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장(빛과 그림자)140403b-이 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아까 첫째 시간에 예수님은 단독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오신다고 했죠. 그러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짊어진 짐 보따리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택한 백성! 하나님으로 난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으로 난 자들을 예수님이 따로 챙기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사람들은 뭐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난 자가 아니에요. 이건 육신에서 나온 것이고 어두움에 속한 자에요.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난 자들, 남들 보기는 예수님 홀로 보이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어떤 하실 일이 있는데 하실 일이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택한 백성이 있어요.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택하여 보낸 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이것,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보기에 털렁털렁 맨 몸으로 온 거예요. 맨 몸으로 와 놓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만들어 내는데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사마리아 여인이 분명히 어두움에 속한 여자 맞죠? 그런데 나중에 추수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로서 들통 났죠. 그러면 그 사람이 맨 그 동일한 사람이죠. 동일한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바꿔치기 했다는 거예요. 이러니까 어려운 거예요.
어두움에 난 인간을 아버지께 난 자로, 준비된 인간으로 바꿔치기 한 겁니다. 우리는 바꿔치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깨닫고 주님께서 ‘믿나? 믿으라니까. 믿으면 거듭나면 되는 거야.’ 본인 맨 그 사람이 본인이 믿어서 본인이 구원받는 그 사람 되기를 원하잖아요. 이게 지금까지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이 뭐냐 하면 주께로 말씀이 오게 되면 좋은 말로 성령이 와서 믿게 되면 전에 몰랐던 내가 이제는 새 사람 되어서 믿으니까 새 사람 된 나나 전의 나나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란 말이죠. 그게 인간들 생각이라니까요.
이게 바꿔치기가 들어가는 거예요. 바꿔치기가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는 이 세상에 평범한 아줌마다.’ 하고 룰루랄라 하고 물 길러 오잖아요. 올 때 주님 보시기에는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게 허구에요. 주님 보시기에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의 행위가 가해지면 이 여인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서 이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담기느냐, 안 담기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만약에 여인이 예수님 말씀대로 깨달았다 해버리면 이 여인은 거듭남이 안 돼요. 거듭남이 뭔지 알아요? 현재 기존에 있던 몸은 죽고, 그 죽은 몸에서 다시 태어날 때를 거듭남이라 합니다. 내 말 틀렸습니까? 거듭남이 그런 거잖아요. 깨달았다는 거듭남이 아닙니다. ‘아! 알아들었습니다.’ 절대로 거듭남이 아니에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야 돼요. 뭐가 들어간다? 죽음이 들어가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할 때 주님이 십자가 죽을 때 이미 어둠에 속한 사마리아 여인도 같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시간상으로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 죽음은 예수님 혼자 죽는 것이고 사마리아 죽은 것은 늙어 죽는 것이고 우리 죽음은 따로 분리해 놔요. 분리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합친 거예요. 너 죽고 나 죽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는 너와 함께 죽는 죽음으로 죽었다로 해주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소급해서 그걸 적용시켜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 이전부터 적용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기 물이 있는데 주님이 나한테 ‘어이, 근호야, 이 물 가지고 있거라.’ 보니 물 이예요. 분명히 물입니다. 물인데 ‘어이, 근호야.’ ‘예’ ‘내가 준 포도주 가져오너라.’ ‘포도주 준 적 없어요. 물 줬습니다.’ ‘포도주 줬다니까.’ ‘물 주셨어요. 주님도 자꾸 억지 부리시는데 억지 부리시면 안 됩니다.’ ‘한번 봐.’ ‘봅시다. 어! 포도주네.’ 분명히 물 받았어요.
그런데 물이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뭐로 변했어요? 물이 포도주로 변했거든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내가 나에요.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내가 내 몸이 아니고 이미 주님 죽었을 때 같이 죽고 주님 살았을 때 산 몸으로 소급해서 평가한다니까요.
또 예를 들어봅시다. 간통하다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너를 고소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고소하지 않겠다. 너를 용서하겠다.’ ‘무슨 근거로 용서합니까?’ ‘하여튼 용서받는 거야.’ ‘용서 받았어?’ ‘용서 있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야, 간음한 여인아.’ ‘예’ ‘너 받은 게 뭐지?’ ‘용서 받았는데요.’ ‘한번 봐’ ‘어! 피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은 자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는 거예요. 여인은 자기가 간음했다가 용서받은 것으로 끝났는데 그게 아니고 여인은 영생을 얻어버린 거예요. 왜, 그 여인은 하나님께 난 자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무나 찝쩝 대지 않습니다. 모든 소경 다 오세요. 이게 아닙니다. 주께서는 아버지께 난 자에게만 주님의 행위가 간을 봐요. 찜을 하는 거예요. 원래 뒤에다 X표를 해요. 신문 넣은 집을 싸인 하듯이. 우리도 모르게 X표를 해놓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것이라. 이 말은 우리가 예수 믿었을 때 안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우리가 까마득히 모를 때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주께 채택되면서 소급해서 그 전에 주님께서 어떤 작업으로 모든 나의 구원을 완료시켜 놨는가를 차후에 우리는 믿고 그걸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어려운 이유가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할 때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한다면 내 쪽에서 내 민 손길에 주님이 닿으면 나는 주님을 믿는 게 되고 영접하는 게 되고 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는 방식, 내 쪽에서 출발하는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예수 믿는 자 되는 그 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이건 나한테 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손을 나는 산 손으로 보거든요.
주님께서는 이 손을 무슨 손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어두움에 쌓여서 죽은 손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를 뒤로 수갑 채우는 거와 똑같아요. 수갑 채우고 내 속에서 어떤 믿음도 박탈해버리고 누구 괜찮은 사람 영접할 마음도 다 뺏어가 버려요. 그래 놓고 말합니다. 손은 묶어 놓고 아무것도 한 것 없죠. 예수 믿을 수 있는 마음 다 없애게 만들고 영접도 못하게 만들고 기껏 혈통도 끊고 뜻밖에 당하게 만들고 하는 말이 “쟤가 구원받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독생자 나타났다는 게 뭘 의미하느냐 하는 겁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뭐가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나타났죠. 독생자 나타날 때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 걸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품에 독생자, 예수님 나타날 때 스프링이 연결됐다고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 나타나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탯줄 끊어지듯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잖아요. 안 끊어졌어요. 그냥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잡아당겨 보니까 그 용수철이 왜 그리 긴지, 길어도 너~~무 길어요. 2천 년 동안 계속되니까. 길어서 예수님 독생자가 나타나면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다 끊어지지 않고 연결돼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요 일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아버지께 난 자를 필히 구원한다는 일도 요 용수철 속에 정보가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볼 때 느긋하게 보셔야 됩니다. ‘아! 이 일을 이렇게 하셨구나. 아이쿠, 이렇게 하셨네. 다 하셨네. 뭐 할 것도 다 해버리셨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야말로 누구만 사랑합니까? 요한복음 마지막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참 좋은 말 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않는지는 주께서 아십니다.” 왜, 아버지와 연결된 용수철은 바로 주님 뒤에 연결됐기 때문에. 예수님 하는 일이 곧 누구 하는 일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디서 감히 그동안 하나님을 운운하고 하나님 일을 내가 언급했다는 그 자체가 ‘아이쿠, 부끄러워 미치겠네.’
예수님이 나타나야 아버지가 나타나는데 예수님도 안 나타난 상태에서 인간들끼리 승리하고 모여서 ‘야,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볼까? 모세 율법이 있는데 어떻게 지키지?’라고 쑥떡 쑥떡 거린 현장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서 전부 다 ‘암행어사 나타나서 변 사또 잔치 상을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이게 뭐야 이게?‘ 다 뒤집은 거예요. 성전? 성전 같은 소리 하네. 다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다 뒤집어버린 거예요.
이제 요한복음 약간 감이 오십니까? 그냥 느긋하게 팔짱 끼고 보시면서 아!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두 분 혼자 다 해버렸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버렸어요.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걸 바꿔치기 한다는데 상세히 해봅시다. 깨달으면 믿는다가 아니고 네가 깨닫게 되면 나를 알아본다는 것도 아니고 하늘나라는 깨달아서 가는 게 아니고 연구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건 제가 아까 언급했어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뭘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못하는 걸 예수님이 죽었다가 아버지께서 살려주는 거예요. 북 치고 장구 치고 예수님 혼자 다해버린 거예요. 아까 집사님이 인생은 연극이라 했는데 요한복음은 우리 연극이 아니고 누구 연극이냐 하면 예수님 홀로 하시는 모노드라마, 예수님 혼자 이 땅을 누비시고 다 하셨던 그 모노드라마에 우리는 구경하다 걸려든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셨잖아요. 따라서 죽었다가 사신 것을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우리도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적어볼게요. 이미 죽었다가 산 사람이 우리 성도다. 그러면 성도가 나중에 죽는 죽음 있잖아요. 이 죽음은 뭐고 이 죽음은 뭐냐? 둘 중에 하나는 가짜 죽음이고 하나는 진짜 죽음이죠. 우리가 죽은 이걸 안식이다 하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쉬는 것. 이렇게 글을 쓰다가 ‘아휴, 찌뿌둥해.’ 하면서 안식. 열심히 돈 벌다가 ‘아유 찌뿌둥해. 혈당 높네.’ 이러면 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죽었다가 산 사람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있습니까? 예수님만 죽음이 있어요. 따라서 요한복음은 누구만 죽을 수 있느냐 하면 오직 예수님만 죽을 수 있어요.
그러면 어둠에 속한 사람은?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었으니 새삼 죽는 건 없고 요한복음에서 산 사람은 누굽니까? 오직 예수님만 살았어요. 처음부터 예수님은 살았고 최초의 산 사람도 예수님이고 최초의 죽음도 예수님이고, 최초의 부활도 예수님이고 나머지는 다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거예요. 어둠이기 때문에.
그게 이 땅의 생명의 특징은 어둠과 죽음의 배경 속에서만 생명이 생명의 값을 하고 그 본질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는데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해봅시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이 진작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안 죽었다고 했죠. 분명히 입에서 죽음의 개념을 끄집어냈잖아요.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다 죽은 자가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거죠.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지금 이거 죽고, 이거 죽으니까 그게 죽음인 줄 아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죽은 것은 그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에요. 그건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티내는 것밖에 안 된다니까요.
장례식이 먼저라니까요. 출생이 나중이고. 아까 했잖아요. 여기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그게 거듭남이 아니고 그냥 한 바퀴 인생 이예요. 주님이 거듭남을 할 때는 그 죽음 말고 다른 죽음을 여기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내 죽음도 아니고 내 자살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여기에 들어가 버리면 예수님의 죽음을 경유해서만이 다시 삶이 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사는 그건 거듭남이 아니라니까요. 주님의 삶 속과 결합될 때만 거듭남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지, 내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사는 그건 소생이죠. 베드로 장모도 소생했죠. 그 다음에 죽었다 산 사람 누굽니까? 야이로의 딸도 죽었다가 살아났죠. 나사로도 마찬가지고, 나사로는 쉬다가 온 사람이고.
어쨌든 흔히 말하는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이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죽었다가 못 살아나고 그냥 죽어버리는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거예요. ‘아!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사는구나.’ 그거 아니거든요.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예수님이 사는 것에 대해서 합류를 하게 되면 이건 내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다른 걸로 교체된 상태에서 주님의 생명이 있는 상태에서 주의 몸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의 특징이라 말이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선로가 바뀌는 지점인데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대전에서 이쪽은 경상도, 이쪽은 전라도인데, 이번에는 전라도 구경 좀 해보자 해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벌써 대전 지나버렸어요. 보니까 풍경이 못 보던 풍경 이예요. 뭐 이런 풍경이 다 있어? 그게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이라니까요. 내가 예상한 거듭남이 아니고 못 보던 풍경들이예요.
그건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의논한 대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일들이 나에게 지금 나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어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기대하지 못한 못 보던 풍경이, 못 보던 인생이 벌써 시작된 거예요. 내가 이렇다가 아니라 매일같이 어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일이, 매일 같이 어찌 잘리는 일이, 어찌 벚꽃이 일주일 이상 피는 일이, 매사가 어찌 머리가 희어지는 일이. 하루하루 삶이 모든 삶이 베드로처럼 원치 않는 길로, 내 뜻대로 안 되는 쪽으로 하는데, 그게 마리아 임신할 정도로 그런 인생이 일어날 때 이걸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은 뭐는 아니다? 결심도 아니고 각오도 아니고 믿음은 주께서 거듭난 사람의 삶 자체를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믿는 자라 합니다. 믿는 자는 늘 주님을 영접하도록 돼 있는, 영접하게 가능한 믿음이기 때문에 영접이 안 될 수야 안 될 수가 없어요. 주님과 함께 늘 교제하는 거예요.
그 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1장 47절 한번 봅시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착해서 간사한 것이 없습니까? 양심적이어서 간사한 것이 없습니까? 나다나엘 혼자 있었습니까? 누가 같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같이 있어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같이 있었잖아요.
그 양식은 51절에 나온 것처럼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수님을 볼 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 혼자로 보이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다? 인자와 천사들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 하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게 지금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천사들이 함께 있고 아버지도 함께 있는 거예요. 그처럼 나다나엘도 함께 있을 경우에만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은 주의 동행이 없으면 이스라엘 아닙니다. 혼자 잘해봐라. 혼자 잘 믿어봐라. 이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동행자가 없으면 이스라엘 사람 아니에요.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바르게 사나, 안사나 내가 지켜봐야지.’ 이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누가 다 가져갔어요? 주님이 다 조정하고 관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간사할 리가 없죠. 예수님 자신이 간사하지 않은데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 특징 이예요.
실질적으로 여러분들 보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는데 왜 이런 모습이 안 나타나느냐 하면 여러분들의 육신이 자꾸 억지를 부려요. 뭐냐 하면 ‘나 돈 없이는 못 살아.’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고요. ‘나는 자식 없이는 못 살아. 우리 남편 잘 돼야 되고 난 남한테 지기 싫어.’ 옛날 버릇을 일부러 추억 삼아 자꾸 만들어 내요. 그런데 해보면 어색해. 그게 그렇게 어색해요. 노래방 갈 수도 있어요. 나이트클럽 갈 수 있는데 성령 받고 노래방 가게 되면 참 어색해요. 자기가 노래 부르면서도 이상하게 점점 시시해져요. 노래방에 가서 ‘아따 참말이여’ 그런 노래 부를까요? 구자억 목사가 불렀다는 그 노래, 아주 히트 쳤어요.
세상일에 분명히 골프치고 다 해도 괜찮은데 재미가 없어진다니까요. 이상하게 실 웃음이 나고 시시해 보이고 웃기고 뻔해요. 성령 안 받으면 프로 야구 류현진에 미칩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에 프로 야구, 프로 축구, 월드컵, 이제는 나이 들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나이 들어도 밤새 보는 사람 있습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삼각하지가 않아요. ‘아이쿠, 없으면 말고, 못하면 주의 뜻이지 뭐.’ 자꾸 이상하게 변해요. 이것이 인생 관리가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여섯 명 사귀었는데 그 다음 일곱 번째부터는 별로 재미 못 느낄 거예요. 이제 메시야 봤는데 뭐. 이제는 남자도 별로 시시해. 여자 분들이 언제 남자가 시시하려면 몇 살쯤 돼야 그런지.
그러니까 요한복음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이제는 우리보고 뭘 하란 말이 아니고 내가 직접 너를 하나님께 난 사람만큼 내가 바뀌겠다. 바뀌는데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너에게 적용을 시킬 테니까 너한테 몸의 어떤 변화, 마음의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지고 이건 주님께서 그렇게 지금 작열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취지에서 주님이 이런 이야기하죠. 내가 너희와 있는 것보다도 다 좋은 게 있는데? ‘뭡니까? 뭡니까?’ “내가 가고 난 뒤에는 보혜사가 오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너희를 관리할 테니까 그게 나한테 더 좋다는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책망하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책망해서 네가 이미 새 사람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의 십자가에서 이루었던 그것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퍼져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요한복음 1장 다시 봅시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자, 여기 할 말이 많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데. 제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거부터 먼저 할게요. 사람이 사는 게 고통입니다. 생, 노, 병, 사 고통인데 불교에서는 고집멸도 [苦集滅道]라는 것은 이미 고생이 있고 고생은 집착에서 오고 멸하는 것은 자아를 멸하려고 도는 팔정도를 닦게 되면 해탈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뭡니까? 이 고통을 누구 고통을 봅니까? 나의 고통을 보죠. 십자가가 누구 고통이었어요? 예수님 고통이죠. 이건 뭡니까? 자기 고통이라. 출발부터 자기 고통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고통은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고통 이예요. 아버지께서 계획한 대로 아들이 시행했기 때문에 죽어지는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교회에서 ‘여러분 고통스럽죠?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 믿으면 여러분들은 고통에서 면제할 수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그들은 회복,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복귀.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은 필히 고통이 없는 경우를 상정하게 돼 있어요. 내가 이가 아프잖아요. 그럼 뭘 생각하는 줄 알아요? ‘아!’ 그때 옥수수 맘대로 뜯던 그때가 그리워진다니까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인간의 따짐, 이성, 이성은 과학과 철학 기술 이예요. 문화, 문명, 즐거움, 이런 걸로 뭘 한다? 회복 이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회복을 언급하거든 기독교가 아닌 줄 아시면 됩니다. 절대로 회복을 하지 않습니다. 없애버려요.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끝나야지, 어두움이 빛이 되면 안 돼요.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끝나는 거예요. 어두움은 마지막이 어디냐 주의 십자가에서 전부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들통 났고 어두움에서 십자가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어두워야 될 이유가 어두움 값을 해야 돼요. 그게 저주고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아들을 모르는 자는 영생이 없다 했어요. 없어야 돼요. ‘에이 재수 없어.’ 없는 게 아니고 필히 영생이 없고 저주가 그들 머리 위에 있다. 이 말은 주께서 이건 아버지 뜻 이예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 외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아요.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어야 돼요. 이건 일가친척이고 뭐고 봐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있어야 돼요. 이 말은 누구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저주 없는 곳으로 나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끝났어요. 이미 끝나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끝나버렸는데 고통, 회복을 언급한다. 이것은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말씀을 지키고 어떻게 실천에 옮기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기껏 자기가 아는 어떤 회복된 상태를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회복은 없습니다. 통일교도 이야기하고 다 이야기하는데 회복은 없습니다.
그럼 뭐냐, 이건 새로움 이예요. 주께서 주시는 것은 새로움 이예요. 예수님께서 어느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했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 따라 갈 테니까 천국 들어가게 해달라.’고 베드로가 예수님 죽는다는 소리 듣고 자기가 목숨 내놓는다고 했죠. 그때 베드로가 목숨 내놓는데서 뭘 기대했겠습니까? ‘내 목숨 내놓으면 내가 그리던 주와 함께 있는 천사, 아버지가 계시고 야! 미치겠네. 그 나라 간다.’ 그 나라 가면 이까짓 거 목숨 하나 내놓아도 나는 남는 장사다.‘ 분명히 언급했을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 했습니까? 뭐가 없다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뭐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처소! 그 이야기를 진작 하지. 참. 진작하면 알아듣느냐 말이죠.
처소가 없어서 베드로가 와도 있을 곳이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하지, 처음부터 하늘나라에는 인간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처소는 예수님이 아버지 뜻을 따라 새롭게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있는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내요.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 개념하고 완전히 다른 거예요. 천국 개념은 이미 있고 그냥 못 가서 문제기 때문에 누가 들여보내준다면 가서 턱 하니 앉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약 설명하면서 제가 그 언급을 여러 번 했는데도 참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홍해 건너왔습니다. 여기가 약속의 땅인데, 제가 분명히 약속의 땅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무슨 땅은 있습니까? 가나안 땅은 있어요.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광야에 있어요. 땅 있다고 그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신 그곳이 약속의 땅이지, 있는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고 원주민 땅 이예요. 열 족속의 땅이라니까요.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이 있는 걸 모르겠어요? 알아요. 알지만 이들이 이 땅이 약속의 땅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내라 했잖아요. ‘너희 정탐해 봐라.’ 가보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땅은 있는데요. 들어오지 말래요.’ 왜?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아서 주께서 우리 약만 올렸어요.’ 들어가지도 못할 땅, 이제는 우리가 오도 가도 못하고 그야말로 끼었다 하죠. 가운데 끼어버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 공동묘지 삼으려고 이렇게 했느냐 불평하니까 불 뱀이 와서 물어 죽여 버리죠.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갈 데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이 간 데를 누가 정했습니까? 자기가 상상했던 갈 곳이죠. 자기가 희망하고 자기가 들은풍월에 들은 천국이었어요.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나라는 것은 누군지 모른다. 그럼 나는 뭐냐, 남한테 들었던 것을 가지고 나를 규합하죠. 그러면 내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이미 기존에 있던 남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남의 이야기가 그게 진짜인 줄 알고 같은 어두움이면서 똑같은 어두움의 소식을 우리는 빛이라고 여기면서 그걸 가슴에 품고 부푼 가슴을 안고 교회 가잖아요. 백날 가야 돈만 날리지.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내 자신이 문제가 있음을 알 때 그 속에서 ‘나는 문제 있다.’ ‘문제없어.’가 아닙니다. 문제 있어요. 문제 있는데 이 문제 있는 걸 딛고 나오는 주님의 소식, 이 문제 있는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요.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갈 사람은 오직 두 사람밖에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주님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보기는 어느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주님 있는데 뭐가 문제냐?’가 극히 모범해답처럼 보이죠. 그런데 막상 우리보고 정탐해보라 하세요. 그 모범 해답 어디갔는지 다 날라 가 버리고 울고 짜고 난리 나요. 애들 사탕 안 주면 혼자서 발광하고 뒹글잖아요. 꼭 그 식이예요. 우리가. 새벽기도 하다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막 뒹굴어버리죠. 그러면 목사가 엘리 제사장도 아닌데 ‘왜 술 취했습니까?‘ 이러고. 진짜 답답하고 컬컬한 심령이 돼서 가슴 두드리면서 달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 그거 안 주십니다. 왜 안 주시느냐 하면 내가 원하기 때문에 안 줘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타인들이 복이라고 간주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허상이기 때문에 못 줍니다. 줄 수가 없어요.
주께서 같이 따라와요. 주께서 이곳에 가게 될 때 같이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따라가는데 가나안 땅 만나기 전에 누굴 만납니까? 가나안 땅 그리워하다가 요단강에 빠지죠. 요단강에 들어갈 때 어떻게 합니까? 전처럼 물을 갈라놓고 보람찬 하고 이렇게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갑자기 홍수가 넘쳐서 물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죽으란 이야깁니다. 제사장이 언약궤 메고 죽으러 갑니다. 빠져죽으려고 강물에 들어가니까 비로소 그때 강물이 열리네요. 우리 같으면 진작 열어줄 걸. 미리 열어줬으면 우리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는 않지, 이렇게 약 올릴 수가 있습니까?
하여튼 인생사는 자체가 철렁, 철렁 매일같이 철렁, 철렁 이예요. 일기 쓰면 오늘 맑음, 철렁, 철렁, 철렁, 오늘도 철렁거리면서 잠잤다. 다음 날 오늘도 비 옴, 철렁, 아침부터 철렁. 특히 주식 하는 사람들, 철렁.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열어놓고 못 가게 합니까? 그것이 항상 이 주체가 주의 일에 건방지게 개입하기 때문에 그걸 빼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주체가 개입할 때는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 채로 개입을 해야 되지, ‘나도 보탰습니다. 나도 도움 줬습니다. 나도 미리 알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게 되면 전부 다 끄집어내버립니다. 그런 식으로는 거듭남이 아니고 이건 죽는 척 하면서 다시 살려는 그런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는 척하는 것하고 죽는 거와 달라요.
진짜 죽는 것은 언약궤와 함께 죽을 때 그때 진짜 죽는 거거든요. 제사장이 죽을 요량하고 언약궤 함께 갔을 때 비로소 강이 열리죠. 그래도 고마운 줄 몰랐을 거예요. ‘에이구, 진작 해주지.’ 짜증내면서 요단강 건너갔을 거예요. 그 다음에 여리고성도 마찬가지고, 거대한 성벽, 무슨 수로 이깁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돌라고 하니까 도니까 무너진 거예요.
매사가 약속의 땅은 바로 코앞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 그들과 함께 있는 분이 약속의 땅을 만들어내시는데 자꾸 주님께서 만들어내시는 걸 가지고 우리는 자꾸 자기가 뭘 안다고 내가 내 꿈에 맞는 천국을 내가 만들어내려고 자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게 이게 천하에 말썽꾸러기에요.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너 같은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너는 너밖에 모르고 죄인밖에 모른다. 네가 구원받은 것은 네가 잘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해서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느긋하게 보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미리 택한 백성 건져 놓고 자기는 구원할 자를 구원해야 될 근거를 아버지 뜻에 따라서 십자가에 장렬하게 돌아가시기 위해서 19장에 보면 “다 이루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요. 제자들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다 고기 잡으러 갔어요. 나중에 성령이 왔고 다시 돌이켜 보니까 세상에 어느 출생부터 어느 한 대목에도 주님의 손길이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건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아버지를 우리에게 나타내서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가 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죠. 그때는 내 아버지가 누구 아버지? 너희 아버지. 요한복음 19장에 부활되고 난 뒤에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고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요한복음 17장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서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걸 백날 그렇게 이야기해도 당체 못 알아먹어요.
나중에 부활하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그걸 알게 되는 거예요. 계속 서론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상세히 못 들어가고. 요한복음 2장 21절~22절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왜 뒤늦게, 그전에는 안 믿었던 모양이라. 이제 와서 믿은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 번 봅시다. 앞에 21절 모른다치고 19절을 예수님 하신 말씀을 우리가 현장에 있다고 칩시다.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제자들이 앉은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했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알아 못 듣는 이유를 그냥 모른다 하지 말고 따져봅시다. 46년이라 하는 것은 1년이 46번 지나가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흘 했잖아요. 사흘이라 하는 것은 1년보다 훨씬 짧은 숫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흘이라는 것은 해가 세 번 뜨는 거예요. 해가 지고 해가 지고 해가 지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사흘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게 아니에요. 46년 동안 지었다 했거든요. 같은 문장 이예요. 예수님께서 어떤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야기하노니.’ 해서 문장에서 46년이란 숫자 나오고 사흘이란 숫자가 나왔죠? 그러면 누가 들어도 46년과 사흘이라 하는 것은 같은 레벨에서 사용되는 그런 시간 개념이라고 누구나 인정하겠죠? 365일이 지나면 1년, 그것이 46번 반복되면 46년, 이거는 바보가 아닌 이상은 이거는 거기 앉아있는 제자들도 다 알아듣겠죠? 그 제자들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예수님 본인이 잘못됐죠.
46년, 사흘. 제자들이 어떻게 돼요? ‘얘들아, 너희들 착각하고 있네. 그 사흘은 그 사흘이 아니야.’하고 주님이 설명을 해줘야 되잖아요. 설명 있었습니까? 설명 없었죠. 설명을 왜 안 해주시는 겁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믿어야 비로소 알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미리 알아버리면 이건 회복이 돼 버려요. 이 고생 많은 세상에서 내가 고생 많이 했으니까 고생하기 전에 고생 없을 때를 기도하잖아요. 그걸 천국이라 생각하잖아요. 그게 뭐냐 인간이 깨달았다는 이성이 도입돼 버려요. 이성은 반드시 회복이 된다고요.
그러나 믿음은 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한 모든 것은 다 허상인 것을 까발리고 없애버려요.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고 맹탕 이예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건 내가 기대한 천국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이 계신 나라가 뭐가 된다? 천국에 그 제자들을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는 출발부터가 아무것도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다지고 또 다져야 되는 거예요.
사흘, 666, 144000, 전부 다 그런 숫자입니다. 믿지 않으면, 성령 안 받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으면 해석이 뭡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 예수님 하신 일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거에요. 그래도 144000, 666, 어쩌고, 베드로가 666 해설집을 따로 낸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46장이라고 따로 만든 게 없어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죠. 666이고 144000은 언약에 종속된다고.
아까 한 거 다시 해봅시다. 하여튼 백날 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는 게 문제라. 안돌아서면 되는데. 자, 성경 구약 있고 신약 있습니다. 성경 해석 어떻게 하라 했죠? 여기 뭐가 있다 했습니까? 크레인 돌고 오라 했죠? 방금 이거 잊어버렸죠? 주님이 하신 일을, 해석을 하면 다시 크레인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666이 뭡니까? 주께서 하신 일, 어떤 일?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를 숫자로 표현한 거, 이러면 되잖아요. 이걸 제가 천지일보에 이런 글을 썼잖아요. 666이 뭐냐?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숫자를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뭐 네로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아이쿠 네로 죽어버리면 666 죽어버렸네. 그럼.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의 모든 숫자나 개념은 1 대 1 대응이 됩니다. 이 컵이 있다는 말은 요렇게 컵 모양이 있고 그걸 컵으로 본 거예요. 1 대 1 대응이 되지만, 성경의 용어는 1 대 1 대응이 없어요. 이스라엘이 숫자가 많으니까 아들들이라 해야 되는데 아들로 돼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결국 아들이 아니라는 말 이예요. 아들은 누구다? 예수님이고,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이스라엘 이예요. 동행자가 있어야 돼요. 여행 가도 누가 있어야 돼요? 가이드가 있어야 되듯이. 우리가 어디를 갑니까? 가이드가 없이 왜 가요?
아버지께 간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는데. 아버지 하나님은 거짓말인데. 아버지는 누구만 압니까? 예수님만 알아요. 어떻게? 아버지 품속에서 나온 독생자가 뒤에 뭘 달고? 탱탱 용수철을 달고 그냥 단독으로 빈손으로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아버지가 맡긴 일을 가득 담고 왔어요. 그 아버지가 한 일 중에 뭐냐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다니까요.
하나님께 난 자라는 것은 먼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있어요. 예정된 자와 잠깐 있을 우리 안개하고 바꿔치기 하는데 그냥 바꿔치기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집어넣어서 바꿔치기 한다니까요. 아!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자는 마귀가 우리를 묶고 있기 때문에 우리 어두움은 빛이 와도 빛인 줄 몰라요. 일반적인 어두움이 아니라니까요. 모든 어두움은 빛의 결핍으로 오기 때문에 빛이 오면 ‘아유, 이제 오십니까?’ 하고 다 반겨요. 그러나 이 어두움은 당체 무슨 어두움인지 빛이 와도 못 알아보는 어두움이라니까요. 그런데 어두움에서 우리가 자진해서 벗어나요? 못 벗어나요.
조금 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어 간 거예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에게 네가 무엇이냐, 무어냐, 라고 물었어요. 여기 설명이 어렵지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나에게 굴복하세요. 이 뜻 이예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은 내가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평소에 내가 정립된 그 구조 안에서 당신은 답변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뜻 이예요. 문장이 어렵죠?
예를 들어서 집사님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면 ‘저 남자인데요.’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병원에서 뭐하는 분입니까? 남자 간호사입니까? 의사입니까?’ 묻는다고요. 아니면 ‘관리하는 분입니까?’ 묻는다고요. ‘내가 궁금한 것을 당신은 답변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고 묻는 거예요. 내가 시스템 속에서 당신은 나한테 굴복, 일단 들어오셔서 내 구조 안에서 나는 이런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셔야 됩니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세례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세례요한은 빛에 속했잖아요. 어두움이 요구하는 구조에 주눅 들거나 동조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voice, 소리라 합니다. 이게 얼마나 동문서답하는 거예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I am voice.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음파에요? 파동인가? 당신이 말하는 나는 누구라 하는 자기 정체성에는 나는 해당이 안 됩니다. 포착이 안 될 존재입니다. 왜냐 하면 나는 다른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벌써 빛과 어두움을 완전히 날카롭게 갈라놓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그분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정말 날 알고 싶으면 나한테 직접 묻지 말고 그분을 경유해서 나에게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는 그분의 소리라 할 때 그분이 나한테 중요하듯이 여러분한테도 그분이 더 중요할 겁니다. 나는 그분의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사야에 예언된 말씀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말씀, 말씀 우기지만 말씀에 속한 나를 못 알아본다는 것은 당신은 말씀 밖에 놀고 있는 마귀에 속한 자들, 어두움에 속한 자들입니다.
말씀을 백날 지키고 말씀을 순종해도 말씀 밖에서 평생토록 지내고 있는 사람들, 감히 누굴? 자기는 자기를 안다는 거예요. 우리는 제사장이고 우리는 레위 인들이고, 그거? 너희끼리나 통해, 너희들끼리만 통하지, 독생 하신 하나님 품속에서 나타난 하나님한테는 그게 전혀 먹힐 리가 없죠.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는 뭘 확인해야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은 절대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이게 막혀 있고 알 길이 없다는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빛과 어두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이미 조치를 다한 수습을 다한 그 일에 의하여 빛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할 말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소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