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 103강-경계표(신19;14) 1610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18. 07:16
2016-10-16 15:00:35조회 : 63         
   경계표 16101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경계표(신명기 19:14)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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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10-16 15:49 
경계표 

2016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신명기 19:14 

(1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땅을 조상하게 물려받았다고 한다면, 요즈음 같으면 보통 “은퇴해서 부모 물려준 땅에서 농사나 지어야지”라고 할 것입니다. 말씀을 주신 그 당시 사람들의 산업은 땅에서 농사하는 것이 주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놀리면서 다른 일에 신경 쓸 입장이 못됩니다. 땅에서 생계거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상대적으로 남자가 농사짓는 집안과 여성이 가장이 되어서 농사짓는 집안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농사일과 가사일까지 책임지면서 여성의 힘으로 가정을 일구어내기가 힘듭니다. 더구나 여성을 경시하는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신의 혈통 잇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집안의 우환이나 병이라도 생기면 목돈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이 목돈 마련을 위해 조상 대대로 물러받은 땅을 담보로 내놓다가 제 때 돈을 이자처서 갚지 못하면 저당 잡히게 됩니다. 만약에 누군가 원래의 땅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한다면 담보를 잡은 채무까지 같이 담당해서 갚아주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러받았다고 해서 과연 그 땅의 소유주가 본인 것이냐 하는 겁니다. 본인 것이라면 본인에게 어려움이 와서 어떻게 처분하든지 간에 상관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땅 주인이 살기가 힘들어서 무슨 조치라도 취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땅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이스라엘 생계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신약에 나타난 말씀의 원형과 연관성을 갖추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원형이란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로마서 16:25-27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이 우주가 운영하는 원칙과 원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감추어진 비밀’에 대해서 언급을 해도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에게 별반응이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기대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내용은 본인의 희망과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잘 되는 것’이 창조 전의 비밀로 담겨져 있다면 자신이 반응을 나타낼 용의가 있다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고서는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고 다시 자기 생업에 열중하는 것은, 얼마나 평소에 ‘나만 살면 그만이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이와 같은 착각과 실수는 신명기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땅은 실은 조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을 담아서’ 주신 것입니다. 즉 자기 이익으로 되돌아오는 해석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언약으로 들어가는 해석이어야 하고, 언약에 삼킴을 당하는 해석이어야 합니다. 

즉 땅 주인이 자기가 속한 집안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있어야 그것이 아브라함의 언약과 접속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땅이요 또하나는 자손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義)입니다. 이 세 가지 약속이 바로 언약의 내용 안에 함께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땅이 제대로 된 언약의 땅이 되려면 필히 혈통과 하나님의 의로움과 관련성을 맺어야 합니다. 땅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언약적 사실은 이론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체험되고 구체화되게 됩니다. 그 경계표와 관련된 예가 룻기 4장에 나옵니다. 

조상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갔던 나오미 가정은 이방민족의 땅에서 남편도 잃고 아들 둘 다 잃고 그냥 다시 유다 땅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빈 손으로 온 것ㅇ든 아니라 누구를 달고 들어왔으니 그 여자는 며느리인 룻입니다. 하지만 죽은 남편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는 그 며느리와 결혼해줄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기 조상, 곧 죽은 남편인 엘리멜렉의 가문을 부활시킬 책무를 해야 합니다. 이는 자식을 낳아도 자기 호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혈통의 자식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혈통은 그 혈통에 소유된 땅의 존재로 증명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가문을 멸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흔적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전략에 나섭니다. 땅만 대신 살 줄 사람을 찾는게 아닙니다. 그 땅에서 계속 살아야 될 여인들의 모든 생계비까지 담당할 자를 찾는 겁니다. 유력한 유보감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보아스입니다.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를 보아스의 시선이 띄는 곳에서 활동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로부터 관심받게 합니다. 급기야 보아스가 자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했고 룻은 그 지시에 따라 보아스가 동침을 합니다. 보아스는 룻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드디어 결심을 서고 난 후에는 대외적으로 “이 여자는 내 사람이다!”라고 발표합니다. 그런데 룻이 낳은 자식이 나오미가 속한 혈통으로 등록됩니다. 

룻기 4:13-17에 보면,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에서 절망한 가문이 새로운 자의 은혜로운 투입으로 인해 축복의 가문이 된 겁니다. 이는 바로 모든 인간은 죽음 속에서만 구원이 된다는 숨겨진 복음적 비밀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언약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가 아니라 실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인간이란 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예수님만이 참된 인간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성도는 바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현상으로서 다양하게 이 땅을 잠간 살다 갈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겉 모습에 따라 혈통과 이름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천국 과 관련된 새로운 주의 이름에 주목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멘 』

 이근호16-10-17 06:55 
103강-신 19장 14절(경계표)1610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9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2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 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창세전에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거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비로소 알려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준 바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떤 원칙과 기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지를, 그동안 인간들이 몰랐다는 겁니다. 몰랐으니까 주먹구구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나만 잘되면 세상 잘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이 세상에서 통하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이 끝나고 나중에 심판받게 되면, ‘아하! 내가 이 세상에 살 때 기준도 아닌 것을 기준으로 삼았고, 원칙도 아닌 것을 원칙으로 여기면서 그냥 막살았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어떤 원칙 가지고 움직이는데, 그 원칙은 비밀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숨겨놓은 거예요. 그 원칙이 비로소 공개되는 것이 뭐냐 하면, 창세전부터 숨겨놓은 그 비밀이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알려졌다. 이게 네 글자로 하면 기쁜 소식, 두 글자로 하면 복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사도바울이 나는 복음 전하는데 빚진 자라고 해가지고, 너희들에게 무조건 전해야 해서 전하는데, 막상 그 소식을 듣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서는 본인이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본인이 생각했던 그 기준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뭐지? 뭐야? 자기가 예상했던 하나님의 원칙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비밀이라고 하게 되면, 이제는 내가 세상에서 뭘 알겠지? 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딱 들어봤는데, 들어보니까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마저 핍박을 할 참이에요. 핍박해야 돼요. 예상 밖의 이야기였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잘 살고, 훌륭한 존재인가를 부각시키느냐를 은근히 고대했는데,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이게 비밀이다.” 하니까, 그럼 내가 평생 나한테 기여하고, 나한테 수고한 그 모든 것이 이게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이걸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자존심이라는 것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들이 이제는 누굴 핍박하느냐, 사도들을 핍박하게 된 겁니다. 그들은 그 당시의 현실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을 한 겁니다. 이 현실에서 나는 어떻다, 라고. 

  

그런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현실 자체를 뭐로 봤느냐 하면, 하나의 환상으로 봐버리고, 진짜 실재하는 세계는 따로 있다는 것. 그것을 알려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과 오늘 본문 신명기가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이 관련성을 우리는 뭐라고 정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다가 언약을 쫙 깔았다. 펼쳐놓았다. 그 펼쳐놓은 언약의 카펫에 뭐가 담겨있는가? 네가 조상부터 받은 땅의 그 경계선을 지켜라. 이게 하나님의 언약에 쫙 깔려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을 모르고 준비된 이 성경 말씀을 딱 보니까, 내가 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다보니까, ‘아, 조상한테 받은 이 땅은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지켜야 될 땅이구나.’ 라고 생각한 겁니다. 

  

일종의 부모가 받았던 그 땅뙈기를 이제는 자식이 받고 난 뒤에, 전에는 뭐 직장 다니고 하다가 나이 60쯤 되어서 이 사회에서 내가 필요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제는 서서히 아버지 땅에다 그만 농사나 지을까? 그제야 뭘 하느냐 하면 조상한테 받았던 땅을 돌아보죠. 보게 되면 남한테 사기당해서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고, 갑자기 시에서 체육시설로 변화시켜놔서, 6시 50분부터 하는 kbs에 세상에 뭐 이런 일이 있는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진즉에 돌아보지 이제서 왜 돌아봤느냐 하는 거죠. 다시 한 번 측량하자고 해서 이만큼은 내 땅인데 들어갔다, 안 들어갔다, 어디 감히 니 비닐하우스가 내 땅에 들어왔느냐 해가지고 남의 비닐하우스에 제초제 뿌려가지고 범인이 누구냐 해서 경찰서에 갔지만 범인도 모르고 시효가 끝나고 하는 그런 이야기. 

  

하나님의 언약은 날아가 버리고 이건 내 거야, 내 땅 내가 지키겠다는 그것만 고집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숨겨진 비밀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저 밥 먹고 살면 주의 복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겠죠. 이 하나님의 경계선이 어떻게 십자가 복음과 관계성이 있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찾아내야 됩니다. 이 찾아내는 방법은 그 당시를 우리가 이론으로 이렇게 알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경계선 가지고 사건들을 자꾸 일으켜요. 

  

그 사건 중에 제일 먼저 나온 사건이 뭐냐 하면, 룻기 4장에 보면 나옵니다. 룻기 4장을 다 보면 시간관계상 어렵고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시기를 원하셨겠지만. 룻기 4장에 나오는 그 보아스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보아스는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무슨 이야기냐 말이죠. 룻기 4장에 나오미 땅이 있었는데, 나오미가 여자거든요. 경작을 못해요. 묵혀놓는 거예요. 그럼 나오미 땅은 지가 팔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팔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19장 14절, 오늘 본문 말씀처럼 조상에게 받은 땅을 니가 힘들다고 해서 니가 팔아서는 안 된다. 그 경계선, 또는 지계표, 경계선을 옮기면 안 된다는 이런 법칙에 의해서 그냥 그 땅을 묵혀놓고 모압 땅으로 갔다가 남편죽고 자식 둘 죽고, 완전히 팔자가 더러운 여자가 되어가지고 돌아옵니다. 그 나오미가 올 때, 올 때는 한 사람을 데리고 와요. 룻이라는 어떤 이방여자를 데리고 와요. 이방여자라고 하면 어려우니까 그냥 베트남 여자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냥 필리핀, 베트남 여자 데리고 온 거예요. 

  

데리고 왔는데, 문제는 그 땅이 있어봐야 나오미와 며느리가 살 수가 없어요. 그 당시 여자의 힘으로써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친척들이 이 땅을 살면서 땅 주인이 되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 이름으로 땅을 사줘야 해요. 땅은 지가 사면서 주인은 남편 이름으로 해줄 친절한 용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어떤 땅을 묵히고 있는데, 만약에 나에게 어떤 조카가 있는데, 조카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나이도 젊은데 이제 혼자 산다. 근데 혼자 살 수가 없다. 근데 조카한테는 신동아 빌라 같은 허름한 빌라 하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수입이 있어서 관리도 하고 하는데, 자식까지 딸려 있고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삼촌인 내가 불쌍하니까 너를 거두어서 생활비 다 대주고 너로 하여금 죽었던 니 남편의 자식까지 다 키우도록 해준다고 할 수 있는, 착한 삼촌이 될 수가 있느냐 이 말이죠. 설마 남자의 가오(폼)가 있어서 하고 싶어 해도 여전히 경제권은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부인이 쥐고 있거든요. 시집이라면 기를 쓰고 들이박고, 친정 같으면 무조건 안으로 하기 때문에, 그 조카가 시집 조카냐, 친정 조카냐에 따라 완전히 돈 씀씀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그렇게 나오니까 친척이 “당신 집안이 무슨 집안이라고 내가 당신의 집안 생활비까지 다 대주냐? 나는 못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나가 떨어졌죠. 그 다음에 누구냐 하면 보아스 라는 유력한, 여기 유력한, 돈 많은 재벌, 호텔을 경영하든지 하는 재벌, 이 재벌이 와서 누굴 좋아하느냐 하면 그 이방여자, 쉽게 말하면 베트남 여자 룻이 그렇게 좋아 보이더란 말이죠. 분명 이뻤던 거예요. 신앙적으로 따지지 마세요. 하나님 사랑하고 하는 그거는 뒷전이고, 우선 이뻐야 된다니까요. 뭐 이쁜 것은 주관적이지만. 어쨌든 이뻐서 니가 내 아내만 된다면 너의 시가집이고 뭐고 전부 다 내가 한다고 했고.

  

그리고 보아스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유도제를 뿌린 중개자가 있었는데 누구냐 하면 시어미니인 나오미가 그렇게 했죠. 젊은 애가 자식도 없이 혼자 사니까 어디 괜찮은 친척가운데 돈 많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이렇게 살핀 거죠. 후보감이 좀 있을 거 아닙니까? 니는 아니고? 니도 아니고? 어? 인물 되고 돈 되고 성격 되고 키 되고, 믿음도 되는, 다 되는 남자를 발견하고 이 시어머니가 작전을 벌인 거예요. 작전을. 작전은 보아스가 이래 있는데, 그 이불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겁니다. 이게 성경이야기입니다. 막장드라마가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야기입니다. 

  

그냥 들어가게 만들어서 합궁을 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또 알면 뭐해요? 만약에 보아스가 눈 떠서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면 끝나는데, 그전부터 이미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쭉 눈 여겨 봤어요. 출신이 어디인지, 지혜롭고 똑똑하고 인물도 되는데, “여보게 출신 좀 알아봐라!” 뭐, 출신 보니까 옥에서 태어난 옥녀. 그거쯤 되거든요. 출신은 베트남여자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린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경계표를 전부 다 자기가 감당해서 그 땅 뿐만 아니고, 땅을 산다는 것은 그 땅에서 살아야 될 그 여자들의 평생까지 다 책임지고, 그리고 자식까지 책임지는데, 그 자식이 보아스 자기 이름이 아닙니다. 죽은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등재가 돼요.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등재가 되는 겁니다. 근데 실제적으로는 보아스 자기 자식이고.그래서 아버지가 둘이 되는 셈이에요. 이렇게 이름이 둘이 될 때, 한쪽 이름은 구원받는 이름이 되고, 천국 가는 예수 이름이 되고, 한쪽 이름은 예수 이름이 되기 위해서 또 육적인 이름을 가진 이름이 되는 거고. 

  

그 이름이 두 개가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땅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두 개에요. 하나는 이 땅에서의 이름이 예수고, 원래 예언된 이름은 임마누엘이고.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서는 이름을 예수라고 해놓고, 이사야 7장에 나오는 이름은 임마누엘이에요. 임마누엘은 네 글자고, 예수는 두 글자거든요. 이게 안 맞게 되어 있단 말이죠. 인간의 존재로서는. 그러나 예수님의 존재는 하늘과 땅이 연결된 존재기 때문에 두 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계표를 지켰다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준 복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하나님이 주신 유산, 그 땅을 통해서 마음껏 발산이 되고,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언약의 땅이에요. 그 땅은, 땅을 지키라는 말은 밥 먹고 살라는 말이 아니고,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서 니 생존보다 더 우월한, 생존보다 더 여분의 의미가 그 땅에 있다. 이 경계선에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굶어죽어야 되는데, 난데없는 행운과 난데없는 복으로 말미암아 나는 죽었던 우리 아버지도 생명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그런 혈통을 가지게 되었다. 이 혈통은 죽었는데 생명과 접선이 된, 접붙임이라고 하죠. 하늘과 접붙임 된 새로운 노선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전라도로 갈 철도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경부선으로 가서 부산으로 가버려요. 울산으로 가면, 울산의 톨게이트는 주의해야 돼요. 사고나니까. 

  

이게 광주로 갈 그 노선이, 지옥으로 갈 노선이 중간에 바뀌어야 돼요. 바뀌어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처음부터 부산으로 가는 부산행은 없어요. 전부 다 지옥으로 가는, 이렇게 하면 전라도 사람들 화 낼 텐데. 전라도가 지옥으로 가는 노선이라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김집사님 잘 들으세요. 일단 예로 든 겁니다. 누구든지 지옥으로 가야 돼요. 지옥을 갈 때, 예수 그리스도로만 이게 노선이 바뀌어서 부산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값을, 부산으로, 천국 가는 사람의 값을 치러줘야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속죄라고 하고, 값을 치룰 때, 이게 의미가 하나 붙어요. 대신, 못난 니 대신 잘난 내가 생명 값으로 대신 치렀다. 할 때는 이걸 대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속죄와 대속이 그렇게 달라요. 속죄라고 하는 것은 개인 구원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대속이라는 말은 니 구원을 위해서 니가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강해요. 예수님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구원이라는 것은 따라오는 것이지, 니 구원하려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라 이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위하여,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서 선악과 따먹어야 했고, 죄를 지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에요. 이러한 경계선에서 방향을 바꾸면 그것이 새로운 혈통이 되고, 그 혈통에서 나타난 자가 룻기 마지막 장에서 다윗이 돼요. 그래서 다윗이라는 혈통은 뭐로 밑거름이 되어 있느냐 하면 다윗 언약의 밑거름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다윗 언약되기 위해서는 다윗은 죄인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예쁜 유부녀를 다윗이 보는 앞에서 이벤트를 친히 준비했습니다. 남자들 들으면 ‘에구 이런 이벤트 좀 나에게 좀 하지?’ 나도 이런 이벤트 좀 해서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거는 아무나 주는 이벤트가 아니고, 적어도 왕쯤 되어야, 적어도 그 여인을 아무 탈 없이 가질만해야 되는 거죠. 그렇게 그 여인을 하고 그 다음에 남편을 죽여 버립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죄 없는 척 하면서 죽여 버리죠. 

  

죽임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 전쟁을 치르는 장군을 죽였기 때문에, 누가 적이냐 하면, 적은 이스라엘 외부에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적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걸 알고 다윗은 쉽게 말하면 십자가까지 내려간 거예요. 십자가에서 비로소 누굴 만나는가? 상한 심령이 되면서 내가 하나님의 원수이군요. 로마서 5장.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인데, 하나님의 화목제물로 원수 된 자를 의인으로 변경시키는 그 주체자로서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신 그 이유가 어느 자리에서 발견됐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이 주님으로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자꾸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요. 궁지에 몰아넣으셔 가지고, “더는 착하지 못합니다. 더는 못합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방금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통합이라고 하는 겁니다. 전체를 전부 다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을 위로 통합을 시켜서, 그 통합된 것을 가지고 신약의 십자가와 연관을 시키면 비로소 감추어진 비밀과 이스라엘 땅의 현상이 이렇게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고 현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살아간다가 아니고 살아가는 현상을 잠시잠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서 안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안개. 그냥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 안개는 현상인데, 현상이 무슨 자존심 챙기고, 뭐를 소유하고,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마저 현상일 뿐이니까. 

  

이것을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꽃이라고 하는 것은 꺾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처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나를 스스로 구원시키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 자신을 보세요. 보실 때, 십자가 안에서 그냥 우리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개가 돼요. 하나가 뭐냐 하면 죄를 짓고 싶지 않아도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악한 내가 보이고, 그것을 쳐다보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받은 자에게만 그게 보여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찬양하리로다 예수 안에서 저를 구원시켰군요. 구원 돼놓고, 구원을 이미 시켜놓고, 우리 인생을, 과거현재미래든지 보게 하시는 겁니다. 보게 되면 그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개입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것을 저는 우체통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서 우체통을 만드는데, 동해안인가 어딘가 보면 커다란 우체통을 본 적이 있어요. 제가 본 적이 있어요.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보면 어느 날 커다란 우체통이 나타납니다. 일단 그 우체통은 어린애가 집어넣든, 어른이 집어넣든, 거기에는 뭐만 모이느냐 하면 편지만 모여요. 그러니까 제가 우체통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 제가 있습니다. 저를 좀 어떻게 해보세요. 저를 구원해주세요.”라고 하지만, 실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안 받아줍니다. 

  

실체를 가지고 일단 우체통에 집어넣으면, 우체통은 뭐가 되느냐 하면 현상이 돼요. 현상이 되면 이미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주체는 주장할 것이 없어요. 끊어져요. 끊어지고 난 뒤에 거기서 분류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거는 지옥 갈 것.” “이거는 천국 갈 것.” 분류작업을 하는데, 그거는 우체국장 지 맘대로 하는 겁니다. 

  

주소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인간의 쓰는 모든 주소는 천국행이니까, 그렇게 해봐야 “지옥갈랍니다!” 하고 손 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애초부터 전부다 무시해버리고 일방적으로 이렇게 분류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중보자가 곧 심판주라는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고수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입니다.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맡김으로써 아들이 자기 원하는 자는 따로 빼돌리고 원하지 않는 자는 내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우체통 밖에 있는 사람이 섭섭해 할 필요는 없어요. 정말, 우체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분류작업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거는 우체통 바깥에서 살아가면서도 이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자기가 살아가면서도 이상하게 나타나는, 안 나타나도 되는데 나타나는 현상적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은 우체통 안에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꼭 나타날 필요가 없고, 태어날 필요도 없는데, 주님 때문에 태어났다고 아는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는 나를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경계표를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 땅은, 이 땅에서, 아브라함의 세 가지 약속, 하나는 땅을 주겠다, 하나는 자식, 혈통을 주겠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거룩과 의를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 가지 약속이거든요. 

  

그런데 이 약속을 이렇게 해야 맞아요. 니가 땅을 포기해라. 그리고 너의 혈통을 포기해라. 그리고 자기 의를 포기해라.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봐야 그 의미가 풀려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땅을 준다고 했는데, 저는 그걸 믿습니다. 근데 왜 땅을 안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성경을 막 들이대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거는 뭐 구약가지고, 자기가 어떤 영역을 만들어가지고 구약에 직접 다가가는데, 자기 영역에서 구약을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라는 감추어진 비밀을 통해서 구약에 들어가야 해요. 

  

입구가 뭐냐 하면 십자가가 입구고, 이 십자가에 들어가면서 자기는 실체가 아니고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구약에 들어가게 되면, 아, 구약 사람들이 이래서 실패했고, 이래서 오해했고, 이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구나. 주님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땅을 줬는데, 이거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줬다고 또 오해했구나. 근데 그 오해가 사실은 우리가 늘 눈만 뜨면 하는 오해가 그겁니다. 늘 찬양할 테니까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항상 손 내미는 거지근성처럼 살아가잖아요. 찬양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요. 안 해도 되는 찬양을 오늘 아침에는 찬양케 하셨던 겁니다. 

  

주께서 찬양하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유도 없이. 안양에 가니까 어떤 권사님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저는 하루 종일 찬양만 하고 싶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제가 그걸 듣고도 못 미더워서, 못 미덥잖아요. 저는 사람 안 믿잖아요. 그런 동호회들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그런 동호회도 많은데, 이야기하기가 싫어요.” 아, 그런 뜻으로 찬양하고 싶다. 복음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 무슨 찬양을 해봐야 노래자랑밖에 안 되지, 무슨 찬양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속으로 그러면 지하실 노래방에 가가지고 찬양하면 되는데, 근데 그런 분위기는 이상해서 좀 찜찜할 거예요. 

  

제가 결론 내리겠습니다. 이 땅은 뭐냐, 왜 우리에게 이렇게 주어진 이런 환경을 주느냐, 현상이면서도 왜 실체라는 오해를 하느냐, 우리의 신앙을 분석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신앙의 분석은 딴 게 아니고, 나에 대해 하나님이 분석을 하는 겁니다. 날 향한 분석을 하는 겁니다. 니가 지금 어디 안에 있느냐, 십자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성령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그걸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성령 안에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신앙 자랑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됩니다. 

  

금요일 밤에 메일을 보내셨고, 전화하셨고, 오늘 메일을 보내신, 이름이 최아브라함. 애리조나 피닉스에 살고 계신 연세가 많으신, 한 70후반내지 80되시는 할아버지고 그 아내분의 이름이 최사라. 그래서 아브라함, 사라는 좋은데, 성이 같아서, 같은 성으로 결혼하셨네요? 하니까, 미국은 남편 성을 따릅니다. 아이구, 이 무식! 무식했구나! 그 분이 A₄용지 50장으로 지난 70~80년 살아왔던 인생을 쭉 적어서 보내시면서, “목사님. 제 신앙에 무슨 문제 있거든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하시면서, A₄용지 50장을 숙제처럼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새벽 3시까지 그걸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답글을 드렸어요. 

  

말씀과 현실을 그렇게 연결시키려고 애쓰는데 제가 무슨 토를 달겠습니까? 말씀이 현실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그 만큼 썼거든요. 그게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제가 무슨 토를 달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메일로 내일 아침 열시에 전화하시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연세도 많고 한국 스케줄도 모르시고, 그래서 하시라고 했는데. 이처럼 우리의 삶은 실체가 아니고 있다가 없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이런 일, 저런 일 당할 때마다, 주님께서 이런 수모, 저런 수모 당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말씀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자랑거리가 남한테 인정받는 것이 나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습니까? 사람한테 인정받는 재미로 살아가는 이 모습 속에서, 이걸 깨트려버리고 귀한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음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