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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아카데미4강-구약의 흐름 1609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5. 19:43
2016-10-05 14:37:04조회 : 16         
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4 – 구약의 흐름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36)

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4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4장에서 유념해야 될 게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르릴지니라”

이 대목입니다. 가인은 지금 아벨과 상대하고 아벨은 가인과 상대하지요. 다시 이야기하면 두 형제 사이에 하나님이 끼어들었다. 금지의 내용,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끼어들었습니다. 금지의 본질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관련돼있고 그것은 바로 영적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를 보여주기 위하여 너희들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거지요. 본질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죽음이 중간과정으로 반드시 등장해야 되고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써 이 세상이 비로소 죄 됨을 확정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어야 돼요.

그런데 죽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보조적인 요소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거기에 끼어든 것이 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가 문에 엎드려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 죄가 강아지입니까? 죄라는 것이 얼굴, 배, 가슴 이런 행태가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보통 성경 볼 때 필요한 것만 체크하고 본질적으로 안 다가서는 경향이 있어요. 적당히 스스로 정당화하면 그걸로 해석 멈추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십자가를 경유해야 한다는 말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 문제는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주님이 일부러 만들어냈어요. 따라서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한테 가야 해답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론은 맞지만 해보니까 응답이 없던데요? 응답이 없을 수밖에 없지요. 주님이 하는 질문을 계속 내가 질문했다고 움켜쥐고 계속 가니까 안 없애니까 해답이 안 생기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하셨죠?”부터 출발해야 될 걸 왜 제 인생에 끼어들어서 힘들게 합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입니다. 내 문제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대상화하고 객체로 사용해서 상대하려고 하니까 주님이 해답을 줬는데 자꾸 버리는 거예요. 이것 말고 내가 정식으로 꽂아놓은 그 해답을 달라 이 말이에요, 라고 하니까 해답은 비껴 지나가는 거예요,

가인은 평소에 죄와 상대하는 걸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만들어낸 문제를 더욱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죄를 가인에게 붙여버립니다. 붙이게 되면 가인은 동생과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자기 죄 문제와 맞닥트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이걸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쉽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선에서 쉬운 거고 듣는 사람은 안 그렇겠지요.

죄가 강아지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여기 보니까 청설모가 뛰어놀아요. 죄가 청설모 같이 생기지도 않았고, 그럼 죄가 들어온다는 것은 어떤 물체, 어떤 형태가 들어온다는 말인가? 이것부터 따져봐야 되겠지요. 죄가 들어온다는 게 무슨 의미냐? 다스린다는 말을 통해서 죄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욕망을 유발하면서 다가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욕망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욕망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그리워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욕망이 생겼다는 말은, 그 욕망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 가자, 내 형제여. 잡아당기는 거예요. 귀신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듯이. 욕망은 그냥 욕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가자고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것을 나의 욕망이라고 해요. 왜? 개인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나의 욕망은 어디를 잡아당기느냐 하면, 나를 욕망하는 것까지 가게 됩니다. 욕망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 인간형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욕망이 오는 순간 나는 저처럼 돼야 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튜브에 <호텔 캘리포니아> 동영상이 있어요. 미국 사람인데 기타를 너무너무 잘 치는 거예요. 애드리브 막 넣고 하잖아요. 그걸 보는 순간 저 사람 자리에 나를 대입시킵니다. 그러면 나는 그 기타를 치고 있고, 기타 칠 때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앞에 군중이 있어요. 큰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재미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두세 명 놓고 설교하는 게 아니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2부, 3부 할 때 그 모습이 자기에게 욕망이 찾아온 증거입니다. 한 삼천 명 하다가 삼십 명 교회 가라 하면 안 가. 어디든지 복음만 전하면 되잖아요. 안 가. 삼천 명이 없잖아.

삼천 명은 자기의 제2의 자아가 되죠. 그 사이가 바로 죄가 되고 욕망이 되는 겁니다. 평소에 가인이 동생 죽이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아니에요. 가인의 취미가 사람 죽이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런데 욕망이 찾아왔는데 아직도 우리는 4장 7절에서 욕망의 방향은 몰라요. 그 방향은 8절에 나옵니다. 그 아우 아벨을 쳐죽었단 말이죠. 그 순간 가인은 뭘 느꼈는가 하면, 나는 나 혼자 살지, 라고 했는데 죄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요. 동생 없이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그걸 본인이 만든 게 아니에요. 강아지처럼 죄가 살금살금 우리에게 찾아와서 기어이 우리가 그 죄를 못 이기게 돼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찾아온 욕망을 문전박대할 수 있습니까? 옛날 과부들 허벅지에 멍이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멍들어도 소용없어요. 과부 혼자 사는데 지나가는 과객이 그것도 모르고 하룻밤 묵을 수 있습니까? 야심한 밤에 여인 혼자 사는데 그럴 수 없나이다. 은장도 꺼내서 참아야 하느니라. 사실은 그 여인의 욕망에는 그런 게 없어요. 먼저 문구멍으로 잘 생겼는지 상대를 주시합니다. 돈 좀 있어 보이고 똑똑하게 잘 생기고 키 180 이상 돼 보이면, 이러면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들이고, 못 생기고 그러면 가라 한단 말이죠.

욕망이란 가만있지 못하게 만드는 그 죄가 욕망인데 우리가 그 욕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흔들기 속에 놓여있습니다. 현장에 만족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만족을 위해서 죄가 흔들어요. 그러면 우리가 가인이라면 욕망을 이깁니까? 못 이기죠. “주여, 이런 욕망을 이길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러든지 어제 이야기한대로 “나를 파괴시켜주옵소서. 나의 죄만 끄집어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기어이 동생을 죽여 버립니다.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동생을 누가 죽였습니까? ①가인이 죽였다. ②죄가 죽였다. ③여호와가 죽였다. 문제 어렵다. 수능 나오면 안 되는데. 삼번이 정답이에요. 그 사람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잖아요. 스데반 죽을 때 주동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 이야기라는 것은 기존 교회 목사들 깜짝 놀라요. 네가 죄를 유발하는구나. 인간들이 죄 지으려고 환장했는데 아예 부추겨라. 무슨 짓거리든 해놓고 뒤에 이번 일은 주께서 하신 일이니 저에게 책임 없습니다. 이 말만 붙이면 그냥 죄 없는 사람 되는. 잘 한다. 교회 꼬라지 잘 돌아가겠다. 안 그래도 근질근질 했는데 교회 내에 바람피우고 싶어 환장한 남자들이 득시글한데 잘한다.

우리 교회는 그래서는 안 돼. 우리는 경건해야 돼. 정결과 성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누가누가 거룩하냐, 그 시합하는 거예요. kbs2에서 금요일 오후 4시에 방영하는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장수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걸 교회가 아직도 하고 있어요. 누가누가 착하냐.

왜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중심이어야 돼요? 그런다면 찾아온 욕망이 물러갑니까? 이미 들은 게 있는 그 욕망을 치울 길이 없어요. 주님은 놀랍게도 우리로 하여금 지옥 속에 살게 하십니다. 욕망 속에 살게 하시고 그리고 가인처럼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네 역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네가 때려죽인 아벨의 피가 너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 속에 놓이게 했어요.

그 사실을 알면 새삼스럽게 죄를 지을까요, 가만있어도 죄라는 것을 알까요? 교회에서 죄 지으면 가만있으면 돼요. 가만있어도 죄 지은 거니까 구태여 눈이 벌게서 죄 짓는 사냥에 나설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이 문제 어떤 문제냐 하면, 욕망의 마지막 목적지가 뭐냐? 나를 욕망하는 거예요. 어떤 나? 내가 내 욕망대로 완성된 그것을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욕망은 ‘소유격+목적격’입니다. 나를 욕망하는 거예요. 이것이 사탄의 속성이에요. 악마의 속성입니다. 나보다 더 소중하고 나보다 더 귀하고 나보다 더 사랑스러운 건 없어요. 지금 문제는 내가 내 마음에 안 들어요. 따라서 우리의 종교의 목적, 하나님을 찾는 목적은 내가 소유할 때까지 줄기차게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인을 키워서 확대시킵니다. 왜? 아벨이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 하나 나갑니다. 아담이 범죄 했잖아요. 범죄 하자마자 왜 예수님을 안 보내십니까? 아담이 죄 지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은 사랑한다면서요? 세상을 사랑하신다면서요? 아벨, 가인 복잡하게 할 것 없어요. 그냥 예수님 보내서 십자가 지고 그 피로 구원하면 되잖아요. 왜 가인, 아벨, 노아 복잡한 계통을 밟게 하십니까?

이건 신학교수도 모르고 어려운 문제지요. 어려운 문제지만 그런 의문점이 들지 않던가요? 모세, 노아 복잡하게 하지 말고 구약이 왜 두꺼워요. 짧게 하면 되잖아요. 아담이 범죄 했는데 주께서 사랑하사 십자가 보내서 구원받아 천국 갔다. 간단하게 되는데 왜 그렇게 두꺼운 겁니까? 그 해답은 출애굽기 15장에 나와 있어요. 죄가 관영하기까지 사백년을 기다려야 됩니다. 누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로 애굽에서 대기상태에 있다가 죄가 관영해야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인구원문제가 아니지요. 의가 죄를 이긴다는 주님의 자기 속성에 관한 문제지요. 그 속성에 관한 문제에 아브라함 자손이 거기에 쓰이는 것이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야망과 구원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건 아닙니다. 주체가 하나님이지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쓰이는 겁니다. 기다려야 돼요. 400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이미 해답은 주어졌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그러나 430년 후에 주어진 것은 율법이었어요. 이상하지요. 이미 해답 줬잖아요. 율법은 왜 줍니까? 해답은 줬는데 문제지를 안 준 거예요. 여러분 수학정석을 볼 때 성질 급한 학생들은 해답부터 먼저 보지요. 주님께서는 그 방법을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해답부터 먼저 줘요. 그래서 신약성경이 어려워요. 해답만 나열돼있기 때문에. 그래서 신약성경은 무슨 뜻인지 몰라야 정답이에요.

그런데 쪽지 보고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 고맙네. 죄 지었는데 죄 용서하라고 십자가 보냈는데 믿습니다. 깔끔하게 끝내버렸어요. 지금 뭘 몰라요? 십자가 피는 안다고 우기지만 정작 피가 무엇과 만나야 됩니까? 죄와 만나야 되는데 죄를 모르는 겁니다. 지난번에 죄 지었지만 지금은 예수 믿고 죄 안 지었어요. 죄는 구약에서 알려줘야 돼요.

구약은 문제지입니다. 구약에 나온 등장인물들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성전 만들라면 성전 만들었지요. 율법대로 제사 드렸지요. 제사장 세우라면 제사장 세웠지요. 그것 하려고 애 먹었어요. 왕 잘 보필하라고 해서 왕 보필했지요. 다윗 나와서 그렇게 신경 썼지요. 적들과 전쟁하라 해서 전쟁했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결론은 멸망이었습니다. 안 된다는 것.

요한복음 3장에서는 너무나 냉정하게 그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니고데모한데 한 말은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겁니다. 참 섭섭하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못 간다. 네가 감히 육을 이겨?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영으로 도약되는 게 아닙니다.

비행장에 돌아다닌다고 다 비행기 아닙니다. 화물 실은 자동차 돌아다녀요. 못 납니다. 비행장 온통 돌아다니죠. 오늘날 교회 같아. 교회 실컷 나왔는데 천국으로 날지를 못하니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실컷 십일조하고 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금요철야까지 나왔는데 날지를 못해. 닭 같아. 지옥 가서 튀겨집니다만. 지옥은 원래 튀김집이에요. 백날 파닥거렸는데 날개가 있어야지요. 천사가 찾아와서 날개를 치든지 해야 되는데 천사가 오질 않으니. 진짜 물동이를 버려둬야 되는데 물 긷는 내 일보다 주님이 찾아오는 것이 물 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물동이를 버려둬야 되는데.

주님 찾아오지 않으니까 시장터죠. 돈 없이는 사람 아니라는 그 구조가 있는 비행장만 맨날 돌아다니는 겁니다. 정보 얻기 위해서 큰 교회 가고. 작은 교회는 자기 딸 신랑감이 없어서 큰 교회 가면 있겠지, 하고 기웃거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원칙은 변함이 없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안 죽이죠. 분명히 살인자는 죽이라 해놓고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뭐가 죽음이냐, 뭐가 저주냐? 번창이 저주요, 번창이 죽음보다 더한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죄가 오염돼요. 온 천지에 죄가 죄를 낳고 죄가 죄를 낳는 가인의 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 선조가 뱀의 후손과 가인과 연관돼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을 어떤 경우라도 어떤 순간이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 원수지간을 주께서는 반복시키지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뭐냐? 아벨과 가인은 원수지간입니다. 거기에 여호와가 개입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이 개입했다, 하나님이 찾아왔다, 아주 소박하게 하나님이 찾아왔어요. 무슨 뜻입니까? 드디어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 나서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가인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아벨 이야기해봅시다. 아벨은 형이 돌 들고 왔을 때 아벨아, 뒤돌아봐. 빨리 피해. 라고 왜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편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편이지. 얼마나 매정한지 몰라요. 그렇게 어린양 잡고 제대로 제사 했으면 적어도 뭔가 받은 게 있으면 인생을 좋게 끝맺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벨이 제사 드릴 때 자기도 육이기 때문에 상상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내 편이다. 욕망이 작용해서 멋지게 될 자기를 욕망할 수 있는 문제에요. 하나님이 나를 짱돌로 쳐 죽일 시나리오에 자기 인생을 마감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세례요한이 날 때 평범하게 낳지 않았어요. 아주 요란스럽게 아버지는 말을 못하고 서판에 이름 쓰고. 그 집 이름 놔두고 성을 요한이라 할 정도로 요란하게 했으면 적어도 세례요한의 미래는 세상적으로 당회장이나 총회장할 정도로 큰 인물로 나야 되는데 희한하게 인물 났지요. 여자아이의 장난스런 농담 한 마디에 목이 잘리는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그렇게 처참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태어날 때 요란 떨지 말든지. 성령이 임해서 예언한 아들이면 그게 걸 맞는 대우를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성도의 대우가, 참. 이게 대우하신 거예요?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늙어죽은 것도 아니에요 참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너는 널 챙길 것 없어. 

챙기면 나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고 

네 자신, 하나님께 제사 드려 응답받았다는 그 간증을 너는 욕망할 거야. 

까불지 마. 나 이 정도야. 쳐 죽여 버립니다. 

아벨이 주인공이 아니고 아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인공이에요

예수님 때문엔 아벨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가인의 벌은 놀랍게도 번창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 번창 하느냐 하면, 주위 사람들이 보호해줘요. 보에 싸임이 가인에게 있습니다. 아무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대한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 족속은 가인의 족속이에요. 최고의 영웅이에요.

여러분이 먼저 태어났다고 그 시조가 아닙니다. 씨족 가운데 벼슬 좀 해야 적어도 영의정이나 아래 단계는 해야 시조가 되지 궁중에서 내시한 것으로는, 우리 8대손 내시했다고 이걸 어떻게 자랑스러워합니까. 영의정 쯤 돼야 경주 이씨 상서공 파쯤 되면 영의정한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자랑질 하지요.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편하게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성경 공부했잖아요. 돌아서면 우리가 느끼는 리얼리티는 현실입니다. 성경의 세계가 아니에요. 역시 사람은 잘 되고 볼 일이다. 그게 우리의 온 몸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간섭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갑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간섭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아벨은 뭐냐? 이용했지요. 이용당했지요. 아벨은 섭섭하지 않습니까? 천사가 우리 대신 변명해줍니다.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신분이 되었는고? 저 영광스런 자리를 천사가 부러워합니다. 천사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성도를 위해서는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할 정도, 적어도 우리는 그 정도입니다. 아무도 감격 안 하네. 우리가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적어도 예수의 피가 소모될 정도, 천사가 흠모할 정도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개 차원으로 취급해요. 인간은 쓰일 때만 주님과 연관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삽입되면서 고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지 그냥 인간은 쓰레기입니다.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니에요. 쓰다가 던져버리는 걸레나 낙엽 정도밖에 안 돼요.

그걸 누가 아느냐?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다윗이 압니다. 다윗이 한 고백이 시편 8편에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무엇이관대 저 같이 하찮은 인자를 생각해주십니까? 뉘앙스를 보세요. 하나님 저 정도는 알아줘야지요. 이것과 정반대지요. 안 찾아오셔도 충분히 하나님답습니다. 그런데 하찮은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찾아올 때 다윗이 한 표현이 있어요. 인간이 아닙니다. 人子

예수님은 자기를 호칭할 때 인자. 하찮은 인간과 동일하게 되기 위해서 물세례 받으신 거예요. 의밖에 없으면서도 죄인이기에 받아야 될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아 이제부터 나의 갈 길을 가야 되겠다. 여기서 너와 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라고 요단강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신약, 구약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제발 성경을 통으로 보셔서 속아도 그만 속으라고. 절대로 인간은 귀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께서 귀하게 쓸 때만 귀하지 그 자체로는 전혀 귀하지 않습니다. 귀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죽음에 대해서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벨을 그렇게 죽이고 드디어 창세기 5장으로 넘어갑니다. 창세기 5장에서 나이들이 나오지요. 나이를 비교하게 되면 동시대를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목표가 있어요.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판을 키웁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에덴동산을 폐쇄했지요.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불든 천사로 그 길을 차단했습니다.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 네가 존재하는 자체가 죽음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죽어야 된다. 그래서 살다가 죽지요. 주님께서 이름대로 했지요. 아담 이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 이야기할 때 인간들은 비로소 깜빡 하나님께 속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처음에 아담 이름이 흙이 아니고 사람이죠. 사람으로 지어놓고 결국 사람은 탈락시키고 흙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알고 이름을 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뱀한테 속힌 거예요. 뱀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거예요. 너, 의미 있다. 자꾸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속성이 어디서 왔느냐? 뱀에서 왔거든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뱀이 사탄이 하나님께 대적하게 된 이유가 나타나요. 나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내 의미를 따로 갖겠다는 것 때문에 하늘나라에 반란이 일어나서 전쟁이 일어났고 못 이기니까 땅으로 쫓겨나서 인간을 유혹한 거예요.

그렇다면 천사 개인의 의미를 안 줬을까요? 천사가, “하나님 저도 나름대로 나의 의미, 가치를 따로 갖고 싶습니다.” “그래? 가져라.”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이럴 수 있는 문제잖아요. 왜 따로 의미와 가치를 주지 않을까요? 그건 세상의 모든 중심은, 의미와 가치를 독점할 분을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둔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나사렛 예수잖아요. 나사렛 예수님이 모든 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을 창세전에 이미 결정했고, 그걸 사탄이 눈치 챘지요.

그래서 사탄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의 적은 예수님이십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욥과 싸우지 하나님과 안 싸우죠.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하지요. 그런데 욥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들어 있잖아요. 그리고 스가랴 4장에 보면 여호수아, 스룹바벨 옷을 벗기라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 사탄이 더럽다고 하지요. 사탄은 고소하는 자니까.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고소하는 자가 사탄이에요.

스가랴 3장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호수아 섰거든요. 사탄이 우편에 섰고, 하나님과 사탄이 안 싸웁니다. 주의 원수죠. 예수님의 원수지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사탄이에요. 알라, 힌두교.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면 발작을 해요. 지들도 들은 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경배하는데 이게 왜 죄인이냐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신앙인인지, 아닌지 성도인지, 아닌지는 결판이 어디서 납니까?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냐, 

죄 지을 경우에만 죄인이냐? 

그 문제지. 죄 안 지면 아직도 의인될 여지는 남아있고, 거룩할 여지는 남아있고, 성화될 여지는 남아있다고 한 이것이 바로 사탄의 종이에요. 사단에 종속된 속성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복음 전한다는 것이 마귀로서는 얼마나 긴급한 상황이겠어요. 빨리 색출해서 쫓아내야 되겠지요.

여기 보니까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천사 앞에 서서 여호수아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그러니까 명을 합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세상에 이런 명령보다 더 행복한 명령이 있을까요? 주님 앞에서 저 이상현 목사의 옷을 벗겨라. 세상에 이런 신분. 인자가 뭔데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평소에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죄만 지었는데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그럼 뒤에서 주님께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개인구원 아니거든.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이분도 있어. 이분도 있고. 처음부터 개인구원은 없었어. 모두 다 주의 지체와 백성이야. 서로 사랑하라. 주 안에서. 그게 바로 내 마지막 계명이다. 개인구원은 사랑이 성립 안 됩니다. 개인구원은 반드시 구원이 된 나를 욕망하고 그걸 소유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나를 사랑하기 바빠서 절대로 남을 사랑할 틈이 생기지 않아요.

부자 청년 이야기 알지요. 그 사람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잖아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과 합치됐습니까? 떠났지요. 그 사람 주장은 이겁니다. 십계명 열심히 지키고 주님을 존중했기에 찾아왔다는 거예요. 주님은 그 본질을 알지요.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알지요. 그래서 모든 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말은 주께서 그 개인에게 하는 이야기지 다른 사람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박사학위 셋 있으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팔아 나를 따르면 영생이 있으리라, 하면 박사학위 셋 있는 사람은 신났지. 재산이 없으니까. 그때는 주님이 멘트를 따로 합니다. 너, 박사학위 몇 개 있노? 네 개입니다. 그 모든 것을 찢고 나를 따라오너라. 또 어떤 사람은 박사도 아니고 돈도 없지만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네 아들을 바치라고 나오지요. ]

결국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온다는 거예요. 육은 맞아요. 육에 영이 침입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핀셋으로 집어내어서 구원해요. 간단해요. 구원은. 그런데 그 성령이 나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구원이란 애초부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구약도 좋지만 이것 모르면 구약 접근 못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4, 15절 누가 크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네가 구원받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은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어놓은 내가 원했던 내 욕망, 소유하고 싶은 내가 나의 목적이 된 내가 꾸며놓은 하나님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거부하고 거절합니다. 이게 아까 에덴동산의 동쪽 길을 천사가 와서 강제로 폐쇄시킨 그 하나님이십니다.

쫓아내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했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내부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었던 내부문제고 그게 평정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겁니다. 내가 이야기해도 참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쩔 수 없어요.

인간아, 너는 빠져나오라. 다만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서 여자의 자손 편에 설 사람은 가서 기다려. 내가 너를 뽑아서 내가 데려와서 일을 시킬 거야. 어떻게? 아벨처럼, 선지자처럼,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여러분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간 것 아시죠. 그러면 모세가 천국 못 갔습니까? 갔지요. 모세가 천국 간 게 어느 대목에 나옵니까? 변화산에 나오잖아요. 그때 모세, 엘리야 나오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모른다 치고 광야에서 그 현장을 봅시다. 모세는 벌벌 떱니다. 들어가야 되는데 나 저것 소망이었는데. 그러면 주변에서 지옥에나 가라고 놀리겠지요.

모세의 역량과 본질이 문제가 아니고 모세의 역할에 관한 문제입니다. 못 들어간 것은 못 들어가는 일을 시켰다는 자체가 모세는 천국 백성이란 말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래요? 사울도 그래요?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구약은 모든 게 모형이고 그림자에요. 구약에 아간, 사울 나오지요. 악신 들린 사람 있잖아요. 지옥 간다고 말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옥, 천국 최종 판정은 신약 때 예수님이 오셔야 되지 구약 그 자체에서는 판정이 안 납니다. 악하게 쓰였다는 건 인정합니다. 지독하게 쓰인 것도 인정합시다. 그러나 사탄이 등장할 때는 최종적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결합될 때 사탄의 기능은 그때 온전하게 같이 드러나는 거예요.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입니다. 사탄과 합세한 사람은 지옥 가는데 오히려 지옥 가는 게 자연스럽고요. 육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게 당연한데 오히려 기이한 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 된 사람들이 출몰했다는 것이 기이해요.

십자가마을에 솔다라는 학생이 쓴 글에 보면 즉흥성의 자유로움, 본인이 그걸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라. 아까 껍데기가 가만있지 않고 주님이 가져가서 비어있으니까 메운다 했지요. 메울 때는 욕망으로 메웁니다. 욕망에 대한 대상은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인간은 세상에 싸여 있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으니까 얼마나 부러운 것들이 많겠어요. 그 부드러운 것들을 집어넣습니다.

솔다 같은 경우에 내가 보기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아. 이게 원활하게 안 된 거예요. 안 됐으니까 깨달은 거예요. 내 속은 주님이 채워야지 세상의 온갖 좋은 것으로 때운다고 땜질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즉흥성이란 말을 썼단 말이죠. 내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나 혼자 살기 위해서 만든 것을 고맙게도 주께서 그걸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냔 말이죠. 내 꿈과 내 비전과 두려움을 실패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친절한 축복이냔 말이죠.

솔다가 한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내가 산다는 것이 전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고 그런 논리로 봤는데 이제는 즉흥적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 글의 요지니까 십자가마을로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즉흥성. 그런데 미리 당부합니다. 이 기분 몇 분 안 갑니다. 다시 돌아서면 마켓이라는 시장구조에서 돈 없이는 못 산다는 강력한 힘에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또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가인의 세계에서 등장한 즉흥적인 구원자의 모습이에요.

그 증거가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2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 경건한 자가 경건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이 말입니다. 지금 경건한 자가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창세기 4장 25절에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지요.

그러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이니까 죽은 아벨 계통에 나오는 셋의 가문은 항상 가인의 공격 표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원칙을 반복하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현실이 되게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이런 말 나오지요.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핍박이란 말을 하지요. 마태복음 5장에 선지자를 핍박한 것 같이.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느니라.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양자의 영으로 아바 아버지로 부르지만 그 영광된 나라에 가기 위해서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장차올 영광에 비해서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런 구절들이 즐겁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기뻐봐야 3초지만, 돌아서면 점심 메뉴는 또 뭐하면 좋을까.

-하나님의 아들은 누굴 지칭하는 거예요?

제가 마무리를 안 했네. 4장 26절, 그때 사람들이 누구 이름을 불렀습니까?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집단이 등장한 겁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원어로 따지면 천사가 나오는데 명목상 따지면 경건한 아들들이에요.

-천사가 아닌 거지요.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걸 천사로 이야기하는 목사들도 있는데

천사로 하면 크로마뇽인 돼요. 그건 과학적인 논조를 억지로 결합시켜서 납득시키려는 짓이에요. 또 속으셨네.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름다운 지옥이라는 표현이 적당한데 아름답고 부러운 지옥에 둘러싸인 한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됩니다. 주님이 개입해야 돼요. 주님이 개입해서 성도, 매일같이 즉흥적으로 이끄심을 받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