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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07강-누구의 전쟁인가(신20;10-15) 1611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15. 17:13
2016-11-13 14:55:07조회 : 63         
   누구의 전쟁인가 161113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누구의 전쟁인가(신명기 20:10-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OJTgwM8fMI, Hit:3
 이근호16-11-14 00:18 
누구의 전쟁인가? 

2016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신명기 20:10-14 

(20: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20:11)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20:12)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20: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20:14)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전쟁을 말씀하시는 와중에서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전쟁을 쉬지 않습니다. 소위 나를 위한 ‘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지시고 특이한 전쟁을 벌이시는데 그것은 일반인들이 이 세상 살면서 서로를 향하여 벌리는 그 전쟁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을 유입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일반인들의 전쟁은 서로의 가진 힘들을 내어놓고 겨루는 방식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본인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전쟁을 치릅니다. 자기 것을 지키되 더 키우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다 확장된 힘의 세력권 속에서 자신을 안정히 담아두려고 합니다. 이 전쟁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학생이 시험없으면 공부하지 않는 법입니다. 시험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자격과 실력과 능력을 측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한 된 자리에 합당한 인재를 뽑기 위해 일련의 조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인재가 되는게 아닙니다. 오로지 인재만이 인재에 합당한 대우를 해줍니다. 

즉 아무나 괜찮은 대우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다 천한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망가져도 좋아. 제발 나를 망하도록 해주세요”라고 부탁할 위인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나는 못났지만 그래도 나를 귀하게 사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이라고 호소하듯이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은 유혹적인 복의 자리에서 밀렸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점이 섭섭하다는 말은 얼마든지 자질이 되고 때가 되면 축복의 그 자리를 다시 넘보겠다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철회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인간 사회는 이런 식으로 쉬지 않고 경쟁하고 투쟁이고 전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옆에 특이한 전쟁을 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출현시켰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세상 나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성과를 이루기를 종용하는 나라인 반면에, 이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들통내면서 승리는 승리대로 낚아내는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할 수 있다”가 무기인 반면에, 이스라엘 나라는 “할 수 없었다”가 무기로 드러나게 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만약에 지금 예배 도중에, 형사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들의 지문들을 찍어간다면, 우리는 벌벌 떨면서 지문을 찍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종잡을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의 법의 투입은 곧 형사의 투입과 마찬가지로서, 지난날 우리가 잘못한 것을 공개하고 합당한 처벌과 저주를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을 마주하는 주변의 적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신 하나님과 미리 전쟁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는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은 곧 ‘저주의 근원’입니다. ‘저주의 근원’이 보여주는 저주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해서 ‘잔인함’입니다. 어느 인간도 이 잔인함을 곱게 수용할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자기만큼은 인생에서 너무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의 존재 가치가 너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단속이 강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전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쟁을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이방민족과 전쟁을 많이 치뤘던 다윗이 결국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 바는, ‘상한 심령’으로서의 자아상이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에 대해서 오해했고 너무 몰랐던 겁니다. 너무 자신을 그동안 미화(美化)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그 성질이 곧 하나님 전쟁에서 자신이 원수의 입장에서 대들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합니다. 

그 법에서 알려준 바는, 어느 인간 치고 망하겠다고 나설 존재는 없었다는 겁니다. 곧 자신의 실상을 속이면서 타인과, 그리고 하나님과 대결을 벌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은 자신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아무 힘도 필요치 않는 전쟁을 벌이십니다. 

죄가 밝혀지는 것이 수치가 아닙니다. 죄는 값을 치러야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패배요 수치요 저주의 현실화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잔인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래서 획득한 것들은 다 이스라엘의 소유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눈독을 들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눈독을 들인만큼 과도한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전도하기 위해 그 대상자를 위하여 집중적으로 기도와 심방과 모든 재정적인 혜택을 쏟아부는 것은, 곧 인간의 행함으로 성과를 얻겠다는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자신의 전쟁’이지 결코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필히 어느 누구도 구원되거나 전쟁에 승리할 자격을 보이는 ‘죄 값’이 나와야 합니다. 곧 ‘대신 값을 치뤘다’는 사실이 전쟁 와중에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홀로 대신 다 해주셨기에, 전쟁을 전리품을 마땅히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아직도 살 자격이 되나? 너무 과분한 것같다”는 심정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곧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법의 유입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세상에서 목숨 부지할 자격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특히 극한 잔인함을 보여는 전쟁터는, 이긴 자라 할지라도 그 저주스러운 잔인함을 마땅히 받아도 상관없는 존재가 곧 본인들임을 알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의 전리품으로 생겨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의 부귀 영화에 미련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쟁’으로 인해 예수님이 상처를 입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망해도 그동안 고마운 인생이었음을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1-14 00:19 
107강-신 20장 10-14절(누구의 전쟁인가)161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0장 10-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실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전쟁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전쟁의 주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하게 하실 때, 하나님 편에 서는 자는 누구냐를 생각해보면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나라가 되겠죠. 우리는 전쟁하면서도 전쟁에서 이길 쪽을 먼저 생각하고, 이길 쪽이 내 편이고 나는 거기에 속해있다고 자기 자신을 거기다가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는 전쟁 안 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생각이 돼버려요. 

  

우리가 평소에 성경을 덮어버리면 또 나의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나만을 위하여,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더 끌어 모으기 위해서, 평생 동안 우리는 전쟁을 하는 인생을 살아 온 적이 없습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소원은 시험 없는 학교, 시험 안 치는 학교죠. 시험 없으면 공부를 안 합니다. 반드시 시험을 쳐야하는데, 시험을 누구하고 치는가? 시험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은 옆 사람, 같은 동기생하고 시험 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혜택이 주어지는 그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합니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자질이나 능력을 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천사들보다 더 큰 영광, 예수님이 누릴 모든 그 영광을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같이 누리가 됩니다. 천국에는 시험이 없습니다. 경쟁도 없습니다. 경쟁 없고 시험 없으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죠. 너무 심심해서 스트레스 받습니까? 우리가 너무 심심해서 스트레스 받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몸이 남을 꺾고 이기는데 너무 길들여져서 그래요. 습관화되어서 그래요.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남을 꺾는데서 오는 쾌감을 느끼는 이것이 습성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남자애들보면 처음 만나서는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새로운 애가 전학 오면 한 번 붙어볼까? 하죠. 누가 이기나 붙어볼까? 나중에 수업 끝나고 저 뒤로 나와! 한 번 붙어보자. 좀 친하게 지내면 될 것을 가지고 꼭 덩치 큰 애한테는 자기 텃세부린다고, 혼자 안 나오고 여럿이 자기 똘마니들 데리고 나와서, 니 어디 출신이야? 한 번 붙어볼까? 일진이든지, 이진이든지 붙어보자고 이래하죠. 그 텃세가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혹시 귀촌한다고 갈 때는 꼭 어른들 모아서 뷔페에 가든지, 뇌물을 줘서, 좋은 게 좋다고 그 동네 사람들하고 고개 숙이고 잘 해야 되죠. 무식한 촌 노인네들! 이렇게 하다가는 무슨 수를 당할지를 모릅니다. 텃세라는 것이 그게 이미 하나의 권력화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면, 우리는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오늘도 우리를 원치 않는 경쟁 마당에 하나님께서 집어넣었어요. 끊임없이 이거는 투쟁하고 전쟁을 하는데, 전쟁의 목적은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이왕 사는 것 잘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딸이 있으면 저 지방대학에 보내지 않고 기어이 말 태워서 이화여대에 집어넣어야 하고. 기어이 그런 싸움을 어떤 사람은 못해서, 다른 사람은 해서 시기가 나서 그렇게 데모하고. 

  

우리가 아는 현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요동치는 이 전쟁싸움 외에는 다른 싸움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생존에 관해서 전쟁을 벌이는 그 옆쪽 나라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쪽 나라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생뚱 맞는, 전혀 다른 전쟁방식을 우리에게 두 가지 종류로 제시하게 됩니다. 한쪽은 뭐냐 하면 하면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는 전쟁, 하면 된다는 것과 이스라엘 전쟁은 해도 안 되는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은 하되 니가 할 수 있는 방식은 전부 다 거두어라. 포기하라. 니가 동원할 수 있는 것 가지고는 이길 전쟁이 아니니라.” 이것을 언급하는 하나님과 기존은 뭐냐 하면 “가진 힘을 다 끌어 모아. 다 끌어 모으면 힘이 센 쪽이 힘없는 쪽을 이기게 되어 있어.” 라는 것에 익숙해진 그 나라가 옆에 있어요. 그래서 그 두 개의 대조되는 나라의 전쟁을 통해서 그 경계선에서 무엇을 뽑아내느냐 하면 전쟁이 없었더라면 나타나지 않을 하나님의 기준이 나타나요. 무슨 기준?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전쟁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이번 수요일에 할 건데, 미리 땡겨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 알면 안 돼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인 동시에 저주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을 못 들었다 치고, 그 뒤쪽만 들어버리면 우리의 기분이 서늘해지죠. 앞쪽은 안 들었다고 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 대목만 딱 쥐자 이 말이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그러니까 저주라는 것이 내가 평소에 스스로 근실하게 산다고 해서 저주 안 받는 것이 아니에요. 혼자 출제하고 혼자 답안내고 한다고 해서 탈락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어느 정도 인간인가 하는 것은 내 곁에 축복과 저주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 분에 대해서 내가 어떤 대우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축복과 저주로 가름되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저 분이 움직여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가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지식으로 습득하라는 말이 아니고요, 우리 주체문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니 자체가 뭐냐? 이 말이죠. 나는 아는데, 더 챙길 것 없나? 이래 생각하지 말고. 더 챙길 생각하지 말고, 더 안 챙겨도 괜찮아요. 니가 누구냐를 알라는 이 말이죠. 니가 누구냐를. 그럼 내가 누구냐를 알면 되지 않겠느냐? 근데 그게 불가능하다니까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나서겠다고 하면 그거는 저주받은 민족이고, 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전쟁으로 끌어 땡겼다면 이거는 축복받을 백성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가 구분했는데, 이걸 신약성경에서는, 우리는 신약시대니까, 잠시 점프해서 신약시대로 땡겨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내가 뭘 못하느냐 하면 나는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지를, 놈인지를 내가 연구하고 탐구하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을뿐더러 안 하게 되죠. 우리는 안 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나쁜 인간인가를, 그걸 알기 위해서 살아간다? 이걸 인생의 목표로 삼는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집에서 가훈이나 학교에서 교훈이나 전부 다 긍정적인 것을 하잖아요. 

  

근데 학교 교훈에 “우리 학급은 더 나빠지자!” 뭐 이런 교훈 봤습니까? “더 나빠지자!” 어떤 학급은 “청소를 잘하자!” 어떤 학급은 “더 더럽히자! 더 낙서를 하자!” 그런 교훈은 없어요. “지금 보다 더 나빠지도록 살자!” 이런 교훈을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내가 범죄자이지만 더 바르게 사는 가운데서 사는 희망을 본다. 그렇게 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저주받을 인간이 되는 거예요. 아직도 실감을 못 느끼고 있는데. 만약에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동대구 경찰서에서 들어와 가지고 “잠시 예배 멈추고 전부 다 지문조회를 하겠습니다.” 하고서 전부 다 지문 조회를 하게 되면 괜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없는데 지문조회 할 때 손가락을 벌벌 떠는 거예요. 나는 니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갑자기 형사님께서 지문조회를 합니까?” “그거는 수사상 미리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지문조회 해놓고 왜 지문조회 했는지를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지문조회부터 합시다.” 그러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혹시 내가 모르게 사건을 유발했는지 벌벌 떠는 거예요. 

  

지문조회자체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범인색출이거든요. 형사 올 때 “반갑다 형사야!” 이런 사람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되도록 모르는 것이 좋잖아요. 경찰이나 파출소는 멀찍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지금보다 내가 더 착할 수가 있고 선할 수가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그것이 현재 나의 전쟁에 무기처럼 여겨진다 이 말입니다. 지금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갑자기 구약이야기 하다가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우리가 죽어서 어느 나라에 가느냐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도리와 정성과 순종과 헌신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면 하나님이 아마 나를 그 나라에 영접하실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수능 앞두고 고3있는 부모들이 얼마나 몸을 조신하고 있는지 몰라요. 내 행동을 건방지게 해가지고 애들 점수 날아갈 까봐서. 

  

안양에 어떤 교회는 앞에 이름이 쫙 나열이 되어 있대요. 저게 무슨 이름인가 물어보니까, 이번에 수능 치는 애들 이름을 다 보이도록 강대상에 해놨답니다. 기도하라고. 그래서 그 권사님이 놀랬어요. ‘뭐 이런 게 다 있느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자기 교회 왔는데, 강사목사님의 얼굴을 프린팅 해서 쭉쭉 걸어났답니다. 

  

그걸 보고 저하고는 관계없지만 저보고 따지듯이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속으로 그럴 수 있는 교회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교회에서 강사목사님의 얼굴을 프린팅 해서 걸 수 있습니까? 다 하는데요. 다. 세미나 할 때 다 하잖아요. 우리 앞에 무슨 절인가 있잖아요. 그 절 큰 스님 얼굴 프린팅 해서 다 해놔요. 큰 스님이나 큰 목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갑바위나 수능이름 써놓는 거나. 

  

이게 뭐냐 하면 할 수 있는데 왜 숨기느냐 이 말이죠. 수능 앞둔 자식 있으면 잠 못 자죠. 오세요. 와 가지고 기도하세요. 기도할 때 뭐 욕심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실력대로만 되게 해주세요. 뭐 자기를 또 이렇게 자제한다고. 속은 그게 아닌데 연출하는 거예요. “저는 욕심 없습니다. 하나님. 안 되는데 달라는 그것보다도 실력대로만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는데, 수능치고 난 뒤에 보면 다 실력대로 못 쳤어요. 실력대로 친 애는 몇 명 안 돼요. 수능은요, 다 복음을 위해서 점수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복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끄집어내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백성과 축복의 백성을 가름하는 기준의 전쟁이 안 나오는 전쟁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의 낯선 기준이 제시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과 우리가 도저히 못하는 전쟁을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성심성의껏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산다는, 그런 식으로 구원받겠다는 시도자체가 이것이 진짜 전쟁이 아니고 마귀가 뒤에서 시킨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전쟁의 승리는 대속에 있습니다. 값을 치르는데 있습니다. 값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쟁을 하면서 그 값을 치러야, 죄 값을 치러야 죄가 없어진다는 이 사실은 전쟁이 일어나야 가능합니다. 

  

우리네 전쟁을 해서는 그걸 몰라요. 나의 전쟁을 하면 모릅니다. 우리네 전쟁은 우리의 자존심이 붙은 전쟁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붙은 전쟁. 기존 교회에서 신천지 얼마나 욕합니까? 그거는 자존심에 관한 문제에요. 박근혜 하야하라고 그렇게 덤벼들잖아요. 그거는 자기들 자존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거는 할 수 있는 거예요. 촛불 나도 들겠어요. 촛불 들고 경찰 버스에 한 번 올라갈까요? 내려와! 내려와! 비폭력! 이거는 나도 하겠어요. put your hands up! 랩 할 때 그런 거 다 해요. 그거는 나도 하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때려죽여도 못하는 것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너는 뭘 해도 죄인이야.” 그걸 보여주는 그게 진짜 횃불이에요. 그게 다윗의 등불이에요. 십자가만이 영원한 횃불이에요. 뭐 어떤 헌신과 정성과 선교사 봉사하고 하늘나라 확장하고 백날해도, 그것은 니 속에 있는 니가 저주 받을 백성이라는 것을 티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바로 값을 치러야 되는, 준비된 대가가 있습니다.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겁니다. 니 몸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른 몸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몸이. 

  

다윗 언약에 있어서 다윗이 알게 된 사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번제와 속건제... 그런 것이 있지만 정작 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 법의 완성은 뭐냐 하면 우리가 그 법 앞에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법의 결과는 용서에요. 모든 율법의 활동의 결과는 용서입니다. 율법으로 활동케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활동케 합시다. 나대지 말고. 본인이 설치지 말고 말씀이 어디에 모이는가를 보자 이 말입니다. 

  

정답을 내렸으니까 이제 다시 구약으로 돌아와 봅시다. 정답을 내렸는데, 아까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같이 봤듯이 쭉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잔인함, 잔혹함, 냉정한 전쟁입니다. 그게 1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14절, “오직 여자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실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자, 아까 제가 설교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전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의 방법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전쟁의 방식에는 관심이 없고 뭐만 관심이 있느냐 하면 “탈취한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결과물에 대해서만 우리는 혹하게 되어 있어요. “이야! 탈취한 것은 다 우리 거래. 와우! 신난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이미 욕심이 나잖아요. 욕심이 나서 저걸 갖고 싶다 이 말이죠. 갖고 싶다면 그 갖고 싶은 사람이 그 전쟁에 대해서 오버하게 돼요. 과도하게 몸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리랑 방송에 취직한다고 하는데, 취직되었느냐 물으니까 떨어졌다는 거예요. 왜 떨어졌느냐 하니까 너무 오버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면접 볼 때 너무 오버해서 떨어졌다는 겁니다. 왜 오버합니까? 지가 원하는 것이 눈앞에 있는 거예요. 있기 때문에. 

  

만약에 총동원 전도주일을 한다, 우리교회가 그런 일은 없겠지만, 제가 죽거들랑 그런 일을 하시든지, 총동원 전도주일을 한다고 하면 어떤 특정 사람을 노릴 때에 전도하기 위해서 오버하게 돼요. 같이 김장 담아주고, 찾아가주고, 괜히 오버하게 되고, 거기에 투입되는 모든 방식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투입한다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희생, 헌신, 사랑, 친절, 배려, 양보, 그거는 영업입니다. 영업. 영업이거든요. 달력주고 하는 이런 것. 영업이라 영업. 무슨 영업에서 그런 게 있어요. 영업하면 영업하는 당사자도 괜찮고 너도 괜찮은 게 돼버려요. 

  

그러나 괜찮은 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의 잔인함 밖에 없습니다. 그 잔인함은 이미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그 숨어있는 기준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기준. 왜 이세상은 저주의 세상이고, 저주받아야 되는 그 기준을 앞당겨서 적들에게 떨어지도록 니는 거기에서 하나의 통로의 역할을 하라 이 말입니다. 문장이 좀 길었죠? 좀 떨어지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예 저주해요. 구원될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주의 기준을 살리는 목적이지, 누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복음의 기준을 살리는 것이, 복음의 기준이 넘쳐나는 것이 최종적인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 복음의 세계를 위해서,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걸 시키는데 택한 백성에게 시키는 거예요. 시킬 때 니가 나대면 안 돼요. 우리가 나대버리면 마치 우리는 저주 안 받을 것처럼 착각을 해가지고, 내가 평소에 내 전쟁을 할 때 동원했던 그 수단을 동원해버립니다. 친절함을 베풀어서 우리 편이 되게 하고. 그렇게 하나님 믿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그 방법이 아니고, 너를 포함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지옥 갈 것도 없어요. 벌써 우리는 지옥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지옥에서 태어나서 행세하는 꼬라지 보면 마귀의 분신들이고, 하는 모든 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왜냐하면 마귀에게서 정신을 받아놓았으니까 자기만 사랑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 마귀 짓을 하는 거예요. 그게 합세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거기에 무슨 토를 달 수 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데. 예수님 죽었다는데 그 앞에서 저는 착하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죽어 마땅한 존재로 자기 자신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무슨 결혼식에서 축복을 퍼붓습니까? 정말 결혼식에 가면 안 돼요. 밥만 먹고 싶은데. 무슨 축복을 합니까? 니 주제파악을 하라고 해야죠. 살다가 헤어져도 축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다 똑같아요. 잘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 같은 못난 존재인데, 창세전부터 선택해서 못난 존재를 가지고 자기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뜻을 전하는데, 저쪽에다 잔인한 저주를 퍼부은 거예요. 

  

저주를 퍼부으면서 퍼붓는 본인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주님이여, 저들의 물건과 저들의 여자와 저들의 유아와 저들의 가축들을 제가 받아도 됩니까?” 이런 결과로 주어질 때, 이게 바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이건 뭐 내가 이렇게 더 살아도 되는 겁니까? 나이 60이 넘어서 더 살면 우사스러운데? 또 뭐 무슨 행패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제가 서울에 가면 자러 가는 좀 먼 곳이 있습니다. 성도님 가정에 가거든요. 가면 복음이야기도 하는데, 그 분이 또 저한테 복음이야기도 해요. 

  

아버지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아버지가 남을 감금하고 폭행해서 합의 정도가 아니고 감옥소에 가게 되었다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거예요. 아이구, 보세요. 나이 많다고 인간되는 것이 아니죠. 그 성질, 왜 폭행했겠어요? 내 것, 내 방식으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니가 내 자존심 건드렸으니까 한 번 맞아보라는 겁니다. 이게 누구의 전쟁입니까? 본인 전쟁이에요.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 분의 아버지가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당부하죠. 그 아버지를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까 아들이 대신 뭐 이렇게 배려하려고 하지 말고, 아버지는 그렇게 교도소에 가봐야 주제파악을 하니까 아들이라고 나대지 말고 가만두라고, 참, 제가 그렇게 효도질 좀 시켰어요. 그런 효도가 없죠. 가족들이 나서서 합의 봐주지 말고. 자기가 한 행동은 자기가 책임지라고 놔둬버리라고요.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만 덮으면 하는 우리 짓거리들이에요. 나의 전쟁, 나 잘 되는 전쟁, 나의 잘남을 증명하는 전쟁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됩니다. 열두제자나 사도들이 갔던 길은 세상에 미련 없었습니다. 아무 미련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도 지옥이고 나도 지옥인데, 그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그냥 구원받은 것뿐이에요. 

  

달리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못난 것. 나 못났다. 그것 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그래, 니 잘났다.’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비비꼬는 이야기지만. ‘어이구, 잘났어요. 어이구, 훌륭하십니다. 이대 잘 들어갔어요. 말 잘 타세요. 엎어져라!’ 그렇게 하면 되지, 그걸 뭐 데모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어차피 세상인데. 뭐 좋은 세상이요? 무슨 좋은 세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신 길이고 스데반집사님이 가신 길인데. 

  

뭐, 어떤 혜택이 주어져도 들풀 같은 나를 이렇게 키워주시고, 참새 같은 나를 이렇게 키워주신 것은, 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거는 니가 하는 전쟁이고 내가 이미 치룬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 나라와 그 의는 예수님 홀로 치러서 얻어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우리가 매일 무슨 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밥이나 먹고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핑계고, 그 내부에는 우리의 자존심이 있고, 그 뒤에는 사탄의 노림수가 있음을 저희들이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