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호
2017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신명기 22: 6-8
(22:6)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22: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를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쉴새 없이 동이 일어납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쉴새없이 변동을 겪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규정한 자아상에 매진합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죽자 사자 자기가 붙듭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보고서도, 내가 나를 붙드는 이상으로 나를 붙들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이득을 챙기려고 합니다. 이득이 안 되는 신앙생활은 그만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이익을 주려고 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치 칠면조 요리를 접시와 그 뚜껑에 숨겨져서 식탁 테이블로 이동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 안에는 정말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 곧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지키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키고 싶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랑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오해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하나님이 사랑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결코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이 실어 나르는 그 안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이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마 3:17)
이 사실을 신명기 당시의 이스라엘이 알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면서 그 율법 안에 담겨 있는 칠면조 같은 사랑을 이스라엘 알지 못하고 덥썩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율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춰 보이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새 둥지에 어미새와 새끼 새가 같이 있을 경우에 새끼 새만 잡아먹을 때, 자신은 하나님의 법을 준수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목수가 집을 지으면서 난간을 만들 때, 마치 자신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앞으로 하나님이 주신 행운의 후보감이라도 될 것 같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진정 율법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을 놓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의 해석은 인간의 주체성을 경유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근원이 죄라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자기 딴에 몇 개는 위반하지 않고 지켰다고 자부심을 그 자부심을 향하여 연이어 계속 해서 다른 율법들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동일한 행위가 어떤 구절에서는 순종한 바가 되고 어떤 구절로 봐서는 불순종이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은 채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은 채 기어이 순종한 적이 있는 존재로 스스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율법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의해서 그 시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로 항상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성공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작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 홀로 성취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율법 해석과 인간들이 해석하는 율법 해석이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가 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도대체 나는 동일한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식으로 왜곡된 해석을 자꾸만 끄집어 내어놓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이 새를 보게 되면 먹잇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동물을 잡아 먹어서는 아니된다 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식용성 동물은 다 먹어도 된다가 아닙니다.
왜 이런 금지 조항이 설정되어 있는 걸까요? 그것은 율법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식욕 때문에 부지 중에 다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미새와 새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어미 새와 새끼 모두를 취하여 버리면 모두 식용의 대상으로만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기에 하나님의 재제가 들어갑니다. 사랑의 관계의 흔적마저 인간이 다 떨어가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보호하려는 것은 그 관계성입니다. 어미새를 남기므로서 얼마 전까지 새끼 새가 그 둥지 안에 있었다는 그 사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새끼 새는 인간들의 식용으로 사라졌음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남겨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는 흔적이 됨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야 하는 겁니다. 새로 집을 짓거나 지붕을 만들 때에도 난간을 만드는 것도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실시해 나가시는 율법의 구체성 속에서 인간의 실천력은 계속 배제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사랑 실천은 자신에 대한 정당함을 계속 생산해내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대 사회에서 아동들을 데리고 산에 소풍을 가면서 만약에 나무에 새 둥지를 보았다면 새끼 새만 취하는 것으로 율법의 순종을 운운할 것이 뻔하고 새로운 지붕을 만들면서 난간을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 율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가질 게 뻔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율법의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성취성은 인간이 전적으로 죄인일 뿐임을 명백하게 드러나는 현상을 동반해서 유발시키게 됩니다. 아무리 난간을 만들고, 아무리 새끼 새만 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에 위배된 죄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언약궤’의 활약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참으로 보호하려는 ‘거룩한 피’입니다. 난간을 제대로 설치 안해서 사람이 떨어져 이 거룩한 땅에 피를 흘러지는 것은 인간 신체 내부에 담겨야 될 오염된 본질이 지상까지 유출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지상에 피를 흘릴 때는 필히 거룩한 짐승의 피가 대신 담당해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훼손이 없는 겁니다.
즉 인간의 피를 거룩한 짐승의 피로 대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사전에 방비한다는 차원에서 난간을 만들라 는 것이 아니라, 난간의 존재 자체가 인간은 얼마든지 새로운 죄를 짓게 되는 인물이라는 표방하는 예가 된다는 겁니다. 난간은 사후(事後)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조심스럽게 산들 그것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6강-신 22장 6-8절(하나님의 보호)170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2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 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네가 새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실생활에서 위험스러운 요소를 없애고, 그게 8절 이야기고, 7절 이야기는 동물한테도 자비를 베풀어라, 이런 것처럼 느껴지죠. 이런 것처럼. 신명기의 대상이 누구냐,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일상의, 평소의 생활을 하고 있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너희들은 나와 함께 잘 먹고 잘 살라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과 다른 요소가 니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꿈틀거리는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이 딱 들어오게 되면,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다른 나라에게는 일체 없는 것이 새롭게 움트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동원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딱 주게 되게 되면, 율법의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평소에 자비를 베풀 때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풀지 말고 식물한테나 동물한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는구나. 그래, 우리들의 착한 성품이 어디 가겠어?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지. 이런 쪽으로 쭉 나가는 거예요.
어미하고 새끼하고 있으면 마치 우리 가정의 엄마하고 자식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둘 다 가져가면 안 되지. 최순실하고 정유라하고 같이 가두면 안 된다니까.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나오는데. 엄마하고 딸하고 어떻게 같이 가두냐 말이에요. 하나는 빼줘야지. 이게 인간의 기본적인 자비심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 본문 22장 7절이 최순실 사건하고 딱 맞아 떨어지네요. 그리고 난간 만들어라.왜? 사람들은 주의를 못하니까, 떨어지면 피 흘리고, 피 흘리면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사람이 난데없이 죽어버리면 그것은 주님의 백성의 피를 본다고 해서 난간 만들어 조심하라. 끝. 해석 끝났네요.
그럼 다른 민족들이 짐승을 지켜주는 것이나, 집 만들 때 난간 만드는 것이나 이스라엘과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이런 해석들이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법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려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속해있는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교회를 지켜준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교회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지키려고 하는 것은 주입된 말씀 안에 담겨있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 때, 칠면조 요리해서 칠면조 요리를 담는 그릇이 밑은 쟁반처럼 생겼고 돔처럼 뚜껑이 있죠. 좀 고급스럽고 품격 있는 영국의 대저택에서 요리가 나올 때는, 우리처럼 부대찌개 나오듯이 오는 것이 아니고, 품격 있게 뚜껑을 딱 덮죠. 물론 뚜껑을 딱 열었을 때 미국산 달걀이 하나 들어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뚜껑 안에 칠면조 요리가 들어 있잖아요. 딱 열어서 칼로 썰어서 먹는데, 그 칠면조가 뚜껑 안에 들어있죠. 그 뚜껑과 밑에 쟁반을 율법으로 봅시다. 율법 안에 뭔가 담겨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 방금 제가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했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 사랑이라니까요. 아, 사랑하는 우리말이지? 아니요.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을 지키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사랑 자체, 사랑을 지켜주는 겁니다. 그게 신약에 오면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지키는 겁니다.
해석이 자꾸 이스라엘 사람이 떨어져서 안 죽도록 한다든지, 이스라엘 나라 안에 어떤 새가 있는데 새를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정작 지키고자 하는 것, 그 사랑을 지키고자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래도 이해가 안 되니까 쉬운 예를 듭시다. 우리교회 몇 년 동안 다녔습니다. 정이 들었죠. 이제 시험도 치고 다음 달에 군에 간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눈에서 멀어지면 정도 멀어질까봐 걱정되는 거예요. 그동안 다녔는데 어쩔 수 없이 떠나야 되는 거예요. 우리교회가 그리운 거예요. 자기는 전주에 살고 있고. 뭐 자기 이득을 위해서 경남에다 해놓고, 뭐 배울 것이 많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젊은 사람 마음속에 끈끈한 정이 있는 거예요. 이 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억의 보호라고 하는 겁니다. 기억의 보호. 과거에 있던 그 기억이 나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보호해주는 거예요. 이걸 아침에 제가 이야기했던 동질성이라는 겁니다. 동질성. 매일 난도질하라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입니다. 그날 걱정은 그날 하라.
원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마디가 있어요. 계절, 또는 절기의 그 절節자가 뭐냐, 끊어진 마디라는 뜻이에요. 늘 이게 끊어지게 되어 있는데, 123456되고, 그 다음에 7되고, 123456 새로 시작하든요. 마디가 있는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늘 쉬는 날도 없이 늘 가요. 심지어 여행 갈 때도 여행스케줄대로, 단위별로, 몇 분에서 몇 분에 도착하고...이거는 뭐 시간에 치어죽어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시간에 남들은 공부해서 자기보다 앞서면 어떻게 될까하고서. 휴가 실컷 보내고 오니까 책상 빼버리고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육아휴직하고 왔는데 벌써 다른 분이 와서 원래 하던 일 못하고 다른 부서로 옮겨 맞지도 않는 일 하다가 자진해서 나가게 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경쟁사회에서 개인적인 사정을 다 봐줄 수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말로 끝나잖아요. 쉴 틈이 없고 쉬지를 못해요. 끊임없이 달려야 해요. 끊어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낮이 되고 밤이 되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이게 뭐냐 하면 자꾸 동질성 가지고 하나님 앞에 윽박지르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동질성 있는 나를 보호해주소서.” 다른 교회 같으면, 솔다씨 떠나면 찬송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근데 다음 주일에 오면 어떻게 해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고 또 노래 부릅니까?
하나님이 지켜주는 것이 나의 미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말로 나의 아름다운 정을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해서 섭섭한 느낌이 더 드네요. 어떤 인간적인 정, 추억, 과거, 미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아주 냉정하고 냉혹합니다. 반대로 나갑니다. 너의 동일성, 너의 스케줄이 주님이 진짜 지키고자 하는 칠면조, 그 사랑을 가로막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너가 십자가 앞에서 설쳐대기 때문에.
우리 서로 사랑하고~~하면 사랑이고 뭐고 주님께서는 비켜라! 이런 것 하는 것이 아니다. 치워라! 이 말이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고 살려주고, 죽이고 살려주는 겁니다. 어디서 보호하기 위해서? 마귀적인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사랑에서. 주님이 주신, 우리에게 탑재시킨 그 사랑에서, 나의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걸 치우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걸 매일 시간으로, 낮밤의 단위로 끊어버리기 때문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전화를 할 때는 이름을 안 밝혀요. 10미터 앞에서 신자였는데 3미터 앞에서는 신자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이름 묻기가 참 곤란해요. 내용이 뭐냐 하면 여러 가지 교회 옮기는 문제로 고민을 해요. 그래서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참새도 키우시고 들풀도 키우듯이 주께서 키워주십니다. 단 우리 인간은 그냥 내가 여기 보호받는다, 사랑받는다, 그걸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 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나라의 가치와 고귀함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주객이 바뀌면 안 돼요. 내가 중요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는 내가 필요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의 이런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까마귀나 뭐 그 새 둥지를 조심스러워했겠습니까? 랍비가 가다가 새 둥지 있으면 “스톱! 신명기 22장 7절 실습할 타이밍입니다. 자, 실습하겠습니다. 누가 나와서 실습하시겠습니까? 옳지. 어미는 잡지 말고. 새끼만. 옳지. 하나님이여, 드디어 신명기 22장 7절 말씀을 이루었습니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냐 말이죠. 자기 딴에는 지켰다고.
또 어떤 목수가 집을 짓는데 난간을 만들면, 저거는 신명기 22장 8절을 지켰으니까, “아이고, 복 받겠네.”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하려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마음에 할례를 행할 수 있습니까? 꼭 지가 안 되는 것은 빼놓고, 지가 얼추 할 수 있다는 것은 해놓고, “하나님 복 주세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도대체 나는 동일한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식으로 왜곡된 해석을 자꾸만 끄집어 내어놓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이 새를 보게 되면 먹잇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동물을 잡아먹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식용성 동물은 다 먹어도 된다가 아닙니다.
왜 이런 금지 조항이 설정되어 있는 걸까요? 그것은 율법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식욕 때문에 부지중에 다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미 새와 새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어미 새와 새끼 모두를 취하여 버리면 모두 식용의 대상으로만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기에 하나님의 재제가 들어갑니다. 사랑의 관계의 흔적마저 인간이 다 떨어가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보호하려는 것은 그 관계성입니다. 어미 새를 남김으로서 얼마 전까지 새끼 새가 그 둥지 안에 있었다는 그 사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새끼 새는 인간들의 식용으로 사라졌음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남겨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는 흔적이 됨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야 하는 겁니다. 새로 집을 짓거나 지붕을 만들 때에도 난간을 만드는 것도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실시해 나가시는 율법의 구체성 속에서 인간의 실천력은 계속 배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설명할 것은 정작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뭐냐, 제가 신약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 복음 지킨다고 열 두 제자가 고생을 얼마나 했습니까? 사도바울도 고생 많이 했거든요. 뭐 우리 같으면 사도바울이 고생해도 싸요. 하나님을 한두 명 지켰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사도들이나 이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본인의 가치와 본인의 아름다운 추억,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추억, 솔다씨 우리교회에서 칭찬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키 되지, 성격되지, 칭찬 얼마나 받았습니까? 공부되지, 머리되지, 십자가마을에서 칭찬 받았거든요. 하루 단위로 다음부터 눈에 안 보이잖아요? 뭐 누가 있었어? 이래 돼요. 지킬 것은 우리가 교인들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늘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그게 뭐였는가? 십자가 복음을 내일 눈 뜨면 내일 또 주실 것이고, 모레에도 모레 주실 것이고, 그걸 저는 무한리필이라고 했습니다. 무한리필. 계속 잔 비우면 채워주시고, 잔 비우면 채워주시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십자가 복음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죠. 어떤 사람 만나게 했다가 헤어지게 되고, 헤어졌다가, 경남 간다고 했다가 경북 대구 집에 또 올 수도 있고.
늘 만나고 헤어짐이 전부 다 주의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서 어딜 가든지 항상 주께서 주의 힘으로 가게 하시고, 오게 하시고, 되게 하시고, 다 하시는 거예요. 그건 신약이고. 그럼 구약은 뭐냐, 구약에서 신약까지, 뭔가 오늘 본문 22장 6절에서 신약까지 가면, 그냥 맹탕으로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거기에 신약에 있는 그 십자가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간 과정을 거치게 될 건데, 그 중간과정을 거치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 뭐냐, 뭘 보호하려고 하느냐, 민수기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궤라는 것을 보호하려는 것이 나옵니다. 언약궤.
민수기 앞에 보면 3장, 4장, 5장, 계속 이래 나와요. 출애굽기에서에서 언약궤를 만들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열 두 지파로 나누어져서, 동서남북 네 개의 지파로 포진해있습니다. 그럼 그 가운데에 뭐가 있느냐, 언약궤가 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정작 하나님이 보호하려는 것을, 너희들이 숫자가 줄어드는 한 있더라도, 전쟁에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언약궤만큼은 못 내놓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여호수아서에 보면 블레셋 전쟁에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빼앗겼어도 언약궤 혼자 독주해서 블레셋 다 쳐부수고 암소에 이끌려서, 그걸 자율주행차라고 하죠. 자율주행해서 이스라엘 벧세메스까지 왔잖아요. 그걸 보고서 주께서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뭔지 우리가 봐야 됩니다. 신약에서는 정말 복음을 위해서는 주께서 우리보고 뭘 시켜도 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비록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남한테 욕 얻어먹는 일이 있더라도 복음이 까라면 까야 되는 거예요. 보자기에서 뭐가 내려올 때, “못 먹습니다.”라고 하지 마세요. 니 잘하라고 한 게 아니에요. 니 잘하라고. 정말 앞으로 우리 솔다씨가 취직할 때 불교병원에 갈 수 있겠죠. 가더라도 괜찮아요. 주께서 가라고 했으니까. 이거 말 잘못 하면 안 된다. 뭐 갈 수도 있죠. 돈 더 준다는데. 빨리 집 한 칸 마련해서 장가가야지.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 뭘 하겠다가 아니라 그 있는 자리가 복음을 위한 자리잖아요. 복음을 위해서 이거 할까요? 묻지도 말아요. 너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는 그 자리가 누굴 위한 걱정이냐? 너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있는 자리냐?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명예를 위해서 있는 자리냐? 아니면 복음을 위한 자리인가? 한 번 보라 이 말이죠.
복음을 위한 자리라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 앞에 오케이가 되는 겁니다. 참 인사이동 참 잘하시고 조치 참 잘하신 거예요. 그게 돌아서서 아는 믿음이에요. 그게. 다 돌아보면 주께서 주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범사에 감사케 하는 겁니다. 그 나라의 의.
그런데 언약궤를 지키는데, 언약궤를 덜렁 그냥 빈터에다가 던지는 것이 아니고, 동쪽에서는 잇사갈, 유다, 스불론, 북쪽에서는 아셀, 단, 납달리, 서쪽에서는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남쪽에서는 갓, 르우벤, 시므온, 이렇게 포진해놓고, 그 안에서는 레위지파들이 있어요. 므라리, 게르손, 고핫, 레위지파들이 있어가지고 성막 근처에 못 오게 합니다. 같은 패가 아니에요. 레위지파하고 레위지파 외에 지파하고 같은 편이 아니에요. 막 먹는 사이가 아닙니다.
니가 같은 지파라고 해서 성막에 가까이 오면 니는 죽어요. 저주받아요. 그러니까 레위지파하고 그쪽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저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주가. 저주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니는 죽어도 이거는, 언약궤는 다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서 망해도 좋으니까, 십자가 복음만큼은 망하는 가운데, 죽는 가운데서도 아름답게 꽃봉오리가 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아주 냉혹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쓸데없이 인생에 불만 갖거나 불평 갖지 마세요. 정말 소중한 것이 있는데, 다른데다가 눈을 돌리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토해내는 겁니다. 거지나사로가 천국 간 것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뭔지 모르고, 주께서 뭘 지키려고 하는지를 몰라서 그래요. 주님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름다움 추억을 지키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난 뒤에 그게 이동해버리면, 이제는 유다지파가 앞장을 섭니다. 잇사갈, 유다, 스불론이 앞서가고, 그 뒤쪽에 레위지파, 게르손, 므라리 자손이 천막과 휘장과 골조를 가지고 압박해서 양쪽으로 이동시키고, 그 다음에 시므온, 르우벤, 갓, 남쪽에 있는 지파가 이동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고핫이라는 레위지파가 성물기구를 가지고 가고, 그 다음에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가 뒤따르고, 그 다음에 아셀, 단, 납달리 지파가 마지막으로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처럼 이렇게 이동합니다.
이렇게 이동하면서 지파와 지파 사이에 하나님의 천막과 휘장과 골조와 귀한 성물을 같이 거기다가 품어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품어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정말 하나님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22장 8절에 보면 “너가 새집을, new house죠. 만들 때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이게 뭐냐 하면, 이런 게 어려운데요, 인간의 피가 바깥에 흘려질 때는 반드시 절차가 있어야 돼요. 인간의 피는 더러운 피기 때문에 그냥 흘러가면 안 되고, 더러운 피에 대해서 새 피로 갈아치워야 이 땅에 의미 있게 흘려질 수가 있습니다. 그 새 피가 뭐냐 하면 이 언약궤 중심으로 벌어지는 제사제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제물의 피로 이게 대속, 대신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하나님이 거주한다는 약속의 땅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처단됩니다.
제가 이야기하면 뭐 그렇게 꼼꼼하고, 뭐 그렇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왜 그리 많습니까? 하는데, 그 점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딱 이겁니다. 더러운 것은 나는 못 산다. 나는 더러운 것은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직업을 묻지 않고, 뭐 키나 성격 보지 않습니다. 직장 같은 것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하게 깨끗하지 아니하면 나는 더러워서 함께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럴 위인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완벽한 분이 없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뭐냐, 아들의 나라에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오죠.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그럼 창조 때 두 분밖에 없었는데, 천사하고, 그럼 거기에 끼어들, 형상대로 만든 새로운 피조물들이 있을 수 있느냐? 그것은 예수님 책임 하에, 예수님이 대신해서, 예수님처럼 깨끗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해서 이스라엘부터 신약까지 쭉 이어지는 겁니다. 딱 하나에요. 더러운 것은 못 봐준다. 그게 구약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겁니다. 깨끗함, 오염제거.
오염제거를 하려면 뭐 세제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율법과 하나님이 드리는 제사에서만 그게 합당한 피가 나와요. 우리가 갖다 바친 피는 안 받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위해서 바치는 그 피, 이삭을 드린 그 피처럼, 약속된 자의 피만을 주께서 인정하는 피기 때문에, 그 피와 율법 사이에서 나오는, 그 제사제도에서 나온 피를 하나님께서 머리위에 뿌림으로써, 우리는 피가 있은 즉 죄 사함이 되는 겁니다.
피를 뿌리게 되면 그 피는 이제부터 우리한테 작용을 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 입장에서 피를 뿌리기 때문에, 매일같이 피가 뿌려지게 되면 우리는 매일같이 피가 흘려져야 될 정도의 죄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생산이에요. 죄의 생산, 복음의 생산, 새로운 자아의 생산, 새로운 주체의 생산. 정작 하나님이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드님을 보호하고, 아들의 나라를 보호하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것은, 이미 그 원칙은 창세전에 정해놨어요.
우리보고 “너 어떻게 해서 천당 갈래?” 라고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미 두 분끼리 확정되었어요. 그걸 언약이라고 하는데, 약속해서 이미 정해놓고, 그 정해놓은 것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맛보기로 보여주셨고, 신약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으로 오셨고.
따라서 그 피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왔다면, 우리는 나의 인생, 나의 아름다운 동질성, 찬란한 나의 아름다운 미래, 과거, 자꾸 이거 하지 마시고, 그걸 완전히 돔배기처럼, 상어가 아니라 경상도 말로 샹해돔배기, 샹해돔배기처럼 단위적으로 끊어버려요. 어제일은 끝났다. 아름다움도 끝났고. 이제는 오늘치 새로운 주의 사명과 주께서 배정해주는 너의 할당이 또 있느니라. 있다 이 말이죠.
뭐 수요일에 못 와도 할 수 없습니다. 할당된 것이 있으니까. 오고가는 것은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해야 되니까. 피곤해서 못 오는데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피곤케 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것도 복음을 위해서 교회 못 나오게 하신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피곤해도, 그래도 나오려고 했는데, 마치 복음을 위해서 못 나오게 하니까, “푹 쉬고 다음에 시간 날 때 오너라.” 모든 게 감사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기도할 때가 되면 되겠죠. 뭐. 부탁은 합니다마는, 그 사람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에 부탁을.. 아,(☓)이거라고요. 예. 잘 알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복음을 위해서 합한 그러한 모습으로, 주께서 지금도 오늘 하루치, 내일은 몰라요. 내일은 모르고 오늘 하루치는 이렇게 인도해주시니 이것이 주의 보호 아래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인생 꾸려간다고 얼마나 노고가 심한지, 아름다운 것은 놓치기 싫고, 자존심 상한 것은 버리고 싶고, 인생이 내 맘대로 사는 것처럼 발작을 해보고 발악을 해보지만, 말씀 보니까 주님이 사랑 자체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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