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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흐름7 1609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8. 15:27
2016-10-07 15:11:18조회 : 19         
20160916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7 – 구약의 흐름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36)

20160916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7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어제 끝 시간에 했던 내용이 복잡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11장 바벨탑에서 탑 쌓는 목적이 뭐냐?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 이름이 지상에 있잖아요. 탑 쌓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 우리는 땅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땅의 존재면서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염원이 있고 소망이 있고 포부가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 우리 이름을 닿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간격이 있으니까 탑을 쌓는 방법으로 우리 이름을 닿게 하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이름이니까 인간의 이름, 사람의 이름이죠. 사람의 이름의 속성을 창세기 11장에 밝혀두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보라는 거죠. 사람의 이름에 분명히 노림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이름도 노림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의 이름의 노림수는 땅에서 하늘까지인데 하나님의 이름의 노림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독생자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빌립보서 2장입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지니사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십자가까지 낮아졌지요.

 

그런데 인간의 이름이 위에서 내려오는 주의 이름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모두 나의 이름을 가졌잖아요. 이름만 가진 게 아니고 포부가 있잖아요. 방금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탑 짓는 아이디어가 집단적 의견이면 나도 포함되잖아요. 우리의 소망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나님의 소망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알아먹을 턱이 없는 거예요. 복음 전하니까 교회에서 못 알아먹는 거예요. 전부 다 높은 곳을 향하여 교회 왔는데 복음은 저 낮은 곳으로, 너무나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 이익에 모순이 되니까 납득이 안 된다,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복잡하다, 그런 반응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버리면 내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구나.

 

죄에서부터 출발해야 주의 이름이 눈에 띠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과 로마서 10장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마음이 높은 곳을 향했다는 게 아니고 높은 곳을 향하는 노림수가 죄라는 인식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주의 이름은 땅에 이르죠. 그래서 천국은 땅에서 만들어진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천하고 누추한 이곳까지 아기로 태어나신 주님, 주님이 이곳까지 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제일 충격 받은 것이 뭐냐 하면, 창조주가 사람 사는 곳에 왔다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엉뚱한 것을 추구하고 있구나. 친히 오셨는데 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구나. 주님의 내려오는 사고방식과 정반대로 가는 걸 알았습니다. 신학생 치고 누구든지 순복음 교회처럼 숫자 많은 걸 염원하지 않을 신학생이 없어요. 순복음 교회처럼 수십만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런 각오를 하지요.

 

그 신학생이 놓친 게 있어요. 그걸 목표로 한다면 그 다음부터 인간들은 자기가 스스로 온갖 방법을 간구하게 됩니다. 이만큼 낮아질까요, 겸손할까요, 눈물로 통곡하면서 기도할까요? 이런 것들을 자꾸 제시하는데 따지고 보면 노림수가 있어요. 수십만의 교인을 자기 휘하에 두겠다는 욕심이 깔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교 온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학교 온 것 자체가 남이 경험하지 않은 더 깊이 있는 죄를 체험하기 위해서 신학교 보냈구나. 일반교인들은 모르는 목사들만 아는 더 깊은 악마의 속성, 그것은 거룩을 빙자한 성스러운 성직자를 핑계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심보, 그런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죄의 진수를 맛보는 행운을 누립니다. 목사님도 마찬가지고. 약간은 마음대로 잡수시고.

 

그런데 이러한 일이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이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옴으로 말미암아 정지가 된 것이 아니라 계속 예수님 십자가까지 발전하고 있는 거예요. 주고받고 하면서. 인간의 이름이 높은 곳을 가게 되면 선지자를 보내서 낮추고, 또 높아지면 또 선지자 보내서 낮추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에서 비유한 대로, 포도원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가니까 농부들이 주인 없다, 우리 포도밭이다 하니까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종을 보내니 죽이고, 종을 보내니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면 존중하리라 했는데 인간의 생각은 이 아들만 죽이면 우리 것이 된다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전 역사를 우리가 공부하는 구약의 전체 역사를 간단하게 포도원 비유로 한 방으로 이야기했어요.

 

종 보내면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 보냈는데 죽이고. 그러니까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나는 너희들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구약의 정답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에 의해서 너희들이 찾는 메시아가 너희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된 바다. 이 해석보다 더 좋은 해석이 어디 있습니까? 확실한 해석이죠.

 

그걸 저는 이렇게 합니다. 주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에 의해서 살해당함으로써 주님이 주님답데 이 땅에서 천국을 건설한다. 이런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깔끔하게 구약 흐름 관통했지요. 인간들은 그냥 죄는 모르고 메시아 활동, 주의 이름과 만남을 통해서 드디어 자기 죄가 발각되는 겁니다. 그러한 예로 어제 탕자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왜 아브라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탕자 이야기하고 왔다갔다 어지럽게 하느냐? 출판사 사장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탕자 비유가 멋집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도 멋지지만 가출하지 않는 맏아들의 태도가 멋져요. 맏아들은 가출한 적이 없습니다. 묻습니다. 가출하지 않은 아들이 효자입니까, 가출한 아들이 효자입니까? 우리 상식은 가출하지 않는 아들이 효자잖아요. 직장에서 착실하게 돈 횡령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돈 횡령한 사람이 지혜롭습니까? 우리 상식은 횡령하지 않은 사람이 지혜롭잖아요. 불의한 청지기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고 탕자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와요. 연발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의 발상을 완전히 부셔버립니다.

 

인간의 이름을 대표해줘야 주의 이름이 비로소 본질이 드러나는 겁니다. 가출한 자를 받아줘야 이미 죄인인 것이 들통 난 자라야 주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티가 난다는 거예요. 잘난 사람들 교회에 모이면 교회가 안 돼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내가 얼마나 저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죄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 현장에서 누구 이름만 높아집니까? 그것을 용서한 예수님의 이름만 높아질 거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신약성경에서 완성이 되는 이유는, 구약에서는 “너, 잘못됐지?” “잘못됐습니다.” 신약은 놀랍게도 이미 용서해놓고 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네 잘못을 저질러 보시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이미 아버지는 가출할 줄 알고 돌아올 줄도 알고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가락지도 준비해놓고. 돌아오고 난 뒤에 금은방에서 가락지 맞춘 게 아니고 이미 가락지 준비해놓고 거기에다 양복까지 준비했어요. 그리고 최고의 한우 준비해놓고 잔치 준비해놓았어요.

 

그런데 맏이가 가만히 보니까 가락지, 그 옷, 맛있는 소고기가 자기를 위함이 아니었어요. 맏이는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정말 납득이 안 돼요. 옆에서 가출한 적도 없이 착실하게 아버지 섬겼는데 그럼 마땅히 대가는 자기한테 와야 되잖아요. 착실하니까. 그러나 착실하다고 천국 못 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착한 사람 천국 못 갑니다. 30년, 40년 신앙생활해도 이것 모르는 사람이 거의 100% 몰라요.

 

한 때 우리나라에 나쁜 남자가 유행했습니다.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그 다음엔 부드러운 시대 왔다가 그게 지루하면 또 나쁜 남자 뜨고 하는데. 나쁜 사람이 천국 갑니다. 그래서 시카고 강의에서 사랑하지 말라 했어요. 서로 경쟁적으로 나쁜 사람 되기 위해서 사랑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했어요. 들어보면 이해돼요. 불쑥 이런 이야기하니까 무슨 이야기냐고 하지만 그 강의할 때 요한일서에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영생도 없다는 그 대목 펴놓고 그런 이야기했다고. 앞뒤 들어보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돌아온 탕자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사랑이 그 탕자를 용납하지 탕자가 용납 받는 행위로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탕자는 네 자리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네 자리는 이미 내가 만들었다. 이미 내가 만들었다 신약, 잘해봐라 천국 넣어줄게 구약입니다. 그게 왜냐하면 발전해야 되니까.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갈 때까지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둘이 만나요. 인간이 악랄할 때 악랄하고 주님도 희생할 때 희생하면 그 모든 희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질문 들어갑니다. 왜 에스겔은 우리를 구원 못합니까? 그냥 선지자라 하지 말고. 왜 에스겔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느냐 하면, 갈 때까지 안 가고 중간과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에스겔 이름이 인자에요. 다니엘을 인자라고 돼있어요. 그 인자를 최종적으로 마감해줘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 이름이 뭡니까?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풀리지요. 둘이 경쟁적으로 가는 거예요. 레이스하는 겁니다.

 

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 도로 멋지게 깔려있거든요. 밤중에 재벌 3세들 명품 차로 카레이스해요. 둘 다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레이스하고 있어요. 어디를 향하여? 인간은 몰라요. 주님은 알아요.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골인하는 겁니다. 그게 거룩한 죽음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잖아요. 복음 뭐 있어요. 십자가 복음이지.

 

그러면 나는요? 십자가 들어가 봐. 네 이름이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절벽에 충돌했는지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 저주받을 짓거리라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폭로돼버립니다. 마지막 십자가 장벽에서. 거기서 우리는 내 고집, 내 이름은 없어지고 기도를 해도 마지막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구원받는 것도 주의 이름, 식사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주신 것, 꽃나무 자라는 것 모든 것이 십자가로 공로로 우리에게 이유 없는 은혜로 주어집니다.

 

이유 없는 은혜라고 제가 언급했어요. 그게 무지개 할 때 이유 없는 은혜라 했지요. 김정은한테 은혜주신 이유가 뭡니까? 왜 살려주십니까? 이유 없는 은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세상에 피를 먹지 말라. 피가 생명이란 말은 이유 없는 법이 돼요. 위에는 은혜, 땅에는 법. 이 법과 은혜가 만나요. 만나는 표징은 아이들 무용에 만나는 게 있어요. 원모어타임. <E.T.> 포스터에 자전거 타고 하늘을 나는 게 있지요. 땅과 하늘의 의가 만나다. 이사야 예언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게 지난 시간에 한 거예요. 복잡해 보이지만.

 

그럼 아브라함 이야기는 왜 끄집어냈는가?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하고 난 뒤에 가다가 멜기세덱을 만난 이야기를 했고, 멜기세덱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은 아버지가 주는데 어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족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장차 예수님의 족보가 멜기세덱이란 족보입니다. 하늘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 이전부터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힘으로 전쟁에 승리하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의 의미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전쟁에 말려들었다는 사실. 그래서 전쟁에 말려들면 구원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6장 12~17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안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을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그 전쟁에 말려든 겁니다. 믿음, 투구, 성령의 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나는 탕자입니다. 그 한 마디만 하면, 수류탄에 철모를 다 갖춘 거예요. 선교단체가 이걸 모르는 거예요. 나는 탕자입니다, 이 한 마디로 전쟁을 마음껏 증거하면 되는데 선교단체 사람들은 전쟁을 지가 벌여요.

 

이미 끝난 전쟁인데 본격적으로 칼 들고 사탄아 오라. 이건 돈키호테도 아니고 과대망상증 환자에 빠져서 선교단체 사람들은 허황된 과대망상에 빠져서 자기 전공과목은 F 맞고 시험 치지는 않는 성경구절 외우는 건 도사가 되고. 얘들 선교사하고. 이러면 누구 이야기하는 것 같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인데 내가 실수한 것 같다. 전공과목 빵구 내고 성경만 공부해서 주께서 좋은 남편 만나서 결혼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그게 아닐 때 나름대로 자기 합리화시킨다고요.

 

우리는 탕자기 때문에 탕자라고 하면 마귀는 재미없다고 가는데 무장을 시키기 때문에 마귀가, 이것 재밌다. 성경 더 읽어야지, 기도도 열심히 해야지, 헌금도 해야지 자꾸 쑤시니까 발광을 해서 우리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가 모자랐어. 젊은 얘들을 잡아버려요.

 

주의 이름과 하나님 이름이 어떻게 발전하고 진전하는지 사례를 듭니다. 이미 결론 났거든요. 주의 이름과 경쟁한다. 그 중에 하나가 창세기 38장. 목사님, 앞의 이야기는 안 합니까? 앞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했어요. 새로운 걸 해야지요.

 

38장 12절 읽어보세요.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목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세상 생활하다가 성경 보는 사람은 깜짝 놀라는 대목이 있어요. 어떻게 아버지와 두 딸이 관계를 맺는가? 그것도 희한할뿐더러 특히 38장 이 대목에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아무리 자식이 좋다고 해도 너무 과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대해서 더 놀라운 것은 누가 더 나쁘냐 하면,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한 이방 여인 다말이라는 며느리 행위가 의가 돼요. 26절에 보면, 네가 나보다 옳도다. 이런 결론에 도달해요.

 

그래서 성경을 본 사람은 우리 상식으론 너무 튀니까 성경은 거룩한 책이니까 거룩하게 접근하잖아요. 그래서 보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곳을 향하여 지키려고 하는데 이 대목마저 지키려고 하니까 지킬 건더기가 없어요. 이건 아마 잘못됐을 거야. 밀치려고 하니까 뭔가 빠트린 느낌이 들고 뭔가 놓쳤던 말은 내 거룩의 향상에 누락이 되어 찝찝하고.

 

그래서 목사한테 물어보죠. 바쁩니다. 그런 초보적인 것은 전도사한테 물어야지. 전도사한테 물으니까 자기도 성경 봤을 거잖아요. 왜 몰라요? 건너뛴 거예요. 옛날에는 그것도 용납했답니다. 옛날 문화에서. 그렇게 넘어가요. 옛날 문화라 하면 성경 자체가 문화가 돼버려요. 문화는 일시적으로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성경에 박혀있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사람이 뭔가 기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중요하다는 겁니다. 롯의 두 딸이 롯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이라는 민족을 낳았다는 사실이 껄끄럽더라도 그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고, 삼손이 여자 밝혀서 이스라엘 자기 민족 구하라는 힘을 여자 하나 얻겠다고 그 힘을 소비하는 그 의미가 항상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른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편하게 믿는 하나님은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이 기이하다면 우리도 덩달아 기이해야 된다는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겁니다.

 

제가 버지니아 강의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구원됐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증거하는 게 자녀의 목적이에요. 내가 구원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이렇다, 라는 걸 증거하는 거예요. 자기 잘났다는 게 아니라. 성경을 볼 때 항상 우리가 노리고 있는 것을 성경이 거부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거부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중간에 가려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하면 내가 반대로 생각했구나. 내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으로 알아야 됩니다.

 

이 본문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논리가 복잡하니까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뭐로 보입니까? 물고기죠. 이 물고기가 심해 4500미터, 엄청나지요. 바다 표면에 있는 우리가 즐겨먹는 고기는 아니란 뜻입니다. 깊은 바다의 물고기는 놀랍게도 드로잉, 드로잉은 그림에서 색깔은 없고 선만 있어요.

 

드로잉은 선으로만 그린 거죠. 심해 물고기는 안에 내용물은 없어요. 수압을 견디기 위해서 선만 유지되고 안과 밖에 동일하게 내통하고 있습니다. 이게 심해 물고기의 특징이에요. 왜 이 고기를 그리느냐? 이게 성도입니다. 세상은 더럽지요. 세상에 성도 안도 똑같아요. 이 더러운 게 육신+영적 조건이 되는 겁니다.

 

바로 유다가 창녀를 찾았다. 우리 상식으론 대단히 윤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분의 고견은 어떻습니까? 어디서 가서 창녀 찾는 게 착한 일입니까? 아니지요. 쫓겨난 며느리가 창녀가 되었다. 이해는 돼요. 생계가 돼야 되니까. 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 들지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한 사람을 노리고 한시적으로 시아버지를 유혹하기 위해 창녀가 되었다. 이것은 세상도 숨기고 싶은 저쪽 바닷물도 숨기고 싶은 그것을 언약 안에서는 노골적으로 까발려지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굉장히 자부심을 느끼죠. 우리 신앙생활이 많이 엉망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시아버지 유혹하는 정도는 아니잖아요. 여러분 써먹을 죄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정도까지 막가지는 않잖아요. 만약에 이것보다 더 막 간다면 목숨 내놓는 것밖에 없어요. 무엇을 위하여 며느리는 창녀까지 하면 시아버지를 유혹했느냐? 그 이유가 장차오실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만남과 관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다말은 성녀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갈 만한 자격 있는 거룩한 여인이에요. 마태복음 족보에 이 거룩한 여인 다말이 유다에게서 자식을 낳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에서 나온 예수님과 연관성 있는 영적 족보에 합류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 봅시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절)

 

하나님이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지상의 일이 인간의 상식, 윤리도덕으로 무장된 인간의 입장에서 도저히 납득이 되기 힘든 그런 일을 주의 일에 가장 표준적인 이 일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가 자기의 가치, 자존심, 명예, 명성 이런 것을 아낌없이 포기한 겁니다. 바로 유다의 노선을 위해서. 유다는 야곱과 관련돼있어요.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니까.

야곱은 어디와 관련돼있습니까? 야곱은 야곱의 하나님과 관련돼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이 등장했어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사람들은 야곱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바뀐 이름은 야곱이 죽었다는 걸 근거로 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그 뒤에 야곱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만나고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날 때 죽을 뻔했다, 이게 아니고 죽었는데 주께서 축복했기에 살아난 거예요. 그럼 살아남 안에 축복이 왕창 들어있는 거예요.

 

그 축복 안에 주의 이름이 들어있고 주의 이름은 노림수가 들어있어요. 지상에 천국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 이름은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게 우리의 노림수고. 야곱의 노림수는 내가 어떻게 하든지 형의 자리에 앉겠다는 것이고. 주님의 노림수는 형의 자리 안 빼앗아도 내가 찾아오면 너는 장자가 된다는 노림수고. 그래서 얍복 강 일 끝나고 난 뒤에 형을 만나죠. 형한테 자랑질합니까? 일곱 번 절해요. GAME OVER. 완전히 게임 끝났어요. 나는 당신과 상대하는 게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 당신과 상대했는데 인간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된 결실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못돼먹은 탕자 같은 나를 죄인인 나를 찾아올 때 이미 게임을 끝났어요. 승리자입니다. 승리자기 때문에 아낌없이 누구한테도 자존심 포기하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야곱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다말도 갖고 있었던 겁니다. 누구든지 돌을 던지란 말이죠. 시아버지 유혹한 창녀라고 돌을 던지란 말이죠. 과부 주제에 창녀 짓해서 돈 번다는 소문을 퍼뜨리란 말이죠. 하지만 너희들 같이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게 아니고 지상에 이미 온 주의 이름에 관계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명예와 명성을 아낌없이 바치리라.

 

그게 누구냐? 야곱의 계통에서 나온 유다입니다. 유다와 결합함으로써 이방인 다말은 구원을 얻는 거예요. 자기 자존심, 체면 그런 건 몽땅 다 깨지고. 그것도 몰래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정 두지 않고 창세기 38장에 영원토록 박아놨어요. 다말 이름은 유명해졌습니다. 시아버지 유혹하기 위해서 창녀 된 여인. 그런데 그 여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녀에요. 마리아와 레벨이 같은. 그래서 다말과 마리아가 같은 족보로 이어진 겁니다. 우리도 그 족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 없어요? 주께서 이미 넣어줬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모습으로 넣어주는 겁니다.

 

성녀들이 가는 족보에 다윗이 들어가죠. 다윗이 누굴 죽였습니까?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안 죽이는 척하며 죽였지요. 더 못됐어요. 살인교사지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 바로 밑에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이 비로소 자기가 구원받았어요. 왕으로서의 자존심, 체면, 남의 여자 건드림 다 떠안고 고마워 어쩔 줄 몰랐어요. 내가 그렇게 알고자 한 나 자신을 주께서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서 축복을 주셔서 나를 구원하시는 이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한 분 빼놓고 우리는 첫 강의에서 다 들었어요. 하나님은 나를 파괴한다는 말했지요. 하나님은 나를 파괴한 대가로 나를 구원한다. 첫날 강의했잖아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릴 구원한다고요. 멀쩡한 우리 껍데기를 헤쳐서 우리 안에 있는 주님께서 장치한 성령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마치 외과의사가 심장을 끄집어내듯이 우리가 가장 아끼는 우리, 가장 숨기고 싶은 그 죄를 끄집어내면서 승리해버립니다. 네 이름으론 그만 살아라. 제발 부탁이니 네 이름으로 사는 것 끝.

 

이제부터 주의 이름으로 사는데 그 대신 너는 영원히 탕자 되어야 된다. 하지만 탕자의 몸에 가락지 끼어지고 탕자의 위에는 맛있는 소고기가 들어가고 탕자의 옷은 알바니, 최고 비싼 옷이라면서요. 이태리 옷 그것 걸치고. 세상에. 이게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정반대로 저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똑같아요. 전 이 이야기할 때 신나. 혼자서 신나는데 세상 사람과 우리와 똑같다는 점이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안 나대도 되잖아요. 유난 떨지 않아도 되는 이 존재의 가벼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죄인된 것처럼 너도 죄인으로 살아라. 그렇다면 안과 밖의 차이는 뭐냐? 언약 안에서는 드로잉 된 물고기 선 안에서 용서가 되지만 저 밖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가 없기 때문에 죄인들이 우리는 왜 용서 안 합니까, 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왜? 너나 나나 똑같기 때문에.

 

다만 드로잉을 그려주신 것은 내가 의도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의 소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안 돼요. 저 사람은 구원 안 하고 저는 구원합니까? 그건 니가 관여할 바가 아니죠. 어떤 사람은 우리가 착하기에. 착한 것 없어요. 안쪽도 바닷물이고 바깥도 바닷물이에요. 심해 사백 미터 밑에서는. 그래서 그 물고기를 모아서 수조에 넣어보니까 처음엔 뿌옇게 보여요. 가만 보니까 어떤 선들이 돌아다녀요. 그게 바로 심해 물고기의 특징입니다.

 

이걸 사자성어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자유롭다. 진리가 너희를 심해 물고기로 바꿔줄게.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마라. 나대지 말라는 것은 생명의 신호 요한계시록 제일 마지막 멘트가 그거였어요. 대전수련회 때. 제일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마세요. 있는 자체에서 가락지만 보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것은 탕자에게만 주어지는 아버지의 가락지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입니다. 고귀한 것 몸에 장착하고 있기에 안 까불어도 되고, 안 나대도 되고, 안 설쳐도 되고, 신앙인 티 안 내도 되고 그냥 하던 행세 잘 하잖아요. 바깥에서 얼마나 잘 나갔습니까? 교회 안 다닐 때. 그 행사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권유하는 것처럼 돼서 미안한데요. 하되 뭐는 잊지 말아라? 선, 언약 십자가라고 윤곽 지어진 경계 지어진 십자가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시고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은 이처럼 그림자, 모형으로 미리 맛보게 해주고 신약은 최종적으로 탕자, 불의한 청지기라 해서 노골적으로 증거물을 제시하죠.

 

여기서 더 부연할 게 있어요. 왜 다말은 시아버지에 집착하느냐? 다말은 인간 이름으로 유다를 본 게 아니고 자기가 시집온 그 가정에 약속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약속을 포기 못한 거예요. 메시아가 온다는 그 약속. 그 약속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약속이 맏아들로 와요. 그 앞에 유다가 아들이 셋이죠. 다말이 첫 아들과 결혼했는데 자식을 못 낳았단 말이죠. 두 번째 아들 오난인데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부한 겁니다. 둘째 아들은 축복된 가정으로 보지 않고 그냥 혈통적 가정으로 봐서 자기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이름의 특징이죠.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익숙해지면 매력이 떨어져요. 특히 남자들이 그래요. 아무리 미스코리아라도 신상 미스코리아가 계속 생산되니까. 이쪽은 호르몬 떨어져서 탱탱한 피부가 쭈그러드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탕웨이가 놓치지 않을 거라고 화장품에 집착하는 이유가 피부 보존하려고 하잖아요. 백날 해봐야 한계가 있으니까.

 

왜 내가 한 평생 여자한테 매이냐 말이죠. 그것도 형의 여자에게. 그러나 이걸 시형제 결혼법이라 합니까? 맏이가 자식 없을 때 둘째, 셋째가 해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맏이로만 연결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욕구 찾다가 진짜 하나님의 축복에서 탈락하면 저주가 돼버려요. 그걸 생각해야 되는데 오난은 자기 씨앗을 아끼겠다고 안 했고.

 

셋째 아들은 어렸어요. 다말이 약속대로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유다가 믿음이 떨어졌어요. 아깝거든. 그래서 다말이 변장한 거예요. 그 뒤에 동네에 소문이 났어요. 당신 며느리 임신했다고 하니까 유다가 꼴에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우리 가문에 창녀 같은 여자가 있는가? 24절에 만약에 소문대로 며느리가 다른 남자 만나서 임신했다면 불사르리라고 했을 때, 이실직고하라. 너를 임신케 한 자가 누구야?

 

며느리가 이겁니다, 하고 유다에게서 받았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으니까 나네. 여기서 유다는 더 높은 차원을 생각한 거예요. 혈통과 가문과 명예를 생각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 족보에 팍 꽂히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셀 때는 ‘~에게서’가 붙습니다.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원래 천국 족보라고 하던 남자는 어매 기죽어. 부끄러워서.

 

외부에서 날아온 이방여자보다 못한 믿음, 이것이 탕자의 모습, 인간의 이름의 진면목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외부에서 이방여자 보내서 주의 이름으로 탕자를 구원하는 그 원칙이 바로 주의족보에 삽입 돼있다는 것을 마태복음 1장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