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강-신 23장 9-14절(하나님의 진영)1702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3장 9-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7페이지입니다.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 밖으로 나가고 진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해질 때에 목욕하고 해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고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한테 준 이야기, 그 이야기에 오늘날 현대인인 우리가 그 말씀에 참여해서 이해하려고 하니까 도무지 어떤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정리가 안 되죠. 이 말씀을 제가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전쟁할 때에 그냥 전쟁하지 말고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배출이 되는 것들을 하나님의 진영 안에는 있지 않도록 처리를 하라. 그것입니다. 전쟁할 때입니다. 일반적인 날 말고 전쟁할 때에.
그러면 이걸 쉽게 하려면 이 말밖에 할 게 없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한 대의 전차라고 보시면 돼요. 전차. 장갑차. 전차 안에 똥 누면 안 되잖아요. 하나의 전차가 움직이는데 그 안에 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몽설하면 안 되고. 그것을 피하고 전체가 움직이도록 하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은 개인이 무기 들고 하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지, 그 전체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하나밖에 없는 무기가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납득이 되지를 않아요.
장난감 같은 것을 보면, 특히 독수리 오형제 같은 것을 보면 전쟁하지 않을 때는 분명히 다섯 명이거든요. 근데 전쟁할 때는 “합체!”이래가지고 다섯이 하나로 뭉쳐지는 겁니다. 뭉쳐지게 되면 거기에 탁월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쟁 무기가 되는 거예요. 만화영화에서는 그런 게 통하는데, 그게 실제로 인류 역사,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그게 나타나고 할 때는 참, 우리가 굉장히 믿기가 힘들어지는 겁니다.
보통 성경이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성질 급해서 신약성경부터 덤벼들어서 “십자가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다.” 이렇게 성급하게 이야기하는데, 구약을 한 번 경유를 해봅시다. 구약을 경유를 하면 홍해바다 앞에서 그게 갈라질 것이라고 믿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친다, 친다고 할 때 저쪽 숫자는 얼마고 이쪽 무기는 얼마고, 공성퇴를 어떻게 쏘아 올리는가, 성이 있으면 돌을 던져서 성문을 부수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들어간다. 이렇게 하나의 계획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그런 무기가 전혀 없이 여리고성을 침공한다고 했을 때에 이건 다른 민족이 들으면 놀림감입니다. “이스라엘 너희들 미쳤구나!” 저 뚜껑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데, 고고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성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가지고 그냥 돌멩이를 던져가지고서는 무너지지도 않는대요.
근데 어쨌든 간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는데, 아무 무기도 없이 그냥 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죠. 근데 그 방법은 뭐냐, 그냥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7일 동안 도는데,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면 저절로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아파트 단지를 전부 다 전도를 한다, 전도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인들 다 동원해서 아파트 둘레를 일곱 바퀴 돌면 되겠죠. 동신교회처럼.
그러면 전도 되는 겁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흉내 내기가 아니에요. 모방하기가 아닙니다. 모방할 수 없는 것을 니가 믿느냐? 하는 겁니다. 보고서도 두 번 다시 해보라고 하면 할 수 없는 것. 그게 믿음이거든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믿고 난 뒤에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우리의 행함을 일절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진짜 믿어버리면 이제부터 뭘 해도 이거는 구원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 그걸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건 앞에 있는 믿음하고 전혀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할 수가 있느냐, 한 자는 못 자라게 하죠. 2센티미터는 된다고 합니다. 요새 물리학적으로는 2센티미터는 된다고 하는데, 한 자까지는 자라게 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내미는 것은 아서라 마서라 이 이야기에요. “제발 좀 그만두지. 좀 설치지 말지.” 이 이야기에요. 이걸 당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니가 현재 그대로 사는 것이 왜 맘에 안 드는데?” 이걸 묻는 겁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게 뭐 어떤데? 그게 뭐 어때서?” “그래버려요. 그래도 좀 폼 내고 인간이 좀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어야죠.” “그걸 왜 들어야 하는데?”
그걸 왜 들어야 하죠?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걱정들을 하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못함을 뚜렷하게, 저벅저벅 다가오듯이, 전에는 희미했는데 점점 더 또렷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렌즈가 줌 하듯이, 점점 더 그 정밀도가 심화되면서 깨닫는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서 대변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다음 전쟁을 할 때, 이 신명기말씀 23장이 있는데, 진 안에서 대변을 누고 이랬겠어요? 할 수 있는 것은 했어요. 대변은 밖에 나가서 누고, 그 다음 이스라엘끼리 모아서 깨끗하게 해놓고, 깨끗하지? 그 다음 1분 뒤에 대변 본 사람 안에 있어? 없어? 2분 뒤에 없지? 없으면 공격! 공격했는데 졌다 이 말이죠.
어떻게 할 거에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이 몽설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하면, 이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거든요. 꿈에 저절로 나왔는데, 이걸 묻는 거예요. “전쟁 나가는데 꿈에 몽설한 사람 손들어보세요!” “있어요? 그럼 너는 빠지고.” 그럼 빼고 나머지가 전쟁을 했다, 개 피 받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요.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 정도 조항 같으면 다 하고 해요. 참작해서 하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를 몰라서 그래요. 신약시대로 바로 넘어가봅시다. 구원은 뭐로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된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피 흘리는 것은 더럽다, 우리가 몽정한 것은 더럽다, 오줌 누는 것 더럽다, 여자 하혈 흘리는 것은 다 더럽다, 해놓고는 하나님이 자기 몸에서 피를 흘리는 것, 그것은 생명이래요.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신약의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이 세상을 통치하는 힘, 보이지 않는 악마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해서 그 전리품으로, 전리품의 효과로 구원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겁니다. 신약성경에서. 이걸 신약교수한테 해도 신약교수는 몰라요. 왜? 그들은 아예 안 믿어요. 그들이 맨날 주장하는 것은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그것만 주장하지, 그 근본적인 믿음 자체가 없어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도 구원되는 이유는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그 가운데 끼어들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끼어들 게 없어요. 지금 우리교회 생중계가 안 되거든요. 지금 살짝 짜증나려고 해요. 그런데 “주님이여! 생중계 안 됩니다.” 주님께서 “꼭 돼야 될 이유가 뭐냐? 꼭 돼야 될 이유가 있어?” 그것 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생중계 된 것, 생중계 되는 상황과 이쪽에 피를 놓아봅시다. 생중계 되어서 구원받습니까? 피 흘려서 구원받습니까? 피 흘려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생중계 안 되는 것 놓고 이쪽에 피를 놓아봅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공무원 시험 치는 것하고 이쪽에 피 놓고, 대통령 바뀌는 것하고 이쪽에 피 놓고, 뭐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태극기 숫자가 촛불 숫자보다 3배 많다는 소식이 들려요. 태극기 좋아하죠. 태극기, 촛불이 숫자를 안 밝히는 이유가 거기 있구나. 승리하는데. 그거하고 예수님 피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은, 그 해결점은 신약의 흘려진 피, 주님만이 흘려진 피로 구원되지, 인간이 흘린 피는 안 된다는 점에서, 흘려진 것은 하나님의 대전차, 또는 장갑차, 탱크, 그 안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의 움직이는 전체가 되는 거예요. 움직이는 전체. 개개인의 역량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누가 꽉 쥐고 있어요. 목자는 하나고 양은 백 마리라면 목자의 의해서 양이 사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한 진영은 하나님의 목자가 그걸 통합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저쪽과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이쪽과 전쟁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거예요. 제가 낮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남 미워할 것이 없이 내가 나한테 미워져야 해요. 매일같이 내가 나한테. 그런데 자기 자신이 그렇게 고와지는데 그게 무슨 신앙이겠습니까?
인간은 안 되는데, 예수님 피는 된다고 할 때, 그 연결점은 뭐냐 하면 구약은 가시적인 것이고 신약은 가시적이지 않는 것으로 일단은 이렇게 구분합시다. 신약에서는 변소이야기, 뭐 삽 이야기 눈에 다 보이는 거잖아요. 보이는 것을 보이는 인간이 그걸 다루어서 구원받겠다고 하면 보이는 차원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근데 구약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안 되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구원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안 보고 믿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럼 인간 쪽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 인간 쪽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 쪽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냐, 지옥 가냐, 그건 아직 못 봤다든지,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을 아직 못 봤다든지, 자기가 아직 못 본 것을 끄집어내는데 그 못 본 것을 끄집어내도 소용이 없어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보는 것에 담기지 않은 미흡된 것, 아주 모자란 것, 여분의 것,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지 진짜 생뚱 맞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다, 백날 해봐야 구원 못 봤습니다. 진짜 구원받는 것은 그게 왜 있어야 되는데, 상상도 못한 것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의 피에요.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 거예요. 장래에 천국이 있다, 그런 주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미리 포착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에서는 보이는 건데 신약에서는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캐묻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승천할 때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니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세계는 니가 생각한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원인이고 여러분들은 결과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하는 이런 결과가,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은 따로 있어야 돼요. 그 원인이 따라 오게 되면 내가 예상한 결과가 아니에요. “아, 천국은 참 좋겠다. 이사야에 보게 되면 이리가 양하고 같이 놀고..” 뭐 이리나 양은 다 눈에 아른거리는 것들이잖아요. 양이 같이 놀고 어린애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그걸 머릿속에 상상할 수 있어요. 꿈속에 나타나고 막 상상하잖아요.
그 상상한 거 다 소용없어요. 그거 천국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나를 원인으로 생각해서 내가 상상한 거니까 결과도 하나님이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가 원인으로부터 시작한 결과기 때문에 그 원인과 결과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정리할 수가 있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봐야 돼요.
누구의 배설물이냐, 이게 아담의 배설물이거든요. 아담의 자식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아담조차도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추방되는 입장이에요.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추방시키느냐 하는 거예요. 그 누가, 누구라는 분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원인이라는 결과를 이 속에 집어넣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의 피 입니다. 자, 그렇다면 신약은 예수님의 피라는 사실을 이해하겠는데, 그럼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피 말고 뭐로 나타납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 이스라엘이 레위지파를 집어넣어버리면 열두 지파가 아니고 열 세지파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한 지파가 남아도는 것이 돼요. 그럼 요셉 지파가 두 지파로 나누어지면서 열 세지파가 되는데, 그럼 남아도는 요셉 지파를 하나로 줄일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열두 지파를 통합시키는 그런 새로운 한 지파를 주께서 묶으라고 따로 만들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따로 묶으라고 하나를 만들어야 돼요.
그 만드는 것이 바로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 3장 11절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절, “보라 내가 아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 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처음 난 자라” 레위인은 처음 난 자라, 레위인은 처음 난 자기 때문에 레위인은 누구하고 통합이 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 통합이 되어 있고 나머지기는 열두 지파로 레위지파한테 종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눈에 보이는 식으로 만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쟁을 하러 갈 때, 보통 이스라엘 군이 광야에서 진 칠 때는, 그냥 눌러 앉아서 잠자고 먹을 때는 성막을 가장 중앙에 두고 그 주위에는 레위지파가 포위하듯이 이렇게 둘러서 있어요. 그것은 모세 언약이 그렇습니다. 동쪽에 모세 아론, 그리고 북쪽에 므라리 서쪽에는 게르손 남쪽에는 고핫. 이 므라리, 게르손, 고핫은 전부 다 레위지파에 속합니다. 그리고 동쪽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어요. 이거는 어떤 지파도 없이 모세와 아론이 있어요.
먼저 모세, 아론이 앞장세울 수도 있고 중간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걸 앞장세워서 모세, 아론이 멈추고 있다가 이동할 때는 성막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서쪽에는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남쪽에는 갓, 시므온, 르우벤. 이렇게 해서 열 세 지파, 레위지파는 성막을 지키고 나머지기는 포진한 채로 이렇게 이동합니다.
동쪽에 있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가운데서 유다가 먼저 가요. 그걸 선입지파라고 하는데, 먼저 입장한다고 해서 선입. 이렇게 해서 움직이는데, 이 움직임으로써 뭘 유지해야 되느냐 하면 진영을 유지해야 돼요. 이게 장갑차니까. 이게 탱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옛날 안동축제를 보면 그게 있죠.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앞에 뭐 동그랗게 짚하고 밧줄로 만들어놓고 대장이 올라가서 싸우는 것 있죠. 차전놀이. 차전놀이라고 하고 뭐라고 또 하는데 청군, 백군 나눠서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보이는 것은 밑에는 군중들만 보이고 위에서는 일대일로 보여요. 여자후손과 뱀의 후손. 일대일로 보인다고요. 여호와께서 움직이는 적은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적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이미 접수했어요. 인간은 전부 다 자기 졸개들이에요. 으악하고 겁주면 으악하고 겁내는 졸개들. 진짜 인간을 지배하는 그 주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여호와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이에요.
이미 악마는 알아요. 자기가 왜 지옥 간 줄을 알고, 지옥 간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무조건 적-복음, 복음 아닌 것만 무조건 사로잡고 복음인 것은 대적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근데 인간들은 마귀에게 속하다 보니까 진정 자기 적이 누군 줄 몰라요.
그저 자기 돈 떼먹고 도망치는 다단계나 그런 게 적인지 알지, 진짜 나의 적은, 나의 영원한 적은 악마라는 사실을. 악마가 눈에 보여야 믿죠.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 해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면 적인 줄 알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자식이 속 썩이면 “이 웬수야!” 하죠. “아이고 이 웬수 같은 것!”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간의 정액이나 여자의 월경이나 또는 이런 배설물 같은 것이 없어야 되느냐 하면, 지금 전쟁은 저쪽의 적들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그게 충분하게 납득이 되어야 하고 통합이 되어야 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결과이어야 하고 원인은 우리 가운데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 때문에 니가 있고 내가 있고 너가 있고 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 때문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사귐은, 성도의 사귐은 반드시, 전에 제가 여러분 했습니다만, 복음을 경유해야 된다고 했죠. 복음을. 그냥 초코파이 하나 나눠주고 정이 있다고 하면 안 돼요.
초코파이 나눠주지 말고 복음으로 나눠줘야 해요. 복음으로 나눠줘야 이게 정으로 왔다가 복음 싫어서 삐져서 나가죠. “니는 딴 건 다 좋은데 그 소리는 하지 마라. 우리 인간이 완전히 쓰레기 되잖아?” “우린 원래 쓰레기야! 원래. 원래 쓰레기라니까.” 우리는 마귀에 속해서, 원래 우리는 복음을 반대하기 위해서 악마 편에 선 하나의 탱크들이에요. 바퀴들이고.
악마는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서 딴 건 다 수정하되, 복음은 무조건 반대하도록 우리를 길들여왔습니다. 복음 대신 우리를 통합시킨 것은 뭐냐 하면 영어로 해피니스happiness에요. 행복이에요. 행복을 위해서 인간은 태어났다는 겁니다. 행복을 위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든 학문과 철학과 예술과 정치와 사회경제, 모든 학문의 초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행복 하라는 거예요.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택시 드라이버해도 행복해요.
모든 것은 꼿꼿이 오직 하나의 초점에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 믿으면 행복하나? 질문 자체가 이렇게 나와요. 행복을 추구할 가치 없음을, 가치 없음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오늘 본문을 알아야 해요. 똥 누는 것도 지 맘대로 못해요. 니는 진 밖에 나가 죽어야 할 인간인데,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군사로, 너는 똥은 바깥에 싸고 이 안에서는 싸지 마!
이 거룩한 진영에, 하나님에 의해서만 조성된 이 거룩한 가든garden, 정원에 너는 들어오너라. 이래서 우리는 하나의 적을 적으로 아는, 적을 제대로 아는, 적을 제대로 파악하는, 이건 우리 적이 아니고, 이게 우리 행복의 적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군사로서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탱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이에요.
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체적으로 전쟁에 나설 수가 없는가? 우리는 오줌이나 질질 싸고, 우리 안에서 나오는 배설물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거예요. 주님의 전쟁은 더러움과 깨끗함의 전쟁인데, 여기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불합한 것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부끄럽고 더럽다는 말이죠.
부끄럽고 더럽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 몸에서 나오는, 우리 몸에 있을 때는 모르는데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영에서는, 하나님의 전투 진영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은, 몸 밖으로 나온 것이 몸 안에 있다는 이유로, 더러운 것을 담아내는 용기, 기구, 그릇 자체가 더럽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구약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니까, 속의 더러운 것이 나오면 하나님의 전에 오지를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확인할 수 있죠.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니가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어떤 거룩한 말씀이 들어가도, 들어갔다 나오면 더럽다는 거예요.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니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럽다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 입장에서 더럽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생각하는 발상이나 사고방식이나 내일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이나 관심사나 경향성이나 전부 다 더러운 거예요.
여러분들이 드라마나 이런 것들을 보셔야 하는 이유가 내 속에 있는 더러움을 드라마를 통해서 다 보여주고 있으니, 거기서 동감을 하는 겁니다. 아, 저게 더럽구나! 옷 재벌 안 되다가, 이제 뒤늦게 쫓아낸 사람이 옷 재벌 되어서 회사를 살리고, 아, 역시 월계수 주인공이 회사한테 잘해. 굉장히 흐뭇하죠. 그게 행복이잖아요. 그게. 행복하기 위해서 드라마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을 같이 하는 거예요. 우리는 드라마를 따서 거기다가 내 더러운 것을 뿜어내고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그러는 겁니다.
가족끼리 그렇게 정답게 지내다가 막상 명절날에 모여가지고 화투쳤다 하면 싸우고 난리 나고, 술김에 화투쳐가지고 형님은 쌍피 가져가도 먹을 것은 내주지도 않는다고 이리 삐지고 저리 삐지고, 그렇게 화투를 쳐보자 이 말이죠. 그렇게 우리 속에 어떤 것이 담겨있는지. 나중에 화딱지나면 화투판 다 엎어버리면서 잘 먹고 잘살라고 하고. “형님! 잘 먹고 잘 사소서. 애야 집에나 올라가자.” 판 다 깨져버리고. 그게 평소의 우리 일상의 모습이 아닙니까? 일상의 모습.
일상의 모습 그 가운데서, 어떻게 일상의 그런 모습이, 그게 더러운데, 어떻게 그 더러운데서 더러움이 탈출이 가능하겠습니까? 안 되죠. 지금 생중계도 안 되고. 이게 예수님의 피 때문에 그럽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놓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면서, 아! 우리의 일상이 속에서 더러운 것만 나온다고 생각할 때,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뭘 설치고 뭘 열심히 한들, 예수님의 피를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두고두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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