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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11강-미움받는 장자(신21;15-17) 1612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12. 07:04
2016-12-11 15:01:13조회 : 34         
   미움받는 장자 16121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미움받는 장자(신명기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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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12-11 16:00 
미움 받는 장자  

2016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신명기 21:15-17 

(21: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여든 

(21:16)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성경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듭니다. 흔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을 끄집어내어 말씀을 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심이 유감없이 터져나오는 상황을 포착해서 말씀을 담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억지로 말씀 순종 현상’이 발췌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태어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은근히 고대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곱디고운 마음씨에 흠집이 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말씀으로 당당해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태도를 노리는 인간들의 심보가 잘못된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아울러 밝히십니다. 

인간들이 원치 않는 상황이 들이닥치게 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상당히 귀찮아 합니다. 마지못해 지켜놓고서도 외형적으로 지켰다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인간들은 자기 잘난 맛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님께서 수용할 만 것이 못됩니다. 

도리어 인간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미움받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미움받는 그 자리’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결국에는 장자가 되어야 하는 야곱도 출생할 때는 장자로서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야곱에게는 본성적으로 장자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위해 마련된 장자의 자리는 에서의 것도 아니요 야곱의 것도 아님을 나타내십니다. 어느 인간도 복받을 만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만한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만큼은 마땅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늘 간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기 사랑을 ‘예수님께 대한 미움’으로 전환시키십니다. 이 작업에 율법이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 맞추어 상황도 함께 제공됩니다. 만약에 미운 아내에서 장자가 태어났다면, 남편된 입장에서 신명기 오늘 본문을 생각해서 그 장자에게 유산을 다른 아들보다 곱빼기로 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불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사랑의 티를 낸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하던 행세대로 그냥 겉으로 말씀 순종한 티를 내면 그것으로도 통한다고 여깁니다. 

인간이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이미 인간 마음 자체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움 마음은 그 어떤 경우라도 미움 마음을 유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즉 말씀을 제대로 지킬 위인은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말씀에 의한 미움’이 메시야를 이 세상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본 뜻을 드러내는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환경 만들기를 위해 미리 동원된 자들이 바로 야곱의 12아들들입니다. 역대상 5: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여기서 인간들은 다음과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을 장자로 할 것으면 왜 애초부터 요셉을 제일 먼저 태어나게 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요셉을 제일 먼저 태어나게 했다면 그 이 요셉의 이름을 르우벤이었을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는 구원의 원리가 중요합니다.
요셉은 바로 ‘제일 마지막’이라는 위치에 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셈하는 순서를 늘 뒤집어버립니다. 그래야 악마의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르우벤과 요셉 사이에 9명이라 하는 아들이 있는데 왜 장자는 요셉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이며 그 라헬이 낳은 첫 번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구원의 언약을 제공하면서도 정작 언약을 받는 야곱은 언약 달성에서 소외되어 있고 배제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7:2에 보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미움을 양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나아가서 요셉에게만 유독 장래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두 개의 꿈을 꾸게 하십니다. 이를 기화로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자기들 눈 앞에서 제거하게 됩니다. 이로서 야곱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에는 야곱에게 내려준 언약의 설계도가 담겨 있습니다. 

즉 야곱은 뻥뚫은 인생은 잃어버렸다고 간주된 사랑하는 요셉에 의해서 전부 언약적으로 채워집니다. 역대상에 나오는 유다와 요셉의 경우를 보게 되면, 유다는 비-언약적 태도가 이방여인 다말이라는 며느리에 의해서 부각이 됩니다. 비 언약적으로 미움받을 뻔한 며느리가 도리어 언약적으로 옳은 행위를 하므로서 유다 가문을 살립니다. 

시형제 결혼법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는 시동생은 아들 없는 형수와 혼인해서 아들을 낳도록 해야하고 그 낳은 자식은 자기 자식이 아니라 형의 가문을 잇도록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희생의 의미’가 함유되지 아니하는 존재는 언약노선에 설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와중에서 세상으로부터 언약노선에 속한 자들은 미움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미움을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2-12 06:15 
111강-신 21장 15-17절(미움 받는 장자)1612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1장 15-17절입니다. 구약성경 294페이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여든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이렇게 비틀어버려요. 나에게 두 아내가 있는데, 평소에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는 아내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아들이 먼저 태어나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고 있는 아내가 떡뚜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그러면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아낌없이 그 아들을 장자로 삼아서 상속을 두 배나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돼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흡족하지만 무엇이 나타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우리들의 만족 속에 이렇게 묻혀버려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자신의 본색이 어떤 인간인지, 내가 어떤 인간인데 구원 받았는지, 그게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걸 비틀어버립니다. 두 아내를 같이 사랑할 수 없고, 한쪽 아내를 사랑하고 한쪽 아내를 미워하게 되는데, 늘 미워하기 때문에 그 아내는 제쳐놓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줄 마음이 있었는데,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고 미워하는 아내에게서 아들이 떡하니 태어났을 때, 그때부터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우리 인생을 비틀어버리는 겁니다. 고민거리를 제공해버려요. 

  

고민거리를 제공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자기의 숨겨진 본색이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드러나 가지고, 분명히 법적으로 장자한테 두 배를 줘야하는데, 밉잖아요. 미우니까 제켜버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애한테 두 배를, 모든 상속을 그냥 다 물려줘버립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가 돼요. 

  

그래서 성경말씀 신명기 21장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싶어도,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괴물이 이미 우리 안을 잠식하고 있고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냥 수월하게, 수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꼭 비틀어가지고 그냥 짜내버리죠. 쭉 짜내게 되면, 아, 우리 속에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위배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심이라는 거죠. 본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내 뜻이 아니면 거절하는 그런 것이 우리의 본심에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미운 아내에게서 먼저 난 자식에게 상속을 하면 되지,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미운 아들에게 상속할 때, “참, 하나님 고맙습니다. 내 마음을 들통 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자! 두 배다! 아이참, 더러워서. 내 성질 같으면 내가 니한테 안 주는데, 하나님 보고 내가 진짜 주는 거야.” 이런 식으로 그냥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툭 던져서 상속을 두 배나 줄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겁니까? 삐진 거죠.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일조 하는 사람을 질책을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래 되어 있거든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이 본문 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십일조에 대해서 질책해놓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십일조 하는 자체가 반드시 위선적으로 행하는데, 그 행하는 것이 기준이 없어서 그래요. 그 기준이 뭐냐, 의와 인과 신이 원하는, 그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을 십일조 하는 그 당사자들이 도저히 그것을 뽑아낼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뽑아낼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툭 던져주는 거예요. “자, 하나님 먹으세요. 자, 가져가세요.” 속으로는 ‘에이, 더러워서!’ 하면서 “에구! 십분의 일? 자, 자 여기 있으니 가져가세요. 나 이 정도로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툭 던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십일조를 내면서 그렇지 않는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즐겨낼 인간이 없어요. 자기 것을 왜 남한테 즐겨 뺏깁니까? 그거 말도 안 되죠. 성경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할 때 이 말은 뭐냐, 즐겨 십일조를 낼 마음 자체가 아예 우리 안에는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번역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이것도” 라는 말이 본문에는 없어요. “이것들”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요. “이것들은 행하고 저것들은 단호하게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게. 이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의와 인과 신을 드리는 마음은 행하되, 저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위선적으로 십일조를 행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척결하고, 그걸 저주하고, 그걸 물리쳐라!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은 의와 인과 신으로 충분해요. 그것도 충분한데, 그것이 모자랄 것 같으면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면 되겠는데,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라는 계명의 마지막 목표점으로 백퍼센트 이미 완료가 되어버렸어요. 의와 인과 신. 됐는데, 의와 인과 신으로 모자랄 것 같으면 십분의 일을 계산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의와 인과 신이 곧 십일조의, 십일조뿐만 아니고 모든 율법의 최종 상태에요. 거기에 더 플러스(+) 할 것이 없어요. 

  

의와 인과 신이 2분의 1이고, 그 다음에 하는 2분의 1을 보태서 1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 자체가 잘못되었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로마서 3장의 말씀 그대로에요. 우리가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저주를 더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이 저주를 커버하기 위해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한에서, 자기가 말씀을 지킨 것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께 들이댑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성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주께서는 의와 인과 신,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을 봐요. “십일조 내면서 이거 뭔가 기분 더럽고 하는 것이 있지?” “에이! 없습니다.” “아니, 뭔가 있는데?” “없습니다. 기쁘게 합니다. 지금 스마일하면서 합니다.” 이거 귀신을 속이세요. 절대로 이런 법은 없습니다. 

  

이런 법은, 웃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경우는 딱 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죽어 마땅한 순간, 그 짧은 순간에만 진정 웃어요. ‘에구, 십자가 앞에 내가 죄인인데, 의인되려고 껍죽댔구나! 아이고, 주님 죄송합니다.’ 이럴 때만 웃고, 한 5초가나 봐요. 그거 지나면 안 돼요. ‘이제 감사했으니까 어떤 뭐가 있겠지.’ 또 챙기는 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처음부터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아들이 나오면 항상 웃죠.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아내한테서 아들까지 낳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데, 하나님은 비틀어간다니까요. 비틀어야 우리의 마음이 나와요. ‘저거 안 나가 죽나? 진짜 나가 죽어라!’ 이러고 있는데, 그쪽에서 아들이 나왔으니까, 무시할 수 없고, 신명기 21장을 잊고 싶은데 21장법에 나와 있으니까, 그 애한테 장자 하라고 하니까, 재산을 미운자식한테 다 준다는 것이, 이거는 참을 수 없는 자기의 어떤 굴욕감을 느끼는 겁니다. 굴욕감 느끼라고 말씀 주신 거예요. 이 말씀이 굴욕감을 느끼라고. 

  

그렇다면 이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이 뭐냐, 이래도 삐지고 저래도 삐지고 할 건데. 그리고 또 한 가지 뭐냐 하면 만약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맏이가 나왔다, 맏이가 나올 때, “사랑하는 아내야! 니가 아들까지 낳아줬구나. 그 아들한테 아낌없이 곱빼기로 상속할게.” 이렇게 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그렇게 해놓고, “하여튼 미운 여편네라서 자식 낳는 것도 두 번째 낳잖아. 봐라! 하나님의 뜻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미워하는 이것이 내가 미워한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널 미워한다고 생각해. 이 여편네야!” 또 평소에 그럴 거라 이 말이죠.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아들 데리고 나가든지 마음대로 해라. 귀찮아 죽겠어.” 분명히 이런 마음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죠. 

  

왜?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맏이를 낳았으니까. 하나님이 내편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막 질주하고 나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하나님의 뜻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걸 비틀어버리죠. 그러면 여기에 담긴 뜻은 무엇이냐? 이게 굉장히 심오해요. 여기 담긴 뜻이. 역대상 5장 1절부터 2절까지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해놓고 “(르우벤은 그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방금 읽은 역대상 5장을 딱 보게 되면, 왜 자꾸 혼선을 일으키게 유도하느냐 이 말이죠. 르우벤이 제일 먼저 태어난 아들이거든요. 그럼 장자가 제일 먼저 태어났으니까 르우벤이 되는 겁니다. 먼저 태어나게 해놓고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헷갈리는 것이, 그럼 처음부터 요셉을 제일 먼저 태어나게 하든지. 근데 요셉이 먼저 태어나도 요셉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먼저 태어나게 해놓고 그걸 저 뒤에 구석에다 집어넣어버려요. 

  

먼저 난 자가 나중 되게 만드는 작업을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어요.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죠. 먼저 태어나게 해놓고 장자는 야곱에게 돌아가게 합니다.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자 되게 하는 그 과정 속에 뭐가 담겨 있느냐? 복음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왜 복음이냐? 사람들이 선호하는 메시아를 안 줘요. 오히려 사람들이 다 기피하는 메시아를 줘놓고, 사람들에게 다 미움 받았다, 너에게 미움 받았다, 너에게 미움 받았다, 미움 받았다. 싫다, 싫다, 싫다 해놓고, 주께서 그 사람을 부활시켜버립니다. 

  

그럼 모든 인간은 부활될 자격이 없고 영생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창세기 3장의 조치가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함을 증명해버리는 겁니다. 하야해라, 하야해라 해놓고, 박근혜를 부활시켜버립니다. 죽고 난 뒤에. 이거는 할 말 없는 거죠. 할 말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할 말을. “구원받는데 내가 뭔가 좀 했습니다.” 라는 할 말을 잊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없애버려요. 그래서 “나는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니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구원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니까.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격으로만 우리를 하나님의 영생으로 가게 하시면, 우리는 그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구원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만끽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광만을 돌리게 되는데, 그 영광만을 돌리는 그러한 기능자끼리 모인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천국은 예수님만 영광 돌리는 곳이에요. 

  

르우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관계를 맺어가지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이 르우벤에게서 탈락이 된 거예요. 나쁜 짓해서 탈락이 된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런데 요셉에게는 왜 돌아가느냐 이 말이죠. 르우벤과 요셉과의 관계 사이에는 무려 열 단계가 있어요. 열 명이나 단계가 있는데, 그들은 왜 안 되느냐 이 말이죠. 이게 또 심오해요. 

  

이게 창세기 37장을 찾아가봐야 합니다. 이걸 처음 설명한지가 이십년 전에 설명한 건데 다시 이렇게 설명하게 되어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떤 것을 설명했느냐 하면 창세기 37장에, 먼저 앞에 36장 1절을 보면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대략이라는 것은 에돔의 족보죠.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에돔이라는 것은 야곱과 에서에서 에서가 탈락하고 난 뒤에 에서의 조상이 에돔입니다. 

  

이렇게 에서의 자손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나와 있고, 그 다음 37장 2절에 보면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 그 다음에 요셉이야기가 나와 버려요. 그러니까 야곱의 족보에 구멍이 뻥하고 뚫리는 겁니다. “야곱은 저기 나가 노세요.”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야곱 본인을 야곱 인생에서 빼게 만들어요. “저기에서 구경만 하세요.” “그럼 내 인생은요?” “당신 인생을 대신 채워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요?” “바로 당신이 진짜 사랑하는 여자, 라헬의 맏이가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언약대로 천국 갈 그런 스토리로 만들 것입니다.” 해놓고, 야곱은 비켜가고 그 자리에 요셉을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뭐가 부여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부여돼버려요. 그리고 난 뒤에 창세기 37장 2절을 보게 되면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요셉의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아버지의 첩들의 아들들과 함께 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벌써 에서와 야곱과 나누고, 그리고 본처와 종들과 나누고, 계속 나눈다고요. 나누어 놓고, 무엇과 무엇의 대결상태로 놓느냐 하면 정실부인과 종의 여자에게서 나온 자식들과 마주보도록, 대치하도록 그렇게 조종을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종은 천국 못 가기 때문에. 그럼 율법의 아들은? 율법의 아들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율법의 종밖에 없어요. 율법의 아들 되신 분은 오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에 갈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채워나가야죠.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야 돼요. 이게 성경의 내용에 담겨있습니다. 

  

교인들이나 목사들이나 이걸 어떤 불경으로 봐가지고, “주의 뜻이다. 시키는 대로 하자.” 이거는 유대교입니다. 모든 인터넷에 나오는 설교들을 보세요.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갔으니까 우리는 세상으로 가지 맙시다.” 무슨 설교가 그런 설교가 다 있어요?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는 두 번 다시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촛불집회는 세상 아닙니까? 연속극 드라마는 세상 아니에요? 어디 지리산에 혼자 도 닦으러 가면 세상 아닙니까? 제가 강의할 때 그렇게 했어요. 지리산에 혼자 도 닦으러 갔어도 장날 되면 밑에 내려와야 된다고. 물건 골라야 되니까. 장날은 세상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에 전기세 받으러 오는 한전 직원하고도 말 섞어야 돼요. “전기세 많이 나왔네? 좀 깎아주소?” 이거 세상 아니에요? 

  

성경은 구원받은 입장에서 도대체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기에 유월절 어린양 피로만 구원되느냐?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거예요. 성경을 안 보게 되면 우리는 지가 예수 믿어서, 예수 믿는 행위로 구원된 줄 알고 있어요. ‘잘났어! 예수 믿는 행동이 아주 멋있었어!’ 그런 놀라운 결단력을 내려서 구원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된 사람은 날마다 낯선, 비정상적인 것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돼요. 비틀어지게 해요. 그게 천국 가는 정상적인 길이에요.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좁은 길로 가라고 했잖아요. 

  

서울역 앞에서 데모하는 박사모, 그거는 좁은 길이고, 광화문에서 데모하는 그거는 넓은 길이고. 뭐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죠. 안 된다는 말을 분명히 했습니다. 저에게 하도 묻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제가 가락강의에서 녹음은 안 됐지만 쉬는 시간에 이런 정치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한 적이 있어요. 민주주의는 국회중심이지 대통령 중심이 아닙니다. 서양 정치사를 제가 아는 대로, 나름대로 죽 이야기를 해줬어요. 처음부터 의회제도이지 대통령제도가 아니에요. 그럼 대통령제를 한 것은 뭐냐 하면 동양에서는 왕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뭐 박근혜 내려오라고 하는 그것은 별 의미 없는 거예요. 뭐 내려가, 내려가라 하는 그것은 자칫하면 다른 왕을 달라고 하는 것밖에 안 돼요. 말씀시간에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큰일 나니까. 

  

그런데 지금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하고 첩들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3절을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4절,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 하였더라” 형들이 그를 보고 미워하고 불평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계속 미움 받는 존재인데, 그 존재에게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구원의 정보가, 구원의 내용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주위로부터 미움 받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요. 

  

철딱서니 없는 요셉은 자기가 꿈을 꿨는데, 그랬으면 꿈에 대해서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이게 철이 없어가지고 꿈 이야기를 형들 앞에서 막 자랑질을 하는 거예요. “꿈을 꿨는데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한테 절을 하더이다. 곡식 단을 묶었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곡식 단들이 내게 절하더이다.” 이걸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요셉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안 죽이고 싶어도 죽일 기회를 제공한 셈이 돼요. 

  

이게 뭐냐 야곱과 천국과 이어지는 유일한 과정입니다. 야곱이 잘나서가 아니라 야곱이 사랑하는 자식이 야곱이라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미움 받는 희생 제물로 제공되어야 되는 거예요.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움 받는 자를 희생 제물로 제시한다는 것. 사랑받는 자를 제시하게 되면 이거는 정성이 돼요. 정성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맨날 음력 설 전이나 명절에 보게 되면 새벽 4시에 보게 되면 정한수 떠놓고 옷 갈아입고 아주 부엌에서 빌어요. 빌 때 그게 정화수거든요. 시커먼 꾸정물 떠놓고 비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깨끗한 것을 안 받아요. 그리고 우리의 더러운 것도 안 받아요. 이래도 안 받고 저래도 안 받아요. 그런데 뭘 받느냐, 하나님께서 일을 만들어요. 일을 만들어서 가만히 있는데 미움을 사. 미움을 듬뿍 받는, 세상에서 미움 받는 것만 받아요.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사건이기 때문에. 왜? 장자가 르우벤이 아니고 요셉이냐? 그 모든 형제들로부터 미움 받았고 아버지로부터 잊혀진 존재기 때문에. 아버지는 요셉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널브러져있었어요. 

  

그런데 일은 누가 다 했는가? 일은 요셉이 다 해가지고 야곱의 언약을 야곱이 이룬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잃어버린 자식, 내놓은 자식, 죽은 자식, 이미 죽어버린 그 자식이 다 이루어서, “이건 아버지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이루어진 겁니다.” 하고 얼른 아버지한테 갖다 바치더란 말이죠. 잃어버린 예수님이 다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하고 똑같은 이치가 되는 겁니다. 그 만화가 형사 가제트 아닙니까? 형사 가제트가 아무리 설쳐도 일은 누가 하느냐 하면 강아지 한 마리하고 소년이 범죄를 다 처리해놓고 나중에 영광은 가제트 형사 혼자 다 받잖아요. 모자 팍팍 돌아가고 팔 길게 나오면서 지 혼자 영광 받고 있잖아요. 

  

그러면 요셉은 그렇다 치고, 역대상 5장에 보면 그럼 유다는 왜 나오느냐, 이게 어려운데 시간이 없어서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원래 창세기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는 것을 보면 이게 투톱이에요. 뭐냐 하면 죽은 자가 유다에게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열 두 제자가 유다냐? 아니에요. 요셉 대목에 보니까 요셉도 못지않아요. 요셉에게는 아마 목자가 나올걸요. 창세기 49장에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24절에 보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오리라” 

  

이래되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최종 결승에 두 톱이 올라간 거예요. 유다냐 아니면 요셉이냐, 요셉이냐 유다냐, 유다VS요셉, 요셉VS유다, 두 톱이 올라간 거예요. 이 두 개의 대등되는 요소가 등장한 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질 때, 북쪽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인데 바로 요셉지파에요. 남쪽은 뭐냐 유다지파에요. 열둘을 대표하는 거예요. 근데 누가 망하느냐, 북쪽은 망하고 유다는 떠버려요. 마지막 최종 결승전에서 유다가 올라가버립니다. 

  

그럼 유다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그것은 바로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요셉이야기 죽 나오다가 갑자기 스톱이 돼버리고 유다이야기가 끼어들어버립니다. 유다에게 아들이 세 명인데 유다는 뭘 무시했느냐 하면 시형제결혼법을 무시했어요. 시형제결혼법이 뭐냐 하면 총각인 시동생은 늙어빠진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놓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는 원칙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해요. 눈앞에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차마 당신은 내 아버지라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장자가 먹어요. 세상 전체를, 우주 전체를 하나님이 언약이 있는 장자가 독식하게 돼요. 독식. 몽땅 다 가져가요. 그럼 나머지기는 뭐냐, 저주는 뭐냐, 그것의 종이 되는 것이 저주가 돼요. 에서는 야곱의 종이 되어야 돼요. 둘 다 잘 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가 독식하게 되어 있어요. 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유다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하면, 유다의 며느리가 다말인데요, 그 다말이 이방여인이에요. 이방여인인데 뭘 아느냐 하면, 이방여인에게 뭐가 담기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담겨버려요. 

  

그러니까 이 다말이라는 여자는 비록 이방여자지만 이 집의 맏이하고 결혼을 했어요. 결혼을 했는데 유다가 보기에도 지 자식들이 전혀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새로운 며느리는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이방여자지만. 그냥 베트남여자라고 생각하면 돼요. 또 베트남 여자라고 하면 목사님이 무시한다고 하니까 필리핀 여자라고 하는데, 필리핀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저 이방여자가 들어왔는데 그 여자가 복음을 알아버리고, 진짜 한국에 있는 첫째, 둘째아들은 교회 다니고 모태신앙이라도 복음을 몰라요. 관심도 없고.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복음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첫째 아들 죽여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아들이 형님 아들이 되는 것이 싫어가지고 사정을 딴 데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또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보니까 어린 세 번째 아들도 죽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세 번째 아들 셀라가 장성해도 그 늙은 형수하고 결혼 안 시킵니다. 이게 뭐냐 우리를 틀어버립니다. 역시 인간은 언약 적이 아닙니다. 반 언약 적이에요. 주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귀 편에 속해요. 유다가. 

  

그런데 누가 아느냐, 고맙게도 그 주변에 복음을 아는 며느리가 유다 가정을 살립니다. 그러면 유다 가정에서 주님이 나왔다는 말은 유다 가정에 뭐가 들어있다는 말이 되느냐 하면 희생물이, 아무것도 모르는, 언약도 모르는 인간을 언약 쪽으로 끌어당겨서 천국 가게 만드는 그 희생된 요소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다말이라는 이방여인에게. 미움 받는 이방여인이 오히려 미워하는 쪽을 살리는 방식이 복음인 거예요. 

  

이 다말이라는 여자가 셋째를 달라고 하니까 안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말이라는 여자가 창녀로 변장해요. 아버지가 와서 창녀로 변장해서 관계를 맺어버려요. 관계를 맺어버리고 돈 대신 딴 것을 달라고 했어요. 지팡이하고 끈과 도장을 달라고 해서 그걸 딱 쥐고 있었다 이 말이죠. 딱 쥐고 있는데, 나중에 세월 지나서 사람들이 당신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니까, “뭐라고? 우리는 하나님 믿는 귀한 언약의 가정인데 그런 바람피우는 며느리는 용서할 수 없다.” 이 말은 이참에 잘됐다 이 말이에요. 이방여자 떨어내면 우리 셋째 아들 살겠다는 이 말이에요. 자기 아들 살까 싶어서. “누구야? 어느 놈이야?” 청문회 나와서 다 했어요. “누구야? 너하고 관계 맺은 남자가 어느 놈이야?” “이놈입니다.” 하고 내놔버렸어요. 보니까 자기거든요. 재판하는 본인이 했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악녀로 재판받을 그 며느리가 바로 성녀였던 겁니다. 성녀, 거룩한 여인이에요. 상대적으로 의로운 여인이었어요. 전에도 어느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바로 “나 죽을랍니다.” 하는 이것이 미담美談입니다.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고 하는 것. 유다족보 내에 다말의 이야기는 미담美談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주의 언약은 바로 그런 식이에요. 미움을 받게 해놓고 오히려 미워 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기쁜 소식이 전달되는 것. 그렇게 될 때, “미움 받아도 마땅한데, 저주받아도 마땅한데 구원해주셨군요.” 하고 눈으로 자기 행함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나 대신에 미움 받아 희생하신 그쪽으로 눈이 돌아갈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겁니다. 장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비틀기 위해서 이 계명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것이 아예 버릇이 되었습니다. 남한테 미움 받는 것을 천하보다 싫어하는 이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습관으로 인하여 도리어 미움 받는 분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이제부터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