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a-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40절입니다. “다시 요한이 세례 주던 곳에 가서 거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왜 등장하느냐? ‘등장할 만하니까 등장했겠지..’ 라고 하면 안 되고요, 예수님이 바로 오셔도 되는데 세례 요한을 왜 앞장세웠느냐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입을 다물고 있어요. 예수님이 바로 오시면 되는데 세례 요한을 왜 앞장세우느냐 말이에요. “물렀거라.” 하는 옛날 대감마님 앞에 하인을 세우듯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해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이기 때문에 먼저 오셨다고요. 그런데 제 질문은 왜 그 소리가 필요하느냐 하는 거에요.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처럼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서 세례 요한이 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런데 소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이고 그 소리의 본부는 예수님이다라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제 질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등장하면 되는데 소리가 왜 필요하느냐, 앞에 하인, 종, 이런 식의 관계를 왜 유지해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원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냥 죄라고 인정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할 때 그 죄, 그 죄가 만들어진 현실을 그대로 밑바닥에 타일처럼, 거름(퇴비)처럼 쫙 깝니다. 그러면 죄가 쫙 깔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죄를 깔아야 되느냐 하면은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담이 자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유혹을 받아서 따먹었습니까? 뱀의 유혹을 받았지요.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은 죄는 인간의 단독범행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 거에요. 그것은 악마(마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그렇지 않은데 가인은 모든 시작과 마감을 인간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마감을 시켜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끝이에요.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는 죄, 다시 말해 악마가 덮쳐서 그렇거든요. 그러나 막상 정말 악마와 결탁된 가인은 아담의 아버지인 아담의 요소로써 모든 것을 마감하는 경향이 있어요. 모든 영적인 것을 배제해버리고 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실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현실이라는 게 이것으로 종결이 되는 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과학시대지요. 귀신이라고 하면 진짜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이고 천국은 가봐야 아는 거고 예수님은 이미 과거의 인물이고 하나님은 있는 게 아니고 대자연은 스스로 자기 촉매적인 국소질서로 만들어진 것이 되는 겁니다. 대자연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촉매,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은 나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으면 또 거기에다가 영향을 주고.. 서로가 영향을 받으면서 서로가 하나의 질서를 만드는데 그 질서가 국소, 제한된 장소의 질서다. 이게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겁니다.
개 따로 있고 소 따로, 말 따로 있는데 그것을 질서 덩어리, 동양에서는 그걸 기 덩어리, 서양에서는 에너지 덩어리라고 합니다. 에너지 덩어리는 엽록소에서 광합성에 의한 햇빛 에너지가 발생되면 동물 세포가 그걸 받아서 질소와 산소로 공급해서 이 세상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무엇이 빠졌지요? 귀신이 빠졌지요, 마귀 빠졌지요, 선악과가 빠졌지요? 그렇게 선악과, 여호와 하나님, 약속,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빼는 이 작업은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죄가 깔려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죄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생각하는 범주를 우리가 익히 아는 것으로 제한시키는 이 자체가 죄가 된다 이 말이지요. “가인아, 동생을 왜 죽였느냐?” “미워서 죽였습니다.” 이렇게 가둬두는 거에요. “사람이 왜 욕심을 내느냐” “인간에게는 이(理)적인 요소도 있지만 정(情)적인 요소도 있어가지고 감정이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이(理)적인 요소가 이걸 다스리면 된다.” 이게 바로 악마가 자기의 정체를 안 드러내고 자꾸 앞장세우는 거에요. 그 선악과를 뱀이 따먹었습니까, 아담이 따먹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지요.
그러니까 그 관계가 똑같아요. 뱀은 자기의 정체를 감추고 자기가 원하는 짓을 하면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을 앞장 세워가지고 자꾸 마귀의 본심을 인간을 통해서 실현코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인간은 “뱀이 시켰어요.” 라고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어 했어요.” “동생 왜 죽였느냐?” “죽이고 싶어서 죽였어요.” “왜 죽이고 싶은데?” “욱 하고 나오니까 죽였네요.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금 성경은 우리를 보고 “다시는 안 그럴 거지?”를 묻는 게 아니고 너희의 모든 행위를 뱀과 관련을 시키라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에게서는 종을 잡을 수 없는 약속이 나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지요. 인간이 아는 현실의 범위에서는 이것의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자식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남자의 후손입니다. 족보가 전부 남자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시조에 보면 아버지 날 낳으시고 나오잖아요. 전부 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마태복음 1장에 쭉 나온다고요.
모든 것을 그냥 우리가 납득이 되는 것, 우리가 보고 있는 것으로 제한하자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마귀 이야기, 귀신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우리한테 해꼬지할 때 그래서 추방할 필요가 있을 때 ‘에잇, 귀신아 이것 먹고 떨어져라.’ 그러니까 귀신하고 노닥거리는 게 아니고 귀신이 노는 세계 따로, 북한에 요덕수용소 만들 듯이 귀신 수용소를 만들어놓고 죽은 자는 거기로 갔다가 49제를 드리면 거기서 제대해가지고 또 영원히 가고 이쪽은 인간 동네이고 인간이 알아서 할 테니까 귀신은 자꾸 한 맺혀가지고 얼쩡거리지 말라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세요. 옛날 토속 종교나 교회나 똑같잖아요. 새벽기도 같은 데 나와서 강단을 치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은 전부 다 한이 맺혀있어요. 그런데 한이 맺혀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뜻대로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의 뜻을 어디에서 규정했습니까? 자기가 설정한 범주 안에서만 규정한 거에요. ‘아이고 우리 조상은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 이것 때문에 한이 맺힌 게 아닙니다. ‘우리 십자가 때문에..’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않아요. 그저 ‘돈을 사랑하면 안 되는데, 내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알아야지..’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설정한 나의 영역이 뜻대로 안 되는 이유는 필히 귀신이라든지 악마, 성경에 나오는 나쁜 존재 있잖아요. 그게 장난질을 치니까 그런 거라는 거에요. “마귀를 이기신 주여, 어서 후딱 이 귀신을 내 영역에서 추방시켜서 원상회복해주고 내 인생을 빠른 시간에 만회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거에요. 그 인간이 마귀의 앞잡이에요. 선악과 놓쳤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다 의미가 없지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눈에 보이는 행실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요.
그리고 힘이 들면 기도해서 마저 채우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의 사고방식 모두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현재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자기 자신, 그게 계시의 핵심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죄라는 게 없지요. 여기에서 제가 원죄라고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죄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죄는 누가 지은 죄입니까? 본인이 잘못해서 지은 그런 죄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 죄 말고 밑바탕에 깔린 다른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인간들의 관심을 끌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등장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당신은 그런 주장을 감히 할 수 있느냐?” 세례 요한이 와서 한 일이 뭡니까? 세례를 줬지요. 그래서 이름이 세례 요한이잖아요. 그래서 세례 요한에 관해서 예수님과 연결해서 이야기한다면 세례가 없는 자에게는 구원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세례가 없는 자에게는 성령세례도, 천국도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물세례가 뭡니까? 물세례라는 것은 물을 찍어바르는 것이 아니고 요단 강 물속에 잠수하는 거거든요. 이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세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옛날에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속에 왔을 때 거기에서 한꺼번에 세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바닷물에 사람이 들어간다면 필히 거기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왜?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은 홍해 물에서 다 죽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세례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게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에서 죽어 있는 것이 원래의 모습이라는 거에요. 이 원래의 모습이 모든 인간 현실의 밑바닥에 깔려있는데 사람들은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가지고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에요. “살아있는 인간 더 한 번 살아보자. 그런데 이 살아있는 것을 방해하면 마귀다. 그리고 실수하면 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와야 될 이유가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평지 작업, 그 기초 작업이 미리 있어야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본질에 관한 문제이고, 이게 원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을 만났다,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헤어졌다. 또 예수님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헤어졌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 안 돼요. 세례 요한한테 붙잡히고 세례 요한한테 붙잡힌 상태에서 그때 예수님이 오셔야 돼요. (같이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그럴 때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보라,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요? 세례 요한이. 어느 자리에서? 바로 인간들이 도외시한 그 죄의 자리에 인간은 산 존재가 아니고 물에 빠져 죽어 마땅한, 지금 심판 앞, 저주 아래 있는...
지금도 산다는 게 저주에요. 이 세상 산다는 게 저주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게 저주 아래에서 태어난 거에요. 그걸 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죄 속에 태어난 그런 행세와 모습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와야 세상 죄가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을 보라”라고 할 때 이 말은 인간이 자기가 죄 지은 것을 책임지라는 말이에요,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이에요?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이에요. 복음이 기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 못 지게 하시는 이게 기쁜 거에요.
내가 숙제하고 싶어도 숙제하지 말라는 거에요. 십계명을 보고 다 풀려고 하는데 너는 풀지 말라고 하면서 시험지를 가져가 버려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의 세례 장면이 나와요. 4복음서에 다 있는 게 몇 개 있어요. 오병이어도 다 있고.. 세례 요한이 하는 모든 일이 세례 요한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냐 하면은 이미 시작, 개시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일을 예수님 만나서 악수부터 하고 시작하지 말고 세례 요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주의 일의 근처에도 못 온다 이 말이에요.
특히 누가복음 같은 경우에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 출생의 비밀을 기록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것마저 예수님의 일이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내가 죄 속에 죽어있음을 안다면 그 자체가 너의 일이 아니고 이미 시작된 주의 일이다 이 말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너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내가 이 지옥 같은, 죄 된 세상 속에 태어났구나를 알게 하는 거에요.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자로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6월 25일이라고 하면 이건 아재개그에요. 나중에 집에 갈 때 웃어요.)”
모든 것이 육이라는 말은 나쁜 짓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고상한 일을 해도 우리가 평생 보여줄 것은 우리의 육 됨을 보여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뿐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일이 되는 거에요. 밑에 우리가 도외시하는 선악과의 죄를 계속 끌고가는 그 작업을 이미 주께서 일하고 온 거에요.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니” 아버지가 일하니까 예수님이 일하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생각해요. “목사님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주의 일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주의 일은 없어요. “그럼 집에서 놀까요?” 놀면서도 그게 주의 일인 것이 믿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안 놀거든요. 예수님은 왜 안 노십니까? 아버지가 일하시거든요. 모든 이 세상의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일하신 흔적들입니다. 주님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지금 모든 것이 주의 일인데 찾기는 뭘 찾아요. 전부 다 주의 일이 되는데요. 낙엽이 떨어지는 것, 별이 반짝이는 것, 중국 여인이 닭하고 쌀을 훔치는 것도 주의 일이고 집사님이 찡찡찡 우는 것도 주의 일이고 모든 게 주의 일이에요. 왜? 아버지가 일하시니까 주가 일하시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왜 내가 놀 때는 일을 안 하고 일할 때만 일을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이것은 마귀가 앞잡이가 되어가지고 자꾸 독자적으로 단독적인 가인의 성격이(이게 육이거든요.) 그대로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도 안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내가 한 번 나서볼까?’ 그렇게 일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오전 설교에 제가 이봉창 의사 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교회 교인 두 명이 “이봉창이 누굽니까?”라고 묻는 거에요.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봉창은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독립운동이 안 된다는 겁니다. 안중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 말이 맞아요, 안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 말이 맞는데요. 제가 안중근이나 이봉창에게 묻고 싶은 것은 “독립해서 뭐할 건데?” 좋다고 쇠고기 사먹겠지. 대한독립이라는 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이게 안 나오지요. 그러면 성경에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독립을 위해서 하겠다는 것은 결국 성경의 무엇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거에요? 선악과, 원죄, 귀신, 악마의 일, 약속, 이스라엘 메시아의 기다림을 전부 다 가위로 잘라버리는 거에요. 이딴 것은 필요 없고 이딴 것은 필요 없고 이건 우리 집안에 도움도 안 되고 이건 필요 없고.. 라고 하면서 다 잘라버리는 거에요.
그런 사람에게 “혹시 묻습니다. 세례 요한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그 양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이순신은 알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을 내가 꼭 알아야 됩니까?” “당신이 죽습니다. 나미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왜 죽습니까?” “육이거든요.” “육? 육이 뭔데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마귀가 모든 문제를 눈에 보이는 인간에 의해서만 처리되도록 그렇게 제한된 현실로 만든 거에요. 인간만의 세계로 악마가 단도리를 잘 한 거에요. 이걸 경상도 말로 단디라고 합니다. “일 단디 해라이.” 단단히 하라는 말입니다.
항상 영적인 것이 있더라도 우선되는 것은 육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요. 그 육을 형성하는 내용은 혈연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이것은 짐승들이 새끼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제가 대구공부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인간의 모든 욕정은 짝짓기, 혈연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욕정을 주체 못하는 이유는 결혼해서 새끼를 칠 정년기가 되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나쁘다고는 할 수가 없지요. 왜? 짐승들도 새끼를 치니까 그게 나쁘다고 못하잖아요.
“그런데 둘이 결혼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러면 저한테 막 따질 거에요. 그러면 저는 답하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데 홍수는 왜 났지요?” 이게 뭐가 문제라고 홍수가 옵니까?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밥을 할 때 고기만 먹어서 그렇습니까? 고등어 구워가지고 미세먼지 46배 만들어서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벌을 받는 거에요? 그게 아니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인자가 임하는 것을 잃어버린 거에요. 인자의 이야기를 누가 안 해주는 겁니까?
인간을 이렇게 가두어놓은 그 배후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뱀의 후손,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이것을 현실의 전부로 규정하도록 만드는 거에요. 여기에 돌발사태가 일어났으니 누가 왔다? 세례라는 기능을 베풀 세례 요한이 온 거에요. 세례 요한은 놀러 온 게 아닙니다. 무슨 기능을 해요? 세례라는 기능을 해요. 세례라는 기능이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자기)의 원천을 찾아가는 거에요. “다 물에 들어가. 홍해 바다에 다 빠져죽어.” 이게 원천이에요.
그 원천은 본인이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고 누가 미리 보내서 했다? 예수님이 미리 보내서 한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미리 보내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에요. 누가복음을 한 번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2장 34절입니다. 성경을 보시게 되면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쭉 내려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를 따지면 구약 성경의 역사가 거기에 밑바탕 되어 있습니다. 34절 같은 경우에 “시므온이 저에게 축복하여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폐하고 흥하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나오지요. 이스라엘의 설명을 보면 사람이 흥하고 폐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비방을 받는 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이 등장된다 이 말입니다. 그분이 누군가 하면 아기 예수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 다음에 나온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보는 현실은 인간이 그렇게 감추어놓고 인간은 전혀 예상도 못한, 다른 현실층으로 범위(범주)의 폭이 넓혀진다는 겁니다.
성도의 자유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가 아닌 사람이 보는 범위보다 모든 세상을 훨씬 넓게 보는 거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라는 열매가 어디에서 나오겠어요? 세상을 넓게 봐서 그래요. 어디까지? 지평선이 아니에요. 오는 세계까지 다 아울러서 보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을 넓게 보는 거에요. 베드로에게 “당신 복음 전하면 죽인다.”고 하니까 “아이구 뭐 예수님 소원대로 됐구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나는 주님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이게 범위를 넓히는 거에요. “네 속에 이야기하시는 분이 있어서 네 말이 아니고 네 속에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리라” 범위를 넓히는 겁니다.
그렇게 넓혀버리면 이제는 드론처럼 되어가지고 세상을 떠서 보지요. 이게 자유잖아요. 그래서 이 복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밥을 먹어도 맛이 있지요. 복음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는 뭘 해도 소화도 안 돼요. 복음 모르는 사람하고 이야기하면 소화도 안 돼요. 짜증나요. 만약에 여러분이 공직에 있는데 홍민표인가 하는 사람이 와가지고 돈 한 5억을 네 가방에 넣어준다, 사과박스에 넣어준다고 해서 넣어주게 되면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고 칩시다.) “이거 해서 잘 봐주소.”라고 한다면 “회사가 잘 되면 뭐 하겠노? 잘 되었다고 소고기 사먹겠지.”라고 하면 뇌물을 주겠어요?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 말이지요.
“당신 그렇게 하면 우리 이혼한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래 이혼하자. 같이 살면 뭐 하겠노? 남들이 행복하다고 하겠지. 개코 행복. 살기 싫어? 그래 갈라서자.”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온 말씀 아닙니까? 그래놓고 그게 자유라고 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하고 붙어 살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이혼했다고 상을 주거나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 본들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 범위 내에서는) 부부끼리 같이 살고 돈 많이 버는 게 대단하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가진 자는 다 못 쓰는 것같이 해라. 왜? 세상 행적은 후딱 간다. 훅 간다. 이 말이거든요.
음악대장이라는 사람이 복면가왕 10연승에 실패했잖아요. 9번이나 우승했다고요. 만약에 음악대장이라는 하현우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승 10번 하면 뭘 하겠어? 오늘 노래 그냥 임팩트까지 가지 말고 대충 부르다가 내려가자.” 그래서 대충 불렀잖아요. 그게 별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말로만 예수를 본받아라, 세례 요한을 본받아라, 선지자를 본받으라고 하는데 본받는 방법이 참 쉬워요. 자기가 이미 원죄 아래에서 육이고 지금 죽어있다는 것, 그리고 주일날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늙어서 맥이 빠져서 죽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죽이시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왜? 주님이 말씀대로 일하시기 때문이지요. 세례 요한은 세례 요한이 되어야 되고 삭개오는 돈이 많은 부자지만 네 집에 구원이 이르러야 되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나야 했고 그런 겁니다. 탕자는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영접을 받아야 되고요. 그것은 본인이 움직인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신 거에요.
왜 주께서 일하신 것을 강조해야 되는냐? 우리가 뭘 꿈쩍여봐야 그것은 죄를 못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건 일로 쳐주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일은 누구만 하느냐? 예수님만 해요. 왜? 효과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하는 일은 백날 해봐야 그냥 죄에 더 얽히게 마련이에요. 어려운 사람을 돌본다고 아껴가지고 저금통 깨서 돈을 줬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할 때 오른손이 그 일을 하거든요. 그러면 누가 눈치를 채버립니까? 왼손이 눈치를 채가지고 주의 일이 안 돼요. 주의 일을 겐세이 놓는 식이다 이 말이지요. 주의 일을 방해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를 해봤자 뭐 하겠습니까? 기도했음이 기억이 나는데요. 금식기도 백날 해봐야, 금식 안 해봤지요? ‘이번 금요일날 금식하고 피자 두 판 사먹어야지..’ 이게 자기의 희망이 되는데 이게 무슨 금식입니까? ‘빨리 끝내야지.. 날짜 정말 안 가네.’ 6.25 때 먹던 수제비 먹자고 해가지고 수제비 띄우는데 6.25 빨리 끝나라. 6.25 때 먹던 수제비를 생각하는 그게 바로 육이오. 아재개그예요. 그게 바로 영이 아닌 육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왜 등장했는가? 우리가 밟고 있는 것을 치명적으로 완전히 뒤집기 위해서 등장하는 거에요. 우리의 진짜 본질이 담긴(있던) 담요가 있다고 치면, 그 담요를 확 잡아당겨가지고 담요로 우리를 되덮어서 우리를 덮어버리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온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 요한의 행위를 권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적인 일이 아닌 거에요. 세례 요한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개인적으로 한 모든 행동이 절대로 주의 일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개별적으로 본인의 뜻이라면 주의 일이 아니고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주의 일을 하면서 본인이 의인이 됩니까,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까? 죄인으로 드러나요. 그래서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가 누구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까?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 더 큽니까? 구약에 있는 어떤 선지자보다 세례 요한이 위대하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 위대한 자도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보다 못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요한복음 10장 40절을 하는데요,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구절 앞에 있는 38절을 한 번 보세요.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그리고 누가 등장합니까? 세례 요한이 등장하지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훌륭하다, 메시아다가 아니지요. 세례 요한도 죄인이지요? 그렇다면 죄인인 세례 요한이지만 지금 세례 요한이 본인의 일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자기의 일을 하면서 세례 요한을 앞장세우지요.
그러니까 지금 인간이 하는 일이 인간이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뒤에 숨어서 세례 요한을 앞장세우듯이 인간의 모든 일은 예수님과의 대척관계에 있는 그 무엇, 여자의 후손의 대척관계가 누구입니까? 뱀의 후손, 악마가 그 일을 하는 거에요. 뱀의 후손이라는 말의 뜻은 뱀보다 작은 새끼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뱀의 실체를 밝히는, 뱀 이전에 있었던 그 진짜 실체를 뱀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에요.
다윗의 자손이 주예요, 주가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는 거에요. 똑같은 원리로 뱀의 후손이, 기어다니는 뱀에게 그런 일을 시킨 진짜 숨겨진 어른, 주모자 이게 바로 뱀이다 이 말이지요. 맨날 뱀이다, 뱀이다라고 노래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그렇다고 뱀이 잡히는 게 아니에요. 땅꾼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후손이 미래에 있고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오히려 숨겨진 실체의 범위가 점점 넓혀지는 거에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아담은 모형입니다. 우리는 아담에 속해있고요. 그러면 아담의 후손이면서도 아담의 제 1은 누구냐?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아담과 예수님을 연결시키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담은 이 땅에 태어나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야 되었다 이 말입니다. 뱀의 후손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여자의 후손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배후에서 세례 요한을 세례 요한이 되게 했다는 말의 뜻은 모든 인간은 배후에 어두움이 있고 인간은 육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인간이 육으로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인간의 배후에 배후자가 있게 하셨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인간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특이한데, “똘아이 아니야, 미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미친 사람은 혼자 미치잖아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진짜 비유로 말해서 도끼들고 설치는 거니까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라고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 인간 세계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심사를 했어요. 그런데 심사하러 오신 그 심사위원들에게, 감사원 직원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까짓 것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얼굴을 내밀어?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너희들이 구원을 받으면 이 돌멩이들이 구원받겠다. 세상에.. 어디를 여기에서 얼쩡거리고..”
왜 이 세상이 아버지가 일하고 주님이 지금까지 계속 일해왔는데 너희들이 생각하기를, “언제 그랬어?”라고 생각하도록 도대체 누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었느냐? 이것은 자질의 문제가 아니고 권세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누가 강압적으로 이걸 못 보도록 그렇게 가둬둔 거에요. 세례 요한은 뭐다? 권세다. 하늘에서 온 권세다. 그런데 41절에 봅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너무 특이하고 도끼 이야기까지 너무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 때에 타작마당에 나왔다고(마당놀이 말고) 해요.
타작마당의 뜻은 때가 무슨 때라는 말입니까?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몰랐던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을 심판하는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고 난 뒤에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거에요. 갑자기 뭘 생각하겠어요? 자기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나는 지금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가지고 나는 맞다고 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 이 말이지요.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야, 복음을 알았으니까, 하나님이 진짜 진리와 정답을 내려줬으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야, 김 목사, 이 목사, 최 목사, 나 너하고 손잡고 일할게. 다른 사람 못 믿고 너만 믿어.”라고 하셨으면 입을 떼자마자 3천 명이 회개하고 5천 명 등록해가지고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지을까?’ 이것만 생각해야 될 텐데 있는 사람도 다 나가요. 평균도 안 돼요. 있는 사람마저 다 나가버리니까 의욕이 없어요, 의욕이.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복음을 들어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하는 말이 그 교회가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왜 교인수가 얼마 안 되느냐 말이지요. “진짜 진리를 전한다면 하나님이 자기 편이니까 많은 사람을 보내가지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할 건데 왜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숫자를 보니까 얼마 안 되어서 (다른 데는 차고 넘치는데) 도저히 못 믿겠다.” 하면서 복음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설교도 듣지를 않고 아예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시내에 갈 때 직행 6번하고 1번이 가는데 직행 1번은 동대구역에 가고 직행 6번은 가지를 않아요. 직행 1번이 간다고요. 그런데 직행 6번은 우리 동네가 종점이라 사람이 텅 비어있지만 시내로 바로 가고 직행 1번은 동대구역으로 가는데 직행 1번에는 사람들이 꽉 차있는 거에요. 진리입니까? 코스가 달라요. 갈 길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한 쪽은 지옥이고 한 쪽은 천국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렇게 의욕이 없을까봐 하시는 말이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마라. 천국은 너희 것이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오지를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모아서 가는 게 아니고 택한 자를 찾아내는 방식이지요. 생명책의 명단은 예수님만 아시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일하시고 아들이 일하니까 오직 예수님으로 스톱되었어요. 제자들은 일을 안 해요. 그냥 추수한 것을 줍기만 하지 일했다고 포함되면 안 돼요. 인간을 보고 일을 시키면 항상 엉터리 일을 하기 때문에 안 돼요.
일을 온전히 하려면 주님이 해야 돼요. 어설프게 미장을 맡겨가지고 집을 다 지어놓고 쑥 그려놓으면 안 되듯이.. 아버지가 일하기 때문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그냥 찾는 겁니다. 누가 이 사람을 아(모르)시나요? 패티김이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이산가족찾기 KBS 여의도 앞에 붙여가지고 했잖아요. 자기 양 찾는 작업이지 사람 떼스리, 팬클럽 모집해가지고 단체로 보내는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백날 해봤자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이사야 6장에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현실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세례 요한의 일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성령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게 되면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만 나는 일을 할 뿐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마귀까지 집어넣어서 현실을 다시 한 번 재조정과 재비치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세례 요한을 집어넣는 거에요. 그냥 멀뚱하게 있습니까? 세례 요한이 거침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심판 이야기를 하고 도끼이야기를 하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심판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부터 심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을 안 받으려면 착해야 된다, 나빠야 된다 어느 쪽입니까? 심판은 내가 이런 기운을 받아서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의 행위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심판할 때 우리는 죄인이 되어 있어야 돼요. 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산상설교가 주어지게 됩니다. 산상 설교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산상 설교 들을 때 굉장히 기뻐해야 돼요. “주제파악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나는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했는데 그 책임지는 데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야 돼요. 그러니까 책임질 거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산상 설교를 설교할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너는 세상의 빛이라” 어디 뭐, 유아인처럼 인물이 잘 생겨야 됩니까? “너희는 소금이라” “등경 위에 빛을 비취되 너희 선한 행실을 가지고 비취라” 결국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비췹니다. “나 죄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비취지요. 그런데 산상 설교를 그냥 하게 되면 이 땅에 천국을 만들려고 교인들을 아예 윽박질러요. 목사 자기도 못 지키면서요. 교인들을 윽박질러 왔어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또 거기에 속아넘어 갔어요. 속이는 인간이나 속는 인간이나, 다단계나 옥장판 10개 사는 인간이나, 대출 받아 사는 인간이나 문 잠궈놓고 휴대폰 압수해놓고 그걸 팔아먹는 인간이나, 똑같아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살면 뭐 합니까? 왜 사는데요? 삶에 이유가 없어요. 왜? 처음부터 우리는 원죄의 늪에 빠져있기 때문에 살 이유가 없는데요. 살 이유가 없었는데 이유가 있지요. 왜? 주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온 겁니다. 주님과의 연관성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 더 이상 육이 아니고 영이 되는 겁니다. 6.25(육이오)에서 0(영)으로.. 영이 되지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믿을 때부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해왔다는 사실을 세례 요한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관계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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