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3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한 것은 인간의 진실은 하나님이 찾아오심을 밝혀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과 처음부터 연관돼있는 걸 모른 채 일방적으로 착각해서 찾아가는 겁니다. 찾아가다보면 계속 자기의 망상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지요.
지난 시간에 상당히 중요한 것을 했는데 복습하게 되면, 창세기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창세기는, 내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서 보는 것과, 큐티가 위험해요. 우리 속에 창세기 요소가 들어있는 창세기. 주께서 인간 만들 때 창세기 내용이 우리 속에 포함돼있는데 그 내용이 죄와 연결돼있다 했습니다. 그 창세기는 어떻게 가려지느냐 하면, 내가 창세기를 생각하고 내가 성경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진짜 창세기가 가려지는 거예요.
그럼 창세기 해석을 할 수 없는데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선지자들은 뭔가 다른 걸 받았어요. 그리스도 영을 받아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어떤 해석을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입각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근거해서 창세기를 해석하게 되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신약에 오게 되는데 창세기 구약인데 어떻게 신약과 구약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느냐?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시나리오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가 찾아가는 창세기 말고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창세기를 해석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결론에 이르죠. 그렇게 하면 되는데 조건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창세기 해석은 백날 해석해봐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해석밖에 나오질 않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해석을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실례를 많이 들었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자기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지 누가 하나님 외에 누가 창조했겠는가? 세상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정답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정답은 뭐가 정답이냐 하면, 십자가를 위해서 창세기를 만들었다는 연관성을 지어야 되는데 십자가 빠트리고 나는 천지를 창조한 걸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이야기해드렸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렇데 되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했던 거죠.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창세기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예수님의 의견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오기 전까지 죄가 없었다. 내가 오고 난 뒤에 비로소 너희 아비는 악마고 너는 죄로써 드러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 이야기한다고 곧이들을 사람 없지만.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 전체 말씀을 응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밝혀졌습니다. 숨겨있는 진짜 창세기를 우리 속의 죄를 끄집어내는 거죠. 예수님이 오심으로 비로소 죄인된 것처럼 예수님이 창세기를 해석함으로써 창세기 속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런 말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 쪽에서 찾아간 창세기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비로소 창세기의 비밀은 풀린단 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창세기를 인정한다고 치고, 창세기 4장을 봅시다. 대번에 나오는 의문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으면 그 날로 죽어야지 자식은 왜 낳게 하십니까? 창세기 보면 나오는 의문인데 아무도 이걸 목사님한테 질문하지 않아요. 먹는 날 죽어야지 멀쩡하게 살아서 또 자식까지 낳네. 왜 그렇습니까? 뭔가 우리가 기대하는 창세기와 창세기를 가지고 다가오는 하나님과 의도 자체가 분명히 틀어지고 비켜가고 있는 겁니다. 다른 거예요.
그렇다면 이 문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먹는 날 죽이지 않고 자식까지 낳게 하고 계속 번창케 하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제처럼 두 개의 문장을 대비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두 번째,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두 개의 문장의 차이점을 누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죠.
쉬운 예를 들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시계를 사줬다. 엄마가, 이번 성적 안 오르면 국물도 없어. 차이점이 뭡니까? 난 공부가 제일 쉬워요, 했더니만 부수적으로 시계가 온 것과, 내가 공부한 것이 중요하지요. 공부 잘했더니 선물까지 주더라. 중요한 것은, 내가 공부 잘한 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적 안 오르면 국물도 없다는 말은, 엄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의 욕망은 공부 잘하는 자식을 원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식아, 공부 좀 잘하면 더 좋지. 나는 네가 더 중요하거든. 하지만 성적이 오르면 더욱 더 기뻐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나는 성적만 원하는데 네가 따라줘야 돼. 만약 안 따라주면 미워할 거야. 포인트가 다른 데 가 있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해놓고 자식을 낳게 합니까? 뉘앙스가 인간을 사랑함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 다시 말해서 금지의 의미를 계속해서 반복시키기 위해서 자식들을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지금 주님께서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죽음을 만들기 위해서 너희들은 계속해서 태어나야 한다. 죽음이 갖고 있는 지층, 죽음이 중첩된 의미는 계속 태어나면 태어날수록 어디에 어프로치해요. 뭔가 수렴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가까이 가고 있는 겁니다.
진짜 죽음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목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이 죽음이에요.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세계 내분이 밝혀집니다. 첫째 시간 기억납니까? 인간이 만들어진 목적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선악과 심은 목적이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위험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예 없어져야 돼요. 그런 위험한 지뢰 같은 걸 왜 심어놓습니까? 256년 동안 지켰다고요? 그 다음날 먹고 싶은데? 결국은 따먹을 수밖에 없는 지뢰를 그것도 변두리가 아니라 중앙에 꽂아놓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아, 너는 하나님 일에 개입하지 말란 거예요. 밀쳐내기 위해서 꽂아놓은 거예요. 하나님의 내부문제는 내부에서 처리하는 겁니다. 그 내부문제가 요한계시록 12장에 독생자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데 있어서 반대세력이 있었던 겁니다. 하늘나라에 반란이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반란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판이 커졌어요. 하늘나라 전쟁이 인간 세계까지 넘쳐온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먼저고 그 다음에 인간입니다.
간단한 문장인데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모든 설교 때문에 사람들은 복음적 설교에 대해서 토함을 느끼면서 그 현장에서 떠나버려요. 제가 단지 이 말을 했을 뿐인데 골로새서 1장 16, 17절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구역질을 느끼면서 화를 내면서 떠나버립니다. 그런 현상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어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런 취지에서 설교했다고 구토를 느끼고 떠나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라든지 교회에 올 때는 내가 내 것으로 만족을 찾기 위해서 왔다가 자기가 만족하는 범위 내에서 성경해석을 그만둡니다. 어떤 성경해석이 내 구미를 맞춰준다면 눈을 돌려서 그만 좋습니다, 하고 원래적인 하나님 말씀에 접근 안 하고 얻을 것 얻었다는 그런 태도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려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내 것을 살겠다, 따로 놀겠다는 겁니다. 이게 사탄의 속성이라 했지요. 나는 내 것으로 독자적으로 따로 살게 되면 그게 제일 편해. 인생 뭐 있어? 편하게 사는 게 최고지.
성경을 왜 봅니까? 편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이 불안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편하게 사는 정도까지만 큐티하고 정도까지만 성경해석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거예요. 그런데 복음 전하는 목사 입에서 그걸 얻고자 교회 왔는데 아무리 해도 자꾸 딴 소리하는 거예요. 예수님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다고 하니까 그럼 내 것은 언제 오는데? 아무리 들어도 안 들리는 겁니다.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교회 오는 노동의 목적에 위배되니까 그 노동에 만족하는 다른 교회에 갈 수밖에 없어요. 거기는 그걸 채워주거든요.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 행복합니다. 그게 납득이 되고 나를 위해서 왔는데 다른 분의 이야기를 하니까 내 인생 만회하기 위해서 왔는데 인생 만회하는 방법은 언제 나오는데?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무척 고생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선지자들이 전부 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 먼저 아니고 예수님 먼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렇게 외치다가 쓸데없는 왜 자꾸 문명발전에 우리 사회공동체의 전진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힘 모아 발전하자는 그러한 대안을 제시해야지. 왜 자꾸 원론적인 것, 원칙적인 것만 들이대면 우리가 열심히 하는 행위가 의미 없지 않느냐는 거죠. 그러면 그 행위가 누구 행위란 말입니까? 내 행위지. 내 행위로 인하여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노림수를 갖고 왔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당신이 목사가 됐으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라는 지시만 하라는 거예요. 단순하게 그것만 하라는 거예요.
그럼 복음 아는 목사는, 그래서 뭘 원합니까? 그러면 따로 살고 혼자 편하게 살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뱀의 속성입니다. 사귐이 없는 거예요. 누구하고? 나의 원본 되시는 나를 만든 창조주와 사귐이 없으면 천국 가도 못 견딥니다. 천국은 내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3절)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귀면 안 돼요. 아들의 나라와 사귀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성경해석을 했단 말이죠.
자기만족을 위해서 성경해석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으로 보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주신 책이죠. 그렇게 했던 성경해석에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이 등장해버리거든요. 모든 성경해석을 내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주 되도록 해석해버리니까 해석에 차이가 났습니다. 해석에 차이가 나니까 둘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삐졌고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나는 하나님 믿고 해석하는데 왜 예수 당신은 내 해석과 다릅니까? 그러면 결국 둘 중에 누가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해석이 맞고, 나는 사탄이 심어준 가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찬양했고 섬겼고 봉사하고 헌금한 거예요.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이렇게 이야기가 돼요.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내 중심으로 성경 해석한 거예요. 그 목적은 나는 따로 살고 싶어. 혼자. 다 귀찮아. 그럼 뭐가 필요하겠어요? 돈이 필요하겠어요. 그걸 누가 아느냐? 사탄이 알고, 예수를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경제적 문제로 테스트하잖아요. 돈만 있으면 혼자서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다 낭패 보는 사람도 있지만 돈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돈이 우리 자체적인 힘과 자질과 역량과 권력을, 능력을 소유하게 하겠지요. 소유된 능력으로 사는 이것은 출애굽기에 의하면 애굽의 생활입니다. 애굽에서는 힘만 가지면 사는 거예요. 광야에서는 다 털어먹게 해요. 애굽에 살던 그 성질을 적용시켜 살 어떤 방법이나 강구를 일체 삭제시키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평소에 했던 행동, 아침에 일어나 진라면 끓여먹고 한 행동, 저녁에 치킨 먹던 그 행동, 광야에 무슨 치킨이 있습니까? 광야가 닭 키우는 데입니까? 광야에 치맥 없어요. 몸은 습성화 되었어요. 치맥과 술과 담배와 적당한 오락으로. 광야에서 다 떨어내버렸어요. 재미도 없고 권태롭고.
이스라엘 백성은 참 인내심이 많아요. 처음부터 애굽으로 돌아가자 했으면 얼마나 좋았어요. 도저히 못 견뎌서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진작 본색을 드러내지. 모세는 답답해서 이 사실을 현장취재해서 동영상 찍고 해서 더는 이 사람들과 못 살겠습니다. 저 사람들 관리가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설교자가 이러한 아픔을 겪어야 됩니다. 교인들의 비 복음적 성향 때문에 고통당할 때 저는 장담합니다. 백 프로 성령 받은 목사에요.
창세기 4장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죽이지 않고 자식을 낳게 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양대 진영으로 나눕니다. 형제간 사이를 이간질해요. 누가요? 하나님이. 이간질하면 결국 개인적인 역량,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없어야 될 벌어짐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새롭게 발생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아담이 갖고 있는 역량이라든지 아벨이 갖고 있는 소질이나 재주는 아무 의미 없고 그 둘 사이를 벌어지게 한 그 관계를 위해서 두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 내가 금지한 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 금지한 것이 현실에 드러내기 위해서 바로 죽음이 필요한 거예요. 아담과 아벨이 왜 태어났습니까?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이 없다 했지요. 사람은 태어나면 다 죽게 마련이야. 이건 복음이 아니고 허무주의고 염세주의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관심사는 자기에 대한 애정과 미련과 집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깝다.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늙어죽는구나. 그래, 죽으면 죽어야지. 이건 누구한테 동정하는 거예요?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자기한테 동정하는 거죠.
그런데 아까 두 번째 문장, 태어남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는 말은, 죽음과 무관하게 태어난 인간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시다바리입니까? 시다바리죠. 변두리에 별 의미 없는 존재란 말이죠. 우리말로 껍데기에 불과한 겁니다. 알맹이는 주님이 필요해서 다 가져가요. 금지의 내용이 뭔지 필요해서 인간을 만들어놨고 거기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면서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이란 사건을 유도해요. 거기에 하나님의 개입된 상황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터에 집어넣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식빵 먹었잖아요. 아이들은 테두리는 놔두고 폭신폭신 것만 파먹지요. 나머지 껍데기인 거예요. 인간은 자기 본질을 하나님만 알지 자기는 몰라요. 인간은 뻥 뚫린 거죠. 뻥 뚫린 부분을 가만있지 않고 계속 매워나가죠. 껍데기를 잔여물이라 합니다. 남아있는 껍데기가 허전하잖아요. 인간의 심리에서 뭐가 등장하는가? 원인도 없는 알 수 없는 불안, 원인 없는 위협, 협박, 원인 없는 두려움.
이것은 돈이 7조원, 8조원이 있어도 소용없어요. 밤을 못 이룰 정도로 불안해요. 자식이 열 명이 효도해도 불안하고. 공포와 불안이 달라요.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어요. 더 미치는 거예요. 정신과 가 보세요. 그냥 증세만 억누를 뿐인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저 원인을 만들어냅니다. 남편이 애 먹여서 그렇다. 그럼 남편이 애 안 먹이면 불안이 없어져야 되잖아요. 아니요.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원인을 모르니까 일단 남편 문제를 들었는데 증세가 없어지지 않고 또 생기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그리고 모르는 것보다 더 답답한 것은 아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요. 그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계속 마귀 속성과 연계가 돼요.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해서 사탄의 종이 된다. 성령이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설교시간에 히브리서 2장 16절에 여러분이 불안하고 벌벌 떠는 것은 살고자해서 그렇습니다. 죽고자하면 마귀가 떠납니다. 눈치코치 없는 목사가 그런 설교했다고 칩시다. 그게 대책이냐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목적이 행복을 위해서 오잖아요. 사는데 더욱더 풍요하고 미래가 안심하고 살기, 벌써 목적 자체가 죽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살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처방전으로 내놓은 것이 죽으세요, 이게 처방전입니까?
처방전은 그렇게 내리는 게 아닙니다. 주기도문 하루 두 번 외우시고, 성경 몇 장 보십니까? 세 장. 두 장 더 늘이시고, 기도시간은 한 시간 하세요. 이게 처방전이에요. 아닌 것 같아요? 신부가 그렇게 해요. 형제님, 고해성사한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자주 오세요. 제가 고양이를 바깥에 찬 데 뒀습니다. 제 죄를 용서하옵소서. 알겠습니다. 주기도문 두 번 외우세요. 다음 분. 진짭니다.
천주교에 똑똑한 신학자들은 이걸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 처방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위약효과입니다. 플라시보 효과. 그 자체가 유치해 보이고 천박해 보이죠. 하지만 고양이로 가슴 아파하는 할머니한테는 신부의 말이 예상 못한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아직도 천주교는 번창하고 있어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 그것 아니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당하는 후유증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천주교를 욕합니까? 천주교 따라 갑니다. 참선하고 영성훈련 다 하고. 옛날에 했던 것 그대로 다 합니다. 신부는 제복 입고 돌아다니고 십자가 배지 달고 계절마다 휘장 바꾸고. 뭔가 효과를 주는 거예요. 직접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어떤 상징물들을 많이 배치해서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사람들은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 적절한 돈을 내놓을 겁니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으면 교회가 운영이 안 돼요.
남의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 모든 게 돈입니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명분이 돈을 위해서 있지 돈이 명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닙니다. 제일 위선 떨지 마세요. 돈뿐입니다. 왜 돈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돈이 있어야 나 혼자 편하게 살 수 있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절대 신으로써. 돈이 없어서 그렇지 주께서 돈만 주신다면, 권력을 주신다면 그걸 목표로 얼마든지 목사 말에 순종하고 교회에 순종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게 문제에요. 인간은 지식적인 체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게 구약이죠. 구약에 요나 봅시다. 요나에게 큰 물고기가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니죠. 요나가 만난 박 넝쿨이 하나님입니까? 그런데 요나는 뭘 느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한테 이야기하심을 만남을 느끼고 있지요.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증명될 수 없어요. 요나는 모든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발췌하게 되는 겁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의 의미를 발췌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교류하고 있고 사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야 갑자가 풍랑이 일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스로 가니까 벌주려고 하는구나, 하고 눈치 채는데 박 넝쿨, 갑자기 니느웨 사람이 회개해서 하나님은 40일 만에 심판 받는다고 했는데 완전히 구라가 되고 말았어요. 40일 만에 심판하신다고 했으면 동업자끼리 말이 맞아야 될 것 아닙니까.
어떤 수선하는 가게에 부부가 있는데 수선하는데 10달러입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시세 모르는 남편이 5달러입니다, 동업자끼리 왜 말이 달라. 뒤늦게 아내가, 사실은 10달러입니다, 하면 당신 남편은 5달러라고 하던데, 그러면 5달러에 해줄 수밖에 없잖아요. 이미 동업자가 일을 저질러놨으니.
지금 선지자는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죠. 하나님께서 40일 되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내부적으로 문제없어야 되는데 왜 갑자기 회개해서 멸망하지 않게 됐어요. 요나가 화가 난 이유는 회개해서 멸망 안 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사전에 언질을 주던지 암시를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이런 동업자가 어디 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그래서 요나는 죽으려고 했지요. 요나가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햇볕이 따가워. 자살하려고 했는데 땡볕이라 힘들어. 이게 무슨 의도입니까? 요나는 북쪽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선지자지요. 그러면 선지자는 양쪽을 다 보는 겁니다. 하나님 쪽도 알고 이쪽도 다 알아요. 그걸 뉴저지 강의에서 경계선이라 했는데 기억납니까? 경계선은 양쪽을 다 보는 거예요. 그래서 증인이 되는 겁니다. 육의 세계, 영의 세계 다 아는 거예요. 주의 증인이 되어 아예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너희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주의 증인하라고 아직도 이 고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도 알고 이스라엘도 알지요.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 자신을, 본질을 안다고 했지요.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능이 하나님으로 살았을까요, 육체의 컨디션으로 살았을까요? 육체의 컨디션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섭씨 18~20도 사이, 바람은 미풍, 산들산들, 이건 기분 좋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습도는 20~30%, 촉촉한 것보다 좀 더 낮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육적인 쾌감을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보다 더 원하는 바가 그건데.
아까 머리 띵하다 했지요. 지금도 머리 아파요? 머리가 갑자기 상쾌해져 보세요. 이게 하나님의 축복인가 할 거예요. 인간은 육체의 본능을 이기지 못합니다. 육체의 아픔뿐만 아니고 육체의 본능, 성욕과 식욕, 잠자는 욕구 등 생존 욕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미흡할 때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부를 때부터 내가 원하는 행복과 벌어진 간격을 주께서 매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결재를 누가 올립니까? 내 쪽에서 결재를 올리고 올린 데로 들어줘야 돼요.
제가 뉴저지에서 2016년 올림픽 조정경기 했지요. 내가 여기 있고 쭉 나가는 거예요. 우리 얘들 어떻고, 남편 사업 어떻고, 완전 조정경기에요. 출발, 시작! 이게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를 내가 골라 타겠다는 겁니다. 열두 교회 다녔다고 분명히 제가 뉴저지 강의에서 했는데.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해도 아무리 선지자 사명해도 따끔따끔 하게 되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형제우애 다 날아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아무리 목사가 이야기해도 이빨 아프면 임플란트 잘못 되면 무슨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나옵니까. 사람은 주의 말씀을 못 지킵니다. 그때그때 몸의 컨디션 따라 웃다가 울다가 그래요. 어린아이가 그래요. 혼자 웃다가 울고, 감당이 안 되지요.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적절하게 사용하는데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 떨기나무 방법을 사용하는 게 제일 좋아요. 출애굽기 3장에 떨기나무가 있는데 불이 붙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소감을 밝힙니다. 왜 떨기나무가 타지 않느냐? 불이 붙는 것과 타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그냥 불이 붙는 것은 불이 붙는 거지만, 타는 것은 불쏘시개가 점점 더 소모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불이 붙을 때는 불은 붙으면서 떨기나무는 사라져야 돼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떨기나무는 그대로 있고 불은 불대로 있고. 그 말은 하나님은 인간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세야, 내가 널 찾아갈 때는 너의 죄인 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너의 죄인 됨을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회개를 받고 사용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경건을 받아서 사용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못남을 못난 대로 노출시키면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따로 우리의 못남을 앞장세워서 일을 벌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성과는 예수님의 공로로 돌아가는 거예요.
요나가 하나님 체험을 어떻게 했습니까?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고 어떤 고래가 와서 받았다든지 박 넝쿨이 시들어서 자살하는데 짜증났다든지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그널, 의미가 담긴 신호가 온다는 것을 포착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들이. 그렇다면 오늘날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고 하나님이 운동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가 뽑아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했습니까, 뭘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제가 적어봤어요. 그 항목을 나열할 테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기 위해서 어떤 걸 준비했는지 읽어볼게요. 교회, 시장, 회사, 공연장, 스포츠경기장, 정치, 유치원, 가정, 티비방송, 건강, 전쟁, 건축, 경작, 창고, 병원, 군대, 농장, 백악관, 유엔. 이걸 준비했습니다. 뭐예요?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이 바로 주님 자신이 우리와 접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큰 물고기고, 그리고 시들어버린 박 넝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여주세요, 할 필요 없지요.
움직이는 의미가 뭡니까? 의미의 사슬, 의미의 조합이 중요한 겁니다. 그 의미는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아십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괜히 읽어드렸겠습니까? 모든 존재와 활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3장 언급했습니까? 세상은 누구 것이고?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보세요. 우리는 어떤 종교란 것이 필요 없잖아요. 삶이 곧 종교고 예배잖아요. 이게 사도의 뜻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무슨 짓들을 하고 온 거예요. 지금까지. 따로 논 거예요. 주님이여, 회사 일에 간섭하지 마시고 이번 주일 날 봅시다. 맨날 주일에 보자는 거예요. 주일이 특정 날이 되는가? 오늘 태양과 다른 태양인가요?
왜 인간의 전통에 말려듭니까? 바리새인의 전통에 주의하라,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건만 백날 들어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나의 정체성, 나의 본질을 규정했던 가문의 전통, 사회의 전통, 국가와 학교, 교회의 전통에서 그것들의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완전히 질식시키고 말았어요. 거기서 선과 악으로 규정한 겁니다. 이래야 선이고 이래야 악하다는 것을 너무 강력하게 세뇌를 받고 세례를 받은 거예요. 우리는 그들의 세례를 받은 거예요. 성령세례 받기 전에 먼저 받은 세례가 있어요.
그중에서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받은 세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례가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마켓, 세상은 마켓입니다. 대통령? 마켓 사장, 회장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지도자는 오너 외에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에 베버가 이야기한 모든 정치는 관료제란 뜻이에요. 돈 벌기 위한 관료제. 대통령? 돈만 벌게 해준다면 아낌없이 표를 던집니다.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은 한쪽이 잘 살고, 한쪽은 못 살게 됐다는 갈등이 복잡하게 됐지 목적은 하나에요. 잘 살게 해주신다면 아낌없이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종교라고 바꾸겠습니다. 문제는 딱 한 가지에요. 멕시칸을 잘 살게 하느냐, 중산층을 잘 살게 하느냐, 상류층을 더 잘 살게 하느냐? 거기서 표의 비율이 달라질 뿐이지 항상 모든 것은 시장이에요.
시장에는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한 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니까 이 말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몰라요. 인간은 껍데기죠. 껍데기는 잔여물, 잔여물은 떠밀려온 쓰레기거든요. 누가 떠밀었어요? 경제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돈이 떠밀었어요.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이것 말고 다른 현실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이게 현실이에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것뿐입니다.
돈을 위해서 명분이 있는 것이지 명분을 위해서 돈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정말 명분이 중요하다면 늘 순교할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어디에 대해서? 시장에 대항해서 순교해야 돼요. 얘 없으면 문 닫겠다. 왜 갑자기 문을 닫아요? 운영이 안 되니까. 운영이 뭡니까? 돈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나는 돈한테 굴복 안 해. 나는 이걸 끝까지 사수해서 자폭하겠어. 그런 자신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지는 문 닫아서 좋겠다. 직원들, 얘들 생각해야지. 레슨비 없는데. 서로 관계가 얽혀있는데.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 반갑지요. 문제가 생겼어요. 아들이 잘 돼서 돌아온 게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된 겁니다. 노후대책을 갉아먹을 쥐가 돼버렸어요. 우리끼리 편하게, 마귀의 속성대로 나 혼자 편하게 살았는데 아들이 돌아왔어요. 반 토막 날 판이에요. 슬슬 밀어내지요. 추석 되면 나오는 말입니다. 취직 언제 할래, 결혼 언제 할래? 그래서 명절에 안 가잖아요. 무서워서. 자식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버지니아 강의에서 했어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가 아닙니다. 오늘 바른 소리 왜 하는지 모르겠어. 돈 있을 때만 부모에요. 자식은 돈 없어도 자식이지만. 끝까지 교회에 돈 바치지 말고 쥐고 있으세요. 그래야 자식한테 대우 받아요. 헌금하면 교회가 날 부모 만들 줄 알아요? 돈이 부모 만들지 교회가 부모 만드는 게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 훌륭한 신앙, 그게 현실 앞에서 무슨 소용 있습니까? 믿음, 소망, 기도가 무슨 소용 있어요. 기도 했다면 돈으로 실적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네 시간 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기도노동해서 얼마나 벌었는지 그것 내밀라는 거예요. 왜 그 이야기를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에서 왜 못합니까? 쉬쉬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감추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두 진영으로 나눴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금지의 본능을 두 형제가 나눠 갖게 됐습니다. 그 안에서 죽음이 발생되고 그 죽음은 마지막 진짜 죽음은 십자가지요. 주님은 사랑한 자는 천국 가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 가지요. 그러니까 두 형제가 두 진영으로 나눠진 겁니다. 천국과 관련된 형제 아벨, 그리고 지옥과 관련된 형제 가인, 두 진영으로 나눠진 거예요. 구약 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의미를 필요한 인간들을 모집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