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강-신 19장 15-21절(위증죄)1610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9장 15-21절입니다. 구약성경 292페이지입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성경말씀이 나올 때에 사람들끼리만 나오면 참 쉬운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도 이게 난해한 것이 17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이 어디 서는 것을 의미하느냐 하는 거죠. 하나님 앞에 나온다, 아무나 하나님 앞이 될 수가 있고, 오늘날에는 판사 앞에 나오는 것이 보편적인데,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여보 우리 하나님 앞에 섭시다.” 어데에? 목사 앞에? 판사 앞에? 변호사 앞에? 어디에 서는 것이 이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겁니까?
돈 벌기 위해서 눈이 벌건 변호사 앞에 뭐든지 시비 걸어서 재판하라고 자꾸 독촉하는 그 변호사 앞에 설까요? 판사들은 업무가 많아서 지칠 대로 지치고, 검사도 마찬가지고. 인도 같은 데는 현재 2500만 건이나 계류되어 있다는 겁니다. 판사가 하루에 50건씩 판결한다는데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성경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옵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라! 이게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면 상대방을 불쌍히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겁니다. “그저 뭐 은혜로 합시다. 뭐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목사들이나 장로들 모인 노회 같은 데를 보게 되면, 마지막은 은혜로 끝내요. 좋은 게 좋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목사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백날 뭐 해봐라, 어디 목사를 고발하고 해도, 마지막은 은혜로 끝냅시다. 은혜로 끝내자고 한 것이 뭐냐, 돈 주고 보내자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걸 알기 때문에 목사는 버티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서 돈 더 나올까 싶어서.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지를 않습니다. 그냥 인간들끼리, 같은 인간들끼리 정치적 합의가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명기 19장을 펼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살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서야 될 이유가 뭐냐, 여기에 서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로 남을 모함했을 때, 하나님 앞에다가 불러내라는 말입니다. 근데 하나님 앞에 불러낸다는 뜻은 뭐냐 하면 그 당시 제사장과 재판관 앞에 서는 것을 하나님 앞에 불러내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섰지, 하나님 앞이라는 그런 보장은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보통 재판장과 제사장 앞에 설 경우와 하나님 앞에 선 현상으로 재판장과 제사장 앞에 설 때와 뭔가 차이가 나야 해요. 그냥 사람 앞에 설 때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하고 다르다 이 말이죠.
그 차이 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앞에 섰던 제사장, 어떤 고소인과 고소당한 사람이 자기 앞에 섰을 때에, 그 당시 제사장이나 재판장 앞에 섰을 때, 뭐 같은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을 재판하는 경우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호출당한 그런 입장에 서서 그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 성경 해석에 대한 판결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이 말이죠.
분명히 있는 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어떤 누구도 아는 사람이라고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겨서 봐주는 법이 없게 하라. 그게 20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 두려워함을 유발시킬 수 있다면, 그거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사람 앞에 섰다고 볼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섰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두려움이죠. 오늘날 이런 두려움 같은 것은 사실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돈만 주면 해결되는 입장에서 무슨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로 고소, 고발하는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라. 니 눈에는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재판장이라는 사람, 제사장이라는 사람으로 보이냐?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이렇게 확정하려면,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위증죄를 가지고 일하신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증죄를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은, 다른 증거를 대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라고 이런 식으로 안다면 그것은 잘못하시는 것이 됩니다. 적으시는 분은 잘못 알았다고 적어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정의롭게만 일하고 거짓말 안 하신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에 반대가 되는 사람의 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위증죄를 가지고 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본인이 위증적인 형식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정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세상을 보는 것과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위증죄를 가지고 사용한다고 했을 때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고소, 고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면서 제일 좋은 것이 고소나 고발당하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다 귀찮아. 그냥 누가 나 안 건드리고, 내가 누구 안 건드리고 조용하게 사는 건데, 하나님께서 조용하게 살게 해버리면 십계명 제 9계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죠. 9계명이 뭐냐 하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십계명에서 아홉 번째 계명입니다. 그러면 그 계명의 내용이 뭔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고소하던지, 고소당하던지 하는 경험을 갖게 해서 십계명이라는 제 9계명이 그냥 문자로 박혀있는 죽은 문자가 아니라, 이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현실의 일부구나! 나는 지리산에 들어가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고소, 고발 없이 그냥 점잖게 대인의 마음으로 살라고 해도, 가만 놔두지 않고 하나님의 의해서 고소, 고발하는 사건이 유발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남자들이 그냥 총각으로 살면 조용하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내 가정에 끼어들게 되어서, 나는 뭐라고 해도 대인처럼 살라고 해도, 진짜 대승적인 마음으로 살라고 해도 같은 동거인이 말썽을 부려버리면, 어쩔 수 없이 팔자가 엮일 수밖에 없어요. 엮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건 뭐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조작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지, 내가 뭐 조용하게 살라고 마음다짐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일으킨 분란 속에 우리가 끼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고 십계명의 세계, 율법의 세계, 말씀의 세계가 되거든요. 그러면 이 고소, 고발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럼 고소고발을 할 때 이왕 당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지, 라고 나올 게 뻔하다 이 말이죠. 그럼 그 뜻을 어디서 찾는가? 신명기 19장 15절에서 21절까지 누구나 보게 될 겁니다. “억울합니다.” 라고 한쪽은 이야기할 것이고, 아닙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그렇게 해코지했습니다.” 이래 나올 거고.
그렇다면 정말 귀찮지만 재판장 앞에 부름을 당해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죽음이라는 것은 운명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은 힘이거든요. 힘이라고 하는 것은 작동을 하게 되어있어요. ‘살다보면 죽겠지.’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당겨서 이 현실 속에 죽음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성도는 이걸 알아야 해요. 그 죽음이 강하게 작동을 하는데, 내가 운명 같으면 육체가 힘 빠져서 죽지만, 이게 운명이 아니고 힘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니가 죽는 것이 왜 죽는지 알아? 이런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는다는 겁니다.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는다는 그 원칙이 죽기 전에부터 이미 활개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이나 율법이 우리 속에 이미 들어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고소고발에 휩싸이고, 그리고 원치 않는데 죽기 전부터, 심판 앞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일찍부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된다면, 여기서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미 너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니는 죽어야 돼! 이런 판결을 재판장이 내려버리면, 우리는 예상 밖에 일찍 죽는 수가 있어요. “니는 고소를 당해놓고 억울하다고 했으니까 니가 죽어야 한다.” 이렇게 해가지고 갑자 기 처형당해버리면 남은 자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세상이 내 세상 같으면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죽을지 싶은데, 하나님의 세상이기 때문에, 말씀의 세상이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이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을 초빙해서, 나라는 사람을 간택해가지고 어떤 사건 속에 휘말리게 하게 하시면, 본의 아니게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맛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그 일을 예수님이 하셨어요. 그래서 구약이 어려운 거예요. 구약이 그냥 있어버리면 구약 해석이, 구약 해답이 없어요. 그러나 이 본문 말씀을 요한복음 8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이 본문을 자기에게 적용시켜버립니다. 이걸 설명하는 저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하고, 정말 어렵기 짝이 없어요. 요한복은 8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7절에,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19절,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지금 읽었던 요한복음 18장 17절, 18절의 말씀을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신명기 19장 15절에서 21절, 우리가 보았던 본문하고 연결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조용하게 살고 싶어도 조용하게 살 입장이 못 됩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 안에 사는 사람 같으면 이 신명기 19장의 말씀이 요한복음 18장 17절, 18절에서 완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남은 삶을 통해서 다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야 해요.
그럼, 목사님 어떻게 연결됩니까? 제가 아까 힌트를 드렸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힘이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시간이 가면 죽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죽음은 현재 죽음의 힘으로 지금 말씀을 가지고 작용을 하고 있어요. 그 작용을 하는데, 근본적인 위증죄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거거든요. 자, 무엇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박범신이라는 작가가 자기 소설 지망생들하고 아가씨나 아줌마들하고 같이 반갑다고 악수하고 반갑다고 약간 껴안고 그래가지고 좋게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성희롱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 중에 참석한 다른 사람이 그것은 성희롱이 아니었다. 그 당시 분위기가 좋은 게 좋다고 한 것이고. 박범신이라는 그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내 나이가 70이 넘어가서 노망이 들어서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라고 사과를 합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럴 때, 제가 박범신이라는 소설가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제 3자 입장에서 누가 위증했는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우리 말고 남 이야기가 돼버려요. 그러면 신명기 19장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된다니까요. 우리 구원문제와 우리 영생문제와 무관한.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나만의 세계를 따로 챙기는 것이 되가지고, 저 박범신이 나빠! 아니야 저건 위증일 수 있지? 라고 평하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위증죄를 범하고 있고,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악인에 속해버려요.
여기 21절에 보면,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이 땅에서 벌인 위증죄에 대해서, 우리가 “나는 빠질게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증죄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라는 본래의 취지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관없다고 빠져나왔기 때문에, 니가 바로 거짓말하는 인생이라고 해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에는 생명으로, 하나님의 영생이 없는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는, 그 작업을 주께서는 이미 위증죄를 가지고 이미 판을 넓힌 거예요. 판을 크게 만드신 거예요.
그게 얼마나 옳은 이야기입니까? “저는 남한테 거짓말한 적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지옥 보내는 거예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은 거짓말 하라는 이야기에요. 거짓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하면서 ‘에구, 거짓말 안 해도 되는데, 괜히 했다.’ 이렇게 하지 말고,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니가 수용을 해줘야 된다는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일곱 번 거짓말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거짓말 아닌 게 없어요. 모든 게 거짓말이에요. 모든 게. 왜? 모든 게 나 위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모든 게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거짓말밖에 없는 그곳에 주님께서 위증죄를 거론하면서 뛰어들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본 거예요. 그들이 거짓말쟁이로 본다는 말은 비로소 그들이 거짓말 속에 푹 파묻혀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예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선다는 이 말은 어느 성경말씀도 우리를 비켜가는 말씀은 없다는 것을 완전히 보여주는 말씀이에요. 자,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19장 15절~21절하고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8장17절, 18절하고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할 수 없어요. 어렵더라도 설명해야 되겠어요. 그걸 설명하기 전에 먼저 언급할 게,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의 죽음과 죄는 힘이라고 했어요. 힘. 힘이라는 말은 뭐냐, ‘나 혼자 지리산에 가서 도 닦으면 되지.’ 이렇게 홀로 있을 수가 없어요. 다 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칠곡군 약목면 교리12에 보면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 이름이 도쌍연이라는 할머니가 있어요. 도쌍연. 근데 그 할머니 이름이, 부모가 그 이름을 지을 때 다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 나이가 한 80가까이 되는데, 옛날에 엄마가 자식을 낳으면 태어날 태어나면 죽고, 태어나면 죽고 하니까, 부모가 화가 나서, 조물주가 죽이기 전에 자기가 먼저 자기가 자학하듯이 내 자식은 죽어 마땅하다고 미리 액땜하듯이 자기가 받을 저주를 자식한테 퍼붓는 거예요. 그 방법이 뭐냐, 성이 도인데, 리을이 붙어서 돌쌍년으로 간주해서, 리을을 빼고 도쌍연으로 지어서 80까지 살았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경을 몰라도 모든 움직임에 보이지 않는 악의 힘과 선한 내가 버티고자 하는 힘과 그냥 밀당, 밀고 땡기는 그러한 복잡한 정신구조 속에서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말입니다. 이 돌쌍년, 죄송합니다. 이 이름 자체에다가 힘을 실어주는 거예요. 조물주가 우리 집을 저주해서 때리기 전에, 우리가 알아서 기었으니까, 유월절 어린양 잡았으니까, ‘아, 이 집은 벌써 지가 돌쌍년이라는 것을 아는구나.’ 그냥 넘어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자기가 살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기껏 지어낸 것이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과의 흥정과 거래를 한 겁니다.
이게 힘의 세계에요. 벌써 악마의 세계에도 이런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가, 누구하나 할 것 없이 거짓된 영, 다시 말해서 악마의 주특기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영, 거짓말 힘 속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위증죄라는 본문에 입각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한 거예요. 때가 되매. 요한복음 8장 16절을 보면,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나를 보내신 이와 함께 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이래 돼버리면 어느 수준이 되느냐 하면, 이건 신명기 19장의 수준이 되는 겁니다. 신명기 19장에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제사장 앞에 서죠. 그러면 제사장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제사장 봤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저를 세웠지만, 사실은 하나님도 하나님이고 나도 하나님입니다.” 이런 제사장은 없어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제사장입니다.” 재판장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재판장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걸 뭐라고 바꿨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아까 적절하게 어떤 분이 쉬는 시간에 질문한 것이 있어요. 마태복음 22장 44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시편 110편에 보면 절대로 본문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앞에는 여호와로 되어 있고, 뒤에는 내 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로 바꾸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유대인과 열 두 제자는, 그 주께 라는 것이 하늘에 계신 두 분인 줄 알았지, 지상에 내려온 주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사도행전 2장 34절, 35절에서 베드로의 설교에 보게 되면 이 대목이 나옵니다.
34절,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이미 지상에 오셨던 그 분이, 나사렛 예수가 사람이 아니고 바로 시편 110편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이 오심으로써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35절,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이 원수라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그 원수가 이방민족인 줄 알았어요. 이스라엘 빼놓고 이방민족인 줄 알았어요. 우리는 원수가 없고, 이스라엘을 폄하하고 욕하는 저쪽이 원수인 줄 알았죠.
근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44절에서 “주께서 내 주께” 해가지고 자신에게 적용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발언을 못 알아듣는 너희들이 거짓 영에 사로잡혀서 위증죄를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못을 하고 난 뒤에 위증죄를 판결하는 것이 아니고 판결부터 나오고, 이 판결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판결을 먼저 보여주기 위해서 판결이 판결답게 되어지는 상황을 예수님께서 유도하시고 유발시킨 거예요.
진짜 말하면서도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내가 잘못되면 성경말씀 찾아야지, 그게 아니라 성경말씀에 맞추기 위해서, 이미 성경말씀의 결론에 맞추기 위해서, 옷 재가지고 맞추는 것은 월계수양복점에서 하는 짓이고, 그게 아니고 이미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양복하나 맞춰 놓고 옷에 맞춰가는 거예요. 옷에.
“너희는 거짓말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 마귀에게 속했다.” “어찌 우리가 그렇습니까?” “봐라! 주께서 주라고 할 때 그 주를 너희들이 힘으로, 어떤 힘으로 장착된 해석과 정신에 입각해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
그게 바로 너희들이 보편적인, 일반적인 바로 위증죄에 해당 된다는 겁니다. 그럼 위증죄에 해당 안 되려면, 당신을 증거 할 자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니까 증거 할 자가 있으니, 요한복음 8장을 다시 보게 되면, 18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증거 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내가 나를 증거 하는 증거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해서 증거 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신명기에서 증거 한다는 이야기는 본인 빼고 두 사람, 세 사람이지, 본인 집어넣고 두 사람, 세 사람 같으면, 사실은 인간으로 따지면 증인이 두 세 사람 필요한 게 아니에요. 한 사람만 필요하면 돼요. 한 사람만. 자기는 원래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또 누구 한 사람만 증인이 되면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신명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어떤 하나님께서 유발시킨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그 당함에서 자기가 너무 억울하다고 빠져나올 요량으로 신명기 19장, 이 위증죄를 활용하더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위증죄는 빠져나올 요량으로 이걸 자기한테 적용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이 세상의 악함에 의해 재판에서 패배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바로 거짓말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벨입니다. 억울함이죠. 그 억울함과 억울함의 연속이 오늘날 성도의 계열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복음 안다고 우리는 얼마나 억울함을 당합니까? 그냥 대충 믿어라? 그냥 곱게 좀 다녀라? 지금 우리같이 그냥 곱게 다니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냥 왔다가 밥만 먹고 가는데, 이런 고운 게 어딨습니까? 별나게 안 설치잖아요? 근데 별나게 안 설친다고, 뭘 해도 죄인 된다고, 그렇게 해서 또 억울함을 당하고 비난을 받잖아요.
바로 열 두 제자가 순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별나게 설쳐서가 아닙니다. 딴소리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예수님 십자가 복음 이야기하다가 다 죽었습니다. 그런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세상인지 주께서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죽음이 그냥 가만히 다가오는 운명이 아니고, 지금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차라리 우리 이름을 돌쌍년으로 짓든지, 우리가 죄인이라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그렇게 마음을 품고 살아갑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만은 바르게 조용하게 산다고 자부했지만,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경우를 밟아서라도 기어이 복음이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오도록 조치를 해주셔서, 기어이 이 세상이 지옥 같은 거짓의 세상인 것을 알려주시는 도구로 사용해주시니,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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