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20강-육의 순수성(신23;1-8) 1702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12. 21:17
2017-02-12 15:04:54조회 : 18         
   육의 순수성 17021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육의 순수성(신명기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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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2-12 15:44 
육의 순수성 

2017년 2월 12일                         본문 말씀: 신명기 23:1-8 

(23: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3: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3: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23: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23:6)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 

(23: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23:8)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리라 

구약은 하나님에 의해서 친히 역사를 만들어 나가시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에 대해서 그 역사 속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마저 하나님 안목으로 역사를 이해하기가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안목을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기정사실화’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관심 가진 대상 쪽에서 ‘자신의 구원’을 정당화할 요소가 들어있음을 발견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이 한국 역사를 말하면서, “그러니까 한국 사람은 전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돼”라는 취지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 민족은 고유로부터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 살아남았기에 그 기질이 전수되어 오늘날 우리는 힘차게 이렇게 자랑스런 조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은근히 ‘조상 자랑’이 되는 겁니다. 스스로 신앙 좋다고 우기는 유대인들은 노골적으로 자기 조상을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조상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 믿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예배하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거론해도 여전히 자기 자신은 마땅히 오래 살아남아야 하고 구원받아 천국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총회’가 딱 나오면, “나는 분명 그곳에 들어갈 거야”라는 희망적 의도를 가지고 대할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만 성경을 다시 볼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며는, 남성 생식기에 손상이 있다고 여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남성 생식기에 손상이 있는 자는 여호와 총회에 못들어간다는 조항이 자신에게 위기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라고 나올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설마 내가 잘못해서 생긴 손상이 아니라 날 때부터 손상이 있었다든지 조상의 죄 때문에 손상이 있어도 여호와의 총회에 못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요?”라는 걱정이 되어서 묻게 됩니다. 2절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륜해서 태어난 자식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봐도 나오는 모압과 암몬 사람들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 조카의 자식이면서도 손자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이후에 자식을 생산을 남녀가 롯의 가정밖에 없어서 아버지와 딸이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어 낳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구어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하늘의 거룩의 자국이 온전하게 남아 있음을 혈통적으로 점검하고 그 점검의 결과로서 부정적 요소가 없는 나머지 쪽을 ‘여호와 총회’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역사 자체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연극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 당시에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지옥 갔다’고 단정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계속 미래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노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혈통 순수성 중심으로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면서, 이스라엘이 지닌 혈통의 순수성에 대한 이해도와 기여도에 따라 3대 후에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 민족이 있는 반면에 10대 후에나 들어올 수 있는 민족도 있고 더나아가서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는 민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민족들의 배치도 그 당시에 보여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연극무대인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3대가 지나야 들어올 수 있다는 에돔 민족은 말라기에 아예 하나님의 저주받은 민족으로 낙인찍힙니다.(말 1:3-4) 역사가 거의 끝나가는 지점이요 종말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결혼의 순수성’을 어떤 식으로 지켜야할까요? 오늘날에는 모든 인류가 과학을 신봉하는 세상입니다.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은 오로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례되는 윤리와 도덕은 과학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비합리적이고 국가 발전에 저해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함을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산업일군이 부모 장례 치른다고 3년 상하면서 무덤가에 천만치고 무단결근한다면 당연히 해고대상입니다. 경제 발전에 저해되지 않는 조건 안에서만 윤리와 도덕이 구축됩니다. 따라서 결혼의 순수함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 과학의 정설은 이러합니다. 생물적으로 혼인이란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자가 생산을 위해 주체적으로 벌리는 표현적 현상을 두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혼인을 생각해야지만 남녀 간의 갈등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수월합니다. 이성 간 갈등은 남성과 여성의 생식적 이해가 엇갈릴 때마다 나타납니다. 갈등 이론은 불화가 예측 가능하고 일어날 것이 완전히 예상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짝짓기 시장에서 일어나는 기만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만약 단기적 짝짓기 전략을 추구하는 한 남성이 장기적 짝짓기 전략을 추구하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관심을 가진다면 두 사리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남성은 캐주얼 섹스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장기적 헌신이나 이해나 감정적 몰입을 가장하여 여성의 장기적 짝짓기 전략을 방해합니다. 남성은 진화를 통해 정교한 성적 착취 전략들을 발전시켰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때로는 자신을 무비용의 성적 기회로 제공한 뒤에 (공짜지만 나중에 그 비용을 두고두고 울겨먹는다) 남성이 마음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여 아침에 일어난 남성에게 자신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이는 여성이 진화를 통해 발전시킨 무기고에 보관돼 있는 미끼 상술의 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일단 장기적인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 뒤에도 남성과 여성은 각자의 진화적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여성이 저지르는 성적 부정은 자기 자식을 위해 더 나은 유전자를 확보할 수 있지만 이것은 남성에게 재앙에 가까운 비용을 안겨줍니다. 자신도 모르게 경쟁자의 자식에게 자원을 지원한 꼴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남성의 부정은 소중한 자원을 경쟁자 여성과 그 자식에게 빼앗길 위험이 있으며 (재정적 소스를 나누어가질 수 있기에 ) 게다가 남성이 헌신을 완전히 잃을 위험까지 있습니다. (과도한 질투가 사태를 악화시킨다) 따라서 이럴 경우는 사회적인 협상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식을 양육하는 쪽으로 자식을 양육하지 않는 쪽에서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흥정이 마무리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 종교 말고 복음은 다음과 결혼의 순수성과 ‘여호와의 총회’를 다음과 같이 연관 짓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즉 이 종말 때에는 그 어떤 혈통적 순수함이나 순결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만들기를 통해서 들추어낸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언약의 피’로만 천국, 곧 ‘여호와의 총회’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의 순수함만이 천국에 통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아의 순수함 대신 예수님의 피의 순수함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2-12 20:14 
120강-신 23장 1-8절(육의 순수성)1702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3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297페이지입니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게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었음이니라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오늘 읽었던 본문은 딱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내가 만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만들기에요. 이스라엘 역사 만들기. 인간이 생각하는 역사라는 것은 자기 조상을 상당히 좋게 생각하는 반면에 하나님이 만든 역사는 조상이라 할지라도 탈락자는 탈락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조상이 탈락했는데 우리는 왜 구원받았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탈락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 탈락한 조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육에 속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 이스라엘 천국에 못 들어가고, 육은 필히 탈락해야 마땅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육 말고 다른 요소가 그 속에 이미 잠입해, 투입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 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은 육의 역사는 이것은 진정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가 아니라고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 예배드린 것이지 아브라함에게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제사제도와 한 번 비교해보세요. 그것은 바로 조상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조상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조상은 없으라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해케 하기 위해서, 우리가 조상 덕분에 살았다는 일방적인 오해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은 조상, 자손 이런 고리가 아니라 주님이 조상을 믿지 말라는 언약적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게 변동사항이 일어나야 해요.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가 없죠. 그래서 그 변화를 요한복음 3장 같으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 영이라고 하겠는데, 이것을 구약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여호와의 총회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여호와의 총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의 총회가 맞는 말입니까? 아니면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호와의 총회라는 것은 임시방편이에요. 여호와의 총회, 총회 하면서 나중에는 이게 영적인 세계로 도약하고 맙니다. 아직은 구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이스라엘 역사가 끝나지 않았거든요. 역사의 중간지점에 와 있는 거예요. 계속 과정 속에 와 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서 기대치를 주는 듯하면서 도 빠지고 또 한 번 해봐라 하면서도 실망으로 전환시키고, 이런 방법을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신약의 입장에서는 구약을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신약의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낚싯대로 건진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겁니다. 육의 역사 속에. 육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수모를 당하는 식으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로 성취시켜놓았기 때문에, 만날 하늘만 쳐다본다고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떤 변동이 일어난 거예요. 이 땅의 언어로, 이 땅의 표현으로, 어떤 변동된 표현을 우리가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한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거예요. 어떤 원리가, 총회는 어떤 원리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거룩한 자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자라는 말을 딱 들으면 착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근데 이것은 구약에서 거부합니다. 조상이 안 착한데 어떻게 본인이 착할 수가 있어요? 그 애비의 그 자식인데. 이게 되지를 않거든요. 

  

니가 만약에 죄가 나오거든 ‘아, 우리 조상도 같은 죄를 지었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하라. 이게 옳은 겁니다. 아담을 조상으로 두고 있으니까. 뭐 자기 책임은 아니다, 라고, 하지만 자기 책임은 아닐 수는 있어요. 하지만 책임의 문제가 아니고, 그 식으로, 하나님이 죄 지어서 탈락시키는 식으로, 그 역사적 작업에 이미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죄 없어요.” 하지 말고, 자기 자식을 놓으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이런 게 어디서 태어났노?” 할 정도로 희한한 애가 또 태어나고 기대에 어긋나는 짓거리들을 하거든요. ‘아, 내 의사라고 하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진짜 속에 하수구처럼 흐르고 있는 것은, 이건 말려도 안 되는 겁니다. 천대가도 만대가도 달라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삼대와 십대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열대가 지나가면 총회에 들어올 수 있고, 이런 자는 열대가 지나도 총회에 못 들어오고, 이런 자는 삼대가 되면 들어올 수 있고, 이렇게 해서 구약에서는 계속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고 가시는 거예요. 결국 망할 수밖에 없지만, 계속 질질 끌고 가면서 나올 수 있는 죄는 다 끄집어내겠다는 뜻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참 어렵지만, 이스라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하나의 무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쉬워요. 오늘 주님의 하시는 뮤지컬은 어떤 뮤지컬일까? 하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구원되고 안 되고는, 그거는 예수님 마음대로고. 반대로 생각하세요. 왜 이스라엘이 구원되지 못했느냐는 쪽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꾸 인간 편에 서지 마시고요, 늘 주님 편에 서야 돼요. 오늘 1절에 보면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남자의 생식기가 고환과 음경 어디에 있는데, 고환이 깨지거나 음경이 베인 자, 베여서 짧아진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온다는 거예요. 인간이 뭐 지 맘대로 자르고 안하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자기 맘대로 못 자르지만. 전쟁하면서 잘라질 수도 있어요. 전쟁하면서. 어쨌든 그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럼 이걸 보게 되면 당사자는 “억울합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억울합니다.” 억울한 게 아니에요. “니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마. 니가 조상 탓이라고 봐라.” 이렇게 돌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소리를 하지 마라는 말이죠. 뭔가 이게 윗대부터 흐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힘찬 줄기를 누가 막아서서 말릴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럼 말릴 길이 없는데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조상들이 줄곧 내려오는 그 죄에 어떤 종류의 죄가 있는가를 보라, 이 말입니다. 어떤 종류의 죄가.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면, 안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안 들어가면. 자기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 그럼 안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안 들어가면 구원 못 받잖아요? 그게 임시적인 무대라는 사실을 제가 여기서 또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 연기자가 드라마에서 총 맞아 죽는다고 그 사람이 실제로 죽어서 그 집에 가면 장례 치르고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일 뿐이잖아요. 연극일 뿐. 지금 이 사람들도 연극하고 있다니까요. “아, 지금 뭐 전쟁에 나가서 생식기에 문제 있는 사람은 억울하겠다.” 억울한 것이 아니에요. “아, 나는 이런 역할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이 총회 들어갈 사람, 천국 갈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구약성경 신명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후딱후딱 넘어가요. 혹시 걸릴 것이 있는가 싶어서 걱정이 되어가지고. 아예 안 보는 척하는 거예요. 마침 짐승이 오니까 타조가 도망치지 않고 물에다가 지 얼굴만 박고, 아마 지금쯤 지나갔을 걸? 하는 것처럼. 지가 가짜 현실을 자꾸 만들고 현실을 자꾸 정당화시켜요. 가상현실을 자꾸 만든다니까요. 포켓몬 고GO라는 것을 자꾸 만들죠. 

  

두 번째 보면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간다. 불륜에서 태어난 아이는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도 못 들어갑니다. 역적은 못 들어갑니다. 안 들어가면 되지? 안 들어가면 되잖아요? 안 들어가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어차피 구원은 이래도 못 들어가고 저래도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왜 이렇게 실패와 실수한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내는가, 그건 점점 더 여호와의 총회라는 본질을 신약 쪽으로, 예수님 쪽으로 다가가면서 구체화시키는데, 이 연극무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연으로, 엑스트라로 많이 참석들을 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누가 반항한다고 “목사님. 지옥 갔죠?” 자꾸 “지옥 갔죠?”를 자꾸 결부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그 역할을 했을 뿐이지, 천국가고 지옥가고는 그건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은 1절과 2절, 3절을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1절에서 3절을 종합해서 정리할 내용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결혼 제도의 거룩성, 순수성, 순결성, 그걸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총회의 조건으로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혈통의 순결성을 걸은 거예요. 말라기에 봐도 그런 대목이,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마지막까지 결혼의 순결성에 대해서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근데 여기 신낭이라는 것은 생식기와 관련되어 있고, 사생아도 불륜과 관계되어 있고, 암몬이나 모압도 근친상간에서 태어난 자식들이거든요. 이거는 바로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여튼 남자는 한 명 남았고 여자는 두 명 남았어요.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아서. 여자 둘은 자매간이고 남자 하나는 아버지입니다. 자식을 놓아야 하는데 남자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해야하는데 도저히 양심상 안 되니까 자매들이 술을 먹여가지고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거예요. 아이고, 그걸 보면 여자들이 독해요. 

  

큰 딸이 낳은 아들 이름을 모압이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족속의 조상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 이름을 벤암미라 하니, 누구 이름 비슷한데,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정식으로 뭔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정식이 아닌 자손들이 번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사건이죠. 

  

그러면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뭔가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사건의 결과물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렇게 임시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어요. 신약까지 안 가고 임시적으로. 부정적인 사건,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데 가담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간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여호와의 총회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했는데, 그 계획한 바가 아무 하자 없이 그대로 하나님한테 회수가 될 때, 거룩, 거룩, 거룩이 와서 그 거룩이 거룩답게 유지되다가 거룩이 회수가 될 때, 그 회수된 거룩에 걸려든 사람은 전부 다 여호와의 총회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전부 다 탈락이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는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 그런 역할, 그런 뮤지컬을, 지금 연극을 하고 있으니까, 주님의 취지를 보일 뿐이에요. 그 다음에 3절에 보면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은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러면 처음의 출생자체가, 출생된 자식 입장에서는 이건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이렇게 태어나려고 본인이 의견조정을 한 적이 없거든요.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닙니까? 자기가 없을 때 아빠엄마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운명을 자기가 짊어진다는 것은 인간적인, 인권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억울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럼 억울하면 어떻게 하느냐, 이거는 내가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를 저한테 물어서는 안 되죠? 그거는 부모한테 물어야지 왜 제가 그걸 담당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거는 억울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이야. 하나의 역할이거든요. 역할. 나는 저 배역을 맡겠습니다. 나는 이 배역을 맡겠습니다. 배역 맡겠다고 지가 나서지 마라는 말이죠. 

  

태어난 자체가 이미 할당받은 배역들이 있어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여자목사 되기를 원하는데 그거는 그렇게 배역을 원할 필요가 없어요. 돈보고 자꾸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다 조상 탓이다, 하나님이 다 하시는데 내 탓은 아니래.”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뒤에 보게 되면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뭘 했느냐, 모압과 암몬이 아니고 자손들이 무슨 짓을 했느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나와서 그들이 힘들게 행진을 했을 때에 그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뭘 했느냐 하면 그들이 믿는 신이 있어 저주받도록 하기 위해서 발람이라는 모압 선지자에게 뇌물을 줘가지고 그를 저주케 했다는 겁니다. 이거는 자손입니다. 모압이 아니고 암몬이 아니고, 그 두 딸이 낳은 애기가 아니라 그 후대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죠. 

  

아버지가 어떻고 할 것이 없이 니한테 흘러들어온 그 아버지의 성격은, 이제는 내가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통해서 그걸 발산해야 되죠. 아, 이게 또 새롭게 발굴된 죄구나.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을 건드린다는 새로운 죄의 항목이 모압과 암몬의 후손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발굴, 개발된 거예요. 드러난 겁니다. 노출된 거예요. 그들은 또 그러한 역할을 또 하면 되죠. 

  

이게 민수기 22장에 나온 이야기인데, 여기서 오늘날 현대의 사고방식과 한 번 비교해봅시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 당시의 여호와의 총회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순결해야 한다. 그 순결은 결혼의 순결 속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근데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와서 소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본 과학적인 안목에 의하면 결혼이라는 것은 그렇게 순결을 요구할 수 있는 그러한 근거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결혼을 왜 하느냐?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런데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면 너무나 추상적이잖아요. 도킨스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는,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뭘까? 그걸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요새는 과학이 종교고 과학이 진리니까, 그걸 분석해보니까 유전자를 많이 퍼트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오해케 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DNA가 장착이 되어 있는데, 인간이 DNA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DNA가 바깥에 있는 인간을 안에서 조절하고 있는 겁니다. 아바타라는 영화에 보면 큰 로봇을 안에 들어있는 인간이 조절하면서 원주민 외계인하고 막 싸우듯이, 큰 로봇을 작은 인간이 두뇌부분, 심장부분에 앉아가지고 조절하면 되듯이, 사실은 인간 스스로 자아가 자기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고 안에 있는 DNA라는 것이, 이 정보가, 그냥 분자덩어리에요. 물질덩어리가 인간이라는 물질덩어리를 이렇게 저렇게 조정하고 있는 겁니다. 

  

그 조정하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 뭐냐, DNA가 이기적으로, 오직 DNA 본인만, 살아있는 괴물 같아. DNA 본인만 많이 퍼트리기 위해서 그렇게 조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과학적으로 그렇게 정설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DNA를 많이 퍼트리는 그러한 DNA의 충동이 곧 결혼이고, 그리고 그게 정욕이고, 이성에 대한 욕구라는 겁니다. 

  

그러면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 윤리도덕에 질투한다는 것은 뭐냐, 질투한다는 것은 이거에요. 내가 퍼트린 그 DNA를, DNA에게 봉사해야 할 그 모든 역량을 남의 DNA에게 봉사할 때 사람들은 질투를 느낀다 이 말이죠. 남자는 자기 DNA를 어떤 여자고 간에 퍼트리는데 급급하다보니까, 이걸 캐주얼섹스라고 해요. 그냥 그 즉석으로 하지만 여자는 그럴 줄 알고 그걸 장기적 결론을 꾸며가지고 그 남자에게 받았던 DNA를 오래오래 끌고 갈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한 번 물었던 남자는 놓지 않는다. 이런 거예요. 그게 결혼제도에요. 셰퍼드 전략. 꽉 물고 놓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 DNA를 힘 좋은 남자를 통해서 계속 양육받기 위해서 그 짓을 한다는 겁니다. 이거 이대, 숙대, 모든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근데 내 DNA를 해야 될 내 머슴을, 내 머슴하고 장기계약 들어갔는데 그 남자가 딴 데 하게 되면 총 가져오라고 해서 죽이고 싶어 합니다. 내 DNA를 건드렸으니까. 이게 질투라는 거예요. 질투. 그러면 오늘날 과학시대에서 모든 DNA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전체적인 협상을 해야 하는데, 협상이 뭐냐 돈이에요. 그게 양육비라는 겁니다. 갈라서되 양육비는 줘라 이 말이죠. 내 DNA를 키우기 위해서 달라 이 말이죠. 

  

오늘날 실생활이 아주 간단하죠. 그럼 결혼을 하는데, 여자 쪽에서는 자기한테 좋은 DNA를 고르는 거예요. 언제까지? 60,70, 80까지 혼자 사는 거예요. 나에게 맞는 DNA가 나타날 때까지. 남자는 그것도 모르고 퍼주기만 바쁘고. 여자는 골라서 잡고. 정설입니다. 뭐 한두 번 확인한 것이 아니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과학이라는 종교에 의하면 윤리도덕은 다 구실에 불과하고 핑계에 불과한 거예요. 

  

자연본성적인 이 충동을 그럴싸하게 가려보겠다고 하는 것은 그건 옛날 봉건시대 때나 통할 일이지, 인구수가 75억 입장에서는, 니가 안 죽으면 내가 죽을 판인 입장에서는, 무한한 경쟁시대에서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윤리도덕은 다 끊어내고, 진짜 그 도킨스 말대로 내가 아니죠. 내 안에 주인이 따로 있죠. 내 안에 있는 DNA만 계속 양호하게 키워내는 것.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자연선택,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연선택설이에요. 

  

그러니까 자연선택설은 선이고 악이고 없는 거예요. 자연선택인데, 그게 신이거든요. 자연이 신이기 때문에 선악을 따질 문제가 아니에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거기에 무슨 선과 악이 있어요.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는데 선과 악이 통합니까? 안 통하죠. 

  

그런데 지금 여호와의 총회보세요. 완전히 다르죠. 여호와의 총회에서는 개개인의 DNA를 개무시 합니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아주 더 나아가서 인간의 윤리도덕 그것도 완전히 무시해요. 전쟁 나가서 생식기 다쳤는데 그 책임을 왜 본인한테 묻습니까? 부모가 다른 족속인데, 부모가 암몬 모압 족속이기 때문에 십 대를 거쳐서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간다면, 그러면 모압 족속 가운데 양심 고운사람, 착한 사람, 여호와 믿는 사람, 들어가요? 못 들어가요. 왜? 십 대까지니까. 십 대라면 그 당시에 한 100살로 보면 천년동안 못 들어가요. 한 대를 만약에 50년 잡으면 500년 동안 못 들어와요. 

  

성경을 이렇게 봐야 합니다. 하나의 연극무대에요. 개인구원으로, 나는 구원받아야지, 라는 이런 모습으로 신명기를 본다면, 신명기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겁니다. 그냥 옛날이야기인데 후딱후딱 넘어가자. 뭐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거 뭐 난처한 이야기인데 그냥 넘어가자. 이래 돼버립니다. 하나하나 이유가 옛날에는 육을 통해서 영을 설명한 무대장치가 구약입니다. 

  

그건 뭐냐, 결혼의 순수성이에요. 피의 순수성입니다. 생명의 순수성. 이렇게 하면 어떤 분들은 “아이고, 순수한 피가 어디에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 것은 맞아요. 그것은 신약에 와서. 아, 순수함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아예 아담자손이냐,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와야 해요. 미래에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아담이 와야 되고 두 번째 아담이 등장이 돼야 되는 겁니다. 아담이 등장해서, 그냥 오시면 안 돼요. 

  

이 순수하지 못한 육의 저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거기서 부활되어야 합니다. 거쳐서 와야 해요. 거쳐서 옴으로써 그 경로를,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 경로가 예수님이 가신 경로인 동시에 본인이 천국 간다는 것이 확정된 그 경로로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아, 나를 죽이는 것이 이게 제 코스고 정 코스에요. 왜? “순수하지 않아. 죽어야 돼.”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그 코스가 주님이 먼저 다녀가신 코스기 때문에. 다녀가신 코스. 역사에 명성황후가 다녀가신 코스 있죠. 

  

다녀가신 코스거든요. 이스라엘 역사를 코스로 잡아서 신약이 나오거든요. 신약의 예수님 십자가 코스가 우리의 코스입니다. 그렇다면 그 코스를 알고 신명기 23장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어느 누구도 육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계속 혼혈아들이 일어나니까. 왜? 하나님께서 저쪽에 있는 다른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과 섞이게 만들었어요. 완전히 짬뽕이고 비빔밥도 그런 비빔밥이 없어요. 현재 그 이스라엘에 순수한 혈통이 없습니다. 

  

혈통은 DNA를 퍼트리는 DNA이 본연의 그 충동 때문에 어떤 누구도 순수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구석기 시대에 우리 한반도 국가의 조상은 누구냐, 북쪽에서 내려온 것과 남방계통하고 합쳐서 그런 거예요. 북쪽 계통이 내려왔다는 증거는 바로 가야지방에서 나온 토기가 양쪽으로 잡는 곳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북쪽 기마민족의 출신이고, 그리고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증거는 뭐냐 쌍꺼풀이 있는 것. 이거는 베트남 계통이에요. 그래서 만나서 한반도인데, 한반도가 무슨 순수한 혈통입니까? 순수한 혈통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다 섞여 있는 겁니다. 정 비율에 따라서 다 섞여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이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 따라서 순수함은 없다는 것, 그걸 주께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 순수함이 없는 속으로 주님께서 없는 순수를 가지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순수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을 다물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 7절에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며 그의 형제니라” 이렇게 해서 그 당시 무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가장 가까운 형제가 누구냐 하면 바로 조상들 윗대로 갑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난 그 자식이, 아브라함이 난 자식이 이삭이고 이삭이 난 자식이 에서와 야곱이거든요. 에서하고 야곱은 쌍둥이잖아요. 쌍둥이기 때문에 말라기에 갈 때까지 그들은 형제로서 지내지만 말라기에 때에 와서 또 하나님이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에서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말라기 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역사가 말라기로 끝날 쯤 되니까, 끝날 그 단면에 진짜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고 저주받을 자니라. 그때 다시 그렇게 등장합니다. 

  

왜 저주받을 자냐, 야곱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그 전에는 이스라엘을 좀 대우했거든요. 끝까지 대우했다는 그것마저도 대우 안 했음으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역사는 흐른다~♬ 계속해서 역사는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까지 흘러가느냐, 유대인들이,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죽일 때까지 역사는 흐른다~♬ 계속 흘러가는 겁니다. 흘러가서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자는 없다. 

  

그리고 난 뒤에 드디어 히브리서 12장, 이 말씀은 꼭 해야 돼요. 22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절, “하늘에 거룩한 장자들의 총회와”라고 나와 있어요. 오늘 본문 신명기에서 나오는 총회가 여기 방금 읽었던 히브리서에 총회가 나옵니다. 이 총회는 어떻게 총회냐, 바로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언약의 피로, 예수님의 피로 총회가 된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 사실을 누가 압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구원받고 난 뒤에 성경을 성령께서 인도하고 보니까, 아, 이 세상의 흐름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할 자를 생산하는 히스토리history, 역사라는 사실에 우리는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기쁘게 되죠. 몸이야 어떻게 망가지든 육에 불과함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과학적인 세상에 저희들이 쌓여있습니다. 내 행복만 추구하면 진리인줄 알았는데,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 중심이 진리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천국가게 되었사오니, 이 진리 외에 다른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