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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거주 1610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27. 06:02
2016-10-19 00:20:38조회 : 266         
거주 16101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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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65.245)16-10-24 22:38 
가락-요한복음12장12절(거주)161018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2장 12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12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면 그 당시 사람들의 문화, 종교적인 의식처럼 그렇게 느낄 겁니다. 사실 시편 118편 26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세 가지 축제인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그때 시편 118편을 합창, 제창, 또는 떼창,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성전에 대한 의식으로서 그렇게 해왔던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주느냐 하면, 그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주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녀교육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어요. 옛날에 있었던 그 모든 것이, 보통 민족에게는 옛날에 있었던 것은 과거잖아요. 과거로 보지 않고 예언으로 보는 겁니다.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거지만, 예언은 뭘 기다리는 겁니까? 예언이 실현되는 상태, 예언의 실현의 순간을 고대해야 되겠죠. 그럼 고대한다는 것은 희망이라는 뜻이고, 희망은 그 집단의 결속을 성립시키는 겁니다. 그걸 ‘이데올로기’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념, 통화가 되는 그 사이를 지탱하고 통합시키고 결속시켜주는 그 사회를 이데올로기라고 어려운 말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이스라엘이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구약 말씀을 반복하는 거고, 그래서 그들은 예언 성취의 수용자, 곧 예언의 성취를 받아야 될 대상자로서 거기서 국가적 정체성, 아이덴티티, 자의식이 발생됩니다. 그러면 개개인이 있더라도 전부 다 하나로, 계속해서 한 마음이 되겠죠. 한 마음. 이게 오늘날 유대교를 유지하는 지주, 정신적인 이념이 돼요. 구약성경이 있다, 그 성경은 언젠가 우리에게 복으로 주어진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겨내고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시편 118편부터 해서, 시편의 내용들이 그거에요.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것이 주 내용이 되는 겁니다. 주 내용이. 그래서 그렇게 돼버리면 미래에 대해서 완성된 일을 이야기한다는 말은 현재에 있어서의 티격태격할 수 있는 사적인 모든 의견충돌이 어떻게 되겠어요? 무마되고, 희석되고, 그런 것은 양보 될 하찮은 것이 되겠죠. 

  

큰 취지를 위해서 개인적인 이득은 스스로 접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미래에 될 일이잖아요. 방금 축제하면서 후렴으로 부르는 것이. 근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 오실 때, 그 미래에 일어나야 될 일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니까, 그게 미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 현재 완료된, 완성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자,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12장 12절을 보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을 뻔히 아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러한 호산나 찬송의 대환영의 행사가 이게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아예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자체가, 열 두 제자도 내빼고,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가하다고 투표를 했고,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투표를 했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 배척했다, 배척했다, 심하게 배척했다. 

  

“거 봐! 십자가에 죽기까지 넘겨줬잖아?” 이렇게 해야 일관성이 있는데, 이렇게 호산나 하고 찬양을 해버리니까, 호산나 찬양하는 이 상황이, 십자가 죽으면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외면했다고 하는 것과 매치가 안 되는 느낌이 들죠. 그럼 그때 호산나 외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지? 그들은 뭐하고 있었어? 반란을 일으키든지, 어떻게 시위를 하든지 하지. 죽여서는 안 되는 분이라고 이렇게 데모를 하든지 하지. 

  

바로 그 점이 곤란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할 때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생각하지 않고, 이것 자체가, 대중들에게 인기 있고 환영받는 이것 자체로써, 이게 구원의 완성으로 보면 왜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두 번째 문제가 좀 어렵죠.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 하지 마시고, 호산나 찬양이라고 할 때, ‘그렇지! 이제 내가 메시아 대우를 받는구먼. 그래. 내가 원했어. 이런 상황을 원했단 말이야. 역시 내 백성들이 나를 이렇게 환영하는구먼. 자, 여기서 임무는 끝났다. 끝내자. 주님이여, 저를 데려가옵소서.’ 호산나 찬양하면서 구름이 와서 예수님을 데려가고 하면 그 대단원의 막이, 드라마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오늘 뭐 구르미 그린 달빛이 마지막 시간이라는데, 박보검이라는 애가 그렇게 유명하대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요. 박보검 복지부장관 시키라고. 보검복지부장관. 애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있답니다. 왜 복지부장관이냐 하면 박보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진다고 해서, 니가 고만 복지부장관하라고 한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도 충분한데, 근데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말이죠. 낄 자리가. 

  

그럼 이걸 무시하고 빼는 것이 십자가하고 맞는가? 아니면 이 사실을 집어넣어야 우리가 놓친, 뭔가 십자가의 의미를 놓친 것이 있는데, 만약에 이 사실이 없이 그냥 인간들에게 버림받아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근데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하고, 환영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둘 사이에 하나는 더 보충되어야 될 십자가의 의미가 있을 수가 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집어넣었을 때. 이 말은 이것을 빼고, 이걸 무시하고 십자가를 했을 때 놓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놓친 것이. 

  

그러면 이 본문의 의미는 뭐냐, 논리가 복잡하니까 그림으로 간단하게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 안에 들어가는 선에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크게 그리고요, 그 다음에 인간을 그리게 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보거든요. 우리가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계시다. 중간은 진공, 진공상태. 끊어져 있죠. 

  

인간의 몸은 독자적인 몸이기 때문에, 샴쌍둥이가 아니잖아요. 머리 붙어 있는 몸은 아니잖아요. 몸으로 쳐서 각각 딴 몸이 되는 겁니다. 딴 몸이 될 때, 이쪽이 갖고 있는 느낌이나 의지라든지 생각들이, 예수님 말고 다른 일반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이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전달이 되겠어요? 전달 될 리가 없어요. 절대 전달 안 됩니다. 

  

인간은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주장, 일방적 내뱉음뿐이에요. 아무리 마음 맞추고, 흔히 심파시sympathy라고 영어로 그렇게 하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감이라고 하잖아요. 공감 없습니다. 공감이라는 것이 없어요. 공감이고 싶어 하겠지. 내 말에 아멘 했으니까, 내 말에 동의했으니까, 내 뜻대로 되겠지. 그거는 나중에 실망을 낳을 수밖에 없는 착각입니다. 어떤 인간도 내 뜻 그대로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어요. 

  

사랑한다고 천 번을 이야기해 봐도 그 의미를 상대방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몸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몸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도 떨어져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귐은 이해가 되어서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저 친밀도에 불과하다. 가까이서 자주 만나면 친밀도가 상승하고 아무리 좋아했던 사이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말 누가 했죠. 내가 했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안 보게 되면 거기에 다른 생각들이 막 들어와요. 다른 생각들이. 혹시 다른 사람을...뭐가 어떻고 해서 온갖 생각들을 다 집어넣어서 이게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뜻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지금, 현재 친해야 돼요. 지금 친하다는 것뿐이지, 계속해서 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결혼할 때는 타이밍이 중요한 겁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내년 가을에 하자.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냥 지금 서로 친밀한 것을 공감이라고 오해한 그 순간에 해치워버려야 해요. 해치워버려야 되지, 미적거리면 그 사이에 다른 차들이 낀다니까요. 차가 가는데 중간에 새치기해서 불나가지고 죽지 말고. 중간에 다른 차들이 끼어버리면 점점 더 멀어진다니까요. 0순위에서 1순위, 2순위, 3순위로 밀려버리면 나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불신의 관계가 되어서 이게 안 돼요. 그래서 인간은 안 됩니다. 

  

그런데 제 말은 뭐냐 하면 인간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뭔가 어려울 때, 행복할 때, 아쉬울 때, 주님! 주님! 하면서 사랑해주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언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데, 주님의 마음을 알겠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라고 백날 해봐야 전부 거짓말 밖에 안 나오고, 아멘도 사기에요. 아멘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멘 한다는 뜻은 동의한다는 그 뜻이 아니에요.
아멘이라는 뜻은 뭐냐 하면,
니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내가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 아멘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러한 고백은 니 고백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심어준 고백이 아멘인 겁니다.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이거든요.

사람에게 뭔가 특이사항이 나왔을 때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지,
니가 원인이 되어서, 니 의나 니 결심에 의해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이게 아멘입니다. 

그래서 아멘 할 때는 반드시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나오는 고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해야 해요.
아멘 하면 복 주는 것이 아니고, 아멘 그 자체가 복의 완결이에요.
아멘하고 주세요! 하고 손 벌리지 마세요.
“주의 처분에 맡기겠나이다.” 이걸 짧게 하면 아멘이에요.

어떤 교회는 아멘이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불이 나서 주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이렇게 나올 때 진짜 아멘교회에요. 어떤 애 이름이 아멘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김아멘. 박아멘. 고아원에 맡겨도 아멘할지 모르겠어요. 그게 진짜 아멘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중간 과정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다리하고 우리하고 연결이 되었어요. 예수님의 몸을 빗금으로 한다면, 예수님의 빗금이 우리한테 와서 결과를 놓고, 그 결과로 우리의 모든 것이 예수님하고 합류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진공이 아니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몸은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되면, 저쪽 5미터에 있다면, 우리 사이에 5미터가 떨어져있는 걸로 보잖아요. 그런데 주의 몸은 성도에게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걸 배워야 돼요. 이게 가면 갈수록 체험화 되어야 해요. 이게. 

  

이걸 그리스도 안이라고 해요. 그리스도 안.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 내 몸이 아니라 주의 몸의 지체로서 일어나야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불렀단 말이죠. 호산나라는 뜻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구원자 하나님이여!” 뭐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호산나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 하냐 하면,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부르겠어요? 도저히 우리 힘으로 구원될 가망성은 완전히 전무한 것, 완전히 파탄 날 경우에요. 

  

구원은 더는 없다. 우리가 할 도리를 다 했는데, 더 이상 우리가 끄집어낼 방식이나 방법이나 도리는 우리로서는 더 이상 끄집어낼 게 없다. 이제는. 결국 그런 상황에서 부를 것은 호산나밖에 없어요. “주여, 이제는 주님차례이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더는 안 됩니다. 구원해주옵소서.” 자 이렇게 될 경우에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구원해주옵소서 라고 하니까 우리말로 하면 구출해달라는 거죠. 그럼 구출할 당시에는 뭐만 아느냐 하면, 내가 아는 이 지경만 알고, 구출하고 난 뒤에 어디에 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구출당한 사람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이게 구약의 한계입니다. 구약의 한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해버리죠. 어려움에 처해버리면 사람들이 그래요. 내가 어렵다는 것을 어디에 비교하느냐 하면, 종전까지 어렵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가지고, “주여, 어렵습니다.” 뒤에 나오는 말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던 전의 상태로 돌이키게만 해주시면 고맙습니다.” 그런 수준밖에 안 돼요. 그런 수준밖에.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거는 같은 공간적 이동일 뿐이에요. 이 땅에서 이 땅으로, 같은 지역에서 이동밖에는 안 돼요. 여기서 건져내서 저기로 가는 것, 전에 재미나게 살던 그 시절로 회귀하는 것, 그것밖에 안 돼요.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살고 싶어요? 어디서 살고 싶습니까? 만약에 고르라면. 고를 수 없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에덴동산에 가게 되면 거기 뱀이 있어요. 뱀이 있고, 에덴동산에 무슨 나무가 있습니까? 선악과나무 있죠. 그때 그 시절로 한 번 돌아가 볼래요? 그리고 선악과나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면서 계속 꼬시는데, 불안 불안해서 거기서 살겠습니까? 에덴동산으로 우리가 갈 군번들도 아니고, 가서도 안 되지요. 차라리 선악과 있는 동네 말고, 선악과 없이 생명나무만 있는 동네가 좋죠. 

  

그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옵니다. 생명나무 가로수가 쫙 있고 그 안에는 강이 흐르고, 때마다 실과가 나면서, 그 강은 무슨 강이냐 하면, 에스겔이 본 성전에 흐르는 강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을 영원토록 살리는 그 강, 에덴동산. 그 에덴동산은 우리가 거할 천국이죠. 근데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 출처가 전에는 생명나무, 선악과가 에덴동산의 구조였다면, 이번에는 하나님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보좌. 

  

자, 요한계시록에서 그런 이야기할 때, 결국 우리에게 무슨 숙제를 안겨주느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영생이 나오는 그 메커니즘을 니가 밝혀라. 이게 하나의 우리에게 숙제처럼 주어지는 겁니다. “아! 좋다!” “근데 저게 왜 좋은데?” “그냥 좋네요.” 그건 잘못입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자리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좋다고 하면 안 되고,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 자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쪽을 보고 “캬아! 좋다!” 이렇게 되어야 되죠. 

  

술 먹는 사람보고 “참 좋으네? 참 맛있겠네?” 이거하고, 실제로 술 한 잔 먹어가면서 “캬아! 이슬이 이런 이슬이? 이슬이 이런 맛이가?” 술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탁 쏘는 체험적인 술과 구경만 하면서 좋다고 하는 그거하고는 달라요. 저는 요새 이상하게 매운 음식만 보면 땀이 나요. 먹지도 안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은 수시로 외부와 결속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손길이 안 닿은 적이 없어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럼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의 몸입니까?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이렇게 했을 때, 원칙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앞에 하나 붙이면 새 언약이죠. 그럼 새 언약은 뭐냐,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어 있죠. 살과 피로 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말로 희생이죠. 이 세상의 모든 근거가 유지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근거가 되어서 아직도 이 세상이 존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 혜택을 누가 받는가? 이 혜택이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주어지죠. 

  

근데 말씀해보세요. 모든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고 하면서, 용어는 뭡니까? 악인과 선인. 분명히 나와 있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혜택을 입으면 다 선인인줄 알잖아요. 근데 성경에는 악인과 선인에게 혜택이 있다고 하니까, 결국에는 주님의 희생덕분에 산다고 하는 것은 선인에 해당되고, 혜택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것은 악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로마서 1장에 의해서 너희가 나중에 심판 날에 핑계치 못하리라. 

  

은혜 받아 먹어놓고도, 니가 은혜 준 것도 모르는 것으로 니가 살았다는 것은 니가 지옥가도, 니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길에 가는 사람 잡아놓고 물어보면, 자기가 이렇게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심장의 판막이 잘 돌아가는 이 모든 것은 다 주의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나오는 것을 모르고, 지가 열심히 운동하고, 조깅하고, 산 정상에 올라가서 그 덕분에 자기가 건강하다고, 그렇게 주변에서 자꾸 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발이 아프다.” 평상시에 하는 문장이고 용어죠. “나는 발이 아프다.”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내 발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주께서 아프게 한 고통이 내 발을 통해서 튀어나온다.” 이렇게 해야 해요. 약간 복잡하지만. 주께서 때가 되어서, 어떤 의미가 있어서, 무슨 의도가 있어서, 나로 하여금 아픔을 내 발을 통해서 튀어나오게 한다. 그래서 내 몸은 내 고통의 원인이 절대로 될 수가 없다.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에 있다. 예수님의 뜻에 있다

  

그래서 이 전체를 뭐라고 하냐 하면, 이게 진정한 아멘이고 호산나가 되는 겁니다. 이미 그때 너희가 기대했던 예언은 이제 예언이 아니고, 이게 현실이 된 거예요. 현실이. 더 쉽게 말해서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 몸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동시적으로 거기에 뭐가 따라 오는가 하면, 예수님을 향하여 예언했던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의 행위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이, 모든 말씀의 완성태, 완성 상태로 거기에 가득하게 같이 동반해서 있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은 그 자체가 구원된 완성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 안 믿던 내가 예수 믿음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과 상관없었던 우리에게 예수님이 믿음을 선물로 줌으로 말미암아 나를 포함해서 되어진 모든 상황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구원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의미하는 거죠. 

  

이렇게 내 몸과 예수님 몸이 하나가 된 결속을 가지고 이걸 관계성이라고 하고, 이걸 연루, 연루되어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거든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관계성, 연루, 이 상태가 바로 언약관계입니다. 이게 언약관계인데, 이게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연루성가지고 이 지상에서 이미 실현이 된 거예요. 이미 개시가 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호산나 하는 것이, 늦게 오신 분은 모르지만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때에 호산나를 부른다고 했던가요? 어떤 때에? 아까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들이 구약 때 했던 모든 절기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실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자체가 완성된 축제가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이렇게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같이 되어 있는 이걸로 해서 제목을 정하겠습니다. 제목 한다고 해서 믿지 마세요. 

  

‘거주’라고 하겠습니다. 거주. 주님과 함께 거주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죠. 여기서 반드시 주의할 것은 내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고 하니까 우리는 나를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나를 없애버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주님만 있다. 이렇게 되잖아요. 주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거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가 죽으면 하나만 남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요. 

  

그 관계를 계속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관계에 참여한 그 주체와 그 대상자가 늘 함께 살아있으면서, 거주 속에서 그 연루된 관계성이 계속해서, 그게 언약이겠죠. 그 언약이 계속해서 살아나야 돼요. 따라서 사도바울 같으면 작년에도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올해도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면, “니 작년에 죽었잖아? 작년에 죽은 니를 거론하지 말아야지?” 작년에 죽었으면, 그럼 주님이 산다. 주님이 산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왜 올해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느냐? 

  

그거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는 누구하나 죽고 나면 나만 남았다는 것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그 관계성,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되게 그 관계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우리가 발휘해야 되는 거예요. 그 기능을. 그래야 그 언약적 말씀이 살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계속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죽고 늘 살아나야 되고, 늘 죽고 늘 살아나야 돼요. 그래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계속 살아있죠. 

  

관심사가 말씀이어야 하지, 우리 자신이 뭘 획득했다, 소유했다, 그건 내 거다, 그런데 관심두면 이게 안 돼요. 그거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그 한 것을 잘 이해했는지, 제가 한 번 퀴즈문제를 낼게요. 초상화와 산 사람의 차이점이 뭐죠? 초상화와 산 사람의 차이점? 초상화 같으면 화가가 있잖아요. 화가가 그렸죠. 주님이 우리를 하셨다고 하니까, 자꾸 우리는 초상화 같은 느낌이 드는데, 우리는 산 사람이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 우리가 죄인의 모습으로, 그 죄인의 모습이 예수님 쪽으로 이렇게 결성이 되고 결합이 되어있어야 해요. 

  

이게 거주적인 관계입니다. 초상화는 그냥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언약을 살려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죄인으로 살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그러면 끝! 이게 아니고, 만들었는데 그 만들어진 것이 내 구원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그 새 언약의 완성의 위엄을 계속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죽을 때까지,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발산해야 할 그러한 기능으로 쓰여 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보면 그 다음 문제가 풀려요. 호산나 했는데, 왜 십자가에 죽이셨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부터 풀리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호산나 했으면 그걸로 끝내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아! 수고했다! 환영받았나?” “환영받았습니다.” “완성했으니까 데려가겠다.” 이렇게 하시고. 호산나하면서 그렇게 환영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잡힐 때 시위하고 데모하지 않고, “이 분은 메시아입니다.” 누구 하나 입 뗀 사람도 없어요. 심지어 여기에 열 두 제자가 있었잖아요.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시위 할 수 없고, 베드로가 나서서 “제가 호위무사 되겠습니다.” 해도 “그 칼을 거두어라!” 베드로가 “제가 지키겠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통촉이고 뭐고, 칼을 거두어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해놓고 결국은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고 해서 갈 테면 가라고 예수님이 다 보내버리고 혼자 올라가셨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 호산나하고 어울리지 않는, 그 환영받았던 그 최고조가 갑자기, 급작스럽게 뚝 떨어져가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다 기피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되는 그것이 왜 언약의 완성이냐? 호산나로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완성이냐? 그 점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 이 점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운가 하면,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에요? 아니면 십자가 사건이 복음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죠? 사도바울은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막달라 마리아하고 야고보 엄마하고 세베대의 아들의 엄마, 그 세 사람이 있었고, 그 다음에 전부 다 적들이 있었어요. 로마 군병들하고 또 심심해서 구경 온 사람들, 지하철 공짜로 타고 구경 온 노인네도 있을 수 있고, 정치적인 사안인가 싶어가지고 신문기자 몇 명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가장 큰 목격자는 양쪽에 있던 두 강도가 배후로서 참여했죠. 

  

그러나 거기에 사람들이 약간 있다 할지라도, 이거는 어디까지나 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은 주류로부터 거부당한 상황이죠. 주류사회로부터, 주류세계로부터. 다시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고, 내가 예수님 죽음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것이 나한테 불리하면 불리했지, 절대로 내 생존에 유리할 수 없는, 입 다물어야 될, 잘라내야 될 불길한 일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그 사회였습니다. 그 십자가사건이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그걸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세상이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으로 구성되는 겁니까? 사건으로 구성되는 겁니까? 몸이냐? 사건이냐? 자, 몸은 아니에요. 몸은 어디에 구애를 받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습니다. 누가 한 번 요한계시록 11장을 찾아보세요. 11장 어디를 찾아보느냐 하면, 11장 8절을 한 번 봅시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자, 보세요. 이걸 몸으로 하면 장소가 혼선이 일어납니다. 소돔하고 애굽하고 가까운 거리가 아니에요. 이집트하고 소돔이니까, 지금의 레바논. 하여튼 레바논인가 이스라엘 경계선인데, 사해 위쪽에 있으니까. 또 하나는 뭡니까? 갈보리언덕. 어떻게? 지금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왜 그게 같은 장소가 되죠? 우리가 지리적으로 같은 장소가 아니라고 할 때는 펼쳐놓고 보면 아니죠? 애굽은 저 남쪽에 있고, 소돔은 북쪽에 있고, 그 다음에 갈보리는 약간 더 서쪽에 있고. 

  

지중해가 여기 있다면, 애굽은 저 밑에 이집트 있고, 사해 북쪽에 소돔과 고모라 있고, 여기 갈보리언덕, 산 정상 옆에 갈보리언덕이 있단 말이죠. 이건 지중해고. 이게 어떻게 같은 장소가 될 수 있습니까? 펼쳐놓고 보면. 근데 펼쳐놓고 보지 말고 중첩되어 봅시다. 그걸 보태고, 보태고, 또 보태고, 또 보태고, 이렇게 수평으로 보지 말고, 펼치지 말고. 

  

이걸 중첩으로 보면 이 모든 지명은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꼭 동원되어야 했던 지명들이 아니라, 그 지명에서 일어났던,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사건이 중첩이 되면, 큰 하나의 사건을 이루죠. 그게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에 어떤 장소가 필요했다? 애굽 나라가 필요했고. 십자가 사건에 뭐가 필요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필요했고. 십자가 사건에 뭐가 필요했다? 갈보리언덕이 필요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의 편성, 이러한 구성은 누가 할 수 있어요? 어느 몸이 할 수 있어요? 인간의 몸은 그걸 해낼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몸이 왜 해내지를 못하느냐 하면, 인간의 몸은 전체의 부분이 돼버려요. 부분은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요 근래 강의하면서 자주 이야기하는 건데, 부분이 어떻게 존재의미를 알 수가 있죠? 제가 지난 강의 할 때도 그렇고, 전에 설교할 때도 그랬는데, 사람은 며칠째 만들었죠? 6일째 만들었죠. 

  

그럼 6일째 만들어진 것이 창세전의 일에 대해서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짬뽕이고 짜장면이고 간에 주는 대로 먹어야지, 지가 달은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달을 만들었으면 됐지, 달은 왜 갑자기 보름달 됐다가 초승달 됐다가 합니까? 하늘의 별은 왜 그리 많습니까? 별 헤다가 볼 일 다보겠다. 별 헤는 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별 헤다가 어머니이야기 해버렸어요. 

  

왜냐, 별에 붙인 모든 윤동주 시인의 이미지가 사실은 어머니로 이끌게 한, 사실은 진짜 보고 싶은 것은 친구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진짜 내면에 보고 싶은 것은 어머니였다. 이걸 시로 표현하기 위해서 엉뚱한 것 붙여놓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어머니를 붙이는 거예요. 윤동주가. 자, 그러면 별은 왜 있습니까? 우리는 알아요. 뭐냐 하면, 별은 누굴 위해서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윤동주가 별하고 어머니를 붙이고 싶었는데, 초장부터 붙이지 않고 끝에다 붙이면서, 앞에 거기까지 오는 과정으로,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이렇게 붙이고 나서 그 다음에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끝에 붙이잖아요. 

  

그처럼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누구 이름 붙이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붙이겠죠. 이스라엘이 어떻고, 아브라함이 어떻고, 이삭이 어떻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붙이겠죠. 그러면 그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찾아갔다는 자체가 사건화 시키는 거예요. 그럼 사건을 펼치는 것이 아니고, 이걸 수직적으로 중첩을 시켜버리면, 그 아브라함이 있는 이유도 예수님을 위해서, 이삭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 야곱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걸 저는 사건으로 봤지만,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서는 영적으로 본 거예요. 영은 이 세상 말고 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속에서 사건화 될 때만 그게 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걸 우발성이라고 합니다. 영은 육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가지고 다닐 것이 아닙니다. 포터블portable이 아니에요. 내가 장착할 것이 아니에요. 이동할 것도 아니고. 소유대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주 명확할 거예요. 십자가 피 앞에서 상상은 없다. 아까 제가 질문했습니다. 현실은 뭐냐, 세상은 뭐냐고 물었죠? 상상입니다. 내가 꿈꾸어오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하다고 내가 느끼는, 내 몸이 느끼는 상상이 지금 그대로, 이 나이에, 이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나의 현실이고, 나의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부분은 전체를 알아요? 몰라요? 모르니까 그냥 일방적으로 우기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 상상대로 되게 하옵소서.” 이걸 두 자로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 기도의 참된 본심은 기대에요. 인텐션intention하는 거예요. 의도하는 거예요. 의도하는 것을 인간들은 성경용어에 기도가 나오니까, 기도라고 한 거예요. 이걸 아주 묵사발 만들었죠. “니가 기대한 것을 기도하지 마라!” 주님께서. 그거는 기도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왜 내가 기대하는 것을 기도해서는 안 됩니까? 그거는 상상이나 하구거든요. 허구. 

  

그 허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내 몸, 이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이것을 나를 이 세상에 중심으로 놓고, 전체라고 보고, 내가 일방적으로 구성한 가짜현실, 그 구성한 가짜현실에 동원된 것이 가짜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진짜 참된 신앙의 첫걸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였다는 겁니다. 그걸 줄이면 하나님은 가짜다. 진짜 하나님은 알 수가 없다. 왜? 존재성이 아니고, 그냥 우발적으로 나에게 성령에 의해서, 성령세례가 찾아와야 하기 때문에. 

  

아까 그 강의를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정리해보면 이렇게 돼요. 내 몸이 여기 있다 합시다. 우리는 무엇을 상상한다? 계속해서 예수님 상상하고 하나님 상상하죠. 그 사이는 비어있죠. 비어있으니까 상상하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오히려 의아해해요. 의아해한다. 제목이 이게 더 지당한 것 같기도 하고, 거주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왜 찾아오십니까? 왜? 주님이여! 제가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잘 알고, 삼위일체 연구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죄인이라고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저는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니 현실 부수기 위해서 왔다. 니 현실.” 니가 니를 보호하고, 종교생활로 니 장래를 보장받고 천국까지 가고자 하는 이 거짓된 체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그 작업으로 예수님께서 그 발바닥으로 있는 시커먼 그 빗금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무시한 사람은 오는 세대까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오게 되면 우리는 사로잡히죠. 사로잡히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모든 것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너의 그 상상했던 죄도 예수님한테 가는 거예요. 화살표가 위에서부터, 주님 쪽에서부터 오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서 가고, 또 오고 또 가고, 이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거주함. 주님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사는 모습입니다. 나중에 천국 가면 면류관 던지면서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겠죠. 찬양 드리고, 받으시고, 감사하고, 또 찬양 드리고 기뻐하고. 이 땅에서 육신이 있기 때문에 죄짓고, 용서해주시고, 또 죄짓고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죄짓는 것밖에 없어요. 지난 낮 설교 했잖아요.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 핍박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성질대로 살면 돼요. 우리 성질대로 살면 그게 핍박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성질에서 뭐가 나오죠? 상상이 나오죠. 그래서 이 상상이 나온다는 이 상상을 가지고 자크 라캉은 최초로 이걸 밝혀냈어요. 상상계라는 것을. 프로이드도 이걸 몰랐어요. 상상계, 상징계. 프로이드가 이런 용어를 썼지만 그걸 밝혀낸 것은 제자인 자크 라캉이 한 거예요. 자크 라캉은 지난 부산강의에서 했습니다. 

  

상상계, 상징계, 시간관계상 이것만 했는데, 나중에 12월에 할 건데, 지젝은 실재계까지 해요. 실재계. 세 가지가 있어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실재를 오브제 아(objet a)라고 해서 잉여, 여분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나온 욕망인지 모르지만, 뭔가 더 쾌락적이고 더 짜릿한 것이 있을 건데, 라고 계속 추구하게 만드는 그런 유혹 같은 것이에요. 유혹 같은 것이. 이것은 결국 우리 안에 뭐가 작용한다? 우리 육신 안에 선악과의 유혹이 죽을 때까지 계속 작용해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사건의 구체화로 사용을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구체화로. 

  

우리가 아무리 착해도 늙음을 회수할 수는 없는 겁니다. “착하게 살아라. 그러면 청춘을 돌려줄게.” 뭐 이런 구절이 있던가요? 사도바울이 “하나님, 바르게 살면 저를 젊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사도바울이 소원했던가요? 아니면 “주님이여, 어서 나를 이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새로운 육신을 덧입기를 원합니다.” 어느 쪽이에요? 덧입죠.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산소 같은 그것은, 산소는 이 지상에 없어요. 주님이 산소 같은 분이에요. 흠도 티도 없는 거룩, 그 완벽한 형상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로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이 완전한 이상,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이 몸이 후패해지는 것이고, 그 후패해질 때도 이게 그냥 우리 몸이 후패해지면 안 되고, 사건에 편입되어야 하거든요. 

  

우리가 후패해지는 하나까지라도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해요.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가 해야 될 것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죽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거거든요. “여러분이 아무리 해도 의를 이룰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래 된다 말이죠. 그럼 그 설교는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이미 성령세례 받은 사람만이 납득이 되겠죠. 

  

그럼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그럼 성령세례 안 받은 사람이 납득이 안 되면?”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왜 걱정하십니까?” “그럼 뭐 달랑 두 명 남는데?” 아니 두 명 남든, 세 명 남든, 두 세 사람만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두 명 남으면 운영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빚내서 부동산을 했느냐 말이죠. 쓸데없이 부동산 크게 해놓고 채워달라고 하면 되겠어요. 그게 무슨 세계인데? 교인들이 상상한 세계에요. 

  

그래서 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는 필히 알아야 돼요. 왜?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모습이니까. 알려드려요? 상상은 바로 타인의 욕망에서부터 옵니다. 이걸 대타자, 大, Large, 대문자 A로 썼어요. 대타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꼰대, 어떤 어르신네. 그 어르신네 안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부터 출발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르신네를 떠날 수 없어요. 어르신네의 의식으로 우리는 꽉 덮여져있습니다. 이게 상상계입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네가 어릴 때는 부모고, 커서는 교사고, 그 다음에 교회가면 목사고, 성인이 되면 이것이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신은 가짜 신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인류사 모든 아담에게 다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겼어요. 자, 예수 믿은 자를 잡아 죽인 자가 누굽니까? 잡아 죽여서 가둔 사람이 누구죠? 사울이죠. 사울의 대타자가 누구였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았습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65.245)16-10-24 22:38 
가락-요한복음12장12절(거주)161018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연루’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관조.’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바라보니까 이 안에 관계성이 없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예수님 저기 있으면 그 사이는 진공상태처럼, 그냥 주시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믿을까 말까는 내가 선택해야지.’ 이게 관조입니다. ‘그래, 결심했어. 예수님 믿어보자.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지.’ 백날 해봐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라캉은 바로 이게 너의 상상인데, 이 상상은 니가 이미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상상이라는 겁니다. 

이 상상의 특징은, 부모가 길들일 때 어떻게 길들였느냐 하면, 채찍과 당근으로 길을 들여놓으니까, 여기서 선과 악이 성립돼요. 선과 악. 선은 뭐냐 하면 너한테 유리한 것이 선이고, 너한테 불리한 것이 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라고 할 때는,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이거는 뭐냐 하면 몸의 감각이겠죠. 맴매해서 아프면 이거는 악이 되고, 맛있는 초콜릿 사주면 선이 되고. 그래서 부모가 양육하고 훈계할 때에 불리한 것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게 하고 유리한 쪽으로 인도하겠죠. 

그런데 이제 부모가 양육하면서 자식들에게 부모가 뭔가 한계에 이른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어느 정도 가르치면 가르친 것은 잘해요. 그 안에서. 그런데 새로운 의외성이 계속 나올 때, 잔소리가 계속 늘어나는 거예요. 잔소리가 계속 늘어나요. 새로운 사태들이, 여러 가지 경우수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가르친 것 가지고는 더 이상 적용이 안 되는 것. 식사할 때, “숟가락 가지고는 밥을 먹고 젓가락 가지고는 반찬 먹어야 돼.” 그걸 해서 착한 사람으로 종결됩니까? 교도소에 가보세요. 전부 다 숟가락 가지고 밥 먹지. 안 되거든요. 

새로운 상황이 들이닥칠 때, 사태가 왔을 때, 거기에 대한 또 선과 악을, 부모가 거기에 대한 양육과 훈계를 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 새로운 사태가, 부모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부모가 여기서 무리수를 하든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죠. 스마트 폰 게임할 때 풍선을 열 개 이상 하지 말라는 그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로 게임에 정통한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풍선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모르니까 그들은 누구한테 묻는가? 친구한테 묻겠죠. 

그러면 대타자가 부모로부터 선악을 알던 것이, 부모의 한계를 딱 느껴버리면, 이제는 부모의 말이 그야말로 잔소리가 되어 버리죠. 바이 바이가 돼버려요. 더 새로운 정보는 친구한테 듣는 겁니다. 친구한테 그걸 더욱더 수집하게 되어 있죠. 추가적으로 모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친구가 가져온 정보에 의해서 선악이 돼버리면, 이거는 나중에 어떤 관계가 되느냐 하면 부모가 했던 선악의 기준과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서 했던 기준과 이게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맞을 리가 없는 거예요. 맞지 않는다는 것은 대척관계가 있단 말이고, 이제는 어느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한쪽 기준을 완전히 철폐해야 할 입장인 거예요. ‘이제는 엄마 말이라면 무조건 안 들어.’ 이래 돼버려요. 무조건 안 들어버려요. 

왜냐하면 엄마 말을 대체할 새로운 그것이 내 몸을 기쁘게 만든 요소가 돼버려요. 어릴 때부터 이미 자기 몸이 기쁘고 즐거운 것은 선이 되고, 자기 몸이 불편한 것은 악이 된다고 이미 몸 자체가 인식이 되어서 반응을 하기 때문에. 이제는 담배 피우고 술 먹는 이것이 이상하게 자기 몸을 기쁘게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엄마가 잔소리하니까, 전에 있던 바른 기준도 이제는 내쳐버리고, 이제는 술, 담배 하는 친구와 더불어서 새로운 자아상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의 범위가 넓혀져 버리면, 뭐냐 하면 선배가 생기고 후배가 생기겠죠. 그러면 그 애가 나중에 사회에 나갈 때 누구 말 듣느냐 하면 부모 말 안 듣고, 학교 교사 말도 안 듣고, 교회 목사 말도 안 듣고, 선배 말을 듣는데, 그 선배가 조폭 오야붕이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이게 대타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조폭 오야붕을 만나서 바다이야기라든지 게임하다가 체포가 되죠. 체포가 되는 그것을 가지고 상징계라고 합니다. 

상상으로 자기를 뽐내다가,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고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이 뭐냐 하면, 상상계에 있다가 상징계라는 더 넓은 범위의, 상징계에서 주어지는 법, 사회적 질서법, 이게 상징계입니다. 사회적 질서법이니까, 자기의 상상계가 상징계에서 이렇게 깨어질 때,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현실을 느끼고 세상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겁니다. 느낄 때,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바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겠죠.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불안, 이것이 몸의 증세로 나타나면 이걸 가지고 히스테리, 또는 노이로제라고 합니다. 이런 몸의 증세로 드러나게 돼요. 이게 더 가면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죠. 

왜 이런 병이 생기느냐 하면, 나는 아무리 상징계가 벽이 높더라도, 아무리 사회법이 무섭다 할지라도 나는 상상계를 못 버리겠어. 이렇게 고집을 세우니까 몸은 하나인데, 잡아당기는 세계는 몇 개입니까? 두 개죠. 여기서 몸은 자동적으로 몸에 익숙한 세계에 소속되는 것과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는 그 사이에서 몸이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이 바로 정신병이고 노이로제고 히스테리입니다. 그래서 보통 직장에서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하잖아요. 노처녀 히스테리! 얼마나 직장에서 대리가 히스테리가 많으면 이름도 히숙대리 라고 해요. 개콘에 나오는 히숙대리. 하여튼 히스테리가 많다는 뜻이에요. 

교회 가면 그런 사람 있어요. 여전도사 히숙대리. 괜히 부부간에 정이 좋으면 질투를 해가지고 여전도사 노처녀 히숙대리가 있죠. 이거는 자동적으로 발사되는 거예요. 이거 치료방법으로 라캉은 이렇게 치료합니다. “니는 죄인이야!” 이거 한 마디로 다 된다는 겁니다. 니는 죄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히스테리의 증세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어요. 이거는 정신병에서 약물로 하는 것보다도 정신적 구조로 풀어야 되는 겁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것 가지고 2016년도 노벨문학상 탄 사람이 있습니다.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밥 딜런의 시에 보면, 결국은 자연주의죠. 우리는 이 세상에 흩어져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 문화가 1960년대에 유행했었던 히피였습니다. 무정부주의에요. 무정부주의. 히피는 극단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마약과 이런 것을 해서,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한 뭐든지 용납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질서로부터 탈출하라. 젊은이들이여! 왜냐하면 이 기존의 질서는 상징법이거든요. 상징법은 우리가 어릴 때 갖고 있던, 동화 같은 상상의 세계를 계속 구박하고, 그걸 파괴시키고, 계속 부수니까, 몸은 이미 늙어서 어릴 때로 못 돌아가고, 인간이 다시 거듭날 수가 없잖아요. 

몸은 늙었는데, 마음속의 순수한 꿈은 어릴 때 백설공주고, 신데렐라고, 백마 탄 왕자고. 그러니까 어릴 때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Beautiful한데, 왜 어른이 되고 나니까 실제로 이 세상사는 것이 왜 그렇게 만만치 않느냐, 왜 이렇게 힘드냐 이 말이죠. 이 고생을 언제까지 해야 되느냐?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이 말이죠. 자유가 있으면 내 인생을 내 원대로 고를 수 있는 자유선택이 있다면, 의지가 있다면, 그 의지를 우리는 국가라는 이름에 희생시키지 말고 그걸 마음껏 발휘하자.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빠라빠라빠라밤~♬ 오토바이 타고 돌아다니면서, 수염 기르고, 재킷입고, 극도의 쾌락을 맛보면서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이 놓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상징계의 법인 이 국가를 공격하기 이전에 본인의 늙음이, 본인의 죽음의 능력이 본인을 힘들게 하고, 본인의 육신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나이 안 들어봤으니까 그걸 모르는 거예요. 젊은 애들은 마냥 계속해서 자기의 젊음이 안 아프고 가고자 하는 거예요. 이 몸 자체가 아무 이상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 몸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몸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계획은 많아요. 그리고 내 몸은 절대로 피곤을 모르는 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어벤져스에요. 어벤져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특징이 뭐였던가요? 피로를 몰라요. 스파이더맨이 아이구, 힘 빠진다고 하면서 멈춰있던가요? 항상 쌩쌩해요. 원더우먼이나 이런 사람들. 늘 건강하잖아요. 늘 건강하고 건장하죠. 뭐 어떤 적들이 나타나도 빰빠라빰빠~♬시금치만 먹으면, 진짜 제가 어릴 때 시금치만 먹으면 힘이 생기는 줄 알았어요. 뽀빠이 살려줘요! 올리브가 이렇게 하면. 그 만화영화 보면서 불만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부루트스는 매주 그렇게 맞으면서 그렇게 까불고, 올리브는 그렇게 뽀빠이가 살려주게 되면 아예 뽀빠이하고 붙어  살든지, 왜 자꾸 살려달라고 하니, 도대체 몇 번째에요? 몇 번째? 그리고 뽀빠이도 불만이 많은 게, 뽀빠이도 평소에 시금치를 많이 먹고 있지, 꼭 일이 있을 때만 먹어요. 일이 있을 때만. 뭐 비타민도 아니고. 

다 이게 어릴 때 꿈이 어른이 되니까 그게 그리운 거예요. 그만큼 죽음의 힘을 감당하기가 곤란하다 이 말이죠. 프로이드는 개인적인 정신병에서 했는데, 라캉은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까지 확대시킵니다. 이 원리를. 확대시켰는데, 상상계에서 알 수 없는 욕망(a)으로 인해 대타자(A)의 욕망으로 갑니다. 상징계로 가다가 상상계에 교란되어서 주체에 이르지 못해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상상계에 있다가, 어릴 때의 상상계에 있다가, 상상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릴 때만 상상계가 아니고, 뭔가 괜찮다 싶으면 그걸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상상계입니다. ‘그래, 저게 내 모습이야.’ ‘나는 기타리스트가 될래.’ 

기타치고 싶다고 해서 애들한테 기타사주면 3개월도 안 돼서 그 다음에 피겨하려고 해요. 피겨. 피겨 하다가 그 다음에 골프한다고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돈만 갖다 다 줘보세요. 갖고 놀다가 재미없다고 또 딴 데 하고. 아휴! 참!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그 아이를 가르치는 엄마의 어릴 때, 이쁜 애로 잘 키웠다는 그 상상계를 양육 받아서 그래요. 그렇게 자기 엄마한테 양육 받아가지고, 자기 자식 잘 키우는 것이 자기 책무고, 나의 나됨. 

그러니까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어떤 외부의 타인과 일치시키는 것이 있잖아요. 자식을 잘 키우는 그 엄마의 모습을 자기의 상상으로 늘 이걸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이 포기를 못하니까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만들고, 자식은 부모 따라하고. 이게 마마보이가 돼버리는 거예요. 심지어 시집가도, 대학가서 중간고사 볼 때도 교수 찾아가서 점수 똑바로 매기라고 엄마가 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드론처럼 위에서 주시하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소개팅 하는 데는 다 따라가고. 그러면 자식이 엄마를 이용해요. 

그런데 그거 아니면 엄마는 지금껏 자신이 사는 의미가 없는데요? 뭐 오십대가 바다를 볼까요? 바다 많이 보라고 해요. 인천에 가면 바다 많이 있어요. 오십대가 되어서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보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자아를 찾았다. 자아를 찾는 것도요, 자아를 찾은 것이 아니에요. 결혼 전으로 돌아간 거예요. 몸은 늙었는데, 결혼 전 20대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혼하고 50대는 가능성이 없어요. 50이 넘었는데 누가 좋아합니까? 그래서 주체 자체가 분열이 되는 거예요. 주체 자체가 찢어지는 겁니다. 늘 찌어지니까 여기서 뭐가 생긴다? 깊은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정해져요. 인간이. 

그럼 불안정하면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죠? 더 욕망을 찾겠죠. 더 짜릿한 것을 찾겠죠. 그 찾는 그 요구를 이제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욕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타인들에게 욕망을 물어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습니까?” 이걸 타인에게 묻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실재계에요. 실재계. 이렇게 타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결국은 스스로 누구의 종이 된다? 타인의 종이 되는 거죠. 이렇게 묻는 이유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는 어떠한 것도 기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물이 먹고 싶어서 물을 마셨다. 마신 뒤에 콜라가 먹고 싶다. 아까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다음에 또 피자해보세요. 지겹다고 해요. 그러면 지겨우면 어떻게 하느냐, 무슨 음식이든지 또 찾아야 되겠죠. 물어야 되겠죠. 어느 것이 맛있는지. 맛집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누구의 종이에요? 내가 이미 타인의 욕망에 종이 되는 겁니다. 종이 되면서 인간은 상상계에 군림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 순간 나는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스스로 자기에게 억지를 부리면서 위로를 하는 거예요. 

이 버릇이 성경 볼 때 그대로 나옵니다. ‘나는 신자 맞아. 나는 은혜 받은 거 맞아. 성령세례 받은 거 맞아.’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억지를 부리고 최면을 거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오늘 밤 죽으면 천당 갈 거야.’ 자기 확신을 계속 다지고 다지는데, 그렇게 다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미 실재계에 빠져버린 거예요. 내가 나한테 종이 되는 것. 그것을 라캉은 타인한테 종이 되었다고 하는데, 라캉은 사실 알아요. 그 타인이 악마라는 것을 알아요. 악마. 인간은 이미 악마의 밥이 된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선악나무는 그냥 관조해야 해요. 그걸 자기 소유로 만들면 안 돼요. 선악나무의 뿌리가, 에덴동산에 물이 흐르죠. 중앙에 나무가 두 그루 있어요. 이 나무가 분명히 다른 종류의 나무다 이 말이죠. 하나, 둘이에요. 일이 아니고. 둘인데, 나중에 보니까 이 둘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느냐, 하나를 따먹으니까 남은 하나 역시 못 따먹는 나무가 돼버린 거예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천지창조를 할 때, 전부 다 따로 만든 것 같지만 사실 그 바닥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가 놓여있었던 겁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전부 다.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인간과. 모든 것이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다 통하게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걸 골로새서 1장 16절에 와서야 알지, 신약에 와서 알지, 그걸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르죠. 가인이 아벨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인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죽여 보니까, 동생을 죽이고 난 뒤에 이게 알려진 거예요. 

쉽게 갑시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을 여자, 여자, 남자, 남자라고 해도 괜찮고, 여자, 남자라고 해도 괜찮은데, 상대를 볼 때에 우리는 저 사람이 내 맘에 든다, 안 든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성도는 뭘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이걸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성도를 볼 때는, 여자고, 남자다 했을 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그 남자를 봐야 해요. 근데 이론은 그럴 듯한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저 남자를 좋다고 했을 때, 저 남자의 반응이 뭘까? 별로라고 한다면 내 위신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는데, 나는 그 꼴을 못 보겠다고 혼자서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저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안 받아주게 되면, 첫 번째 안 받아주며? 두 번째 받아주면? 세 번째 나의 대처는? 이걸 또 생각한다고요. 만약에 둘이 청춘남녀라면 얼마나 축하해주겠어요? 근데 청춘남녀가 아니고 기혼자라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기혼자라면. 이게 전부 다 어디서 나온 거예요? 전부 다 선악을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후유증이라고요. 근데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게 되면 뭡니까? 1번을 하든, 2번을 하든, 3번을 하든, 그것은 필히 니 속에서 나와야 될 죄가 돼요. 나와야 될. 

여기 ‘나와 될’ 이라는 말을 꼭 붙입니다. 그냥 죄라고 하면 “안 할게요.” 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필히 나와야 될 죄가 되는 겁니다. 필히 나와야 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발시킴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예수님의 생명나무가 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생명나무는 뭡니까?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을 고려한다? 안 한다? 일체 고려 안 해요. 그게 복음입니다. 일체 고려 안 합니다. 

왜? 고려하지 않느냐 하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일임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나의 원수 되었으나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원수 된 너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거든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해요? 화목제물 되시는 예수님하고 상대하죠.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위인이 없었으나 주님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있어서, 로마서 3장인데. 21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가 없나니” 이 네모가 뭐죠? “육체” 

“육체는 없나니” 그럼 끝났죠. 지옥가야 되죠. 율법으로는 없는데, 그 다음에 뭐냐, 22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의가 나타나가지고 우리에게 폼만 잡고 구경만 시켜주고 바이바이 합니까?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의 한 의가 실제로 실적을 남기고 열매를 맺겠죠. 그러면 성도는 무엇의 열매입니까? 성도 본인의 행함의 열매가 아니고 누구 열매입니까? 우리는 접어두고, 아예 상종도 안 하고 나타난 화목제물의 의미, 가치, 그 취지를 그냥 고스란히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그 덩어리가 뭐다?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성도. 

성도를 딱 깨버리면 화목제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화목제물은 모든 다섯 가지 제사 가운데 마지막 제사, 완료된 제사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 사실을 미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니까,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죠. 아직도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행함은 이미 접었다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버리니까, 우리는 시간상 현재 밖을 못 벗어나는데, 현재 이후의 미래의 일을 우리한테 이야기하니까, 도대체 이거는 못 알아듣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주제가 바로 캘거리강의에서 한 겁니다. 캘거리강의 1강을 하고 난 뒤에 김을수 집사님은 목사님 강의하는데 힘든 것을 보고 내가 다 기운이 빠졌다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려고 아주 용을 썼는데, 위로 아닌 덕담을 그렇게 해주셨어요. 오늘 본문에서 호산나 했죠. 호산나를 누가 알고 있었느냐,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 그들에게 호산나를 누가 시켰습니까? 그들이 자발적으로 했죠.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한 거예요. 

근데, 오해했는데 예수님은 그 오해한 것을, 너희들 쪽에서 분명히 오해했는데, 너희들은 현재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되지만, 미래를 알고 미래를 몰고 오셔서 현재에다 덮쳐버린 입장에서 너희들의 그 오해가 주님한테는 합치된 거예요. 주님한테 합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 모습이 왜 있느냐 하면, 십자가 이전의 모습이 있잖아요? 십자가 이후에도 우리는 이 모습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맨날 상상계하면서 내가 신자 맞다, 나는 기도에 대해서 안다, 나는 복음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그걸, 조금만 되면, 내일되고 모레가 되기만 하면 오해임을 계속 깨우쳐주는 거예요. 

그럼 오해임을 깨우쳐주면, 그럼 오해했으면 구원 못 받았네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로마서 3장에서. 우리의 어떤 행동도 차단한다고 했죠. 오해를 하든, 육해를 하든, 육회? 육회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칠해를 하든, 팔해를 하든 간에, 구원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화목제물. 예수님이 예수님의 자기 성과의 열매로써 구원하는 건데, 우리가 오해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나는 매일 오해한다. 나는 매일 착각한다.’ 이런 고백이 두 글자로 줄이면 ‘아멘’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 지금도 주께서 해내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진실로 그러합니다. 아멘.” 이게 사도바울이 누렸던, 성령 안에서의 마음껏 자유입니다. 마음껏 자유죠. 구약사람들은 빠져나온 것만 생각했어요. 자기의 고통과 아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거는 구원 아니에요. 구원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느냐, 사도바울 정도가 되어야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즐기는 거예요. 뭘 즐긴다? 내가 벌이는 나의 오해를 보고 즐기고, 나의 죄를 보고 즐기는 거고, 나의 실수와 실수라고 할 것도 없이 본심이죠. 뭐. 실수를 보고 마음껏 호탕한 웃음을 띠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그거 해봐야 현재거든요. 현재에 있는 우리를 미래가 그렇게 다루어준다는 것이 바로 수직적으로 세운, 아까 지명을 펼쳐놓지 말고 수직적으로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그래서 뽀빠이 만화는 옳은 이야기에요. 올리브는 부루트스한테 매일 당하고 뽀빠이는 매일 시금치 먹고 도와줘야 하고. 그래서 매일, 매일 십자가 지신 은혜가 주어져야 돼요. 우리는 매일같이 “뽀빠이 살려줘요!” 라고  매일같이 이렇게 해야 해요. 

그러니까 그 올리브가 그렇게 도와줬으면 누구 편이 되어야 합니까? 이제는 뽀빠이 편 되어야 하는데, 또 본성이 뭐냐, 이제 상상계를 아니까, 하다가 상징계를 통해서 당해놓고 그 상징계에서 찢어진 주체는 뭐로 한다? 나름대로 물어요. “내가 어떤 인간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죠. 해답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해답이 없어요. 이걸 딜레마라고 합니다. 딜레마. 인간은 영원한 딜레마. 찢어진 주체인데, 그냥 주책바가지죠. 

찢어진 주체는 항상 이게 미끄러진다고 했어요. 미끄러진다는 말이 왜 적당하느냐 하면, 보통 이걸 이동한다고 하게 되면 좀 뻣뻣하게 이동할 수 있잖아요. 이거는 내가 이동 안 하려고 버티면 되잖아요. 근데 여기다가 참기름을 발라놓으세요. 참기름을 발라놓으면 본의 아니게 미끄러지게 되어 있어요. 주체는 상상계에서 자아가 돼버려요. 현재에서. 주체는 자아가 되는데, 자아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분열되고 난 뒤에 그건 자아가 아니고, 일시적 주체였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우리가 알게 됩니다. 상징계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내가 아는 현실이 내 뜻대로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나는 기타리스트여서 기타를 한 20년 쳤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떤 악단에서 기타리스트 한 명 뽑는데, 보통 한 50명이 오거든요. 연줄해가지고, 빽 써가지고, “나는 김 세황한테 배웠습니다.” “나는 함 춘호한테 배웠습니다.” 전부 다 온다고요. 전부 다 오게 되면 다들 귀신들이죠.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기타를 열심히 했는지. “나는 적재한테 배웠습니다.” 적재 알아요? 적재라는 사람이 있어요. 기타 잘 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왜 그렇게 많은가 하면 공부는 하기 싫지, 김태원이 기타 잘 쳐서 저렇게 밥 먹고 산다고 하니까, 부활이 하나밖에 없어요. 부활 팀이 두 팀이 아니거든요. 밥 먹고 사는 팀이 몇 안 돼요. 어디 보컬 홍대 앞에서 해봐야 하현우 복면가왕이나 몇 개 뜨죠. 다 뜨지도 않는다고요. 그런데 개나 소나 다 공부는 못하지만 기타는 잘 친다고 하는데, 그렇게 잘 치는 애들이 너무 많은데? 밥 못 먹고 살아요. 이걸 가지고 어떻다? 자기도 모르게 미끄러지는 거예요. 미끄러져요. 

이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설교 잘한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설교 잘한다고. “우리 교인들이 뻑 간다.” “주의 사자입니다.” “살아계신 누구입니다.” 막 이렇게 해요. 그래서 “목사님. 이 설교 좀 한 번 들어보세요.” 해요. 들어본다고요. 들어봐야 평을 하죠. 찾는 것은 딱 한 개 찾아요. “나는 설교하는 자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가를 찾아봐요. 아무도 없어요. 

설교한다는 자체가 이게 죄라고 아는 사람, 없습니다. 사기꾼입니다. 설교해서 유명인사 되어서 교인들 모아서 노후대책 삼겠다는 겁니다. 직업 삼겠다는 겁니다.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마귀의 종들입니다. “여러분, 설교 하는 것조차, 설교 듣는 것조차 죄인입니다.” 해줘야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돼요. 자기 집단이나 공동체가 그게 의미 없게 돼요. 그거 의미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산나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밝혀드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떤 누구도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이 합체가 돼요. 집단이에요. 집단을 가지고 주님이 처음부터 이야기해요. 권세입니다. 권력층. 대구강의에서 이걸 비계 덩어리 라고 했죠. 여러분 비계가 어떻습니까? 그 섬유조직이, 세포조직이 빡빡하죠. 뚫을 수가 없어요. 그냥 칼로는 이 비계를 잘라내기 힘들 정도로 빡빡하죠. 우리는 백날 손톱으로 그 권력층을 뚫으려고 해도 못 뚫습니다. 

호산나라는 단체의, 이 집단적인 힘에 합류가 돼버려요. 이 권력층에. 합류가 되면서 내 구원이 좋다고 하다가 내가 다니는 교회가 괜찮다는 것으로 변해버려요. 내 믿음이 좋다. 십자가마을 괜찮다. 이래 돼버린다니까요. 무슨 천국에 십자가마을이 있습니까? 구원해줍니까? 안 해줘요. 왜 십자가마을이 구원해줍니까? 인간은 반드시 권력층을 통과해서 그 안에서 자기의 정서적인 안정감을 누리고자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호산나 하는 이러한 권력은, 더 센 권력에 의해서 결국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더 환호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백날 날 따라오면서 좋다고 해봐야 너희들 배후에 너희들보다 더 센 권력으로 짓누르고 있는 비계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너희는 군소리도 못하고, 끽소리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 층을, 너희들이 뚫을 수 없는 그 권력층을 그 앞까지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깊숙이 들어가 버리면,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한테 어떤 능력이 되느냐 하면, 주님이 뚫었던 그 능력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진짜 니가 성령 받은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떠는 진짜 권력으로 우리에게 테스트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종교권력입니다. 쉽게 말해서 두 글자로 하면 교회입니다. 

“니가 복음을 알아? 그러면 교회에서 안면 무시당하고 교회에서 군소리하지 말라고 할 때 이겨낼 수 있겠어?”이래 돼버려요. “다 니한테 정주는 사람이고, 다 니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은 지옥가고 자기는 구원받는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행여나 있을 수 있겠다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뭐냐 하면 권력에 대한 미련, 혼자 하니까, 너무 외로우니까, 더불어 믿으면 낫지 않겠느냐 그러한 통박 굴리고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 어떻게 소속에 합류되어 정신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겠다는 이 말은, 결국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이 무슨 대상이 되느냐 하면, 이게 연루가 아니고 관조가 돼버려요. “주님. 제 모습이 괜찮죠? 주님께서 평가해주세요”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그럼 결국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 앞에서 우리는 초상화가 돼버리고,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뭐가 돼요? 초상화가 돼버려요. 그리스도 정교처럼. 

그리스도 정교 보면 이게 무당인지, 기독교인지 이게 분간이 안 돼요. 아이구, 그 삼위일체도 얼마나 이쁘게 그려놨다고요. 이쁘게. 꼭 무당집에서 그려놓은 것처럼 하나님 세분을 쏙 그려놨어요. 그리스는 안 가봤지만, 걸어서 세계 속으로 라는 프로에 보면 많이 나와요. 보게 되면 그리스나, 발칸반도나 하여튼 그 위에 크로아티아도 있잖아요. 그 나라가 전부 그리스도정교 바닥이 아닙니까? 보면 전부 다 촛불 켜놓고, 촛불은 왜 켜는지 몰라요. 근데 향 안 피워놔서 천만다행이에요. 거기서 전부 다 빌고. 

그리고 스페인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이거는 관광산업이에요. 성자들이 갔던 코스대고 가게 되면, 중간 중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여행자를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다 있어요. 거기에 보면 배낭여행 겸, 살 빼기운동 겸, 그것도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20대에 돈 벌어서 배낭여행가고, 혼담은 안 들어오고 짜증나니까 개나 소나 다 배낭여행하면서, 행여나 또 괜찮은 외국남자 만날까 싶어서 잔뜩 기대를 걸고 배낭여행한다고 쭉 돌아보잖아요. 그 코스마다 이미 관광 상품이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어릴 적 동화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동원하는 이것을 주님이 어떻게 보시겠느냐? 주님은 하나의 관조가 되고 주님은 우리한테 초상화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우리한테 왔다면, 이건 아까 이야기한 율법 외에 한 의가 왔죠. 그 율법의 의는 미래적인 것으로 왔죠. 미래적인 것 앞에서 우리는 뭘 해도, 우리의 행위나 모든 것은 저주받을 짓이다. 선교, 전도, 설교, 강의해도, 뭘 해도 저주받을 짓이에요. 이걸 확정시키고,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의 빗금 친 몸이 우리에게 오는 것, 이 바닥을 예수님의 피로 적시게 되면, 우리는 이 자체로서 어떤 짓거리를 해도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분류하는 작업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특명을 내려줬어요. 마치 욥에게 하라고 사탄에게 특명을 내리듯이. 사탄으로 하여금 전 세계 모든 기독교를 점령해라. 단체냐, 아니면 사건이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단체나 개인이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소유가 돼요. 상상계가 성립되지만, 우발적인 사건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째고 들어오니까. 자아든 주체든 이걸 개무시 하고 들어오니까요.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요. 예상 밖의 사태가.   

전에 수요일에 설교 했는가,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손수건 가지고 사람들에게서 귀신 나오고 병 나았죠. 근데 자기 손수건이나 앞치마가지고 병 낫게 했을 때에 사도바울이 그걸 미리 예상했습니까? 몰랐습니까? 자기 손수건이고 자기앞치마지만 예상을 못했어요. 자, 그다음 질문, 그 손수건으로 했으니까 20장에서 그 손수건을 써먹었겠습니까? 안 써먹었겠습니까? 사도바울 본인이 써먹을까요? 안 써먹을까요? 써먹을 리가 있습니까? 

왜? 나아봤자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니고, 쓰시는 그 순간에 동시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거 한 3초갑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때문에 뭔가 상상계가 발휘되어서 그러니까 내가 신자 맞지? 하면서 하나님의 성도로 합치된다고 또 혼자 착각하고 상상을 해요. 그래서 무슨 사건 터지고 하면, “주여! 어찌 저에게 이런 일을?” 하고 까불다가, ‘아하, 그게 아니구나.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러니까 이 호산나 찬양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로 가는 이 코스를, 거꾸로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한테 이걸 재현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상이라고 합니다. 현상은 뭐가 아니다? 실체가 결코 아닙니다. 실체는 하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숨어있으니까, 숨어있다는 말은, 드러낸다는 것하고 같은 말이에요. 말은 반대인데, 연결되어 있어요. 숨어있다는 말은 숨어있는 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현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소유대상이 아니니까 특징은 뭐냐 하면 다양합니다. 다양하니까 이건 뭘 부수느냐 하면 실재계를 부수는 거예요. 누구 따라하거나 누구 모방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현상, 이거는 우발적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거나 사도바울의 손수건이나, 이 모든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결코 사도바울에게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왜 자꾸 내가 했다고 하느냐? 세상에 사도바울이 무슨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계산해보면 39☓5=195, 평소에 사도바울이 195대 맞고 사도되려고 애를 썼습니까? 아니죠. 195대를 누가 때렸습니까? 맞는 것도 주님이 맞아야 돼요, 주님이 실체고 자기는 맞아야 될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도바울 때린 것은 사도바울을 때린 것이 아니고 주님을 때린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물주고 사도바울에게 옷 입혀준 것은 누구한테 한 겁니까? 주님한테 한 거예요. 바로 그런 관점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완료죠. 이미 완료된 관점에서 더 이상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변경이 성립이 안 돼요. 이미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를 어떻게 봐야 됩니까? 이미 끝난 상태기 때문에 변경이 안 됩니다. 그럼 합격했잖아요? 합격했는데 성경을 왜 봅니까? 

바로 사건자체가, 십자가사건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소돔위에다가 애굽 얹고, 애굽 위에다가 갈보리언덕 얹고, 두 증인 한꺼번에 시체 만들고, 거기다가 경주에 지진 일어나고, 부활이 일어나고, 온갖 요한계시록에 있던 것은 층층이 다 쌓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쌓이면 두꺼울 것이 아니냐? 사건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두꺼운 것이 없어요.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살아있으면 증거자로 우리가 있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성령이 하신 일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 장로님께서 그런 질문했어요. “성령으로 구원받아야 되는데, 왜 십자가로 구원받습니까?” 우리교회 최근에 오신 장로님이신데, 그런 질문하신 것도 상당히 고마웠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잖아요. “왜,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야 하는데, 목사님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고 자꾸 이야기합니까?” 좀 우스워요? 질문이? 우스우면 답변해보시든지요? 

요한복음 16장을 이야기해드렸습니다. 16장에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세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왔으니까 내가 성령을 소유해야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연루시키는 관계성을 맺을 때, 성령을 앞장세울 때는, 놀랍게도 성령이 성령을 앞장세우지 않아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성령은 배후에 역사하는 거예요. 

이 모든 과정을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 성령을 내가 소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뭐가 급하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천당 가야 되겠다. 천당 가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십자가 믿을까? 성령 받을까? 내가 십자가 믿어도 성령이 안 오면 아니라고 했으니까, 애초부터 성령부터 받아버리면 십자가는 덤으로 오니까 구원받겠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하신 거예요. 

근데 성령은, 사건은 사건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고, 다만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실 때,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에서는. 그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미련하고 어리석게 오시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지혜를 박살내는 방식으로 오시는 겁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의 똑똑함과 지혜와 이성을 갖추었다는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태와 다양성 있게 연루되어 있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마음껏 부자는 부자 되게 하고, 갤럭시7인가, 갤럭시8인가 막 만들어내라 이 말입니다. 전부 다. 삼성이고 JP모건이고 하여튼 투자회사고 마음껏 자본주의 하세요. 그것이 다 무엇과 연루되어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연루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유지되는 세상이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다양성 있게. 따라서 우리는 그 가운데 뭐만 즐기면 돼요? 복음으로 마음껏, 희희낙락, 자유만 즐기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유를 할 때, 어디까지 자유를 해야 됩니까? 라고 또 자기의 상상계를 동원해요. 주체에 합당한, 첫째 시간에 상징계하니까, 어디까지가 아니고, 바람은 지나가고 난 뒤에 바람이 왔다는 것을 알잖아요. 전에 이야기했죠. 사랑이라는 것은 이별하고 난 뒤에 비로소 안다고. 왜냐하면 이별 안 하면 사랑이 당연한 줄 알아요. 아내가 날 좋아하면 남편은 당연히 자기를 좋아해야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내하고 이혼하고 난 뒤에는 ‘아, 이게 많이 참았었구나. 억지로 해줬구나.’ 꼴 보기 싫은데도 밥해줬다는 것을 알듯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라고 하는 것은 항상 사후적이에요. 사건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사건의 의미를 붙일 수밖에 없는, 뒷북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고마운 것은 주께서 뒷북을 치시지 않고 앞북을 쳐주셔서 고맙죠. 오늘 제목을 앞북이라고 할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미리아시고, 창세전부터 우리의 일거수를 다 아시는 주님.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