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6-라캉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이러한 상상적 관계, 상징적 관계, 주체형성 관계를 라캉이 친절하게도 한 그림으로 보여줬습니다. 사후적인 자아이상표. 자아이상은 처음에 상상적 관계가 이상적 관계라 했지요. 이상적 자아에 대해서 평생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소년들의 꿈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라. 이게 전부 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 자아에요. 상상적 관계에서 자아가 나오기 위한 관계라고 하면, 이것 말고 또 있는가?
주체적 관계에 있어서 주체를 분열시키는 거기에서는 내 이상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걸 가만두지 않고 나로 하여금 매력에 빠지게 만들고 그것에 주눅 들게 만드는 그것을 자아이상.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자아, 이상에 대해서 항상 결핍을 느끼는 자아. 이상은 확정돼있는데 자아는 계속 미치지 못하니까 이상에 맞는 자아를 주체로 바꾸어서 이상과 주체가 합치된다고 임시적으로 우기는 그때 등장하는 것이 자아가 아니고 주체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상징적 관계에서.
상징적 관계란 말 자체가 헛방이네, 허구네, 그냥 폼만 잡았다는 뉘앙스를 주지요. 상상이나 상징이나 둘 다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는 모든 현상 움직임을 다 아울러야 진리가 되죠.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는 게 무슨 진리가 되겠어요? 그래서 자아이상으로 추구하는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이상으로 돌아오는 긴긴 과정을 표로 라캉이 만들어서 제시했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제일 먼저 $인간은 △거시기, 이드, 아무것도 아닌 것, 아직까지 육신 덩어리기 때문에 자아고 주체고 없어요. 그런데 사후적이니까 나중에 이게 분열된 주체로 자리가 이동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돼요.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타자, s는 사인, 신호, 기호가 돼서 moi가 되는데 모이는 자아입니다. 이게 I(A)이상화된 대타자로 돌아옵니다. 이게 (S)주체인 것처럼 되죠. 뭐든지 거시기가 엄마를 만나면 엄마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나인 것처럼 느끼는.
라캉은 층을 이층으로 나눴어요. 일층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의식의 세계입니다. 일층에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나가면, 기표, 기표는 환유적인 거예요. 환유는 적당한 후보감이 방향이 이렇게 해서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날아가게 되면 여기가 결합이 돼요. 그러면 A대타자의 요구가 되면서 s(A)주체가 대타자를 받아들여요. 이걸 고정점, 날아가는 개념을 잡아서 내려오게 돼요. 처음에 타자의 기호, 상상적 관계에서 어떤 타자를 상상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상징적 관계가 돼요. 내려오게 되면 자아이상, 남들이 원하는 대로 합치됐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 자리가 내 자리에요. 그러면 사후적으로 주체인데 항상 이게 주어지고 또 주어지니까 분열된 주체.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위에는 이층인데 무의식계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인간의 d요구가 주어져요. 요구를 누가 원하느냐? 이게 $◇a환상입니다. 주체가 깨어지면 분열되면 미흡함이 나오는데 그걸 오브제a, 이런 어려운 말을 쓰기 싫어요. 설명해야 되니까. 그냥 알 수 없는 타인의 것인데 타인의 욕망. 소문자a와 ◊마름모를 일치 또는 합치된다고 여기는 환상이에요.
분열된 것이 내가 미흡한 것, 내가 새로운 요구에, 아까 이야기했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할 때 그걸 해야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라고 인정받지, 라고 여길 때 분열된 주체가 마치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고 싶은 그런 욕구가 생겨요. 환상이에요. 우기는 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 소문자d, 타인의 요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d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D, 요구긴 요구인데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이 대타자 자체가 분열돼있어요. 대타자가 갖고 있던 욕망이 늘 일정하지 않아요. 이걸 요구하다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다가, 또 다른 걸 요구하다가, 온유와 화평을 요구하다가 자꾸 새로운 걸 요구하니까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욕망해야 됩니까? 대타자의 욕망이 항상 일정하지 않고 갈라져있어요. 나라는 주체가 합치되기 위해서 타인의 욕망에 요구되기를 원하면서 요구하지만 계속 묻고 요구하고, 묻고 요구하고. 이 단계가 무의식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요구하면서 환상을 요구하는데 상징적 관계에서 잘라져요. 그래서는 안 돼. 이 정도하면 성도 맞습니까? 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돼. 네가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하라. 이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래서 네가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이젠 어둠에 속하지 말고. 요구하게 되면 나의 상상적 관계가 주체가 분열됩니다. 이걸 거세라고 해요. 누구한테? 남한테 내가 사모하는 그분에게 거세당해요. 거세는 잘리는 거예요. 잘리는 없다는 뉘앙스라기보다는 계속해서 미흡하기에 보충을 요구하는 입장에 있어요.
요구하기 위해서 대타자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것을 욕망하게 돼있어요. 요구를 하면서 나의 환상과 합치되고 싶지만 그 심정으로 진정 원하는 게 뭐냐고 자꾸 묻게 되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것처럼 묻게 되는 거예요. 묻고 가져오는데 또 여기서 그것이 온전치 않고 대타자의 분열된 것이 오게 돼요.
거세는 어디서 나왔는가?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없는 것과 아빠한테 있는 것을 본다는 겁니다. 자기한테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 그건 뭐겠어요? 바로 성기죠. 그래서 이걸 남근의 세계, 상징적 세계. 남근을 고치면 남성, 남성의 세계는 항상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거예요.
이걸 대표기표라고 하는데 내용은 없고 내용이 채워져야 되기 때문에 후보감들이 와요. 후보감들이 계속 주어지는 것을 언어에서 환유라 하고 그 중에 하나 뽑는 것을 은유고. 환유, 은유는 다 비유에 관한 용어지요. 비유란 말은 실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념을 그걸 채워도 주체는 실체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집요하다. 나는 사라진다. 계속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죽음의 힘에 의해서 사라져가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에 죽을 때 라캉은, 나는 사라진다고 하지요.
이 남근의 세계로 인하여 뭘 봤느냐 하면, 처음에는 저항해요. 저항하면서도 나중에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그 미흡한 것을 채워야 되는 거예요. 채우기 위해서 희열을 추구하게 됩니다. 희열을 주이상스인데 처음엔 저항지만, 저항해도 저항해 나갈 수 없는 게 내 자체가 남이 만들기 때문에 아무리 혼자 절대적이라 해도 또 남들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들을 수밖에 없는 속성을 내뿜게 돼있어요. 그걸 남의 것을 오브제a, 어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합치되려고 하는 욕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돼요. 우리의 속성 자체가.
그러면서도 뭔가 되려고 하면, 남근의 절대적인 것에 의해서 거세당하니까 그건 아니야. 그게 단 줄 알아? 그게 성화의 다가 아니야. 그게 경건의 다가 아니야. 그게 신앙인의 다가 아니야. 너는 그 단어에 합치된 그 모습이 그게 다가 아니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할 때 누가 요구해요? 남들이 요구하기 전부터 내가 요구한다니까요. 끊임없이 나는 멈출 수 없고 멈출 수 없고 불안하니까. 처음부터 정신병자니까. 만족함이 없고요. 어떤 만족함의 대상이 있는 게 아니고. 대상이 있으면 그걸 가지면 그만이죠. 만족할 대상이 없는 거예요. 그걸 순수욕망이라 합니다. $◇D
순수욕망은 대상이 없어요. 그냥 대상이 새롭게 등장해서 나한테 지시할 때 당신이 이걸 요구하는군요. 할 뿐인데 가지고 오고 난 뒤에는 이게 다가 아니구나. 대타자가 갈라졌으니까. 나나 너나 다 분열된 거예요. 주체가 자아이상을 꾸미지만 상상계를 계속 시도하지만 상징계를 거쳐서 무의식을 거치면 자아이상도 늘 교체돼야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주인공 된 s자체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러한 저항에 대해서 예를 들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예수님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상상하죠. 그래서 우리 중에 천국 가면 누가 제일 높으냐고 했지요. 그 상상은 예수님의 목소리 중에서 저것 적당해,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나라는 거시기는 주님이 원하는 합치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갈수록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을 해요. 내가 고난 받아서 죽어야 된다고 하니까 죽으면 안 되지요. 죽을 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은 죽는다 하니까, 나는? 예수님 생각 안 해요.
가룟 유다가 자살한 이유가 뭡니까? 그동안 내가 구축한 나의 양심은 어떻게 돼요? 누가 나를 괴롭히지요? 내가 만든 분열된 주체가 나를 괴롭히잖아요. 그러니까 s가 주체가 상상한 나를 힘들게 하잖아요. 힘들 게 할 때 나의 조치는 그 힘든 나를 없애면 힘들지 않겠지요. 그래서 자살하잖아요. 남들이 귀찮아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남들한테 귀 기울이는 그런 내가 미워. 도대체 내가 왜 이런지 몰라. 라캉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이게 환유적 관계에요. 골라잡을 환유가 너무 많아요. 그중에 하나를 선택했지만 선택해봐야 또 분열되니까.
나훈아 노래가 적당하네. 도대체 내가 왜 이런지 몰라. 힘들면 어떻게 돼요? 내가 나한테 조치를 해야 되는데 내 육신을 죽여 버리죠. 죽이면 내가 편하다고 했는데 편한 감정을 그동안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남이 그렇게 만들어놨지요. 그러면 남한테 인정 못 받는 내가 있으니까 남한테 책임을 돌리면서 나는 고이고이 거룩하게 목매 자살하면 되지요. 그럼 누가 나를 죽인 거예요? 남이 나를 죽인 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선 사탄이 되죠. 악마가 우리의 강력한 외부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다뤄지면서 악마는 우리를 절대자로 만들었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네가 신이야. 너는 완벽해. 너는 완전한 행복과 사랑을 받아 누릴 그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다고 심어줬는데 갑자기 예수님 들이닥쳐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니까 거기에 맞춰야 천국 가니까 부단히 노력하지요.
이케요, 저케요? 이 정도하면 됩니까, 라고 스스로 순간순간 그걸 자부하고 싶지요. 만약에 그걸 안 지키면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번 주에 계약 깨지고 저주받고, 폭행당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마린시티에 갑자기 물이 차고. 왜 망하면 안 됩니까? 그것은 망하지 말라 어릴 때부터 부모가 세뇌시켜서 그래요. 너는 죽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죽어선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평생을 무거운 짐 진 것처럼 살아왔는데 이제는 더는 못 견뎌서 죽는 거예요.
부모님전상서, 죽을 때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아버지 이름으로. 아버지 이름의 남성의 세계, 남근의 세계에요. 아버지 보소서. 저는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산 적이 없어요. 자기 이름을 깨보면 아버지 이름이에요. 아버지는 뭔가 없는 걸 가졌어요. 그건 남자는 생식기가 있고 여자는 없는 게 있어요. 그걸 결핍으로 본 거예요. 미흡한 걸로 보고 있는 것은 정상적으로 제대로 갖췄다고 본 겁니다.
남성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절대자로 구축이 되지요. 그 절대자의 내용이 외부에서 주어지고 확정된 게 아니니까 그저 아버지처럼 모든 걸 정상적으로 갖추고 싶다는 게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생식기 달렸다고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남성다움, 씩씩함,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버티는 것, 이게 남자한테는 계속 강요된 겁니다. 그리고 여자는 없는 척을 해야 돼요. 여자는 고분고분해야 되고, 우아해야 되고, 예뻐야 돼. 남성한테 잘 보여야 팔자 고쳐. 네가 수학, 영어 공부해야 남편의 얼굴이 바뀐다. 여고3학년 급훈에 나온다는.
여자는 남편이 있음으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은 남자만 있지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지 여성은 애초에 없는 거예요. 남자에 예속돼있는 거예요. 꼭 창세기 3장에서 내린 하나님의 저주를 이야기한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항상 여자의 자리는 자인하는 자리거든요. 여자는 남자한테 인정받을 때만 여자가 되지 여자가 스스로 인정하는 그것은 남성의 세계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자한테 인정받을 때만 여자가 되는 거예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의 뼈라 할 때만 남자가 돼요. 라캉이 얼마나 기독교적인지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저항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베드로가 위로 올라갑니다. 베드로의 저항이 바로 배신이죠. 베드로가 배신할 때 어떤 힘을 느꼈습니까? 현재 유대인의 권력에서 나는 나답게 그들의 요구하는 주체로 형성돼 왔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따라다닌 것은 결국 예수님에 맞춘 게 아니고 기존에 형성된 주체, 유대사회에서 너는 나중에 천국 가겠네, 라고 그들마저 인정해주는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필요했던 것이 예수였는데 예수가 자기 개념에 미끄러진다는 말을 해요.
합치되지 않으니까 기존의 주체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 예수를 내쳐야 되지요. 내침으로써 기존의 세계와 이상적인 자아 모습은 예수님 보시기에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고 기존에 그 당시 유대사회가 요구하는 내가 될 때 가장 이상적이라는 티를 낸 겁니다. 그걸 완전히 표시를 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와서 다른 점이 뭡니까? 사도 바울은 배신한 베드로부터 출발하지요. 마지막 사도니까. 열두 제자들 사이에서 뿔처럼 튀어나온 게 사도 바울이에요. 왜냐하면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어느 민족을 위해서? 이미 옛 언약,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사도라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지요. 이방인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 유대사회가 이미 하늘나라 백성이 아님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등장해야 할 사도가 사도 바울입니다.
열두 제자 대표가 베드로라면 베드로는 할례 행한 자와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서. 그런데 그걸 누가 지적합니까? 이미 율법시대가 아닌데 왜 당신은 그걸 빌미 삼아서 이방인과 함께 하면 안 된다고 하느냐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 지적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총체적인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마지막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 안에서 십자가의 장벽은 해소가 되는 겁니다. 이젠 유대인도 없고 십자가란 새로운 새 언약의 기준에 의해서 성도가 되는 것을 보여주죠.
이게 마지막 남은 게 있어요. 이렇게 무의식 세계에서 욕구와 욕망의 세계가 상징세계에 영향을 입힙니다. 상징세계가 고정된 게 아니고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주어지는데 그 세계를 담론이라고 해요. 담론 중에서 하나만 보겠습니다. 8페이지에 이런 그림 나오는데 S1 -> S2 이건 주체를 말하는 게 아니고 기표를 말합니다. 주인기표. 주인기표는 내용이 없다고 했지요. 이건 주체를 분열시키면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욕망인데 무조건 끌리는 욕망, 소문자a에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분열된 주체인데 이게 담론의 기본이에요. 담론은 상징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언어들의 바다. 언어의 바다에서 뭐가 생기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 네 가지가 생기는 거예요.
담론이란 언어의 풀장이라고 보면 돼요. 이건 환유의 세계지요. 계속 후보감이 되는 개념이 나와요. 개인은 그때그때마다 자기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면 되고, 선택은 은유라 했습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실체가 없고 꾸미는 위장한 가면을 쓰고 있는, 가면 벗기면 가면 또 나오니까 가면덩어리가 본인이라고 보면 돼요.
이 자리가 중요해요. 주인기표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후보감을 계속 찾고 있어요. S2, S3, S4 계속 있겠지요. 이게 바로 (S1)행위자 자리에요. (S2)타인의 자리, 밑에 이 자리를 (a)생산된 자리, 그 다음에 ($)진리/진실의 자리.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간주할 때 분열된 주체가 나 저런 사람 맞지요, 하는 순간 또 욕망에 의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이게 네 자리가 될 걸? 그 타인의 자리.
예를 들어서 기타리스트가 될까 하다가 골프 배워보겠다. 처음에 나는 기타리스트 될까 하다가 미끄러지니까 이게 안 미끄러질 수 있겠어요? 나는 저것 안 먹고 싶다고 그걸 안 돌아봅니까? 그건 먹고 싶다는 말과 똑같은 말 아닙니까. 엄마, 나 저것 안 가져도 돼, 라는 말은 사달라는 말이잖아요.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라캉의 미끄러진다는 말은 본인이 어쩔 수 없이 끌러간다는 거예요. 30대에 좋아하는 것과 40대에 좋아하는 것이 다르죠. 미끄러진 거예요. 내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후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선택했다고 합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게 나오기 때문에 환유, 나와 합치될 새로운 후보감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삼성이 투수들 도박하고 다 나가고 난 뒤에 삼성팬들이 어디로 가겠어요? 엘지로 가든지 기아로 가겠지요. 안 그러면 부산으로? 몇 년째 가을야구 못하니까 팬 많이 놓쳤습니다. 이게 미끄러지는 거예요. 선택한 게 아니라니까. 고향이 부산이라 자이언트 응원했는데 성적이 워낙 나쁘니까 삼성으로 갈까? 삼성은 도박으로 시끄럽고 신생팀은 그렇고 오래된 두산이 괜찮네. 두산은 팬이 너무 많아. 기아는? 전라도라서 뭐 어떻고.
왜 타인의 자리에 가느냐 하면 우리 태생이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갈 수밖에 없어요. 해서 이거라고 잡았는데 거기서 알 수 없는 욕망이 생산되는 거예요. 생산된 것을 어디로 가져온다? 나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을 또 욕망할 수 없는 이게 바로 분열된 주체, 나를 나 되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진리라는. 이게 바로 가장 기본이 되는 담론인데 주인담론이에요.
그렇다면 그것 말고 뭐가 있습니까? 8페이지에 나와 있지요. 대학담론은 다른 말로 과학담론, 물리학담론, 생물학담론, 수학담론이라 하면 돼요. S2는 누구나 인정하는 방정식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인데 이게 대표기표에요. 이건 누구도 손대면 안 돼요. 너무나 진리라서. 로켓 올라갈 때 전부 그 방정식으로 목성으로 보내고 그래요.
이것이 진짜 진리에 합당한, 올라가는 걸 저항성이라고 하는데, S1이 방정식을 세워놓고 확정되었다고 여겼는데 점차로 알 수 없는 새로운 과학체계를 만들 거예요. 예를 들어서 상대성원리입니다. 세상은 절대 시간, 절대 공간으로 고정돼있다고 했는데 상대성원리는 중력에 의해서 질량이 공간이 휘어지고 모든 시공간이 새롭게 조성된다고 보는 거예요. 상대성원리는 처음에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생산된 게 뭐냐? 뭐지? 과학이 진리라는 게 뭐야? 라고 다시 주체가 성립될 때 이걸 대학담론. 과학이 이걸로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추구하는 거예요.
그 옆에 것 봅시다. 생산된 자리에 알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오브제a, 그 다음에 주체가 있고, 그 다음에 S1 밑에 S2가 있어요. 이게 히스테리담론이죠. 자꾸 자기가 나폴레옹이래. 주체가 뭐라고 하는데 사실은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우기는 거예요. 자기가 전생의 왕이고 나는 왕비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이 점차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사실은 주인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새로운 S2로 생산자, 내가 나폴레옹이라는 주인기표를 갖고 있을 때 타인과 합치되었다고 여길 때 너의 병 고침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달을 때 그런 것이 생산될 때 이 병은 치료된다. 이게 히스테리담론이에요.
마지막 하나 봅시다. 분석가담론이에요. 환자를 두고 분석하는 정신과의사의 담론이에요. 시작은 a부터 해요. 분석가는 환자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요. 혹시 꿈 이야기해보세요. 뭐가 불만입니까? 팔짱 끼고 듣는 입장이에요. 행위자를 보면서 타자가 누구냐 하면, 환자인 분열된 주체가 타자가 되죠. 생산 되는 게 뭐냐? 당신은 이런 인간이네요, 라고 이야기해주면, 진리가 뭐냐? 사실은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은 순회하는 상징질서에 포함이 될 때 병이 낫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정신분석의 목적이 뭐냐 하면, 환자니까 나는 누가 될 수 있고 이것도 될 수 있지만 상징세계에서 늘 떠돌아다녀야 될 그게 자기 주체라고 아는 그것을 치료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환자고, 주께서 구원되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면, 이건 구원받은 거고.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 세상은 남성의 세계라 했잖아요. 현실은 상징세계. 인간의 욕망과 욕망의 풀장. 그럼 이 세상이 그게 전부냐? 전부가 아니에요. 남성의 세계 특징이 바로 남근이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의 이름이죠. 상징적 세계는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있어요. 이 질서가 완벽하게 진리겠습니까? 완벽하다면 움직이지 않아야 되는데 요동하잖아요. 그 원인이 뭐냐? 남성의 세계만 있는 게 아니고 여성적 세계가 있는 거예요. 남성의 세계가 닫힌 집합세계라면 여성의 세계는 열린 집합세계에요.
여기서 라캉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한 세미나에서 이런 표현을 했어요. 일종에 구원을 제시한 겁니다. 여성의 세계는 없는 거예요. 여성은 없어요. 없는 게 있는 걸 살려냅니다. 꼭 뭘 봅니까? 잉태되지 못한 자가 성령의 세계인 것처럼. 남자 없이 아기를 가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여자의 후손이 남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도표를 그려놓고 둘로 나눠요. 여성의 세계와 남성의 세계로 나눕니다. 우선 남성의 세계부터 보면, 남성의 세계는 전체를 남근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쉽게 말해서 신의 이름으로 통치가 돼야 되기 때문에 질서의 세계에요. 남근에 속한 남성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x, ∅x라 해서 이건 남성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예외 없이 모두 다, 라고 이야기할 때는 이 세상은 모두 다 남근의 세계에 속한다. 누가? 이걸 A를 뒤집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 다 남성의 세계에 포함돼있다. 그런데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뭐냐? 이걸 전칭, 특칭. 특정한 예외가 있는데 파이의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게 한 사람 존재한다. 존재는 E인데 E를 거꾸로 써요. ∃x 이게 남성의 세계에요.
남근의 세계에 예외적인 존재가 하나 존재한다. 누구겠습니까? 신이고, 가정에서는 아버지고, 교회에서 목사고, 나라에서는 대통령이겠죠. 대통령이라 하면 안 돼요. 법을 초월하니까 왕이겠죠. 그래야 질서가 잡혀요. 왕은 간음해도 괜찮아요. 간음하지 말라가 있어야 간음함이 성립되니까. 하나님이 짝 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는 경우에만 그 법에 질서가 잡힙니다. 이게 남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걸 여성의 세계가 보고 있어요. 여성의 세계는 남근을 유발하고 그리고 여기 있는 분열된 주체는 여성을 사모하지요. 너희들 신한테 매여 봐라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고 분열된 주체는 여성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세계는 말로 표현되지 않으니까 무의식적 구조에서 깨어진 분열된 대타자를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여성의 세계를 양화사라 하는데 ∅x파이에 속하지 않는 자는 예외 없이 다 속한다. 모든 세계는 다 남근에 속해있다. 아까와 같은 말이죠. 남근에 속하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을 통해서 그걸 이야기한다고. 모든 여성은 남성에 속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남근에 속하지 않는 모두 다 남근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해요. 모든 주체가 남근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속한다고 해놓고 아니라고 합니다. 이건 역설이고 모순되지요. 그러니까 여성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거예요. 상징적 세계에서 언어는 항상 어떤 질서 잡기 위해서 통용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말이 서로 통해야 하지 통하지 않는 말을 왜 합니까. 그런데 말을 했는데 이상하게 현 질서를 유지하는 용도로 말하지 않는 경우, 그건 바로 여자의 후손, 여자의 세계지요. 그게 바로 복음의 세계지요.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보지 못한다고 하니 소경이 아니다.
바로 라캉은 기독교적이에요. 현상에 있는 우리의 육체의 욕망과 모든 걸 통해서 이 세상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속합니다. 그 세계에서 나는 집요하게 내 자신이 누군가로 확정에 의해서 살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된다? 나는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세상에 대해서 라캉이 주장하는 걸 보았습니다. 이 세상을 언어적으로 문법적으로 따진다고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유로움, 성령의 자유로움으로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사랑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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