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장14(우리)1404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자,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 품속에서 몇 명이 나왔죠? 독생자 한명 나왔죠. 그런데 성도가 몇 명이죠? 많잖아요. 어! 하나에서 왜 다수가 되었을까요? 왜 하나가 다수가 되지? 이 문제를 예수님 믿기로 누가 계모임 했습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자, 너와 내가 모입니다. 모일 때는 공통점이 있을 때만 모이는 거예요. 그러면 공통점이 사라지면? 모였다가 깨어지죠. 물론 부부도 깨질 수 있지만 자식 때문에 안 깨지기도 하지만.
사람이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 모이게 되면 반드시 거기는 모여야 될 타당성, 정당성 이유가 계속 그 안에 원리가 살아있어야 돼요. 그게 만약에 없어버리면 그게 깨어지게 돼 있습니다.
교회에서 기념일마다, 기념일이란 부활절, 맥추절 이런 건데요. 기념일마다 목돈 내라 하거든요. 기념일 자체가 봉투 돌려서 목돈 내는 날 이예요. 목돈을 내게 되면 교회가 뭐로 단결되겠습니까? 지금 낸 게 뭐에요? 돈 냈죠. 평소에 푼돈 내다가 주정헌금 1000원 내다가 그때는 목돈을 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가 낸 목돈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십일조라 하는 것이 1/10이 아니고 십일조가 나중에 누적이 되면 나중에 십일조 낸 사람 복리로 계산하게 되면 엄청난 비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죠. 그러면 그 교회서 가장 영향 있는 사람은 그 교회에 가장 돈을 많이 낸 사람, 그러니까 빌라 바쳐서 간 사람이라든지 반드시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에 처음 왔는데 자기 집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을 했다면 기존에 푼돈 냈던 사람들은 그 사람은 우습게보겠습니까? 안 보겠습니까? ‘나는 1년 동안 다니면서 10만원밖에 안 냈는데 저 사람은 오자마자 2천만 원씩이나 냈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 지분이 있을 게 아니냐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교회가 그 사람들에게 낸 만큼 혜택과 보상차원에서 내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뭔가 제직 때 발언을 할 때는 발언권이 먹히게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저들은 2천만 원 냈고 내년에도 2천만 원 낼 수 있으니 예산 펑크 나면 메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단결이 어떤 단결 이예요? 돈의 단결이죠. 공통점이 돈이었습니다. 교회 부흥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네. 항상 어쨌든지 간에 돈을 내게 함으로써 돈을 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저거 내가 냈어요. 피아노 내가 했어요. 저 꽃꽂이 내가 했어요.’ 함으로써 기어이 그 사람을 그 다리 거쳐서 그 사람 일은 하나의 지체로서 만들어 내는 그 행정적 방법, 그것이 교회로 하여금 결속하는 힘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주님께서 독생자에서 다수가 되기 이전에 이미 그전에 다수가 있었어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어요. 유대나라였습니다. 유대나라가 뭐로 결속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자기 의를 유지하는 방법은 뭐가 투입돼야 됩니까? 율법을 줘야 되겠죠. 자 묻습니다. 율법을 지킨다. 안 지킨다. 를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 곤란해요. 왜냐 하면 백정도 세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하면 유대나라에서 그게 먹혀요? 안 먹혀요? ‘웃기고 있네.’ 라고 안 되죠.
그러면 율법에서 자기 의가 나오는데 그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뭐냐 하면 관행과 관습의 해석법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해석법을 좀 더 권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누굴 동원시키느냐 하면 역사를 동원시켜야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성경해석이 계속 업그레이드 해왔다.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모세를 주었고 모세 때부터 해석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해온 거예요. ’해석은 이게 율법의 바른 뜻이야, 아니야 저게 바른 뜻인지.‘ 계속해서 실험해 왔고 검정을 거쳤고 그것이 해석의 누적이 되어서 진리에 가장 완벽한 진리체제로서 지금 예수님 시대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떡을 원하지만 바리새인과 새두개인은 뭐를 원하느냐 하면 율법 바로 세우기, 그리고 율법 바르게 세우기는 율법을 실천에 옮기는데 그 실천의 세칙과 규칙은 누가 제정합니까?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정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디까지 기어 올라가는 겁니까? 일반 민중들부터 시작해서, 떡 좋아하는 사람들부터, 율법 관계없이 병 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귀신, 마지막 사단은 뭡니까? 바로 율법을 쥐고 있는 사람, 율법을 쥐고 그걸 권위 있게, 권세 있게 해석을 내리는 그쪽이 마귀와 가장 마귀로부터 가장 충실하게 다루어지는 마귀의 한 family,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한복음의 흐름은 그렇게 돼 있습니다. 제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점차 율법을 쥐고 있는 그 권위자까지 마주치게 하는 겁니다. 처음에 요한복음 4장에서 누가 옵니까? 사마리아 여인부터 시작하죠. 그리고 5장에서는 연못에 들어가서 병 낫기를 원하는 병자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사실 요한복음 1장, 2장, 3장도 서론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부터 시작하니까 추수부터 시작하니까.
38년 된 병자가 무슨 호수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 있었잖아요. 무수한 병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 바리새인이 왜 없어요? 바리새인은 이들이 병 낫는 것에 대해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세례요한보고 네가 누구냐고 묻는 그것이 하나의 체제가 돼 있죠. 그게 바로 예수님이 독생자 나타나서 툭 떨어진 체제가 이미 율법으로서 하나의 질서가 잡혀있고 계급이 형성돼 있는 그런 세계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름대로 단단한 우리가 되죠. we, 우리가 되죠. 우리를 나의 복수와 우리의 단수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나의 복수라는 것은 나를 극대화 시킬 때 내가 나누어지면서 우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소속된, 그러니까 소속을 말하죠. 나로 하여금 내가 커지고 확장되는 이상형이 바로 우리가 되는 겁니다. 복수란 말은 복수, 보복한다는 말이 아니고 여러 개지만 그들이 다 하나의 나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그 우리. 이것을 지향하는 거예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우리가 뭐가 됩니까? 이게 단수,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체제가 갖춰 있다 말이죠. 이게 유대나라 이스라엘에서 마지막 최종모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독생자가 한분이다 말이죠. 한분인데 왜 한분이 어떻게 여러 성도들, 여러 믿는 자를 발생시킬 수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할 때 그 사람의 개성을 살리면 안 되죠. 여럿이 되고 다 깨지잖아요.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뭐였습니까? 율법이라는 해석이고 율법으로 그들은 하나가 됐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도 율법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었습니까? 아니면 율법 외에 다른 걸로 하나가 되었습니까? 율법 외에 율법의 완성으로 하나가 된 거죠. 그러면 율법의 완성이 됐다는 말은 결국 이들의 이것은 미완성이란 뜻이죠. 그러면 이것도 주님이 성도 만드는 것보다 이거부터 먼저 따져봅시다.
‘내가 율법을 존중합니다. 너도 존중합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라고 할 때 이게 진정 하나냐 이 말입니다. 미리 정답을 하면, 이건 하나가 아니에요. 인간이 법 좋아한다고 법 좋아한 사람 묶는다고 해서 그게 한 몸이 되지 않습니다. 부부가 ‘당신 야구 좋아해?’ ‘우린 야구 좋아해.’ ‘우리 결혼식 때 야구장에서 할까?’ ‘야구장에서 해.’ 그럼 한 몸입니까? 야구 좋아하는 데서는 하나지만 ‘당신 뭐 먹을래? 나 짜장면.’ ‘나 짬뽕’ 이래서 갈라져서 이혼까지는 안 하겠지만 그게 다를 때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죠.
그러니까 제가 주님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의 율법이라는 것은 핑계라는 거예요. 핑계고 율법은 하나의 빌미고 율법으로 묶게 하는 다른 세력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어두운 세계고 예수님에 대한 반대 세력인 겁니다.
그러면 결론은 났어요. 뭐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반대되는 세력에 의해서 튕겨져 나오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예수님과 한패가 되는데 예수님 반대 세력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안 받아주는 사람은 그 안 받아주는 식으로 그 사람들을 모아서 예수님의 하나가 되는 거예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하면 ‘세상이 너를 싫어하느냐? 미워하느냐?’ ‘미워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네가 내게 속했기 때문에 미움 받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 일방적 생각이지 제자들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제자들은 권력에 지금 굴복하기 바쁩니다.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했는데 잊어버렸죠? 뭐냐 하면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죠? 영생을 얻는다 하고 믿어버리면 이건 영생 원하는 사람 모여라, 해서 모이면 그건 하나가 안 돼요. 지금 그걸 설명하려고 이렇게 제가 어렵게 설명하는 겁니다.
‘너 뭐 얻을 거야?’ ‘나 영생 얻을게.’ ‘ 나 영생 얻을게.’ ‘영생 얻을 사람 모여라. 우리 교회다.‘ 이건 아닌 거예요. 이건 모아봤자 이건 다 따로따로 개인이 복수가 되지 않고 다 따로따로 놀아요. 그래가지고는 교회가 될 수가 없어요. 그건 주님의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경험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어야 돼요.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한테 ‘너 스스로 내가 스승인 줄 아느냐?’ ‘예 압니다.’ 그 말 안 믿어요. 예수님을 스승으로 믿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을 믿는 방법은 예수님이 당했던 동일한 경험을 겪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내치는 그런 어두운 세력이 구축 화 돼 있어야 돼요. 그리고 구축 화 된 세력에서 그들이 감당 못해서 튀어나오는, 그들이 내쫓게 하는 그런 경험을 겪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태 마가 누가와 다른 요한복음의 특징 이예요. 진짜 어렵죠. 지금 제가 어렵다는 것은 출발점이 뭐냐 하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발생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이쿠, 예수 제가 믿죠.’ 그거 인정 안 합니다. ‘제가 영생 얻기 위해서 예수 믿겠습니다.’ 인정 안 해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 믿고 나왔다가 자기가 백날 세미나 듣고 백날 해봐야 ‘아, 이제 알았네.’ 하고 믿는 게 아니에요. 니고데모는 섞일 수 없는 공의회거든요. 거기서 배척받고 튕겨 나와야 돼요. 여러분 어디서 튕겨 나왔습니까? 사모님한테 밉상 받았어요? 등산 자주 간다고 밉상 받고 친구 잘못 사귄다고 밉상 받은 거 아니에요. 그렇게 튕겨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튕겨 나오면 안 되고 예수님이 튕겨났던 그 튕김과 동일한 튕김으로서 나올 때 비로소 이건 내가 주님과 한 몸 된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누구 뜻이다? 주님의 모집 전략에 입각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안 튕겨 나오고 싶은데 튕겨 나온 셈이 돼 줘야 돼요. 그럴 때 우리는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제가 요한복음 14장, 15장을 미리 이야기했어요.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다시 성령을 보내줄게. 성령이 와서 너희를 책망할 것이다. 책망을 받게 되면 비로소 너희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책망 없는 하나는 없다. 책망 받는 책망의 기준은 뭐냐, 내가 이 세상에서 당했던 기준을 똑같이 너희에게 적용시킬 것이다. 세상은 그걸 거부하지만 너희들은 성령에 의해서 그 책망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너는 내 제자가 되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 출발점이 뭐냐 하면 어떻게 각 사람인데 하나가 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we,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서 우리가 되느냐. 이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전에는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부활되고 난 뒤에. 내 아버지가 이제는 뭐가 된다? 이제는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거예요. 이래서 우리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에 나와요.
여러분들이 나, 너, 자꾸 이걸 여러분들이 신경을 안 썼던 이유가 요한복음 보고 ‘제가 믿을게요.’ 손들고 나서면 믿는 자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믿는 자 되기 위해서 우리가 손든다고 ‘그래 오너라.’ 받아주지 않아요. 그러면 내 개인이 살아있어요. 천국 가서 자기 자랑한다 말이죠. ‘저 우리 동네서 저만 믿었어요.’ 자랑하게 돼요. 자랑함을 없애야 돼요. 안 없애면 이건 독자적인 요소가 됩니다. 내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이러면 주님 중심의 우리가 성립이 안 돼요. 계속 자기가 살아있게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든 제자는 다 도망쳐야 돼요. 당연히 도망쳐서 그게 본색이고 그럴 수밖에 없고 그들은 예수님과 하나 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실패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에 실패를 하셔야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다워요. 뭔가 실패해야 돼요.
아까 수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자 봅시다. 홍해 바다입니다. 홍해바다에 모세 있고 백성들 있고 뒤에는 누가 따라옵니까? 애굽 군이 따라오죠. 자, 요 지점이 A지점이라면 요 지점에서 바라본 홍해와 요 지점(B)에서 바라본 홍해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요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신자에요. 요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건너온 사람이라는 티가 팍팍 나요. 이 차이점을 모르게 되면 건너본 적도 없으면서 건너봤다는 그냥 허세를 부리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점 A 와 B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나와 나의 차이점 이예요. 이랬던 내가 이랬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지고 두 조각내는 겁니다. 내가 이랬던 사람인데. 그럼 이랬던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영생 얻으려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주께서는 그 방법을 일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나로 하여금 죽음의 바다에 건너가게 해서 마땅히 우리는 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함을 일깨워주시고 나중에 건너와 보니까 내 힘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 이걸 건너오다니, 내 구원에 대해서, 내 믿음에 대해서 내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우리가 느껴져야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이 예수를 믿다니, 뭐가 부족해서 예수 믿어요? 나 같은 인간이 예수 믿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건너와 보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나를 새롭게 채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냥 나를 착하다고 채택한 것이 아니고 죽여 놓고 나를 데려간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 홍해가 바로 율법체제, 이게 율법체제거든요. 지금은 유대나라가 없잖아요. 지금은 아, 대한민국이잖아요. 그렇지만 유대나라가 유대로 결속이 된 것이 율법에 대한 해석이고 그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계급이 생겼잖아요.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진짜 착한 사람. 그걸 우리는 거기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건너왔죠. 건너옴을 통해서 우리는 마땅히 이런 것이 이미 주님께서 건너 간 길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따라서 주님을 오해하고 주님이 비난받았던 이유를 같이 공유하면서 가는 거예요. ‘주님이 이런 말 하셔서 이렇게 받았구나.’ 하면서 건너온 사람은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체험되었으니까.
다윗이 간음했고 살인했기 때문에 비로소 다윗은 사람에게 죄짓지 않은 거예요. 다윗이 누구에게 죄졌다 했어요? 주께만 죄졌죠. 이런 뻔뻔스러움. 그러면 우리야는 뭐고 밧세바는 뭐야? 죽은 우리야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런데 거기다 한 수 더 뜹니다. “주께서 꺾어진 뼈로 제가 살았나이다.” 이렇게 되면 주께서 꺾으신 뼈가 누구냐 하면 우리야 장군이거든요. ‘우리야 장군은 나 구원하기 위해서 소모품이다.’ 이런 발언을 하잖아요. 그거 우리야 장군 들으면 기분 나쁘겠어요? 기분 더럽겠습니까? 이게 우리야 장군이 우리가 아니라면 기분 더러울 건데 이게 우리라면 감사하죠. 왜 감사하냐 하면 나는 어떻게 쓰여 지던 간에 그렇게 누굴 구원하는데 쓰여 졌다면 저로서 고맙죠, 라는 발언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모여서 우리의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게 모여서 영생이 되는 겁니다.
집사님이 집사님을 때리면서 ‘기분 나쁘죠?’ 하면 ‘나는 비로소 당신의 주먹이 이렇게 센지 알게 되는 기쁨을 누렸소.’ 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주먹 한 대 정도는 괜찮은데 이 세상에 주먹이 아니고 돈이 문제 아닙니까? 돈 빌려줬는데 돈 안 갚을 때 ‘비로소 당신은 얼마나 뻔뻔스런 인간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알게 된 기쁨을 당신이 누리게 하시는군요.’ 이런 소리 하는 사람 없어요. ‘돈 안 갚나? 집 사고 차사고 돈 얼른 갚아라.’ 이렇게 나오죠.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돈으로 결속돼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을 만나면 나한테 돈이 얼마나 들어오나, 이걸로 봤는데 돈이 떼일 때 비로소 그 진짜 결속력이, 노끈이 드디어 노출된 거예요. 내가 말해도 너무 심하게 말해서 오그라든다.
어릴 때 세 살인 쌍둥이가 ‘아빠 나 사랑해?’라는 말은 ‘내 형보다 빵을 하나 더 줄 거야? 더 큰 빵을 줄 거야?‘ 그 이야기잖아요. 아직 어린애가 그렇잖아요.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빵 하나 더 주면 사랑하는 것이고, 빵 안 주고 맛없는 것 주면 미워하는 거예요. 애들은 그거에요. 그 애들이 커서 나중에 나이 40, 50이 되면 누구는 집 팔아다 보증 서주고 누구는 대출 담보 대주고 형은 다 해주고 나는 왜 대출 안 해줍니까? 이런 식으로 나왔을 뿐인데 축소해보면 역시 부모 자식 간에도 무슨 관계? 돈의 관계다.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버지 유산을 형한테는 빌딩 주고 저한테는 빚만 주고 이럴 때 그 동생이 대번 누구를 찾아오느냐 하면 예수님을 찾아와요. 찾아와서 ‘형이 내 유산 가져갔습니다. 어떻게 정의롭게 해결해 달라.’ 할 때 주님이 뭐라 했습니까? 화내죠. 어떻게 내가 너희들의 우리라는 유대관계, 돈으로 맺어진 우리 관계를 그걸 해결해 주는 메시야로 봤느냐? 탐심에서는 생명이 나온다? 안 나온다? 안 나온다. 생명을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오늘밤에 진주에 배 태워버리면 저 책꽂이에 있는 교과서가 누구 것이 되겠느냐? 죽은 사람에게 너무 잔인하게 예를 들어서 미안하긴 미안한데요. 복음을 위해서 할 수 없어요. 오늘밤 저 옷장이 옷이 누구 옷이 되겠느냐? 기가 막힐 일입니다. 애 하나 키우는데 조기유학 시켰죠. 돈이 얼마나 들었어요? 초등학교부터 선행학습 시켰죠. 돈 투자를 얼마나 한 거예요? 보상금 4억 5천 가지고 한이 풀리겠어요?
자식이 있다는 것은 부모의 살 희망과 용기가 있다는 거예요.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고 투자비용 문제가 아니고 누구 때문에 사는데요. 늙은 남편 때문에 살까요. 파릇파릇한 자식 보고 사는데 그 자식을 가장 귀한 자식을 죽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보고 뭐라 했어요? ‘ 네 아들을 배에 태워라.’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리고 ‘엔진 빼라.’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 말은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누굴 죽인다? 아들을 죽이라 하니까. 도대체 우리가 믿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이예요? 자비로운 하나님? 어디 그런 자비, 자비 두 번만 있으면 자식 다 죽이겠다. 무슨 그런 자비가 있어요?
죽이라는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는 하나님이라니까요. 죽는 것이 뭐냐, 율법의 완성이고. 우리가 지켰다. 지켰다 우기는 그 율법을 지킨 게 아니고 죽이는 거예요. 그 경험을 공유할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의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뭐 요한복음 3장 16절 잘도 외워요. 하여튼 올림픽이나 월드컵 보면 꼭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JOHN 36 써서 카메라 앞에 들고 다니는 사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말이 얼마나 쉬운 말이지만 이걸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누가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죽음을 일깨워주는 그 주님의 직접적인 능력이 아니면 요한복음 3장 16절 남의 이야기에요. 소용없어요. 백날 해보고 천 번을 한다고 이게 학이 되는 게 아니에요. 종이학은 천 번을 접으면 학이 되겠지만 이건 천 번 해서 종이학 만들어도 말씀 날라 가지도 않아요.
그래서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다 해서 인간의 시간 개념을 깨버려요. 인간의 시간 개념, 전 후를 따지는 인간이 전 후는 주님 앞에 안 통한다. 왜 애초부터 구원 못 받을 인간이라고 확정된 셈이기 때문에 거기다 인간의 전 후를 개입하지 말라 말이죠.
1장 다시 봅시다. 요 문제 해결돼야 됩니다. 뭐냐 하면 인간의 맺음이라 하는 것을 결국은 보이지 않는 법의 힘! 저주의 힘으로 인간이 결속시켰다.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최고고 제일 밑바닥에는 죄인이고, 그래서 인간의 결속이 단결 돼서 유대교라는 게 성립된 거예요. 여기에 누가 뛰어들다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렇다면 아무도 이 보이지 않는 법, 이 법을 이용한, 법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의의 체계를 세우는 이 악마적인 법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에요. 어느 누구도 이 의라는 법 체제, 법을 통해서 주는 의라는 체제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악과를 아무 소리 안하고 따먹고 난 뒤에 “너 따먹었지? 죽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선악과 따먹기 전에 먼저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야기했습니까? 먼저 이야기했죠. 먼저 이야기해버리면 이게 하나의 아담과 하와의 자아의식에 박혀 버려요. 박히니까 뱀의 유혹의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든 이유가 선악과에 담긴 말씀이 인간을 통해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이야기해서 뒤에 있는 악마까지 정체를 드러내는데 인간이 사용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죽는 게 무섭습니까? 죽는다는 위협이 무서워요? 죽는다는 위협이 무서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아의식에 박힌 죽음이 돼 버리면 그 다음에 협박의 대상이 돼 버려요. 죽기를 무서워하면 종노릇하듯이. ‘이러면 죽는다. 죽는다.’
그런데 우연히 죽는 사람은 죽는 것도 모르고 죽어요. 예를 들어서 ‘아빠 물이 차 들어와요. 지금 바쁘니까 물 피해서 갈게요.’ 애들은 죽음의 위험을 모르고 그 메시지를 받는 부모는 지금 자기가 죽는 거 이상으로 무서운 거예요. 애는 현장에서 자기 물 퍼내고 물 피하는 그 자기 일상의 일에 충실했을 뿐 이예요. 전혀 무섭지 않아요. 숙제하듯이 지금의 할 일은 뭐냐, 물 피해서 배 위에 올라가는 그 일 뿐이지, 내가 죽고 난 뒤에 그건 겁나지 않아요. 누가 겁나느냐, 그런 것을 상상한 안산에 있는 부모가 겁난다니까요. 이것이 인간의 자아의식 때문에 그래요.
마귀는 인간에게 일부러 자아의식을 불어넣어서 자아의식 속에 있는 것을 유혹했고 인간 자체가 아주 버려버렸어요. 인간 자체가 모여 봤자 악마가 주는 그 의의 힘, 선악과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단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선악과 벗어나는 놈은 우리 손에 죽는다.’ 이겁니다. 이것이 극대화 된 것이 바로 국가라는 거예요.
국가는 이건 참고로 하겠어요. 국가에서 법의 혜택을 받지 않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어요. 그게 누군지 알아요? 국가의 왕 이예요. 왕은 법에 저촉 받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국가가 성립이 안 돼요. 밑의 사람이 따지고 들 수가 없어야 돼요. 그래야 국가가 돼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라멕입니다. 라멕은 본인의 결정이 곧 법이 돼요.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7배로 받되 내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벌의 77배를 받는다.’ 이게 법이어야 돼요. 그래야 국가에서 법이 돌아가요. 법이 돌아갈 때 최종적인 법에서 초월한 존재가 있어야 법이 돌아가지, 초월한 존재가 없으면 이게 개판돼 버린다고요. ‘너만 잘났나?’ 이래 돼 버리면 나라꼴이 안 돼요. ‘자자, 우리 말 치우고 우리 어르신은 뭐라고 하는지 들어봅시다.’ 어르신내는 법의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법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법을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법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법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의 체제가 잡힌 자체가 정답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말하면서도 어렵다. 그들이 법을 알아서 질서 잡히는 게 아니고 질서 자체가 정답이 되어서 무조건 순종한다는 자체가 법이 있는 이유가 된다니까요. 대들지 말라 말이죠.
우리는 죽음의 권세한테 대들면 안 돼요. 어떤 인간이 ‘하나님이여, 왜 저를 죽이십니까?’ 그렇게 대들면 안 된다고요. ‘죽는 게 마땅하군요.’ 이렇게 돼야지 대들면 안 돼요. 직원이 사장한테 대들면 사장이 그를 직원으로 간주하든지 아니면 사장보다 더 높은 사장으로 간주하든지 둘 중에 하나잖아요. 그럼 사장보다 더 높은 사장이면 그 직원을 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쫓아내야죠. 쫓아내면 사장은 몇 명입니까? 갑자기 2명 되다가 몇 명 됐어요? 혼자되면 회사가 잘 돌아가는 거예요.
법을 내린 사람은 절대로 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겁니다. 간음했다고요? 주님이 뭐라 합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했다.”고 했을 때 그 법을 지킬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어야 ‘세상에 저런 권세가 어디서 나오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킬 수가 없어야 돼요. 그래야 복종을 하는 거예요. 복종하는 자체가 법이 있는 이유입니다. 마귀가 와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죠? 그러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는 무조건 나보다 더 센 법에 복종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에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법 잘 지키는 세계에 굴복한다면 그거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전히 율법의 저주 아래 속한 사람 이예요.
‘주여, 앞으로는 잘할게요.’ 다윗이 간음하고 난 뒤에 이랬습니까? ‘하나님, 앞으로는 간음죄 안 지을게요.’ 이랬습니까? 한번 한 것은 실수로 봐줘야 되죠. 그런데 이런 말에서 이 세상에서 간음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간음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어요. 빨리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간음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단 한 번만 간음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간음을 한번 하게 되면 계속 또 하게 되니까. 재밌으니까. 해도 아무렇지 않으니까.
다윗이 간음하고 난 뒤에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랬습니까? 그 자체가 의미가 없죠. 주께서 원하시는 건 상한 심령이니까. 간음 안 하면 두 번 안 하면 상한 심령에서 옳은 심령 됩니까? 우리가 나쁜 짓하고 난 뒤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잖아요. ‘주여 이런 못 된 짓을 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옵소서.’ 주님이 어리둥절합니다. ‘네가 지금 나를 제대로 알고 기도한 거야? 내가 율법적인 존재야? 다시는 안 하겠어.’ 그건 같은 인간들보고 하는 거예요. 그건 바리새인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은 죄를 지어도 죄를 모르는 이유가 죄에 반드시 자기의 반성과 ‘이것이 나쁘다.’ 하는 것을 알고 죄를 짓기 때문에 죄는 나쁘지만 그 죄가 나쁘다는 그 사실은 나쁠까요? 안 나쁠까요? 내가 돈을 훔쳤던 것이 나쁘다는 그것까지 나쁜 겁니까? 아니죠. 돈을 훔친 건 나쁘지만 돈을 훔친 것이 나쁘다는 그 마음까지는 나쁘지 않고 그걸 양심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아이구 착한 면이 있네.’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악에서 못 벗어난다니까요. 죄를 짓는 곳에서도 ‘나는 죄를 짓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회개하는 선함이 있으니까 이게 선악과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이게 악마의 덫인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네가 회개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악의 체계서 당해서 밀려나오듯이 너도 거기서 밀려나오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하고 나하고 사적으로 만나지 말고 우리 소속으로 만나자는 거예요. 너는 어느 소속이고? 선악 소속이고. 나는 거기서 쫓겨나서 아버지께 소속됐고. 네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 소속이 돼야 돼요.
아버지께 소속이 되려면 아들이 와서 그 자를 아들다운 모습으로 고난을 받도록 이렇게 해야 됩니다. 네가 속해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지적 질을 당해야 돼요. 그래서 같이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우리를 용납하지 않고 ‘에잇, 퉤, 가라. 잘 먹고 잘살아라. 꺼져라.’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니까요. 구원이! 제가 말하는 요한복음이 그래요.
요한복음 6장에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할 때 그 말은 우리가 ‘가겠습니다.’라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보내주는 그 절차, 메카니즘, 프로세스, 과정은 예수님이 먼저 거치고 난 뒤에 거쳐진 그 과정을 그대로 그 사람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그 사람도 이 세상에서 똑같이 얻어맞고 주님한테로 튕겨져 나온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베드로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했죠. 그때 베드로 하는 말이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주께 밀어버리죠. 그리고 그 다음에 ”네가 앞으로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했죠. 그 모든 말이 뭔 뜻 이예요? ‘네가 이제부터 똑바로 복음 알았지?’ ‘예’ 이게 아니고 주께서 했던 그 과정을 그냥 반복해서 베드로에게 씌워버리면 베드로는 그야말로 주께서 당한 고난에 함께 참여되면서 주께서 튕겨져 나온 방식으로 그대로 튕겨져 나오게 돼요.
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요한이 마지막에 어디서 죽습니까? 밧모 섬에서 죽죠. 밧모 섬에 요한이 있을 때 누가 나타나요? 예수님이 나타나죠. 천사를 통해서 계시주면서. 보세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잖아요. 사도바울이 풍랑 만날 때 배에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배에 인구 조사할 때 47 몇 명? 숫자가 한 명 바뀌죠. 사도바울도 숫자가 바뀌었어요. 한 명 더 쳐야 돼요. 로마 가는 길에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주님이 함께 있었는데 그건 숫자에 안 넣었어요. 주님이 함께 가는 거예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은 뭐냐, 우리를 빼내기 위한 전략입니다.
홍해 앞바다에서 모세와 백성들이 함께 있었죠. 모세가 물을 갈라줘야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이 열어줘야 갈 수 있는 거예요. 왜,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세계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 아닌 이상은 못 들어가요. 그런데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해서 그 관계에, 처소에 넣어 줄 때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그냥 가만있으세요. 찾아오실 때까지. 찾아오시는데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주일 날 설교에 했잖아요.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바람 불잖아요. 오늘도 바람이 부네. 바람이 불잖아요. 주께서 활동은 쉰 적이 없어요.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추수해 내십니다. 이건 쉬지는 안했어요. 괜히 바쁜 사람보고 자꾸 안 찾아온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진도에서 수색대가 몇 명 건졌는지 뉴스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오늘 낮에 휴게소에서 보니까 배 근처에서 구조대원들이 활동하고 있죠. 안 놀아요. 안 노는데 구조 자가 없네. 맨날 박 근혜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서 건지라 하는데 물살이 세서 탁해서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그들이 놉니까? 택한 자만 건집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 작업에서는 빈틈이 없어요. 완벽하게 해냅니다. 믿읍시다, 우리가. 주께서 반드시 건질 자를 건지십니다. 괜히 우리가 나서서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속에서 우리는 사라져야 되고 난 사라져야 되니까.
우리 속에서 세례요한은 뭐였습니까? 여기 23절에 ‘아니다. 아니다’ 하니까 ‘그럼 너는 누구냐’ 할 때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소리라는 말은 바로 ‘너는 누구냐’고 물을 때는 개인이 물었잖아요. 개인이 묻고 그들의 소속을 물었거든요. 우리나라 소속에서 너는 어떤 존재냐, 묻는 거예요.
여자 목욕탕에 이상하게 남자 같이 생긴 사람이 들어왔다 말이죠. 그러면 여자 목욕탕 주인이 ‘너는 누구냐’ 묻는 것은 ‘나는 판사입니다. 나는 백수입니다.’ 그런 질문을 묻는 게 아니고 질문이 뭡니까? 소속이 뭐에요? 여탕이잖아요. 그러면 뭘 묻는 거예요? 남자냐? 여자냐? 그걸 묻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체제 속에서 ‘넌 위치가 뭐냐’ 할 때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네 체제 말고 우리 체제 따로 있어요. 그 체제에서 세례요한은 뭡니까? 소리죠. 소리니까 ‘나는‘이란 말을 쓸 수 있어요? 없어요? 쓸 수 없어요. 그분의 소리! ’그분의‘ 이니까 소유격이죠. 영어로 of, 그분에게 소속된 사람입니다.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되고.” 왜 그 말을 했을까? 왜 우리 같으면 그분도 흥한 덕분에 우리도 흥했으면 좋겠는데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되고,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있으면 그걸 둘러싼 뭐가 있기 때문에? 둘러싼 어두움의 세계,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움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계와 관련되어서 나는 쇠해야 되고, 어두움의 세계와 관련되어서 주님은 흥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자체가 개인을 언급할 때는 나, 딱 둘러선 나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소속에서의 나는 뭣과 다릅니다. 나는 저들과 이렇게 다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닙니다.
그 다음에 24절 보면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 요거 설명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했지만 또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의 결속을 위해서 율법으로 결속했다 하죠. 율법을 하기 위해서 역사가 있어야 되겠죠. 역사는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거론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보장한다. 따라서 우리의 법 해석은 이미 누적된 진리와 가까운 것만 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세례를 주는 자격자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에게 권위 있게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세례를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역사 정통성이 그대로 계속 살아있게 하는 거겠죠.
그런데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뭐라고 합니까? 세례를 주는데 너희 모르는 다른 노선에 의해서 주어지죠. 그럼 노선이 몇 개에요? 노선이 결국 두 개인 겁니다. 요걸 설명할게요. 너희들 노선 하나, 또 노선 하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기존의 노선은 아니오, 라고 하면서 비로소 등장되는 노선이 바로 낯선 노선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너는 이 노선이고 나는 이 노선이 아니고, ‘그 노선이 아니다.’고 밀침으로써 비로소 그 밀치기 전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나타나는 노선, ‘아니다.’가 아니면 절대로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날 때는 반드시 ‘아니다.’ 이야기하고 나타나야 되는 노선. 그게 바로 구원받은 노선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구원할 때 ‘너, 너, 너 하늘로 와.’ 이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고 예수님은 뭐로 판정됩니까? 이 세상에서 ‘아니오.’로 판정되죠. 그래서 같이 ‘아니다.’로 판정 받는 그 ‘아니다.’가 오히려 ‘이다’가 되는 방식을 사용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성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증거 하는 게 돼요. ‘너는 다른 거 같아. 너는 모든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하고 다른 것 같아.’라는 그런 말을 하는 가운데서 성도됨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예들이 전부 다 그런 쪽이죠.
그 다음에 봅시다. 26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요한이 질문한 사람, 사람 같지도 않은 거예요. 보세요. 질문이 뭐냐 하면 “어찌, 어찌 너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 지금 질문한 것은 “네가 세례 줄 자가 맞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거든요. “네가 누구 허락 받고 세례를 줘?” 질문이 이러면 그럼 답변이 뭐가 돼요? “나는 누구 아는 바리새인이 세례 주라 했어.” 이런다든지 “내가 알아서 한다.” 답변이 그렇게 나와야 되는데, 답변이 뭡니까? “나는 물세례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성령세례를 준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그 질문의 답변이 맞는 거예요? 아니 사람을 완전히 개 무시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엄마, 파마 어디서 했어?’ 이러면 답변이 뭡니까? ‘아, 요 동네에서 했어.’ 이래야 되는데, ‘엄마 파마 어디서 했어?’ 하니까 ‘나 지금 쌍꺼풀 수술할 거야.’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하면 ‘너는 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네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나는 내 할 도리를 계속 해야만 하는 그런 입장이라는 그런 뜻 이예요.
그래서 그 말은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너는 나에게 따질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너에게 닥칠 일만 걱정하라.‘ 그 뜻 이예요. 와~! 세례요한 세죠? 쟁반에 목 벨 만큼 대단히 센 거예요.
지금도 바리새인들이 이런 질문을 세례요한한테 했는데 이 질문을 오늘도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내용도 모르고 고분고분 답변 다해줘요. ‘어떻게 구원됐어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구원됐어요.’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구원됐습니까?’ 하면 ‘너 같은 인간에게 주께서 재림하십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자꾸 유대를 해서 힘들지 않게 살아가고 불평 없이 살아가려고 그렇게 시도하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해야 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유대지 사람과의 유대가 아니에요. 우리는 튕겨져 나와야 돼요. 그래서 교회서 나가라 할 때 이거는 사실은 이런 축복은 없어요. 문제는 그동안 내가 낸 십일조가 아까운 거죠. 십일조도 아깝지만 그동안 그 교회 깔아놓은 부조 돈 나간 게 있어서 곧 자기 딸이 결혼식 하는데 회수를 해야 되는데 나가 버리면 이단 나갔다고 결혼식 할 때 회수를 못하게 되잖아요. 그러니 인간은 선악과 체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하는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제발 나가주세요.‘ 하는 날이 올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엄마 복음 이야기하려면 나한테 이야기 하지 마.’ 이런 식으로. 제발 딴 이야기는 좋은데 엄마, 복음 이야기는 하는데 내가 미치겠다. 그러니까 복음 빼고 딴 이야기 다 해줘.‘ 이런 말이 뭐냐 하면 소속이 이미 다르다는 이야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코스를 우리가 밟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될 텐데 우리는 걱정부터 늘어집니다. 행여나 세상한테 미움받을까봐 그저 입술로만 믿기만 작정했지만 실제로 믿게 하시는 주님에게 영광 돌리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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