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강-신 21장 18-21절(불효자 처리)1612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1장 18-21절입니다. 구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 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아멘. 이게 아멘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19절입니다. 부모가 그 자식을 잡아가지고, 부모가 형사가 되고 자식은 범죄자로 취급하라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자식이 제 3자의 자식으로 봐야 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식은 부모가 태어나게 한 게 아니에요. 말씀이 태어나게 한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잖아요.
그럼 말씀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장차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의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앞당겨 보여주는 그러한 정황이 이스라엘 내부에도 계속 피어날 때에, 그 이스라엘은 신약 때의 예수님의 새로운 나라와 관련성을 갖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이 천국과 관련성이 있으려면 내 자식을 구원하겠다고 욕심 부리지 말고 말씀으로 연결을 시켜놓아야 돼요.
나의 가정을 말씀에다 집어넣어버립니다. 집어넣어 놓고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가정이 될 때, 그 말씀을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 가정에다가 다시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어버리면 아버지, 아들 관계가 아니라 복음과 복음의 관계로서 엮어져야 해요. 그거 하라고 하나님께서 자식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맡긴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만든 나라인데 완벽한 나라일거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나라를 만들 때 완벽한 나라라면 어떤 가정에도 말썽부리는 자식은 아예 없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가정을 만들 수도 있지 아니 하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이고.
주님이 생각하는 완벽이라는 것은 죄에 죄를 더욱더 완벽하게 끄집어내는 것이 주님 앞에 완벽이에요. 우리는 위선자고 자꾸 자기를 꾸미기 때문에 건성 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완벽은 그러한 위선과 가면을 뚫고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완벽입니다. 우리가 마치 우리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 데 까지 주님의 말씀의 손가락이 닿을 정도로의 완벽. 주여! 완벽하게 저를 해체시켜주옵소서. 주여! 완벽하게 저를 분해시켜주옵소서. 그때 완벽이라는 말을 써야 돼요. 그냥 겉치레의 완벽이 아니라, 우리를 쪼개는데 말씀이 더욱더 예리하게 더 쪼개게 하옵소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예리한 칼 같아서, 쉽게 말해서 회칼이 있어요. 회칼. 회칼이 되어서, 스시 칼이 되어서 우리를 쪼개고 진짜 뼈까지 쪼갠다는 거예요. 쪼개서 우리로 하여금 아예 나라는 것이 없고, 처음부터 말씀의 조각들이었는데, 지금은 하나의 그 조각조각들을, 부속들을 모으다 보니까 오늘날 우리라는, 성도라는 새로운 조립품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날마다 확인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그래서 내가 말씀 지킨다는 주체의식이 성립이 안 돼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이끌어가고 인도하여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절대불변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결혼식에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 있어요. 뭐 이 말 들으면 뜨끔할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겠지만. 주례가 없는 결혼식을 한다는 말은 우리가 알만큼 아니까, 오기만 해서 우리가 하는 축하에 동조를 해달라는 거예요. 아빠나 엄마나. 기성세대가 뭘 아느냐? 라는 거죠.
결혼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알만큼 아니까, 기성세대에게 더 이상 잔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덕담이나 해달라는 거예요. 덕담이나. 축시나 해주고 사회나 보라는 거예요. 나중에 부조내고 밥이나 먹고 가라는 이 말이죠. 오만 원 내고 둘이 와서 먹지 말고. 덕담이나 하는 것이 결혼식이 아닙니다. 자기축제가 아니에요. 훈계하는 겁니다.
이미 결혼을 해본 사람이 이 결혼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아는 분이 주례를 해야 되죠. 특히 이혼한 사람이 주례를 해도 괜찮아요. 결혼해서 가정이루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결혼식만 하면 부부가 되는 줄 알아? 매일 부부가 아니면 언제든지 깨질 부부에요. 매일 부부가 아니면. 매일 새신랑, 새신부가 돼야 돼요. 누구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매일같이 그때 처음 마음으로. 첫사랑으로. 당신만 함께 있다면 더는 필요 없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 말고 더 바라면 그것도 죄다. 시월의 어느 날처럼.
“당신 말고 딴 것을 원한다면 그게 내가 죄가 될 정도입니다.” 이런 낮은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되고, 아니, 더 깊이 있게 가려면 자기 죄를 더욱더 알 때, “이런 것도 감당해주는 당신이 고마워!” 이렇게 될 때 매일같이 부부에게 신선감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절대적 기준이 제시되어야 할 텐데, 절대적 기준이 없고, 뭐냐 하면 각자, 각자 자기 기준대로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례라는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겁니다. 또 주례해봐야 사실은 들을 것도 없고요. 이해는 됩니다마는. 참, 주례를 할 때는 결혼식을 깬다는 마음으로 주례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위기가 너무 허황되어 있기 때문에. 붕 떠 있어요. 마치 행복을 다 얻은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비로소 헤어질 때 안다고요. 헤어질 때 깨닫는다.
‘아, 그동안에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구나. 하나의 욕정이었지 사랑이 아니었구나. 하나의 소유의 대상이었지 진정 그 앞에, 그를 위해 바친다는 사랑이 아니었구나.’ 그를 위해 바치면 그가 내 뜻대로 움직일 줄 알았죠. 그럴 줄 알았지롱~다 퍼주면 움직일 줄 알았지롱~ 내가 해 준 만큼 줄줄 알았지롱~ 택도 없는 소리에요.
절대적 기준은 바로 우리 행복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면 절대적 기준이 뭐냐, 이 말씀에 나와 있어요. 그 말씀은 바로 기존의 세상은 이런 겁니다. 왜 그렇게 주례를 없애버리느냐 하면, 내가 가는 그곳이 진리라고 하는데, 사실은 진리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찾아오는 길이에요. 찾아오는 길목에 그 진리가 있어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다가오는 것, 그것은 바로 말씀밖에 없어요.
말씀이 나한테 다가와서 나를, 내 인생을 완전히 분해해버리고, 재분해하고, 재조립하고, 분해하고, 재분해하고, 조립하고 재조립하는 겁니다. 이걸 제가 수요일에 엉망진창이라고 했어요. 텐트 속에서 발길질하면 바깥으로 우당탕탕 튀어나오듯이. 내 인생이 내 게 아니고 엉망진창이에요.
마치 이불 속에 갑자기 고라니나 사슴이 들어와 가지고 이불 바깥이 울퉁불퉁한 것처럼. 내 인생에 내가 기대하지 않은 낯선 요소가 들어와서 나를 자기마음대로 만들 때, 그것이 말씀일 때, 비로소 우리의 가정은 주님이 친히 손대는 가정이 되고, 친히 손대는 다가온 구원에 들어간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마침 오늘 본문 자체가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가, 하는 그 대목인데, 지난 금요일에 상당히 감격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스카이프 딱 설치해놓고, 태블릿PC를 딱 켜놓고, 독일에 있는 자식과 부산에 있는 사돈과 대구에 있는 나하고 생중계를 했어요. 화면 세 개를 같이 띄어놓고. 돌 설교를 했어요. 돌. 외손녀 돌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여러 가지 하는데, 사돈이 들으면 안 되니까 말조심 해야죠.
복음을 전하게 되어서 나름대로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각자 서로 인사하고, 우리 외손녀는 한복 입혀 놓고, 또 까불까 싶어서 귤 하나 입에 집어넣어 주고, 좋다고 했는데, 그 돌 설교를 어떻게 했느냐, 제가 돌 설교 한 기억은 옛날 최일규 성도님의 애 돌 할 때 하고, 벌써 몇 년 전입니까? 십 몇 년 전이니까, 그때하고 처음 하는 것 같아요. 돌 설교는.
본문이 이사야 1장 2절에서 4절이었습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 하나님이 자식을 양육한다 했습니다. 그러면 자식 양육 방법은 딴 데서 찾을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자식을 어떻게 양육하느냐, 그걸 그대로 우리한테 집어넣으면 됩니다. 말씀으로 집어넣으면 되죠.
하나님은 자식을 어떻게 양육하느냐 하면 자식을 버렸습니다. 내어버렸어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이게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잡아 죽이도록 한 조치입니다. 아이고, 내 새끼야! 이게 아니에요. 나가 죽어라! 이거에요. 나가 죽어라! 이 세상의 죄에 가서 빠져죽어라! 그러면 양육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그 빠져죽으라고 한 그 자식이, 자식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써는 자기에게 뒤집어 씌워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자식이. 그러면서 백날 설쳐봐야 그 죄의 늪에 더욱 빠지죠.
죄의 늪에 빠진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더욱더 얽매인다는 거예요. 세상의 유혹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 새로운 것, 자꾸 거기에 미혹이 되고, 강박적으로 거기에 몰두하게 되어 있어요. 젊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새로운 것을 잘 찾아요. 새로운 것. 자기 주제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자기가 버리운 자라는 것을 모르고, 어디 늪에 빠진 자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바로 탕자처럼 자식이 가출하기를 은근히 기다리죠. 가출해라! 세상맛을 봐라! 그러나 하나님의 양육은 그렇게 버려진 자, 말씀에 입각해서 아예 죄에 범벅이가 된 자, 그때부터 바로 양육이 시작되는 겁니다. 버려진 자를 아버지께서는 그 자식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이 양육 방법입니다.
이사야 1장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절,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부패한 자식이라면 찾아오지를 말든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해놓고, 하나님이 부패한 자식이라고 해놓고 찾아가요.
이것은 마치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할 때에 한 사람은 뭐 십일조 했습니다, 금식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지 자랑 늘어놓는데, 그렇게 되면 주님의 양육의 요소가 거기에는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거기에는. 주님이 손댈 의미가 없습니다. 지가 알아서 잘 기어 나오는데 왜 주님이 구원하십니까? 그거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에요. “나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은 양은 양이 아니에요.
천국 가려면 죄를 지어야 해요. 죄 짓지 않은 자는 천국을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피가 피 값을 하고 피가 피로 그 기능을 발휘하려면 일차적으로 말씀을 때려가지고 패역한 자식이고, 버려진 자식이고, 쉽게 말해서 너는 구원 될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 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해요.
그래서 잠언서에는 자식을 매로 쳐도 자식은 안 죽게 되어 있다고(잠13:24),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물론 잘못 때리면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자식은 매로 치라고 자식을 낳은 거예요. 매로 치라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 보고 이삭을 잡아 죽이라고 이삭을 준 거예요. 왜? 그 이삭을 죽이는 그 모양새는 이삭을 사랑하는 자기 사랑이 거기에 담겨있거든요. 결국 이삭을 죽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아 니가 니 사랑을 죽여 버려라.” 이 말입니다.
니 사랑을 죽여 버릴 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그때부터 뭐가 시작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양육을 체험하게 되고, 몸소 인정하게 되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바라볼 때 측은하게 보세요. ‘아이고, 앞으로 고생할 존재야! 나야 뭐 고생했다마는 니는 앞으로 우에 고생할래? 뭐 딸이라서 군에는 안 가겠다마는. 여자로서 사회에서 냉대당하는 그것을 우에 당할래?’
애는 철도 없이 부모의 보쌈 속에 있어가지고 온화한 비닐하우스처럼 그렇게 살지만, 아버지 보기에 버려진 자식을 볼 때에는 측은한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그 측은한 마음에 기준이 필요해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돈이 없어서 측은한 것이 아니고, 몸이 아파서 측은한 것이 아니고, 죄가 뭔지도, 하나님의 의가 뭔지도, 복음이 뭔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 측은한 마음을 일단 부모부터 깨달아야 그 깨달음이 자식한테 전달될 수 있는 겁니다.
부모는 뭐 건성으로 나 예수 믿었다고 해놓고는, 고3한테는 공부하라고, 교회가지마라고 하고, 고3이니까 공부만 하고 말씀은 나중에 들으라고 하고, 이런 식으로 세상부귀영화 은근히 노리면서,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기도 많이 해놓았다. 엄마 새벽기도 많이 해놓았다. 니는 잘 될 거다.” 그게 뭐예요? 그게 버리운 거예요? 지금 출세 준비하고 있는 겁니까? 아버지는 자식의 비선실세가 되면 안 돼요. “말만 타라! 이화여대는 내가 넣어줄게.”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니까요. 백만 천사가 데모할 수가 있어요. 백만 천사가 촛불집회 할 수가 있습니다. “쟤는 아닙니다. 저럴 수는 없습니다.”
자, 그러면 죄와 의를 아는데, 오늘 본문이 그걸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거부하느냐,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오염되었기 때문에. 제가 지난 가야산 수련회에서 분명히 했어요. 마태복음 할 때 분명히 했는데, 오염 된 것은 무슨 처분한다고 했어요? 살처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리고 닭이고. ‘불쌍한 오리야 너를 위해서 기도해줄게.’ 이런 것 없습니다. 그냥 잡아다가 다 죽여 버립니다. 지금 천팔백만 마리 죽였어요. 지금 대구 빼놓고 다 난리 났어요. 경북도 들어왔어요. 살처분 한다고.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천국에 못 갈 인간 같으면 인간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는 오염된 오리하고 닭하고 똑같은 겁니다. 새하고. 마땅히 심판으로, 저주로, 살처분 하는 거예요. 뭐 물주고, 천국에는 물도 있지만 지옥에는 물도 없어요. 지옥에는 불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세요. 물이 넘치는 곳은, 생명수가 넘치는 곳은 천국이지, 지옥에는 그게 없어요.
아직 우리가 지옥을 안 가니까, 까불까불해가지고 하는데, 지금 이 무대장치, 이 미장센, 프랑스어mise en scène(연극, 영화무대에 오른 등장인물의 배치나 동작,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설계. 특히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화면의 크기 따위를 포괄하는 넓은 범위의 개념이다.) 영화나 연극에서 미장센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용상, 의미상 안에 있는 스토리의 구조를 미장센이라고 합니다. 짜여진 구조.
우리는 현실이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 떨어지기 직전에도 소돔 고모라는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었어요. 그게 완전히 소금바다가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지금도 사해가 소금바다잖아요. 매 그 자리잖아요. 그 자리. 노아홍수 때 사람들은 그게 전부인줄 알았어요. 이게 물바다 될 줄 몰랐죠. 이거는 철수 돼야 될 연극장치에 불과해요. 세트장에 불과합니다. 이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아들어야죠.
가정에서는 오염된 것을 주께서는 제거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자식을 살리는 방법은 이 말씀 밖에 없어요. 이 말씀을 어떻게 하느냐, 패역한 자식 앞에서 이 말씀을 그대로 읽는 거예요. 그대로. 패역한 자식은 들으라! 너 가만히 들으라! 패역한 자식을 그 부모가 체포하는 거예요. 수갑이 있으면 더 합리적이에요. 수갑이 있으면 더 실용적이에요.
수갑을 채워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장로들에게 가서 떠벌리는 겁니다. “제발, 내 자식 좀 죽여주옵소서. 그냥 죽이지 말고 돌로 치되,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염된 오리라고 생각하고 살처분 해주시옵소서. 여러분 손으로 때려죽이옵소서. 여러분 손으로.”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어주는 심정입니다.
내 자식인데 남보고 죽이라는 말은, “차라리 그 돌로 나를 때려주옵소서.”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를 죽이는 심정으로, 내 속에 오염된, 하나님이 싫어하는, 하나님의 거룩에 위배되는, 거룩한 하나님을 감당 못할 그런 오염된 요소가 내 안에 있을 경우에 나한테 돌을 던지옵소서. 그런 취지로 내 뱃속으로 난 내 자식을, 오염된 자식을 때려죽이옵소서. 더 이상 내 잔소리로는 안 되니까 죽여 달라는 거예요.
그럼 죽여 달라고 하면 죽여줘야죠. 죽여주는데, 뭐 행여나 자식이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제 다시는 술 안 먹을게요.” 본문이 술 취한 패역한 자가 나오니까. 그럼 현장에서는 “괜찮네.” 하면서 돌려보낼 때, 바로 그 자식은 신명기 21장 18절과 21절이 듬뿍 담긴, 이제 말씀이 지배하는 자식으로서 다시 집으로 귀환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가 십자가 믿는 모습이에요.
저주받아야 될 우리가 십자가 알고, 성령을 통해서 미리 땡겨서 알고, 이제는 십자가 있는 체로 진즉에 죽어야 될 건데, “주의 말씀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감사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양육하는 방법이에요. 천국에 보낼 자기 자식을 양육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십자가를 가지고 죽여 놓고,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으로서 다시 끄집어낼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양육하는 방식이 그겁니다. 이사야 1장 2절에서 패역한 자식이라고 해놓고는, 이사야를 보내서 다시 찾아가서 그들 속에 처녀에게 아들을 낳게 해서, 그 아들로 진짜 이스라엘을 죄에서 건져내는 그 원대한 시나리오를, 주께서는 중간과정과 끝 과정, 성경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겁니다.
각 가정에는 다 아들이 있고, 딸이 있고, 자식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정이라는 것은 일종의 말씀이 작용하는 교회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취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뭐 사돈은 입에 뜨뜻한지는 모르겠어요. 자칭 평가하면 그분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또 케이크도 잘랐어요. 양쪽 집에만 케이크가 있고 정작 본인 집에는 케이크가 없고, 외손녀보고 불라고 해서 화면으로 부는 것이 보이면 그럼 내가 불어서 끄고, 먹기는 우리가 먹고. 저쪽 사돈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이벤트를 하고 돌은 넘어갔습니다마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몇 시간 후에 딸한테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 오늘 말씀 참 좋았습니다. 귀한 말씀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 딸이 말씀으로 있다는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일단은 ‘후유~ 오염을 피로서 제거했나?’라는 정도로, ‘피가 묻어있는 자식인가?’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기 때문에.
여러분, 이게 늘 방부처리 해야 되고, 항상 생각할 것은 죄냐, 죄 아니냐가 중요해요. 천국, 지옥 가는 문제는 죄가 아직 남아 있느냐, 씻어졌느냐, 그 문제입니다. 따라서 피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씻어주는 피, 착한 일? 언제까지 착한 일 할 겁니까?
그 피를 피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식들이 말씀은 들었지만 세상에 나가서, 이제는 조금씩 이 세상의 죄가 얼마나 악랄한지를,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더 동조하고 있는지를, 어느 새 자식들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지를, 철저하게 깊이 있게 깨달아서, 혹시 압니까? 성령이 선물 주게 되면, “부모님의 복음을 이제서 압니다.”라는 그 기적 같은 소리가 들릴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미리 땡겨서 심판받게 하옵소서. 장차 올 심판이 우리 가정에 미리 와 주시옵소서. 주께서 십자가로 심판한다는 것을 온 가족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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