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강-신 22장 5절(남녀 구분)1701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2장 5절입니다. 구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자니라”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평소에 사람들의 글처럼 이렇게 보게 되면,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입지 않고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지 않으면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습니까? 라는 이야기가 딱 붙어 나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이거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쉬워요? 여자가 남자 옷 안 입고 남자가 여자 옷 안 입으면 천국 간다. 뭐 십자가도 필요 없어요. 옷만 제대로 챙겨 입어도 구원받는다면 이게 굉장히 편리하고 좋은 일처럼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22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해놓고, 고린도전서 1장이나 신약에 보면, 내가 이 세상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하고 만이 언약을 맺었으니까, 내 피와 내 살로만 새 언약을 세우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그 전에 모든 인간과 계약을 시도했지만 그것이 전부 다 실패로 끝났다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옷 안 입고 남자가 여자 옷 안 입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이런 말씀을 주실 때에 구원되지도 못하고 천국가지도 못할 말을 뭣 때문에 여자는 남자 옷을 입지 말라고 거론하고 남자는 여자 옷을 입지 말라고 거론했느냐? 구원되지도 않을 것을 왜 했느냐?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실체가 이 말씀에 대해서 걸려드는 겁니다. 만약에 홍수가 났을 때에 그 탁류에 온갖 쓰레기가 내려가죠. 작대기를 가지고 뭐 하나 건지려고 하면 거기에 나뭇가지도 걸리고 집기도 걸리고 하잖아요. 보고 난 뒤에는 도로 탁류에 집어던져버리면 역시 쓰레기로 흘러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신명기 22장 5절가지고 탁류에 흘러가고 있는 세상에다가 막대기하나 툭 던지게 되면, 그 막대기에 부딪힌 어떤 인간이 “나는 남자지만 여자 옷 안 입고 뭐 이래 살겠습니다. 구원해주세요.” 하면 “쓰레기네!”하고 툭 던져버리죠. 하나님께서는 세상 자체를 책망하시는 거예요. 우리 개인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니가 세상의 전체 분위기에서 못 벗어나니까. 일괄해서 한 통으로 다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지켰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지켰다고 해봐야 또 딴 말씀 줘버리면 본색이 또 드러나요. 전에는 옷 입는 것은 쉬웠는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왜 어렵냐고 이래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을 지켜도 그 중에 하나를 어기면 저주받는 거예요. 이것은 니가 구원될 수 있다가 아니라 반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니가 왜 모르느냐 하는 겁니다.
그때는 여자가 남자 옷 안 입고, 남자가 여자 옷 안 입고, 하면 되는 줄 알았죠? 그러니까 니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어떤 힘에 물려있다는 사실을 니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더 깊이 들어가 봐야 하는 겁니다. 먼저 따져야 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 두 개의 성으로 따로 구분했는가, 그 문제를 생각해봐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남자 여자 없이 그냥 단일 종種으로 여자면 여자, 남자면 남자, 단 한 가지 종種으로 인간 만들고 다 이루었다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남자는 남자로 만들고 여자는 여자로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정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인간으로 나갈 때, 인간은 숫자 1, 하나로 갈 수 없고 항상 어디에 부딪히느냐 하면 2에 부딪혀요. 2에 딱 부딪힙니다. 2로 딱 끝나요. 2를 넘어서서 1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2부터 그 다음 하나님까지는 1로 쭉 이어지거든요. 1로 이어지는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남자 아니면 여자라고 하는 것은, 만약에 남자 할래? 여자 할래? 라고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성性없이 태어났다가 한 2년 뒤에, 한 1년 6개월 뒤에, 또는 돌 지나고 난 뒤에 “너 남자 할래? 여자 할래? 니가 한 번 골라봐라.” 이렇게 해버리면 “가만히 있어 보자. 여자는 이쁘고 남자는 힘세니까, 나 힘센 것 할래. 나 남자 할래.” 이렇게 선택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남자를 선택한 1이 돼버려요. 내가 선택한 성을 내가 가진 것이 돼버리면, 그 남자라고 하는 것은 짝이 없이 그냥 남자로 결정돼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우리한테 주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를 어떤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데 뭐냐 하면 남자는 항상 여자마저 정복하지 못하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고 여자는 남자마저 내 영역에 감히 침범하는 미진한, 남아있는 영역이 따로 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숫자 2라는 그 속에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을 다 아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태생 자체가 남자 아니면 여자기 때문에 상대방의 성에 대해서는 다 알지를 못해요. 다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진리에 대해서 몽땅 다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전부를 아는 것하고 단편적으로 아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단편적으로 알아서는 진리를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은 넘보지 말아야 돼요. 일부가 전체를 안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비논리적이잖아요. 일부가 전체를 안다는 것. 예를 들어서 산에 등산하는 엄홍길이라는 사람은, 8000M이상의 산이 16개라고 하는데 그걸 다 왔다 갔다 했다고 합니다. 그럼 산에 대해서 다 아느냐? 우리 동네에 엄홍길이 안 왔거든요.
산에 가는 사람은 참 희한해요. 거기 왜 올라가느냐 하는 겁니다. 또 내려올 걸.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자랑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보고 싶으면 비행기 타고 보든지, 드론을 띄워서 보든지. 그렇게 에베레스트 16좌에 다 올라갔다. 그런데 그게 누구냐? 나다. 숫자처럼 1이 되는 겁니다. 숫자 1이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나고자 계속해서 애쓰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이 뭐냐, 딜레마에서 절대존재, 유일한 단독존재가 되는 게, 인간의 구원의 심보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잖아요. 불교에서. 최고가 되는 것. 그렇게 최고가 돼버리면 주위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만 내 마음에 자족하는 대상이 돼버려요. 뭐, 사랑한다고 해봐도 ‘너는 나 때문에 있는 거야. 내 이익에 필요 없으면 벌써 버렸어.’ 이래 된다고요. 결국은 나중에 몇 년 지나고 나면 본색 드러내죠. ‘나라는 하나를 위해서 너라는 보조 존재가 있었던 거야.’ 그럼 결혼하기 전에 진작 이야기하지? 결혼할 때 말하면 결혼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때는 입을 꾹 다물고 있죠. 전부 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태어나서 남자 할래? 여자 할래? 이래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둘 중의 하나로 필히 가게 되어 있어요. 둘 중의 하나로. 여자 아니면 남자, 남자 아니면 여자. 그렇게 돼버리면 우리는 누구의 지적을 받느냐 하면, 자기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이야기해도 여자의 지적을 받게 되어 있어요. 여자 쪽의. 내가 미처 접수하지 못한, 알지 못하는 쪽에서 나한테 지적을 해버리면 우리는 그것에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감당하지 못하면 어쨌든 간에 내가 미처 점령하지 못한 것과 합일이 될 때, 하나가 되면서 그 둘 사이에 우리는 모든 진리에 가로막히는 피조물의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럼 왜 이렇게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로 구분했는가? 이게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정반대가. 남자 비슷한 것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여자로 하나님께서 두 성을 나누는 것은 정반대의 대치되는, 다툼이 되는, 충돌이 되는, 그런 관계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선악과라는 말 자체를 우리는 쉽게 이야기하는데, 선악과, 선과 악을 하나로 묶어서 그렇게 이름을 부르거든요. 선악과. 근데 선악과 내용을 한번 풀이해보라고 해요. 풀이 해보면 선과 악을 함께 안다는 것이, 이게 성립이 안 돼요. 선과 악을 함께 아는 것이 선이 돼버리면 그 순간 악이 날아가 버려요. 제가 지금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선과 악이 하나가 안 되고 딜레마가 돼버린다고요. 아까 쉬는 시간에 질문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선을 원하지만 악이 나를 사로잡아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악마저 정복하지? 이게 인간은 선악이라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에 악을 정복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정복하고 싶어요. 정복해버리면 그게 선악이 아니고 선이 돼버려요. 악을 이겼으니까, 악의 지점까지 다 점령했으니까, 우리는 선한 사람이 돼버립니다. 선한 사람이 돼버리면, 어떤 원칙이 깨어져버리면 우리는 선악과에서 벗어난 사람이 돼버려요.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꾸준히 선악에 갇혀있어야 돼요. 선악에. 선이 나오는 그 순간에 악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선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발견하지 못한 악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어떤 분의 기도대로, 선한 선생이여! 자기는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버림으로써 내가 악이 된다는 겁니다. 악이 되는데, 그 악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나쁜 짓을 하는 악이 아니고 선악 그 자체를 해결하지 못하고 갇혀있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이 딜레마가 뭐냐 하면 바로 구약이거든요. 그럼 이게 어디서 해결되느냐, 신약에서 해결됩니다. 선악에 대해서 묻지 않아요. 왜냐하면 신약은 천국 갈 사람이 나중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천국에 온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는데, 그 사람의 특징이 뭐냐 선악과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는 두 개의 나무였는데, 천국에는 하나밖에 없어요. 생명나무 밖에 없어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이미 선악과의 딜레마에서 벗어난 거예요. 어떻게 벗어났는가? 죽어서 벗어났죠. 선악체제의 딜레마에서 죽어서 벗어나죠. 죽지 아니하면 못 벗어나요. 그러면 그동안 이 선악체계에 가두어놓기 위해서 한 조치는 뭐냐, 악마를 보내는 겁니다. 악마가 선악의 딜레마인데, 악마는 선과 악 사이를, 그걸 하나로 통일시키면서 슬그머니 빠져버려요. 이걸 사라지는 매개자라 합니다. 용어가 어렵죠. 사라지는 매개.
뭔가 선과 악이 안 맞는데도 맞다고 치고 중간에 빠져버립니다. 빠져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는 선한데 악이 약간 있다. 따라서 선으로 악을 자꾸 자꾸 조금씩, 조금씩 점령해나가면 언젠가는 선악의 굴레에서,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악마를 보내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요. 그게 욥의 세 친구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선하다는 거예요.
그 선함의 딜레마를 욥이 고난 받기 전에는 몰랐어요. 고난 받고 난 뒤에 자기가 알고 있는 벗어남 가지고 아무리 해석을 하려고 해도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마치 오늘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이유를 모르듯이. 그 좋은 말씀 가지고 착한 일 많이 했으면 그걸로 됐지. 왜 십자가에 죽기는 왜 죽느냐 말이죠. 선한 선생님이여! 하늘나라로 곱게 가소서. 근데 십자가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식으로 간다는 것은....., 열 두 제자가 딴 건 다 이해해도 한 가지는 이해 못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에 왜 죽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안 죽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교회 수 십 년 다녀도 그 십자가를 몰라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그렇게 목사가 되고 신학 교수가 돼도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죽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사랑인지는 알겠는데, 왜 죽어서 사랑하느냐? 말로 사랑한다고 해도 되는데? 우리 인간들 관계에서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면 되잖아요. 사랑한다. 해놓고 헉! 하고 죽는 것, 이거는 이상하잖아요? 그것도 니 죄 때문에. 그 정도로 뭔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요소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을 뭔가 보안하기 위해서 어떤 노래가사인데, 이제는 드디어 팝송까지 진출했어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의 가사를 보면, Take the ribbon from your hair Shake it loose and let it fall Layin' soft up on my skin 당신의 리본, 머리끈을 풀어 느슨하게 늘어뜨리세요.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그리고 그 중간에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I don't care who's right or wrong 지금 우리가 당신과 이 밤을 즐기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I don't care 나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을 번역하면 이 밤을 나에게 할애해달라는 거예요. 이 시간을 할애해 달라.
이 가사를 언급한 이유는 그 다음에 악마가 나와요. Let the devil take tomorrow 우리가 이런 짓을 하고 내일 악마한테 사로잡힌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그걸 허락하세요. 왜? Lord to night I need a friend 주께서 이 날을 우리에게 필요한 날로 보기 때문에.
지금 이상하죠. 남녀가 정욕을 품었는데 갑자기 악마devil가 나오고, 주님Lord이 나오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옳고 그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너무나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옳고 그름을 잊어버립시다. 놔버립시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신 밤으로 생각합시다. 이 밤을 나에게 할애해주세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라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스펠송을 불렀어요. Why me Lord라는 노래, 하필이면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라는 노래입니다.
이런 가사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왜 가스펠 송하고 차이가 나느냐 하면, 가스펠 송은 일단 우리는 성령 받았다 치고, 성령 받은 사람끼리 성경 구절을 동원해가지고 성경구절을 조립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찬양이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이런 팝송은 실제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그것과 악마와 주님을 연결시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 “죽어도 좋습니다.” 하는 경우에.
주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하면, “주님 저 착하죠? 저 선하죠?” 이걸 요청하게 되면 이건 아직 안 죽은 거예요. 덜 죽은 거예요. 정말 주님이 왔을 때에, 이사야 6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할 때에, 이 백성 중에 누가 갈꼬? 제가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좋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다루시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들은 자기를 정상으로 보기 때문에 선과 악에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취하려고 해요. 이게 우리가 매일같이 겪는 일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악을 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선을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는데, 그게 사실은 마귀가 쳐놓은 그 딜레마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선한 일을 하게 되면 하고 난 뒤가 문제에요. 하고 난 뒤에가. 하고 난 뒤에 흐뭇한 마음이 들어요. 오늘도 내가 예상 밖의 착한 일을 했으니, 아마 요번 주 수련회는 은혜의 수련회가 될 가망성이 많아.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은혜 받을 거야. 또는 내가 어떤 중대한 일을 하게 되면 성사가 잘 될 거야. 왜?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악마가 노렸던 겁니다. 악마가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한 거예요.
남녀 사이를 구분했다. 이거는 통합이 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선악과가 깨어지고 난 뒤에 악마가 개입하면서 남녀 사이는 이게 통합이 됩니다. 그 통합되는 모양새를 가지고 주님은 저주라고 했어요. 여자가 임신할 때 고통이 있고 남자한테 종속되는 것이,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남자한테 종속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구분 지었던 1로 가지 못하고 2에서 머물러야 되는, 구분지은 그물망이, 남녀 사이에 그냥 그물로 덮어씌우는 겁니다.
그러면 신명기 22장 5절에 여자가 남자 옷을 입지 말고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지 말라는 말은 이미 니가 속한 이 세상은 악마가 쳐놓은 선악과의 그물망에 옴팍 니가 덮어씌워져 있다. 따라서 니가 남녀의 그 정반대되는, 적대적인 그 관계를 니는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유지해야 돼요. 옷 하나 입고, 안 입고, 하는 것이 뭐 중요하냐고 하지만, 사실은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옷을 입음으로써, 이 옷을 입고 이렇게 하는 것조차도 우리가 2라는 그 딜레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 성신을 받은, 또는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도들이 신약에 와서 “옷 똑바로 입어! 청바지 입으면 안 돼! 바지 입은 여자들 다 나가세요. 지옥 갑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까요? 신약은 바로 그 딜레마에서, 남자 여자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어도 상관없이, 이야기 잘 들어야 돼요. 남자가 여자 옷을 안 입고 남자 옷만 입어도 지옥가고, 남자가 여자 옷 입어도 지옥 갑니다. 여자가 여자 옷만 고집해도 지옥가고 여자가 남자 옷 입어도 지옥 갑니다.
신약에서는 아예 선악과 자체에 대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묻지를 않아요.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뭘 해도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뭘 해도. 어떤 음식을 먹어도. 게먹든지, 멍게 먹든지, 뭘 먹어도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악과의 굴레는 우리하고 상대해서 우리의 구원을 챙겨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말고 이미 예수님하고, 생명 되신 예수님하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입장에서는 신명기를 다시 보게 됩니다. “아, 우리는 이중성 속에 놓여있었구나!”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죠. 오늘은 사정상 빨리 끝내야 되니까. 그럼 목사님, 지금 우리가 여자가 남자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뭘 입어도 괜찮다는 이 말입니까? 이렇게 하는데, 그게 괜찮을 것 같으면 신명기 22장 5절을 지워버려야 해요. 이것은 상관없고, 이럴 것 같으면 구약 전체를 칼로 다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남자가 여자 옷을 입을 때, 우리는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안 되고, 옷을 입으면 돼요. 옷을. 하나의 꼼수가 됩니다마는.
이게 남자 옷 따로 여자 옷 따로는 그 당시, 신명기 때 이스라엘의 문제에요. 지금은 여자 옷 따로 남자 옷 따로 없습니다. 남자 옷, 여자 옷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놓았더라도 성도는 구애받지 못해요. 치수에 맞는 적합한 옷, 그것도 39,900원 하는 것, 그렇게 사가지고, 자기의 맞춤옷을 입으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중요해요. 감사하면 돼요. 감사하면. 무슨 옷이든지 주께서 주신 옷이라고 여기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옷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옷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옷을 입는다는 말은 이 땅에서 살면서 역시 죄인으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리그 그렇게 산다는 것을, 역시 이중성에서 벗어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에는 마귀가 이중성을 매개했지만 지금은 우리 주님의 새 언약의 살과 피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셨사오니, 범사에 감사하면서 어떤 옷을 입든지 간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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