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강-신 22장 22-24절(통간)1702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2장 22-24절입니다. 구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남자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방금 읽었던 이 대목을 보고 아주 신이 난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한 둘이 아닐 거예요. “나는 그런 적 없는데? 나는 이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아예 신이 났어요. 아마 성경 보는 재미가 여기에 있을 거예요. “나는 이런 죄를 지은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인간 때려죽여버리소.” 갑자기 뭐 기분이 들뜨고 난리죠.
근데 그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그 범죄 현장에 있지도 않고 그 범죄 요건이 갖추어져 있지 아니하면, 이게 죄 사함의 범주에서도 탈락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죄함이 없으면 사함도 없어요. 혼자 좋다고 잘난 체하고 까불고 있다가 나중에 지옥에 가 있습니다.
성경말씀에서 이런 말씀을 주실 때에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가 사적인, 개인적인 잘남과 자기가 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그동안 모아놓은 자기의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낼 것인가, 이걸 측정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내가 지금 어느 정도까지 착함에 도달했을까? 야! 이 성경 말씀에 내가 위반한 것이 없으니까 천국이 손에 닿아있어서 곧 들어갈 것 같아. 나 같은 천사가 어디에 있어? 이런 죄도 안 지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했어?’ 이렇게 돼버립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기선택의 파멸성입니다. 인간의 자기선택의 파멸성.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형 에서는 미워하기로 선택했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창세기 25장에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결론에 도달해버리는 오류를 범해요. “역시,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고 성급하게 먼저 가는데, 그 중간이 뭐냐 하면 야곱은 본인이 본인을 선택했다는 이 사실을 빠트리면 안 되는 거예요.
야곱은 왜 형을 속였습니까? 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기만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나를 선택하는 이 선택성에 대해서 본인이 양보할 마음이 없어요. 그 속임은 삼촌 라반까지 속입니다. 삼촌까지 속이고, 삼촌도 야곱을 속였죠. 야곱이 원하는 여자를 주지 않고, 좀 얼굴 못생긴 언니를 1+1세일하듯이 덤으로 하나 더 끼어들게 함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인생이 21년 동안 고생했잖아요.
그래서 야곱이 ‘두고 보자!’하는 거예요. 남한테 지고는 못사는 성격입니다. 그게 야곱이고, 이 야곱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꾸준히 선택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선택이 결국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함으로써 알려주는 것은 뭐냐, 나는 나의 원수마저, 내가 선택한 위력은 나의 원수마저 구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 중에서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정죄 받은 자 중에서 마땅한 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골라서 구원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만약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치면, 나는 도대체 하나님의 어떤 위치에서 정죄함을 받아 마땅하냐? 그 자리를 반드시 확보해야 돼요. 그 자리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 중의 한 자리가 바로 신명기고, 그 신명기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야기가 이렇게 쭉 길게 나오는데, 보통 길게 나올 때는 제가 또 쉽게 이야기해드리죠. 어떤 총각이 유부녀와 통간할 때는 둘 다 다 죽여라. 그 다음에 23절에 보면 약혼을 해서 남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했을 때는 둘 다 다 죽여라. 내용이 별로 어렵지 않죠? 와 닿지 않습니까?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뭐냐, 24절에 보니까 처녀가 성읍 중에 있으면서 그렇게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소리를 안 질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처녀가 벙어리라면 어떻게 할래요? 벙어리라면? “으으흐음~~”했는데 소리가 안 들려? 그리고 더 벙어리보다 더 장애자,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면? 정신이상자나 또는 아이큐가 낮은 처녀에게 빼빼로나 하나 입에 물게 하고 성폭행 했을 경우에는? 과자는 좋다고 먹고 일은 끝나버리는 이럴 경우에? 그거는 그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이 말입니다.
25절부터 30절까지 그 뒤에 읽지는 않았습니다마는, 본문과 관련이 됩니다. 25절,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거든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26절, “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치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죽인 것과 일반이라” 27절,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 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그러니까 장소가,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곳에서 강간을 당했을 때 그 강간당한 책임을 여자한테 묻지 말라는 거예요. 근데 여자입장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이건 강간당한 것도 기분 나쁜데, 책임을 묻지 말라고 해서 마치 범죄에 합류한 사람처럼, 죄인처럼 취급받는 것은, 지난 시간에도 했습니다만, 인권의 대한 쓰라린 상처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벌써부터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죠.
그 다음에 28절에 보면,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는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거든” 둘 다 처녀총각이다 말이죠. 29절,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로 아내를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평생에 그 여자를 버리지 못한다는데, 현대 여성 입장에서는 뭔가 조건이 빠진 것 같아요. 본인이 그 남자를 원했을 경우에, 조인성이라든지, 소지섭이라든지, 뭔가 원했을 경우에는 되는데.
돈 되고, 인물 되고, 성격되고, 키 되고, 마음씨 되고, 그리고 뇌섹남, 뇌가 섹시한 남자, 그리 되면 되는데, 돈 안 되고, 인물 안 되고, 다 안 되고, 아이큐 안 되고, 집안 안 됐을 때, 이거는 강제로 당했다고 계속 살아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지금 말을 천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성경 내용을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고상한 척하면서 넘어가지 마세요.
그 다음에 30절에, “사람이 그 아비의 후실을 취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게 성경에 분명히 나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이런 구절을 할 때는 하나하나 따지면 진짜 이거는 ‘선데이 서울’하고 똑같이 돼요. 젊은 사람들은 선데이 서울을 모르지만. 그런 잡지가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간추려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간추려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기 간통, 통간이라고 하는데, 간통이나 통간이 죄의 끝자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을 다루어요. 육을 육적인 차원에서 다룹니다. 이런 내용이 나왔을 때, 이것을 나는 안 했다고 빠지지 말고, 안 했다고 빠지면 개인이 개인의 운명을 선택하는 셈이 돼버려요. 야곱이 돼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왔을 때, 모세를 분명히 개인으로 찾아온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달랑 개인구원하려고 찾아왔습니까? 모세는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종이에요.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구원이지 모세구원이 아닙니다. 야곱을 찾아온다고 야곱 혼자만 천당 보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만 보내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의 후손들을 천당보내기 위해서 야곱을 찾아온 거예요.
야곱을 찾아와 야곱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겁니다. 집단의 이름이에요. 집단의 이름. 하나님과 싸우고 난 후에는 마하나임이고, 마하나임이라는 천사이름이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천사가 찾아와서 야곱을 만났고, 그 천사의 기능이 자기밖에 모르는 야곱의 이름이 바뀌고 난 뒤에, 이름 바뀐 야곱에서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기능을 이제는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선택이라는 기능을 애초부터 주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개인선택이 없는데 이 본문을 보면서 “헤헤! 나는 안 했지롱~ 나는 평생 이런 짓 없지롱~” 이래 돼버리면 그 사람은 개인선택을 그냥 유지하는 셈이 돼버려서 정죄함 자리에, 집단적 정죄함 자리에 끼어들지 못해서 죄 사함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 가운데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내 대신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야 돼요. 내 대신.
그리고 이 말씀은 앞으로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 이야기고, 우리가 또 무심코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런 사태는 앞으로 원치 않는데 주어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나중에 낭만을 위해서라든지. 그거는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거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보편화시키시는데, 십자가 그 죄 사함의 효과를 위해서, 그 보편적 효과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간음이라는, 간통이라는 범위를 보편적으로 늘려놔 버렸습니다.
그게 뭐냐,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자가 되는 거예요. 간통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근데 그 마음은 인간이 조절할 대상이 아니에요. 오히려 마음이 인간을 그때그때마다 지배하게 되어 있어요. 마음속에 있는 인간의 욕구, 욕망, 충동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까지 어쨌다, 저쨌다, 하는 것은 의미 없고, 지금 내 마음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거는 새로운 주의 말씀 앞에, 십자가 앞에 자기를 내세워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기억되고 싶은 사랑과 기억하고픈 사랑도 간음이에요. 제가 너무 심한 율법을 말씀했습니까? 고등학교 때 했던 첫사랑,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이름도 묻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내 역사 속에, 내 history속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선택이에요. 꾸준하게 우리는 나를 이렇게 선택하는 겁니다.
자, 그럼 이 말씀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내에 혼인이라고 하는 것은 두 종류로 나눠요. 하나는 사회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결혼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사회성. 약혼, 결혼, 혼인, 사회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회성이라고 하는 말은 결혼 문제가 아니고 그 공동체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이 사회성의 요건을 갖추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 동거는 안 됩니다. 동거는 안 돼요. 현대는 결혼은 안 해도 동거는 허락이 되잖아요. 그러나 그 사회는 그 공동체의 인정을 받아야 되고 허가를 받아야 돼요.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남자여자, 그거는 짝짓기죠. 암컷수컷 짝짓기의 그 욕구가 그냥 육적인 충동의 욕구로 머물러버리면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이 없다는 겁니다.
차별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인간의 충동성이 어떻게 거룩한 나라와의 조직과 연계되어 있어야 돼요. 동물적인 충동, 그냥 덮치고 싶은 그 충동마저도 이스라엘 율법을 경유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결혼생활로, 주께서 받으실만한 결혼생활로 이게 정착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것에 실패한 것이 뭐냐, 죄가 되는 거죠.
이걸 신약에서는 이렇게 됩니다. 육에서 시작했더라도 영이 돼야 돼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결혼을 이야기해놓고 내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신비가 아니고 교회의 신비를 가정의 남자, 여자 만남 속에서, 그 속에서 “이게 바로 교회야. 이게 바로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야.”하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남편의 신부가 아니고, 남편의 신부는 육적인 차원이고, 궁극적으로써는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느냐를 남편과 혼인하면서 그걸 찾아보는 겁니다. 찾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일은, 사실은 충동적이거든요. 지금 구약입니다. 신약에서는 좀 있다가 이야기하고.
그럼 이스라엘 내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회성에 위반되는 그러한 혼인관계에 대해서는 그걸 비사회적으로 봐가지고 거기에 뭘 가하느냐 하면 보복을 가합니다. 보복을. 단체가 보복을 가해요. 단체가. 갑자기 조용해지네요. 조용해져야죠. 지난 시간에 어떤 딸이 결혼을 했는데 처녀가 아닌 것을 속이고 했을 때에 부모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의 장로들이 죽여 버려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가 개인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이 집단을 선택했다는 그 취지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계속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 거룩성을. 우리 같으면 내 딸 왜 죽이냐고 이렇게 할 거예요. 심지어 어제 뉴스 보니까 자기 딸을 성추행했다고 담당교사를 만나서 죽여 버렸어요. 죽인 엄마가 46세고 그 상담교사는 나이 50세. 나이가 50이고 뭐고 간에 내 딸 건드렸으니까, 성폭행이 아니고 성추행을 했는데 죽였습니다. 얼마나 성질이 났으면 죽였어요.
그런 것은 자기로서는 거룩한데, 자기로서는 정의로운데,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몽땅 애굽에 있을 때에, 애굽에서 애굽의 장자들과 함께 몰살당해야 마땅한 그런 자들이었어요. 어린양하고 바꿔치기 해서 살아났잖아요. 어린양하고 바꿔치기 해서. 그들을 천국보내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보내기 우해서.
따라서 무슨 취지가 날아가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다는, 애굽적인 자기 욕심, 육적인 것만 남아있고 어린양이라는 영적인 요소가 누락이 되어있으니까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인정받지 못한 동거생활은, 이스라엘의 결혼제도에 합당하다는 것을 주위사람들이 공정을 해줄 때에만 둘 사이의 관계는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안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동네가 보통 무서운 동네가 아니죠. 근데 제가 간통이나 통간이 죄의 끝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이것을 공동체가 보복을 하는데, 현대인들의 보복은 뭐냐 하면 바람을 피웠으니까 이혼을 시킨다든지, 이혼시킬 때 그냥 시키지 말고 양육비 다 주고 돈으로 해결한다든지, “그렇게 내가 바람피운 것이 싫으면 니도 맞바람 피워!”라고 해가지고 맞바람으로 복수를 한다든지, 안 그러면 동네방네에 우사를 시켜가지고, 니가 한 그 수치스러움을 다 공개를 해서 각자 마음속에 있는 개인적인 복수심을, 또는 복수심을 대신 갚아주는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게 나다나엘호손이 쓴 ‘주홍 글씨’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1640년, 17세기 중반에 영국 청교도 집안의 어떤 여자가 남편보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남편은 늙은 의사고, 여자가 먼저 와서 살다가 어떤 목사하고 간통을 해서 애를 낳았는데, 여자는 입을 다물고, 입을 다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중에 줄거리에 보면 목사가 말은 안 하고 오직 경건! 경건! 완전한 거룩을 추구해야 천당에 간다는 것만 외치는데, 본인은 자근자근 말라가고 있어요. 왜 저렇게 말라가는지 이유를 몰라요. 끝에는 여자는 도망치려고 하고 목사는 스스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입니다. 나다나엘호손이라는 작가가 거기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그게 마귀적인 책이에요.
왜냐하면 현대에서 젊은 사람 둘을 돌로 쳐죽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돌을 맞으면서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서로 꼭 껴안고 죽을 거라 말이죠. 그러니 복수가 되겠어요? “니가 그렇게 하면 나는 니 꼴도 보기 싫다. 나는 이 결혼 허락 안 한다.” 이렇게 하니까 “엄마가 허락 안 해줘도 돼. 우리끼리 살면 돼. 자기야! 우리 멀리 도망쳐서 살자!” 복수 잘 되겠다~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부추겨주는 거예요. “아니야. 우리가 성심성의껏 부모의 인정을 받도록 노력해야지.” “흥! 나는 인정 안 해. 나는 오빠만 있으면 돼. 나는 따로 살아야 되겠어.” 그렇게 해놓고 남자하고 여자하고 또 다투잖아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현대사회에서 복수를 합니까? 이거는 핍박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데? 완전히 복음적이라.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돌에 맞는 것도 기뻐. 왜? 같이 돌에 맞으니까. 그러니 사적이 선택에 의해서 살아가는 이 육적이 세계에서 이 영적인 이야기는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뭐냐, 통간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연결시키느냐 하면 돌로 쳐죽이는 데까지 연결시키거든요. 이 말은 누구는 그 짓을 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돌 던진 사람은 잘났고, 돌 맞는 사람은 못났다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피해자냐, 가해자냐 구분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자,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냐?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피해자는 율법밖에 없어요. 율법. 어떤 여자가 간통했다고 죽으라고 돌로 쳐죽이는 그 인간도 간음이라는 처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본인이 돌로 쳐죽일 수 있는 자격자가 계속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시간요소를 빼버리거든요. 시간요소를 빼버리면 지금까지는 간음 안 했지만, 언제 간음한다든지, 간음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과거에 착하게 살았다는 것이 전부 다 무효가 되고, 그 순간 돌로 쳐죽여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율법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늘, 율법의 배후에는 뭐냐, 돌로 쳐죽여야 되는 죽음과 관련성이 되어 있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제사제도와 관련성이 되어 있고, 어린양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신약적으로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피해자고 그 외에는 모두 다 가해자가 된다는 그 구조를 주님께서는 구약부터 장착, 정착시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장로가 되어서 율법 어겼다고 남을 쳐 죽이는데 가담했다는 그것이, 본인이 죄 지었을 때, 이 죄 말고, 간통죄 말고, 안식일 어긴다든지, 다른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빼 줄 수 있는 어떤 어드벤티지advantage, 유리한 점은 없습니다. “니가 남을 죽였던 말든 간에 이번에는 너 차례다.”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왜? 율법은 그것이 점점 더 확산이 되고 확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아는 죄는 몇 가지 안 되는데, 그걸 덮은 보자기는 넓어도 너무 넓다고요. “너는 평생 간통한 적 없기 때문에 간통죄에서는 빼줄게.” 이게 아니에요. 육적인 죄를 한 번씩 만나게 되면, 그거는 뭐냐 하면 이 죄, 저 죄, 관계없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누구나 가해자일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죽어가야 할 여정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죽는 이유를 찾아내는 거예요. 손님이 오는데 살 것 같으면 “어서 오세요!” 웃으면서 하고, 좀 없어 보이고 둘러만 볼 것 같으면 인상 쓰는 죄. 이웃사랑이라는 범죄, 죽어 마땅한 겁니다. 왜? 아직까지 나의 육적인 것에 기반을 둔 사적선택에 의한 자기인생 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성화론이거든요. 성화론은 다 지옥 갑니다. 아이고, 이 말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잘 됐어요.
왜 자기를 선택하는데? 왜 이스라엘이 되지 못하고 야곱으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고! 저 놈 죽이라고! 속이 시원하던가요? 누가 피해자인데요? 이미 피해자는 결정 났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만 피해자고 모든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성령 받은 사람은 간통죄가 없어요. ‘제발 간통죄 지으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십자가 안에 안 들어왔고 지금도 십자가 밖에서 관람하고 있는 중입니다. 구경하고 있어요. 하나 예를 들면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이고, 대통령이 뭐, 누가 되든, 문재인이 되든, 이재명이 되든, 황교안 전도사님이 되던, 나는 국민이야.” 이러면 아무 관계없는데, “누가 돼야 돼!”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렇게 안 되면 이민 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되면 나는 미국시민 될 거야.” 미국시민으로 요새는 트럼프 때문에 받지도 안 해요.
정말 천국시민이라면 그리스도에 다 이루었다는 것에 관심 있어야 되지, “주여! 간통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거 뭡니까? 마귀의 노리개 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제가 요한계시록 강의할 때 했지만, 다 구원받고 난 뒤에 “함 보자. 내가 어떤 죄인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었나.” 이걸 느긋하게 찾아보는 식으로 해야 돼요. 이래야 마귀의 시험에 들지를 않습니다. 이래야. 성경에 하나 나오면 부들부들 떨면서 “아이고, 어쩌나! 어쩌나! 지금까지 견뎌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견디게 하옵소서.” 이러는 거예요.
이게 뭐냐, 사적선택이에요. 오늘 간통보다 사적선택이 더 중요해요. 사적선택은 내가 행동 조심하게 되면 미래에는 피게 된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거는 무당이고 불교죠. 우리는 이미 미래가 피었어요. 이미. 사나죽으나 천국이에요. 이제 군대생활 그만하고 제대하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얼쩡거립니까? 거려봐야 간통만 짓는데. 간통뿐만 아니고 살인이고 탐심이고 다 짓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주께서 통과한 터널을, 그걸 경유하면서 이제는 손잡고 나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강의할 때 했거든요. “그냥 구경 한 번 잘했네.” 내가 나를 선택해서 구원시키겠다는 이 철없는 육적인 이 사고방식이 어떠한 악마의 놀림감이 되었는가를 실컷 구경하세요.
십자가 안에 있는 나의 관점에서, 십자가 밖에 있는 내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면, “아, 저래서 구원되었구나!” 천박한 육적인 범죄, 뭐 돈을 어떻게 했느냐 그것 생각하지 말고, 구원받은 입장에서 “아, 지옥 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저런 법에 얽매여 있구나.” 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직 구원되지 못해서 벌벌 떠는 이러한 모습은 욥도 그런 모습을 보여줘요. 욥기 31장 9절에 보면, 자기에게 고난이 오니까 자기는 고난 받을 그러한 죄가 없다고, 정죄 받을 죄가 없다고 그런 소리 합니다.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10절,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욥이 어디서 착각하느냐 하면 내 아내가, 아직까지 이혼 안 했던 모양이라. 내 아내가 남에게 피해 입지 않게 하려면 나부터 행동을 똑바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율법주의고 구약적입니까? 지금 욥의 이 이야기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왜냐,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는 심보를 욥이 고난 가운데 그대로 노출해줍니다. 내가 행동을 똑바로 안 하면 그 벌이 내 자손에게, 내가 사랑하는 귀한 보석 같은 그들에게 주께서 저주를 내리셔서 피해를 본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NO! NO!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마귀를 착하기 그지없는 욥에게 보내서, 욥이 아무 짓도 않은 호작질을 다하고 도망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욥은 악마를 놓친 거예요. 악마를 몰랐던 거예요. 자꾸 하나님하고 직접 상대하려고 했지, 악마가 나한테 무슨 호작질을 했는지 몰라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거든요. 내가 정신 차려서 이만큼 산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정신이 깨어져야 해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오늘 일용할 양식을 얻은 겁니다. 행동 똑바로 해서, 간통 안 해가지고, 점심 때 맛있는 자장면 먹은 것이 아니에요. 저는 바빠서 안 먹었지만.
그게 아니고, 주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너의 진짜 육적인 모습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실컷 구경하면서, 빨리 이 땅을 빠져나오라고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면서 나라는 이름으로 남의 영화를 우리를 통해서 보게 하십니다. 간음죄 생각하지 마시고, 십계명 생각하지 마시고, 사랑만 생각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 생각하게 하옵소서. 피 흘린 유일한 피해자는 주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할 텐데, 마치 본인도 피해자인척하는 이 교만함을 주님 처치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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