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강-신 20장 1-3절(하나님의 전쟁방식)1610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0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92페이지입니다.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거든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에 놀라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 아예 전쟁 자체가 안 일어나도록 조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붙여놓고 떨지 말라고 하지 마시고 조용한 게 좋다고, 그냥 조용하게 살게 하시면 좋은데, 그럴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 있는데, 왜 조용하게 살지 않게 하고, 의도적으로 겁낼만하고, 놀랄만한 일을 만들어놓고, 놀라지 말라고 이렇게 하니까, 그럼 그걸 유발시킨 하나님의 의도가 뭔지가 상당히 난감할 겁니다.
그 의도를 제가 미리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점으로 사용하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기준점을 세우려고 하시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심판이 감행되는지, 어떤 식으로 할 때 천국가고, 지옥 가는지를 그 기준점으로 우리를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홀로 달리신 게 아니에요. 양쪽에 인간의 두 대표자가 등장했는데, 하나는 지옥의 대표자, 하나는 천국의 대표자에요.
그 가운데 기준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면 지옥,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면 천국. 그게 최정점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기준점으로 삼기 위해서, 물론 그 기준점은 개인의 기준점이 될 수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이 표준이다.” 이래 되면 말이 안돼요. 표준이 너무 많아서 말이 안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사람은 다른데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그 기준점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 그 내부에 뭘 쑤셔도 전부 다 똑같은 기준점이 나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다 똑같은 기준점이 나온다는 그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인생경험이 다 다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기준점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는데, 개인 전쟁이 아니고 집단전쟁을 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누구나 겁나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전쟁을 주께서는 전쟁을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일으키는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밖에 없죠.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이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이긴다고 이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자, 전쟁에서 적들이 앞에 모압이고 뭐 블레셋이고 있습니다.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쟁을 붙여줬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다고 하는데,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전쟁에서 이기고 난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가 전에 적들과 한 번 붙어보자는 그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 전쟁 통에서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전쟁인데도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새로운 남은 집단이 비로소 이긴 집단이 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그 역대하에 보면 여호사밧왕 땐가 그때 전쟁이 있었어요. 역대하 20장 15절에서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때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암몬과 모압과 세일 사람들이 연합해서 여호사밧을, 유다나라를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럴 때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우리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인 야하시엘에게 신이 임하게 해서 예언을 하게 하시는데, 전쟁은 일으켜놓고 하는 말이 이 전쟁이 이스라엘이 이기라고 준 전쟁이 아니고, 이스라엘 니가 처리할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17절에 보니까 이 전쟁은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렇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현실관에 대해서 굉장히 난감한 입장을 취해버립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들의 전부가 현실이 아닌가? 그 보이는 것들의 전부가 현실이 아니에요. <일차원적인 인간>에서 마르쿠제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현대인의 기술 산업시대에 사는 인간들은 일차원적인 인간이다. 일차원이라고 하는 것은 위치를 정할 때 숫자 1로만 위치를 정하는 것을 1차원, 숫자 2개로 정할 때는 2차원, 숫자 3개의 좌표가 있을 때 3차원 존재, 4개가 있어버리면 그거는 4차원, 수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1차원존재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엘리베이터를 올라타는 것. 성경에서 나오는 바벨탑이 바로 그거죠. 밑에 있다. 1층이다. 2층이다. 3층이다. 너는 저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높은 계급이고, 나는 낮은 계급에 있다. 이 사고방식 자체가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게 되면 높은 자리고, 실제로 아파트 높은 곳이 값이 좀 나가지 않습니까? 높은 데 산다는 것은 좀 잘 사는 거예요. 빌라가 높아봤자 얼마나 높겠습니까? 그거는 뭐 엘리베이터도 없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위아래, 위위아래, 그거밖에 모르는 인간을 일차원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아주 탄식을 했죠. 인간의 이성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다. 강하고 약한 것 밖에 모른다. 그런데 이 전쟁은 그 현실이 전부에요.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전부인데,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해서 높은 자리에 가느냐, 이 현실이 전부인데, 여호사밧이라는 왕 때 하나님께서 야하시엘에게 신이 개입해버리니까, 그럼 하나님의 신이 있는 위치는 어디냐 말이죠.
엘리베이터 같은, 바벨탑 같은 일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있는 자리가 나타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나타났으니까, 아, 이게 위아래, 높고 낮음 적인 것이 아니고, 이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고, 이 현실을 이렇게 구성해야만 되는 다른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의 연합적인 공격을 했을 때에, 이 전쟁은 그렇게 엘리베이터 타는, 니가 해결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전쟁이 아니고, 이차원적으로 다른 동네에서 처리할 일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 당시 유다나라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사람들에게 두렵고 놀라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아침에도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면 소나 웃을 일이지, 인간들의 현실상에서는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사람밖에 없고, 그 사람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이해력이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누적된 과거사를 경험으로 해서 미래를 정리하고 대처하려는 것 외에는 나온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여호사밧의 휘하에 있는 백성들이 참 두려워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사밧이 그 말을 듣고 용감하게 찬양대를 만들어요. 찬양대를 만들고 노래를 불러버립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전쟁이 이미 완료가 됐다고 치고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이미 완료된 상태라고 이미 확정 나고 난 뒤에 불러야 될 노래를 전쟁하기 전에 이미 그 노래를 그 안에 집어넣어버려요. 승리하리라가 아니라 승리했다는 거예요. 승리했다. 이길 것이다가 아니라 이겼다. 이미 이겼다.
이미 이겨버린 것으로 집단화시키는 거예요. 본인들을. 전쟁이 완료되고 난 뒤에, 그래서 살아난 집단을, 전쟁하기 전에 그렇게 자기를 봐버리면, 결국 자기가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입장에서, “니 이렇게 하면 구원 못 받는다?”라고 치고 들어오는 모든 이단들과 대적들은 주님의 개입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연출을 꾸미는, 하나의 연극무대를 꾸미는 셈이 되죠.
이렇게 친절하게 해서 믿을 것 같으면 덜 친절하고 싶은데, 이게 정말 얼마나 난해한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그 원칙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신명기 20장에 보게 되면 1절에 나옵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 앞에 붙는 문장이 있어요.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그래서 현재 이런 지시를 하는 하나님은 뭘 포기 못하겠다고 하냐면 출애굽 때 탈출했던 그 방식을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음을 분명히 다짐에 다짐을 하는 하나님. 달리 이야기해서 애굽에서 나왔던 그 원리를 그 후대사람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반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본문의 전쟁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출애굽 때로 한 번 돌아 가봐야겠죠.
출애굽기 1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여기서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약간 해석이 필요합니다. 어떤 해석이 더 추가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당시에 바로왕은 라(Ra)라고 하는 태양신의 아들이에요.
근데 그 당시 애굽에서는요, 태양신은 독보적인 존재고, 그 위에 많은 신들이 순차적으로, 일차원적으로, 엘리베이터 타는 식으로 수많은 신들이, 하급 신들이 많았어요. 그 많은 신들, 신들은 보이지 않는 거거든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보이지 않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가현체로, 형태로 드러나는 실체가 누구냐, 바로 바로 왕입니다. 왕이에요.
왕은 인간들이 어떤 집단을 구성할 때, 집단이 구성되면서 초월적인 세계를 상상하기 마련인데, 그 상상된 초월적인 그것을, 눈으로 보이는 식으로 구체화시킬 때 그게 지도자가 되고 왕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임금님이 되는 거예요. 대통령이 되고. 영국의 국가 이름이 뭐냐,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 하소서”에요.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 하소서!” 그 가락은 유명한 찬송가에 나와요. “피난처 있으니” 그 노래가 지금도 영국 국가에요. 가사가 좀 다르겠지만.
어떤 대통령이 흔들린다는 것은, 갑자기 정치이야기, 뒷방이야기가 왜 튀어나오지? 대통령이 흔들릴 때, 백성들의 마음도 뭔가 불안감을 느끼는 거예요. 불안감을.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도자, 백성들의 상상력이 집대성 된, 인간의 마음이 이래야 내 마음이 안정된다는, 그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가현체를 직접 하나님께서 공격함으로써 모든 신들과 나는 전쟁을 벌인다가 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 왕이 보여줄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마주침은 정상적인 마주침은 없다. 곧 죽음밖에 없었다. 모든 애굽에 사는 자들이 다 그러하다. 다만 죽고 난 뒤에 혹시나 그 하나님의 죽음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거든, 그 가운데 없었던 새로운 생명의 기능을 보아라. 그 기능이 바로 어린양의 피 입니다. 어린양의 피. 그 어린양의 피를 그 후대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오면서 반복을 하게 되는데, 그 반복하는 법칙을 시내 산에서 부여받게 되는데, 그게 제사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모세율법이에요. 그 제사법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안에 아무 흠 없는,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될, 대신 희생했던 그 제물에 의해서, 그 흠 없는 제물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옛날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실존해 있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이라는 나라가 있을 때는 애굽이라는 나라밖에 없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었어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어요. 그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나오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 아니고, 애굽에서 살 되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없던 나라를, 애굽이라는 나라밖에 없고 다른 나라는 없었던 그 나라에게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침투시키고 개입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개입으로, 낯선 신의 개입으로 말미암아서 새롭게 등장한 낯선 나라고 곧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와 계속 싸운다는 말은 이스라엘 나라 외에 다른 모든 나라는 인간의 한계성을 끝까지 보여줄 그러한 통합적인 조직체로서 기존의 모든 인간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모든 인간 나라는 200여국이 넘지만 그게 하나로 통합돼요. 그게 뭐냐 하면 짐승의 나라, 큰 성 바벨론, 음녀의 나라, 예수님께 대드는 그러한 성질이 여전히 살아있는 나라, 그 나라 중에 하나가 아!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하는 그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나라에요.
성경은 무정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국가주의에요. 이게 뭐냐 하면, 정부는 있어야 돼요. 로마서 13장에 정부가 있어야 되는 이유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임시적인 권세를 주었는데, 그거는 정부가 그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권세, 천사의 권세를 사용하되, 그것은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악체제가 갖추어 줘야 돼요.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보면, 니가 권세가진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의해서는 최종적인 모든 전쟁이 끝난 상태,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숨어있는 나라와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의 전쟁이거든요. 이 모든 나라라고 하지만 사실은 모든 나라가 악마의 나라에요. 단 하나의 나라에요. 하나의 나라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모든 나라가. 미국에 이민가도 캐나다에 이민가도 소용없어요. 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주를 하고 여기 안 살고 딴 데 살아봐야 경치는 좋다마는, 로키산맥이 아닙니다. 라키산맥이에요. 발음이 달라요. 경치는 좋지만, 하늘나라와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삼층천하고 세상나라하고 어디 게임이 됩니까?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자꾸 발목을 붙잡아요. “여기서 니가 인간이라면 가더라도 큰소리 치고 가야지? 행세깨나 해야지?” 하고 이런 식으로 붙드는데, 참, 우리는 발목이 붙들릴 때마다 출애굽의 그 어린양의 희생을 자꾸 놓쳐버려요.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발목이 잡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니가 구원 그 이후의 존재냐, 아니면 아무리 해도 구원 안 되는 존재냐를, 그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전쟁을 유발시킵니다. 미리 이야기합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실제적으로 땅 위에서의 영토싸움이라면, 신약에서는 내 내부의 싸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싸움입니다.
세상을 좇는 내 마음과 천국을 가야할 내 마음의 싸움에, 여기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게 돼요. 니가 구원받은 것은 용서받아서 구원받은 것이지, 니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그 전쟁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전쟁의 그 성격은 신명기 3장 3절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 하였느니라”
이것을 하나님의 전쟁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신명기 3장이니까 이미 전에 이야기한 거예요. 여기 보면 “붙이시매”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신명기 뿐만 아니고, 이 말씀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여호수아고, 더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 사사기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하지만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 무능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떡하니 잡아가지고 주께서 붙여주시매 전쟁에 승리해버려요.
근데 다른 사람은 오해해가지고 “야! 니가 했제?” “나 안 했다.” “니가 했잖아? 항아리 들고 횃불 들고 니가 했잖아?” “나 안 했어. 주께서 그냥 붙여준 거야.” 그런 식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여호수아에서 여리고성 도는 것도 마찬가지고. 한 것이 없는데 어떤 승리의 모든 보상은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거예요. 이게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린 구경만 하면 됩니까?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뭘 해야 하느냐 하면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여야 돼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 평지의 전쟁에서 패배해가지고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을 쳐야 되는데 이 전쟁이 이스라엘 내부의 전쟁으로 파급이 되면서 이제는 쳐들어온 적이 문제가 아니고, 그 적이, 하나님의 적이 우리 내부에 있는 거예요. 그게 자기 자신의 적을 쳐주어야 하는 겁니다.
다윗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못 치죠. 하나님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애를 하나님이 친히 쳐버립니다. 그리고 압살롬부터 해서 다 쳐버리죠. 하여튼 곁가지에 붙어있는 것, 내 혈통과 육신에 관한 것은 다 쳐버립니다. 왜?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원칙이 이미 출애굽기 때 있었잖아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수단도 소용없어요.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지 않으면 영생을 못 얻습니다. 혈통으로 아무리 애써도 안 돼요. 시편 8장 2절의 말씀이 꽤나 유명한 말씀인데, 그 의미는 상당히 난해한 의미에요. 1절부터 보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여기까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오해하죠. 이게 오해에요.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 하늘을 향하여 찬양한다는 것은 지상에 무슨 일을 근거로 해야 하늘에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그냥 하늘을 보고 영광을 돌려버리면 그거는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지상에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해요. 그래서 성가대 연습해서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 아니고, 성가대 찬양을 하되, 성가대 하는 하나하나가 전부 다 지상에서 박살나야 해요.
이쪽은 이혼하고, 이쪽은 애가 죽고, 그 다음날 다 와서 찬양해야 돼요. 이쪽은 부도나고, 이쪽은 사기당하고....., 찬양대는 그때그때마다 바뀌어져야 하죠. 그래서 우리 교회는 찬양대를 아예 없앴잖아요. 아까 예배 전에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우리 이상규 집사님이 김연선 집사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쉿! 이야기 하지 마! 지금 사건은 터졌는데, 찬양할 기회는 왔는데, 스스로 찬양을 억누르고 있어요. 그 이야기는 말 안 합니다. 주께서 아시겠죠.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적들이 왔는데, 군사가 누구냐 하면 젖먹이에요. 젖먹이. 갑자기 생각나네. 우리 외손녀 생각이 나요. 무슨 젖먹이가 전쟁을 합니까? 젖먹이가? 그냥 주스만 주면 좋아가지고, 주스 좋아요. 맛있어요. 주스 또 달라고 입만 벌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군사가 됩니까? 적어도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건이 터지면 우리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거든요.
그래서 젖먹이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어른입네~ 하는 것들은 다 쳐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걸 이스라엘이 쳐내는 작업을 못했어요. 전부 다 아까워서. 전부 다 일가친척이라서. 일가친척이라서 쳐내지를 못해요. 모이면 힘 될 줄 알고. 우리가 잘 아는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을 보세요.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 다윗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번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전쟁이지 우리가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나온 대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별 생각을 못 느끼고 있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대령하고 이쪽에서는 다윗이 돌멩이가지고 골리앗을 이겼다. 그렇게 해서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그 다음부터는 다윗에게 군사나 이런 것이 필요 없어야 돼요. 다윗은 전부 다 돌멩이 들고 설쳐야 됩니다.
그런데 이긴 것이 돌멩이로 이긴 경우가 딱 그 한 경우뿐이에요. 그 다음에는 정규군을 조직합니다. 뭐예요? 믿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지팡이 가지고 홍해 갈라졌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 교회오실 때 그냥 오시면 안 돼요. 전부 다 지팡이 들고 와야 해요. 지팡이 들고 하면 어지간한 것은 다 갈라지고, 소원 다 이루어지고, 왜 그렇게 안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한 번 전쟁에서 일어난 그 남은 자, 그 남은 자를 또 쪼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옛날 과거사에서 일어난 것을 또 써먹어버리면, 그것은 전쟁에서 남은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있던 기억가지고 전쟁에 마중 나와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거는 젖먹이가 아니고 지가 잘났다고 까부는 사춘기의 애가 돼버린 거예요. “하나님 이제 내 힘으로 됩니다.”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힘으로 하는 것을 실패케 만들었죠. 여러분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권사, 제단 쌓는 권사들 주의해야 합니다. 그거 전부 다 샤머니즘이에요. 무당입니다. 진정한 전쟁은 나 빼놓고 이게 아니고, 자신 안에,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어요. 시편 71편에 보면 내가 오직 하나님의 의만 진술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모든 죄를 이기는 그것, 그것이 신약 시대의 최종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전쟁은 없어요. 우리가 원수 된 자였는데 하나님의 율법 외에 한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끝난 거예요.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게 예수님께서 자기 의를 보내셔가지고 그 의 앞에 모든 어떤 인간도 내가 스스로 살 수 있는 자격자가 없고 내 행한 것은 죄뿐입니다.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만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할 때 이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그 가치를, 의미를 신약에서 완성 상태로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전쟁은 하나님의 의를 남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날마다 이것도 착한 건데, 이것도 나름대로 성령께서 한 귀한 건데, 하는 것들을 성령이 와서 전부 다 죄를 지적하면서 다 털어내는 거예요. 그 털어내는 죄를 우리는 반복해서 짓게 되면 또 털어주시고, 또 짓게 되면 또 털어주시고, 그것도 정 안되면 진공청소기로 윙~해서 뽑아주시고, 또 돌아서서 바깥에 나가면 또 먼지 묻고, 또 드르륵해주시고.
날마다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이미 이겼던 자로서의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벌써 전쟁은 일어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연연하는 이 세상 많은 자들과의 대결에서 우리 자신이 흡수 통합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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