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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06강-겁내는 자(신20;5-9) 1611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7. 17:07
2016-11-06 15:04:26조회 : 44         
   겁내는 자 16110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겁내는 자(신명기 20:5-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9KDxlYXFtWQ, Hit:6
 이근호16-11-06 15:42 
겁내는 자 


2016년 11월 6일                            본문 말씀: 신명기 20:5-9 

(20:5)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20: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20:7) 여자와 약혼하고 그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취할까 하노라 하고 

(20:8)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하여 

(20:9) 백성에게 이르기를 필한 후에 군대의 장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하나님의 전쟁은 일반적인 인간들의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로서는 불필요하게 만드는 전쟁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인 것을 뜻합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전쟁 중에 있는지, 자신들이 하나님의 군대인 줄로 모르고 그 효과만 얻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무기는 너무나도 특이하게 된 ‘어린양의 희생’이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1년 된 어린양의 피를 문밖으로 내놓고 전시하듯이 하는 것이 전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전쟁을 치르는 주체자를 감추므로서 모든 지상에서 일어나고 주어는 모든 것이 ‘전쟁의 여파’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친히 개입’이 성사된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이 하나님 전쟁에 가담될 경우를 사전에 차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도 소소한 전쟁을 합니다. 자신이 이미 가졌다고 여기는 것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 그 소유된 것들 중에서 전쟁에 소모될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구분할 겁니다. 

즉 작은 부분을 소비해서라도 나머지 대부분의 것을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전쟁에 나서게 마련입니다. 장사에 일단 초기 밑천을 넣어서 지속적인 소득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들을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들로서는 ‘낯선 전쟁’입니다. 인간들이 이 전쟁에 가담한다고 여기면 이는 전쟁의 성질을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들이 소원은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벌리는 모든 전쟁은 이 행복사수와 관계된 것들입니다. “신이시여. 행복을 유지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행복해서는 안될 우리들이 도대체 어디서 온 행복을 이렇게 누리게 되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난 뒤, 그 하나님에게 대드는 경우들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신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당연히 우상이요 다른 하나는 당연히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참된 신은 우상 뒤에 가리워져 있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을 자진해서 우상이라고 신고할 자는 없습니다. 

다른 각자 ‘참된 신’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이 주장은 진위는 참된 하나님의 개입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황당하게 말도 안되는 그런 전쟁을 마주하게 만들어서, 나의 것으로 나의 것을 지키는 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판국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심을 더 이상 감출 길없어 노출시키게 됩니다. 소위 겁을 집어먹게 됩니다. 행여 전쟁에 나가서 전사를 하게 되면 그동안 공들였던 ‘나의 것’이 타인의 것이 되는 것을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전쟁의 진위나 승리 여부에서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날아가버린 것이 화가 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라 ‘나의 전쟁’, ‘본인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자기 전쟁을 위한 보조로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시키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당부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나뉘어져 겁을 집어먹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 지를 분간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은 숨어있는 하나님의 개입으로서, 그 결과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로 구분됩니다. 즉 승리의 원리를 아는 쪽이 하나님의 백성 쪽입니다. ‘승리의 원리’는 바로 ‘토사구팽 (兎死狗烹)입니다.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곧 ‘억울해 보이는 희생’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있으나 마나하고 소모되어도 마음이 덜 아픈 쪽의 희생을 통해서 멀쩡하다고 여기는 자들의 배를 더 살찌우려고 합니다. 소위 ‘살아 남아 있는 자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이런 인간들의 존재 본성을 공략합니다. 

창세기 8: 20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고 되어 있습니다. 홍수 이후에, 같이 방주를 동승했던 짐승들 중에서 노아가 잡았던 짐승은 (소모시킨 짐승은) 소비하고 싶은 더러운 짐승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입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정결함은 축소되고 더러움은 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제단을 기쁘게 흠향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구원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자들이, 자신의 가치를 살리고 인정해줄 그런 구세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욕망의 희생물이 된 그런 분이시었습니다. 즉 자진해서 토사구팽을 당하시려는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새 집을 지었다든지 새로운 포도원 농장을 장만했다든지, 방금 새 여인을 만나 약혼식을 행한 자들은 전쟁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죄인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 못한 자들은 전쟁에 참여할 입장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두 명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남쪽에서 올라온 선지자는 못된 북쪽 선지자의 꾐에 빠져 사자lion에 물러 죽게 됩니다. 남쪽 선지자의 임무 수행에 억지로 끼어들고 싶었던 이 북쪽 선지자는 곧 북 이스라엘의 그 당시 신앙형편을 반응합니다. 

겉모습만 예언을 제대로 전한다고 해서 참된 선지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감하고 과감하게 진리를 전한다고 해서 참된 선지자가 아닙니다. 참으로 참된 선지자는 자신의 한계를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주님의 증인’되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즉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쟁의 여파에 속해있습니다. 

우리 실력으로 승리를 따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손으로 배신당하신 그 분의 피가 진정한 전쟁의 무기인 것을 아는 자들이 진정한 하늘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대가 보고 봉사하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이용당해도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1-06 23:18 
106강-신 20장 5-9절(겁내는 자)161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0장 5-9절입니다. 구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여자와 약혼하고 그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취할까 하노라 하고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하여 백성에게 이르기를 필한 후에 군대의 장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지금 이 말씀은 전쟁이야기입니다. 어떤 전쟁이냐, 하나님의 전쟁이야기입니다. 보통 하나님의 전쟁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전쟁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눈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안 보이는 그런 전쟁인데, 이게 어떻게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냐 이 말이죠. 흔히들 말만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보면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을 빙자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기 전쟁을 벌이면서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어요. 축구할 때, 기도 막 해대잖아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기도하고 하나님한테 기도 한다 이 말이죠. 

  

만약에 축구하는 두 팀이 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라면 주님은 지금 마음이 갈라져서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둘 다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팀이 이겨도 진 팀은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이 축구 파토나라,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가 아침에 했던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한 번 봅시다. 창조하고 대들고 심판하고. 중간에 대들고 하는 장면이 인류역사인데요. 하나님께 대드는데 거기서 두 개의 상반된 신이 나옵니다. 

  

그 상반된 신, 우상이 등장합니다. 방금 두 개의 상반된 신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신이 아니고 달랑 하나밖에 없는 유일신, 하나밖에 없는 신이 등장해요. 이스라엘은 여호와요, 다른 민족한테는 가끔 몰록, 밀곰, 각각 자기 신이 하나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왜 두 개의 신이라고 하느냐? 각자의 민족은 유일신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고 생각하고 믿는데, 그게 왜 두 개의 신이 되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그냥 개입하지 않아요. 전쟁형식을 띄게 되어서 소위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그 여호와가 우상이 돼버립니다. 

  

예수 믿는 교회에 주님이 개입해버리면 예수 믿는 그 예수가 우상이 돼버려요. 전쟁을 통해서 두 개의 신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이 두 개로 나누어지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느냐 하면 백성이 둘로 나누어져요. 가짜 하나님 믿는 백성과 진짜 하나님 믿는 백성으로 구분되는데, 그 구분 되는 것은, “나 가짜 싫어. 진짜 하고 싶어.” 그렇게 한다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전쟁형식으로 개입이 되는 그 현장이 있어야 됩니다. 사건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인간치고 “나 우상섬깁니다.” 라고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어떤 인간치고. 교회 다니면서 나는 가짜 신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전쟁이 그 사람의 인생 속에 개입할 때, 자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아, 내가 엉터리로 살았구나.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된 자, 죄인 된 자, 경건치 않은 자에게 하나님의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되었다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의라는 전쟁의 생성물, 그걸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간들은 자기가 진짜 예수, 진짜 하나님, 진짜 삼위일체 믿는다고 자부를 하지만, 계속적으로 실제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하는 겁니다. 인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전쟁 속에 휩싸여간 그런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났냐? 일어나지 않았냐? 하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이렇게 파악합니다. 

  

그동안 인생을 우리가 살아오면서 우리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걸 제가 언급하면 바로 행복이라는 것, 그겁니다. 그 다음에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정. 그런데 그 행복과 사랑과 우정을 유발하는 그 모판이 있어요. 그 모판이 뭐냐, 혈육입니다. 혈육. 자기 식구 감싸기. 내 가족이에요. 내 가족. 누구든지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이 혈육이, 혈육적인 자기 본성을 유감없이 본때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쟁은 벌써 결론이 나왔죠. 하나님의 전쟁은 뭐냐, 영으로 오셔서 육을 상대하는 전쟁. 그렇다면 이 육이 하나님이 뭘 하든 간에, 예수님이 뭘 하든 간에, 뭘 감추느냐 하면 “나는 내 육을 포기 못합니다.” 라는 것을 감추는 용도로, 감추는 방식으로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한 거예요. 감추고 있었던 겁니다. 내 혈육적인 뿌리를. 

  

어떤 분이 복음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 복음을 아는 분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날 때부터 다 죄인입니다. 날 때부터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쪽에서 하는 소리가 “어느 목사가 그런 소리 하더냐?” 이렇게 고함지르면서 이런 소리를 해요. “그럼 니 부모는?” 부모도 죄인이라고 하니까, 화가 끝까지 나버린 거예요. 그쪽에서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부모를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그러한 쪽에서 논쟁을 벌인 거예요. 무당하고 논쟁을 벌인 거예요. 논쟁을 벌인 사람이 누군지 알겠죠? 시도 없이 건드린 분 있잖아요. 무당하고 붙은 거예요. 

  

무당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죽은 부모, 조상한테 제사를 잘 드려야 이 땅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그걸 길게 했지만,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니가 육에 얽매여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잘 섬겨서 복 받는다는 이것, 이거는 우리가 타고난 태생인데, 사실은 아무리 종교로서 얼키설키 자기를 꾸미고 종교로 이것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육의 본성을 감출 길이 없어요. 모든 종교의 특징이 바로 그거잖아요. 

  

우리 집안 잘 되는 것. 아버지가 대통령이 이었으면 나도 대통령. 모든 종교가 어디에 개입되느냐 하면, 우리 집안 영원하여라!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육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이에요. 전쟁해야 할 대상자, 뱀의 후손, 영이 되는 이유가 인간은 자기를 고칠 의사가 없어요. 고칠 마음이 없어요. 아담이 범죄 했던 그 자아를 그저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유지하려면 우리를 범죄케 했던 그 자아를 유지하라고 언급하는 그런 신을 찾아가면 되죠. 그 신이 누구냐? 마귀잖아요. “반갑다. 마귀야!” 

  

우리가 잘 되기 위해서 섬기는 그 신이 용어가 예수가 됐던, 하나님이 됐던, 삼위일체가 됐던, 어떤 신이 됐던, 그건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지키고 싶은 신을 지키도록 격려해주고 배려해주는 신이에요. 지금의 자아를 나는 다른 자아로 달라질 의사가 없다. 거기에 대해서 악마는, “그래라. 더 키워줄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구약에서는 실제적인 토지싸움, 경계선싸움, 또는 영토싸움이 되지만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까지 이르게 되면 계속해서 성경에서 문제 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어떤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내 현재 자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당성을 위해서 동원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말씀이라도, ‘지금 내 자아에 손대지 마. 이 자아는 내가 유지할거야.’ 그걸 정당화시키는, 지금 내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유지시켜주는 데에, 그런 식으로 말씀을 덧입히면 그거는 악마가 말씀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오면서 지금의 자아 말고 다른 자아로 바꿔달라는 이런 마음으로 오지 않고 지금 자아를, 죄를 그냥 덮어달라고 하는 겁니다. 자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에게 안 들키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온다면 그것은 마귀를 찾아오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과 행복과 우정은 다 혈육과 관련이 되어 있고, 동창생이라는 것도 나의 과거에 연루되어 있잖아요. 따라서 영어로 비욘드 beyond라고 하는데, 넘어서야 해요. 우리가 행복을 쥐면 안 되고 행복을 넘어야 해요. 행복 너머가 불행이 아닙니다. 그냥 행복 너머에요. 행복 그 딴 게 뭔데? 이게 행복너머입니다. 사랑, 사랑도 넘어서야 해요. 사랑 그게 뭔데? 사랑도 나중에 피곤해요.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하지, 사랑 챙겨주려고 하는 것도 피곤해요. 하루 세끼를 우에 다 챙겨줘요? 우정, 우정도 나중에 나이 들어서 우정은요, 그것도 피곤해요. 

  

그저 만나자고 하는 것은 혼자 술 먹는 것이 맛이 없어서, 술 먹고 싶어서 자꾸 친구한테 전화하는 거예요. 술 먹고 싶어가지고. 세상 정치이야기 하는 것도 혼자 노는데 재미없으니까 친구 불러내서 안주 삼아 정치이야기 하는 겁니다. 혼자 있는 것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그걸 정신적 공허감이라고 해요. 결핍을 뭔가 채워야 한다는 것. 결핍된 자아를 바꾸면 되는데, 결핍된 자아는 안 바꾸고 빈칸만 자꾸 채우고 또 채우는데, 이거는 사마리아 여인하고 똑같아요. 마셔도, 마셔도 목말라요. 

  

그것은 그 이유가 바로 내 자아가 참된 하나님을 줘도 우리는 그것을 기피하고 옛날에 내 자아를 잘한다, 잘한다고 유지시키는 그 하나님을 찾다보니까 그런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는데,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 줬어요. 그 사례를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계속 주는데, 줘도 소용이 없어요. 이거는 무슨 장맛비에 물방울처럼, 유리창에 부딪쳐도 그냥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려가요. 그 유리 칸막이 안쪽에는 아우성이라. 소돔과 고모라하고 똑같아요. 아우성을 치는데,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이 표면에 와서, 표면이 완전히 말끔한 유리벽이어서 쫙쫙 미끄러져요. 

  

듣기는 들어도 쫙쫙 미끄러져가고, 속에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강력한 유리벽. 그 유리벽을 깨는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치르게 하는데, 그 전쟁에서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치르게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어느 정도 말도 안 되는 전쟁이냐 하면, 기존의 무기가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드는 전쟁을 일으켜버립니다. 얼추 뭔가 전쟁이 된다 싶을 때는 용기를 내든지, 단합대회를 하던지 할 텐데,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버리면 처음부터 기죽고 들어가서 전쟁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입니다. 커도 너무 커요. 키가 3미터가 되니까. 목소리는 얼마나 우렁찬데. 그 3미터 된 덩치가 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했어요. 그리고 또 내기를 하는데 남자답게 내기를 하자는 거예요. 여럿이 덤빌 것 없이 너희들 대표자 하나 뽑고 내가 나갈게. 일대일로 해서 이긴 자가 다 먹기. 이긴 쪽이 다 먹기. 이긴 쪽이 몽땅 다 갖기. 게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다 먹기. 적장의 목을 치면 나머지기 다 먹기. 슬슬 정치적 발언이 나오는데 주의해야 해요. 

  

이 전쟁을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전쟁,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이거는 할 수 없는 전쟁을 왜 유발시키느냐 하면은, 처음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미 전쟁을 했거든요. 그때 히브리인들은 전쟁인줄도 모르고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이미 전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혜택만 입었단 말이죠. 그 전쟁이 뭐냐 하면 애굽은 전쟁 상대자가 누구인줄도 모르면서 전쟁에서 패배해버렸습니다. 그 전쟁이 어린양이에요. 어린양.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전쟁의 무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어린양의 희생이 들어가야 해요. 희생자 뽑는데, 희생되는데 적합하지 않는 자들은 집으로 다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자, 집에 돌려보낸 자가 어떤 자인가 하면, 5절에 보면,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가라” 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느냐 하면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걱정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거예요.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할 수 있죠.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상당히 무서운 말씀인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면, 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아군 편에 전사자가 나타날까요? 안 나타날까요?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일체 다치지 않고 적들만 다친다고 생각하죠. 그런 하나님의 전쟁은 없어요. 그러면 희생적인 어린양은 어디서 찾습니까? 없어요. 우리가 희생되기를 원하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은 희생이 안 되고 쓸데없는 것들만, 그것 좀 나가 안 죽나? 하는 이런 것들만 희생되어서 그 희생의 덕을 보자는 심보를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8장 끝에 보게 되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방주에 있던 그 짐승 가운데 제물을 드리는데, 그 제물이 어떤 제물이냐 하면, 더럽고 불결한 짐승들도 함께 쌍으로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짐승 중에서 제물을 바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너희들이 사실은 살고자 하는 입을 뗄 입장도 못 되고, 자격도 없는 인간인데, 차라리 살았다고 좋다고 하지 말고, 왜 내가 살았지? 하고 오히려 의심을 하라는 거예요. 행복이 뭡니까? 묻지 말고, 행복을 키울 생각을 하지 말고, 행복하지 않아야 되는데, 도대체 행복이 어디서 왔지? 난데없는 행복이 왜 오지?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야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에 합류한 자의 모습이 맞다. 이 말입니다. 

  

아휴! 정말, 인간으로서 그런 인간이 있다는 것이 드물죠. 내 것 지키려고 하잖아요. 그리고 희생은 남들 희생시켜놓고 덕이나 보자는 식이잖아요. 왜냐하면 나는 더 살아야 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게 바로 말씀을 가지고 자기 존재의 정당성으로 계속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원수 된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하는 말이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냐 하면, 그 희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 이 말은 뭐냐 하면이 땅은 인간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그냥 덤으로 노동하면서 거기서 사는 거고, 이 땅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은 무지개처럼 하나님의 희생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태워지고, 주입되고, 또 주입되어야 해요.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백만 세 번....계속해서 건전지 들어가는 겁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햇빛과 공기를 선인과 악인에게 유지되려면, 인간 쪽에서 얻어 챙겨서, 헌금 받아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십자가 그 의가 계속해서 소모품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 소모된 그것을, 희생적인 소모된 그것을 모르게 된다면 그거는 전쟁의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패배자는 지옥 가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는 주님이 승리하되, 거기에 백성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승리의 취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벌이는 전쟁,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희생 덕분으로 산다는 그 전쟁에 우리는 계속해서 깊숙하게 가담이 되어야 하고 그 안쪽에서 살아야 돼요. 안쪽에서. 그 안에서 계속 살아야 됩니다. 계속 살면서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내가 바친 것, 내가 하는 희생, 내가 주님 앞에 하는 기도, 이 모든 것은 일체 희생물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존재자체가. 내 존재자체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겁니다. 

  

안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것은 안 받고 다른 분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입장에서, 증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이번에 제가 울산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파우치라고 이야기했어요. 지갑. 여성들이 갖고 다니는 파우치. 예수님의 파우치. 그걸 예수 안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갖고 다니는 그 지갑, 파우치 안에 우리는 동전처럼, 예수님께서 늘 갖고 다녀요. 

  

지난 울산에서 공부하기 전에 식사하러갔는데, 길에 가다가 돈을 주웠어요. 돈을 주웠는데, 옆에 가던 이종원 목사님이 달랑 그 돈을 가져가버렸어요. 십 원. 동전을 갖고 가서 자기 발밑에 넣어요. 구리는 건강에 좋다고. 이제 그 동전은 이종원 목사님의 파우치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들어가 있어가지고 주님이 앞서 선봉장이 되는 그 전쟁의 맛을 마음껏 보고 있는 겁니다. 내가 희생한 것이 아닌데? 나는 그저 얻어 챙겼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는 그 실현태, 실현되는 그 양상이에요. 

  

집을 짓는데, 내 집 짓는 것에 대해서 자꾸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거예요. 참, 아까 그 문제를 다시 해봅시다. 자, 하나님의 전쟁에서 전사자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반드시 생깁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땅을 분배하는데, 땅을 분배해 줘봤자 어떤 집안은 고아와 과부가 돼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쟁에 나가서 그들이 하나님의 전쟁의 이름으로 전사해버려요. 아이성 싸움에서도 무려 35명이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안 죽는 것이 아니에요. 전사해요. 죽습니다. 근데 그 전사가 주의 이름으로 전사해야 되기 때문에 전사해요. 

  

그런데 그 사실을 미리 땡겨서 하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집지었는데 전사하면 집에서 누가 살지? 빼라! 빼라! 다 빼라! 지금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데 아직도 자기 존재유지와 정당성을 위하여 전쟁을 이용하려고 하는가? 니 집 잘 짓는 거 하려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야. 니 가정의 행복과 사랑과 우정을 위해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야. 그거 빼!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뭐냐 하면, 6절에 보면,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가라” 빼버려요. 뭐 전쟁하면 적이.. 여호와증인도 빼버려라! 뭐 양심적인 이웃 때문에 군대를 안 간다고요? 

  

제가 판사 같으면 그 여호와증인한테 묻고 싶어요. 니 양심 안에 뭐가 들어있는 줄 알아? 니 양심 속에는 니 부모한테 배워먹었던 니 혈육이 들어있어. 성령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혈육이 들어있어요. 나만 살겠다는 것이 들어있어요. 징역 10년 내리고 싶어요. 누가 군에 가고 싶어서 갔습니까? 나만 살겠다는 그 이기주의를 용납하면 안 돼요.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군 양심 없어서 군에 가나?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할까 하는 자가 있느냐 이런 자는 나가라고 법으로 정해놓으면, 자 어떤 꼼수를 쓰겠어요? 군에서 통보받고 갑자기 자기 밭에다가 뭘 심겠습니까? 갑자기 포도 심는다고 하겠죠. 그래서 군에서 나와 가지고 “이 집 아들 12월에 군에 갑니다.” 하니까, “방금 포도나무 심었습니다.” “겨울에 포도를 왜 심어? 포도 심었어? 그럼 빼줍시다.” “헤헤! 그럼 성공했네. 군 면제됐네.” 이런 꼼수가 또 나올 거예요. 

  

뿐만 아니고, 7절에 “여자와 약혼하고 그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취할까 하노라 하고” 약혼했는데 전사하면 그 여자하고 결혼 못한다 이 말이죠. 인간의 육적인 입장에서 굉장히 심각한 문젠데, 성경에서는 그걸 빼버리라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이 들어있어요. 그 예수님의 희생을 네 글자로 이야기하면 토사구팽이라고 합니다. 

  

실컷 교회에서 이용해먹고 내칠 때, 이용해먹고, 빼먹을 것 다 빼먹고 구박하는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희생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봉사하려고 하거든 봉사하지 마세요. 녹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녹취하라고 했습니까? 녹취해놓고 돈 달라고 해요. 아르바이트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십자가를 경유해야 하는데,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다이렉트로 자기에게 경유하는 겁니다. ‘교회 나 때문에 잘 됐는데 이제는 나를 내쳐? 괘씸한 것!’ 이거 뭐예요? 왜 다이렉트로 합니까? 지금 갑자기 이 말 듣고 집에 가서 포도원 심고, 약혼 하고, 집 짓고, 아이구, 이용당하면 안 되는데....., 

  

8절에 나옵니다.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집에 가! 집에 가! 이거는 겁내지 않는 자가 승리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한다는 말이지, 겁 없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은, 이거는 다른 민족에게도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군데에서는 사람을 기계로 만들잖아요. 그런 식으로 겁 없는 자가 승리한다는 이거는 하나님의 전쟁의 원칙이 아닙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주여! 주님이 원하시면 토사구팽 해주시옵소서. 그게 저의 소원입니다.” 라는 자들만 남으라는 것이죠. 

  

그럼 목사님, 그렇게 해서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가라 가! 다 가버려! 그럼 다 가라! 이 말입니다. 토사구팽 안 당하려고,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사냥개를 사냥하는데 다 써먹고 쓸데없으면 잡아먹는다는 뜻이거든요. 자진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거든 주의 일 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의인이면서도 그렇게 당했어요. 의인이면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죽임 당했어요. 하나님한테.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관계에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그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그 예수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그렇게 되지 못한 제가 한탄스럽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뜻이 아닙니까? 예수 믿는 것이 뭐 장난도 아니고. 자꾸 피 찍어 발라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차라리 피 찍어 바르지 말고 빨간색 페인트를 찍어 바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은 이 세상에 실제적으로 전쟁 속에 있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이기주의며 예수님까지 이용하려는 그런 나쁜 놈인가 하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예수님만이 정말 인간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 억울한 죽음이 도리어 죄인을 구원했습니다. 그걸 증거 하라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두 종류의 아주 특이한 두 선지자가 등장해요. 

  

여로보암 때에, 여로보암이 까불대니까, 남쪽 유다나라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여로보암에게 “당신 나라, 당신 자손들은 대대로 죽을 것입니다. 300년 후에 당신이 벌인 이 산당의 제단에서 당신의 후손들이 죽을 겁니다.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이렇게 그 집안 저주받는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 여로보암 왕이 네가 왕인데 어디 까부냐? 저 사람을 추포하라! 잡으라고 이렇게 하니까 손이 그만 원상회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살려달라고 하니까 기도해서 손이 다시 성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여로보암이 당신은 참 귀한분이니까 내가 당신한테 모든 미래를 보장해주겠다고 하니까,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물도 마시지 말고 떡도 먹지 말고, 이 땅에서, 북쪽 이스라엘 땅에서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북쪽 이스라엘의 늙은 선지자, 요새 말로 늙은 목사죠. 나도 같은 목사인데 천사가 와서 어젯밤에 이야기하기를 물마시고 떡 주라고 했다고 거짓말 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런 멋진 예언을 했는데 나도 같은 멋진 예언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목사라는 것을 상대를 통해서 감정이입이 되어서, 자기도 같은 목사이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남쪽에서 온 목사가 진짜 그런가 싶어서 떡을 얻어먹었어요. 먹고 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북쪽 이스라엘 목사에게 임하기를, 그 사람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했기 때문에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예언했어요. 예언하고 난 뒤에, 남쪽 목사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사자를 만나서 그 선지자를 죽여 버렸어요. 죽었는데 사자가 보통 먹이를 뜯어먹어야 하는데 안 먹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이 소문을 뒤늦게 북쪽 이스라엘 토착목사가 듣고, 내가 잘못했다. 내가 욕심을 부렸다. 해가지고 내가 죽으면 이 사람 묘에 함께 묻어달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 내부 전쟁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내 것을 삼는 것이냐, 아니면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쪽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 이 북쪽 선지자는 나도 목사라는 쪽으로 이걸 다이렉트로 연결시킨 거예요. 이런 목사가 북쪽에 있다는 말은, 북쪽 나라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못된 선지자를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는 의미가 이 열왕기상 13장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전쟁의 여파가, 효력이 일어나는 그 삶에 계속 살고 있어요. 우리는 큐티 하면서, 큐티자체도 위험한데, 말씀 묵상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연결시키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하는데, 모든 말씀 안에는 주님의 신음소리가 들려있고, 주님의 고통이 담겨있다는 조로, 그것을 찾아내는 쪽으로 말씀을 봐야 해요. 

  

이 말씀 가지고 내가 잘났다, 역시 나도 참 멋진 사람이야, 나도 성도다워, 그걸 으스대지 말고,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주님 은혜가 아니면 안 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모든 말씀을 보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하나님의 전쟁에 가담된, 하나님의 파우치 안에 있는 동전으로, 십 원짜리 동전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으로 전쟁을 할 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기는지를 우리는 잘 모르지만 이미 하나님의 전쟁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