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6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8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구원이 뭐냐? 지금부터 출애굽기합니다. 창세기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영적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에 말려든 것이 인간이다. 말려든 사람들이 점점 구체화하면서 주의 이름이 개입되고 바벨탑, 인간의 이름도 같이 거론 되면서 인간이 원하는 바와 주의 원하는 바가 충돌하면서 지상에 낯선 하나님의 일들이 드문드문 등장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것까지 이야기했어요.
드문드문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인데 언약은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죠. 다말 같은 경우에는 약속을 던진 분이 약속의 성취자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성실성이라고 하는데 언약의 하나님은 자기가 던진 약속은 필히 약속을 제시한 하나님에 의해서 다 성취되게 돼있어요.
그래서 선조들은 아브라함을 믿은 게 아니고 이삭을 믿은 게 아니고 야곱을 믿은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었고, 이삭의 하나님을 믿었고, 야곱의 하나님을 믿었어요. 순서상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되지만 막상 천국에 가면 아브라함 있는 곳에 이삭 있고, 이삭 있는 곳에 야곱 있고, 야곱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고자 하다가 보고 좋아했지요. 여기 계신 걸 가지고. 천국에서 봤던 예수님의 모형이 바로 이삭이었고 이삭을 바친 행위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천국 가서 느긋한 마음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뭐냐?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구원이란 불교적입니다. 불교에선 생로병사 질곡에 빠져있어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이 지옥 같은 질곡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래서 인간들의 구원이란 벗어나고 파. 고생 많은 인생에서 벗어나고 파. 이걸 불교 용어로 하면 해탈이 되는 겁니다. 반복되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
불교적이란 말은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간 본성에 합치된 내용으로 보면 됩니다. 불교가 있는 것을 고마워해야 됩니다. 불교의 정신이 바로 우리 정신이기 때문에. 불교의 갓바위는 그저 빌잖아요. 불교의 교리는 딱 하나에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 먹는다. 네가 응답 안하고 배기나 보자. 여기 지성의 양에 비례해서 감동의 양도 비례한다는 겁니다. 지성 정비례의 법칙. 교회 목회 뭐 있어요? 딱 이거지요. 불교 법칙 하나만 있으면 목회성공입니다. 기도를 안 하니까 응답을 못 받지. 바치지 않으니까 인색하니까 복을 못 받지, 인간들아. 열심히 없으니까 교회 성장이 안 되지. 이게 인간의 본성이죠.
그렇게 한 이유는 고생 많은 인생에서 벗어나고 파. 이것뿐이에요. 종교단체가 이러한 소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있잖아요. 이게 아니라면 이게 구원이 아니라면 해탈이 구원이 아니라면 성경에서 무엇이 구원이냐? 궁금하시죠. 두 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효과’입니다. 효과의 의미를 약간 더 자세하게 하면 부대효과.
여기 종이가 있는데 내가 빨리 지나가면 가만있는 종이가 펄럭이죠. 이걸 물리학에서 부대효과라고 합니다. 종이는 아무 생각 없어요. 종이는 그냥 여기 있습니다. 종이 뚝 떨어졌어요. 이게 부대효과에요. 종이가 하는 말이, 난 떨어질 생각 안 했어요. 누가 내 곁을 치고 가니까 떨어졌습니다. 이게 부대효과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종이는 아무 생각 없는데 바람이 불어서 떨어지는 그걸 생각하고 종이 예를 든 거예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부대효과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한 고생 많은 더러운 세상에서 평온한 극락에 가는 게 우리의 소망이었잖아요. 불교적으로. 그 방법은 지성이 원인이 되어서 하늘도 복 주는 결과를 낳는 그것이 모든 인간의 이름이 갖는 속성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게 아니고 부대효과라니까요. 뭔가 휙 지나갔는데 내가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무엇이 단절된 겁니까?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시도는 부대효과로 말미암아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어렵습니다. 구원이 안 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은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하라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제가 30년 신학교 갈 때부터 지금까지 오해받고 싸웠습니다.
이 목사님,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권면과 명령들이 있는데 당신 무시합니까? 오늘 아침에 목사님 질문 있잖아요. 네가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라. 마태복음 5장 16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무시합니까? 질문이 비밀글로 들어왔어요. 오늘 답변 해줬습니다.
일반 목사들은 이야기해요. 신학이고 뭐고 간에 성경에 하라 하면 우리는 목사로써 성경 펴놓고 여러분, 하라 했지요? 다 이 합시다. 내가 뭐가 잘못됐어. 이게 옳은 것이지. 교인 여러분 반박해보세요. 성경에 하라했는데 제가 잘못입니까? 그러면 교인들은 성경에 하라했으니까 하라. 우리 목사님 잘못 아니네. 그런데 성경의 다른 구절과 이상하게 잘 안 맞네. 자꾸 의문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믿으라 하면 믿고 하라 하면 하면 됩니다. 그냥 넘어갑시다. 그게 바로 유대교에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고. 그런데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부대효과는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너희들의 성질대로 살 때 주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상황 속에서 구원의 효과가 비로소 그 현장에 나타나게 돼있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부대효과, 종이는 떨어질 마음도 없었는데 바람이 부니까 떨어졌잖아요. 이게 구원이란 부대효과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대효과를 기다리면 되겠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기다림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사전 작업에 나서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아 너희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라.
우리의 본성은 아까 이야기한 지성이면 감천이다. 답답해서 가만있질 못해요. “시켜만 주이소.” 하나님이, “알았어. 시킬 테니까.” 오른손을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참 열심히 합니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대라는 그것을 교회 청소년수련회에서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청소년수련회하면 주로 세족식 같은 걸 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제자들 발 씻기는 걸 본받아 하자. 저 같으면 오른뺨 때리기, 그것 좀 하면 어떨지.
어떤 여학생이 예쁘다. 어떻게 때리겠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못 생겼다. 말씀대로 때리죠(^^). 너 같은 게 수련회 다 오고. 집에서 살이나 빼지. 성질 나오지요. 매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고3이다. 성경구절 찾아내서 지킨다고 난리 쳐요. 그런데 이미 합격했다. 그전에 열 개 했다면 다섯 개 대략 빼고 지킬 수 있는 것 두 개 빼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네 본색을 좀 드러내라. 탕자라야 구원을 받으니까. 탕자 집에 큰 아들은 가출 안 했지요. 그런 얘는 주의 이름을 기회를 놓쳐요.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탕자가 꼭 필요한 거예요. 죄라는 재료가 있어야 의라는 생산물이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사도 바울의 권면, 권면 얼마나 많습니까? 무시로 기도하라.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마라. 네가 새 사람을 입어라.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빛의 자녀라.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로 알아라. 동정하는 자가 되라.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주께 맡겨라. 음식물로 인하여 형제를 비난하지 마라. 주께서 구원한 형제를 넘어뜨리려느냐.
눈 감고 들춰보면 전부 다 그거에요.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친 것처럼 하라. 그 구절은 잘 기억하네요. 얻어 챙길 것은 기억하고 줄 건 생각 안 하고. 모든 것이 하라, 하라, 하라. 하세요. 해보라고. 해보면 자기의 숨겨진 나의 이름이 은근히 노렸던 바가 완전히 토하듯이 나와요. 이러한 극단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옵니다. 일곱 교회 나오죠. 일곱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노니 끝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을 들으라.
그 중간에 있는 내용이 이거에요. 나는 이 교회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것을 칭찬하노라.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노니. 교회가 그런 본문을 보고 설교를 어떻게 합니까? 이건 주 앞에 칭찬 받겠고, 이것만 고치면 하나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된다는 아이디어가 막 등장하겠지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돈 많다고 인색하게 굴다가 망했던 교회니까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눈에 안약을 발라라. 원래 라오디게아 교회가 안약이 생산되던 어떤 지방이다. 주석 보면 다 나온 그것. 차라리 주석 들고 읽어. 그 시간에 장로는 자고 있어요. 하도 많이 들어서 더 나올 게 없어요. 초신자들만 저렇게 놀라운 내용이, 이러고 있다고.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일곱 교회 전부 다 교회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교회 모델은 없다는 겁니다. 모델을 찾는다는 자체가 그게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결국 일곱 교회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여덟 교회 아니죠? 720 교회 아니지요? 일곱 교회란 것은, 환상 속의 일곱 교회가 현실에 나타날 때는 교회 자체가 없어요. 교회는 어디 있느냐? 복음이 전파되는 즉흥적인 우발적인 현상으로만 교회가 나타납니다. 야, 교회다, 라고 붙잡으면 이미 그 자리에는 교회가 없어진 거예요. 역사 시대에 교회는 인간의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소유의 대상이 아닌 건 뭐냐? 내가 여기 있고 교회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구원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면 뭐냐? 효과. 주님이 설쳐, 너무 설쳐. 주님이 설칠 때마다 즉흥적으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사라지는 겁니다. 한 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있지요. 한시적이에요. 내가 원하는 교회는 이렇다고 보여주고 사라졌어요. 역사에서는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소유만 인정해요.
서른두 살에 올림픽에 나가서 펜싱으로 금메달 땄다는 이야기를 이 사람이 64살에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 볼 공산이 큽니까?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훈련해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 금메달 땄구나. 참 좋은 사람이다. 존경해야지. 그렇다면 서른두 살에 금메달 딴 가치가 64까지 가겠습니까? 갈 수 없지요. 그 동안 인생 어떻게 꼬였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서른두 살에 국위를 선양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본인은 64살까지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 나온 용어가 ‘왕년에’란 거예요. 이게 인간의 이름이 갖고 있는 속성이에요. 실제로 서른두 살에 금메달 딴 사람이 서른세 살에 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해서 차사고 냈어요. 욕 되게 얻어먹었습니다. 심지어 금메달 딴 역도 선수는 코치하면서 제자들 성추행해서 코치직 박탈당했어요. 사람들은 괜찮은 자기 과거는 소유가 되고 별 볼일 없는 것은 지워서 남한테 안 들키도록 감추고. 왕년에 잘 나간 것을 계속 지속시키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자기 가치를.
또 예를 듭시다. 30대, 40대, 50대는 별 볼일 없었는데 70 넘어서 대단한 인물이 됐다고 합시다. 반 총장 그 사람 나이가 70인데 대통령하라고 난리입니다. 이 사람은 왕년에란 말이 별로 없어요. 이 사람이 올해 은퇴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다면, 그냥 대통령선거 낙선자잖아요. 그러면 내가 옛날에 유엔총장이야. 이렇게 나서겠지요. 이게 효과입니까, 소유입니까? 인간의 이름은 소유 외에는 다른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 얘가 참 좋은 대학 다녔지요. 지금은요? 신용불량자. 그걸 감추고 우리 얘가 머리 하나는 좋아. 지금은? 부도났지, 뭐. 부도난 건 잊어버리고 옛날 그 기억만 집착하고 강렬하게 소유하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얘가 똑똑해서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 얘 지금은 어디 있나? 뭘 하는지 감추지요.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왜 방해하고 막아서는지 아시겠지요. 인간의 나라는 존재는 소유의 집체, 집합, 집단이 될 때 나가 돼요. 다른 사람 만나서 안녕하십니까, 나는 납디다. 이러면 못 알아들어요. 실례지만 직업이 무엇인지요? 나를 찾는 게 아니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직업을 묻고, 실례지만 부동산은 얼마나? 오만 평. 자식은? 쌍둥이 둘. 나는 오만 평 있고 직업은 의사고, 자식은 둘. 이만하면 나는 갑자기 풍선처럼 업 되는 거예요.
자식은 없고, 부동산 없고, 직업 없고. 죽어라 차라리. 왜 사느냐, 왜 살아. 내가 있잖아. 네가 있으면 뭔데? 가진 게 없는데. 소유가 그 사람 존재를 말해주는 거예요. 직업이든 나이든 건강이든. 사람이 제일 중요한 건 건강 소유에요. 건강 소유가 행복 소유라고 하잖아요. 최고의 행복은 돈보다 건강이 중요하다.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다. 그러면 뭐해요, 예수를 소유하려고 하는데. 예수 소유하니까 지옥 나는 거예요. 누가 갑인지 분간을 못해요. 예수를 왜 소유합니까? 예수를 소유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는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에서 뭐냐?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어요. 일은 주님이 벌였어요. 원래 애굽에 있었던 사람들은 요셉의 명성 때문에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인디언보호지역에 있는 인디언처럼 놀아도 돈 줘요. 물론 마약하겠지만. 그 정도로 요셉을 생각한다면 바로가 요셉의 후손들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바로가 약속했거든요. 요셉아, 걱정하지 마라. 네 자손들 내가 알아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만데. 흉년 들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흉년, 풍선 예측해서 나라가 부강했으니 네가 믿는 여호와 덕분이다. 이게 옛날 선대 바로 왕이 요셉과 요셉의 후손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게 요셉을 잊어버린 바로가 등장하면서 옛날 바로는 요셉의 효과를 안 사람인 반면에 새롭게 등장한 후대 바로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 인간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효과로 살았는데 갑자기 인간의 이름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그들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영적 전쟁,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터가 애굽이란 나라가 된 거예요. 성경을 앞뒤로 봐서 그렇게 해석해야 됩니다. 주의 이름이 개입해요.
모세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너를 애굽에 보내노라. 애굽에는 약속이 없고 보내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죠. 그러면 애굽에 사는 히브리인들은 포로가 되고 종이 되고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주인 싸움이에요. 주인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면 노예가 주인을 못 이기죠. 이걸 갇혀있다.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율법과 죄에 갇혀있는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방했다. 구원이 아니고 해방시켜놓은 거예요.
뭡니까? 출애굽은 모형이고 신약에서 본격적으로 그게 완성이 되면 우리는 정작 어디에 갇혀있는지 모르면서 살아왔는데 복음이 들어오니까 우리가 법에 갇혀있었구나. 양심에 갇혀있었고, 법에 갇혀있었고, 전통에 갇혀있었고, 체면과 위신과 명예와 소유에 갇혀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목숨 부지에 갇혀있었던 겁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겠습니까. 추석 만난 게 원수들 만난 거예요. 실제로도 그렇고. 그렇게 친하던 형제들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언장 낭독에서는 갑자기 난 리 납니다. 남자 형제들은 점잖은 체하는데 안에 있는 동서들끼리 큰 며느리, 둘째 며느리 해서 형님은 전에 땅 받았잖아요. 집안이 원수에요.
나를 대적하는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공격하고 내 것을 빼앗는 원수의 일종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이름이에요. 그 습성은 어디서 왔는가? 주인을 닮았거든요. 주인은 바로 애굽이고 히브리인들이 그들을 닮았어요. 그래서 모세가 와서 여기서 나가자고 하니까 바로가 반대한 건 물론이고 누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까?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습니다. 모세 양반. 우리는 여기서 나가자고 소원해서 기도한 게 아니에요. 옛날처럼 하나님의 효과를 알던 그때 그 시대로 돌아가서 이왕 살았던 여기서 살기를 원하지 나가기는 어딜 나가. 니나 나가라. 모세를 반대한 사람이 히브리인들이었어요. 몰랐습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로 반대했는지 알아요?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을 우리 곁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구원하러 온 사람을 밀치는 거예요.
왜 그러냐? 본성이 문화와 풍습에 녹아들었어요. 인간 내부가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완전무장 됐기 때문에 바늘도 안 들어가요. 말 좋게 한다고 따라가고 이런 것 없어요. 습성 자체가 완전히 애굽 사람입니다. 어떻게 손 볼 수가 없습니다. 모세 간다고 해서 좋아할 줄 압니까?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 들었습니까? 정 떼고 죽읍시다. 이게 우리 곁에 온 모세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웃집 애굽 사람과 금융 거래했고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까. 싸우면서도 정 드는 건데. 그 정을 어떻게 뗄 건데요? 우리가 이 땅을 떠나기 싫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
그렇게 애 먹인 남편과 이별하는 게 힘든 이유가 그 놈의 정 때문에. 신앙이고 뭐고 하나님이고 뭐고 정이 제일 가까워. 예수님은 세 번째 서세요. 제일 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정으로 사는 거예요. 정 없으면 자살 할 것 같아. 정 없으면 죽을 것 같아.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정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그래놓고 믿음이라고? 개코나 믿어. 정을 소유하는 것보다 믿는 게 뭐 있어요.
복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발 편하게 살게 해주세요. 편하게 사는 게 뭔지 알아요? 정으로 둘둘 말아서 살도록 제발 좀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정으로 둘둘 감았습니다. 복음이고 뭐고 나한테 정주는 사람이 최고에요. 예수님보다 정준 사람이 최고에요. 그 사람이 예수 믿으면 예수 믿고 절에 가면 절에 따라갈 거예요. 정에 웃고 정에 살고 정에 울고. 인간 뭐 있어, 이거지요. 인생 뭐 있어요? 이겁니다.
놀랍게도 출애굽기는 애굽에 사는 히브리인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하라, 하라 할 때 효과를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요. 성질대로 그냥 사세요. 막 사세요.
목사님 아시지만 답변 글에 막 사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것도 정에 붙들러 사는 막 사는 거고, 막 사는 것도 정상적인 사는 거고. 제가 말을 바꿔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막 사는 게 정상적인 거고 산다고 우기는 것은 위선적으로 사는 거고, 실제로 막 살면서 안 그런 것처럼 사는 위선적인 삶을 산다고 표현하고. 그렇게 하는 겁ㄴ디ㅏ.
어떻게 할 겁니까? 애굽에서 못 떠나겠다는 어찌 할 거예요? 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을 방치하고 이들 근처에 구원의 효과를 발휘해야지요. 그게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 계획에 대해서 인간들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사전에 모세도 몰랐어요. 주님께서 모세를 보내면서 모세에게 내린 기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세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애굽은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했다. 따라서 요셉과 그 속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한 통속이 됐고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런 처지에서 히브리인들은 괴로워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다. 옛날처럼 좋은 바로 왕이 와서 좋은 은총을 받아서 사이좋게 살았던 그 시절이 좋다고 했고, 저는 그것을 한 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정이라고 했지요. 정으로 사는 것이 몸에 완전무장 됐어요. 해방이란 인식도 없어요.
그럴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어요. 아홉 가지 재앙 내릴 때까지 히브리인들이 떠날 생각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히브리인들이 사는 곳에는 다섯 번째부터 아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저쪽에 애굽인들이 사는 집단 주거지에는 메뚜기고 우박 떨어지고 난리도 아닌데 히브리인들은 주께서 보호해줬어요. 하나님의 작업을 둘 사이를 분리하는 겁니다. 들 다 똑같아요.
아까 제가 뭘 드로잉했습니까? 물고기 그렸지요. 안과 밖이 똑같아요. 똑같은데 선을 그으니까 여기서 경계선이 섰지요. 경계선이 민수기, 레위기에 들어가면 ‘거룩’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윤리도덕 개념이 전혀 아니죠. 따로 분리되었음,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뭔 뜻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분리가 되면 통용되는 개념 자체, 단어 의미 자체가 달라져요.
사랑? 네가 애굽에서 통용되는 그 사랑개념 아니거든요. 미움? 그 개념 아니에요. 기도? 그 개념 아니에요. 모든 개념이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롭게 밝혀져야 될 개념이지 십자가 없이 주님의 말씀 듣고 상식으로 주님 앞에 나서게 되면 주께서 거부합니다. 그 뜻이 아니다. 그건 더러운 오염된 뜻이다. 열심히 기도하라 할 때도 열심의 의미도 달라요.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아니고 몽땅 다 틀린 거예요. 오류에요. 십자가 모르면.
열 가지 재앙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왕을 자꾸만 강퍅케 만들어요. 어떤 분이 이것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사람이 착하면 착한 마음 나오게 돼있지요. 강퍅했을 때 강퍅함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착한 마음이고 싶어도 하나님이 강퍅하게 한 경우를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바로 왕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그건 히브리인들 뜻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통치자 바로 왕의 마음을 참 순한 양으로 바뀌어서 우리로 하여금 애굽에서 살 때 편하게 살고 싶다, 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소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일부러 갈수록 바로 왕을 강퍅케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왕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의 뜻을 어길 수 없습니다.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독재자도 마찬가지고. 인간이 지 마음대로 못해요. 하나님이 시킨 대로 마음을 정하고 움직이고. 핵미사일 실험하고. 주님 마음대로에요. 지 마음대로 핵실험 못해요. 홍수 내고 태풍 부는 것. 저는 미국 남부에 허리케인 오게 되면 무슨 벌을 받아서 매년 쉬지도 않고 허리케인 열댓 개씩 와서 집들이 기초공사도 안 했는지 온통채로 날아가요. 미국 집들은 허술한지 남의 나라인데 걱정이 돼요.
강퍅케 함으로써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모세가 하는 일에 회의와 의심 그리고 불안감을 병행해서 증강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모세가 저런 재앙 내린다. 우린 가만있어, 가만있어. 이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내보내야 될 바로 왕의 강퍅함의 수위가 심화돼요.
혹시 친정아버지가 연세는 많고 교회 안 다닌다. 그래서 딸이 죽기 전에 천당 가라고 용돈을 주면 네 소원이라니 교회 가줄게. 이럴 줄 알았는데 주자마자 막걸리 사먹고 개차반 돼서 행패부리고. 아버님 막걸리 값 따로 드릴 테니 교회 갑시다. 이러면 그 돈으로 도박으로 날리고 술 먹고 갈수록 강퍅할 때 그때 딸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여, 내 할 도리 다했습니다. 더는 못합니다. 이게 지성이면 감천이 깨어지는 거예요.
하게 하셔요. 답답해서 부모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다 해요.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아버지가 교회 가기를 학수고대 기다립니다. 교회 가면 유리창이나 깨고 난리 칠 때 어디서 기도가 응답되느냐 하면, 나는 더 이상 기도 안 합니다. 할 때 비로소 그게 기도 응답이 되었어요. 네 기도의 정성에 따라 움직일 줄 알았느냐? 그렇게 되면 네 마음에 기도라는 소유를 갖게 돼. 나는 기도 응답받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탈, 해방, 구원이 안 돼요.
애굽에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굽에 살던 내가 나로부터 구원이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라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하고 그리고 죽어 마땅한 것을 건져내는 몫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결정의 몫입니다. 내가 고대했고 내가 간구했기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님 마음대로 구원하신 겁니다.
나의 희망과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소유하지 마세요. 그 소유는 나의 주특기를 자랑질하는 인간의 이름의 존재가 돼버립니다. 그럼 목사님,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그 질문 나올 줄 알았지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라는 거예요. 머리 좋은 사람 다 아시죠. 그러니까 그 엉터리를 계속 하게끔 어려운 상황, 난처한 상황, 곤란한 상황, 기도 안 하면 잠이 안 올 지경에 기도 응답되던 말든 지금 답답한데 어떻게 합니까?
차를 몰고 가는데 앞에 경찰이 있고 딴 짓하다가 못 봤어. 벌써 시속 85마일 넘고 절로 기도가 나와요. “주여, 경찰이 못 보게 하옵소서.” 그런데 경찰이 못 봤다. “주여, 기도가 응답이 되었군요.” 답답하면 기도하지 말라고 말려도 우리의 본성인데 왜 본성을 애써 아니라고 하느냐.
교회 헌금하지 말라고 해도 헌금하게 돼있어요. 헌금해야 받아먹어도 양심에 가책을 안 느껴요. 헌금도 안 하고 받아먹는다는 것은 착한 인간성에서는 용납이 안 돼요. 그놈에 착한 인간성을 내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착한 인간성에 위배되는 행동을 함부로 하기 싫어요. 그래서 막 살라고 해서 막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막 살라는 것은 네가 지금까지 갖고 있는 마일리지를 펼쳐보란 말입니다. 네가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착한 사람인지 펼쳐야 그게 바로 탕자의 모습이고 죄인의 모습인 것이 십자가 앞서서 나타날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사람들 다 죽입니다. 히브리인이고 애굽 사람이고 애굽 자체를 다 죽여 버려요. 어떻게? 바로를 강퍅케 함으로써 바로의 신, 애굽의 신과 여호와와 영적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는 신 안에 있는 모든 애굽의 사람들은 그 신에 종속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최종적으로 다 보여주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인다. 맏아들을 죽이는 것은 모든 인간을 다 죽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결국 애굽의 맏아들은 다 죽었습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무슨 말하려고 다 죽었다고 하느냐, 분명히 우리가 알기는 히브리인들 맏이는 살지 않았느냐, 하고 싶지요. 출애굽기 13장 보세요. 다 죽은 것 맞아요. 1,2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다 죽어잖아요. 내 자식 내 새끼 다 죽었잖아요. 내 소유인 것이 죽었잖아요. 죽어야 삽니다. 내 것 죽고 주님 것이 될 때 구원이고 해방이란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함께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가 계속 살려낼 때 그걸 신약에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걸 바깥으로 볼 때 에고 ‘나’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난데 십자가에서 옛날 나를 매일같이 죽이고 매일같이 새로운 내 인생을 주님의 인생으로 바꾸는 작업이 살아있는 드럼통이 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해야 되죠. 시키는 대로 행해야 돼요. 율법도 지키고 사도의 권면도 다 지켜야 돼요. 이 말로 끝내고 싶다. 자꾸 행하지 말라는 소리했다, 헌금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헌금 하시고 다 하세요. 그리고 그게 죽을죄가 된다는 걸 알라는 겁니다. 뺀질이처럼 돈 아까워하지 말고. 다 하되 하면서 “주여, 또 죄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란 말이죠. 기도하면서 죄 들어간다고 하란 말이죠.
이것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주의 이름은 어디서 드러난다? 인간의 이름과 충돌되고 합체될 때 드러나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이름의 본성도 같이 드러나면서 마귀의 후손에 속한 속성인 것이 드러나고 동시에 주의 이름도 거기 등장하면서 주님은 이 땅에서 희생 받는 인간에게 밀침 당하고 고난 받고 핍박받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지요.
그런데 결코 인간의 이름은 스스로 해방되거나 구원이 될 수 없지요. 그런데 인간의 밀침으로 죽었던 주의 이름이 흘린 희생의 피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뻔히 지옥 갈 우리를 그 피로 부침개로 인하여 맛있게 입에 들어가잖아요. 그걸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응식이라, 하나님의 양식이라 돼있어요. 거제, 요제 거기에 동원됩니다. 그런 건 어려워서 할 기회도 없고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인간의 이름을 그냥 안 받고 주의 이름의 희생이 묻힐 때는 창녀든 세리든 관계없이 반 총장이든 온 총장이든 똑같이 취급해서 다 죽을 자에요. 자기 소유밖에 모르니까. 그 자를 희생의 어린양의 피로 용서하시고 데려갈 때 우리는 누구의 것이 된다? 출애굽기 13장 2절의 말씀처럼 누구의 것이 됩니까? 영원한 주의 이름의 것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