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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10강-아릿다운 포로(신21;10) 1612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5. 06:57
2016-12-04 15:04:02조회 : 36         
   아리따운 포로 1612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리따운 포로(신명기 21:10-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DgS-7m15-Vw, Hit:2

 이근호16-12-04 15:47 

아리따운 포로 

2016년 12월 4일                     본문 말씀: 신명기 21:10-14 

(21:10) 네가 나가서 대적과 싸움함을 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붙이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21:11)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연련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21: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21: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거하며 그 부모를 위하여 일 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21: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게 되면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왜 기뻐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여유를 부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권리 행사를 원할 수 있는 형편에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욕망의 요구를 충족시킬 상황이라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즉 “나 이 정도로 대단해!”라는 사실을 상황이 증명해준다는 것이 즐거운 겁니다. 이는 곧 ‘자아 도취’입니다. 전쟁에서의 승자로 결론났다는 것은 ‘자아 도취’를 행사할 권리를 확보했다는 말이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는 승리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가 자꾸만 진짜 자기를 남에게 드러내기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즉 진짜 자아상은 ‘익명적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남들에게는 다른 자아상으로 자기 자신을 나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해서 그 내부적 자아상까지 하나님의 법 앞으로 호출시키십니다. 인간들은 극구 자신에 대해서 선별적으로 관리해서 나타내어주는 것만 타인들이 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숨겨진 자아상을 중심으로 절대적 존재로 신격화되어 버립니다. 즉 “누가 뭐래도 나는 나에게 신과 같은 존재다. 건드리지 말라!”가 됩니다. 법은 이러한 인간들의 노림수를 방치하지 않고 찾아듭니다. 외부와 내부로 구분짓는 우리의 시도에 하나님의 법으로 찾아가서 그 교차점에 형성시킵니다. 

마치 두 개의 도로가 4거리에 교차를 이루는 것처럼,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두 가지 상황을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하고, 그 만나는 그 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인간에게 법적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라는 집단적으로 움직여지는 상황‘이라는 하나의 노선과, 포로 여자를 처리하는 사적 상황을 법을 통해서 만나도록 조치하십니다. 

“내가 획득한 포로이니 끝까지 나의 그 여자에 대한 주인의식을 속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본성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저지당합니다. 남자가 여자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은 또다른 원리의 저촉을 받게 됩니다. 그 원리는 바로 ‘모든 남자는 남성의 대표자요, 모든 여자는 여성의 대표자로서 존재 한다’는 겁니다. 

‘자기 아내, 내 아내’를 내가 뽑았다는 것으로서 결코 사적 권한이나 권리를 상대방에서 행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은 모든 여자를 한 부류에 집합시키고 그 중의 한 여자는 전체 여성성을 대표하는 취지에서 뽑은 겁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를 데리고 사는 남자는, 본인의 권리나 의사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남성성’은 ‘전체 여성성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에 놓여 있는가’를 대리적으로 보여주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남자가 한 여자가 뽑아서 자기만을 위한 살림을 차리는 것이 부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부에게 그런 것으로 법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여성성을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적인 욕심으로 여성을 자기 여자로 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건드린 것이 되어서 ‘욕보인 바’가 된다는 겁니다. 즉 여자에게 걸쳐 있는 여성성을 무시하고 개인의 욕정 채움으로 여성을 다룬다면, 정작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설정해 놓은 ‘남자 아니면 여자’ 혹은 ‘여자 아니면 남자’의 분류방식을 무시하는게 됩니다. 

남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라 아내를 삼으면서 여전히 나타내고 있는 심보는 ‘여성에 대한 우월성’입니다. 즉 ‘나보다 약한 자여. 너보다 강한 나의 소유물이 되어라!’라는 정신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을 보게 되면, 남자의 이름은 ‘흙’이요 여자의 이름은 그 반대가 되는 ‘생명’입니다. 

즉 흙의 입장에서는 ‘생명’의 작업이 아니면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여성 쪽이 하나님 쪽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잠들게 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이 ‘남자’로 일원화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남자가 곧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성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적인 욕정에 의해서 함부로 여성성을 훼손한 것이 어떻게 법적으로 ‘욕보인 바’가 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모멸성과 모독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즉 약하기 때문에, 혹은 남성을 그리워한다는 그 성질을 남성이 여성을 함부로 할 수 있는 빌미로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남자를 사모하고 잘해준다고 해서 그것을 약점으로 여겨 남성이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 계기로 삼아서는 아니됩니다. 이게 바로 여성이 갖고 있는 ‘생명’의 취지를 공격하고 파괴시키는 바가 되는 겁니다. 여성은 남성들이 사적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숱한 관계성이 배후에 얽혀 있습니다. 그것은 남성보다 더 가까운 자리에서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징벌의 징후를 많이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외부 전쟁은 이제는 이스라엘 정신 내부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전쟁을 얻은 획득물로서 인생 역전을 개인적으로 누리겠다는 욕심을 남성이 갖고 있다면 그 획득물 속으로 아리따운 여성이 개입하게 되면 어느새 그 남성은 여성의 미모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겁니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여자 포로’와 ‘아내’라는 위상이 같은 급이 아닙니다. 

아내의 미모가 시들해지고, 같은 살기에 귀찮다고 해서 전에 포로된 시절을 생각해서 여전히 ‘자신을 위한 포로’라고 다루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 여성은 남편된 남성의 실상을 폭로하는 임무가 있기에 ‘여호와 전쟁’으로 가정내의 문제로 확산되어지는 겁니다. 외부적인 전쟁이 끝이 아닌 겁니다. 

외부와 내부의 만남은 감추고 싶은 자신의 본색이 들통나는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반복적으로 질의를 하나님에게 하게 됩니다. “신이시여. 나는 왜 내 마음대로 살면 안되는 겁니까? ” 주님은 답변하십니다. “너보다 약한 존재인 아내에게 물어보아라. 거기에 너의 죄를 들추어내는 답이 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주님만이 홀로 영원한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주어지는 새로움을 통해서 우리 본색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0강-신 21장 10-14절(아리따운 포로)1612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1장 10-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4페이지입니다.

 

“네가 나가서 대적과 싸움함을 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붙이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연련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거하며 그 부모를 위하여 일 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 마음대로 가게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성경을 우리가 보면서 정조준해서 핵심을 보는 것, 그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두 가지 경우가 나옵니다. 하나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해서 포로 잡은 이야기. 그 한 가지 노선이 있다면, 또 하나의 노선은 그 포로 중에서 아리따운 여자가 있어서 자기 아내로 삼고자 하는 우리 내면의 욕망, 이 욕망의 노선이 하나 있습니다.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두 개의 노선을 교차를 시킵니다. 교차되는 그 접전지점, 서로 만나는 그 지점, 두 개의 길이 하나의 사거리를 만드는 그 지점에 우리가 정조준을 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담겨 있어요. 상관없이 보이는, 전쟁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연애하는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죠. 상관없이 보이는 것이 교차점을 형성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고요.

 

그렇게 되게 되면 거기서 익명적인 존재가 법적으로 책임져야 될 주체적 존재로 거기에 포착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남을 알아도 남은 나에 대해 모르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요. 내가 보여주는 것만 남들이 알아채서 박수쳐주고, 내가 숨기고 싶고, 안 들키고 싶은 것은 끝까지 영원토록 남들에 의해서 노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것을 익명적인 존재라고 하는데, 우리는 남한테 보여주는 자아상 따로 있고 순수한 나는 숨기고 싶은. 그걸 익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을 은닉시키는, 이름을 없애버리는, 진짜 니가 나를 알고 싶어? 나 없다고 여겨라! 이렇게 숨겨버리는 겁니다.

 

서울에 삼촌이 있는데, 물론 교회는 안 나가죠. 물론 복음 모르고. 근데 내가 목사니까, 너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떻게 가르치느냐? 이걸 묻는 것이 아니고, 한 오년 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대뜸 한다는 말이 교인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나오느냐? 묻는 거예요. 이것은 소통하는 방법에 있어서, 니는 내 조카고 내 친척이니까, 너와 나의 공통적인 관심사를 이야기하려면, 니는 평생 동안 얼마나 출세했느냐? 나는 이만큼 출세했는데 니는 얼마만큼 출세했는가? 하는 그걸로 내보이고 싶은 거예요. 나는 그 삼촌에게, 삼촌! 그 성경말씀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이렇게 다가가 버리면 이것은 삼촌에게는 감추고 싶은 부분이에요.

 

왜냐하면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본다는 것은 주님의 법에 포착이 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인간인가가 들통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말씀이 다가옴으로써 평소에 안 하는 짓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성경말씀에 대해서 질문을 유발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이 뜻은 뭔 뜻입니까? 이거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궁금해서 하나님한테 묻든지, 어떤 목사한테 묻든지. 말씀이 궁금해서 관심사를 가지고 묻는다는 것은, 그래서 정답을 알아채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묻는다는 그 자체가 성경을 통해서 보면 잘못됨이 비로소 나오는 거예요.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잘못되게 살아가고 있고, 형편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질문이라는 그 방식을 통해서 스스로 그걸 노출시키게 되어 있어요. 정답을 알아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문 자체가 형편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말씀과 마주쳐야 비로소 알거든요. 그 교회 몇 평이고, 그 교회 난방 잘 되고,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면, 끝까지 겉도는 것이 돼버립니다. 우리 친척 중에 합동측이 몇 명이고, 통합측이 몇 명이고, 장로 교인이 몇 명이고, 이렇게 한다면 이거는 계속해서 남한테 보여주고 싶은 가짜 자기를 계속 내뿜어서, 진짜 자아는 계속해서 은닉된 존재로 유지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감추고 싶은 것을 제발 건드리지 마라!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말씀에 대해서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까,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자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무식한 사람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 무식한 사람이 되게 되면 그동안 내가 남한테 대외적으로 쌓아놓았던 나 잘난 존재라는 것이 이게 구멍이 생겨버리고 이게 펑크가 난다 이 말이죠. 계속 잘난 존재로 과시한다는 것은 못난 부분은 남한테 안 들키고 싶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십대 자녀가 있는데, 취직을 한 거예요. “아빠! 나는 취직해서 한 이백오십 만원 받습니다.” 밥상머리에서 그 이야기가 아빠, 엄마한테 대화가 통한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아빠가 묻죠. “니는 취직해가지고 성경 하루에 몇 장 보느냐?” 그러면 그 자식이 “아빠! 일도 바쁜데,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죠!” “니가 지금 하는 것이 바로 익명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거야.” “내가 보여주는 것만 알고 내가 감추고 싶은 것은 나한테 지적질 하지 마세요. 나는 납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갈 테니까 돈만 대주고 딴 것은 일체 신경 끄세요.”라는 것밖엔 안 됩니다. 심지어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 신혼 때는 같이 살고자 하다가, 점점 같이 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3개월도 안 되어서 대번에 눈치 채죠. ‘아이고, 통장 따로 관리해야 하겠구나. 이거 잘못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이렇게 위기감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결혼하든, 뭐하든 간에 인간은 이상스럽게 자기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주는 겁니다. “니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포로 잡아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제공해서 포로까지 주시니, 세상에! 이런 좋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나오죠.

 

근데 거기다가 더 세분화시켜버립니다. 니가 포로 중에서 이쁜 여자가 있어서, 이쁜 여자를 아내로 삼고자 하여 아내로 삼되, 하지만 전쟁에 내가 승리자라는 그 기분 도취는 그 여자를 아내로 삼은 그 순간부터는 니가 그걸 끝내라. 나는 승리자고 너는 패배자의 여자라고 하는 것을, 이미 결혼이라는 그 법적으로 들어오면서 그거는 손을 털어야 되는 거예요. 손을 털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니는 못난 집안이고 나는 잘난 집안인데 내가 니를 불쌍히 여겨서 결혼해준다는 이것을 결혼하고 난 뒤에는 손을 털어야 되는데, 결혼하고 내내도 니그 집에서 혼수 얼마나 해왔느냐 안 해왔느냐, 니가 이불 한 채를 해왔느냐 안 해왔느냐, 그냥 빈손으로 왔느냐, 안 왔느냐는 등등의 이런 소리를 계속 해버리면 결혼생활을 계속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처음에 노예를 삼은 것을 계속 노예로 삼으면 안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은 외부에서 나한테 힘으로 주어지는 것은 덥석 내 소유물로 잡고자 하는 거예요. 승리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그 승리를 복으로 소유했다, 그게 바로 나야! 라고 하는 것이 법의 끝이 아니에요. 이게 그 소유된 포로가 니 내부 속에 들어가서 니가 감추고 싶은 니 내부의 허허실실을 완전히 폭로시키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는 외부전쟁이 내부전쟁으로 번지게 되는 겁니다. 이게 말씀이 진행하는 방향이에요.

 

“하나님의 복으로 이렇게 부자 되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에요. “니가 그 돈 가지고 어디에 쓸 건데?” 그 다음부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집니다. 그 돈이 내 소유가 아니고 돈이 나를 소유했을 경우에는 그 많은 돈의 쓰임새에 따라서 나의 그 허점이, 나의 그 죄악이 그 돈 때문에 그 다음에 노골적으로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다 이게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닌데, 우연찮게 많이 듣게 돼요. 사적인 이야기를 해서 뭐하다마는, 복음을 위해서 쓰고 싶은 갈등을 일으켜요.

 

자기 가족은 복음을 모르지만 한 동네가 되어 가지고, 뭐 목사, 장로라 해도 결국은 유산 때문에 싸운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게 외부적으로 목사니, 장로니 하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돈 욕심 앞에서 자기가 숨기고 싶은 자아는 끝까지 숨기고 싶고, 돈만 가지면, 유산만 많이 받아 챙기면 복이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법적으로 포착된,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노출된 존재로, 그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다들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외부에서 전쟁에 승리했다, 그러니까 저 여자들을 고르는 것은 내 소관이다, 나는 승리자고, 저 여자는 포로 잡혔으니까, 이쁜 것 나와! 하고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춘향전에 그런 대목이 나와요. 춘향이 사는 동네에 사또가 부임을 했는데, 그 사또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동네 기생들을 불러내는 겁니다. 삼월이! 춘심이! 춘심이 하면 또 화가 나겠네. 이름 함부로 부르면 곤란하겠다. 뭐 머시기! 해가지고 그 중에서 제일 예쁜 것을 이방이 사또에게 보이면, 이방이 비선실세가 아닙니까? 그럼 사또는 에잇! 다 맘에 안 든다고 하면서 내가 소문 듣기로는 춘향이가 최고라던데?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내가 완전히 그 주민들을 포로 잡은 것처럼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사또보고 욕하지만, 내가 만약에 사또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사또 됨이 이를 위함이 아닙니까? 하고. 이것 때문에 사또가 된 거예요. 사또 되어서 남이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릴 때, 이게 나의 바로 익명적인 존재에서 바깥으로 보여주는, 나는 이 정도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가짜 자아상을 내놓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 이정도야! 라는 그걸 희망으로 삼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잖아요. 조금만 참으면 남한테 부러운 존재로서 나는 내 존재를 내세울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진짜 숨기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걸 용납하지 않고 말씀을 퍼부으러 찾아가는 겁니다. 그 여자에 대해서, 그 포로에 대해서 니가 함부로 할 수 있다고 덥석 물게 되면, 니가 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렸다. 여호와의 전쟁은 니 소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소유했다고 여기는 그것에 니가 도로 물려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니 내부에서 여호와의 전쟁이 한바탕 붙을 거야. 니는 본격적으로 책임져야 돼! 라는, 그 책임져야 될 그 내용이 여기에 나오는 겁니다.

 

오늘 내용을 보게 되면, 11절을 보면 우리의 주목을 끌죠.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여자를 보고 연련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자, ☐에 뭐가 들어가느냐? 성경에 보니까 아리따운, 이것이 들어가요.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여튼 나이를 불문하고 아리따움에 왜 그렇게 매료되는지. 선악과 따먹을 때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해서 따먹었잖아요. 그 선악과가 모과라면 안 따먹었을 거예요. 아리따운 열매기 때문에 따먹었단 말이죠. 아리따운, 아름답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아름다움에 영원히 포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내부에 이미 장착되어 있어요. 외부에서는 그럴싸하게 자기가 권력자라고 우겨도, 내부에서는 그 아름다움에 포로가 되는 겁니다. 외부 전쟁에서 영웅이 된다 할지라도 내부적으로 우리는 계속 영웅으로 남을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움에 우리는 자진해서 포로가 되고 싶어요. 여자도 마찬가지고 남자도 마찬가지고. 여자는 보석 같은 아름다움에, 남자는 그 보석을 지닌 여자의 아름다움에 또 매료가 되어서 자진해서 포로가 되죠.

 

그러면 인간은 본인이 권력자라고 내세울 형편이 못 됩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어떤 무엇에 얼마든지 종으로 스스로 무릎을 꿇을 용의가 돼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합니다. 돈에 굴복하지만 또 돈보다 더 센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그러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전쟁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그 전쟁의 포로로 잡혀오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그런 아리따운 여인이 없으니까 안심 푹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연련하여, 자기가 그걸 차지하려고 하겠죠. 이거는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고, 세상에 모든 것이 그 아름다움에 매료 되어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어떤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는 개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암컷관리를 그렇게 잘했어요. 그러니까 암컷이 한 다섯 마리가 있었는데 줄곧 암컷이 새끼를 안 낳아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새끼 낳는 것을 귀찮아하고. 귀찮고 사료도 많이 드니까. 그런데 그 마을에 수컷이 한 마리 있었어요. 그 수컷이 있은 이후로 어느 날 암컷 다섯 마리가 동시에 스물여섯마리의 새끼를 낳았어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요. 그래서 반상회를 해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암컷 주인들은 우리 암컷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고, 질이 나쁜 암컷도 아니라고 합니다. 근데 보니까 분명히 저 수컷 하나가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수컷의 여자 주인은 아주 강경하게 자기 수컷에 대해 변호에 나섭니다. 우리 수컷은 내가 단도리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절대로 암컷에게 어떤 짓을 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반대를 했어요. 그래서 검사에 들어갔습니다. 새끼 스물여섯 마리에 대해 유전자 검사를 했어요. 유전자 검사를 해서 다 조사해보니까, 일치! 일치! 일치! 일치!...., 스물여섯마리 전부 다 일치에요. 일치가 아니고 자연의 이치입니다. 수컷 아줌마는 ‘이상하다 내가 단도리를 잘 했는데?’ 수컷 본인도 수컷의 본능에 지도 관리가 안 되는데 주인이라고 관리가 되겠습니까? 암컷이고 수컷이고 다 관리가 안 돼요.

 

따라서 지금 포로가 됐니, 뭐 했니 해도, 하나님의 전쟁이니까 어떻게 법을 줘도,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거에요. 법을 백날 줘도, 법을 지키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이 법을 준 것은, 우리가 이 법에 대해서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러한 반발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법도 초월한,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은 완전한 내 자아를 따로 꼬불쳐놓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하나님이라도 이것은 손대지마세요! 그것으로 악마 같은 나라는 절대성을 뽑아내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아리따운 여자를 포로 잡아서 왔을 때는 남편이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이미 아름다움에 자기가 패배자가 됐다는 것에 감을 못 잡는 겁니다. 그래서 데려왔는데 남자는 계속 궁시렁거리죠. “니가 백날 아름다우면 무슨 소용이 있어? 니는 나 아니면 죽었어. 니는 영원한 나의 포로야.” 이런 감을 갖고 있겠죠.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일 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자 여기서 두 개의 노선이 교차를 이루고, 교차 가운데 그 접전지점에서 정조준 해야 될 믿음이, 복음이 나온다고, 아까 제가 구조를 설명했죠.

 

지금 포로 된 아리따운 여자가 일 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그에게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된다고 할 때에,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금도 이게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깊은 내막의 진리에 관한 건데요. 여자에서 남자로, 이렇게 사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성경 자체가 그래요. 그러니까 여자가, 여자 개인이 여자를 벗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남자에게 오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갈 때는 전체의 여자의 대표성을 가지고 한 남자한테 시집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굉장히 어려운 말을 했어요.

 

그리고 남자가 자기 아내를 뽑을 때, 그거는 내 아내라는 입장에서 개인으로 그 여자하나를 내 아내로 삼는 것이 아니고, 전체 남성을 대표해서 그 중의 여자 하나를 데려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는 여자 따로 분류하게 되어 있고, 남자는 남자 따로 분류를 하게 되어 있어요. 개개인이 되어 버리면, 여자라는 본성을 벗어버리고 남자라는 본성을 벗어버리고 일대일로 만나자. 절대로 성경에서는 일대일로 남자, 여자가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처음부터 질문을 새로 해야 돼요. “왜,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몸에 양성(여성, 남성)을 한꺼번에 지니지 않고, 왜, 어떤 사람은 여자로, 어떤 사람은 남자로 만들었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을 우리가 하나님한테 하게 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거기에 대해 그 질문을 하는 자체가, 우리가 뭔가 켕기는 것이 있고, 아, 이거는 참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불만 섞인 태도로 질문을 하는 것이 돼요. 이상하잖아요. 왜? 세상에 세 번째 성이 없고, 네 번째 성은 왜 없습니까? 왜?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한 게 불만이가?” 하시겠죠. 불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가 안 되잖아요. 남자, 여자 말고 남자 여자를 갖춘 사람이 한 30퍼센트 돼야 하는데, 남자 50퍼센트 여자 50퍼센트 왜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내가 남성 속에 포함됐다는 하나님의 분류자체를 독자적으로 독립해서 나는 나부터 시작하고 싶은 심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저 여자를 골랐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남성을 대표해서 골랐기 때문에, 저 여자는 나의 여자가 아니고, 저 여자가 배경으로 깔고 있는 전체 여자를 대표하기 때문에, 나는 남성의 대표, 저기는 여성의 대표니까, 남성은 이래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내 여자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니가 뭐?” 이래 돼요.

 

전체 공동적인 남성의 일부가 아니고, 나는 나다가 이게 타고난 죄성입니다. 악마성이에요. 백날 전쟁에서 이겨서 여자를 포로 잡아오면 뭐합니까? 이거는 내가 그 여자를 아내로 소유했다가 되죠. 그 여자에게 전체 남성은 여자에게 이렇게 해야 남성으로서 바른 태도라는 그것을 보여주려고 그 여자하고 결혼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법은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어떤 남성이 여성을 고를 때는 개인적인 자격으로 여성에게 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남성은 하나님이 분류하신 그 분류의 취지를 가지고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이 정해준 남성은 여성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태도에 합당하다는 것을 거기서 일부 보여줘야 될 책무를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부부의 원칙입니다. 감히 남성세계가 감히 여성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분류한, 하나님이 남성, 여성을 따로 떼어놨잖아요. 떼어 놓은 것을 부부가 되어서 한 몸 되게 했다면, 한 몸 되게 접착시키는, 그걸 이렇게 연결시키는 그 교류에, 처음부터 남성, 여성으로 떼어놓게 했던 그 떼어내신 원리가 접착되면서 그 원리가 새롭게 부각되는 하나의 계기로써 결혼이라는 것으로 붙여준 거예요. 이해되시기가 참 힘들죠? ‘저 여자 끌리네. 내 여자 삼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송에 보니까 어떤 사장님인데, 본처 있고, 다른 여자 있고, 또 따로 여자하나 있고, 또 자기 회사 경리 팀에 여자하나 있고, 또 새로 사귀었는데 이혼하고 난 뒤에 이혼한 여자를 계속해서 지금 사귀고 있고, 그래서 총 다섯 명인데, 화젯거리가 되어서 그 이야기를 가지고 기자들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그 사장님은 내가 마음에 든 여자를 내가 골랐다는 겁니다. 삑(☓),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거예요. 그러면 내 마음에 드는 여자하고 평생,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하면서 평생 오순도순 그 여자만 사랑하면서 사는 남자는 어떠냐? 그것도 삑(☓),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치고, 부부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분류시킨 그 원리를 같이 부부됨으로서, 아! 이것 때문에 남성은 남성 전체로, 여성은 여성 전체로 이렇게 떼어놓았구나! 그것을 평생 보여주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그러한 일을 하라고 부부되게 하신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와요. 14절에,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 마음대로 가게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여기 욕보였다는 말이 있어요. 욕보였다는 말은 아리따운 그 여자가 전체 여자를 대표해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 안 하고, “니 아니면 여자 없나? 니 아니면 여자 없어?” 그렇게 돼버리면 그 여자를 욕보인 것이 아니고 전체 여자를 욕보인 거예요. 전체 여자를.

 

근데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아니고서야 어떤 남자가 이걸 알겠습니까? 성경을 봐도 나는 안 듣는다고 할 거예요. 어떤 남자가 이걸 알겠습니까? 지 욕구대로, 지 욕망대로 살뿐이죠. 그러니 이 성경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난 자체가 사람에게 욕보이고, 결혼하면서 욕보이고, 결국은 하나님한테 욕보이고, 평생을 하나님한테 욕보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쟁에 승리해서 포로 잡았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날 위해서 승리케 하셨구나.’ 아닙니다. 니가 어떤 존재인지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한 거예요. 근데 아리따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니는 내 거야! 니는 나의 영원한 하녀 시키려고 데려왔어!” 그게 아닙니다. 그 여자가 친정집에서 울고 있습니다. “미쳤나? 니 호강 시켜주는데 울긴 왜 울어?” 아니에요. 그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의 엮어진 모든 관계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차지할 때, 그 여자만 달랑 끊어오죠. 그걸 끊을 수 있는 자격이 남성한테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이걸 정조준 해야 될 때가 왔는데, 그 해답은 무엇이냐, 이거는 제가 지난 울산강의에서 했습니다. 암컷과 수컷에 관한 겁니다. 암컷과 수컷에 관한 것은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와요. 아담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여자가 붙은 것은, 여자를 남자에게 보냈거든요. 특히 아담을 잠들게 한 후에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서 여자를 붙여줬다는 것은, 거기 남자 안에 무슨 손길이 담겨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어요. 그러면 남자라는 작자들 자체가 영원히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여호와다움을 늘 간섭받아야 돼요.

 

그 여호와의 간섭이 뭐냐 하면 함부로 무시하고 있고, 술 먹으면 패도되는, 그 연약한 여성이 여호와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밀면 밀칠 수 있는 그 모습이 여자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여자 이름이 바뀝니다. 남자 이름도 바뀌어요. 남자 이름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흙과 결혼한 여자의 이름은 생명입니다. 하와입니다. 연약해서 무시당할 여자가 오히려 흙에 속한, 죽어야 마땅할 남자를 살리는 역할이 여성 속에 있어요. 여성 속에.

 

따라서 남자는 여성의 약함을 통해서 자기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그 약함 속에서 찾아내야 돼요. 약한 여자와 결혼해서 그 여자의 약함이 새롭게, 새롭게 느껴져야 합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부부라고 하는 것은 만난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라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욕정일 뿐이고, 뭐냐 하면 서로에게 서로를 존경할만한 것이 계속해서 나와 줘야 계속 부부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새로운 것. 깜놀이에요. 깜짝깜짝 놀라는 것. “당신한테 그런 면이! 저런 면이! 이렇게 잡채를 잘해? 놀랬어! 이렇게 맛있는 것이?”

 

갈수록 새로운 면이 나오는 것은, 새로운 면을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제공하게 되고, 그 새로운 면이 나온다면 기존에 남자가 자기주장을 자꾸 포기하게 돼요. “나 정도 되니까 너 같은 것하고 살아주는 거야.” 이게 아니라, 그 새로운 면 앞에 남자는 자기 존재성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아, 니 없이는 나 못 살겠다.” 이게 계속 나와 주는 거예요. 이게 여호와께서 성도를 꾸려나가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한테 뭐가 있다? 여호와의 법이 있는 거예요.

 

그 법이 있음으로써 무시할 여자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법이 나온다면, 그 법은 남자로 하여금 ‘내가 왜 힘들게 일해서 돈 벌면서 죽어가고 있는가? 나는 왜 이 땅에서 살다가 곧장 죽어야 되느냐?’ 그 이유를 내가 무시하는, 나한테 당하기만 하는 그 여성 속에서 그걸 찾아낼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나를 찾아가는 새로운 면면들이 되는 겁니다. 오늘 논리가 어려우면 녹취가 올라올 테니까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법아래 포착될 때, 익명적인 존재에서 법적으로 책임지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착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계성에 있는 성도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외부의 소유가 내부에서는 오히려 우리 소유성을 파괴시키는 하나의 법으로 작용합니다. 내가 아내를 가졌다, 내가 아내를 소유했다, 그것이 나중에 아내로 인하여 구원받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