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2장12절(거주)161018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2장 12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12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면 그 당시 사람들의 문화, 종교적인 의식처럼 그렇게 느낄 겁니다. 사실 시편 118편 26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세 가지 축제인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그때 시편 118편을 합창, 제창, 또는 떼창,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성전에 대한 의식으로서 그렇게 해왔던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주느냐 하면, 그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주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녀교육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어요. 옛날에 있었던 그 모든 것이, 보통 민족에게는 옛날에 있었던 것은 과거잖아요. 과거로 보지 않고 예언으로 보는 겁니다.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거지만, 예언은 뭘 기다리는 겁니까? 예언이 실현되는 상태, 예언의 실현의 순간을 고대해야 되겠죠. 그럼 고대한다는 것은 희망이라는 뜻이고, 희망은 그 집단의 결속을 성립시키는 겁니다. 그걸 ‘이데올로기’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념, 통화가 되는 그 사이를 지탱하고 통합시키고 결속시켜주는 그 사회를 이데올로기라고 어려운 말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이스라엘이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구약 말씀을 반복하는 거고, 그래서 그들은 예언 성취의 수용자, 곧 예언의 성취를 받아야 될 대상자로서 거기서 국가적 정체성, 아이덴티티, 자의식이 발생됩니다. 그러면 개개인이 있더라도 전부 다 하나로, 계속해서 한 마음이 되겠죠. 한 마음. 이게 오늘날 유대교를 유지하는 지주, 정신적인 이념이 돼요. 구약성경이 있다, 그 성경은 언젠가 우리에게 복으로 주어진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겨내고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시편 118편부터 해서, 시편의 내용들이 그거에요.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것이 주 내용이 되는 겁니다. 주 내용이. 그래서 그렇게 돼버리면 미래에 대해서 완성된 일을 이야기한다는 말은 현재에 있어서의 티격태격할 수 있는 사적인 모든 의견충돌이 어떻게 되겠어요? 무마되고, 희석되고, 그런 것은 양보 될 하찮은 것이 되겠죠.
큰 취지를 위해서 개인적인 이득은 스스로 접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미래에 될 일이잖아요. 방금 축제하면서 후렴으로 부르는 것이. 근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 오실 때, 그 미래에 일어나야 될 일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니까, 그게 미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 현재 완료된, 완성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자,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12장 12절을 보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을 뻔히 아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러한 호산나 찬송의 대환영의 행사가 이게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아예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자체가, 열 두 제자도 내빼고,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가하다고 투표를 했고,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투표를 했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 배척했다, 배척했다, 심하게 배척했다.
“거 봐! 십자가에 죽기까지 넘겨줬잖아?” 이렇게 해야 일관성이 있는데, 이렇게 호산나 하고 찬양을 해버리니까, 호산나 찬양하는 이 상황이, 십자가 죽으면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외면했다고 하는 것과 매치가 안 되는 느낌이 들죠. 그럼 그때 호산나 외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지? 그들은 뭐하고 있었어? 반란을 일으키든지, 어떻게 시위를 하든지 하지. 죽여서는 안 되는 분이라고 이렇게 데모를 하든지 하지.
바로 그 점이 곤란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할 때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생각하지 않고, 이것 자체가, 대중들에게 인기 있고 환영받는 이것 자체로써, 이게 구원의 완성으로 보면 왜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두 번째 문제가 좀 어렵죠.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 하지 마시고, 호산나 찬양이라고 할 때, ‘그렇지! 이제 내가 메시아 대우를 받는구먼. 그래. 내가 원했어. 이런 상황을 원했단 말이야. 역시 내 백성들이 나를 이렇게 환영하는구먼. 자, 여기서 임무는 끝났다. 끝내자. 주님이여, 저를 데려가옵소서.’ 호산나 찬양하면서 구름이 와서 예수님을 데려가고 하면 그 대단원의 막이, 드라마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오늘 뭐 구르미 그린 달빛이 마지막 시간이라는데, 박보검이라는 애가 그렇게 유명하대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요. 박보검 복지부장관 시키라고. 보검복지부장관. 애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있답니다. 왜 복지부장관이냐 하면 박보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진다고 해서, 니가 고만 복지부장관하라고 한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도 충분한데, 근데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말이죠. 낄 자리가.
그럼 이걸 무시하고 빼는 것이 십자가하고 맞는가? 아니면 이 사실을 집어넣어야 우리가 놓친, 뭔가 십자가의 의미를 놓친 것이 있는데, 만약에 이 사실이 없이 그냥 인간들에게 버림받아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근데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하고, 환영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둘 사이에 하나는 더 보충되어야 될 십자가의 의미가 있을 수가 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집어넣었을 때. 이 말은 이것을 빼고, 이걸 무시하고 십자가를 했을 때 놓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놓친 것이.
그러면 이 본문의 의미는 뭐냐, 논리가 복잡하니까 그림으로 간단하게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 안에 들어가는 선에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크게 그리고요, 그 다음에 인간을 그리게 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보거든요. 우리가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계시다. 중간은 진공, 진공상태. 끊어져 있죠.
인간의 몸은 독자적인 몸이기 때문에, 샴쌍둥이가 아니잖아요. 머리 붙어 있는 몸은 아니잖아요. 몸으로 쳐서 각각 딴 몸이 되는 겁니다. 딴 몸이 될 때, 이쪽이 갖고 있는 느낌이나 의지라든지 생각들이, 예수님 말고 다른 일반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이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전달이 되겠어요? 전달 될 리가 없어요. 절대 전달 안 됩니다.
인간은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주장, 일방적 내뱉음뿐이에요. 아무리 마음 맞추고, 흔히 심파시sympathy라고 영어로 그렇게 하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감이라고 하잖아요. 공감 없습니다. 공감이라는 것이 없어요. 공감이고 싶어 하겠지. 내 말에 아멘 했으니까, 내 말에 동의했으니까, 내 뜻대로 되겠지. 그거는 나중에 실망을 낳을 수밖에 없는 착각입니다. 어떤 인간도 내 뜻 그대로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어요.
사랑한다고 천 번을 이야기해 봐도 그 의미를 상대방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몸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몸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도 떨어져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귐은 이해가 되어서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저 친밀도에 불과하다. 가까이서 자주 만나면 친밀도가 상승하고 아무리 좋아했던 사이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말 누가 했죠. 내가 했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안 보게 되면 거기에 다른 생각들이 막 들어와요. 다른 생각들이. 혹시 다른 사람을...뭐가 어떻고 해서 온갖 생각들을 다 집어넣어서 이게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뜻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지금, 현재 친해야 돼요. 지금 친하다는 것뿐이지, 계속해서 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결혼할 때는 타이밍이 중요한 겁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내년 가을에 하자.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냥 지금 서로 친밀한 것을 공감이라고 오해한 그 순간에 해치워버려야 해요. 해치워버려야 되지, 미적거리면 그 사이에 다른 차들이 낀다니까요. 차가 가는데 중간에 새치기해서 불나가지고 죽지 말고. 중간에 다른 차들이 끼어버리면 점점 더 멀어진다니까요. 0순위에서 1순위, 2순위, 3순위로 밀려버리면 나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불신의 관계가 되어서 이게 안 돼요. 그래서 인간은 안 됩니다.
그런데 제 말은 뭐냐 하면 인간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뭔가 어려울 때, 행복할 때, 아쉬울 때, 주님! 주님! 하면서 사랑해주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언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데, 주님의 마음을 알겠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라고 백날 해봐야 전부 거짓말 밖에 안 나오고, 아멘도 사기에요. 아멘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멘 한다는 뜻은 동의한다는 그 뜻이 아니에요. 아멘이라는 뜻은 뭐냐 하면, 니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내가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 아멘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러한 고백은 니 고백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심어준 고백이 아멘인 겁니다.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이거든요.
사람에게 뭔가 특이사항이 나왔을 때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지, 니가 원인이 되어서, 니 의나 니 결심에 의해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이게 아멘입니다.
그래서 아멘 할 때는 반드시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나오는 고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해야 해요. 아멘 하면 복 주는 것이 아니고, 아멘 그 자체가 복의 완결이에요. 아멘하고 주세요! 하고 손 벌리지 마세요. “주의 처분에 맡기겠나이다.” 이걸 짧게 하면 아멘이에요.
어떤 교회는 아멘이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불이 나서 주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이렇게 나올 때 진짜 아멘교회에요. 어떤 애 이름이 아멘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김아멘. 박아멘. 고아원에 맡겨도 아멘할지 모르겠어요. 그게 진짜 아멘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중간 과정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다리하고 우리하고 연결이 되었어요. 예수님의 몸을 빗금으로 한다면, 예수님의 빗금이 우리한테 와서 결과를 놓고, 그 결과로 우리의 모든 것이 예수님하고 합류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진공이 아니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몸은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되면, 저쪽 5미터에 있다면, 우리 사이에 5미터가 떨어져있는 걸로 보잖아요. 그런데 주의 몸은 성도에게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걸 배워야 돼요. 이게 가면 갈수록 체험화 되어야 해요. 이게.
이걸 그리스도 안이라고 해요. 그리스도 안.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 내 몸이 아니라 주의 몸의 지체로서 일어나야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불렀단 말이죠. 호산나라는 뜻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구원자 하나님이여!” 뭐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호산나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 하냐 하면,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부르겠어요? 도저히 우리 힘으로 구원될 가망성은 완전히 전무한 것, 완전히 파탄 날 경우에요.
구원은 더는 없다. 우리가 할 도리를 다 했는데, 더 이상 우리가 끄집어낼 방식이나 방법이나 도리는 우리로서는 더 이상 끄집어낼 게 없다. 이제는. 결국 그런 상황에서 부를 것은 호산나밖에 없어요. “주여, 이제는 주님차례이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더는 안 됩니다. 구원해주옵소서.” 자 이렇게 될 경우에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구원해주옵소서 라고 하니까 우리말로 하면 구출해달라는 거죠. 그럼 구출할 당시에는 뭐만 아느냐 하면, 내가 아는 이 지경만 알고, 구출하고 난 뒤에 어디에 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구출당한 사람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이게 구약의 한계입니다. 구약의 한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해버리죠. 어려움에 처해버리면 사람들이 그래요. 내가 어렵다는 것을 어디에 비교하느냐 하면, 종전까지 어렵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가지고, “주여, 어렵습니다.” 뒤에 나오는 말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던 전의 상태로 돌이키게만 해주시면 고맙습니다.” 그런 수준밖에 안 돼요. 그런 수준밖에.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거는 같은 공간적 이동일 뿐이에요. 이 땅에서 이 땅으로, 같은 지역에서 이동밖에는 안 돼요. 여기서 건져내서 저기로 가는 것, 전에 재미나게 살던 그 시절로 회귀하는 것, 그것밖에 안 돼요.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살고 싶어요? 어디서 살고 싶습니까? 만약에 고르라면. 고를 수 없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에덴동산에 가게 되면 거기 뱀이 있어요. 뱀이 있고, 에덴동산에 무슨 나무가 있습니까? 선악과나무 있죠. 그때 그 시절로 한 번 돌아가 볼래요? 그리고 선악과나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면서 계속 꼬시는데, 불안 불안해서 거기서 살겠습니까? 에덴동산으로 우리가 갈 군번들도 아니고, 가서도 안 되지요. 차라리 선악과 있는 동네 말고, 선악과 없이 생명나무만 있는 동네가 좋죠.
그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옵니다. 생명나무 가로수가 쫙 있고 그 안에는 강이 흐르고, 때마다 실과가 나면서, 그 강은 무슨 강이냐 하면, 에스겔이 본 성전에 흐르는 강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을 영원토록 살리는 그 강, 에덴동산. 그 에덴동산은 우리가 거할 천국이죠. 근데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 출처가 전에는 생명나무, 선악과가 에덴동산의 구조였다면, 이번에는 하나님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보좌.
자, 요한계시록에서 그런 이야기할 때, 결국 우리에게 무슨 숙제를 안겨주느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영생이 나오는 그 메커니즘을 니가 밝혀라. 이게 하나의 우리에게 숙제처럼 주어지는 겁니다. “아! 좋다!” “근데 저게 왜 좋은데?” “그냥 좋네요.” 그건 잘못입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자리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좋다고 하면 안 되고,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 자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쪽을 보고 “캬아! 좋다!” 이렇게 되어야 되죠.
술 먹는 사람보고 “참 좋으네? 참 맛있겠네?” 이거하고, 실제로 술 한 잔 먹어가면서 “캬아! 이슬이 이런 이슬이? 이슬이 이런 맛이가?” 술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탁 쏘는 체험적인 술과 구경만 하면서 좋다고 하는 그거하고는 달라요. 저는 요새 이상하게 매운 음식만 보면 땀이 나요. 먹지도 안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은 수시로 외부와 결속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손길이 안 닿은 적이 없어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럼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의 몸입니까?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이렇게 했을 때, 원칙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앞에 하나 붙이면 새 언약이죠. 그럼 새 언약은 뭐냐,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어 있죠. 살과 피로 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말로 희생이죠. 이 세상의 모든 근거가 유지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근거가 되어서 아직도 이 세상이 존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 혜택을 누가 받는가? 이 혜택이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주어지죠.
근데 말씀해보세요. 모든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고 하면서, 용어는 뭡니까? 악인과 선인. 분명히 나와 있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혜택을 입으면 다 선인인줄 알잖아요. 근데 성경에는 악인과 선인에게 혜택이 있다고 하니까, 결국에는 주님의 희생덕분에 산다고 하는 것은 선인에 해당되고, 혜택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것은 악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로마서 1장에 의해서 너희가 나중에 심판 날에 핑계치 못하리라.
은혜 받아 먹어놓고도, 니가 은혜 준 것도 모르는 것으로 니가 살았다는 것은 니가 지옥가도, 니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길에 가는 사람 잡아놓고 물어보면, 자기가 이렇게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심장의 판막이 잘 돌아가는 이 모든 것은 다 주의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나오는 것을 모르고, 지가 열심히 운동하고, 조깅하고, 산 정상에 올라가서 그 덕분에 자기가 건강하다고, 그렇게 주변에서 자꾸 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발이 아프다.” 평상시에 하는 문장이고 용어죠. “나는 발이 아프다.”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내 발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주께서 아프게 한 고통이 내 발을 통해서 튀어나온다.” 이렇게 해야 해요. 약간 복잡하지만. 주께서 때가 되어서, 어떤 의미가 있어서, 무슨 의도가 있어서, 나로 하여금 아픔을 내 발을 통해서 튀어나오게 한다. 그래서 내 몸은 내 고통의 원인이 절대로 될 수가 없다.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에 있다. 예수님의 뜻에 있다.
그래서 이 전체를 뭐라고 하냐 하면, 이게 진정한 아멘이고 호산나가 되는 겁니다. 이미 그때 너희가 기대했던 예언은 이제 예언이 아니고, 이게 현실이 된 거예요. 현실이. 더 쉽게 말해서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 몸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동시적으로 거기에 뭐가 따라 오는가 하면, 예수님을 향하여 예언했던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의 행위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이, 모든 말씀의 완성태, 완성 상태로 거기에 가득하게 같이 동반해서 있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은 그 자체가 구원된 완성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 안 믿던 내가 예수 믿음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과 상관없었던 우리에게 예수님이 믿음을 선물로 줌으로 말미암아 나를 포함해서 되어진 모든 상황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구원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의미하는 거죠.
이렇게 내 몸과 예수님 몸이 하나가 된 결속을 가지고 이걸 관계성이라고 하고, 이걸 연루, 연루되어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거든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관계성, 연루, 이 상태가 바로 언약관계입니다. 이게 언약관계인데, 이게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연루성가지고 이 지상에서 이미 실현이 된 거예요. 이미 개시가 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호산나 하는 것이, 늦게 오신 분은 모르지만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때에 호산나를 부른다고 했던가요? 어떤 때에? 아까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들이 구약 때 했던 모든 절기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실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자체가 완성된 축제가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이렇게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같이 되어 있는 이걸로 해서 제목을 정하겠습니다. 제목 한다고 해서 믿지 마세요.
‘거주’라고 하겠습니다. 거주. 주님과 함께 거주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죠. 여기서 반드시 주의할 것은 내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고 하니까 우리는 나를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나를 없애버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주님만 있다. 이렇게 되잖아요. 주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거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가 죽으면 하나만 남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요.
그 관계를 계속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관계에 참여한 그 주체와 그 대상자가 늘 함께 살아있으면서, 거주 속에서 그 연루된 관계성이 계속해서, 그게 언약이겠죠. 그 언약이 계속해서 살아나야 돼요. 따라서 사도바울 같으면 작년에도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올해도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면, “니 작년에 죽었잖아? 작년에 죽은 니를 거론하지 말아야지?” 작년에 죽었으면, 그럼 주님이 산다. 주님이 산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왜 올해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느냐?
그거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는 누구하나 죽고 나면 나만 남았다는 것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그 관계성,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되게 그 관계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우리가 발휘해야 되는 거예요. 그 기능을. 그래야 그 언약적 말씀이 살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계속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죽고 늘 살아나야 되고, 늘 죽고 늘 살아나야 돼요. 그래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계속 살아있죠.
관심사가 말씀이어야 하지, 우리 자신이 뭘 획득했다, 소유했다, 그건 내 거다, 그런데 관심두면 이게 안 돼요. 그거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그 한 것을 잘 이해했는지, 제가 한 번 퀴즈문제를 낼게요. 초상화와 산 사람의 차이점이 뭐죠? 초상화와 산 사람의 차이점? 초상화 같으면 화가가 있잖아요. 화가가 그렸죠. 주님이 우리를 하셨다고 하니까, 자꾸 우리는 초상화 같은 느낌이 드는데, 우리는 산 사람이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 우리가 죄인의 모습으로, 그 죄인의 모습이 예수님 쪽으로 이렇게 결성이 되고 결합이 되어있어야 해요.
이게 거주적인 관계입니다. 초상화는 그냥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언약을 살려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죄인으로 살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그러면 끝! 이게 아니고, 만들었는데 그 만들어진 것이 내 구원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그 새 언약의 완성의 위엄을 계속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죽을 때까지,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발산해야 할 그러한 기능으로 쓰여 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보면 그 다음 문제가 풀려요. 호산나 했는데, 왜 십자가에 죽이셨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부터 풀리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호산나 했으면 그걸로 끝내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아! 수고했다! 환영받았나?” “환영받았습니다.” “완성했으니까 데려가겠다.” 이렇게 하시고. 호산나하면서 그렇게 환영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잡힐 때 시위하고 데모하지 않고, “이 분은 메시아입니다.” 누구 하나 입 뗀 사람도 없어요. 심지어 여기에 열 두 제자가 있었잖아요.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시위 할 수 없고, 베드로가 나서서 “제가 호위무사 되겠습니다.” 해도 “그 칼을 거두어라!” 베드로가 “제가 지키겠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통촉이고 뭐고, 칼을 거두어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해놓고 결국은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고 해서 갈 테면 가라고 예수님이 다 보내버리고 혼자 올라가셨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 호산나하고 어울리지 않는, 그 환영받았던 그 최고조가 갑자기, 급작스럽게 뚝 떨어져가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다 기피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되는 그것이 왜 언약의 완성이냐? 호산나로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완성이냐? 그 점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 이 점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운가 하면,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에요? 아니면 십자가 사건이 복음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죠? 사도바울은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막달라 마리아하고 야고보 엄마하고 세베대의 아들의 엄마, 그 세 사람이 있었고, 그 다음에 전부 다 적들이 있었어요. 로마 군병들하고 또 심심해서 구경 온 사람들, 지하철 공짜로 타고 구경 온 노인네도 있을 수 있고, 정치적인 사안인가 싶어가지고 신문기자 몇 명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가장 큰 목격자는 양쪽에 있던 두 강도가 배후로서 참여했죠.
그러나 거기에 사람들이 약간 있다 할지라도, 이거는 어디까지나 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은 주류로부터 거부당한 상황이죠. 주류사회로부터, 주류세계로부터. 다시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고, 내가 예수님 죽음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것이 나한테 불리하면 불리했지, 절대로 내 생존에 유리할 수 없는, 입 다물어야 될, 잘라내야 될 불길한 일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그 사회였습니다. 그 십자가사건이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그걸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세상이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으로 구성되는 겁니까? 사건으로 구성되는 겁니까? 몸이냐? 사건이냐? 자, 몸은 아니에요. 몸은 어디에 구애를 받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습니다. 누가 한 번 요한계시록 11장을 찾아보세요. 11장 어디를 찾아보느냐 하면, 11장 8절을 한 번 봅시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자, 보세요. 이걸 몸으로 하면 장소가 혼선이 일어납니다. 소돔하고 애굽하고 가까운 거리가 아니에요. 이집트하고 소돔이니까, 지금의 레바논. 하여튼 레바논인가 이스라엘 경계선인데, 사해 위쪽에 있으니까. 또 하나는 뭡니까? 갈보리언덕. 어떻게? 지금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왜 그게 같은 장소가 되죠? 우리가 지리적으로 같은 장소가 아니라고 할 때는 펼쳐놓고 보면 아니죠? 애굽은 저 남쪽에 있고, 소돔은 북쪽에 있고, 그 다음에 갈보리는 약간 더 서쪽에 있고.
지중해가 여기 있다면, 애굽은 저 밑에 이집트 있고, 사해 북쪽에 소돔과 고모라 있고, 여기 갈보리언덕, 산 정상 옆에 갈보리언덕이 있단 말이죠. 이건 지중해고. 이게 어떻게 같은 장소가 될 수 있습니까? 펼쳐놓고 보면. 근데 펼쳐놓고 보지 말고 중첩되어 봅시다. 그걸 보태고, 보태고, 또 보태고, 또 보태고, 이렇게 수평으로 보지 말고, 펼치지 말고.
이걸 중첩으로 보면 이 모든 지명은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꼭 동원되어야 했던 지명들이 아니라, 그 지명에서 일어났던,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사건이 중첩이 되면, 큰 하나의 사건을 이루죠. 그게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에 어떤 장소가 필요했다? 애굽 나라가 필요했고. 십자가 사건에 뭐가 필요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필요했고. 십자가 사건에 뭐가 필요했다? 갈보리언덕이 필요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의 편성, 이러한 구성은 누가 할 수 있어요? 어느 몸이 할 수 있어요? 인간의 몸은 그걸 해낼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몸이 왜 해내지를 못하느냐 하면, 인간의 몸은 전체의 부분이 돼버려요. 부분은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요 근래 강의하면서 자주 이야기하는 건데, 부분이 어떻게 존재의미를 알 수가 있죠? 제가 지난 강의 할 때도 그렇고, 전에 설교할 때도 그랬는데, 사람은 며칠째 만들었죠? 6일째 만들었죠.
그럼 6일째 만들어진 것이 창세전의 일에 대해서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짬뽕이고 짜장면이고 간에 주는 대로 먹어야지, 지가 달은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달을 만들었으면 됐지, 달은 왜 갑자기 보름달 됐다가 초승달 됐다가 합니까? 하늘의 별은 왜 그리 많습니까? 별 헤다가 볼 일 다보겠다. 별 헤는 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별 헤다가 어머니이야기 해버렸어요.
왜냐, 별에 붙인 모든 윤동주 시인의 이미지가 사실은 어머니로 이끌게 한, 사실은 진짜 보고 싶은 것은 친구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진짜 내면에 보고 싶은 것은 어머니였다. 이걸 시로 표현하기 위해서 엉뚱한 것 붙여놓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어머니를 붙이는 거예요. 윤동주가. 자, 그러면 별은 왜 있습니까? 우리는 알아요. 뭐냐 하면, 별은 누굴 위해서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윤동주가 별하고 어머니를 붙이고 싶었는데, 초장부터 붙이지 않고 끝에다 붙이면서, 앞에 거기까지 오는 과정으로,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이렇게 붙이고 나서 그 다음에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끝에 붙이잖아요.
그처럼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누구 이름 붙이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붙이겠죠. 이스라엘이 어떻고, 아브라함이 어떻고, 이삭이 어떻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붙이겠죠. 그러면 그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찾아갔다는 자체가 사건화 시키는 거예요. 그럼 사건을 펼치는 것이 아니고, 이걸 수직적으로 중첩을 시켜버리면, 그 아브라함이 있는 이유도 예수님을 위해서, 이삭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 야곱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걸 저는 사건으로 봤지만,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서는 영적으로 본 거예요. 영은 이 세상 말고 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속에서 사건화 될 때만 그게 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걸 우발성이라고 합니다. 영은 육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가지고 다닐 것이 아닙니다. 포터블portable이 아니에요. 내가 장착할 것이 아니에요. 이동할 것도 아니고. 소유대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주 명확할 거예요. 십자가 피 앞에서 상상은 없다. 아까 제가 질문했습니다. 현실은 뭐냐, 세상은 뭐냐고 물었죠? 상상입니다. 내가 꿈꾸어오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하다고 내가 느끼는, 내 몸이 느끼는 상상이 지금 그대로, 이 나이에, 이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나의 현실이고, 나의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부분은 전체를 알아요? 몰라요? 모르니까 그냥 일방적으로 우기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 상상대로 되게 하옵소서.” 이걸 두 자로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 기도의 참된 본심은 기대에요. 인텐션intention하는 거예요. 의도하는 거예요. 의도하는 것을 인간들은 성경용어에 기도가 나오니까, 기도라고 한 거예요. 이걸 아주 묵사발 만들었죠. “니가 기대한 것을 기도하지 마라!” 주님께서. 그거는 기도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왜 내가 기대하는 것을 기도해서는 안 됩니까? 그거는 상상이나 하구거든요. 허구.
그 허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내 몸, 이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이것을 나를 이 세상에 중심으로 놓고, 전체라고 보고, 내가 일방적으로 구성한 가짜현실, 그 구성한 가짜현실에 동원된 것이 가짜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진짜 참된 신앙의 첫걸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였다는 겁니다. 그걸 줄이면 하나님은 가짜다. 진짜 하나님은 알 수가 없다. 왜? 존재성이 아니고, 그냥 우발적으로 나에게 성령에 의해서, 성령세례가 찾아와야 하기 때문에.
아까 그 강의를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정리해보면 이렇게 돼요. 내 몸이 여기 있다 합시다. 우리는 무엇을 상상한다? 계속해서 예수님 상상하고 하나님 상상하죠. 그 사이는 비어있죠. 비어있으니까 상상하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오히려 의아해해요. 의아해한다. 제목이 이게 더 지당한 것 같기도 하고, 거주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왜 찾아오십니까? 왜? 주님이여! 제가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잘 알고, 삼위일체 연구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죄인이라고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저는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니 현실 부수기 위해서 왔다. 니 현실.” 니가 니를 보호하고, 종교생활로 니 장래를 보장받고 천국까지 가고자 하는 이 거짓된 체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그 작업으로 예수님께서 그 발바닥으로 있는 시커먼 그 빗금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무시한 사람은 오는 세대까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오게 되면 우리는 사로잡히죠. 사로잡히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모든 것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너의 그 상상했던 죄도 예수님한테 가는 거예요. 화살표가 위에서부터, 주님 쪽에서부터 오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서 가고, 또 오고 또 가고, 이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거주함. 주님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사는 모습입니다. 나중에 천국 가면 면류관 던지면서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겠죠. 찬양 드리고, 받으시고, 감사하고, 또 찬양 드리고 기뻐하고. 이 땅에서 육신이 있기 때문에 죄짓고, 용서해주시고, 또 죄짓고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죄짓는 것밖에 없어요. 지난 낮 설교 했잖아요.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 핍박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성질대로 살면 돼요. 우리 성질대로 살면 그게 핍박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성질에서 뭐가 나오죠? 상상이 나오죠. 그래서 이 상상이 나온다는 이 상상을 가지고 자크 라캉은 최초로 이걸 밝혀냈어요. 상상계라는 것을. 프로이드도 이걸 몰랐어요. 상상계, 상징계. 프로이드가 이런 용어를 썼지만 그걸 밝혀낸 것은 제자인 자크 라캉이 한 거예요. 자크 라캉은 지난 부산강의에서 했습니다.
상상계, 상징계, 시간관계상 이것만 했는데, 나중에 12월에 할 건데, 지젝은 실재계까지 해요. 실재계. 세 가지가 있어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실재를 오브제 아(objet a)라고 해서 잉여, 여분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나온 욕망인지 모르지만, 뭔가 더 쾌락적이고 더 짜릿한 것이 있을 건데, 라고 계속 추구하게 만드는 그런 유혹 같은 것이에요. 유혹 같은 것이. 이것은 결국 우리 안에 뭐가 작용한다? 우리 육신 안에 선악과의 유혹이 죽을 때까지 계속 작용해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사건의 구체화로 사용을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구체화로.
우리가 아무리 착해도 늙음을 회수할 수는 없는 겁니다. “착하게 살아라. 그러면 청춘을 돌려줄게.” 뭐 이런 구절이 있던가요? 사도바울이 “하나님, 바르게 살면 저를 젊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사도바울이 소원했던가요? 아니면 “주님이여, 어서 나를 이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새로운 육신을 덧입기를 원합니다.” 어느 쪽이에요? 덧입죠.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산소 같은 그것은, 산소는 이 지상에 없어요. 주님이 산소 같은 분이에요. 흠도 티도 없는 거룩, 그 완벽한 형상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로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이 완전한 이상,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이 몸이 후패해지는 것이고, 그 후패해질 때도 이게 그냥 우리 몸이 후패해지면 안 되고, 사건에 편입되어야 하거든요.
우리가 후패해지는 하나까지라도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해요.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가 해야 될 것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죽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거거든요. “여러분이 아무리 해도 의를 이룰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래 된다 말이죠. 그럼 그 설교는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이미 성령세례 받은 사람만이 납득이 되겠죠.
그럼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그럼 성령세례 안 받은 사람이 납득이 안 되면?”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왜 걱정하십니까?” “그럼 뭐 달랑 두 명 남는데?” 아니 두 명 남든, 세 명 남든, 두 세 사람만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두 명 남으면 운영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빚내서 부동산을 했느냐 말이죠. 쓸데없이 부동산 크게 해놓고 채워달라고 하면 되겠어요. 그게 무슨 세계인데? 교인들이 상상한 세계에요.
그래서 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는 필히 알아야 돼요. 왜?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모습이니까. 알려드려요? 상상은 바로 타인의 욕망에서부터 옵니다. 이걸 대타자, 大, Large, 대문자 A로 썼어요. 대타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꼰대, 어떤 어르신네. 그 어르신네 안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부터 출발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르신네를 떠날 수 없어요. 어르신네의 의식으로 우리는 꽉 덮여져있습니다. 이게 상상계입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네가 어릴 때는 부모고, 커서는 교사고, 그 다음에 교회가면 목사고, 성인이 되면 이것이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신은 가짜 신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인류사 모든 아담에게 다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겼어요. 자, 예수 믿은 자를 잡아 죽인 자가 누굽니까? 잡아 죽여서 가둔 사람이 누구죠? 사울이죠. 사울의 대타자가 누구였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았습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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