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09강-피 처리(신21;1-5) 1611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28. 08:51
2016-11-27 14:57:11조회 : 28         
   피 처리 16112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피 처리(신명기 21: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NxmLty-q2Q, Hit:1

 이근호16-11-27 15:39 
피 흘린 죄  

2016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신명기 21:1-5 

(2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에서 혹시 피살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21:2) 너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나가서 그 피살한 곳에서 사면에 있는 각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21:3)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21:4)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21: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땅의 특성은 백성들이 독단적으로 처리할 그 어떤 여지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땅은 주시는 율법과 관련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일들을 쉬지 않고 그 땅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마치 땅 밑에 법의 보일러가 깔려 있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 같으면 자신이 거주한 땅에서 어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나 안 죽여서요”하고 문닫아 걸면 그만일 것입니다. 행여 교회에 나간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조언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나 하나님에게 알아서 처리하실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던 일이나 계속 합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말, 즉 ‘하나님께 맡기고’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방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손 떼겠다’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살인사건을 통해서, 혹은 피흘려진 시신의 발견을 통해서 다시금 율법과 율법과 연결된 촘촘한 그물망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끔 조치하시는 겁니다. 

즉 ‘나’를 독자적인 ‘나’로 하나님께서는 간주하시지 않으시는 겁니다. 율법과 관련된 ‘나’로 정립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한 위상입니다. ‘나’를 구성하는데 있는 지난 날, 자신의 노동과 고생담 같은 것으로 조립해서 구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자아상을 정립하게 됩니다. 

갈수록 시대 풍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고대 시대에는 신에게 절대적 권위를 주었고 그 권위를 가시한 자들이 바로 왕이 되어서 모든 고대 민족국가들은 왕, 혹은 유사 왕의 나라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숨어계신 신의 말을 왕을 통해 듣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불평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것조차도 신이 내린 팔자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역사의식’이란 없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내가 나중에 무엇이 되겠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없고 한계가 있는 그런 신분사회였습니다. 나의  존재성보다 신분이 더 위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와서, 소위 ‘계몽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비-역사적인 것은 미신으로 통해서 배격시키고 역사적인 미래상을 활동의 목표가 되면서, 어떤 개인도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되고자 하는 바를 획득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곧 자기를 위한 역사를 따로 자기 노동에 의해서 만들어 있고 그것은 외부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주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러다보니 극렬한 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피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은 겁니다. 어지간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하고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치 점과 점이 따로 또렷하게 떨어진 모습니다. 옛날 같으면 일가친척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필연적 혈연관계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어 어떤 의무감을 안겨주었지만, 이제는 일가, 친척, 친구, 식구마저 다 귀찮은 겁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은 ‘내 몰라라’하고 같은 뜻으로 통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이런 오늘날의 정신을 인정치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취지는 이러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생긴 피는 특정한 지역에서만 처리가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즉 중앙지에 따로 마련된 그 성소의 취지를 살려주는 사건으로서 이 율법이 촘촘히 깔린 약속의 땅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사건은 성소 기능의 반복을 보여주는 것과 연결되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피 흘림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이란 실은 이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거주민의 일상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서 ‘뭘해도 죽는다’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직 안 죽고 살아있기에 죽음은 나중의 문제로 돌려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리 율법을 깔아두신 것은, 인간이 생존에 보탬이 되는 그 어떤 일을 종사해서 그 끝은 필히 “그래서 너는 필히 죽어야 돼”와 결부되어 있다는 겁니다. 

유독 이스라엘에게서 이런 의미를 나타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체가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란 결코 그 자체로서 실체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실상을 폼내는 동작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동작들마저도 ‘죽음 의미’에 속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시신이 있던 현장의 의미는, 그 현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음이 임시 성도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성소에게 활동하는 제사장이 이 작업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핵심은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노동에 투입된 적이 없는 암송아지에 있습니다. 그는 죽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재 의미를 되새겨주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죽는 장소 또한 인간들이 경작이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물을 가두어두는 곳도 아닙니다. 흐르는 물이 있는 골짜기에서 암송아리를 잡습니다. 이로서 율법을 통해서 약속의 땅의 혜택인 ‘용서’가 성립됩니다. 지정된 방법이 개입된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9: 24-26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정된 장소’는 마지막 때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특정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이 바로 그 장소입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죄 용서’ 모방하는 시절은 마감했습니다. 남아 있는 숨겨진 각자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뿐입니다. 사무엘상 19:9-10에 보면,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인간형 뿐입니다.
사울 인간형은 분해되면 결국 악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인생을 역사적으로 분해가 되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각자 숨겨놓은 본질을 보이는 대리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들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이 여전히 십자가 피를 밟고 살아가고 있음을 감잡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하나님의 뜻에 맡길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속을 질주하면서 본질을 보이도록 분해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6-11-28 23:33:20조회 : 10         
109강-신 21장 1-5절(피 처리)161127-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109강-신 21장 1-5절(피 처리)161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1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에서 혹시 피살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너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나가서 그 피살한 곳에서 사면에 있는 각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찌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오늘 이야기는 그냥 어떤 땅에 사람이 죽어 있어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그 지역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나가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에게 지시하기를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람들의 생산에 동원되지 않은, 그러한 암송아지를 가지고 그것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잘 가지도 않는 곳에 가서 송아지의 목을 꺾을 때, 레위 자손 제사장도 참여해서 그렇게 하라, 라는 그 지시를 내린 그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의 지역에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겠는가를 생각해봐야 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그 나라와 하나님을 모르고 모독하면서 그대로 지내고 있는 인간세계와의 그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차이, 그 경계선을 계속해서 주목을 해야 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지, 소속되어 있지 않는지를 우리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계속 나와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근데 만약에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 근처에 시신이 있다, 아, 누가 죽었구나, 그저 하나님께 맡기자. 자, 하나님께 맡기자가 어떤 뜻이에요? 현대인들이 흔히 “하나님께 맡기자. 교회에서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데, 뜻대로 하시옵소서나 맡기자 하는 것은 나 몰라라 하는 다른 표현일 수가 있어요. ‘내가 안 죽였으면 됐지.’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죽게 하도록 하신 그 장소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고 관계망으로 엮어 있어요. 엮어있는데, 뭐 내가 안 죽였으면 나 몰라라 하고 방치해버리면 엮어진 관계망이 드러나는 기회를 놓치게 돼버립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그냥 하나님께 맡기자가 아니라, 자, 이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법을 준비했을까? 이래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맡기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끝. 그걸로 끝나버려요. 내가 뭐 하나님 뜻을 압니까? 연약한 인간이 뭘 알겠어요. 이러고 그만 자기 평소에 하던 대로 내빼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얼키설키 관계망으로, 촘촘한 그물망으로 짜여져 있어요. 독단적으로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그러한 자리를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야말로 DMZ입니다. 곳곳에 지뢰가 묻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묻어있어 가지고,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나가지고 어떤 조치로써 법을 마련했는지, 그것과 엮어지도록 우리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내가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그 일들이 어떻게 엮어져 있느냐 이 말이죠.

 

제가 지난 광주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옛날에 모든 인류학 책을 보게 되면 모든 민족은 신이 있어가지고 신의 법대로 이렇게 따랐어요. 심지어 고조선시대에도 단군의 법이 있었습니다. 제천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요. 부여, 옥저, 동예, 우리나라 북쪽에 있는 민족들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들이 남긴 어떤 법을 보게 되면 2300년 전에 저 이라크에 함무라비 법전에 나온 동일한 법의 내용이 부여, 옥저, 동예, 주몽이전에, 고조선시대의 법에 보면 일곱 개인가, 여덟 개인가, 지금 남아 있어요. 법이 너무 유사해요. 물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둑질 한 사람은 손을 베라, 하는 그런 종류지만.

 

어쨌든 법이 있다는 것은 그 법을 만드신 그 권위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고대사회였습니다. 지금 여러분 교양하나 배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뭐가 생겼느냐 하면, "신은 멀리하고 지금은 우리 안에 양심이라는 신을 따르자. 빛을 외부에서 비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내부에서 나를 비치게 하면 되잖아." 라는 시대가 접어들었습니다. 계몽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계몽이라는 것은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해요. 계몽주의가 되면서, 그 전에는 신의 운명에 맡긴 자, 신의 뜻에 맡기자.

 

“니가 못 사는 것도 신의 뜻이고 내가 잘 사는 것도 신의 뜻이니까, 니는 잘 사는 나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돼!” “예, 예, 주인님.” 그게 신분제도거든요. “예. 내가 노예로 사는 것도 신의 뜻입니다.” 이렇게 그냥 굽신굽신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근대가 되면서 이제부터는 내 안에서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역량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비리비리해서는 안 되지. 나의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자. 그래서 신화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역사시대로 바뀌는 거예요.

 

역사시대로 바뀐다는 것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먼 미래의 아름다운 천국 은 그런 지상낙원을 우리 힘으로 이 땅에 세우자는 겁니다. 그것도 일종의 공동체 운동이죠.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더 살기 좋은 민족으로 만들자.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열심히 일하게 되면 그만한 미래의 보상은 얻는다. 미래의 보상을 얻는다는 말은 천국은 죽어서 가면 되고, 지상에서 그냥 운명이다, 라고 머물면 안 되고, 열심히 나름대로의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게 바로 역사시대에요.

 

역사시대인데, 그 역사시대가 이제는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해야 될 일이 많고 경쟁이 너무 심하니까. 그래서 아이고, 역사고 뭐고 다 귀찮다. 나는 내가 즐거운 대로, 나 편안대로 살래. 이게 바로 점으로 바뀌어요. 신화에서, 신의 세계에서 우리 가문의 역사, 민족의 역사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나만 잘되면 되는 거예요. 하나의 점조직처럼, 점으로 딱 돼버립니다. 데모를 하든지 말든지 나는 나대로 살면 되고. 집에서 시집가라, 장가가라, 백날해도 나는 나 편안대로 살 거니까 나이가 몇인지 묻지 마. 나는 결혼도 하기 싫어. 나는 결혼도 안 할 거야. 라고 이십대에 선언하고.

 

결혼도 거부하고 그냥 나마나 편하면 된다는, 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랩rap음악이라는 거예요. 랩은 그 단어와 단어사이가 뚝뚝 떨어져 있어요. 가락도 없어요. 11월 중순에 우리 처갓집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축가를 하는데 랩으로 축가를 하는 거예요. 양동근이 나와 가지고. 신랑이 양동근하고 아는 모양이에요. 어반자카파하고 put your hands up! 손들고 랩으로 여호와는∙나의 목자시니∙내게 부족함이∙없으리로다 하면서 전부 다 따라하라는 거예요. 무슨 축가가 그런 게 있어요? 혼자 놀다 갔어요. 혼자. 지가 내뱉고 싶은 용어를 누가 듣든 말든 무조건 내뱉어버리면 이게 음악이라는 겁니다. 랩 복음송이 이제 교회의 젊은 애들이 파고들어가는 거예요. 가락을 맞춰야 되고 뭐 알토 소프라노 필요 없어요. 지가 하고 싶은 대로 지껄이면 되니까.

 

모든 게 끊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점점 더 어떻게 보면 각박한데, 각박해도 좋다는 거예요. 각박 안 하고 일가친척 찾아보는 것이 이게 귀찮다는 거예요. 옛날에 사촌 같으면 전부 다 동원령을 내렸는데, 사촌간은. 이제는 누가 결혼식한다고 해도 처음에는 돈만 주다가 이제는 돈도 안 주고, 돈 주는 것도 아까워. 그걸 다 씹어버리는 거예요. 나는 가기도 싫어. 이 시대가 뭐냐 하면 자기만 가하면 된다는 겁니다. 약해서 밟히고 없으니 당하고. 그러니 이 각박한 시대에 나름대로의 숨통이 트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거예요. 역사도 없고 미래 같은 것도 생각하지도 않고. “니 장래 우에 될래?”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점조직 같은.

 

옛날에는 기독교집안 같으면 같이 교회에 나왔어요. 이제는 그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에서는 그 놓친 부분이 있잖아요. 누구 하나 죽었다, 내가 안 죽였어. 이게 아니라, 그 죽은 자와 내가 있는 이 지점과의 이미 말씀으로, 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앞에 놓여 있는, 감추어져있는 케이블 선을 다시 한 번 들추어내듯이. 깔아져 있는 그 율법의 촘촘한 그물망을 끄집어내는 계기로써 시신이 발견된 것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온 나라가 다 동원돼요. 시신하나 발견됐다고. 지금 범인 찾는 것이 아닙니다. 범인 찾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관여해야 될 일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발생되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고 있고 찾고 있는 것이 뭐냐, 그것은 신약의 히브리서까지 연결이 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피 흘렸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피는 지정된 지역에서만 처리가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피는 지정된 지역에서만 처리가 가능하다. 이것이 뭐냐 하면 피를 흘렸다는 것은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이게 죽음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영생을 주고 천국을 주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전체의 성격과 본질을 딱 하나로 묶을 필요가 있는데요, 그 묶는 것이 뭐냐 니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갔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요. 니 죽음에 대해서 니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에이, 늙어죽지. 아니, 아니, 법적으로 율법적으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그냥 죽는 법이 없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음을 통해서 감추어진 이 우주의 비밀을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다 드러내는 거예요. 그 죽음의 징후가 뭐냐, 그 이스라엘 땅에 피 흘림으로, 피라는 물질성으로 나타내고 그 피는 어디서 최종 해답을 얻어야 하느냐 하면, 그냥 해답 없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해답과 관련된 죽음인데, 모든 죽음이라는 것은. 그 죽음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그 죽음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지정된 장소가 뭐냐, 제사장이 일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이 제사장이 현장에 수사 반장처럼 찾아가야 되는 거예요. 참여해야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19장 8절에서 10절에 보게 되면, 사무엘상을 본다는 것은 방금 우리가 본 것이 신명기거든요. 그리고 제가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히브리서를 이야기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소를 마련해놓고, 그 성소에서 평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를 반복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그런 행위를 했는데, 그런 행위를 하게 한 규범이 뭐냐, 옛 언약에 나와 있어요. 옛 언약. 그걸 첫 언약이라고 하고. 히브리서 9장 18절에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언약도 아니니”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첫 언약이니까 딱 뉘앙스가 뭐냐, 첫 언약이니까 끝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전부가 아니라는 뉘앙스를 주죠. 그 다음에 뭐냐, 마지막 언약, 두 번째 언약, 모든 것을 종합시키는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정된 장소로써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거예요. 장소로써. 지상의 장소에 주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없던 장소인데,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림자에요. 실체가 아니에요.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그냥 폼만 냈는데, 그 폼에 해당되는 정답은 예수님 안에 들어있고, 예수님 안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지정된 장소가 지정된 인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어디 가서 예배드릴까?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여인이 그렇게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다. 장소 문제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니라. 바로 예수님이 바로 장소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장소가 돼버리면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예수 안이라는 것은 어떤 장소라도 상관없이 돼버립니다. 여러분이 수준이 되니까 제가 지금 계속 어려운 말로 진행해나가는 거예요. 수준이 되니까. 한마디만 해도 딱딱 알아채잖아요.

 

장소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은, 지상에서 열심히 한 것 다 무효다. 그거는 의미 없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다만 폼만 냈을 뿐인데, 그 폼이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을 장차 미리 그냥 흉내 낸 거예요. 그러니까 흉내를 그만 내라는 겁니다. 뭐 유월절이라든지, 절기 지키는 것, 그런 흉내는 그만 내라는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에서는 한해가 바뀌는 것이 시월 달에 바뀌어요. 시월 달에 바뀌기 전에, 새해가 되기 전에 그걸 대림절, 또는 강림절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서 크리스마스가 오기 4주전을 강림절이라고 하는 겁니다. 벌써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는 강림절이 시작되었어요. 근데 이거는 현재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대속죄일 다음에 장막절, 칠칠절 들어가고 그 뒤에는 새해가 바뀌게 되는데, 이 속죄일은 뭐하냐 하면, 그 날은 모든 관공서도 다 놀고 심지어 차도 운행을 못해요. 기차도 멈추고. 뭐 가게 문 닫는 것은 당연하고. 하면 법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대속죄일은 초막 지어놓고 그 안에서 닭을 머리에 돌리면, 양을 잡아야 되는데 닭을 대신한답니다. 닭을 머리에 그렇게 하게 되면 우리 죄가 흩어진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그건 아주 교훈적으로 애들 자식 교육에 아주 좋습니다마는, 그걸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해야죠.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해야 하는데, 심지어 예수님 오시고 나서까지 유대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그게 전통이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꿔치기 했잖아요. “내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내가 바로 유월절양이다. 이제 새 언약 할 테니 양, 닭 머리에 이고 돌아다니지 말고, 내 피와 내 살이 곧 이게 실체다.” 이렇게 오신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걸 믿지 않고, “이거 어디 또라이가?” 하고 죽여 버렸거든요. 죽여 버렸다 이 말이죠. 죽여 버렸는데, 그 죽여서 흘린 피가, 오늘 본문에 흘려있던 피의 완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가 되는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의 기도대로 우리가 죄를 아는 그것이 이미 율법의 관계망 속에 들어온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 구원된 사람, 영생을 얻은 사람에게만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관계망 속에 놓여있다는 식으로 고백이 가능한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니 앞에 말고. 어디, 니 앞에 죄인이야? 국가와 민족 앞에 말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어서 죽어있으면서 자꾸 뭐라고 오해했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더 살아야지, 라고 했는데 이제야 십자가 앞에서 그 오해가 풀렸습니다.

 

죽어있는 인간을 사는 모습으로 보여줬는데 그거는 뭐냐 “진작 죽어야 된다는 것을 사는 모습으로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은 겁니다.” 라는 고백을 해서 “내가 진짜 내가 아니고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천국 생활을 미리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연결을 시켜놓은 거예요. 어떤 시신이 또랑에 있다, 들판에 있다, 내가 안 죽였는데? 이러면 그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피를 흘리지 말라고 했는데, 죽음의 피, 죄의 피를 흘렸구나. 그렇다면 제사장 뭐하십니까? 빨리 제사장 동원해야죠. 그 제사장이 빨리 와가지고, 제사장이 원래 성소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뭐냐, 이동하는 성소가 되는 거예요.

 

성소 안에 활동해야 될 제사장이, 전문가가 시신 있던 그 장소의 제사장이 되어서, 거기에서 성소에서 매일 벌어지는 취지를 살리면서, 그 현장에서 피는 어떻게 용서가 되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인위적인 손이 닿지 않은, 농사짓지 않는 암송아지를 잡고, 거기다가 그것도 들밭이 아니고, 논이 아니고, 그냥 물이 흐르고 아무도 농사짓지 않은 골짜기에 가서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용서라는 그 취지는 인간이 개입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가 마련된 상태에서 그 용서만이 왜 용서가 되고, 그 용서만이 왜 천국행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리버리한 우리를 이 땅에서 살인죄도 일어나게도 하고, 농사짓게도 하고, 나는 살았다. 이만큼 살았다고 이렇게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께서 그런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리버리하게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평소에. 아까 랩 하듯이 자기 랩만 하면서 그냥 사는 거예요. 니하고 내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러면서 그냥 사는 겁니다. 뭐 신화시대이든 역사시대이든 마찬가지고 점조직 된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드리면 귀찮다고 내버리는 거죠.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한 십자가의 조치는 절대로 주님께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38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말은 이 말씀 앞에서는 의미 없는 거예요. 주께서 자기백성을 살리겠다는 겁니다.

 

이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닌데, 우리가 왜 내 구원문제를 걱정을 하죠? 믿음이 없을 가능성이 많아요. 내 구원에 대해서, 또는 내가 아는 가족이나 친척에 대해서, 같은 교인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는 것은, 그 순간 뭘 놓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알아서 챙겨간다는 주님의 몫에 우리가 주제넘게, 쓸데없이 관여하는 셈이 돼버립니다. 주께서 내 백성 안 놓친다는데, 니가 쓸데없이 내 앞에서 걱정들을 늘 하고 있으니까, 진짜 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나왔어요. 그저 내게 맡기라는 겁니다. 니 살아가는 인생이고, 전도고, 선교고, 뭐고 간에, 그런 것 다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라. 주께 맡겨라. 주게 맡겼으니까 나는 놉니다. 이게 아니고 주께 맡기라는 말은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된 관계망이 있잖아요. 관계선이 있잖아요. 그 속을 질주하라 이 말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서울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게 되면, 대구까지 오게 되면 그냥 앉아서 가면 되잖아요. 이제는 기차에 앉아서 가지 말고 달리는 기차의 복도를 니가 뛰어서 달리라 이 말이죠.

 

역사 속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그저 달려가는 거예요. 달려가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자기가 달려가는 이것이 주의 뜻에 의해서 이미 목적에 도달된다는 것을 내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앉아서 가게 되면 사람들은 기차가 다 알아서 실어 줄 거고, 부산 가서 뭐 할까?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회나 좀 사올까? 각자 자기 점조직 같은 자기 생각만 한다고요. 그런데 갑자기 3C열 7번에 앉아있던 사람이 죽었다 이 말이죠. 그 사건이 오늘 신명기 사건이잖아요. 나는 내가 가는 것만 생각하고 딴 데 신경 끊고 싶어요. 하지만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갑자기 제사장이 등장하고.

 

‘아! 주님께서 계속 기차를 목적을 향하여 달리게 하시는구나. 주님께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는구나.’ 라는 그 관계망이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또다시 오늘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약이고. 방금 읽은 신명기고. 그 사이에 아까 보려고 했던 사무엘상 19장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두 사람이 나와요. 한 사람은 사울이고 한 사람은 다윗인데, 이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9절에,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무엘상 16장 14절부터 보면 평소에 사울이 아플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악신이 떠나고 했거든요. 이번에도 성공한 줄 알았는데 성공 못했어요. 사무엘상 19장 10절에 보면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인간형人間型이 딱 두 가지 형型밖에 없어요. 사울형과 다윗형 밖에 없는데, 사울형은 역사적으로 분해해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악신과 접합되어 있어요. 악신과. 근데 다윗형은 분해해보면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만남이, 둘이 서로 만났거든요. 둘이 서로 만났어요. 사무엘상 19장에서는. 그러니까 제 말은 만나고 헤어지던 간에 그 인간이 갖고 있던 그 본질과, 그러니까 그림자가 예수님의 실체가 연결되어 있는 그 연결망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역사를 살면서 결국은 점점 더 분해됩니다. 점점 늙어가고, 나중에는 할 것도 없이 죽치고 앉아있어야 돼요. 시간만 낭비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걱정이 되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서 주의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은 분해하는 그 자체가 주의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쪼개보게 되면 어디하고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끝에 알지 마시고 미리 땡겨서, 창창하게 이십대 잘 나갈 때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미리 아셔야 해요. 주변의 상황을 통해서. 다윗의 존재의 목적은 악신 들린 자와 만나는 거예요. 만남이 있어야 내가 저 사람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기차 달리는데 기차 옆에 지리산 기도원에 가지 마세요. 그냥 기차에서 같이 달리세요. 기차 속이 시장이면 그냥 가야 돼요. 가시고, 자꾸 기도원으로 도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산장의 여인이 되지 마세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왜, 아무도 날 찾는 이가 없어요?

 

노인 되어도 멀리가지 마시고 그저 병원하고 가까운데 있어야 돼요. 그래야 빨리 부를 수 있거든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산장에 가지 마시고. 이 세상을 달려가면서 그것을 주께서 다 알아서 분해해주시고 해체해줘요. 해주시면서, 결국은 나의 난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망, 새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그나마 살도록 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친구들과 이렇게 만날 수도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이 많이 돼서 그래요. 동창들 만나고 돌아다니시는데 그것도 주께서 하셨다고 하시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너무 즐겁게 빠지면 안 되겠죠. 쓸데없는 소리 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다 우연이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입장에서 필연인 것을 우리는 진즉에 몰랐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만 따졌는데, 그것이 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깨우치기 위한 하나님의 친절한 조치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