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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강의-라캉 1610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5. 11:20
2016-10-11 16:10:54조회 : 369         
자크 라캉 16101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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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6-라캉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라캉입니다. 1901에 태어나서 1981에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남긴 말이, [나는 집요하다. 나는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했어요. 그 말 자체가 라캉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라캉은 ‘나’에 대해서 연구한 거예요. 에고(자아) 또는 주체로 돼있고, 주체는 자체 내부로 분열된 주체가 되는데 나는 사라지고 있다. 이것부터 먼저 생각한다면, 

그전까지 철학은 죽음을 내 육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봤거든요. 육체가 사라지지만 나는 불멸하다고 하겠지요. 라캉은 그걸 공격하는 겁니다. 육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나’가 사라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육체의 수준이면 생물학적 수준이죠. 거기는 주체도 없고 나도 없는 상태, 원형적인 생물적인 육체 상태. 이걸 욕구라 하고 같은 말로 충동이라고 하는데 충동에 욕구에 들어가면 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분열적 주체가 되게 되면, 존재가 사라지고 의미만 남는 거죠. 이 의미가 등장하면 존재는 사라지고, 존재가 등장하게 되면 의미는 사라지고, 서로 대립관계에 있다고 라캉은 이야기했어요. 욕구충동을 느낄 때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는데 첫 번째 장벽이 등장합니다. 나는 충동이 있다고 안 돼요. 왜냐하면 충동이 있다고 할 때 충동을 바라보는 나를 따로 상정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아직도 충동에 제대로 못 들어간 겁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나 자신이 없어져버리면 욕구충동만 남으면, 결국 이것은 희열과 관련되겠지요. 어느 정도 희열적이냐 하면, 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것을 언어적/문법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동사가 되는 겁니다. 대명사나 명사가 사라지고 동사만 되는. 동사만 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을 볼 때 운동으로 봤거든요.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했다는 운동적 관점에서 봤잖아요. 운동이니까 동사, 동사는 움직임이고 사건에 불과한 거죠. 그 뒤에 인간이 명사나 대명사를 붙이면 여기서 주체가 나오고 자아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육신이 있다는 말 자체도 궁극적인 원천적인 게 아니죠. 항상 내가 등장하고 내가 어떻다, 내가 이런 존재라고 등장하면, 사실은 라캉 입장에서는 반칙이라는 거예요. 그건 전혀 세상적이 아니라고 본 겁니다. 

옥수수수염 차 있고 나는 여기 있는데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답변 안 하죠. 그냥 물체 아닙니까. 이럴 때 가장 순수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우리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데 진짜 자신의 모습은 자기 자아가 없어지고 주체가 없어질 때 진짜 모습이란 말이죠. 그러면 내가 없어지면, “너, 행복하니?”라는 말 자체도 의미 없지요. 의미도 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존재, 의미로 갈라지지만 나중에 존재, 의미 다 같이 날아가요.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항상 반칙을 범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 반칙이 나를 상정한다는 것. 내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는 태어났다고 합니까? 그냥 울지요. 운다는 게 뭐냐? 동사 아닙니까. 그냥 움직이잖아요. 

요한복음 3장 3절에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할 때 니고데모가 고민한 것은 본인이 다시 태어난다는 겁니다. 라캉의 입장에서는 이건 엉터리죠. 다시 태어날 때는 내가, 라는 것이 사라지고 난 뒤의 문제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아까워하거나 아쉬워하거나 집착을 보이거나 집요하게 달려들 주체가 이미 없어진 상태지요. 뭔가 귀한 걸 붙잡겠다는 말은 아직도 나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붙잡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라캉이 보기에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억지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라캉에 대한 철학은 한 마디로 억지에 대한 분석이에요. 억지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바로 나라는 것, 또는 주체가 있어서 모든 세상을 자기 입장에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인간은 태어나서 6~8개월 사이에 나라는 게 성립돼요. 그걸 거울단계라고 하는데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 자체가 문제의 씨앗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2차원이에요, 3차원이에요?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죠. 그런데 거울은 2차잖아요. 그러니까 곡해한 거예요.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자기가 착각한 겁니다. 아무리 3차원으로 보일지라도 평면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뒷모습을 모르니까. 

이것은 인간의 육체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속이지 않는 진짜 모습이 되려면 나를 포기해야 되는데 그래서 나라는 게 평생 동안 자기를 힘들게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부터 라캉의 철학은 시작하는 겁니다. 

라캉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을 정신병자로 봐요. 정도만 다를 뿐이지 모두 정신병자에요. 정신병자의 특징은 못 고칩니다. 신경증, 노이로제 같은 것은 고칠 수 있지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앎으로써 고치는데 인간은 타고난 것은 정신병자는 못 고쳐요. 정신병으로 단정 짓는 이유는 뭐냐? 라캉은 프로이트에 의해 알게 되죠. 인간은 죽음 본능이 있다고. 인간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기를 설정해놓고 자기가 내뿜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노력하면서 욕망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노리는 거예요. 

희열까지 노리는데 희열 자체가 인간을 점점 배고프게 만든단 말이죠. 희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등산하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 그 짜릿한 짧은 순간의 희열, 정상에 올라갔을 때라든지 자기 몸이 가벼워졌다는 짧은 한 순간을 위해서 부단하게 계속해서 집요하게 도전하고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뭘 원해서 시도하는지 대상이 없어요. 그냥 닥치는 대로 조금이라도 희열을 뽑아내게 되면 보람 같은 것을 느끼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사후적 관리, 사후적 조치라고 하는데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 의미입니다. 그전에는 의미가 없고. 이 의미는 자신의 자아 또는 자기 주체와 관련되면서 생기거든요. 오늘도 보람된 일을 했다. 누가? 내가. 이 세상에서 너는 어떤 존재인데? 그건 몰라도 돼. 알고 싶지도 않아. 내가 즐겁고 기쁘고 내 안에 희열 되고, 그러면 돼. 이거거든요. 

이게 얼마나 반칙이냔 말이죠. 나는 즐겁고 행복하고 기쁘다는 속에 별은 왜 있고, 달은 왜 있는지 의미가 들어가겠어요? 빠져있지요.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내가 행복한 것에 포함돼있어요? 배제돼있지요. 오면서 보도블록이 몇 개인지 빠져있지요. 보도블록이 존재하지요. 내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이 내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서 임의로 나는 선택하지요. 내가 먼저 있기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골라서 선택하니까 이게 진리일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내 주장, 내 욕구를 펼치니까 그건 진리가 아니지요. 

진리가 아니란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갑자가 테러를 당하고 폭행을 당해도 탓할 사람이 있다, 없다? 갑자기 해운대 마린시티에 홍수가 나도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원망할 대상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태풍이 의미 있으려면 내 희열을 갈아먹었잖아요. 나를 불안하게 했으니까.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후적으로 사람들은 거기에 의미를 두지요. 

그러면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불안감이 생겼으니까 이건 나의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사랑을 빼앗긴 거잖아요. 빼앗겼으면 누락됐잖아요. 그럼 가만있지 않고 그걸 보충해야 되겠지요. 보충하면서 의미가 생긴다니까. 지진이 왜 생겼느냐? 그 의미를 따진다고 보충이 돼요? 보충이 안 되죠. 보충이 안 될 때는 지진을 일으키는 적대세력을 반드시 만들어내야 되죠. 

라캉이 어렵기 때문에 기초가 돼야 돼요. 나의 의미를 위해서 누구 하나를 나의 원수, 적으로 설정해야 되는 겁니다. 라캉은 그걸 지목하는 거예요. 왜 경주에 사는 나는 지진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느냐고 묻는 거예요. 라캉이 경주시민들에게. 태풍의 피해 입은 울산에 태화종합시장 서점 아저씨나 그런 사람들에게 왜 화를 내느냐고 물으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 행복을 방해했잖아요. 라캉은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나왔는데? 

쉽게 말해서 네가 거기 존재하는 게 진리냐고 묻는 거예요. 당신이 만약에 내가 존재하는 게 진리라면 태풍이 일어나서 수십 년 했던 모든 재산이 날아갈지라도 진리라고 수용돼야 된다는 거예요. 진리는 하나니까. 그런데 왜 태풍이 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할 때 그 동안 나는 진리에 관심도 없으면서 평소에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사랑받아야 돼, 이걸 진리로 간주해 왔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태풍이 들이닥친 순간 그게 진리가 아님이 들통 났지요. 

그러면 태풍 맞은 사람이 적을 삼아야 되거든요. 내 것을 건드렸기 때문에 복수가 돼야 돼요. 복수 안 되면 정신병 걸리니까 안 그래도 정신병자지만, 정신병자 티를 내야 될 것 아닙니까. 울산시청을 복수하겠지요. 울산시청을 그렇게 했던 박근혜 대통령을 적으로 삼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물난리 났는데 전화 한 통 안 했던 친한 외사촌을 적으로 삼는 거예요. 올케. 

특히 적을 삼는 건 지젝에서 굉장히 강조해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항상 분풀이할 적들을 만들어내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 교회 가는 사람은 적을 누구로 삼겠습니까? 사탄, 악마, 마귀. 적, 내 원수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 나를 분석해본 적 있습니까? 내 성질이니까 묻지 마. 성질나는 걸 성질난다고 했을 뿐이야. 묻지 마. 그런 식으로 살아왔지 왜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시도 적이 없느냐 이 말이에요. 

9월 11일이 되면 미국시민들은 보편적인 적을 만들고 또 이슬람 종교에서도 적에 대한 복수의 날로 정하죠. 이 교회에 매일같이 나온다면  밑에 있는 핸드폰 가게가 적이 될 거예요. 소음을 유발하니까. 가끔 문 여니까 관계없지요. 이걸 점점 더 하게 되면 전 지구적으로 적이 있어야 되고. 적은 이라크, 북한, 이란, 테러집단이 되겠고. 

자기 인생에 적은 초등학교 때 교사부터 해서 명품 가방 떼먹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 첫사랑 여자라든지 모든 게 자기 적이 되겠지요. 그러면 적을 껌처럼 씹어대면서 험하고 험한 고단한 인생을 견뎌내는 겁니다. 적이 없으면 견딜 수 없어요. 이게 치료입니다. 정신병 치료가 그거에요. 만들어내고 찾아야 돼요.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원수 갚는 것은 주님한테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성경 보기를 왜 싫어하는지 알겠지요. 마태복음 6장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돼있지요. 그게 딜레마가 돼버리면 가시가 되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결국은 성경은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성경읽기, 성경 지키기, 교회 가기가 나의 울분을 해소 못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갈수록 교회 안 나오는 거예요. 성경도 안 보는 거예요. 뭔가 풀어주는 게 있어야 돼요. 내가 만든 적을 주께서 밟아주는 시원한 복수한다는 그런 현실을 진리라고 만들어줘야 갈 마음이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 갈 마음이 없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라캉은 인간을 전체를 정신병자로 본다. 정신병자로 있으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을 진리로 간주하고. 라캉이 보기에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그건 정신병을 숨기는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해야 될 자기 자신은 모르고 과학적으로 더 편리하고 더 맛있는 것, 더 고급스러운 것, 더 우수한 것 그것들을 백날 겹치고 겹쳐봐야 정신병 밖에 없어요. 하롱베이에 가봐다 정신병자들 다 모여 있어요. 거기 거주하는 사람부터 정신병자에요. 

이제부터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아란 게 어디서 나왔느냐는 거예요. 자아가 있고 타인이 있는 게 아니고, 타인부터 먼저 있고 자아는 나중에 생겼다는 겁니다. 이건 당연한 거잖아요. 아기가 태어날 때 원초적인 욕망 덩어리, 물질 덩어리기 때문에 그 자체는 자아가 없어요. 6~8개월 돼야 자아가 생기고, 16개월 돼야 거울단계가 완성되거든요. 통계적으로 보면. 

6페이지부터 먼저 봅시다. 제가 조잡하게 그린 그림 하나 나오지요. L도식이라 해요. λ(Lambda)라고 하는 헬라어가 이렇게 돼있거든요. λ를 영어로 하면 L이 돼요. 그래서 L도식이에요. **아래 그림 참조 

주체를 대문자S라 하고, 밑에 자아라고 쓰고, 여기 타자라고 쓰고, 여기는 대타자라고 쓰는데 타자로부터 먼저 자아가 생긴다. 이걸 상상적 관계라 하는데 쉬운 말로 이상화된 자아를 두고 이야기해요. 자아가 형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돼요. 누구를 모방해야 되고 누구로부터 그 내용이 채워져야 돼요. 아기가 태어나서 아빠보다 엄마가 가깝지요. 엄마가 여성이죠. 여성인 엄마로부터 너는 어떤 존재라고 계속해서 지시와 지적을 받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 혼자 아기를 낳은 게 아닙니다. 라캉 항상 정확하게 이야기해요. 아기는 엄마 혼자 낳는 법이 없어요. 그건 성모 마리아지. 반드시 아빠가 있지요. 아기가 엄마한테 지시를 받으면서 점점 철이 나면서 엄마는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요. 아빠로부터 지시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권력이 엄마보다 아빠가 더 세든지 심지어 아빠가 아무리 공처가라 할지라도 아빠의 존재와 아빠와 엄마의 관계까지 자아 속에 다 채워지려면 아빠, 엄마와 본인과의 차이점을 자아의 내용으로 채워지게 돼있어요. 

이걸 상상적 관계, 다른 말로 거울관계. 자기 자신이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은 엄마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때 엄마는 맴매하지요.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부를 때 좋아하면 엄마도 기뻐하니까 엄마가 젖을 더 주잖아. 그러면 아기의 육체가 배부르겠지요. 그러면 희열 상태에 들어가죠. 만족한 상태에 들어간단 말이죠. 

인간은 제일 밑층에 충동 또는 욕구, 욕구는 항상 사라지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욕구에 대해서 엄마는 요구하게 돼있습니다. 그 요구에 대해서 욕구를 자제해야 되고 어떤 때는 맴매하니까 정지시켜야 되고, 어떤 때는 지연시켜야 되고 양보해야 되고 그런 것으로 자아가 형성돼요. 이것은 프로이트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면 돼요.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바로 인정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욕구와 요구, 남의 요구에 대해서 욕구가 그것을 자제를 해야 되고 절제와 관리해야 될 때 그 차이에서 욕망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거울보고 알았던 그 자아는 그냥 머물지 못하고 대타자, 타자는 내가 상상한 자아를 할 때 처음에 형성된 타자인데, 이 대타자 안에 예속되죠. 엄마가 전부가 아니구나. 친척이 오게 되면 친척 말도 잘 들어야 되는구나. 나중에 사회 나가면 친구와 잘 사귀어야 되겠네. 본인의 범위가 점점 더 넓혀지겠지요. 이게 대타자에요. 

교회 가면 목사님 있고, 학교에는 선생님 있고. 이 대타자에 인정받아야 돼요. 인정받지 아니하면 처벌받으니까. 함부로 까불고 뒤에서 장난치면 매 맞잖아요. 대타자에 부합되는 인정받기 위한 새로운 자아를 구축하는데 이게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L도식에서 주체에서 점선으로 돼있지요. 방향은 주체 방향인데 점선으로 돼있지요. 여기서 여기까지가 실선이에요. 상상된 자아, 이상화된 나가 대타자의 욕망을 교란시킵니다. 합치되지 못하게 한다 이 말이에요.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쉽게 예를 듭시다.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누가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대타자에 속하죠. 그걸 지키고자 나선 이유가 뭡니까? 대타자의 말을 들을 때 진짜 나인 것처럼 느껴지는 진짜 주체, 주체는 육신적으로 나가 아니라 이제는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그게 주체에요. 그러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인정받으려면 그게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회사에서 과장이라면 사장 앞에서 과장답게 행동해야 되고, 교회 장로라면 장로답게 행동해야 되고, 개인적으론 하나님 앞에선 성도답게 행동해야 되고, 집에선 아버지답게 행동해야 된다. 이게 뭐예요? 대타자가 다 다르니까 거기에 따라 주체가 다 달라요. 주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없어요. 없다는 말은 계속해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한 시도 없을 때가 없었는데 진정한 주체는 어디 것도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벌써부터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란 것을 안 잊었겠지요. 

대타자가 요구하는 것을 기존에 “나는 그것 하기 싫은데, 돈을 좀 사랑하고 싶은데.” 이게 뭐냐 하면, 주체가 되려면 또 상상을 하거든요. 내가 신자 맞아. 하나님 말씀 맞아. 그랬는데 새로운 법이 주어질 때는 지금까지 내가 구축한 주체는 새롭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엔 모자란단 말인가? 그러면 성화를 더 해야 돼? 라고 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상상의 관계를 새로운 주체가 되는데 그 주체에 대해서 교란시키고 방해하는 거예요. 방해하게 되면 주체가 분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상상할 때 했던 그 주체와 다른 주체를 요구하니까 갈라지겠지요. 그게 주체의 분열이라는 겁니다. 

정신병이란 것은 늘 주체가 분열되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내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박자를 맞추어야 될지 나를 그만 몰아세우고 나를 그만 힘들게 하라. 누가 뭐라 했어? 정말 힘들어서 더 이상 성경 못 보겠다. 교회 못 나오겠다. 그럼 집에 가만있으면 상상적 주체가 되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적이 없으면 못 산다 했지요. 계속 씹어야 돼요. 정 적이 없거든 미운 연예인들 씹으면 돼요. 잘했다, 이혼. 그게 없으면 드라마를 보던지 유럽이나 한국 남자들 좋아하는 스포츠 아닙니까. 추신수가 속해 있는 텍사스 팀이 토론토에게 3:0을 깨졌지요. 그럼 적이 누구에요? 토론토 죽어야 돼. 토론토가 또 김현수가 공 받는데 컵 던졌지요. 토론토 팀은 죽어야 돼. 그걸 씹어야 일을 잘한다니까. 전라도 사람한테는 기아가 잘했어. 어제 엘지한테 4:2로 이겼잖아요. 엘지는 밟아야 돼. 

그렇게 프로야구 신경 쓰다가 갑자기 넘어져서 팔에 깁스했다면 이제는 야구 생각은 날아가고 날 아프게 한 의사가 임시적인 적으로 등장해요. 병원을 옮길까? 왜 낫질 않아. 새로운 적을 발생시켜야 돼요. 하여튼 나 빼놓고는 다 적이에요. 

어릴 때부터 상상했던 절대적인 자아가 계속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과 사태들로 인하여 대타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로부터 인정받은 절대자로 등장해야 되는데 그 시도가 상징적 관계라는 거예요. 상징적 관계에서 주체가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현실이 되는 이유가 뭐냐? 왜 나는 나 혼자 못 사느냐? 

우리의 마음, 정신, 심리적 순환을 적어볼게요. 혼자 있으니 편하다. 그 다음에 생기는 게 외롭다. 격정적으로 사랑하거나 행복하다. 이건 남녀 간의 관계뿐만 아니고 누굴 만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내가 응원하는 엘지가 7:0으로 지고 있다가 9:7로 역전하게 되면 격정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피곤하다. 그 다음에 귀찮다. 그 다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혼자 있는 게 편하다. 좀 있으면 외롭다. 인생 뭐있어요? 이게 인생 전부입니다. 

회사 다니고 돈 벌어봤는데 다 귀찮다. 나이 칠십 돼서 혼자 있으면 외롭다. 참한 아줌마 없나. 혼인신고는 안 하겠지요. 돈 빼 가면 귀찮으니까. 아줌마와 놀다가 그것도 피곤하다. 너, 이제 나가라. 나가면 편하지요. 그런데 또 외롭지요. 그 다음에 다른 아줌마. 아무리 신앙이 어떠니 성화론이 어떻고 신학이 어떻다고 백날 이야기하고 삼위일체 연구해봐야 신학교수, 목사, 장로라고 해봐야 달랑 밑에 돌아가는 정신구조는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외로움에서 격정적인 사랑, 애정행각, 남녀사이도 마찬가지고 이럴 때 주변을 얼마나 괴롭히겠습니까. 요새 왜 전화 안 하노? 전화했잖아요. 니, 언제 오는데? 자꾸 찾아요. 손자 데리고 가면, 또 대충 놀았으면 가라. 나 혼자 있고 싶다. 다음에 설에 보자. 혼자 지내는 게 편하다. 

이러한 욕구와 욕망이 현실에서 하는데 특히 남을 괴롭히는 거예요. 타인은 괴롭힘을 당하면 가만있지 않지요. 갑자기 대응하면서 좋은 친구사이가 적대적 관계 또는 적이 돼버립니다. 자기 인생에 적이라고 자기 항목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여러분, 큰 교회 목사들이 교인 많다고 좋아들 합니까? 40대 초자 목사들은 그렇게 하잖아요. 나중에 60 넘으면 교인이고 다 귀찮아요.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알아서들 하고 월급만 주고 교인들은 마음대로 하고, 설교도 한 걸 또 하고. 놀러갈 생각만 하지 아무런 것 없어요. 목사고 장로고, 심지어 대학교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라캉은 이러한 실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벽하게 찾아낼 수 없을까 해서 그린 게 이거에요. 주체는 상징적 관계지요. 상징적 관계는 반드시 대타자, 사회란 걸 염두에 둡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중요한 걸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구조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언어적 관계라는 것을 알았어요. 큰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가친척 모이면 흔히 말하는 집안 되는 줄 알잖아요. 집안은 반드시 언어적 구조로 짜여있다는 것을 구조주의에서 밝혔습니다. 

언어적 모습으로 오는데 그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선택과 나열, 계속해서 제공되는 연속되는 개념들이에요. 선택을 은유라 하고, 반복해서 계속 자료가 주어지는 이것을 환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은유적과 환유적인 행위에 의해서 인간은 언어적으로 합치되려고, 참 중요한 단어에요. 그 언어에 합치될 때 여기서 임시적으로 주체가 생기는 겁니다. 선택은 내가 선택하지요. 은유가 된다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에요. 은유는 꾸미기잖아요. 

모든 언어가 두 가지에요. 은유행위와 환유행위로 되는데 나열되는 개념, 개념이란 중간에 이걸 집어넣으면 이해하기 쉬워요. 후보감. 이게 적합하겠어요, 저게 적합하겠어요? 코카콜라 공장에서 이동하면서 등장하지요. 이동하는 걸 환유라 하고, 그걸 뽑아내는 걸 은유라 합니다. 선택이죠. 내가 있음에 내가 선택해서 내 나름의 인생을 마작하듯이 내 인생을 전개시키고 그게 내 인생이라고 확정시키는 이게 바로 인간의 주체인데 주체자가 주체행위를 벌이거든요. 

주체는 언어라는 개념에 둘러싸이면서 형성되는 거예요. 그중에서 적당한 것에 자기 욕망하던 것을 합치하고 그걸 나라고 이야기하는데, 주체가 또 분열되잖아요. 분열되면 어느 걸 골라잡을까, 하다가 이게 나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열된 틈에서 정신병적 요소가 안 사라지고 계속 있는 겁니다. 

라캉이 죽을 때 나는 집요하다. 나는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말은 늘 사라진다는 현실에서 죽음의 현상, 어느 것 하나 합치되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뭔가 합치되도록 덤벼들어야 다른 사람 보기에 내가 주체로 인정받는 거예요. 그러면 인정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타고 났어. 어릴 때부터 내가 알아서 기어 나온 게 아니고 아빠, 엄마가 먼저 있고 나는 무존재에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선점하고 있는 존재의 일부로서 가담이 되는 식으로 왔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식으로 내가 그런 자아가 될 수밖에 없었단 말이죠. 

“내가 뭐가 될까요?”라는 것은 다른 말로, “제가 어떤 욕망을 가지면 되겠습니까?”라고 자꾸 물어서 지금껏 내가 나 된 거예요. 묻는 모든 관계가 언어적 관계로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예를 들어서 돌잔치에서 뭘 합니까? 이게 대표적인 예인데 책, 마이크, 청진기, 실, 돈. 딸한테는 마이크 좋아요. 여자 아나운서 되니까. 남자한테는 반드시 청진기 있어야 돼. 의사 되는 것. 돌잔치에서 성경책 놓는 건 못 봤다. 행여나 성경책을 집을까봐 예배드리고 난 뒤에 멀리 치워놔야 돼. 

세례요한은 어릴 때부터 주님 찾았어요.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끝날 때까지 예수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태어나지도 못할 자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서
잠시 주체로 살다가
주체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그냥 소리, 인간이 아니고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살다가 가버렸지요.
그 세례요한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136)16-10-14 10:23 
201610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6-라캉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이러한 상상적 관계, 상징적 관계, 주체형성 관계를 라캉이 친절하게도 한 그림으로 보여줬습니다. 사후적인 자아이상표. 자아이상은 처음에 상상적 관계가 이상적 관계라 했지요. 이상적 자아에 대해서 평생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소년들의 꿈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라. 이게 전부 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 자아에요. 상상적 관계에서 자아가 나오기 위한 관계라고 하면, 이것 말고 또 있는가? 

주체적 관계에 있어서 주체를 분열시키는 거기에서는 내 이상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걸 가만두지 않고 나로 하여금 매력에 빠지게 만들고 그것에 주눅 들게 만드는 그것을 자아이상.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자아, 이상에 대해서 항상 결핍을 느끼는 자아. 이상은 확정돼있는데 자아는 계속 미치지 못하니까 이상에 맞는 자아를 주체로 바꾸어서 이상과 주체가 합치된다고 임시적으로 우기는 그때 등장하는 것이 자아가 아니고 주체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상징적 관계에서. 

상징적 관계란 말 자체가 헛방이네, 허구네, 그냥 폼만 잡았다는 뉘앙스를 주지요. 상상이나 상징이나 둘 다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는 모든 현상 움직임을 다 아울러야 진리가 되죠.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는 게 무슨 진리가 되겠어요? 그래서 자아이상으로 추구하는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이상으로 돌아오는 긴긴 과정을 표로 라캉이 만들어서 제시했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제일 먼저 $인간은 △거시기, 이드, 아무것도 아닌 것, 아직까지 육신 덩어리기 때문에 자아고 주체고 없어요. 그런데 사후적이니까 나중에 이게 분열된 주체로 자리가 이동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돼요.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타자, s는 사인, 신호, 기호가 돼서 moi가 되는데 모이는 자아입니다. 이게 I(A)이상화된 대타자로 돌아옵니다. 이게 (S)주체인 것처럼 되죠. 뭐든지 거시기가 엄마를 만나면 엄마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나인 것처럼 느끼는. 

라캉은 층을 이층으로 나눴어요. 일층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의식의 세계입니다. 일층에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나가면, 기표, 기표는 환유적인 거예요. 환유는 적당한 후보감이 방향이 이렇게 해서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날아가게 되면 여기가 결합이 돼요. 그러면 A대타자의 요구가 되면서 s(A)주체가 대타자를 받아들여요. 이걸 고정점, 날아가는 개념을 잡아서 내려오게 돼요. 
처음에 타자의 기호, 상상적 관계에서 어떤 타자를 상상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상징적 관계가 돼요. 내려오게 되면 자아이상, 남들이 원하는 대로 합치됐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 자리가 내 자리에요. 그러면 사후적으로 주체인데 항상 이게 주어지고 또 주어지니까 분열된 주체.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위에는 이층인데 무의식계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인간의 d요구가 주어져요. 요구를 누가 원하느냐? 이게 $◇a환상입니다. 주체가 깨어지면 분열되면 미흡함이 나오는데 그걸 오브제a, 이런 어려운 말을 쓰기 싫어요. 설명해야 되니까. 그냥 알 수 없는 타인의 것인데 타인의 욕망. 소문자a와 ◊마름모를 일치 또는 합치된다고 여기는 환상이에요. 

분열된 것이 내가 미흡한 것, 내가 새로운 요구에, 아까 이야기했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할 때 그걸 해야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라고 인정받지, 라고 여길 때 분열된 주체가 마치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고 싶은 그런 욕구가 생겨요. 환상이에요. 우기는 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 소문자d, 타인의 요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d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D, 요구긴 요구인데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이 대타자 자체가 분열돼있어요. 대타자가 갖고 있던 욕망이 늘 일정하지 않아요. 이걸 요구하다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다가, 또 다른 걸 요구하다가, 온유와 화평을 요구하다가 자꾸 새로운 걸 요구하니까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욕망해야 됩니까? 대타자의 욕망이 항상 일정하지 않고 갈라져있어요. 나라는 주체가 합치되기 위해서 타인의 욕망에 요구되기를 원하면서 요구하지만 계속 묻고 요구하고, 묻고 요구하고. 이 단계가 무의식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요구하면서 환상을 요구하는데 상징적 관계에서 잘라져요. 그래서는 안 돼. 이 정도하면 성도 맞습니까? 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돼. 네가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하라. 이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래서 네가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이젠 어둠에 속하지 말고. 요구하게 되면 나의 상상적 관계가 주체가 분열됩니다. 이걸 거세라고 해요. 누구한테? 남한테 내가 사모하는 그분에게 거세당해요. 거세는 잘리는 거예요. 잘리는 없다는 뉘앙스라기보다는 계속해서 미흡하기에 보충을 요구하는 입장에 있어요. 

요구하기 위해서 대타자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것을 욕망하게 돼있어요. 요구를 하면서 나의 환상과 합치되고 싶지만 그 심정으로 진정 원하는 게 뭐냐고 자꾸 묻게 되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것처럼 묻게 되는 거예요. 묻고 가져오는데 또 여기서 그것이 온전치 않고 대타자의 분열된 것이 오게 돼요. 

거세는 어디서 나왔는가?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없는 것과 아빠한테 있는 것을 본다는 겁니다. 자기한테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 그건 뭐겠어요? 바로 성기죠. 그래서 이걸 남근의 세계, 상징적 세계. 남근을 고치면 남성, 남성의 세계는 항상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거예요. 

이걸 대표기표라고 하는데 내용은 없고 내용이 채워져야 되기 때문에 후보감들이 와요. 후보감들이 계속 주어지는 것을 언어에서 환유라 하고 그 중에 하나 뽑는 것을 은유고. 환유, 은유는 다 비유에 관한 용어지요. 비유란 말은 실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념을 그걸 채워도 주체는 실체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집요하다. 나는 사라진다. 계속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죽음의 힘에 의해서 사라져가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에 죽을 때 라캉은, 나는 사라진다고 하지요. 

이 남근의 세계로 인하여 뭘 봤느냐 하면, 처음에는 저항해요. 저항하면서도 나중에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그 미흡한 것을 채워야 되는 거예요. 채우기 위해서 희열을 추구하게 됩니다. 희열을 주이상스인데 처음엔 저항지만, 저항해도 저항해 나갈 수 없는 게 내 자체가 남이 만들기 때문에 아무리 혼자 절대적이라 해도 또 남들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들을 수밖에 없는 속성을 내뿜게 돼있어요. 그걸 남의 것을 오브제a, 어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합치되려고 하는 욕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돼요. 우리의 속성 자체가. 

그러면서도 뭔가 되려고 하면, 남근의 절대적인 것에 의해서 거세당하니까 그건 아니야. 그게 단 줄 알아? 그게 성화의 다가 아니야. 그게 경건의 다가 아니야. 그게 신앙인의 다가 아니야. 너는 그 단어에 합치된 그 모습이 그게 다가 아니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할 때 누가 요구해요? 남들이 요구하기 전부터 내가 요구한다니까요. 끊임없이 나는 멈출 수 없고 멈출 수 없고 불안하니까. 처음부터 정신병자니까. 만족함이 없고요. 어떤 만족함의 대상이 있는 게 아니고. 대상이 있으면 그걸 가지면 그만이죠. 만족할 대상이 없는 거예요. 그걸 순수욕망이라 합니다. $◇D 

순수욕망은 대상이 없어요. 그냥 대상이 새롭게 등장해서 나한테 지시할 때 당신이 이걸 요구하는군요. 할 뿐인데 가지고 오고 난 뒤에는 이게 다가 아니구나. 대타자가 갈라졌으니까. 나나 너나 다 분열된 거예요. 주체가 자아이상을 꾸미지만 상상계를 계속 시도하지만 상징계를 거쳐서 무의식을 거치면 자아이상도 늘 교체돼야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주인공 된 s자체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러한 저항에 대해서 예를 들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예수님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상상하죠. 그래서 우리 중에 천국 가면 누가 제일 높으냐고 했지요. 그 상상은 예수님의 목소리 중에서 저것 적당해,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나라는 거시기는 주님이 원하는 합치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갈수록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을 해요. 내가 고난 받아서 죽어야 된다고 하니까 죽으면 안 되지요. 죽을 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은 죽는다 하니까, 나는? 예수님 생각 안 해요. 

가룟 유다가 자살한 이유가 뭡니까? 그동안 내가 구축한 나의 양심은 어떻게 돼요? 누가 나를 괴롭히지요? 내가 만든 분열된 주체가 나를 괴롭히잖아요. 그러니까 s가 주체가 상상한 나를 힘들게 하잖아요. 힘들 게 할 때 나의 조치는 그 힘든 나를 없애면 힘들지 않겠지요. 그래서 자살하잖아요. 남들이 귀찮아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남들한테 귀 기울이는 그런 내가 미워. 도대체 내가 왜 이런지 몰라. 라캉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이게 환유적 관계에요. 골라잡을 환유가 너무 많아요. 그중에 하나를 선택했지만 선택해봐야 또 분열되니까. 

나훈아 노래가 적당하네. 도대체 내가 왜 이런지 몰라. 힘들면 어떻게 돼요? 내가 나한테 조치를 해야 되는데 내 육신을 죽여 버리죠. 죽이면 내가 편하다고 했는데 편한 감정을 그동안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남이 그렇게 만들어놨지요. 그러면 남한테 인정 못 받는 내가 있으니까 남한테 책임을 돌리면서 나는 고이고이 거룩하게 목매 자살하면 되지요. 그럼 누가 나를 죽인 거예요? 남이 나를 죽인 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선 사탄이 되죠. 악마가 우리의 강력한 외부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다뤄지면서 악마는 우리를 절대자로 만들었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네가 신이야. 너는 완벽해. 너는 완전한 행복과 사랑을 받아 누릴 그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다고 심어줬는데 갑자기 예수님 들이닥쳐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니까 거기에 맞춰야 천국 가니까 부단히 노력하지요. 

이케요, 저케요? 이 정도하면 됩니까, 라고 스스로 순간순간 그걸 자부하고 싶지요. 만약에 그걸 안 지키면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번 주에 계약 깨지고 저주받고, 폭행당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마린시티에 갑자기 물이 차고. 왜 망하면 안 됩니까? 그것은 망하지 말라 어릴 때부터 부모가 세뇌시켜서 그래요. 너는 죽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죽어선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평생을 무거운 짐 진 것처럼 살아왔는데 이제는 더는 못 견뎌서 죽는 거예요. 

부모님전상서, 죽을 때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아버지 이름으로. 아버지 이름의 남성의 세계, 남근의 세계에요. 아버지 보소서. 저는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산 적이 없어요. 자기 이름을 깨보면 아버지 이름이에요. 아버지는 뭔가 없는 걸 가졌어요. 그건 남자는 생식기가 있고 여자는 없는 게 있어요. 그걸 결핍으로 본 거예요. 미흡한 걸로 보고 있는 것은 정상적으로 제대로 갖췄다고 본 겁니다. 

남성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절대자로 구축이 되지요. 그 절대자의 내용이 외부에서 주어지고 확정된 게 아니니까 그저 아버지처럼 모든 걸 정상적으로 갖추고 싶다는 게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생식기 달렸다고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남성다움, 씩씩함,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버티는 것, 이게 남자한테는 계속 강요된 겁니다. 그리고 여자는 없는 척을 해야 돼요. 여자는 고분고분해야 되고, 우아해야 되고, 예뻐야 돼. 남성한테 잘 보여야 팔자 고쳐. 네가 수학, 영어 공부해야 남편의 얼굴이 바뀐다. 여고3학년 급훈에 나온다는. 

여자는 남편이 있음으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은 남자만 있지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지 여성은 애초에 없는 거예요. 남자에 예속돼있는 거예요. 꼭 창세기 3장에서 내린 하나님의 저주를 이야기한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항상 여자의 자리는 자인하는 자리거든요. 여자는 남자한테 인정받을 때만 여자가 되지 여자가 스스로 인정하는 그것은 남성의 세계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자한테 인정받을 때만 여자가 되는 거예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의 뼈라 할 때만 남자가 돼요. 라캉이 얼마나 기독교적인지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저항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베드로가 위로 올라갑니다. 베드로의 저항이 바로 배신이죠. 베드로가 배신할 때 어떤 힘을 느꼈습니까? 현재 유대인의 권력에서 나는 나답게 그들의 요구하는 주체로 형성돼 왔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따라다닌 것은 결국 예수님에 맞춘 게 아니고 기존에 형성된 주체, 유대사회에서 너는 나중에 천국 가겠네, 라고 그들마저 인정해주는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필요했던 것이 예수였는데 예수가 자기 개념에 미끄러진다는 말을 해요. 

합치되지 않으니까 기존의 주체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 예수를 내쳐야 되지요. 내침으로써 기존의 세계와 이상적인 자아 모습은 예수님 보시기에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고 기존에 그 당시 유대사회가 요구하는 내가 될 때 가장 이상적이라는 티를 낸 겁니다. 그걸 완전히 표시를 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와서 다른 점이 뭡니까? 사도 바울은 배신한 베드로부터 출발하지요. 마지막 사도니까. 열두 제자들 사이에서 뿔처럼 튀어나온 게 사도 바울이에요. 왜냐하면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어느 민족을 위해서? 이미 옛 언약,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사도라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지요. 이방인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 유대사회가 이미 하늘나라 백성이 아님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등장해야 할 사도가 사도 바울입니다. 

열두 제자 대표가 베드로라면 베드로는 할례 행한 자와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서. 그런데 그걸 누가 지적합니까? 이미 율법시대가 아닌데 왜 당신은 그걸 빌미 삼아서 이방인과 함께 하면 안 된다고 하느냐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 지적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총체적인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마지막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 안에서 십자가의 장벽은 해소가 되는 겁니다. 이젠 유대인도 없고 십자가란 새로운 새 언약의 기준에 의해서 성도가 되는 것을 보여주죠. 

이게 마지막 남은 게 있어요. 이렇게 무의식 세계에서 욕구와 욕망의 세계가 상징세계에 영향을 입힙니다. 상징세계가 고정된 게 아니고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주어지는데 그 세계를 담론이라고 해요. 담론 중에서 하나만 보겠습니다. 8페이지에 이런 그림 나오는데 S1 -> S2 이건 주체를 말하는 게 아니고 기표를 말합니다. 주인기표. 주인기표는 내용이 없다고 했지요. 이건 주체를 분열시키면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욕망인데 무조건 끌리는 욕망, 소문자a에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분열된 주체인데 이게 담론의 기본이에요. 담론은 상징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언어들의 바다. 언어의 바다에서 뭐가 생기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 네 가지가 생기는 거예요. 

담론이란 언어의 풀장이라고 보면 돼요. 이건 환유의 세계지요. 계속 후보감이 되는 개념이 나와요. 개인은 그때그때마다 자기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면 되고, 선택은 은유라 했습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실체가 없고 꾸미는 위장한 가면을 쓰고 있는, 가면 벗기면 가면 또 나오니까 가면덩어리가 본인이라고 보면 돼요. 

이 자리가 중요해요. 주인기표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후보감을 계속 찾고 있어요. S2, S3, S4 계속 있겠지요. 이게 바로 (S1)행위자 자리에요. (S2)타인의 자리, 밑에 이 자리를 (a)생산된 자리, 그 다음에 ($)진리/진실의 자리.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간주할 때 분열된 주체가 나 저런 사람 맞지요, 하는 순간 또 욕망에 의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이게 네 자리가 될 걸? 그 타인의 자리. 

예를 들어서 기타리스트가 될까 하다가 골프 배워보겠다. 처음에 나는 기타리스트 될까 하다가 미끄러지니까 이게 안 미끄러질 수 있겠어요? 나는 저것 안 먹고 싶다고 그걸 안 돌아봅니까? 그건 먹고 싶다는 말과 똑같은 말 아닙니까. 엄마, 나 저것 안 가져도 돼, 라는 말은 사달라는 말이잖아요.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라캉의 미끄러진다는 말은 본인이 어쩔 수 없이 끌러간다는 거예요. 30대에 좋아하는 것과 40대에 좋아하는 것이 다르죠. 미끄러진 거예요. 내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후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선택했다고 합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게 나오기 때문에 환유, 나와 합치될 새로운 후보감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삼성이 투수들 도박하고 다 나가고 난 뒤에 삼성팬들이 어디로 가겠어요? 엘지로 가든지 기아로 가겠지요. 안 그러면 부산으로? 몇 년째 가을야구 못하니까 팬 많이 놓쳤습니다. 이게 미끄러지는 거예요. 선택한 게 아니라니까. 고향이 부산이라 자이언트 응원했는데 성적이 워낙 나쁘니까 삼성으로 갈까? 삼성은 도박으로 시끄럽고 신생팀은 그렇고 오래된 두산이 괜찮네. 두산은 팬이 너무 많아. 기아는? 전라도라서 뭐 어떻고. 

왜 타인의 자리에 가느냐 하면 우리 태생이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갈 수밖에 없어요. 해서 이거라고 잡았는데 거기서 알 수 없는 욕망이 생산되는 거예요. 생산된 것을 어디로 가져온다? 나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을 또 욕망할 수 없는 이게 바로 분열된 주체, 나를 나 되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진리라는. 이게 바로 가장 기본이 되는 담론인데 주인담론이에요. 

그렇다면 그것 말고 뭐가 있습니까? 8페이지에 나와 있지요. 대학담론은 다른 말로 과학담론, 물리학담론, 생물학담론, 수학담론이라 하면 돼요. S2는 누구나 인정하는 방정식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인데 이게 대표기표에요. 이건 누구도 손대면 안 돼요. 너무나 진리라서. 로켓 올라갈 때 전부 그 방정식으로 목성으로 보내고 그래요. 

이것이 진짜 진리에 합당한, 올라가는 걸 저항성이라고 하는데, S1이 방정식을 세워놓고 확정되었다고 여겼는데 점차로 알 수 없는 새로운 과학체계를 만들 거예요. 예를 들어서 상대성원리입니다. 세상은 절대 시간, 절대 공간으로 고정돼있다고 했는데 상대성원리는 중력에 의해서 질량이 공간이 휘어지고 모든 시공간이 새롭게 조성된다고 보는 거예요. 상대성원리는 처음에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생산된 게 뭐냐? 뭐지? 과학이 진리라는 게 뭐야? 라고 다시 주체가 성립될 때 이걸 대학담론. 과학이 이걸로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추구하는 거예요. 

그 옆에 것 봅시다. 생산된 자리에 알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오브제a, 그 다음에 주체가 있고, 그 다음에 S1 밑에 S2가 있어요. 이게 히스테리담론이죠. 자꾸 자기가 나폴레옹이래. 주체가 뭐라고 하는데 사실은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우기는 거예요. 자기가 전생의 왕이고 나는 왕비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이 점차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사실은 주인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새로운 S2로 생산자, 내가 나폴레옹이라는 주인기표를 갖고 있을 때 타인과 합치되었다고 여길 때 너의 병 고침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달을 때 그런 것이 생산될 때 이 병은 치료된다. 이게 히스테리담론이에요. 

마지막 하나 봅시다. 분석가담론이에요. 환자를 두고 분석하는 정신과의사의 담론이에요. 시작은 a부터 해요. 분석가는 환자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요. 혹시 꿈 이야기해보세요. 뭐가 불만입니까? 팔짱 끼고 듣는 입장이에요. 행위자를 보면서 타자가 누구냐 하면, 환자인 분열된 주체가 타자가 되죠. 생산 되는 게 뭐냐? 당신은 이런 인간이네요, 라고 이야기해주면, 진리가 뭐냐? 사실은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은 순회하는 상징질서에 포함이 될 때 병이 낫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정신분석의 목적이 뭐냐 하면, 환자니까 나는 누가 될 수 있고 이것도 될 수 있지만 상징세계에서 늘 떠돌아다녀야 될 그게 자기 주체라고 아는 그것을 치료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환자고, 주께서 구원되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면, 이건 구원받은 거고.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 세상은 남성의 세계라 했잖아요. 현실은 상징세계. 인간의 욕망과 욕망의 풀장. 그럼 이 세상이 그게 전부냐? 전부가 아니에요. 남성의 세계 특징이 바로 남근이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의 이름이죠. 상징적 세계는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있어요. 이 질서가 완벽하게 진리겠습니까? 완벽하다면 움직이지 않아야 되는데 요동하잖아요. 그 원인이 뭐냐? 남성의 세계만 있는 게 아니고 여성적 세계가 있는 거예요. 남성의 세계가 닫힌 집합세계라면 여성의 세계는 열린 집합세계에요. 

여기서 라캉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한 세미나에서 이런 표현을 했어요. 일종에 구원을 제시한 겁니다. 여성의 세계는 없는 거예요. 여성은 없어요. 없는 게 있는 걸 살려냅니다. 꼭 뭘 봅니까? 잉태되지 못한 자가 성령의 세계인 것처럼. 남자 없이 아기를 가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여자의 후손이 남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도표를 그려놓고 둘로 나눠요. 여성의 세계와 남성의 세계로 나눕니다. 우선 남성의 세계부터 보면, 남성의 세계는 전체를 남근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쉽게 말해서 신의 이름으로 통치가 돼야 되기 때문에 질서의 세계에요. 남근에 속한 남성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x, ∅x라 해서 이건 남성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예외 없이 모두 다, 라고 이야기할 때는 이 세상은 모두 다 남근의 세계에 속한다. 누가? 이걸 A를 뒤집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 다 남성의 세계에 포함돼있다. 그런데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뭐냐? 이걸 전칭, 특칭. 특정한 예외가 있는데 파이의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게 한 사람 존재한다. 존재는 E인데 E를 거꾸로 써요. ∃x 이게 남성의 세계에요. 

남근의 세계에 예외적인 존재가 하나 존재한다. 누구겠습니까? 신이고, 가정에서는 아버지고, 교회에서 목사고, 나라에서는 대통령이겠죠. 대통령이라 하면 안 돼요. 법을 초월하니까 왕이겠죠. 그래야 질서가 잡혀요. 왕은 간음해도 괜찮아요. 간음하지 말라가 있어야 간음함이 성립되니까. 하나님이 짝 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는 경우에만 그 법에 질서가 잡힙니다. 이게 남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걸 여성의 세계가 보고 있어요. 여성의 세계는 남근을 유발하고 그리고 여기 있는 분열된 주체는 여성을 사모하지요. 너희들 신한테 매여 봐라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고 분열된 주체는 여성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세계는 말로 표현되지 않으니까 무의식적 구조에서 깨어진 분열된 대타자를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여성의 세계를 양화사라 하는데 ∅x파이에 속하지 않는 자는 예외 없이 다 속한다. 모든 세계는 다 남근에 속해있다. 아까와 같은 말이죠. 남근에 속하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을 통해서 그걸 이야기한다고. 모든 여성은 남성에 속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남근에 속하지 않는 모두 다 남근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해요. 모든 주체가 남근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속한다고 해놓고 아니라고 합니다. 이건 역설이고 모순되지요. 그러니까 여성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거예요. 상징적 세계에서 언어는 항상 어떤 질서 잡기 위해서 통용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말이 서로 통해야 하지 통하지 않는 말을 왜 합니까. 그런데 말을 했는데 이상하게 현 질서를 유지하는 용도로 말하지 않는 경우, 그건 바로 여자의 후손, 여자의 세계지요. 그게 바로 복음의 세계지요.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보지 못한다고 하니 소경이 아니다. 

바로 라캉은 기독교적이에요. 현상에 있는 우리의 육체의 욕망과 모든 걸 통해서 이 세상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속합니다. 그 세계에서 나는 집요하게 내 자신이 누군가로 확정에 의해서 살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된다? 나는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세상에 대해서 라캉이 주장하는 걸 보았습니다. 이 세상을 언어적으로 문법적으로 따진다고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유로움, 성령의 자유로움으로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사랑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