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6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땅 이야기 계속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어디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까? 하늘에 따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땅에서 만들어지는데 하나님께서 방문해서 친히 만듭니다. 뷔페에서 음식 먹는 것도 있지만 쉐프가 재료 가지고 우리 집에서 음식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음식을 대접하듯이 인간이 사는 땅에서 천국을 만드니까 천국을 만드는 형성과정에서 얼마나 핍박과 고난과 모멸과 모욕과 아픔이 겪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땅은 이미 사탄이 지배하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 천국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겠어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고난 속에서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고난 자체만으로 하나님 뜻이 다인가? 아닙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피에 관련한 특별한 법이 주어지지요.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고 사람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화이트보드와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왜 구태여 하느냐? 그것은 바로 법 자체가 위반으로써 하늘나라 내분에 의해서 발생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다. 정말 어려운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법을 준다는 것은 뭔가 천국 완성에서 온전치 않는 모습, 내면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지요. 그걸 완성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을 줬으면 율법으로 구원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 외에 한 의가 나와요.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습니까, 율법 외에 한 의로 구원받습니까? 율법 외에 한 의로 구원받지요. 그런데 받는 입장에서는 뭐가 불필요하게 느껴집니까? 어차피 율법 외로 구원한다면 율법 왜 줬느냐 말이죠.
공항에서 수련회장까지 오려면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잖아요. 내비게이션이 자꾸 저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이 말을 왜 합니까? 안 가면 되지. 제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면 아예 율법 주지 말든지. 어차피 구원도 못 받는데 뭐하려 줘요? 왜 주는데.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율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서 율법이 만들어지고 하나님 의가 만들어지니까 유사한 것은 되지만 그렇게 바로 연결하는 건 곤란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길은 안 된다는 말은, 우리가 그냥 받는 입장에서는 저한테 구태여 알리지 마세요. 이래나 저래나 구원받아 챙기면 전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이란 말이죠. 어떤 통로로 왔는지 알 필요가 없이.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있고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일을 벌이는 게 아니고 애초에 우리는 없는 존재인데 내부 해결책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었지 현재 있는 우리 존재가 필요해서 하나님이 법을 주고 의를 주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면 안 되고 율법 외에 한 의니까 왜 율법은 아니며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어야 되느냐, 그것을 알려주는 현장으로 달려가야 돼요. 물론 주께서 달려가게 하시지만. 거기에 가보니까 피 터지는 싸움이 있었던 거예요. 악마와 주님의 피 터지는 전쟁을 증거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은 나를 자랑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과를 자랑해야만 우리는 아들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우리보다 먼저 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천사입니다. 그게 에스겔 1장과 10장에도 나오는데 천사들이 그냥 날개 쳐요. 눈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면서 두 날개로 스랍들이 영원토록 찬양하라고 이사야 6장도 나오고 에스겔 하늘의 보좌도 나오고. 하늘의 보좌가 주님을 양쪽에서 천사의 모습, 사람의 모습, 사자의 모습, 독수리의 모습으로 완전히 둘러싸서 주님을 보호하는데 안에 있는 주님이 좌로 가, 우로 가! 조종하면서 움직이는 겁니다. 장갑차처럼.
에스겔이 봤던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은 항상 장차오실 주의 모습인데 그걸 하나님의 이름이라 해요.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스스로 회수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 스스로 주가 되시는 결과물을 도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 싸움은 누구와 하느냐?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버려요. 성전 지으라고 허락해놓고 하나님이 라이터로 불태우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그게 바로 십자가 죽은 분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한 번 실패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저주 없는 인간은 구원이 되질 못합니다. 반드시 저주에 참여한 자만이 구원에 참여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 십자가 안에 들어갈 때 이미 율법의 저주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간단히 이야기합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어요. 문제는 뭘 믿느냐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인되었다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해합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믿어요. 자기 믿는 감정을 믿어요. 뭐? 그건 말을 안 해. 주여, 믿습니다. 뭘? 자꾸 믿는다는 색다른 내 감정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런 믿음은 나중에 부부싸움하면 다 날아가요. 새벽기도 은혜 받고 오후 두시 되면 다 날아갑니다. 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나오면서 지 신발 한 짝 잃어버리면 은혜 받은 것 짜증으로 돌변합니다. 받은 은혜 어디 갔는데? 단도리 잘 하지. 자기 믿음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우리가 지어내거나 만들어낼 수 없어요. 하나님 자신이 앞장세운 언약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는데 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내가 호출 당했습니다.
제가 호출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하도 교계에 이 단어가 범람하기 때문에 그래요. 소명이란 단어를 오해하기 때문에 차라리 호출이 와 닿는다. 군에서 차출. 일방적으로 뽑아서 일을 맡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필요한 곳으로 차출해야 돼요. 차출당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본인은 그런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항상 이야기해요.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거죠.
그 중에 한 사람이 소년 다윗.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자기 힘으로 이겼다고 하던가요? 이번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된 전쟁이란 겁니다. 이번 전쟁이 할례 받은 쪽과 할례 받지 않는 쪽,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의 전쟁인데 그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전쟁인데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두렵고 떨리고 무서워하십니까? 다윗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어른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존재와 존재끼리 벌이는 전쟁이 아니고 다윗이란 존재와 골리앗이란 존재가 벌인 전쟁이 아니고 다른 언약적 요소가 있는 거예요. 컨베이어 시스템이에요. 그냥 가만있으면 선반이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갖고 있는 무기가 뭡니까? 돌팔매죠. 돌팔매 쥐고 있는데 앞에 어떤 존재가 등장하지요. 판은 비-존재가 깔아놨고 소년 다윗은 비-존재에 의해서 연결돼있고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 갖고 있는 무기를 날릴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이미 떠난 한 돌의 궤적은 자기 소관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 했단 말이죠. 돌이 날아갈 때 과장해서 이야기합니다. 돌이 오는 걸 골리앗이 봤어요. 돌의 방향을 보고 피하니까 이 돌이 유도미사일이에요. 돌이 따라오는 거예요. 게 섰거라, 하는 식으로. 그런데 골리앗이 제대로 썼는데 사이에 박혀서 죽었어요.
제가 과장되게 이야기한 건 뭐냐? 골리앗 죽음이 이미 전쟁하기 전부터 시나리오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골리앗을 그렇게 죽도록 된 거예요. 그러면 소년 다윗 시선에서는 골리앗은 죽은 존재에요. 죽었다 치는데 뭐가 문제에요. 아저씨들, 사울 왕이여, 언약 안에 살아있는 우리가 이미 시체가 된 저걸 못 이기다니 무엇에 졸았습니까, 무엇이 겁납니까? 이런 안목으로 전쟁한 것이 소년 다윗의 전쟁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비-존재만 철거해보면 키가 삼미터 삼십, 목소리 크지, 수염 길렀지, 감히 함부로 대적 못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글에 힘이 있었어요. 실물 보니까 볼품없네. 비-존재가 존재의 세계에 등장하니까 볼품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게 된 것은 끝까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인상을 아니었어요. 요새 말로 하면 시골 어떤 서른세 살 먹은 나사렛 청년인데 과대망상 환자가 되어 지가 오실 메시아라는 우기는 거예요.
침착하고 지혜롭고 그리고 매사에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72명의 똑똑한 엘리트 유대인들은 모여서 이 청년에 대해서 온갖 배려와 인내성 있게 그리고 충고도 하고 미쳐도 곱게 미치라고 했지만 결국 못 참게 만든 것은 성전을 뒤집은 성전에서 채찍 들고 난동부린 것을 계기로 해서 괜히 로마에 비위를 건드려서 애매한 백성들 죽이면 안 된다고 해서 한 사람 청년 예수를 죽여서 로마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현명한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였고, 또 과대망상은 구라가 심하거든요. 죽고 난 뒤에 3일 만에 부활한다고 했어요. 안 믿는데 혹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갈까봐 로마 군병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게 예수이야기에요. 이걸 누가 믿겠어요? 절대로 안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이름 사울이었어요. 똑똑하기 짝이 없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그는 안 믿었어요. 이런 촌스러운 이야기를 누가 믿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하노라. 그야말로 만화영화에 나오는 용감한 소녀처럼 그처럼 사울이 설쳤는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말려야 하는데 말리지 않았어요. 여러 명 체포되어 죽고 스데반 집사 죽고 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러 갔다가 세례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불신의 눈으로 봤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생긴 정신적 트라우마가 쌓여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도가 넘쳐서 “살아계신 주님이여, 잘못했습니다.” 너무 악한 일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이 폭발해서 나가도 너무 나갔어요. 예수는 살아있다는 편지를 썼는데 그렇지 않아서 로마에 압제 받아도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유포가 되어 예수는 살아있다는 거짓말이 유포되어 나중에 로마는 이데올로기로 사용해서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서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퍼졌다, 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는 아멘. 옳습니다, 라고 해야 돼요. 왜?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바로 살아계신 주님께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 전략이 세상 끝 날까지 완벽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어요.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공개되었지만 철저하게 숨겨진 분이에요. 그리고 숨겨진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한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가게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불신자가 재조립한 이야기를 우리는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반대 이야기를. 그래서 저는 한때 이런 생각했어요. 만약에 신학교를 세우면 교수의 90%을 중으로 채우고, 소설가라든지 안 믿는 사람들로 해서 신학생들을 철저하게 세뇌시켜서 그러니까 예수는 신화적 존재라니까 이 바보들아, 라는 것을 실컷 해서 신학교에 50명이 오면 다 떨어트려야 돼요. 그래야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이 티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중들을 보낸 것은 신학교 총장이 보낸 것이 아니고 주께서 보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목사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래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개인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지 않을 거잖아요.
나 잘 되기 위해서. 자신이 방해물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내 지식과, 내 명예와 내 자존심이 십자가를 가린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진정 주의 증인입니다. 가는 곳마다 저, 죄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것을 성령에 의해서 믿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에요. 산을 옮겨서 바다에 빠트린다. 말도 안 되지요. 그것보다 더 심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사렛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거예요. 산을 옮기는 것은 포클레인 이만 대 동원하면 옮길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흘린 이천 년 전에 다른 몸에서 흘린 피가 이천 후에 이 몸의 어떤 죄도 씻어준다니 그 연관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거예요?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합니까? 이게 증명 안 되니까 진화론 반대하는 창조과학 하는 사람들은 증명이 안 되니까 과학적 이론으로 신이 천지를 창조했으니까 믿자는 쪽으로 나오는 거예요. 전 그 사람들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창조론자를 신자로 보지 않아요. 왜? 성령이 임하면 창조론자 되는 게 아니고 예수 십자가를 증거하게 돼있어요. 제 말 틀렸습니까? 사도 바울이 있잖아요. 나는 십자가 주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했는데 저쪽에서 화석 들고 설치고 공룡 뼈들고 설친단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떤 모순에 빠지느냐 하면, 다른 것은 다 죄라도 과학적 지식은 죄에서 빼주세요, 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마치 미용사가 자기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 내가 과속 운전한 것, 부모한테 효도 못한 것 다 죄가 되지만 저 아줌마 커트 잘한 것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주특기를 발휘한 것은 의롭고 나머지는 죄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진정 죄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그 미용사는 아무리 따져도 커트 잘된 게 왜 죄인지 본인이 그걸 증명할 길이 없네요. 이 수박 누가 차렸습니까? 반듯하게 잘 차렸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거예요. 누가 잘 차린 거예요? 수박 잘 차린 게 죄입니다, 하면 그때부터 증명을 해야 돼요. 이렇게 차려야 죄 아닌가, 이렇게 잘라야 죄 아닌가? 그게 아니고 십자가 자체가 수박이 아니고 참외가 아니고 미용사가 아니고 과학을 하던 그 자체로 이미 날 때부터 악한 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십자가가 새 언약, 마지막 언약이니까 한꺼번에 우리를 확정지어버린 겁니다.
확정지었기 때문에 나온 게 성령이고 그 성령을 우리가 받게 되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맞네요. 죄인 맞는데 살아가는 것은 모두 감사네요. 별아, 안녕. 인자하심이 저기 있네. 님 그림자만 부르지 말고. 달아, 안녕. 당신도 인자하심 믿고 나도 인자하심을 믿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 같이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모습, 이게 로마서 8장이잖아요. 성경을 완전히 관통해버렸어요. 십자가 언약으로 완전히 뚫어버렸어요. 뚫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죄로 드러납니다.
한국에 ktx가 있어요. 시속 310까지 나와요. 제가 보거든요. 하도 많이 타서 마일리지 좀 쌓였어요. 에너지를 가하게 되면 공기가 깨지면서 큰 소리로 들리거든요. 십자가가 지나가면 지나간 곳이 전부 다 죄로 변해요. 언약이 지나간 곳에 죄가 들어갑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이걸 몰랐어요. 제사가 지나가면 저희들이 죄고, 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 제사에서 쓴 어린양인 것을 알아야 될 텐데 그들은 제사 지내는 그 자체를 의롭다고 본 거예요. 제사 지냄을 소유하는 거예요. 제사 지내라 하니까 그 율법의 명령을 소유함으로써 의로운 나라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바로 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11장 봅시다. 함에 땅에 세워진 탑이 하나 있어요. 그 탑이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의 의미가 있어요.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겠다.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거죠. 우리 이름이 하늘로 오르면 누구 이름이 보편적 단독성이 될까요? 우리 이름을 탑 위에 쌓아서 하늘에 올랐으니까 모든 세계는 보편적 단독성, 전체를 덮는 의미를 제공하는 의미를 나눠주는 모든 의미는 우리들 이름에서 나온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고, 민주주의 정신을 아브라함 링컨이 이야기했어요. 게티스버스 연설에서 뭐라 했습니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아멘이죠. 바른 소리에요. 왜? 이 세상이 멸망하니까.
경주에 5.8 지진이 일어나도 인민의 나라는 흔들렸어요. 서울까지. 대구는 물론이고. 주님은 통째로 세상을 멸망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렸기 때문에. 창으로 찔렀기 때문에.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 예수님을 홀대했던 이 세계가 결국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 됨으로써 자동적으로 이 세상은 뱀의 후손의 세계, 사탄이 통치하는 세계, 큰 성 바벨론, 그걸로 들통 났습니다. 세상이라 하지 않고 큰 성 바벨로, 음녀라고 의미를 제공한 것은 그 모든 의미가 비-존재자인 예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 입장에서 붙이는 개념들이 요한계시록에 박혀있는 거예요.
그걸 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 이름으로 풀 수 없고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십자가를 경유해야 풀리게 돼있는데 사람들은 구원받겠다고, 자기 구원받는 욕구가 앞서서 자기 존재성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다보니까 666 받으면 안 된다,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내 이름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받아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 해석의 대세가 되고 말았어요.
[생명의 신호]이란 책이 좁은 길이란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그 출판사 존재를 아십니까? 그 사장님이 누군지 알아요? 비-존재적 감춰진 인물이죠. [생명의 신호]란 책에 이런 그림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어디 있느냐? 역사와 환상의 교집합. 서로 결합되는 집합이 있다. 역사와 그리고 환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는 역사로는 포착이 안 되는 세계에요. 그래서 역사의 세계는 요한계시록을 읽어낼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역사는 역사를 부정을 못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예수님이 역사 세계를 부정한 사건이거든요. 부정하지 못하고 자기를 스스로 포기 못하는 것으로 너를 포기하라는 분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기어이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는데 나란 역사를 구원받으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탈락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요한계시록 해석을 누가 하느냐?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만이 마치 자기가 떠나온 세계를 다시 흩어보듯이 내가 이런 고생했지. 회상하듯이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이미 십자가로 용서 받고 난 뒤에 도대체 내가 어떤 세계에 살았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개판인 세계였어? 그걸 바라보는 내용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생명의 신호]에 시조 한 편이 실려 있어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미 황폐해진 옛 도성을 말 한 필로 돌아보면서 옛날엔 인재도 많았건만 이제는 황폐해졌구나, 하는 느긋한 안목으로 이 뉴-저지를 보시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비-존재요, 없는 존재고 그들이 죽은 존재라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우리들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죽은 시체 골리앗으로 보기 바랍니다. 골리앗의 특징은 덩치가 크다, 잘 산다, 좋은 차를 탄다,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만 죽은 자가 차 몰고 가는 거예요. 언젠가는 죽을 거잖아요. 지금 살았듯이 언젠가는 살아가고.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묵시적 혜택을 입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면 죽이려고 해도 못 죽여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죄가 있어야 죽이는데 의인 돼버리면 통과, 이게 유월절이거든요.
어린양이 대신하면 더 이상 죽을 이유를 찾을 수 없어요. 강도를 붙들고 천사가 아무리 봐도 이 사람 죽일 이유가 없네. 천국. 창녀를 붙들고 아무리 봐도 지옥 보낼 근거가 없어요. 천국. 사전 조치가 다 돼있어요. 예수님께서 피로 용서를 다 했지요. 그야말로 매일같이 신상입니다. 새로운 제품으로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은 어디서 이뤄지는가? 천국은 어디서 이뤄진다? 땅에서 이뤄진다. 어떻게 이뤄진다? 원수지간 전쟁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알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나의 방패라고 했어요. 방패는 전쟁하는 그거에요.
11장하기 전에 15장부터 먼저 봅시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이 말은 전쟁이 있으나 전리품이 네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네가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가지고 전쟁하는 거예요. 네가 나서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데리고 전쟁하는 거예요. 마치 하나님이 욥을 데리고 사탄과 내기하듯이.
쉽게 말합시다.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돼요. 교회에서 제직회할 때 큰소리치면, 목사나 장로가 뭐라고 합니까? 김 집사 뭘 믿고 큰소리칩니까, 하지요. 갑자기 교회가 믿는 단체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교회는 예수 믿는 단체입니다. 말을 해도 주님 바라보면서 십자가 바라보며 이야기하죠. 주님 믿고 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목사가 안 지려고 나는 주님 안 믿나, 이러거든요. 같은 주님인데 의견이 다릅니까.
아브라함 전쟁이 그 뒤에 나와요. 14장에 보면, 아브람이 조카 롯이 사로잡힘을 듣고 318명을 데리고 다섯 왕과 싸워서 이깁니다. 이 전쟁이 아브라함이 전쟁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걸 알아요. 누가 하셨는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길에서 누굴 만납니다.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이제 나옵니다.
땅이 두 종류로 나눠져요. 하나는 법의 체계가 있고, 또 하나는 묵시의 체계가 땅에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멜기세덱은 이름 없는 사람이에요. 지상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 보통 족보는 부모의 족보를 따르거든요. 그런데 지상에는 아비도 없기 때문에 하늘의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이에요.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에 아브라함이 본의 아니게 말려든 겁니다. 아브라함은 318명밖에 안 돼요. 그것도 용병이고 소수입니다. 말이 군사지 군사 아니에요. 그냥 하인들이에요.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겼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궁금해 죽는 거예요. 이번 전쟁은 제 솜씨가 아닌데 누구세요? 정체를 밝혀라.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나님이 찾아왔지요.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숨겨진 비-존재적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비-존재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그걸 증명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묵시적 이름을 갖고 있는 멜기세덱이었고 아낌없이 자기의 모든 걸 드립니다. 그게 십일조에요.
십일조라는 것은 모든 걸 드리고 다시 한 번 나로 하여금 있게 한 것이 주님 쪽에서 존재케 하셨다고 고백하는 식으로 90%을 되돌려 받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 차이가 10%. 그런데 다른 사람들 보기에 마치 내 것 중에서 10% 드린 것처럼 보이잖아요. 사실은 내 것도 아닌 90%을 염치없이 돌려받았는데 다 가져가도 되는데 10%도 아니고 90%을 돌려받으니 이렇게 황공할 데가. 그게 십일조입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품꾼이거든요. 약속의 땅의 지주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비가 오고 안 오고 따라서 생산물이 달라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적당한 비를 주면 되지 않겠느냐? 조건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제사를 제대로 지내야 약속의 땅에 비를 내리고 곡물을 생산케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 지주의 대변자지요. 백성들은 지주의 품꾼이죠. 그러면 생산물 전부는 누구의 공로입니까? 바로 땅주인의 공로지요. 십일조를 누구한테 드려야 돼요? 제사장한테 드려요. 그게 바로 십일조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공사가 잘 됐습니다. 그래? 기분이다. 90% 가져가.
따라서 돌려받은 그것은 제사장 때문에 돌려받지요. 그럼 퀴즈? 오늘날 제사장은 몇 명일까요? 보편적 단독성, The onE, 일자, 한 명이죠. 그런데 그 제사장은 임기가 몇 년일까요? 영원이죠. 영원한 제사장으로 등극했다는 것은 계속해서 받을 십일조를 다 받아 챙겼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미 십일조를 받았던 복의 덕택으로 우리에게 성령세례가 왔고 신자가 되었다면 우리가 또 낼 십일조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덜 냈으면 복이 덜 와야 되는데 완벽한 구원을 이뤘다면 받아 챙길 십일조는 다 받아 챙겼다는 거예요. 적금 다 부었어요.
오늘날 십일조 낸다는 데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데 낸다 말입니까? 구약에서 십일조를 누구한테 냅니까? 제사장이 받지요. 오늘날 제사장이 있어요, 없어요? 있기는 있는데 항상 살아계셔서 영원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 드리면 받습니까? 이미 다 받았어요. 본인이 제물이고 본인이 제사장이고 본인이 아버지께 십일조라는 모든 율법을 본인이 십일조가 되셔서 아버지께 드려서 완료됐기 때문에 온 게 새 언약이고, 다 이뤘다. 이뤘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짜로 성령이 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공짜 받아놓고 공짜 중에서 내면 무슨 꼴이에요?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을 잘못했는가?
-신약 시대인데 교회제도는 여전히 구약 시대를
그건 지 마음대로 하는 건데 평가할 가치도 없어요. 지가 뭘 하든 관계없어요.
바벨탑이 뭐냐 하면, 사람의 이름으로 오르잖아요. 아래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아브라함은 뭣도 모르는 보통 사람인데 위에서 내려왔어요. 하나님은 땅에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위에서 내려오고 인간은 거꾸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위, 아래. 아래, 위.
제가 무슨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간단하게 해서 아브라함은 핍박을 받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핍박을 받았다는 말은, 누가 핍박받았다? 예수님이 핍박받았다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지금도 우리 이름이 유명해지기를 원하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이 모독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주여, 또 제가 까불었습니다. 세상 본받아서 출세하려고 설쳐댔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어디까지 낮아졌다?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졌지요. 그럼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뭡니까? 최저까지 낮아지심이란 의미가 십자가에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다른 말로 번역하면, 최저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만나라.
바로 천국은 땅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 싫어하는 최저 바닥에서. 스스로 주께서 낮아진 것도 있지만 누가 떠밀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인간의 이름의 속성과는 반대된다는 이유 때문에 매몰차게 그분을 저 낮은 곳으로 패스시켰어요. 돈 되는 하나님은 연결했지만 십자가 진 하나님은 우리가 안 믿어. 우리가 패스, 패스. 우리가 통과시켰습니다.
마지막 이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탕자가 가출한 것 아시죠. 아버지는 누굴 기다립니까?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죠. 아버지는 알아요. 집 나간 그 자리가 탕자의 자리가 아닌 거예요. 그럼 탕자는 가출할 때부터 아버지의 이름, 하나님 이름의 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 다시 말해서 아버지 재산으로 출세하겠다는 인간의 이름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아버지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식이 가출하는 행위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항상 효도 다했던 맏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가출한 경험이 없어요. 그러면 아버지 이름은 인간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가출한 것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카고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제발 서로 사랑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본문입니다. 그 본문을 설명하고 해석하면서 제발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는 시카고 교인들 기분 좋았어요. 평소에 하던 행세대로 하라 하니까. 왜냐하면 가출, 탕자가 돼줘야 돼요. 죄인이 돼줘야 돼요. 죄인이 안 되면 구주의 의미가 날아가요. 없어져요.
그러면 제 말 곡해해서 목사님이 책임지고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미워해야지. 꼭 그런 사람 있다고요.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평소에 내 이름, 내 명예, 내 가치로 살잖아요. 그 자체가 비록 가출 안 하더라도 이미 뭐가 잠복돼 있습니까? 내가 돈이 없어서 교회 나오지 돈만 벌면 놀러갈 거야. 교회도, 하나님도 바이바이야. 이미 내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든지 항상 가출할 만반의 준비가 돼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눈치 채면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영광스러운 탕자, 정말 아버지께 사랑받는 탕자가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탕자의 자리에 있을 때 오히려 그 탕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기다려주신 아버지 은혜가 생각납니다. 솟아나죠.
마지막 이 문제 던지고 마치겠습니다. 탕자가 맛있게 소고기 먹고 가락지 끼고 새 옷 입었잖아요. 탕자가 돌아온 지 오년 쯤 지났습니다. 마을 사람이, 둘째 아들 그 가락지 누가 거야? 내가 탕자 되어 얻은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아니면 나는 탕자였는데 아버지 은혜로 가락지 끼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오년 이든 십년 이든 가락지가 있는 한 주의 은혜가 함께 있겠지요.
그러면 흔히 말하는 거룩이 뭐고, 성화가 뭡니까? 항상 십자가만 자랑하는 게 바로 거룩이고 거룩한 생활이잖아요. 그때 탕자 되니까 아버지기 이것 주더라. 그때 잘 나갔어. 내 공로로 얻었어. 이러면 안 되겠지요. 항상 십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주여, 이것만 보면 아버지 생각납니다. 이처럼 거룩 된 생활이란 예수님만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거룩 된 생활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