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08강-잔인한 진멸(신20;15-18) 1611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21. 03:19

잔인한 진멸(신명기 20: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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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11-20 15:58 
잔인한 진멸 

2016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신명기 20:15-18 

(20: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20: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20: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지시하기를, “이방민족들은 다 죽여라”고 하십니다. 자칭 양심가이고 자신을 선하게 보는 자들에게 있어 이런 하나님의 지시는 참으로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동정이나 애정이나 박애정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간주합니다. 

이 점을 공략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발판일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상호 거래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여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거룩을 원하고 인간에게는 거룩할 수 있는 소양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열심히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렇듯 자신의 착함과 도덕심과 인정많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몽땅 다 죽여라!”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그 의도에 대해서 난감함을 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당히 다 죽이는 척하면서 가련해보이고 어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어 주려고 합니다. 

윗사람의 가혹한 처분도 실무자 선에게 적당하게 봐주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선의(善意)로 말입니다. 이 가혹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지시는, 인간들이 어떠한 하나님상(像)을 원하고 있는지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하나님상은, 자신들의 선악질서에 부합되는 신입니다. 

즉 “신은 선을 원하고 악을 싫어한다. 따라서 나는 선하기로 작심을 하므로서 그 태도만큼은 선으로 간주해주실 것이다.”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온전하게 천사처럼 선하지 못하지만 선하게 살고자 하는 그 심정만큼은 악하지 않고 선하다는 판정을 해주실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잊고 있습니다. 질투란 상대를 의식하고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경쟁 상대 없이 목적하는 대상에게만 매달리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자를 의식해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해서는 아니되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참 어질고 훌륭하다고 자부합니다. 나쁜 짓을 될 수 있는 한 멀리하겠다는 이성적 결단을 늘 내릴 자질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 내용 안에 자기 자신이 담겨 있게 됩니다. 즉 ‘신을 사랑하는 나를 내가 사랑하고 매료되어 있다’가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과 3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명나무 과실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곧 인간 자체를 거부하십니다.
그것이 생명나무 과실을 지키는 방식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조치를 인간에게 퍼부으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생명나무 과실을 인간의 손길과 요구로부터 지키시려는 그 조치를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는 곧 생명나무 과실을 노리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한 견해를 하나님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인간의 ‘자기 마움’ ‘자기 저주’입니다. ‘자기 버림’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질투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을 다 진멸하신다 할지라도 그 행위에 찬양해야 합니다. 비록 진멸의 대상자 가운데 본인이 들어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뜻에 부합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런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체가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불에 태워서 제사드리는 번제를 드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는 아들의 모든 것이 결코 아버지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비록 자신이 좋아하는 타잎이고 자신에게 너무나도 소중해보이는 대상이라도 그것이 아브라함 본인의 사랑의 노선에게 연결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들을 잡는 그 행위로 본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이는 자기가 그 어떤 행위를 해도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토대가 되지를 못한다는 사실은 이삭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난 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 아들의 존재‘로 인하여 본인이 구원받는 겁니다. 타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본인이 구원받는 겁니다. 

이런 점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요셉에게도 일어납니다. 모두 다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본인들의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사랑에 대해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기에 마귀를 신봉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해야 될 분은 나의 위선을 늘 지적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은 선악 질서에 버팁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 추한 자를 악한 자로 몰아붙이고, 주위에 아름다운 이를 선한 자로 착각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눈을 호강하기 위해 추한 자들을 종교재판하는 식으로 제거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일방적 잔인함을 우리들은 못내 감추면서 자신의 선함과 내면의 아름다움은 근거로 신의 결속에 나서는 바로 이 짓이 예수님을 죽게 만든 악마의 짓입니다. 구원이란 선악체제 자체에서 ‘생명나무 체제’로의 구원입니다. 일체의 선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천국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천국에 도달된 자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른들이 외출하면서 어린 아이의 외출 준비를 알아서 다 챙겨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도로 천국에로의 외출이 가능치 않습니다. 사랑과 속죄라는 선물이 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이 살기에 정당화하다고 우기는 그 충동을 늘 십자가 사랑 앞에 노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6-11-21 00:31:36조회 : 4         
108강-신 20장 15-18절(잔인한 진멸)161120-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108강-신 20장 15-18절(잔인한 진멸)161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0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다 살리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극단적인 겁니다. 이 극단적인 조치를 왜 하나님께서 행하셨는가 하면, 새로 다 갈아엎기 위해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죄악된 것들이, 마귀적인 것들이 섞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극단적인 조치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근데 이 극단적인 조치를 누가 반대하고 누가 강렬하게 저항하느냐 하면, 바로 선과 악에 대해서 감각이 있는 인간들 쪽에서 나섭니다. 왜냐하면 다 죽인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악한 짓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악한 짓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고 천국을 만든다? 이거는 생뚱 맞는 일이라는 겁니다. 착한 일은 따로 모아놓고 이거는 천국 보내고 나쁜 것은 따로 모아서 이거는 지옥 보내고. 이게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하나님의 조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신이시여, 신은 우리와 닮았잖아요?” 하나님이 자기하고 닮았대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우리 쪽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형상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서 서로 의논하고 협상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악마의 형상이라면 어떻게 할래? 인간들은 거기에 대해서 거부하죠. 선을 알고 있는데 악마일 수가 없을 겁니다. 선을 알고 있는 이상은.

 

온전하게 선을 행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천사가 아니니까. 근데 무엇이 선하다는 것을 아는 이상은 온전하게 악마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고 장담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래도? 하시면서 자기 아들을 보내버리셨죠. 자기 아들을 보내니까 예수님이 보는 세상의 한계와 인간들이 이미 확보해놓은 자기 한계가, 이게 서로 다른 세계였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선악으로 쫙 깔아놓은 세계에 선악을 초연하게, 선과 악에 대해서 벗어나는 요소가 있다면 인간들은 차마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이거는 없애버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과 악을 아니까 이걸 잘 다독거려가지고 선한 것은 따로 챙겨서 천국 만드는데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는 것이 인간 쪽의 생각이라면, 하나님은 누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했던가? 하는 거예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내가 알지 못하게 했는데, 누가 뒤에서 부추겨서 알게 했느냐를 문제 삼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서,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되는 거예요. 거기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선과 악을 다른 말로 하면 거룩과 비 거룩이 되겠죠. 성경에서 어떤 용어를 갖다 붙여도 인간은 둘로 쪼갭니다. 이거는 선한 것. 이거는 악한 것. 그러면서 인간들은 말하죠. “하나님께서 말씀 주실 때, 그렇게 구분지으라고 말씀 줬잖아요?” 라고 그 핑계를 하나님께 댑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구분해서 선 쪽에 서라고 말씀을, 율법을 준 게 아니고, 그렇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그 자체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선한 인간으로 몰아세우는, 선악과 따먹은 것은 정당합니다, 라고 몰아세우는 그 배후에 악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준 거예요.

 

이거는 루터도 몰라요. 칼빈도 몰라요. 아는 사람은 아마, 옛날에도 아는 사람이 있을 건데, 그 사람들은 유명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신학자라는 것은 교회에 보탬이 될 때, 유명인사가 되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교회 역사에 길이 남아요. 그러나 본인 복음을 아는 사람은 교회 부흥에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거는 있었나? 할 정도로 사전에 다 삭제돼버려요. 일종의 마귀가 교회를 앞장세워서 사기를 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선과 악을 잘 활용해라.” 그러면 선한 쪽에 설 것이라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했던 그 짓, 유대인 했던 그 짓을 지금도 교회에서 그 짓 하고 있습니다.

 

1553년에 어떤 작품이 있었는데, 농부 캄브리아노의 이야기인데 영리한 농부 하나가 당나귀 엉덩이 사이에 돈을 끼워놓았어요. 돈을 끼워놓고 옆에 무식한 농부를 꼬십니다. 우리 집에 있는 당나귀는 이상하게 돈을 낳는다. 너희 집 당나귀는 새끼를 낳지만 우리 당나귀는 돈을 낳는다. 한 번 보여 줄까? 하면서 엉덩이를 툭 치면 돈이 나오고, 또 쳐도 돈이 나오니까. 옆에 있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농부가 돈이 나오는 당나귀니까 비싼 값으로 당나귀를 사는 거예요.

 

사람들이 구원을 주는 당나귀를 원하고 있어요. 간증 같은 것을 포장을 해가지고. 뭘 했더니만 복을 받는다고 포장을 해서. 그거 사기 치는 겁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잔인함을 자기에 대한 잔인함으로 그냥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를 잔인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철저하게. 너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해! 라고 큰소리치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게 이제 소리 없이 피 흘리시는 하나님이시죠.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셨을 때, 떡과 생선을 제공해놓고 따라온 사람에게 오히려 손가락질 하시면서 “너희들 왜 따라왔는데? 너희들 뭣 때문에 따라왔는데?” 뒤돌아서서 냉혹하게 다루시는 하나님. “주께서 은혜 줬잖아요?” 하면서 따라오면 “너 왜 따라오는데? 너 따라오는 의도가 뭐야? 니 장래가 잘 되기 위해서 따라오지? 그렇다면 그거는 니가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야. 니는 내가 품고 있을 하나님 아버지의 잔혹함을 니가 몰라. 니 지금 엉뚱한 노선이야. 다른 노선으로 가!” 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어젠가 tv에서 본 이야기인데, 어떤 잔혹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손자가 있는데, 그 손자가 할머니보고 빨리 죽으라는 거예요. 왜 죽으라고 하느냐, 할머니가 죽어야 제삿날에 고기를 먹기 때문에. 옛날에 못 살 때 이야기에요. 그래가지고 그 할머니가 누굴 부르느냐 하면 며느리를 불러서 닦달 냅니다. “니가 그렇게 귀띔해줬지? 니가 그렇게 가르쳤지? 일곱 살 먹은 애가 어떻게 알겠어? 제사 지내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어? 니가 빨리 나 죽으라고 아예 용을 썼지?” 그렇게 며느리만 실컷 욕을 얻어먹었다고 나이든 며느리가 시어머니 죽고 난 뒤에 한풀이를 하는 이야기였어요.

 

얼마나 잔인한 가정입니까? 고기 먹고 싶어서 이제는 눈앞에 할머니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이처럼 그리스난민이 지중해에 빠져죽고 시리아에 폭격이 어떻고 해도 나의 일이 아니면 우리는 그렇게 잔인해요. 우리는 자기한테는 그렇게 관대하면서도, 자기 손톱 밑에 가시는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뭐 다른 사람이 아파하고 폭격 맞고 한 이런 것은 휘파람 불고 있습니다. 돈만 벌린다면 코뿔소의 뿔이라도 잘라야 해요. 그게 얼마나 아픈지 그런 것은 생각도 안 합니다.

 

평소에 우리는 아주 잔인하게 밟을 수 있는 것은 지근지근 다 밟으면서, 내 숨 좀 쉬자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부르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다움을 위해서 아주 잔인한 조치가 취해져야 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니가 만나게 된 이방민족에 대해서 이렇게 16절 끝에 보면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 그럼 호흡이 있는 자는 살리지 말라는 것은 호흡이 없는 자는 살리라는 말 같은데, 호흡이 없으면 죽은 거죠.

 

결국 단 한마디로 말해서 죽여라. 다 죽여라. 몽땅 죽여라. 없애버려라. 이 잔혹함. 하나님의 이 잔혹함에 대해서 인간의 능력으로 이게 도대체 납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잔인하지 않는 하나님을 자꾸 찾아요. 주면 좋다고 히히 웃고, 복 주고, 꼭 KFC할아버지 인상처럼. 또는 금복주 인상처럼 말이죠. 아주 인상 좋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을 자꾸 떠오르게 되는데,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정말 잔인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잔인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은 스스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나는 니가 다른 쪽을 사랑하는 것을 못 보는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야 될 것을 지금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데, 어데 주님한테 돌아갈 사랑이 어데 남아있습니까? 주님에게 줄 사랑은 남아있질 않아요.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돈 준다면, 우리는 돈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랑이 밀려오면 한 사랑이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막 던지면서 하는 CF처럼. 이미 새로운 사랑이 왔는데, 옛날 사랑이 있을 수가 없죠. 근데 그 새로운 사랑이 가버리면 다시 옛날 사랑을 되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얌체 같아요. 순간순간 우리는, 이 얌체 같은 것은 본성에 해당되지,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얌체인지, 얌체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얌체라는 것은 욱하면 나오는 것이 얌체입니다.

 

저도 얌체 짓을 했는데, 복사 집에 가가지고 토정비결을 딱 보니까 야, 이거는 이번 주 설교거리에 참 멋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책을 들고 복사를 해달라고 했어요. 한 면만 복사를 했죠.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얌체도 이런 얌체가 없어요. 제가 우리교회 목사라는 것을 잘 알거든요. 복사를 매일하니까. 그래서 다음에 가서 사과를 했습니다. 급해서 복사를 했는데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제가 미안해서 책을 한 권 사겠습니다. 그래서 책 만 원짜리 한 권 사고 사과를 했더니만, 그 분이 뭐, 여러 면 복사한 것도 아닌데, 괜찮다고 하길래, 아, 그러면 앞으로 한 면 정도는 얌체 같은 짓을 해도 되겠다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이처럼 눈에 딱 보이게 되면 이거는 이성이, 내 선악체계가, 논리가 말리지를 못해요. 그냥 욱하고 튀어나와버려요. 그래서 


주께서는 왜 그렇게 잔인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토대가 아브라함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잔인하게 죽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주일학교 때 한 건데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잔인하게 없앤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니가 지금 남의 것 가지고 니가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이죠. 

하나님이 주셨건만, 내가 사랑하는 순간 내 것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은 자기 사랑하라고 준 것에 대해서 ‘야! 이건 내 구미에 땡긴다. 이건 내가 원했던 자식이다.’ 하고 땡기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이에요. 지금 이 사랑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니가 평소에 니 욕정으로, 니 욕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니가 감사를 하든, 고마워하든, 기뻐하든, 그것은 니 마음에 들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거는 기존의 욕정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거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노선을 바꿔야 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야 해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가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려면, 근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체제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생명나무 가는 길 근처에도 못 갔어요. 생명나무 안에서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근처도 못 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맞춰주려고 해도 맞춰 줄 수가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그 범위 전체가 선악체제 안에서만 존재하는, 그 안에만 놓여있는 그런 아름다운 것이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이제야 본문의 뜻이 나오는데, 결국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 뜻입니다. 왜? 정 때문에. 니가 갖고 있는 정을 니가 배신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마지막 챙기는, 내가 인간인 이유는 내가 인정이 있고 동정이 있는, 이런 착한 인간이기 때문에, ~~ 때문에, 그 때문에를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자꾸자꾸 다른 하나님을 찾고 섬길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협상밖에 할 수 없습니다.

 

14세기~17세기, 심지어 18세기까지 미국에 있었던 재판 중에 하나가 종교재판이에요. 여러분 종교재판에 끌려나오는 죄수가 어떤 종류냐 하면, 주로 여성들이 많은데, 역사적으로 여성들이 많은 종교재판을 누가 조사를 해봤어요. 어떤 사람들이 종교재판에 걸려들었는가? 답이 딱 나왔습니다. 못생긴 여자에요. 못생긴 여자. 어떤 사람이 못생긴 여자를 보게 되면 본인들이 화가 나요. 귀신은 뭐하나? 안 잡아가고. 종교재판은 인간들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무슨 뜻이냐 하면 선악 중에서 악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추함으로 바꾸는 거예요. 선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쁜 것으로 바꿔놔요.

 

그래서 이쁜 여자는 뭐든지 용서가 돼요. 남자한테. 드라마 보면 이쁜 여자가 남자의 귀싸대기를 딱 때리잖아요. 그리고 여자는 웃죠. 근데 그걸 아무나 써먹으면 안 됩니다. 못생긴 여자가 남자 귀싸대기를 때리면요, 그날은 죽는 날이에요. 제가 지난 수요일인지, 그런 이야기했는데, 연약한 여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왜 벌을 주시는가? 폭력적인데. 남자들이 폭력을 행해서 벌을 준다거나,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면 그건 죽일 놈인데, 가만히 있는 여자들을 왜 유황불, 지옥 불에 보내느냐? 제가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 답을 내렸어요.

 

그게 뭐냐, 여자들이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자기와 비교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은 나와 선악과 따먹기 전에 나를 하와가 그걸 비교한 거예요. 그런 현상이 우리 주위에 있어요. 여자들이 이야기하는데 스스럼없이 “나는 샤론스톤 닮았지?” 가만히 있는 내가 화가 나요. “니는 고소영이 닮았다. 그치?”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아무리 봐도 아닌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 중에서 악에다가 추함을 포함시켜버려요. 선은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그러니까 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사람들만 있어야 되는데, 왜 허락도 없이 못생긴 것들이 얼쩡거리느냐?

 

그러면 내가 추구하는 그 깨끗한 천국에 부합되지 못한 요소기 때문에, “신이시여! 알아서 좀 처리해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말씀이 내 위주가 되는 거예요. 결국 남는 것은 나는 절대로 손대면 안 되고, 왜? 이정도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眞善美. 대구경북여고 교훈입니다. 그 학교 안 다녀봤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이순자여사가 거기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그 진선미를 추구하는 자체로 나를 의롭게 해달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아예, 일거에 파쇄 하는 방법은 착하디 착한 우리에게 잔인하디 잔인한 일을 시키는 겁니다.

 

다 죽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합니다. “어데에? 아이구, 저를 그런 위인으로 보십니까? 그런 못된 짓은 나쁜 사람한테 시켜야지, 저같이 착한 사람한테 시키는 게 아닙니다.” 근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아들 죽이는 그것이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만이 뜻이 아니라 아들 죽이는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이죠. 어떤 계기? 지금 나에게 도취되어 있는, 나만을 사랑하는 그 노선에서 나를 미워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나를 미워함으로써 내가 신봉하는 하나님도 같이 죽이는 거예요. 내가 믿던 하나님도 같이 죽이는.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노선으로 바꾸는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입니다. 죽이려고 하는데 옆에 수풀에 있는 수양과 바꿔치기 하면서 나온 그 다음의 계시가 중요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이제는 너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게 중요해요. “너는 너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니가 죽이려고 하는 그 자식 덕분에 아버지인 니가 산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어도 죄인입니다.

 

믿음 있다는 그것을 장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들에게 일어났던 사건,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했어.” 라는,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를 죽이는 그 사건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부여받는 거예요. 이미 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를 부여받아서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하나님의 뜻을 이삭에게 전달시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전달시키고, 야곱은 요셉에게 전달시키고.

 

아브라함과 이삭사이에, 이삭과 야곱사이에, 야곱과 요셉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모두 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누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다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죽이라는 이 말은, 곧 그걸 죽이면서 마치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는 것처럼, 니가 정들었던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곧, 니 자신을 죽여 버리라. 이 말입니다. 니 자신을.

 

이걸 신약적인 표현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구약이고. 이거는 카프카라는 작가가 지은 <유형지에서>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것이 나와요. 우리는 보통 죄 짓고 벌을 받잖아요. 그런데 그 유형지에서 라는 소설에서 나오는 받는 벌이 뭐냐 하면, 판사가 내리는 징벌이 먹물을 가지고 그 사람의 죄를 신체에다 박아버리는 그것이 벌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경 전체에 있는 말씀이, 우리가 어차피 죽어야 될, 내놓아야 될 흙으로 된 신체에다가 이걸 박아버리는 겁니다. 미싱틀로 바바바바박~ 평화시장에 미싱사가 박듯이 두두두두두~ 박아버려요. 박아버리면 평생을 우리는 이 말씀으로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이 온 몸에, 온 신체에 그대로 말씀이 박히는 겁니다. 거기서 피가 나오겠죠.

 

예수 그리스도를 카프카는 그렇게 설명한 것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마디마디에서 나오는 그 피들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흘려져야 될, 그 죄 값으로 흘려져야 될 그 저주의 피. 하나님이 내리시는 잔혹한 피. 이방민족은 다 죽이라는 그 잔혹함을 이제는 몸으로 그대로 묘사해주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 간 사람은? 천국 간 사람은 어떻게 해서 갔느냐? 이걸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하고 엄마하고 외출을 하는데, 12개월 된 딸은 아무것도 안하고 좋아가지고 이러고만 있어요. 손만 흔들고. 지는 외출 준비를 안 하고. 지가 알아서 모자 챙기지도 않고. 그냥 흔들고만 있어요. 아빠, 엄마가 외출한다고 할 때, 애를 그냥 데리고 나가지 않습니다. 춥다고 모자 씌우고, 내복 입히고, 옷 다 입히고, 애는 12개월 됐으니까 벌써 눈치를 채는 거예요. “가자!” 하면 “엥!” 답변을 할 줄 알아요. “이 식당 음식 맛이 좋지?” 하면 “엥!” 외출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게 바로 구원이다.

 

예수님이 자기 길을 가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이게 예수님의 외출이에요. 예수님의 외출인데, 우리도 덩달아 예수님 따라서,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외출을 할 때, 필요한 조치들을 주께서 입혀줍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시대에 거저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용서라는 외출복으로 갈아입혀서 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랑을, 내가 뭐했다는 것을 자랑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바로 신명기를 통해서 내 것이 왜 안 되는가를, 우리는 이방민족이라서 하나님 저주 앞에 잔인하게 죽어 마땅함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만든, 주를 위한 나라, 천국 잔치 외출에 참여시켜주니 감사합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있어야 되는가는 주께서 성령으로, 선물로 보내주시옵소서. 그 용서와 사죄를 귀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