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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22강-종과 주인(신23;15-16) 1702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26. 18:06
2017-02-26 14:56:33조회 : 11         
   종과 주인 17022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종과 주인(신명기 2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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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2-26 15:28 
종과 주인  

2017년 2월 26일                    본문 말씀: 신명기 23:15-16 


(23:15)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23:16) 그가 너의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주인 노릇하는 아담과 종노릇해야 될 아담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아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인간 세상은 노예가 생기고 주인노릇 하는 자들이 생기고 그리고 주인 위치에 있는 자들은 이 형편을 지속시키려고 획책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인간 사회의 성질은 죄성을 지닌 아담의 본성이 대대로 발휘된 결과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힘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 힘이라는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은 그 힘이 토지에서 나온 겁니다. 정착된 농업 사회가 되면서 다수의 힘이 합쳐지지 아니하면 넉넉한 곡식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힘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 힘을 내놓는 것을 ‘노동’이라고 불러봅시다. 인간은 힘이 들어가는 노동하면서 겨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보편적인 징벌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받아야 될 이 징벌을 벗어나서 대장질하면서 도리어 타인의 노동 위에 징벌을 가하려는 초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소위 국가의 등장입니다. 그런 국가 중의 하나가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은 초법적인 힘에 의해서 하나로 뭉쳐진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초법적 힘이 집결되어 있는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입니다. 왕은 그대로 법을 세우는 자입니다. 이 법에 의해서 힘들을 더 증강시킬 의무가 바로 왕입니다. 

그래서 왕의 자리란 나라의 모든 집이 집결되는 그 자리가 됩니다. 이 왕과 가까움에 따라 힘의 서열이 매겨집니다. 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점쟁이나 제사장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왕이 전쟁을 치르거나 나라를 통치할 때 필요한 미래를 위한 정보를 신에게 받아서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관료들은 힘을 왕에게로 집결시키기 행정적, 사무적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농사해서 생존보다 더 많이 얻어진 잉여농산물과 각종 생산물들을 나랏 창고를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역할을 하려면 남보다 보다 넓게 세상을 보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숫자 정리 및 문자나 기호를 통해서 각종 정보를 유용하게 정리해놓아야 합니다. 집체적이고 전체를 움직이고 운용할 수 있는 지식은 보다 집약된 언어나 통계 숫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소위 지식층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공직은 왕이 자신의 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보장해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제국은 철저하게 여타의 민족마저 하나의 질서체로 통합이 가능합니다. 기원전 1776년 경,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있습니다. 이 문서의 메소포타미아 만신전 중에서도 주신이 아누 엔릴, 마르두크 신이 함무라비에게 “정의가 지상에 널리 퍼지고, 사악하고 나쁜 것을 폐지하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하는 ” 임무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300 건의 판결 목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이해해 야 할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율법과 여타 제국의 법이 어떤 차이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려서, 이스라엘의 율법은 항상 ‘피 제사’를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습니다. 

노예제도 폐지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 범죄한 인간 세상에서의 구원이 목적입니다. 쉽게 말해서 힘이 없어 힘에 밀려 노예 생활을 하나, 혹은 남들에게 갑질을 하나 그 누구도 ‘죄의 노예’임을 벗어날 형편이 아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의 취지입니다. 하지만 여타 민족은 힘 체제의 구축입니다. 

함무라비 법적 판결 196-199번과 209-214번은 다음과 같이 철저한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의 법입니다.  

196.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눈을 멀게 한다면 그의 눈도 멀게 만들라 
197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뼈를 부러뜨린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려야 한다. 
198 만일 그가 평민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린다면 그는 은 60세겔을 저울에 달라 피해자에게 주어야 한다. 곧 벌금형이다는 말입니다.  

199 그가 만일 귀족 소유 노예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린다면 노예의 가치의 벌반을 은으로 저울에 달라 지불해야 한다. 

209 만일 귀족 남자가 귀족 여성을 때려서 그녀의 아이가 유산되었다면 태아에 대한 보상으로 은 10세겔을 저울에 달아 지불해야 한다. 

210 만일 맞은 여성이 사망한다면 그 남자의 딸을 죽어야 한다. 

211 만일 그가 임신 중인 평민 여성을 때려서 유산시킨다면 은 5세겔을 달아 주어야 한다. 
212 만일 그 여성이 사망한다면 그는 은 30세겔을 저울에 달아주어야 한다. 
213 만일 그가 귀족 여성의 노에를 때려서 그 태아를 유산시킨다면 그는 은 2 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214 만일 그 여성 노예가 죽는다면 그는 은 20 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이 법들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개의 성별과 세 개의 계급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뉩니다. 사람의 성별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닙니다. 평민 여성의 목숨 값은 30세겔이고, 노예 여성은 20세겔입니다. 이에 비해 평민 남성의 눈은 은 60세겔입니다. 

이 법전은 또한 가족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규정합니다. 이에 따르면 어린이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귀족이 다른 귀족의 딸을 죽이면 그 벌로 살해자의 딸이 처형당합니다. 우리에게는 살인자는 무사한데 죄 없는 그의 딸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함무라비와 바빌론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정당하다. 

하지만 성경은 노예 해방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어차피 죄악된 인간은 힘을 의존하는 본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결코 주인된 입장에서 그렇게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노예가 있다는 점을 퍽이나 다행스러운 인생이라고 만끽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노예가 되려는 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노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잘해 줄때는 오늘 본문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힘이 침해받는다고 느낄 때는,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이 법 가지고 호소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호소에 의해서 결코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제사에서 흘러진 제물의 피 안에서 ‘사랑, 용서’라는 이름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누구나 필히 애굽 나라와 자신의 나라가 어떤 점에서 다른 지를 늘 율법대로 주어지는 환경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순한 신분보장이나 생존보장을 위한 하나님의 법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2강-신 23장 15-16절(종과 주인)1702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3장 15-16절입니다. 구약성경 297페이지입니다.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그가 너의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성경에서 노예, 종이 나오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주인 따로 만들고 종 따로 안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도중에 인구가 팽창하면서 주인 계급 생기고 노예 계급 생겼다는 말은 인간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 자체에 뭔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원래대로 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된다고 생각되는데,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일 것 같으면 주인 때려죽이고 그 주인을 종으로 만들던지, 진짜 공산당 혁명을 일으켜서 그렇게 해주는 것이 가장 하나님다운 일일 텐데, 오늘 본문을 봐도 하나님이 굉장히 소극적이에요.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내게로 도망가거든, 이렇게 된다면 무엇을 인정해주느냐 하면 주인은 어디까지나 주인이고 종은 어디까지나 종이다. 이걸, 이 신분을 확정지어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죠. 많이 봐주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처음부터 인간은 종도, 주인도 없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인이냐? 많이 봐줘라. 고만.”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목적이 신분변화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나, 주인처럼 살게 해주세요.” 이게 기도 제목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인은 그냥 주인대로 쭉 가고 노예는 노예대로 쭉 가되 너무 심하게는 다루지 마라.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인간을 만들 때 주인계급 없고 노예계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인간이 잘못을 저질러서 인간사회가 주인과 노예, 뚜렷한 두 계급으로 나누어졌다면, 인간이 범죄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딴 걸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주인 못지않은 영원한 생명을 주면 될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노예가 되더라도.” 

  

이 땅에서 승부가 끝난 것이 아니고, 이 땅은 어디까지나 문제성 있는 세계로 그냥 남겨두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노예가 노예라 할지라도 네가 사람 노예라면 괜찮다는 겁니다. 제일 크고 더 중요한 하나님의 초점은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죄의 노예는 네가 노예가 되던 주인이 되던 상관없이 이 세상은 전부 다 노예상태에 지금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신분변화해서 이 땅에서 남은 인생 재미있게 살라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죄의 노예 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러라도 노예라는 것을 그 주변에 나타나게 만들어요. 그걸 그냥 방치하시는 겁니다. 니가 노예한테 하는 것을 봐가지고 나는 죄의 노예라는 것을 고백케 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애굽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의 차이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출애굽, 애굽에서 빠져나온 취지를 율법 뒤에다가 깔아버립니다. “니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 사람들을 욕했지? 너도 못지않아. 니 주변에 만약에 노예가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데? 애굽에 있을 때에 주인이 노예를 학대하는 그 학대를, 너라고 해서 학대 안 할 성 싶으냐?”를 따지는 겁니다. 율법으로. 

  

그러면 노예 된 사람에게, 우리가 약간 넉넉해서 부족한 노예 된 사람에게 하는 태도가 이거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거든요. “이게 어디서 기어올라?” 이래 된다 말이죠. 그게 바로 애굽의 보편적인 속성이었고, 하나님께서 그 애굽의 속성에서 빼낼 때에 “너는 니 몸만 하나 편하게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 애굽의 전체적인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라고 빼냈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되었으면 애굽 같은 그러한 짓거리는 두 번 다시 안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준 게 율법인데, 신명기와 같은 취지로 바로 출애굽기 22장에 나와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게 되면 니 주변에 있는 고아나 과부나 노예나 나그네에 대해서 섭섭하게 하면 나는 너를 고아나 과부로 나그네로 만들어버린다. 니가 실망스러운 니 인생을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율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도는 바로 자비를 베풀어야 된다.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편합니까? 아예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없고 잘 사는 사람만 있어가지고 자비를 받는 것이 좋습니까? 어느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동등하게 하든지 우리보다 잘 사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자비를 베풀 대상조차 없는 것이 우리한테는 정말 편하죠. 편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19세기부터 유럽에서 복지정책이라는 것이 도입되었습니다. 개개인이 이웃사랑을 하지 말고 이웃사랑을 국가의 복지전담반에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복지를 다 해줘요. 세금만 내면 곧 이웃사랑이 되도록 그렇게 행정시스템을 가동시킨 겁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 안에 다 이웃사랑이 들어있으니까, 우리가 이웃사랑 안 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다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부담이 줄어드느냐 하면 회개하거나 성경 볼 필요도 없이 국가에 그냥 충성하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되도록 유럽에서 그렇게 실시를 한 거예요. 물론 종이나 노예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종과 노예사이에 갑과 을이 있을 뿐이죠. 종과 노예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풀라고 할 때에 오늘 이 말씀을 지킬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종에게 섭섭하게 하지 말라고 해도 종에게 학대를 하고 또 이렇게 주인 값을 하려고 애를 쓰느냐 하면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따로 투입이 되어야 해요. 제사제도라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제사제도에서 그 희생물이 도입되게 되면, 오른쪽에는 희생물 왼쪽에는 우리가 하는 행위, 이걸 딱 비교를 해보는 거예요. 비교를 해보면서 만약에 우리가 우리 행위대로 이 말씀을 다 지키면 무슨 취지가 필요가 없느냐 하면 구태여 흠 없는 어린양이 죽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제도를 집어넣어놓고 율법을 줬다는 말은 제사제도의 그 피 흘림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이 이렇게 보조로 들어가는 겁니다. 보조로. 출애굽기에서 시내산에 그들이 왔을 때에 피를 양푼에 담아가지고 백성들 머리위에 뿌린다고 했죠. 그 뿌리는 것이 뭐냐, 언약의 피라는 겁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언약은 내가 일방적으로 세웠지, 니가 아쉬워서 요청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근데 말씀보고 못 지키니까, “어쩌지? 이걸 못 지키니까 내 죄는 남아있고 어떻게 하는 수가 없을까? 짠짜짠짜짠~ 아! 저기 있었네. 주여, 피를 흘리셨네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주께서 제사제도를 마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 흘림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말씀을 못 지키는 인간을 주변에다가 포진시켜놓은 거예요. 

  

결국 이 말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오늘 나온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근데 지킬 수가 없다는 말까지 도달되려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경우들이 필요하죠. 그것은 내가 주인인데, 내가 주인노릇하면서 종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보는 것도 되지만, 우리가 스스로 노예입장이 됐을 때, 우리가 노예상황이 됐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은 노예 입에서 권리라는 이름으로 이게 바깥으로 방출하게 돼있습니다. 

  

제 말이 좀 어렵죠. 주인 같으면 이 본문이 있는가를 잊어버린다니까요. 왜? 주인인데 뭐가 아쉬워요. 아쉬울 필요가 없거든요. 근데 노예도 주인이 잘 해줄 때는 이 본문이 아쉽지 않아요. 근데 주인을 피하여 도망갈 때는 믿을 구석은 이 구석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성경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그 말씀이 생각나도록 우리 성도를 그런 쪽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억울하냐?” 우리가 평소에 배부를 때는 성경구절 생각도 안 하다가, 우리가 좀 억울하다 싶으면 이런 구절을 막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 언약의 피를 높이기 위해서, 언약의 피라는 것은 여호와의 개입입니다. 그걸 여호와의 동행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 언약의 피에 주목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쪽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간다. 그런 취지로 말씀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그 취지라면, 그러면 일반민족들은 노예를 어떻게 다루는가, B.C 1779년에 세계 최초의 법전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법전이 뭐냐, 함무라비 법전이라는 겁니다. 그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르둑 신이, 마르둑 신이라고 하니까, 이게 바벨론 제국이 두 개에요. 제국과 일반 큰 나라라고 하는 것의 차이점은, 큰 나라라고 하는 것은 자기민족을 크게 키우는 것은 큰 나라고,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민족을 통합하는 것을 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벨론은 큰 나라가 아니고 제국이에요. 여러 민족을 통합을 했습니다. 여러 민족을 통합을 하다보니까 각 민족마다 자기고유의 법이 있겠죠. 그 법을 묵살해야 돼요. 묵살한다는 말은 초법, 곧 그 법보다 더 윗선에서 지시와 감독과 규율과 통치를 해야 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겁니다. 기존의 모든 민족들의 법을 다 처벌하는 식으로. 그럴 때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이 이렇게 돼있습니다. “정의가 지상에 널리 퍼지고 사악하고 나쁜 것을 폐지하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무를 주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무로써 이 함무라비 법전을 세운다는 겁니다. 좀 이상하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무로 강자인 나는 이 법을 세운다. 이 말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말고 똑같이 하면 되잖아요. 우리 생각은. 강자가 없으면 약자도 없고 법도 없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강자가 있어서 강자가 그 법을 세워야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있죠. 

  

그러면 여기에 총 300건의 판결목록이 나와 있는데, 현대 모든 변호사들이 법을 공부하는데 기초가 되는 겁니다. 판결 제 196번, 제 199번, 제 209번과 214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귀족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눈을 멀게 하면 그의 눈도 멀게 하리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게 함무라비 법전에 나와 있어요. 기원전 1779년에. 바벨론 나라가 두 개입니다. 1779년에 있고, B.C 600년경의 바벨론이 또 있어요. 현재 바벨론은 지금의 이란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귀족이라면, 귀족이 귀족의 눈을 멀게 한다면 그의 눈도 빼버려라. 197번에,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뼈를 부러트린다면 그의 뼈도 부러트려야 한다.” 그 다음에 평민이 나옵니다. “만일 그가 평민의 눈이나 귀족이 그의 뼈를 부러트린다면 은 60세겔을 저울에 달아 피해자에게 주면 된다.”는 겁니다. 이거는 벌금형이에요. 사람 차별하는 겁니다. 귀족>평민>노예 이렇게 되는 겁니다. 

  

199번에 보면 “그가 만일 귀족이 노예의 눈을 멀게 하거든 노예가치의 절반을 은으로 달아줘라.” 노예가 어떤 노동하는 기계에 불과한 거예요. 기계에. 209번에 보면 “만일 귀족 남자가 귀족 여성을 때려서 그 아이가 유산이 되었다면 태아의 보상으로 10세겔을 저울에 달아라.” 여자 뱃속에 있는 아기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여자의 신체 일부로 상해죄가 됩니다. 살인죄가 아니고. 

  

“만일 귀족 남자에게 맞은 귀족 여성이라면 그 남자의 딸을 죽여야 된다.” 때린 자가 귀족 남자인데 벌로 내놓는 것은 그 남자의 딸을 내놓아야 된다는 거예요. 딸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때린 사람을 교도소에 집어넣어야지 왜 딸을 집어넣고 지는 아무런 벌도 안 받고. 이게 뭐냐 하면 귀족>평민>노예도 있지만, 또 남자>여자로 확실히 계급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정의가 지상에 널리 퍼지고 사악하고 나쁜 것은 폐지하고 강자가 약자를 방지하는 의무로 함무라비 법전을 줬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경하고 차이점은 힘의 질서로써 균형을 맞추지 아니하면, 강자는 강자답게 약자는 약자답게 되지 아니하면 다른 민족에게 집어삼켜지는, 힘 있는 제국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힘이 없는 제국이 돼버리면 다른데 공격을 받아요. 

  

그 다음에 보게 되면, 211번 “만약 임신 중인 평민 여성을 때려서 유산시켰다면 5세겔을 줘라.” 평민은 귀족보다 반 가치밖에 안 돼요. “그리고 여자가 만일 사망했다면 은 30세겔을 줘라.” 여자가 죽었는데 벌금만 내면 그만이에요. 평민이에요. 노예는 그보다 더합니다. “만일 그가 귀족 여성의 노예를 때려서 그 노예가 유산되었다면 은 2세겔을 주면 되고, 만약에 노예가 죽는다면 은 20세겔을 주면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노예와 일반 사람들과의 확연한 차이를 두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그렇게 차이를 두지 않습니까?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차이를 둬요. 출애굽기 21장 22절에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구약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요. 그 시대의 문화, 정신, 그것을 가지고 죄를 이끌어 냅니다. 죄를 이끌어내고 그 맞은편에 하나님의 언약의 피를 딱 배치를 해서 이런 죄 조차도 감당 못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언약의 피로써 너희를 건져냈다. 그걸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개입한 그 여호와가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에요. 그 구약의 여호와입니다. 

  

출애굽기 22장 16절에 보면,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절, “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 하는 일례로 돈을 낼지니라” 이건 뭐냐 하면 길 가는 여자를 아무나 붙들고 강간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왜? 여자니까. 하나의 물건이니까. 해놓고 만약에 결혼하고 싶은데, 여자는 무조건 결혼해야 돼요. 여자의 인권은 없어요. 여자는 무조건 결혼해야 돼요. 

  

그런데 그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참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까 가슴 아파서 못하겠는데, 여자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강간한 그 남자에게 주기를 싫어한다면 남자는 그냥 돈만 내면 돼요. 이 말은 더 나아가서 무슨 말이냐 하면 돈 있는 남자는 아무나 건드려도 돼요. 아무나. 이게 바로 출애굽기 21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여성을 무시합니까?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가, 힘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 당시 농사짓는 사회에서 여자의 힘은 농사짓는 그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지 못해요. 

  

그러면 여자라는 이름 자체가 거의 노예라고 보면 됩니다. 농업생산의 잉여생산, 잉여생산이라는 것은 먹고 사는 것 이외의 더 남아도는 생산. 그 생산을 이루는데 있어서 여자는 그렇게 큰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B.C9세기경, 또는 일만년경부터 농업혁명이 벌어졌잖아요. 벌어지면서 그 다음부터 4대강 유역에 정착되면서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는 거예요. 

  

신석기 시대에 정착이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농업을 할 때, 그때는 먹고사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살고 난 후 나머지기 가지고 가축 사료주고 남는 것으로 물물교환을 할 수가 있어요. 남는 생산을 잉여농산물이라고 합니다. 이걸 강조한 사람이 마르크스에요. 잉여농산물을 가지게 되면 남은 죽도록 일하는데 자기는 남는 것 가지고 난蘭이나 치고 뭐 놀러나 다니고 에헴~하고 뭐 양반놀이나 하고 선비놀이 하고. 음악, 예술, 그런 것 하는 인간들이 뭘 구상하게 되느냐 하면 남의 좋은 농토, 옥토를 어떻게 하면 칼을 갈아서, 무기를 만들어서 점령해볼까? 하는 그런 생각으로 나가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정치엘리트라고 이야기를 해요. 정치엘리트 또는 지배계층인.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궁예, 왕건이. 왕건이 아니라 왕건이. 이 동네 돌아다녔던 사람. 이 반야월(대구광역시의 지명)땅이 뭡니까? 왕건이가 후백제 견훤한테 쫓겨 다녔던 곳입니다. 그때 왕건이 빼놓고 밑에 있는 군사들은 다 죽었어요. 그게 파군재 삼거리에 동상 세워놓은 신숭겸 장군이 그때 왕건이 막는다고 죽었던 사람입니다. 우리 동네 유적지에 있어요. 밤새워 넘었다고 해서 반야월이에요. 반야월로 해서 경주 쪽으로 도망갔어요. 

  

그 왕건이하고 궁예 깡팹니다. 깡패. 김유신, 남 농사짓는 것 빼먹고 지는 전쟁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놀이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날 때부터 전쟁놀이가 재밌어요.” 이런 이야기하는 애는 꼭 나중에 장군 되고 왕 돼요. 로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인간들이 있는데, 그걸 바로 당대의 영웅들이라고 하는데 그런 영웅들이 있고. 또 엘리트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농사가 남아도니까, 그 남아도는 것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숫자를 만들었어요. 숫자 계산에 빠른 사람들이 관료직에 앉아있고, 그 관료직이 또 남의 잉여농산물을 월급으로 받아서 관료가 되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농업혁명이 정착이 되게 되면 토지는 좁아져도 많은 생산을 이끌어내고 그 대신 시간은 길어져요. 시간은 미래, 미래를 계속 생각하게 돼요. 그 미래를 생각하면서 등장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신화를 조작하고 역사를 만든 사람이에요. 샤머니즘, 무당들이에요. 이 무당들이 왕 옆에서 이번 전쟁에서 이긴다, 못 이긴다, 점을 쳐줍니다. 중국에 있는 모든 한자의 기본은 바로 조개에다가 새긴 것이고 또 거북이 배에다가 새긴 거예요. 갑골문자라고 하죠. 상형문자. 

  

그 문자가 처음에는 숫자에서 문자가 된 겁니다.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유식하다는 거예요. 베이컨이 말한 것처럼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면 무식하고 무식하면 이거는 어디가도 그 조선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아모개처럼. 역적이라는 드라마에 아모개가 나옵니다. 무식하니까 노예가 된 겁니다. 그러면 글을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칠 마음이 없다니까요. 왜, 그걸 가르쳐요? 이거는 신화에 의하면 신분 자체가 그게 팔자니까. 신화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왕, 그리고 귀족, 봉건사회 때 농노, 이거는 신이 정해준 신분입니다. 

  

가난한 놈들은 늘 가난해야 하고, 부한 사람들은 늘 부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민족들은 질서가 잡히지를 않습니다. 이제 종의 이유를 아시겠죠. 바로 이 신화, 종교, 무당, 이것들이 그 당시의 고대국가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노예계약이 주인과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종교가 근대 때 과학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무너지고 난 뒤에 그때부터는 뭐냐 하면 노예 따로 없고 주인 따로 없다. 오히려 주인은 노예한테 배워야 한다. 이런 이론들이 19세기 때 나오게 됩니다. 

  

헤겔이 말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노예는 노동함으로써 자기의 작품을 만들고, 자기의 작품을 만듦으로써 노예는 더 이상 사물이 아니고 이 우주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고, 주인은 아무것도 할 줄 모름으로써 오히려 그 노예처럼 뭔가 물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의 일상에서 평소에 자기 직업대로 일하다가 나이 60이 되어서 퇴직했을 때, 남편이 집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따박따박 돈 벌어다 주면서 주인노릇 하다가, 이제는 퇴직하고 난 뒤에 모든 집안의 물건 하나하나 다루는 것부터 해서 물건의 자리, 양말 똘똘 말아가지고 어떤 서랍에 넣어야 되고, 이런 것 전부 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하면 그 집안에 이미 주인으로 접수한 여자의 말을 들어야 돼요. 주인과 노예가 역전된 겁니다. 

  

옛날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옛날에는 노에가 일을 해도 그거는 노예의 노동으로 봤지 행위로 안 봤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노동과 행위를 나눴는데, 행위라고 하는 것은 정치판에 나가서 나라걱정 하는 것은 행위에 속하고, 그거는 귀족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거는 시민들이 하는 거고, 그래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끼리 민주주의에요. 노예는 안 넣어주는 겁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는. 그리스 사회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 끼리에요. 노예는 그냥 기계니까 해다가 바치는 것뿐이었어요.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노동이 신분 자체를 뒤바꾼 겁니다. 이제는 중요한 것이 뭐냐 누가 많이 아느냐가 문제에요. 아는 사람이 갑이 되고 모르면 무식하고 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들 선행학습 시켜야 되고 과외 보내야 되고 2억이나 3억 들여서 해외연수 보내야 되고, 무조건 무식하면 을이 되는 거예요. 무식하면. 그거 싫거든 공부하든지, 자격증 따든지. 요새는 따도 안 돼요. 

  

이처럼 인간은 바로 이미 기득권이 갖고 있던 그 정보를 계속 주인노릇하기 위해서 그 정보를 아랫사람한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차단시켜버립니다. 옛날 고대민족에서는. 지금은 누구나 교육의 균등의 기회는 다 줘요. 머리 나쁜 아이는 할 수 없고. 교육의 기회가 헌법으로 보장돼서 공부는 하는데, 공부해봤자 머리가 안 따라줄 때는 점점 더 사회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이 짧은 것은 들이대는 사람이 많아서 비율이 세고, 아주 고단위 기술은 이거는 머리가 천재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몇 명 되지도 않고. 그래서 자동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줄 세우기가 되는 거예요. 

  

새로운 힘의 균형으로 질서 잡힌 이 시대, 바로 과학이 종교가 되고 과학이 복음이 되고 아는 것이 힘이 되는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신명기를 봐야 됩니다. 이것은 거기서 출애굽, 빠져나와야 되고 구원돼야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가 이 세상 한복판에 꽂혔다는 말은, 주께서는 십자가 피를 보고 천국과 지옥을 보내지, 아는 것이 많다고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요한계시록을 말씀드리면, 요한계시록 17장에 결국 이 세상은 그 지식으로 한 나라로 통합되는데 그 통합된 나라 이름이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법이 있어요. 그 법은 가진 자의 법이고 아는 자들을 위한 법일 뿐입니다. 싫으면 배우든지, 싫으면 똑똑해지든지, 싫으면 가지든지, 이거는 나라가 200이고 300이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나라가 아무리 쪼개져도 그건 하나의 제국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제국은 민족을 초월한다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제국, 그 바벨론이 다니엘서에서는 이게 짐승의 나라고 악마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악마의 나라를 온 몸으로 만끽하고 있어요. 여기서 산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이미 우린 죽은 자고. 여기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금 죽어도 사는 것, 그 이외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 복음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신명기에서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해서 그들에게 언약을 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예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세상의 노예가 되었고, 우리는 주인을 부러워했고 권력자를 부러워했고 돈을 부러워하는, 그것이 속성이 되어서 평생토록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여, 그로 인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뒤로 빼돌리고 외면하고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