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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13강-나무에서 죽은 죽음(신21;22-23) 1512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27. 16:31
2016-12-25 15:05:20조회 : 78         
   나무에서 죽은 죽음 16122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나무에서 죽은 죽음(신명기 21:22-2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b74ZdlZy3vE, Hit:3
 이근호16-12-25 15:58 
나무에서 죽은 죽음 

2016년 12월 25일               본문 말씀: 신명기 21: 22-23 

(21: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땅의 오염을 무엇보다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형시키되 땅과 떨어지게 하면서도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나무에 달린 방식’입니다. 이 ‘나무에 달린 방식’은 땅에 분리된 채 하늘로 향한 모습을 보입니다. 신약에 나온 표현으로는 ‘땅에 들린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3:14에 나오는 말씀을 유념해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하늘을 향해 들었습니다. 이 든 것으로 인하여 ‘쳐다 봄’이 성립됩니다. 누구든지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나음을 입습니다.(민 21:9) 쳐다본다는 것은 불맴이 나타나서 물도록 한 조치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나무에 달린 죄인’이 발생된다는 것은 단순히 산 사람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것에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왕 죄지어서 나무에 달린 사람이라도 소위 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은 덜 죄를 지었다는 의식에 머물러서 아니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즉 죽은 사형수를 향하여 측은해 할 겨를도 없이 평소에 산 사람에게도 그토록 무섭고 저주스러운 말씀 속에 여전히 놓여 있음을 알라는 겁니다. ‘저주’의 등장이 가상적이지 않고 생생하게 실제적이라는 겁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말씀에 위배되면 나무에 달려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나무에 달린 죽은 이가 산 사람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접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누구보다 더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나무 위에 매달려서 죽지 않고 산 사람들은 말씀을 제대로 지키고 더 열심히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야 저주가 금방 안 찾아와서 다행스럽게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말씀 자체가 품고 있는 저주를 비켜 갈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게 저주를 유발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19에 보면, “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통 인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볼 순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먼저 산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인 자식은 자기 생김새나 자기 미래에 대해서 사전에 부모와 의논할 그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즉 주어진 대로 살아야 될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일단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주어진 대로 살아야 될 형편’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독자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려고 설쳐댄다는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 자체가 위험하고 수상한 동네입니다. 

그 설쳐대는 노림수는 바로 ‘자기 의, 자기 거룩’입니다. 곧 남에게 안 빼앗길 자기만을 위한 ‘나의 의요 나의 거룩’입니다. 이런 바탕을 깔고 여기에다 신과 거래에 나서게 됩니다. 즉 “나를 위한 메시야, 나를 구원할 메시야가 되어달라”는 겁니다.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생기고 본인이 잘되기 위한 목적을 성립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자기를 위한 세상으로 변모하고 맙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어야 좋은 세상인 것처럼 억지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원대로 자신의 목적이 달성만 된다면 신에게 아낌없이 후사할 용의가 있을 정도입니다. 만약 이런 인간이 졸지에 하나님 말씀에 치어서 ‘나무에 달려 죽게 된다면…?’ 

즉 누구나 언제든지 말씀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어도 마땅하고, 언제든지 자신이 쌓아올린 의미와 존재 가치와 자존감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대상체가 될 수 있음을 인간들은 극구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럴려고 교회 다녔나”라는 식으로 나올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그것은 갈라디아서 3:13 말씀을 몰라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주신 모든 말씀을 몽땅 다 가져가버리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우리’를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우리’란 완전하게 구원에 탈락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된 자는 정말도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에 탈락된 자입니다. 은근히 ‘자기만의 구원’을 따로 상정할 여지는 전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말씀이 주는 그 저주에서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무에 달린 자’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가져 가십니다. 그리고 ‘나무에 달린 자=저주받은 자’라는 공식을 친히 수립하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저주는 아는 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어느 누구도 제대로 말씀에 입각해서 저주받은 자가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구원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이들은 자기 구원을 언급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오신 모든 말씀을 전부 자기에게로 돌려놓으시므로 인하여, 예수님도 아니면서, 메시야도 아니면서 말씀 지켜서 구원 시도하겠다는 모든 것을 부정(不正)행위로 처리하십니다. 

인간이 왜 여기 있는지를 따지는 실존 근거는 인간 입장에서 없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던져진 존재라서 그러합니다. 그 목적을 찾을 권한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면서 살다가 그냥 어느 날 사라질 뿐입니다. 말씀의 완성으로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웃음’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결과물입니다. 이제부터 성도가 보여줄 바는, 왜 자신의 처지가 자기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다 놓으신 ‘효과’인가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구원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행함없이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반복됩니다. 

새삼 법을 앞에 깔아두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시작된 일이 육체의 행함으로 마감지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갈 3:3) 성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구원된 ‘우리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예수님의 웃음과 기쁨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2-25 23:12 
113강-신 21장 22-23절(나무에서 죽은 죽음)1612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1장 22-23절입니다. 구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대목을 보게 되면 일단 죽은 자는 재수 없고 벌 받았다는 생각이 강렬하죠. 맞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받아서 나무 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자를 처리하는 과정을 주십니다. 그 죽은 자를 처리하면서 살아있는 우리가 진짜 우리인지, 아니면 저주받아 죽은 이 자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숨기고 있는 나의 본모습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진짜냐 이 말입니다. 

  

아직 덜 죽은 우리가 제대로 나를 아는지, 아니면 법을 위반했다고, 말씀을 위반했다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형선고 받은 자가 진짜 우리가 숨기고 있는 내 모습인지를. 그 죽은 자를 처리하면서 자기 자신을 정립을 해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재수 없다고, 아이고, 참 저 사람처럼 되면 안 되지. 어떻게 자기의 운도 다하지 못하고 중간에 벌 받아 죽느냐, 이렇게 측은해하지만.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드러내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그 사람은 저주받아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드러나기 위해서, 그게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저주받는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상, 우리도 휘파람 불면서 마냥 즐거울 수가 없죠.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걱정할 잽이 못 됩니다. 저 사람을 죽인 말씀이 우리 코앞에 있다면, 우리도 여차하면 죽는다, 아니 더 나아가서 여차하면 죽는 것이 아니고, 진즉에 우리가 죽어야 될 자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말씀에 걸려들어서 죽었다면 우리도 같이 말씀을 위배했는데, 왜 우리는 안 죽지? 그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봐줘서가 아니라, 아직 우리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이라든지, 철학이라든지 이런 공부를 약간 해보게 되면, 인간들은 뭘 걱정하느냐 하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것과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피부가 건조해져서 건선염에 걸리면 가렵잖아요. 가려운데 병원에 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렵더라도 긁지 마세요.”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지. 누가 긁고 싶어서 긁습니까? 가렵더라도 긁지 않으면, 그러면 자연치유가 된다는 겁니다. 자연치유. 그걸로 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 몸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다룰 수 있는 것, 뭔가 더 너머에 있는, 과잉된, 또 다른 그것이 내가 다루는 것보다 더 윗선에서 갖고 놀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사람들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어떻게 다룰래야 다룰 수 없습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관리라고 합니다. 나라는 주체를 내가 주체 관리자가 되느냐? 절대로 우리는 주체관리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연치유 되도록 할 수 없어요. 긁어야 되죠. 긁으면 사태가 더 악화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가려운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니는 말씀에 순종하라.”고 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가려워도 긁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말씀이에요. 순종하라. 우리는 그냥 순종할 수가 없어요. 자꾸 손을 대가지고 관리주체를, 내가 나의 관리주체로 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뭐냐 사실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노림수였습니다. 전술이었습니다. 전략이었습니다. 말씀을 니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몽땅 누가 다 가져간 거예요. 지난 광주강의에서 비빔밥으로 예를 들었는데, 두 사람이 비빔밥을 2인분 시켜놓고 먹으려고 하는데 한 사람한테 전화가 왔어요. “예, 예, 식사중이니까 식사 끝나고 다시 전화할게요.” 끊고 나서 보니 다 먹었어요. 그 비빔밥을 하나도 안 남겨놓고 다 먹은 거예요. “예, 하나님 말씀 잘 지키겠습니다. 전화 끊고 본격적으로 잘 지키겠습니다.”하고 끊고 보니까 그 말씀을 예수님이 다 가져갔어요. 지킬 게 전혀 남아있지를 않는 거예요. 지킬 게. 

  

결국은 뭐냐,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정말 말씀이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니가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 말고 대신 와서 말씀을 몽땅 다 가져갔는데, 가져가신 분이 나무 위에서 저주를 받는 거예요. 야,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키면 지킬수록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더 우리가 궁지에 몰리고, 자기 자신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와서 우리 몸을 가렵게 만들죠. 가렵게 만들어요. 만들면, 우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서 뭔가 짓을 해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기 몸을 자꾸 다룹니다. 다루어보게 되면 사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겁니다. 

  

얼마 전에 tv를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이 있어요. 신학교 나온 여자 부목사가 덴마크 남자하고 같이 살고 있어요. 애는 아직 없는데. 덴마크 남자하고 사는 것이 인간극장에 나왔거든요. 아침 일곱 시에. 그걸 보는데 덴마크 남자가 얼마나 다정스러운지, 아내가 침대에서 자려고 하는데 자기가 책을 읽어줘요. 그 대목에 약간의 쇼크를 받았어요. 아내가 잠이 들 때까지 책을 읽어줘요.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아! 저게 언제적 일이냐?’ 나이 육십 넘어서 아내가 잠들라고 책을 읽어주는 그런 부부 봤습니까? 그냥 돈만 벌어다 주면 괜찮은 남편으로 보잖아요. 아내가 잠들 때까지. 꼭 어릴 때 읽은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쓰다듬어주고.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돈만 벌어주면 남편 노릇을 했다, 남편 값을 다 했다, 순종했다, 라는 것이 어느 책에 나옵니까? 그런 것이 없거든요. 근데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이정도만 해도 점수 꽤 되는 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저것까지? 저런 것 까지 해야 되는가?’ 갑자기 저주받아 마땅한 남편이 되는 거예요. 야, 저주받아 마땅한 남편이 된 거예요.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어요. 저렇게 하다가 내가 자버리니까,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말씀이라는 것은 내가 관리 주체가 돼서 “내가 이 정도까지 했으니 봐주세요. 하나님 구원해주세요.”라고 하는데, 내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까지 해버리면 주님께서 더 뺍니다. 더 가버려요. 그럼 또 따라 붙으면 또 가버립니다. 꼭 달을 따기 위해서 따라가는 것과 같아요. 내가 저만큼 가면 달은 저만큼 가고, 내가 또 저만큼 가면 달도 또 저만큼 가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노사연의 <님그림자> 노래잖아요.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달을 따라 갈 수가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벌 받아서, 말씀을 어겨서 시체가 되었다. 근데 시체가 되었다고 해도 그게 남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잖아요. “니 일이거든?” 그게 니 일이이라는 말입니다. “너 일!” 어떻게? 시체를 처리함으로써, 오늘 본문에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거든요. 우리는 그 사람보고 “야, 참 고소하다. 그래, 말씀 잘 듣지 왜 까불었느냐?”라고 이렇게 할 입장이 우리가 되질 못합니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모든 것을 비빔밥에다가 말씀을 다 담았다면,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을 대신 가서 저주를 누가 다 받았어요. 다 받고 난 뒤에 이미 우리는 정죄함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신명기 21장 본문을 오늘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봐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설명하고 오늘 설교를 끝내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걸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좀 어렵지만 여러분들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들을 거예요. 

  

고양이가 있고 고양이가 웃으면 고양이 웃음이 나게 되어 있죠.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이게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고양이가 웃고 사라졌는데 웃음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결과로서 와 있는 거예요. 결과로. 여러분들의 눈을 봅니다. 지금 이해가 되는지 눈을 보게 돼요. 아까 제가 기도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는 그냥 던져진 존재에요. 나한테 “니는 어느 집에 살래? 부잣집에 태어날래? 니는 키가 180정도 돼야 되겠네?”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던져진 존재에요. 

  

던져진 존재인데, 던져지고 난 뒤에 원인을 찾아가라는 겁니다. 우리가 던져지고 난 뒤에 우리는 뭘 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이왕 사는 것 바르게 살아야지. 아내가 잘 때까지 책 읽어주고.’ 이거 아니거든요. 우리는 이미 누구의 결과물로 던져진 존재인데, 그 누군가에게 연결이 돼야 돼요. 우리는 웃음이에요. 그냥 하나님 보시기에도 기쁨이고 그냥 웃음이다 말이죠. 나같이 더럽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데 왜 하나님은 기뻐하심을 입었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누가복음 2장에서 선언을 하느냐 이 말이죠. 

  

어딜 봐도, 거울을 봐도 우리에게 기뻐할 구석이 없는데,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고 기쁘다는 거예요. 뭐, 아무나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기쁘다고 한다면 이게 기쁘구나. 근데 왜 기쁜데? 그게 이제는 말씀을 제시하게 되면, 말씀을 역으로, 거꾸로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이미 결론은 기쁨의 대상이다, 영생 얻었다, 구원받았다, 이걸 확정짓고,. 도대체 이 구원이 어디서 날아왔고, 어디서 이미 준비된 것이고, 어디서 이미 예상한 것인지, 그 원인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 원인을 찾아가게 되면 처음에는 기쁘다! 원인 찾자! 이러다가, 나중에는 원인 찾다보면 내가 구원받은 것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좋아져요. 

  

구원받은 내 자신에 대해서 좋아지고 안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신 일과 엮어졌다는 게 기뻐요.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다루어진다는 것.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지금도 예수님이 나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안심하게 만드는 겁니다. 주님의 똘마니가 되는 거죠.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냥 가지가 되는데, 왜 가지고 그동안 포도나무인 체 주제파악도 못하고 살아왔습니까? 주님이 안 잘렸으면 우리도 안 잘립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됐는가, 주님이 저주받았거든요. 제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씀했죠. 제가 옛날에도 그런 예를 몇 번 들었습니다. 전에 대구 대명동 교회에 다녔을 때에 진짜 신앙생활 잘 하려고 애쓴 어떤 분에게 “예수님은 십자가 나무위에서 저주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분이 나한테 화를 내면서 “왜 예수님이 저주받아?” 그럴 리 없다는 거예요. 제가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해줘도 안 믿어요. 

  

저주받았다, 저주받았다는 것을 왜 안 믿느냐 하면, 우리는 구원에서 탈락되어야 합니다. 이게 우리 과정이에요. 지금 우리는 잘못된 것이 뭐냐, 내가 원인이 되어서 구원이라는 결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탈락되는 척이나 하고, 십자가에 죽는 척이나 하고, 척하는 것밖에 몰라요.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지옥을 비켜나게 되면 ‘후유! 안심이다.’하면서, 우리는 고정도까지는 갈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죽을 뻔 했다가 주께서 살려줬다든지. 이런 것.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무슨 체험을 해야 되느냐 하면 탈락했다는 체험을 해야 돼요.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새벽기도까지 나와서 그렇게 애를 썼지만 결국은 탈락입니다. 땡! 32강에서 떨어졌습니다. 끝. 완전히 버림받아야 돼요. 완전히. 버림받은 척, 버림받은 셈치고, 아니에요. 완전히 버림받아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됩니다. 성령이 와야. 

  

구원을 시도하겠다는 자체가 우리 자신을 원인으로 놓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따라갔더니만 구원받았다는 결과를, 내가 예상했던 결과를 따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밥 한 톨 안 남은 비빔밥 그릇에다가 지가 어디서 밥을 사와가지고, 지가 참기름 넣고, 콩나물 넣고, 고추장 치고, 나물해가지고, 김 가루 넣고, 달걀 프라이 하나 넣고 해가지고, 지가 막 이렇게 비비는 거예요. 열심히 비비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원 샷one shot 하고 머리에 뒤집어쓰면 돼요. 

  

일본에서 나온 발명품 중에 그런 게 있어요.
잔 밑이 평평하지 않고 뾰족한 게 있어요.
그게 무슨 잔이냐 하면 소주잔인데 원 샷 잔이에요.

남겨놓으면 잔이 쓰러져서 무조건 다 마셔야 돼요. 눕혀놔야 돼요
.
참, 발명품도 희한한 발명품이에요.

절대로 테이블에 그냥 못 놔두도록, 쓰러지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원 샷 컵이에요.
뭔가 했으면 우르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한 착한 일도 쏟아지고 나쁜 일도 쏟아지고.
착함, 나쁨, 하여튼 간에 우리라는 것은 빈 비빔밥 그릇이 되도록 쏟아지게 만들어요.
하루를 지나면 하루치 쏟아지게 만들고,
내일 되면 내일 또 쏟아지고, 모레되면 모레치 쏟아지고. 


  

그렇게 해서 우리 쪽에서 시도하는 어떤 구원도 애초부터 이거는 없었던 일이에요. 처음에는 우리가 말씀을 볼 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이미 결과물입니다.” “아이고, 기분 좋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 그거 좋네. 이미 구원되었는데 따라가지 못 따라 갈 것이 뭐 있어?” 하고 따라가는데, 따라가면서 점점 더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사라지고, 이게 내가 주님의 일에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고, 거기에 곁가지로 우리가 붙어있는 거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겁니다. 

  

어떤 분이 지난 금요일에 가락강의 시작 전에 점심 때 식사 대접한다고 해서 만났어요. 중국식 뷔페인데, 거기서 두 시간 반 동안 있으면서 세세한 것 까지 죽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분의 질문이 그거였어요. 칭의가 뭐며, 견인은 무엇입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그 질문은 뭐냐 하면 나는 불신자였다, 나는 교회 가게 되었다, 근데 교회에서 구원의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한 거예요. 칭의는 이렇고 견인은 이렇고 그 다음에 성화는 이렇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은 칭의에 대해서 알고 그거 하나 정복하고, 그 다음에 견인에 대해서 알고 하나 정복하고, 그 다음 성화에 대해서 알고 하나 정복하고, 마지막에 영화에 대해서 정복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하나 정복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수학 정석 떼고 그 다음에 뭐 떼고, 떼고 하는 것처럼. 

  

그 분은 기존의 교회에서 그렇게 배운 거예요. 교회에서. 그렇게 돼버리면 계속해서 뭐가 누적이 돼버리느냐 하면 나는 이만큼 구원받았다. 나는 이것까지 왔다. 나는 이 단계까지 올라왔다. 계속 자기가 구원의 주체가 돼버립니다.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근데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탈락되어야 돼요. 우리가 탈락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이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이 우리 앞에만 놓여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으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고양이 웃음이 남아있으려면 여전히 고양이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우리는 고양이 웃음 따로, 고양이 따로가 아니라 고양이 입 꼬리가 올라가는 그 모습을 웃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하면 고양이는 사라졌는데 웃음만 남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우리가 웃음이 되려면 나의 구원도 고양이와 함께 죽어버려야 돼요. 나의 구원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소름이 끼쳐요. 너무 어려워가지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의 효과라고 해요. 효과라는 말을 써요. 효과. 주님의 효과. 주님이 일으킨 효과. 

  

자, 처음부터 설교 다시 해봅시다. 우리는 던져졌다,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왜 이 시대에 태어났는지, 우리는 이유도 몰라요. 그냥 던져진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는 주님의 효과에요. 근데 그 주님이 어떤 주님이냐 하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주님이에요. 예수님이 버림받음으로, 우리가 그 효과로 구원을 얻은 겁니다. 근데 이 이야기를 교회에 몇 년 다닌 사람은 다 안다고 우겨요. 근데 본인이 고양이라. 본인이 효과가 아니고, 사실은 효과이긴 하지만 본인이 구원의 실체가 되고 말았어요. 효과만 남아야 되는데 효과 아닌 실체만 남아있는 거예요. 자기가 웃음을 띠려고 되지도 않는 칭의~! 견인~!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는 성화~! 

  

짧게 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졌는데, 다시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 우리라고 하는 것은 효과, 예수님이 먼저고 우리는 결과다 이 말이죠. 우리가 먼저 있고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였고 그 효과가 우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효과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뭘 증거 하라고? 그 비빔밥 안에 뭐가 있었는지를.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고 지킬 필요도 없는 그 비빔밥 안에 어떤 음식들이 있고 어떤 반찬들이 있었는지를. 주께서 몽땅 뭘 가졌는지를.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나무 위에 죽었다. 아이고, 꼴좋다. 말씀 지키지, 안 지켜서 벌 받았구나. 그 말씀을 사실은 예수님이 가져 간 거예요. 예수님이 가져 가셔가지고 나무 위에 달려서 신명기 21장 말씀대로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효과가 뭐냐, 2016년 12월 25일의 우리들이에요. 그게 우리들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가져가고, 혼자 비빔밥 다 잡숴가지고 나온 효과가 뭐냐 바로 우리들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막 살라고 하다가 이제는 십자가 바라보라고 하고. 십자가 바라보면서 거기서 내 모습을 찾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아니, 내가 비췄으니까 내 모습이 보이잖아.’ 그러니까 내 모습이 보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여전히 노림수가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이렇게 해서 내 구원 챙겨야지.’ 이런 노림수가 있는 반면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 때문에 제가 오늘날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걸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들이 그래요.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의 저주에서, 율법의 저주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것을 나 몰라라 하면 안 돼요. 그 버림받음에 따져보면 이미 우리가 참여되어 있습니다. 이걸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버림받았어요. 아니, 목사님. 그 다음 말씀이 있죠? 아니, 그 다음 말 기다리지 말고,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니까요. 버림받을 뻔? 뻔 아니고 버림받았다니까요. 우리는 말씀에 의하면 이미 버림받았어요. 말씀에 의하면 이미 저주받았어요.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린 같이 죽었어요. 그걸로 끝났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의 영이 와서 건질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몽땅 다 건지기 때문에 이제는 그 주인공이 달라져요. 주인공이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건짐을 받는 겁니다. 전에 미역줄거리 했죠? 미역줄거리 건지듯이, 건지면 물이 뚝뚝 떨어지듯이, 주께서 그냥 피 묻은 손으로 건져내는 겁니다. 피 묻은 손으로. 

  

그럼 뭐냐 하면 혹시 길에서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혹시 구원받았습니까?” 하면, 언제 구원받았다, 어느 교회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지 말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언제, 어디서는 의미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로 저는 고양이의 웃음처럼, 지금 고양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웃음으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면 그 사람 쪽에서 “당신은 어떤 실력으로, 어떻게 기도해서, 어떤 노력으로, 어떻게 정신을 바짝 차렸더니만 그게 믿어집니까?”라고 한다면, “당신은 내가 말한 효과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군요. 내가 나를 조작한 게 아니에요. 내가 나에게 어떤 작용을 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떻게? 언제? 기도를 어떻게 했더니만? 어느 교회에 가서?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그렇게 질문을 하면, “그것은 주님보고 물어보세요. 저 거울 속 안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나의 나 된 것은 저분의 선물입니다. 저 분의 은혜입니다. 결국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 판식, 저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럼 주님의 이름으로 살고 있으면 똑바로 살아야지! 잘 때 책도 읽어주고? 이제는 그런 것 좀 묻지 마! 율법으로 죽었다고 하는 사람한테 자꾸 율법 들이대가지고 착하게 살아야지. 서로 사랑해야지. 형상 본받아야지. 뭐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그런 소리....,우리는 그런 소리를 보면서 아, 이걸 다 가져갔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걸 주께서 가져갔구나. 

  

오늘 본문도 주께서 가져갔고, 갈라디아서 3장도 주께서 가져가신 거예요. 우리는 가져가신 것을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아, 이렇게 가져갔기 때문에 구원되었구나. 이것이 반복적으로, 우리는 버림받아도 마땅한데 주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주님의 사람이 되었구나. 그걸 확인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지 마라. 그걸 쉽게 하면 아무 이유 없이 시작한 것을 법에다가 호소하지 말라는 이 말입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 이유 없이 태어난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이유 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이유 없는 것을 억지로 이유를 만들지 마세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이렇게 할 뿐이지, 거기다가 법을 깔아놓지 마세요. 법은 주께서 가져갔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의 효과 있을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웃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받았다는 이야기 듣고, 정신 차려야지, 이제는 저주 안 받아야지, 하고 우리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람의 티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가져갔다는 것을 까먹고 내 것으로 삼아서 내가 위대하게 되려는 이 모든 시도가 바로 예수님에게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