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질성 유지
2017년 1월 22일 본문 말씀: 신명기 22:9-12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22: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22:11)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22:12) 입는 겉 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씀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모든 변화에도 말씀과 연관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굳이 제시하시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호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 쪽에서 짐작합니다. 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이런 짐작이 오해임이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내민 관련성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상을 상대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외적인 인물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신 예비적인 ‘예외적인 조치’가 바로 이스라엘의 등장입니다.
이 등장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듣게 됩니다.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5:39의 말씀이 적절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즉 성경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이 성경의 내용이 자기와의 연관성을 지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피해가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각종 ‘차이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무수한 차이들과 직접 상대하지 않습니다. 차이와 차이들이 직접 결합하여 본래의 값어치를 여전히 살려내는 식으로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예수 믿는 자들 끼리 단체(교회)를 결성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라는 단체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관련성을 맺게 되면 교인 개개인의 가치가 교회 안에서 계속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과오가 바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에 우리 이스라엘을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생각을 그들은 포기할 생각을 먹지 않았습니다. 비록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다할지라도 그 고난 속에서 자기 자신들을 기어이 하나님께서 건져내어 주신다는 겁니다. 또한 이 관점에 입각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풀이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심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종교단체에서 설교하더라도 자기네 단체의 정통성과 영원성을 옹호하는 식으로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즉 “우리 단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이런 곳에 이단들이나 잡종들이 썪이면 멀쩡한 실한 열매까지 배려버립니다.”라고 말입니다.
벌써 이런 논리는 유대인들이 오랫 동안해 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요, 이는 예수님의 살해에 대해서 주도적인 건의를 해왔던 그 당시 유대 지도층의 의식도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유대인들의 의식을 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벌써 우리 주변에서 적-그리스도적인 기운들이 퍼져있고 그 사상 속에는 유대적 구원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수 있으면 바로 잡으면 원상회복이 가능하다”는 의식입니다. 즉 자신들의 행위한 것이 줄곧 노선으로 차곡차곡 이어졌기에 행여 그 노선에 문제가 있으면 되돌아봐서 그 그려진 노선에 수정을 가하면 잃었던 것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기도에 소홀해서 사업이 망했다면 다시 기도하게 되면 회복이 가능하고, 헌금이 아까와 해서 재산상 소실이 일어났다면 헌금을 마저 채우면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의 입장에서, 지나온 노선과 돌아갈 노선이 동일한 노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늘 ‘회복이 가능한 신앙생활’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에스라, 느헤미야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 하지 않고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여 혈통의 순수성을 훼손해서 70년 동안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혀 갔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십일조 하고 이방 여인과 이혼하고, 같은 이스라엘 민족에서 여인을 찾아 혼인하게 되면 약속의 땅으로 귀환이 가능하다는 희망적 의식으로 사람들은 에스라, 느헤미야를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중심성에 입각한 동일성’ 아니라 ‘자기 존재 중심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성경을 보는데서 예수님 중심성으로 이전하려면 필히 자신은 한낱 ‘숨겨진 동일성’에서 비롯된 한낱 ‘차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와 나귀를 같이 묶어서 나란히 밭 갈지 말라는 말씀은 차이적 존재들을 계속 살려두는 식으로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차이란 ‘나’를 기준점으로 삼고 ‘나랑 차이나네?’라는 식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당기는 밖에 안됩니다.
“너는 나와 다르기에 나에게 핍박받아도 싸다”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입을 막고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두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의 힘으로 자기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나 여지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함이란 한결같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한 책이건만 인간들은 ‘자기의 일관성 있는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책인양 여기면서 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관된 대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은 말씀 구조에 포위되었다”라는 점을 알리시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가두어주신 겁니다. 겉옷 내 귀에 술을 달아라 는 말씀은 민수기 15:38-40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는 취지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서 그 누구도 자기 긍정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말씀의 보호를 받고 사는 복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7강-신 22장 9-12절(동질성 유지)170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2장 9-12절입니다. 구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입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성경은 말씀이기 때문에, 천지창조 할 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 입각해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무수한 단어와 무수한 문장들을 이렇게 깔아놓고, 그 다음에 딱 한마디로 이야기해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그럼 그 중간에 뭐가 탈락되어야 하느냐 하면, “모든 성경은 나를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라는 이름의 피조물을 위해서 성경은 있다.”라는 그 대목은 탈락되어야 해요.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한 세계가 따로 있고, 또 우리가 고집부리는, 나를 유리하게 만드는 세계가 따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경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면 여기서 반드시, 필히 전쟁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쪽과, 아니야.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라는, 우리에게는 타인이죠.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그 싸움의 치열한 다툼이, 우리가 성도라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우리 내부에서 싸웁니다.
예수님을 표현하면서 거기에 적절한 표현이 있어요. 그게 뭐냐 예외자라는 단어입니다. 예외. 예외가 가능한 자. 우리가 우리끼리라고 하는 데서 하나 예외 되는 요소. 마치 미가야 선지자처럼. 가짜 선지자 사백 명이 전쟁하면 승리한다고 할 때, 미가야만이 패배한다고 유일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외자입니다.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사람은 이번 전쟁에서 진다고 할 때, 기드온은 혼자서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나가죠.
그래서 예외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쪽 구역 말고 다른 구역에 소속되어 있는, 신분이 다른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을 왜 줬는가? 율법을 준 이유를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예외자로 만들기 위해서 준 겁니다. 근데 구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보고 뭘 하라고 자꾸 부추기는 겁니다.
오전 설교에서 제가 동정하지 말라고 했죠. 동정하지 말라고 말씀 드린 것은 성경에 동정하라는 말이 있어요. 갇힌 자를 동정하라.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인데, 동정을 하게 되면 갑자기 예수님 중심의 말씀에서 갑자기 내 중심으로 돌아서게 되는 겁니다. ‘아, 내가 남까지 동정하는 괜찮은 존재구나. 그렇다면 동정 못하는, 나처럼 착한 일을 못하는 저 사람은 나하고 같이 합력하면 안 되지. 왜? 너하고 나하고는 다르니까.’ 이렇게 돼버려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방에게 갑질 하는 그 요소가 동정하는 순간에 갑자기 확하고 우리내부에서 올라오는데, 이건 우리가 어떻게 말릴 수가 없어요.
내 몸이라고 하지만, 내 속에서 확 올라오는, 내 위주로 살아가는 이 본성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걷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잠재되어 있는데, 그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밖에 없어요. 이 말씀을 줘야 우리가 모든 말씀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한다는 로마서 3장의 말씀이 실감나는 겁니다. 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함으로써 확하고 올라오는 것. 이거는 우리가 조절이 가능하지 않아요. 어쩔 수가 없어요.
뭐, 우리 교인들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안대기 때문에 그런 체험을 못하셨겠지만, 술을 이렇게 먹게 되면 확하고 올라와요.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목사님은 어떻게 아느냐? 물어보시면 옛날 예수 안 믿을 때, 그때 MT에 가서 먹은 기억이 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는 그때 확 올라온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남이 미워질 때, 또 누가 좋아질 때, 말릴 수 없는 속성이 위에서 확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말씀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어떻게 풀이를 하느냐, 바로 이스라엘의 실생활 모든 경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신명기 22장 9절에 보면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자, 이 말씀을 대표적인 불신자 유대인들이 해석을 했다고 칩시다. 항상 해석할 때 유대인들의 해석을 가미하는 것이 좋아요.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를 모르면 바로 일반 사람들이 이 본문 말씀을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가를 알면 돼요. 그럼 일반 사람을 어디서 찾는가, 일반 사람들을 찾는 것은 쉬워요. 왜? 교인들, 목사들이 이걸 어떻게 푸는가를 보면 그게 일반사람들이거든요. 너무 심한 비약을 했습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설명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야 되고, 십자가 사건을 거론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유대인들의 해석법,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반드시 성경에 섞어야 돼요. 지금 우리는, 저는 유대인들을 본 적이 있지만, 미국 가서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지나가면서 봤어요. 무슨 초막절이 있어가지고 복장이 난리도 아니에요. 그걸 봤지만, 유대인들을 직접 만나서 “당신의 사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본 적은 없어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마침 한국에 교회들이 있어가지고, 교회 신학자들과 신학 교수들이 있고, 목사들이 있거든요. 신학 교수들, 목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말씀을 순종합시다.” 이거에요. “말씀에 순종합시다. 성령을 줬기 때문에, 성령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합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순종하자고 하는 순간에 뭐가 탈락이 되느냐 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죄인이었습니다.”라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겁니다. 선교단체에서 그런 것을 굉장히 많이 느끼죠. 선교단체에서. 본인이 하는 일이 결코 이제부터는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부터 죄가 아니라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은 십자가를 경유한다는, 십자가는 이미 알아서 탈락시킨 겁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이것을 유대인들이 말하는, 흔히 탈무드라고 하는데, 크게 넓혀서 탈무드인데, 뭐 자세히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탈무드라고 봅시다. 이 탈무드에서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여기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 이스라엘은 특수한 민족이고 다른 이방 민족은 나쁜 민족이기 때문에 절대로 혼인을 다른 민족과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쪽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런 해석의 근거는 벌써 느헤미야에 나와요.
에스라, 느헤미야에 보면, 성경에 그런 책이 있어요. 유명하지 않지만. 거기에 보게 되면 왜 우리 이스라엘이 멸망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안 했기 때문이다. 어떤, 어떤 대목에서 순종 안 했는가? 바로 십일조 안 했고, 그들이 이방여자와 혼인해서 그들의 종교성이 이방종교에 물들어서 그렇다. 그럼 구원받는 해결책, 복 받는 해결책, 그리고 다시 본토로 돌아가는 해결책은 이미 나왔어요. 뭔가 지적을 했으면 두 번 다시 그 일을 안 하면 되는 겁니다. 얼마나 수월 합니까?
교회 다녀서 열심히 사는데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서 안 된다. 가만히 원인을 따져보니까 교회에 자주 빠졌고, 십일조 좀 소홀히 했고, 이번에 전도한다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고, 성가대 봉사하라고 하는데 내뺐고,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하거든요. 그것 때문에 사업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럼 사업을 원상복귀 하는 방법은 굉장히 쉬워요. 십일조 다시 하면 되고, 예배 일절 안 빠지면 되고, 전도하면 되고, 그 다음에 봉사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을 멀리서 찾지 말라는 제 취지를 알겠죠?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을, 내가 한 잘못을 그 다음부터는 안 하면 되는 거죠. 기도 열심히 안 했으면 기도 하면 되고, 성경 안 봤으면 성경 보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완벽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사도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죄였다는 겁니다. 그게 왜 죄냐 하면은, 나에게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죄가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미 용서가 끝났는데, 이미 죄 용서가 끝났는데 새삼스럽게 죄 용서 받는 그 논리적 관계를 형성하는 거예요. 논리적 관계를. 마치 컴퓨터에 명령어를 입력하게 되면 명령어대로, 순서대로 움직이는 것을 어려운 말로 알고리즘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거 하게 되면 저거 하고 저거 하게 되면 요거 하고, 지난 죄는 회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뼈 속까지 철두철미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그 사도바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방인 중의 사도라고 했거든요. 그 말은 바로 사도바울이 그 말을 함으로써 이방인 속에 있는 유대인의 대표성을 다시 발췌하는 그러한 효과를 줍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지 말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랍비들이, 율법선생들이 이걸 이야기해요. 지금도 15퍼센트의 철저한 정통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에서 월급을 줘요. 아무 일도 안하고 성경 공부만 해요. 마치 공무원 같아요. 그들이 하는 일은 공무 집행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국회에 압력을 넣어서, 안식일쯤 되게 되면 그들이 완장 차고 밖에 나와 가게 돌아다니면서, 문 여는 사람들 전부 다 지적해서 문 열지 말라고 하고, 법적으로 안식일에 문 다 닫게 만듭니다.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우리 보기에는 율법에 순종하기 때문에 한다고 하죠. 아닙니다.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세계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이 자의식이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흠집나지 않기 위해서, 기어이 우리는 정당하고, 의롭다는 것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율법주의라고 욕하죠. 근데 교회치고 율법주의가 아닌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 그들이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자기가 세운 교회, 역사와 전통인 교회라는 조직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법을 동원 안 하는 동네가 없습니다. 법을 다 동원해요. 어떤 분을 만났는데 자기는 어릴 때부터 철저한 고신 측에 있었다고 합니다. 고신 측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는 일요일에 공무원 시험도 못 치게 만들었어요.
그쪽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가락 모임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자기 아이를 교회가 가까워서 거기에 보냈답니다. 보냈는데, 한 번은 날이 너무 추워서 안 보냈대요. 안 보내니까 그쪽 교사가 그분한테 찾아왔더랍니다. 엄마한테 와서 “왜 교회에 안 보내십니까?” “우리 애가 추워서 알아서 안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안 보내면 안 돼요. 반드시 보내야 돼요.” 교사가 그렇게 이야기해서 물어봤어요. “왜, 애를 반드시 교회에 보내야 됩니까?” “안 보내면 보고서를 써서 당회장한테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교회를 안 나가요. 복음을 알고 교회를 안 나가는데, 교회가 회사라는 느낌이 딱 들었답니다. 보고를 누구한테 보고합니까?
그러니까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교회를 유지하고 팽창시키는데 온 사력과 질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담당하는 전도사나 부목사나 계약직이죠. 그 사람들의 보고서는 당회장목사한테 좋게 보여서 다음 계약을 연장하는데 효과 있기 때문에 그거만 신경 쓰는 겁니다. 교회 없이 구원받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더구나 교회가 주님을 못 박게 한다는 생각은 그들 마음에는 추호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 교회 없어도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하려면 본인이 나는 목사질을 그만해도 된다는 마음이 들 때만, “지금 내가 목사 안 해도 좋아요. 구원 받으면 됐지, 목사 꼭 해야 됩니까?” 그런 마음이 없는 이상은 그런 말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목회하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이게. 십자가마을에 옛날에 주고받는 그 대목을 보니까, 창원에 있는 어느 교회 집사가 저한테 무척이나 달려들었어요.
“이 근호 목사님은 교회 목사가 목회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야 되겠습니까?” 지난 것인데, 지금은 누가 막아놨는지 다 막아놔서 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것을 보니까 있어요. 목회는 예수님이 친히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가 택한 자인지, 누가 구원자인지 예수님만 알기 때문에. 그런데 그 집사는 주장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창원에서 우리교회만큼 진짜 복음적인 교회가 없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 교회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그게 이단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지 말라는 이 말씀은 실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키시는 거예요. 뜻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포도원에 두 종자를 안 섞어요. 섞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랍비가 해석을 해줘요. 랍비는 자기가 자칭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로 자청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나쁜 민족과 피를 섞지 말라는 그런 뜻입니다. 느헤미야 보세요. 피 섞어가지고 우리가 망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구약의 신명기 이 말씀대로 해서 우리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은 죽든 말든,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고 합시다.” 이게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의 성경해석법입니다.
그 해석법을 동원한 이유가 오늘날 교회가 꼭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 교회는 신천지 오면 안 됩니다. 그럼 구천지가 오면? 그래서 해석을 하게 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이게 뭐냐 멀쩡한 복음 아는 신자까지 신천지에 들어가서 다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 가운데 우리 교회에 와서야 내가 구원받는다고 여기면 그 목사님의 설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진짜 우리교회 목사님 영빨이 한 영빨한다.’ 이래 되는 거예요.
또 이것을 확대시켜봅시다. 니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이것은 바로 기독교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에 불교적인 요소가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거나 이거나 아까 그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기독교가 뭐고, 교회가 뭡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말짱 다 똑같아요. 다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시작은 그렇게 시작해놓고 나중에 창대하기는커녕, 시작을 그렇게 해놓고 우리끼리는 거듭난 백성이니까 우리끼리는 지켜야 된다. 이게 지방교회가 아니면, 그러면 뭐 워치만 니 입니까? 뭐 그런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동질성, 모든 것을 설명하려면 새로운 동질성이,
이스라엘 일반 생업 속에 새로운 동질성이 들어와서 그것을 통해서 뽑아내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말로 표현하려면 상당히 어렵죠. 본래 하나님께서 갖고 있는 동질성은 감추어져 있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을 이스라엘 실생활 속에서 지시를 하는 겁니다. 지시를 하게 되면 거기서, 차이 나는 것에서 차이남이 없이 뽑아내는 동질성은 계속해서 이 말씀이 진행되는 절차 가운데서,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 역사 가운데서 새롭게 뽑혀져 나오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0절에 봅시다.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며” 옛날 프로그램에 보면 변 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명랑운동회라는 것이 있어요. 그 게임에 보면 연예인들이 발목 서로 묶고 뛰는 게임이 있어요. 소와 나귀를 겨리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소와 나귀가 다른데 같이 발목 묶고 같이 경작하지 마라. 이런 내용입니다. 랍비가 등장하지 않으면 무식한 일반 사람들은 소와 나귀를 겨리 안 했다고, “하나님 저 복 주시겠죠?” 라고, 율법이 시킨 대로 했다고, 복만 받을 일만 남았다고 이렇게 무식하게 하는 것을 랍비가 나서서 “이거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쓸데없는 잡종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고 랍비 값을 하려고 해석을 내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11절,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혼방이죠. 혼방. 입으면 안 된다. 자, 그럼 동질성은 어디에 있는가? 12절에 나옵니다. “입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이래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설명한 것이 민수기 15장 38절에서 41절에 보면 그걸 설명했어요. 38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절,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절,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포위되었다는 겁니다. 어디에? 말씀의 네 모퉁이에 완전히 포위된 거예요. 그럼 말씀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면 우리 가운데서는 너와 나의 어떤 차이점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근데 실제로 따져보면 차이가 나요.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잘 생긴 사람이 있고 못 생긴 사람이 있고 실력 좋은 사람, 없는 사람, 차이가 있어요. 그러나 그 차이에서 차이나지 않음을 뽑아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이런 각오를 이야기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결혼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겁니까?” “우리는 신문지 위에서도 같이 살 겁니다.” 신문지 위에서도. 감동, 감동이에요. 신문지가 요만하거든요. “엉덩이만 같이 붙어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더는 욕심 없습니다.” 이게 뭐냐, 차이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공통점이 발췌되어 나오는 거예요. 글쎄, 그 생각이 언제까지 가겠어요?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습니다. 물론 나중에 신문지가 아파트 한 백 평짜리로 변하죠.
이미 우리에게 신문지가 주어졌습니다. 네 모퉁이가 말씀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말씀이라는 모퉁이에서는 어떤 차이점도 없어야 돼요. 근데 아까 랍비 해석이 들어가 버리면 유대인은 어떻고, 이방민족은 어떻고, 기독교는 어떻고, 불교는 어떻고, 차이가 나버려요. 근데 차이는, 동일성은 숨어있다고 했죠. 언제까지 숨어있어요. 신약 때까지 숨어있어요. 신약 때 오니까 예수님 빼고 모조리 다 주님과 차이가 나요. 예수님 빼놓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아버지 이름으로? 목사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든 구원이 안 돼요. 오직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구원 됩니다.
차이 속에다 동질성을 깔아두는 거예요. 소와 나귀는 같이 갈지 말라. 그리고 양털과 베실은 섞어 짜지 말라. 그리고 포도원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이 의미의 해석은 우리가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장차 신약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기다리고, 소급해서 이 해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신명기는 율법 아니고 복음이 되는 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이기 때문에.
어떻게 증거 하느냐? 우리가 이 말씀을 예수님을 빼놓고, 불신자로 치고, 유대인으로 치고, 뭐 치고 할 것도 없이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렇게 치고 이 본문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 우리가 포도농사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않았으니까 다 열매 잘 맺게 하옵소서.” 그러한 기대와 보상을 은근히 노리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이번에 제가 기도했는데 기도에 응답이 있게 하옵시고, 이번에 헌금을 했으니까 더 이상 재정적인 파탄이 일어나지 않게 하옵시고, 정의롭게 행동했을 때 뭔가 대가가 있음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남한테 알리게 하옵소서.”
인간은 반드시 이러한 아직도 자기중심으로, 남과 차이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독보적인 권한을 가지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 속했는가, 어느 책에 보니까 참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라는 것은 캐피탈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설명했어요. 캐피탈capital 앞에 영어 단어가 cap, 다시 말해서 모자에요. 캡이라는 뜻은 최고라는 뜻이에요.
이미 우리는 최고를 맛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최고 밑에 줄줄이 거미줄로 연결되어 있는, 상층, 중간층, 하층, 이래 되어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24시간 만나는 정보의 성깔이에요. 모든 정보는 순서 정하기입니다. 누가 부자 됐는가, 누가 가난한가, 우리는 캡의, 최고의 질서에 온 몸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런 동질성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 대화가 되는 거예요. “요새 한 달에 얼마 법니까?” 전부 대화가 되고,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이 사실을 느낍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캐피탈, 돈 벌기 위해서 성경 보는 것이 아닌지를. 내가 속해 있는 내 가족과 내 민족과 국가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 않는지를. 어떤 분은 통일 되라고 이렇게 하는데, 그런 게 있어요.
북한 신자들이 핍박받는 모습이 담겨 있는 그런 동영상들이 유튜브에 많이 있습니다. 제가 다 들어보거든요.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는지. 예수 믿는다고 얼마나 고난을 받았는지. 제 속으로 딱 한 마디 합니다. ‘오지마라. 차라리.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 그렇게 생각해요. ‘차라리 그러면 탈북을 해서 탈북한 이 모습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가는 이 모습이 얼마나 죄악된 모습인가를 알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리에 관계없이 캐피탈, 하나의 자본주의 안에서는 똑같은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예수 중심에 입각해서만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주님에 의해서 차이가 나야지, 내가 알아서 구원받을 생각은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성경 보는 의도와 목적, 뭔가 주 앞에 기대하는 성질을 다시 한 번 분석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될 텐데, 자꾸만 내 중심입니다. 이런 중심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늘 말씀으로 부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또 다시 주님과의 동질성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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