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강-신 22장 13-21절(혼인 속의 복음)170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2장 13-21절입니다. 구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취하여 그와 동침한 후에 그를 미워하여 비방 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가로되 내가 이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그 처녀의 부모가 처녀의 처녀인 표를 얻어 가지고 그 성읍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처녀의 아비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비방 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나 보라 내 딸의 처녀인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필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의 아비에게 주고 그 여자로 그 남자의 평생에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 씌움을 인하여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인 표적이 없거든 처녀를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구약성경이 죄를 이렇게 지적을 하니까 어떤 꼼수를 쓰는가 하면 나한테 해당되는 일인가, 해당되지 않는 일인가부터 살피게 됩니다. “아이고, 우리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고”, 이렇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 나한테 해당될 일일 것 같으면, “주여 십자가가 있으니 뭐, 걱정 하나도 안 합니다. 백날 죄를 지적해도 저는 십자가만 믿습니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니까 첫 번째 경우, 이거는 우리 집에는 이런 해당사항이 없고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도 자기 생각만 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 아이고, 뭐 들켰네. 그래도 뭐 우리는 신약이니까, 신약에서는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했으니까 나는 십자가만 붙든다고 하는 경우도 자기 살기 급급한 그러한 태도고. 자기 사랑이 고만 우선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이 성경에서 원래 말씀하는 취지가 자기 살기가 바빠 가지고 이런 경우나 저런 경우나 날아가 버립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라고 수 백 번도 더 이야기했는데, 그걸 듣고서도 어떤 성경 내용이 들어가게 되면 자기 부끄러운 것이 노출될까봐 이게 덜컥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떠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자기변명들이 동원되죠. 어쩔 수 없었다니, 뭐 어떻다니, 그때는 내가 예수 안 믿었을 때니, 이런 식으로 쭉 나오는데,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하고 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핑계 대는 것이 딴 게 아니고 첫날밤에 처녀성이 없었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쫓아내니까, 그 친정 엄마가 그럴 줄 알고 미리, 히브리인들은 첫날밤에 하얀 천을 깔아놓거든요. 그 천을 딱 갖고 있다가 결혼해놓고 남자가 딴소리하기만 하면, 처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고 나는 다른 처녀를 만나서 다시 혼인하겠다고 나오는 이럴 경우에, 장로들에게, 그 당시 재판관들에게 제시를 해가지고, 제시를 하게 되면 억울한 쪽에서 어떠한 혜택을 입게 되느냐 하면 벌금을 이쪽에서 받게 됩니다.
은 백 세겔을 받고, 또 하나가 뭐냐 하면 그 남자가 평생토록 자기가 모함한 그 여자와 헤어지지 못하는 그러한 혜택을 입어버려요. 그리고 진짜로 처녀가 아닌 상태에서 결혼했으면, 이 거룩한 이스라엘 내에서, 창기가 용납되지 못하는 그러한 이 사회에서, 분명히 결혼하기 전에 결혼할 남자 말고 다른 남자와 창녀 짓을 했기 때문에 창녀로 간주해서 돌로 쳐죽여 버리라는 거예요. 까짓것 인구 하나 줄어도 관계없다는 겁니다. 친정집에서는 자기 딸이 돌에 맞아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법이 그렇다는 겁니다.
쳐죽여 버려서,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내에서 창기 짓을 하는 죄를 제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게 되면 여기에 모든 사람이 다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고, 또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 안 될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이 해당 안 되느냐 하면, 딸 잘 키워가지고 아무 짓도 안하고 처녀인 상태로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너무 자기 딸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거는 잠시 친정집에 놀러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심할 경우에는 오늘 신명기 본문 같은 것은 뭐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뭐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이렇게 돼버리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나는 의롭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고, 벌금 낼 일이 없고, 내 딸 죽일 일이 없다고, 이래 돼버리면 뭘 놓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를 놓치는 것이 돼요. 이 취지를 놓친다는 말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나는 뭐 해당사항이 없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해서 외면하고 안 듣는 셈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은 모든 인간을 경우를 커버합니다. 해당사항이 안 된다는 말을 못하게 만들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진짜 자기 딸이 잘 되어 시집가서 사랑받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표면에 등장하는 것은 창기 짓해서 처녀가 아닌 몸으로 시집 간 하나의 예를 들거나, 무고하게 당하는 그런 경우지만, 그 밑에 담겨 있는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진짜 뜻은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되는 말씀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함하고 있어요.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포함된 뜻과 이렇게 연결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집안에는 이런 우사스러운 일이 없제?” 이런 식으로 어물정식으로 넘어갈 생각을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냥 그걸 방치할 생각이 없는데. 자, 표면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신명기 22장 이 이야기는 그 당시 시대가 역사적으로는 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라고 해서 소규모 종족을 만들었던 시절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들도 전부 다 소규모입니다.
소규모에서는 이게 종족공동체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족의 종족공동체. 그때의 결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식구에 대해서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 집안의 처녀가 아닌 다른 집안의 여자를 맞이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최초의 법은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것이 인간의 법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인류학 가운데 공부해보면 나와요. 지금도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에 가보면 여자를 서로서로 제시함으로써 종족간의 파벌싸움을 사전에 조치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 여자를 하나의 사물로, 물건으로 봄으로써 증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증여. “이거는 그냥 아무 사심 없이 그냥 선물입니다.”라고 드리는 거예요.
근데 오늘날 같은 이러한 사회에서는 오늘 같은 본문을 들이대게 되면 문제가 있어요. 어떤 문제냐 하면 19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 씌움을 인하여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 이 대목입니다. 자기를 버리려고 온갖 꼼수를 다 쓴 남자와 이거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강제로 평생 살아야 할 판이 되었습니다. 이게 여자 인권에 전혀 보탬이 안 돼요.
자기를 내쫓으려고 그런 꼼수를 쓴, 이제는 범죄한 범인하고 사는 거예요. “니는 이제 죽었어.” 주도권이 이제는 여자가 쥐고 있어야 돼요. “니같은 남자하고 내가 더 살고 싶으나? 나가!” 이런 선택권을 여자한테 줘야, 어떤 심적인 피해보상이 넉넉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상이라는 것이 기껏 그 남자하고 못 헤어지는 거예요. 이게 보상이 아니고 족쇄가 될 수가 있어요. 족쇄가. 이별을 하고 싶어도 헤어지지 못하니까.
그럼 여자의 독점적인 인권은 어디서 찾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오해가 있어요. 뭐냐 하면 여자의 인권이라는 것은 현대 사상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에서는 여자의 인권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히브리어의 어휘에 보면 여성명사는 주어로 등장한 적이 없어요. 전부 다 이 세상은 남성의 세계입니다. 제가 지금 이 본문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관 지으려고 이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여자라고 하는 것은, 처음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가 이브라는 여자기 때문에, 하와라는 여자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여자는 늘 울어야 된다, 이게 아니고, 여자다움의 기능은 인간들끼리 기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면서 여자다움의 기능이 특수한 기능이 이 땅에서 발휘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울어야 된다, 뭐 여자는 슬퍼야 된다, 여자의 인권은 짓밟혀야 된다, 단지 여자 입장에서 동정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되어 있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의 징벌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여자를 그렇게 힘들게 한 거예요.
그러면 여자 인권을 따지려고 한다면 하나님한테 따져야 돼요. “고거 먼저 하나 따먹었다고 이런 형벌을 주십니까?”라고 이렇게 따진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모든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을, 이거는 완전히 묵살하고 모든 세상이 여자 중심이 되어야 된다고 우기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일단 결론을 내려 봅시다. 여자에게 이렇게 어떤 징벌적 저주를 내리는 것은 바로 거기에 반발할 수 있는 여지를 니가 품고 있다는 거예요. 남자한테는 가족 먹여 살리다가 그 힘에 받쳐서 결국 죽는다, 라는 징벌을 줬을 때, 어느 남자치고 자기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을 흔쾌히 감수할 어떤 남자도 없듯이, 여자도 동일하게 여자에게 주신 징벌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마땅하다고 나올 위인들이 없어요. 왜? 결국 예수님께서 남자, 여자에게 이런 징벌을 주는 것은 그 배후를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남자, 여자 그 뒤에 앉아있는, 숨어있는 것 나오라는 이런 뜻이에요. 이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따먹고 마음 자체가 마귀의 아바타가 된 거예요. 마귀가 조종하는 그런 속성을 가진 거예요. 지금 속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인간을 옭아매는 것은 하나님 쪽이 아니고 마귀가 중보자로, 중보자도 아닌 게 중보자에 걸쳐가지고 마귀 말을 어쩔 수 없이 수능 할 수밖에 없는 운명과 팔자라는 이 말입니다.
그 팔자 됨을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고, 팔자 됨을 팔자라고 확실하게 못 박아 놓고, 그 다음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기리 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의적인 선택과 권한에 의해서 그게 저주받은 남자든, 저주받은 여자든 상관없이 주의 나라로 데려가는 겁니다. 그 데려갈 때 남자나 여자나 “진즉에 데려오지.” 이게 아니라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뀌어야 돼요. 지옥 불에 의하면 남자한테 치이는 여자의 인권,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가 치이면서도 남자를 사모하는 그런 이중성을 발휘하면서 이 세상은 뭔가 수수한 세력에 의해 총체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위하고 여자는 무시한다, 이게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어디 강원도 할머니가 나왔는데, 그 할머니가 전래 노래를 불러요. 노래 가사가 이겁니다. “시집을 왔는데 남자가 쟁기를 들고 첩살이한테 갔다.” 이게 노래에요.
현대 여성의 입장에서는 뭐가 답답하냐 하면 그 옛날 남자들이 결혼해놓고 또 첩 찾아서 가는 그게 답답한 게 아니고요. 남자가 그렇게 해도 갈라서지도 못하고, 꼭 남자의 운명을 지독스럽게 그것만 붙들고 사는 그 엄마 세대의 그 사고방식이 답답한 거예요. “엄마, 헤어져라. 그거 와 참고 있노? 뭐 여자 인생이 뭐 어떻니, 저떻니, 하지 말고 그거 왜 참고 있어? 괜찮은 남자 있거든 가버리지 그걸 왜 참아? 아이구, 엄마 보니 내가 더 답답하다. 요새는 갈라서면 재산도 딱 반 나와는 거야.”
뭐 이렇게 나올 수도 있지만, 그게 그 할머니 나이가 84세라고 합니다. 그 팔십이 넘은 할머니한테 현대적인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어떤 남자하고 결혼을 했으면 내 팔자는 이거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남자의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그 의식 외에는 다른 의식은 들어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현대의 젊은 여성 입장에서는 그러한 부모의 세대가 더 답답한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피’에 있습니다. 처녀성에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결혼을 할 때 누가 행복하냐 하는 것은 제가 일단 설교에서 접었습니다.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이 땅에 산다는 자체가 지금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 받아야죠. 이런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뭐 행복한 내 인생, 여자의 운명, 이런 것 탓하지 마시고, 정작 예수 그리스도하고 통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러한 인생을 살면서 내가 이러한 인생사는 것이 마땅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어떤 환경을 조성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가혹하게 보이는, 여자에게 너무 무거워 보이는 율법을 가지고, 니가 속한 환경은 니가 원해서 수정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하고 관련될 환경이지, 니 사적인 행복감을 쟁취하기 위해서 주어진 그런 환경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집이고 뭐고 이 세상을 빨리 떠나는 것이 최고 좋아요.
그렇다면 그 처녀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은 레위기 12장 1절에서 8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여자가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여자의 경도할 때와 같이 66일 동안 더럽고, 여자가 아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33일 동안 태가 더럽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사람의 몸에서 뭔가 나온다는 것은 다 추잡고 더러운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 말은 이미 나오기 전에 인간 안에 추잡고 더러운 것이 있었고 선악과 따먹은 그 결실물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뿐만 아니고 다른 구절에 보게 되면 여자가 하혈을 한다든지 하는 이것도 더러워요. 어쨌든 인간의 몸에서 액체가 나온다는 것은 더러운데 그 중의 특히 피가 더러운 겁니다. 그러면 이 더러운 피는, 피가 더럽다고 규정을 했다는 것은, 더럽다 하는 것만 규정하는 것으로 이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더러운 것도 추가적인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깨끗하다고 전환될 수 있는 요건을 전제로 하고, 배경을 전제로 두고 더럽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더럽다고 하는 말만 듣고 주 앞에 따질 생각을 하지 마세요. “너는 저주받아 마땅해. 니 인생 더러워. 죄졌잖아.” 이걸로 끝나지 마시고, “마땅합니다.”라는 말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의 준비된 말씀과 결부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결부된 것의 노선으로 주께서 데려가기 위해서 누굴 사용하느냐 하면, 참 하나님이 교묘해요, 누굴 사용하느냐 하면 정말 철딱서니 없고 못돼먹은 진짜 강도 같은 남자를 여자하고 결혼케 하는 겁니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모함이라는 겁니다. 참, 처남이었으면 때려죽이고 싶은 그런 남자들 있잖아요. 베드로후서에 보면 여성 자체가 약하고 힘도 약하고 정신적으로 자기 살 궁리밖에 안 하니까, 여성의 그러한 약점을 마음껏 희롱하고 갖고 놀고 노리개 감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이미 남성들 속에 퍼져있는 거예요. 남자는 술 먹으면 되는데 여자는 술 먹으면 안 되고, 남자는 담배 피워도 되는데 여자가 길에서 담배 피우면 귀싸대기 맞고, 이러한 것이 범죄 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게 남성의 세계, 남성 위주의 세계에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여성은 하나의 가구요, 물건이라고요. 자기 가문의, 그것도 남성 가문이에요. 남성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증여 물로 바꿔치기 하자. 여자의 견해는 물어보지도 않아요. 무조건 선도 안 보고 가야 돼요. 왜? 남성 위주의 가문을 위해서. 그게 바로 토테미즘이라고 해요. 어려운 말로. 토테미즘이 뭐냐 하면 항상 어느 종족에는 어떤 동물을 조상신으로 섬겨서 그렇게 대를 잇는 겁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수렵을 했거든요. 사냥을 했어요. 사냥을 할 때에는 일방적으로 창을 던져서 곰을 잡는 것이 아니고, 동물과 인간과 서로 상호간에 주고받고, 주고받고 해요. 현대 과학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해서 곰에게 잘하면 자진해서 몸을, 곰의 종족이니까, 곰의 종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곰은 사람한테 먹잇감이 되라고, 이렇게 보태주는 식으로 사냥감이 인간에게 찾아온다고 고대인들은,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생각한 거예요. 인디언들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하도 사냥이 힘들기 때문에 그래요.
하느님, 대한민국의 조상을 하느님이라고 하고, 그 하느님을 환인이라고 하고, 그 환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게 재벌3세에요. 이름이 환웅입니다. 환웅이 뭐냐, 이게 곰이에요. 그리고 환웅하고 결혼한 종족이 뭐냐 웅녀에요. 우루사하는 피로회복제. 웅녀. 그리고 여기는 환웅. 그 자손이 누구냐,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하는 대한민국. 거기서 나온 자손이 단군이 아닙니까? 이게 인간의 전통이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지금 그냥 짐승이라고 하면 됩니다. 짐승인데 자꾸 인간의 인권을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같잖은 거예요.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것은 죽든지, 살든지 그거는 관계없어요. 예수 그리스도하고 언약적으로 맺어지지 않으면 잠깐 살다가 나중에는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피조물을 그렇게 다루어요.
66일 동안 더럽다는 것은 지금 사람을 두고, 인권을 두고 다루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주도권을 쥐고 인간을 꼬셨던 그 경로를 주께서 따라가는 겁니다. 어떻게?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러니까 66일, 33일, 하혈을 했기 때문에 니가 더러워서 제물이 돼야 된다. 그 제물이 누구냐? 예수님만이 그 제물 자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가만히 있거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겁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옛날 고대사회 같으면 지금 여자들이 데모를 해도 보통으로 데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삽니다. 특히 제가 언급했잖아요. 자기를 모함한 남자하고 같이 산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못 헤어진다, 이거는 오히려 착한 쪽이 징벌 받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그 인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나겠어요? 밤에 잘 때 도끼로 치든지 목을 조르든지 저런 인간하고 내가 왜 사느냐가 되지,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오늘 본문 신명기 22장 19절은 매직으로 확 지우고 싶어요. 이거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이래도 저주, 저래도 저주, 재판에서 이겨놓고 형벌이 더 심해. 얼마나 불합리하게 보입니까? 옛날의 여자는요, 남자 없이는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아요.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습니다. 그리고 한 번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는 누가 건드리고 고함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 말은 여성이라는 그 기능 자체가 하나님이 안 도와주면, “철저하게 이 땅에서 제발 좀 남성들이라는 이리한테, 늑대한테 버림받아라. 이게 너희들에게 합당한 징벌이니라.” 이게 여자한테 주어진 운명입니다. “버림받아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 참 좋아진 거예요. 세상 참으로 좋아진 겁니다. 어디 딸내미한테 N분의 1을 줘요. 딸내미한테. 그 집 귀신인데, 그 집한테 받으라고 해요. 왜 이쪽 재산을 줘요. 아들한테만 N분의 1을 해야지, 여자한테 왜 주는데. 요새는 부모가 아프다고 하면 누나들이 벌써 시작됐어요. N분의 1을 계산해가지고. 사위들은 가만히 있어도 부인들이 알아서 다 해줍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일을 이렇게 처리하느냐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 그리고 희생, 구약 때 있는 모든 제물에 십자가의 피가 녹아져 있다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성경 보면서 “나는 뭐 해당사항이 없네? 나는 뭐 깨끗한데 뭐? 나는 처녀로 시집갔으니까 깨끗한데 뭐?”라고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 정당화, 이렇게 하니까 주님 십자가 피하고 무관한 사람이고 티가 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우리의 전부의 세상이 아닙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 안에 이미 진짜로 영원한 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환란, 곤고 받아도 마땅함. 주님께서도 고생했는데 우리가 감히 고생 안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됨. 이런 식으로 증거가 되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내가 이렇게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행복하다가 아니라, “주여! 오늘도 무슨 죄인의 기능을 하게 하시려고 무슨 사태를 나에게 일으키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결론은 이겁니다. 남자는 도둑놈이다. 남자는 도둑놈이고 어떻게 보면 여자는 참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데, 그 당하기만 하는 자리가 어떻게 보면 여자의 자리, 여자의 후손의 자리로 오실, 바로 주께서 그런 여성의 자리로 오시는 겁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22장 21절에 보면 창기 짓은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엮어짐, 창기를 돌려 쳐죽이라고 할 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행실이 안 좋다는 소리를 들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돌로 침을 당해도 마땅합니다.”라고 할 때, 그게 바로 돌아온 탕자요, 천국의 백성을 우리는 또 거기서 목격하게 됩니다.
창기다, 창기 아니다, 하는 그런 직업도, 처녀다, 처녀 아니다, 하는 것도 아무 의미 없어요. 누구나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 일이 없더라도 “주여, 우리는 돌로 침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어디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그걸 받아들일 때, 그게 우리가 성도라는 것이 또 다시 티가 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둑놈이면서 도둑놈이 아닌 척하고, 위선자이면서 아닌 척하는 이 사회가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는 같이 거기에 합세했습니다. 자기 잘난 체 했습니다. 그래놓고 십자가 안다고 했습니다. 주여, 이 모든 엉터리가 주께서 유발시킨 십자가로 인한 능력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