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강-YouTube강의(천국은 어디 있는가)160705-이 근호 목사
제 161강, 제목은 ‘천국은 어디 있는가?’입니다. 천국은 어디 있는가? 천국이 만약에 어디 있다면 우리는 기를 쓰고 찾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근데 내가 천국을 찾아가게 되면, 내가 찾아가지 않을 때는 천국이 거기 있었는데, 내가 천국 가니까 나 때문에 천국이 도망가가지고 없어지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서 구경해보려고 내가 거기에 그 사람과 교제를 하게 되고 대하게 되면 결국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 안 되어버려요. 무슨 요소가 끼어 들였느냐 하면 나라는 요소가 거기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천국은 나와 상관없이, 별개로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거기에 끼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국이냐? 그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에 어떤 집이 청소를 해서 아주 깔끔하다면, 그 집이 청소를 잘 해놓고 내부가 깔끔하기로 소문났다고 하면 우리는 그 집을 구경하고 싶죠. 구경하려고 이 장마철에 흙 묻은 신발을 가지고 턱턱 들어서면서 “어디가 깨끗한데? 발자국 많은데?” 이렇게 한다면 뭔가 그 사람이 오해한 것이 있죠. 그게 전부 다 자기 발자국이라는 사실. 자기 발자국을 거기다가 보태놓고 “깨끗하기는 뭐가 깨끗해?” 라는 식이 되죠.
천국은 찾아가게 되면, 더러운 나 때문에 벌써 몇 발자국 멀어진다는 사실을, 그런 원칙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가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안에 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다고 했으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천국이 내 안에 들어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무엇을 고려하지 못했느냐 하면 내가 과연 천국과 결합이 될 그만한 고상하고 거룩한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존재인가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잘못이죠. 불가능한 겁니다.
천국이 왔을 때, 천국이 들이닥칠 때,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라고 하는 거죠. 자, 예수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우리 집에 밀어닥쳤습니다. 대표적이 예가 삭개오 집에 오신 거시죠.
그때 삭개오가 ‘아, 나도 예수님 만나기 전부터 괜찮은 존재인데, 너무나 괜찮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괜찮은 집이라고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한 번 구경해보시려고 우리 집에 오셨구나!’ 오시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아이고, 니가 사는 것이 괜찮으니까 니 집에 구원이 이르리라”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아니면 정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할 정도로, 추하고 더럽다는 말이 적당하죠.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다 더러워요. 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더러우냐 하면,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항상 남한테 피해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에 절대로 남이 이익이 되는 것을 우리는 눈 뜨고 못 봅니다. 그야말로 남의 것을 뺏지 아니하면 내 것으로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 인간들의 만남이고 세상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나부터 살고보자가 항상 이게 사람의 원칙이 되어 있습니다. 나한테 이익이 될 때는 고맙다고 하지만 손해 볼 때는 제거하고 싶죠. 죽이고 싶어요. 그래서 이런 인간을 가지고, 이런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들어왔다는 말은 뭔가 내 쪽에서 천국이 될 수 없는데 천국을 만들었다는 말은, 천국이 좋다고 하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와 먼저 만나야죠.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과 피 앞에서 우리는 졸지에 잘났다고 우기는, 나는 살아야 돼!, 무조건 살아야 돼! 라는 그런 모든 권한,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죄로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 때문에 입은 상처들이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보통 깡패들을 목욕탕에서 보면 문신자랑 한다고, ‘어 시원하다.’고 하면서 등짝에 호랑이 문신 자랑하고 오잖아요. 보통 곱상한 사람들은 그것이 참 무섭다고 느껴지잖아요. 근데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는 예수님의 몸을 만났다고 칩시다. 예를 들어 도마같이. 만났다고 치게 되면 그건 무서운 정도가 아니고 몸 둘 바를 모르죠.
왜냐하면 그동안 나를 볼 때 엉터리인 나의 이미지를 나라고 간주하면서 살아온 이것이 자기 보기에 너무나, 자기가 보기에 자신이 밉고 후회스럽고 짜증나고 자기가 자기를 쥐어 패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 나는 가짜로 살아가느냐? 왜 자꾸 나는 가짜만 남한테 들이대고 가짜만 알았고 가짜만 선전하고 돌아다니는지.....,’ 이런 자기 자신의 그 한 짓거리가 혐오스럽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혐오스러워요.
천국은 어디 장소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도바울이 바울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순간 경악스러워요. 경악스러운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정말 그 옆에 어떤 세상의 권력자가 있어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창으로 찌르고 돌로 친다고 해도 그는 세상 권력이 전혀 두렵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너무너무 무서운 분을 직접 독대하고 만나는 중이기 때문에. 내 형편이 어떤 지경에 있다는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환경과 지경이 참으로 공포스러울 것입니다. “주여,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러면 저는 망합니다. 이러면 못삽니다.” 이런 저런 불평들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정작 주님과 만나는 타이밍, 그 순간이 오게 되면
심지어 자기 하체가 톱으로 날라 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전혀 그거는 큰 문제가 아닐 정도예요. 내 손발이 다, 진짜 오체가 다 날라 가는 경우, 모가지가 날라 가는 경우, 사자가 열 마리 달려들어서 물어뜯는 경우, 다니엘처럼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경우, 그리고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경우라 할지라도
주님의 눈만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면 짐승에게 뜯어 먹히는 그 순간도 그게 겁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 앞에 자신이 더 부끄럽고 수치스럽죠.
자,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 이니라” 제물의 대해서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리고 난 뒤에 영문 밖에 쓰레기장에서 태워야 됩니다.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여러분들은 이 일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시면 너무나 잘못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자리가, 영문 밖의 자리가 현재 우리가 있는 이 자리입니다. 만약 길에서 어떤 경찰이 와서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하면, “당신 주민등록증으로 봅시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위치가 어디입니까?” 라고 하면서 증을 내놓으라고 하면, 사실 우리가 내놓아야 할 증은, 영문 밖이라는 주민등록증을 내놓아야 해요. “제가 사는 곳은 영문 밖입니다.” 제물이 불살라져야 했던 그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그 자리, 바로 십자가 안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육체는 별로 불 탄 흔적도 없고, 점심도 먹어서 배부르고, 이것은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죠. 은혜입니다. 지금 사자가 뜯어먹지 않고 누가 우리에게 수갑 채우는 사람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에요. 그래서 우리는 수갑 채운 채로 사자 굴에서 안 뜯기니까 오히려 그런 것을 겁내요. ‘지금 내가 건강해야 해. 몸이 아픈데 없어야 해’ 건강하니까 아픈 것을 상상해서 겁을 내는데,
실제로 우리의 자리는 아파도 되는 자리고, 사자 굴에 있어도 되는 자리고, 창으로, 총으로, 차사고 나서 피를 흘려도 괜찮은 자리에요. 왜? 주님과 함께 있는,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있는 자리기 때문이에요. 바로 그것이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못났는데 어느 정도 못났는가를 철저화하는 그 사건이 벌어지는 그 현장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을 맛봅니다. 천국을 맛 본 사람은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고 성령 안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바로 성령 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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