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강-신 22장 1-4절(형제 만들기)170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2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내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
이웃과 이웃에서 형제로 어떻게 달라지는가, 대한 내용입니다. 이웃은 그냥 이웃이지만 형제는 자기와 연장선상에 있는 같은 사람이라고, 같은 자리에 함께 있다고 여기는 그런 형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인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버지거든요. 이스라엘은 아들이 되고. 아버지를 경유해서 같은 이스라엘, 같은 아버지의 의해서 혜택 받은 사람으로 간주할 때 형제가 되는 겁니다.
형제란 말은 반드시 중간에 아버지라는 것을 필수로 해서, 반드시 그걸 필수적인 경로를 거쳐야 형제가 되는 겁니다. 생판 남보고 형제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게 형제가 되려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자리를 공유하고 있어야 됩니다.
근데 그 자리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를 나만 독차지 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저 사람도 똑같은 입장에서 그걸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과 맺어진 관계가, 이게 확장되어서 내가 저 사람하고 관계가 맺어졌다. 그래서 그걸 형제라고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이론상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론상.
아버지 쪽에서 마련한, 아버지가 제시한 그 자리를 나만 독차지한 것이 아니고 같이 공유한다는 입장에서 형제가 된다는 거예요. 형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아버지를 무조건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형제라고 하면서도 내 것을 네게 준다고 하면 그건 형제라고 할 수 없죠. 아버지 것을 같이 누린다고 이래야 형제인데, “네가 불쌍하니까 내가 많이 봐줘가지고 니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하면 그거는 종속되는 겁니다. 그거는 형제가 아니고 갑질 하는 거예요.
부모들이 이상하게 맏아들에게 재산을 준다 이 말이죠. 돌아가시고 난 뒤에 문제가 커지죠. “n분의 1로 나누자.” 그럴 때 형이 “동생아! 니가 동생이니까 내 것 줄게.” 하면 그 듣는 동생 기분 굉장히 나빠요. “그게 형 것이 아니잖아? 원래 아버지 거잖아?” 왜, 형이 그렇게 나한테 준다고 하느냐 말이죠. 아버지가 마련한 것에서 원래 니 것이니까 니 것 준다고 이야기해야죠. 같은 결과라도 이야기가 이렇게 돼야 돼요.
근데 이 말씀을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줬다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신약의 이스라엘이 누구냐, 교회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면 되느냐,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데, 근데 이게 그대로 적용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오늘 읽었던 이 본문 말씀의 정답을 알고 그대로 적용해야 됩니다. 정답을 알고.
“내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하는 것이 이것에 대한, 이렇게 행한 것의 최종적인 것, 그걸 완성이라 합니다. 22장 1절부터 4절까지 말씀하는 이것을 우리를 대표해서 대신 완전하게 다 이루신 분이 계셔요. 이 1절에서 4절을.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정답이에요. 이미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 답을 알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일은 간단합니다. 이 정도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못하는 쪽으로 편성이 되고, 우리가 못하는 것을 홀로 다 이루었다는 쪽에 예수님만 계시는가? 맨 내가 한 것은 나에게 정답이 되지 못하는가? 쉽게 말해서 내가 행한 것으로 내가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 또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내가 왜 의인이 되지 못하는가? 율법의 내용은 뻔히 알겠다, 이런 것은 지킬 수 있겠다, 양 잃으면 주인 찾아주는 것이 당연한 건데, 그 정도 했으면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고 해주세요. 이렇게 우리는 언제든지 요구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 말이죠. 그건 이 율법의 완성이 아니에요. 완성 자는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십자가 밑에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의 카톡을 보니까 참 좋은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만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두 강도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한쪽 사람은 자기 존재를 묵시적으로 봐가지고, 예수님이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묵시적 존재, 또 한 사람은 묵시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각해가지고, “예수 당신이 나한테 해주면 내가 구원받아. 그러면 당신을 주로 믿어줄게.” 이래 나와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탈락이고,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가고. 묵시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가 강도된 이 자리마저도 하나님께서 예상하고 반드시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친히 주께서 묵시적으로 준비한,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마련해준 인생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묵시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참 멋진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라고 이근호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한 말은 내가 생각이 안 나요. 년 초부터 빙빙 돌려서 자기 자랑처럼 됐는데, 이건 자랑이 아니고 고백입니다. 자랑이 아니고 고백이고 자백입니다. 읽어보니까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말에 기뻤던 이유는 바로 개혁주의 신학을 역사적으로 보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하게 되면 그 결과로 당신은 구원받는다.” 이 자체가 우리가 납득이 되는 것만, 우리가 설득되게 해주기만 하면 우리보고 예수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게. 이래 나오잖아요. 이것은 지금 답을 모르는 거예요.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을 찾아가는 식입니다.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백날 교회 나와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미 답은 확고히 묵시적으로 주어졌고, 우리 남은 인생은 그걸 역사적으로 풀 때, 왜 예수님이 답이 되는지를 슬슬 알아가는 거예요. 아,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것, 그 말이 그 말이구나.
구원받기 위해서 새삼 보탤 것이 없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완성이 미완성 속에 벌써 답으로써 섞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완성이 미완성 속에 섞여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완성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출발점이 달라서 그래요. 출발점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가 노리는 것이 따로 있어요. 자기가 노리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들이대니까, 자기 문제하고 답하고 매치가 안 되니까, 에이, 이거는 필요 없는 거라고 해서 갖다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버린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예요. 이 딴 것 왜 줬느냐? 하고 갖다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모여서 형제를 이루고, 그 하나님의 천국을 이루고,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받은 강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천국이냐, 자기 인생을 내가 잘못해서 강도짓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필요에 따라서 나는 강도짓 해야 되기에 강도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원인을 자기 행위에 두지 아니하고, 원인 제공자를 주님에게 돌려버려요. 이게 과연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수 있겠어요? 못 믿습니다.
사람의 육이 영이 돼야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돼야 하느냐 하면, 바위보고 심리치료를 해가지고, 바위가 스스로 바위라고 깨닫는 그 정도가 돼야 이게 되는데, 아니 바위보고 심리치료해가지고 바위가 입을 열어 “나는 바위입니다.” 하는 이런 일이 있겠어요? 임파서블impossible이죠. 불가능하죠. 그 정도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에요. 소나 개나 교회에 와서 다 세례 받으면 영적 사람인줄 알고, 성령세례 함부로 언급하면 다 성령 받은 사람인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돼야 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믿기지 않아야 돼요. 본인이 본인을.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내가 예수 안 믿어도 잘나가는 입장인데 내가 뭐가 모자라서? 내가 왜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도 누가 탓할 사람이 없는데, 왜? 나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이 되었지? 이거 참 희한한 일이네? 그 희한한 일이 어느 정도냐 하면 바위가 입을 열어서 “나는 바위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본문을 주실 때에 먼저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집니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졌는가, 아무 말씀이나 보면 돼요. 4절에 봅시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 이거 뭐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나귀나 소가 넘어진 것을 보면 못 본 체하지 않고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동정심이라는 것이 있어가지고, 그래서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은 성선설, 처음부터 인간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렇게 하거든요. 맹자 같은 사람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근데 문제는 이 형제에요. 형제. 형제의 나귀나 소가 넘어지거든, 형제입니다. 그럼 형제는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지금 신명기 22장이잖아요. 그럼 출애굽기에 형제가 나온 것을 보면 어린양의 피로써 문설주에 바른 그 사람에 한해서만 형제가 돼요. 홍해 가운데를 건너온 그 사람들이 형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실험해봅시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왔잖아요. 잠시 사고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방금 건너왔어요. 건너 온 곳을 뒤돌아서 다시 저쪽으로 건너가보세요. 건너갈 수 있는지? 건너갈 수 있다면 그것은 형제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하게 만들었어야 주님이 원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원인이 된 것을 도로 내가 원인이라고 우겨버리면 그거는 형제라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신명기 22장 이 말씀을 지킨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단 이스라엘이 된 이상 본인이 이 말씀을 지킨 원인자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오늘 분위기가 왜 이런지 모르겠네요. 못 알아듣는 눈치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이야기에요. 내가 만약 우리 친척의 소가 넘어졌는데 일으켜 줬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하는 이 행동이 내가 이 말씀을 지켰다, 안 지켰다 하는 기준점으로 내가 등장해버려요.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가 돼요. “나처럼 해봐라! 목사처럼 믿으면 신자다.”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교주가 따로 없어요. 그게 교주 아닙니까? “제가 신자된 것은.... 전혀 못 합니다.” 이렇게 돼야 주의 증인이 되잖아요? “여러분 빡세게 기도하시면 저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증인이 아니고 악마의 종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종교의 전염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과 행함의 이어짐이 바로 전염이에요. 조류독감 같은 겁니다. 새 하나 걸리면 다 걸리는 거예요. “니도 됐는데 나도 되겠지.” 이게 종교거든요. 근데 복음은 내가 바위가 됐는데, 바위가 말하는 사람 된 것은, 이거는 바위로서는 사전에 예상도 못한 일이에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럼 저쪽에서 “니가 됐는데 내가 안 될 리가 있나?” “글쎄,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주의 은혜로 내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니가 나처럼 똑같이 흉내 낸다 할지라도 된다는 보장이 없어.” 이렇게 돼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참, 전도 꼬라지 잘한다. 그래가지고 전도가 되냐고 하는데, 저는 그동안 전도가 아니라 전도가 아니고 전염이었다. 악질의 전염, 조류독감의 전염이었어요. 전도가 아니고 전염이었습니다. 전염된 것을 흉내를 낸 것을 전도라고 하면 안 돼요.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을 구원시키고 안 시키고, 지옥가게 하고 천당 가게 하는 그 판정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판정관이 될 수 없어요.
날마다 로또죠. 날마다 행운입니다. 십년간 다녔는데 그 다음날에 안 나올 수가 있어요. 십년 다녔는데? 그 추진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마세요. 십년동안 다니게 하다가 그 다음에 안 다니게 하신 거예요. 교회 못 나오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그 사람이 안 나온 것을 그 사람한테 물으면 안 됩니다. 벌써 제가 몇 번째 이야기하는데 사람이 자진해서 지옥갈 수 없어요. 못가고, 어떤 친절한 안내자가 있어서, 날마다 친절하게 이끌어줘야 지옥 가는 겁니다. “이렇게 오세요. 이렇게 오세요.” 자꾸 가서 점점 더 십자가하고는 멀어지고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자기 노력에 의해서 인생을 따로 꾸릴 때, 자꾸 굿을 할 때, 그게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부자가 지옥 간 이유가 그거 아닙니까? 끝까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원인자고 내가 생각한 그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 부자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마다 꽉꽉 차 있어요. 교회마다. 그들은 매일같이 총동원전도주일, 다른 말로 하면 총동원전염주일. 안 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이 말씀을 할 수가, 지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형제라는 것은 주님이 만들어야 형제지, 내가 만든 것은 형제가 아닙니다. 자칫하면 형제 만들어서 보증서가지고 집 날아갈 수가 없어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죠.
이 이야기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요, 마태복음 12장 5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있는데 바깥에 모친과 동생들이 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잘난 체 하면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바깥에 와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으로 듣는 모친, 듣는 동생 기분 나쁘게 하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어머님이 앞에 계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냐?”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불효막심한! 천하에 불효막심한! 그러고도 니가 인간이냐?”하고 욕을 얻어먹어도 당연한. 49절,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절,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내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에요.
예수님의 아버지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를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절대로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아버지를 바로 다이렉트로 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믿게 되어 있어요. 지금 십자가 마을에서 책을 하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회복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책 홍보하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복음의 회복이라는 책이 1994년에 나온 책인데, 그 책을 정 목사님이 수정해서 원고가 다 됐어요.
내용을 대충 훑어보니까 딱 하나의 이야기에요. 인간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만이 아버지가 보낸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맞고 거기다가 플러스해서,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예수님 믿으라고 하는 그게 아니고, 이게 반대가 되는 내용이 바로 복음의 회복이라는 책 내용이에요. 근데 하나 더 얹는 것,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다가 예수님 하나 더 얹는 것, 그거는 굉장히 쉬워요.
바위가 인간되는 그 정도가 아니고,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바위가 인간되는 것 말고, 바위가 심리치료해서 인간되는 것 말고, 그냥 보태면 되니까. 하나님인데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것이 있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었다. 그럼 아들 하나 추가해서 옆에 보태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뭐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이유가 없어요. 왜? 그 당시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었으니까. 이 논리를 따지면 굉장히 간단한 논리에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람이, 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한테 죽었으면, 여호와 하나님 믿고 거기다가 아들 있었다는 내용까지 하나 보태서 믿으면 되는데,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여호와를 믿던 사람들이에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무슨 짓 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잖아요. 왜 하나님은 꼭 그런 식으로 사도를 사도되게 하시는 겁니까? 이게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내 의지와 결심으로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안 되기 때문에.
형제 만들기는, 처음에 보면 우양이 길을 잃어버렸다, 주인 돌려주면 되죠. 형제가 옷을 잃어버렸다, 옷 찾아주죠.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저는 이런 일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막살라고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돈 찾아주는 것도 막사는 거예요. 물론 액수가 아주 적어서, 못 찾아준 경우가 있어서 가슴 아팠던 적도 있어요. 얼마 전에 아침에 운동 갔다가 돈 이만 오천 원 주웠는데 아직까지 주인 못 찾아줬어요. 액수 많으면 찾아주죠. 얼마든지 맹자의 성선설에 의해서 된다 이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일으켜 함으로써 그 사람이 내가 만든 형제가 아니고, 내가 손 내민 형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신,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잃어버린 소를 찾듯이, 잃어버린 옷을 찾듯이, 하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형제 되게 했다는 것을 나한테 경험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뿐만 아니고 나도 마찬가지로 주님 앞에 탕자라는 사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나 나나 똑같이 주님께서 건져줬기 때문에 건짐 받았다는 공통의 필드field, 장場을 마련하는 거예요. 이야기가 이렇게 어려워요. 이야기가 길고 어렵다고요.
교회 나오니까 형제다? 사기당할 일이 있습니까? 사기를 누구한테 당하는데요? 김홍전 목사라고 유명한 목사가 있어요. 죽고 난 뒤에 김홍전 목사의 그 사상과 취지를 살리겠다고, 서울의 그 교회가, 개혁교회라고 하거든요.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정통을 이어받아서 그대로 하겠다. 한국교회 썩었다. 진짜 한국교회는 개혁교회를 해야 돼. 기존의 개혁주의는 다 엉터리야. 우리 김홍전 박사, 그 목사님의 설교대로 해야 돼.” 그래서 서울에 열여덟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 열여덟 개의 교회가 똘똘 뭉쳐가지고, 마치 성민처럼, 완벽한 성화, 진짜 청교도 정신으로 하자고 했던 그 열여덟 개의 교회가 지금 전부 다 어렵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180억 다단계 사기에 다 말려들었어요. 형제여! 하면서 다 사기를 친 겁니다.
연우교회라고 하는 것은 무슨 교회냐 하면 어떤 사람이 한 300명 모았는데, 나이가 많아서 미국으로 쉬러 가고, 아들한테 그 교회를 물려주면서 계약을 맺었어요. “아버지인 나한테 100억 목돈으로 주고 월 천오백만원 내라.” 왜? 니는 공짜로 교인 300명 얻어걸렸으니까. 그래가지고 뭐 들은 것이 있어서 아들이 계약서 썼어요. 그 계약서 써가지고 법적으로 다하고 싸인 다 했습니다. 아버지한테 100억 주고 월 1500백 주겠다고. 그런데 그 교회가 아버지 가고 난 뒤에 교인수가 점점 더 줄거든요.
아들은 좀 양심적이에요. 신앙적이 아니고 양심적이에요. 양심은 바위에요. 인간이 아닙니다. 백날 해봐야 그건 인간이 안 되고 그건 바위에요. 그냥 육이에요. 그러나 양심은 고와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천오백 못줍니다. 좀 깎아주세요.” 그런데 나중에 그것도 못 줘요. 점점 더 교인수가 줄어들어서 이제는 운영도 안 될 판이에요. 아버지는 “빌딩주고 교인 300명 줬는데 십일조 계산해봐라!” 뭐 그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아들이 도저히 안 되니 계약 바꾸자고 하니까 안 된다고, 니가 공짜로 먹으려고 하냐고 해서 아들이 사채 쓰다가 자살해서 죽었어요. 연우교회에요. 이름도 안 잊어버려요. 왜냐하면 김연우 라는 가수가 있으니까. 죽고 난 뒤에 아버지가 그제야 회개했다는 거예요. 제가 그 소리 듣고, 아이고! 그거는 회개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 죽었는데 회개하지 않는 인간이 지 아들이 죽었다고 회개해요? 정말 회개한다면, “예수님 죽으심을 짐작 못해서 그동안 예수님의 죽으심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이래해야 되죠. 반드시 회개는 예수님 쪽으로 가야 돼요. 내 귀한 아들 죽었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지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놓고 진짜 회개 했는가 하고 그 다음에 보니까, 그래놓고도 그 아들이 죽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교회를 맡겼다는 거예요. 그건 회개 아닙니다.
진짜 회개라면 본인이 그 교회를 맡아서, “이거 교회 아닙니다. 제가 장사한 겁니다.” 이렇게 해야 되죠. 계속 그 교회 맡겨서 자기는 커미션 챙겨먹으려고, 이래서 노후대책 챙겨먹으려고 한다면 그거는 처음부터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나 아까 한 그런 이야기가 다 어디서부터 나왔느냐 하면 예수 믿으니까 형제라 하는데 그게 전부 다......, 뭐 어느 교회 가면 갑자기 “서로 사랑합시다. 형제를 사랑합시다.” 해가지고 서로 껴안고 하는데, 저는 옆에 사람들 돌아보면서 “사기꾼입니다.” 하고 악수하시기 바랍니다.
믿어도 어떻게 인간을 믿어요? 예수 믿는다고 믿지 마세요. 주께서 매일같이 예수 믿게 하지 않으면 예수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열심히 해서 내가 예수 믿었습니다.” 하는 것은 백퍼센트 사기입니다. “안 믿으려고 했는데 원인이 주님이 되어서 믿었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것도 그 다음부터 내가 알아서 믿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매일같이 믿게 하셔서 믿습니다. 저는 늘 흥부가 아니고 놀부입니다.” 그런 고백이 나와야 돼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만, 오랜 만에 동창생 만났는데 자기보다 늙어보세요. 얼마나 고소한지 몰라요. 세상에!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습니다. “니! 와 그리 늙었노?” 위로인지, 고소해서 참을 수 없는 고백인지 모르지만, “니! 와 그리 늙었노?” “니도 만만치 않거든?” 이래가지고. 인간은 남이 못되면, 남의 교회 망하면, 아까 두 개의 예를 이야기했죠. 그렇게 망하면 고소해요. 우리가 강도입니다. 강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강도에요. 계속 강도되게 하시는 거예요.
형제 같은 소리하네? 나만 잘되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고, 나만 못되면 모든 인간이 죽일 인간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만 지킬 수 있는 말씀이에요. 소를 잃어버리고, 양을 잃어버리고, 옷을 잃어버리고, 주께서 이걸 찾아주시는 맏형, 맏아들이 되시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9절에. 우리는 맏아들이 홀로 다 하셨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소 잃어버리고, 양 잃어버린, 그야말로 탕자로서 구원받은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같은 인간 믿지 마시고, 주님이 형제 되도록 내 옆에 앉게 하신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나게 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고, 형제 되게 하지 않으면 형제 될 수 없고, 우리 자신을 신앙인 되도록 조치하지 않으면 신앙인이 될 수 없는, 항상 주님으로서 살아가는 그런 주님의 성전, 주님의 가족, 주님의 모친, 주님의 형제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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