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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흐름5 1609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8. 15:26
2016-10-07 15:09:24조회 : 25         
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5 – 구약의 흐름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36)

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5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땅에 관한 문제입니다. 보통 땅이란 그냥 흙으로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요. 땅이 다 안다는 거예요.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것처럼. 땅에서 무슨 일어났는지는 땅이 증인이다. 땅을 속일 수 없다. 인간이 땅으로 쫓겨났는데 하나님의 전쟁은 하늘에서 땅으로 판이 커진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여자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싸우게 돼있고 여자의 후손은 나중에 온 우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주가 되신 나라를 천국이라 하는 거예요. 아들의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땅에서 솟아난다. 우리 상식으론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천국은 땅에서 만들어져요.

 

아까 목사님 따라 프린스톤 대학을 갔는데 본관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어요. 아주 오래된 건물이에요. 십자가 탑이 있어요. 제가 그 앞에서 뭘 봤느냐 하면, 그 십자가 밑에 뭐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십자가 세워질 때 십자가 안쪽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바깥으로 십자가가 보이느냐? 십자가 안에 들어가고 싶은 호기심, 십자가 안에 뭐가 있기에 거기에 들어가 보잔 말이요. 프린스톤 대학에 십자가 해놓고 건물 있으니까 그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내가 십자가 안에 있는 비밀을 헤치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 이야기에요.

 

천국은 땅에서 솟아난다. 땅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땅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발생시켜서 십자가로 완성시켰는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6장을 봅시다. 아담의 10대손이 노아입니다. 5장 29절에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라고 돼있지요.

 

보통 교회에 다니는 가정에서 아들 이름을 노아라고 짓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그 말은 부부싸움을 열심히 했다는 뜻밖에 안 돼요. 부부싸움을 했는데 아들이 비로소 우리 가정을 안위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지요. 아들 대에 와서 비로소 우리 가정은 부부싸움이 그쳤다. 그때 이름을 노아라고 지으면 적절하겠지요.

 

노아의 적절한 등장은 그전에 하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간에 대 혼란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노아 때 와서 평정한 거예요. 평정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노아란 이름 자체가 땅의 안식, 그럼 그 땅은 땅까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흔적,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증거가 남아있는 땅이에요. 하나님이 손댄 흔적이 있는 땅.

 

그래서 인간은 땅으로 쫓겨났고 땅은 인간들의 세계라 여겼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통해서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했고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주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땅에서 하나님의 직접 개입으로 성취하시는 겁니다. 그 첫걸음이 노아의 등장합니다. 노아 등장 이전까지는 땅의 세계는 엉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엉망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창세기 6장에서 홍수로 완전히 물청소해요. 멸망시켜버립니다.

 

멸망하게 되는, 하나님이 개입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땅을 멸망시킬 때 하나님 쪽에서 답변이 있어야 돼요. 그 답변이 방주 안에 들어있어요. 땅의 세계는 새로운 변화를 흔적으로 남기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 새로운 변화가 뭐냐 하면, 이건 정말 일반 평신도나 신학생에게도 너무나 생소하고 어려운 용어가 시작됩니다.

 

비-존재라는 거예요. 방주가 존재하느냐 할 때 방주가 있었잖아요. 그러면 존재하는 것 맞잖아요. 그런데 왜 비-존재라 하느냐? 방주의 존재는 그 이후에 일어나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는 토대가 되는 비-존재가 되는 겁니다. 역시 이럴 때는 그림이 최고에요. 여기에 사람이 있다면, 셈하기 하나, 둘, 셋, 셈하는 것. 123456. 그런데 이것은 뭐냐? 여기에 있는데 셈하기가 해당이 안 되면서도 모든 셈하기의 토대가 되는 어떤 존재가 있는 거예요.

 

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존재를 셈이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로서의 셈에 해당되는 이건 마이너스로 존재해요. 마이너스는 수학에서 뺄셈, 없애기, 또는 제거하기, 본격적으로 말해서 심판하기. 이 세상은 심판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 그 심판 이후에 모든 존재에 대한 의미를 제공하는 유일한 토대가 되는 겁니다. 어렵지요. 그러나 이 표현 외에는 성경 이 부분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여러분이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요나가 하나님과 의미를 주고받았잖아요. 요나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런데 요나는 박 넝쿨이 있다가 갑자기 시든다든지 자기가 물에 빠졌는데 큰 고기가 자기를 삼킨다든지 그런 하나하나의 변화를 하나님이 자기를 죽인 의미로 봤지요. 그럼 요나는 바로 모든 변화에서 그 의미를 조합하고 규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단 말이죠. 요나가 세상 변화에 있어서 의미를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이냔 말이죠. 그런 것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시편 136편 8절에 보면,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신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뽑아내란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낮에 해를 보면서 인자하시네. 방긋방긋 웃고 계시네. 밤에 달을 보면서 저렇게 너그럽게 인자하실 수 있나. 별을 보면서 야, 정말 인자하시다.

 

이것을 뽑아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 의미 색출이 가능하냐고 지금 이스라엘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집안이 거덜 나고 교회가 엉망이고 회사가 부도났는데 무심코 길을 가다가 달을 보며, “주여 여전히 인자하시군요.”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 말이죠. 그게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얻은 의미란 말이죠.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안자하심을 어떻게 발췌해내겠습니까? 맞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참 가당치 않는 일이지요. 로켓으로 달에 착륙해봐야 인자하심이 보입니까? 암스트롱은 하나님 계시다고 했는데 같이 간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달에 착륙했는데 두 사람 의견이 달라요. 하나님을 보았다 하고, 안 보았다 하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욥기 38장 31~3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ㅂ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지금 이 이야기가 욥이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이여, 제게 왜 이유도 없는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 받을 이유도 없는데 저한테 이렇게 아픔과 고난주십니까? 온 몸이 종기로 가득 차고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식 열 명이 하루아침에 다 죽게 만들고 아내는 나를 욕하게 만들고, 왜 이렇게 하시냐고 따졌단 말이죠. 따질 때 하나님이 네가 지금 나와 너 사이에 의미를 찾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묻노라. 내가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관여했느냐고 물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있어도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욥기는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자기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아무리 징조와 징후를 알려줘도 관심사가 정말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시냐고 하는 한 해와 달과 별이 보여주는 인자하심은 없습니다. 가득 차게 주어지는 넘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을 수 있는 소스를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욥을 집어넣어서 욥으로 하여금 그 속내를 마음껏 터트려서, 욥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차라리 이렇게 힘들게 할 것이면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우리 대신 고난 받는 욥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질문을 다 질문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별 만들 때 거기 네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고난 받는 것이 나의 인자고 사랑이고 긍휼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별 만들 때 하나님의 인자가 들어있고 달 만들 때 인자가 박혀있고 해 만들 때 인자가 박혀있는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 몰두하니까 뭘 놓쳤어요? 인자하심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놓친 겁니다.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셈한 거예요. 인간은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로 활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인자하심의 의미를 놓쳐버린 거예요. 진짜 어렵지요. 정말 어려워요.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 7장에서 이 땅을 심판했단 말이죠. 심판은 모든 존재자를 없애버린 거예요. 이건 비-존재가 아니고 무존재, 부재가 되죠. 존재가 없는 거예요. 존재가 없는 가운데 유독 방주 안에 노아만 살았지요. 그럼 노아는 뭐냐 하면, 무존재와 존재 사이에 있는 경계선에 있는 비-존재가 됩니다.

 

노아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번성해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각자각자 자기 아픔, 자기 희망, 자기 행복만 추구하기 때문에 노아의 비-존재성을 잃어버리고 뭔가 일이 안 될 때는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느냐고 따지면서 하늘의 별과 달, 해를 봐도 거기서 인자하심을 발췌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주셨어요. 햇빛과 은혜와 공기를 주셨어요. 그러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왜? 자기 존재부터 신을 따지려고 하니까. 그래서 가상적인 신, 가상적인 예수, 가상적인 복음, 가상적인 성령 전부 누구 좋으라는 예수고 성령이고 복음입니까? 나라는 존재를 더욱더 나만 유독 존재케 하는 그런 목적과 욕심에 차서 예수를 이용하고, 십자가 이용하고, 교회 이용하고 하나님 끌어당긴 거예요. 십자가의 비-존재성, 예수님의 비-존재성을 어디서 찾습니까?

 

오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 붙으면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고 난 뒤에 종말론적 공동체가 교회에요. 종말론적 공동체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실패로 끝나고 난 뒤에 무상에 마지막 때 오는 영이 있어요. 그게 바로 성령. 성령이 와서 강제로 끌어 모은 단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종말론적 단체가 돼요.

 

거기는 마지막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영께서 마지막다운 면모를 마음껏 보여주시면서 깔끔히 홍수 이후에 누구 하나 구원받는 식으로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너, 너, 너 구원받으라고 일방적으로 성령세례 주셔서 그래서 모인 단체, 그게 교회가 된단 말이죠. 그 교회는 예수님이 진두지휘했고 그래서 교회 머리를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무식했으면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에요. 주님이 마지막 때 나타났으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다 망했어요. 그 백성 이제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원하지 이스라엘 회복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현재 이스라엘 땅에 감람산에 예수님 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왔어요. 성령 안에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고 마시는 게 아니고. 그게 하나님 나라지요. 성령이 왔으면 미완료된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에요. 성령 안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와 함께 있으면 그게 교회다.

 

여기서 뺄셈으로 작용한다는 말은, 숫자로 셈을 할 수 없어요. 계시는데 안 계시기 때문에 숫자를 지목할 수 없습니다.

 

달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달을 보면 사람들이 저도 마찬가지지만 뭘 생각하느냐 하면, 노래가 있어요. 저만치 앞서 가는 님, 그게 노사연의 <님 그림자> 달만 보면 그 노래 생각나요. 내용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달이 비추면 나란히 그림자 있잖아요. 때로는 사랑하는 님이 앞서 가면 님 그림자를 바라볼 수 있잖아요. 지금은 그런 님이 없다는 슬픈 노래지요. 아주 유명한 노래입니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은 날 없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또 별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윤동주의 <서시>(별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전부 다 모든 별을 자기에 적용시켜요. 또 별 보면 생각나는 것은 별 하나, 나 하나. 또 생각나는 것은, 이경규가 이야기했던 “별들에게 물어 봐.” 바보처럼 나와서.

 

별에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별이 직접 우리에게 인자하심의 의미를 주는 게 아니고 비존재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의미를 줍니다. 우리 밑에 뭐가 있느냐? 오늘날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은혜, 그게 십자가 은혜인데 창세기 9장에서 그게 바로 피로 은혜다. 피 채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드디어 나옵니다.

 

피가 있고 하늘에 무지개가 있거든요. 피와 무지개가 어디에 들어있냐 하면, 방주의 제한된 의미를 인간들이 방주에서 나오면서 그 의미도 같이 방주에서 뛰어나와서 인간들의 모든 존재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토대로 장식하는 것이 피입니다. 이 점을 약간 상세하게 말씀드리면, 창세기 8장 20절, 이건 보셔야 돼요.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여기까지 여러분 아시죠. 하나님께서 더러운 짐승도 같이 탔는데 더러운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게 아니고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짐승도 같이 방주에 탑승이 가능했고 구원이 가능했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거예요. 언약이라는 것이 더러운 것을 불러일으켜서 그 더러운 것과 극히 대조가 되는 깨끗한 것을 함께 실어서 하나님이 어느 쪽을 희생시키느냐 하면, 더러운 것을 희생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깨끗한 것을 희생시켜서 더러운 것도 구원이 된다. 누구 덕분으로? 정결한 제물 덕분에, 라는 것을 포함시키는 그것이 언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할 때 노아야, 너는 구경이나 하라고 하지 않고 방주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게 언약을 세우리니 곧 방주의 언약이라.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노아 식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으로 노아가 언약 안의 희생을 보여줄 책임을 가지고 구원을 받게 되는데 노아가 나와서 정결한 짐승을 잡습니다.

 

그 다음에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뒤에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다. 할 때 네모가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태어날 때부터,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거든요. 그게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인으로 왜 태어나게 합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언약 안에 들어있는 정결한 분이 나중에 인격으로 구체화되는 그 때를 위하여 미리 악한 자도 그분의 희생 덕분에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예수님의 새 언약, 완성한 언약까지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 언약이 끌고 간 자국이 구약성경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끌어 간 자국을 내는 언약중심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비-존재에요. 있으면서도 숫자로 셈의 대상이 안 되는 것. 이 땅에 사람 눈에 띠지 않으면서도 모든 있음을 있게 하고, 모든 구원을 구원되게 하고, 모든 지옥 갈 사람을 지옥 가게 만드는 어떤 숨겨져 있는 동인자,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자, 그분이 바로 언약이란 이름으로 이미 구약부터 시작한 거예요. 언약의 모습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걸 universal singular보편적 비범자, 또는 특이한 사람, 보편적 단독자. 모든 걸 있게 하는 숨겨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분, 의미를 제공하는 자.

 

그렇다면 언약이 바깥으로 나올 때는 아까 요나가 고기나 박 넝쿨을 보는 것처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줘야지요. 그 의미를 채집할 수 있는, 요나가 박 넝쿨을 보고 주의 의미를 알았지요. 그처럼 이것이 의미가 발생되려면 여기서 의미 있는 현상들이 일어나야 되잖아요. 그게 땅에서는 피 있는 건 먹지 말라는 거예요. 하늘에서는 무지개.

 

이건 바로 숨겨진 보편적 단독자의 증표가 되는 대역하는 현상들이 바로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있고 땅에서는 피 있는 채 먹지 말라. 먹는 자는 죽는다. 그게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이제부터 짐승이나 사람이나 피 흘려서는 안 된다. 선지국 먹지 말라는 뜻인데 사람을 죽여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옥 갑니까, 천당 갑니까, 하는 개인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이게 숨겨진 비존재자의 대역인 거예요. 보편적 단독자가 숨어있으니까 숨어있지만 계시는 것은 확실한 증표로서 창세기 9장 4절에 나오는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이고, 하늘엔 무지개가 있고.

 

무지개가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무지개 있다는 것은 땅에 있는 피 채 먹지 말라 또는 피를 흘리지 말라와 연결돼있다고 보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연을 날리면 멀리서 보면 연을 보이는데 아이는 작아서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연줄을 잡고 있는 아이가 따로 있듯이 지상에 있는 피와 하늘에 있는 무지개가 연계돼있단 말이죠. 피는 보편적 단독자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이 찾을 수 없는 이유 없는 법이 돼요. 하늘이 무지개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은혜를 받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신기하죠.

 

북한의 김정은이 자기 부하 70명을 죽였는데 못 됐지요. 그런데 왜 안 죽지요? 그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주기 때문에 안 죽는다 하거든요. 그러면 악인을 지켜주는 원인에 대해서 인간은 찾을 수 있습니까? 찾을 수 없어요.

 

여러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아십니까? 전두환 군사정권 물러가라고 해서 군사정권에 의해 학살당하다시피 한. [소년이 온다]는 소설로도 나왔어요. 한강이란 작가가 썼어요. 그 작가가 [채식주의자]란 소설로 2016 맨부커상 인터내셔날 부문, 상을 받았어요. 한국문단 최초로 받았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하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민주투사가 죽었을 때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이 있는 신부와 목사들이 하나님 뭐 하시느냐? 악이 활개치고 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맥없이 죽어가니까 억울한 피를 보고 왜 하나님은 가만있느냐? 거기서 나온 하나님이 혀 잘린 하나님, 눈 먼 하나님이란 노래가 번졌어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 절대적 악에 대해서 무능하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책을 내놓으란 겁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이 사회가 어느 쪽으로 가야 돼요? 정의로운 쪽으로 가야 되는데 말만 하나님이 정의롭고 실제로는 불의가 넘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방치하시고 방관만 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들아 해답을 제시하라고 할 때 무슨 해답을 제시합니까? 그저 정의를 위해서 부르짖자, 기껏 노력하자는 그 선만 제시되는 거예요. 정의가 강 같이 흐르게 하소서. 맨날 아모스 이야기 끌어다 사회 운동하잖아요. 예수도 안 믿으면서 운동한다고 나라에서 보조금 타내고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되려 하고.

 

[채식주의자] 서평을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습니다. 왜 그 책을 보고 평을 해야 되는가? 현 세대가 그 사람에게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준다는 것은 이 시대가 소망하는 이 시대가 나름대로 아픔과 괴로움을 해소하는 해결책으로 그 책을 해답을 제사했다는 차원에서 상을 줬거든요. 그러면 그 책의 내용이 곧 이 시대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어떤 식으로 제공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예수 안 믿는 이 시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괴로움 속에서 해결책이 뭔지 찾고자 했는데 한강이란 작가가 그 해결책을 줬으니까 우리는 아낌없이 상을 드리겠습니다, 해서 받은 상이거든요.

 

사회정의에 대해서 교회가 말을 해야 교인들이 교회에 올 게 아니겠습니까? 해방신학이라든지 해서 보수 쪽으로 갔던 사람들을 다시 자유주의 신학으로 끌어서 나름대로 권력을 쥐려고 했는데 광주 사태가 절호의 찬스가 된 거예요. 하나님은 억눌린 하나님이다. 우리가 희생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정말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그 말이죠.

 

예수님은 좌우 어느 쪽에 동참한 적이 없습니다. 보수나 진보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존재를 위한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비-존재 숨겨진 예수님의 희생은 이미 십자가로 완료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들의 나라 예수님이 주가 되심에 필요한 그런 자들만 여자의 후손의 노선에 합당하고 안 그러면 뱀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제가 창세기 4장을 하면서 아벨과 가인 사이가 갑자기 원수지간이 되었지요. 이미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의 후손 셋이 등장해서 가인은 번창하잖아요. 누가 원수지간을 의도적으로 유발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했고, 그 하나님을 창세기 4장 끝에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한 거예요. 구약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전히 구약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 중심이에요.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웁니다.

 

모세와 하나님이 만났을 때 누구십니까, 이름을 알려달라고 할 때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을 회수하면서 주의 나라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게 언약이라면 언약을 던져놓고 던져놓은 언약을 줍는 거예요.

 

여러분, 아브람이 복의 근원입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에요? 아브라함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브람을 던져놓고 네가 아비 집을 떠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해놓고 하나님이 그걸 회수하면서 분명히 아브람을 회수했는데 보니까 아브라함이 된 거예요. 야곱을 던졌는데 주의 이름이 얍복 강에서 결합되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거예요. 이스라엘이 복의 근원이고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다.

 

오늘날 복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온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기가 복 받기 위해서 뭘 해야 되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그 설교 내용에 예수님이 이야기만 나오지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그 교회에 두 번 다시 출석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러면 그 교회는 명분이 좋아도 문 닫을 수밖에 없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교인이 있어야 뭘 하지요. 예수님 이야기만 했는데 올 리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이야기만 하게 하느냐? 성령 받은 사람에게. 그것은 복 받기 위해 왔다는 자를 아브람이나 야곱처럼 바뀌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관점으로 교회에 인생 만회하기 위해서 온 그 마음가짐 자체를 달라지게 하는데 달라지는 방법은 행함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비-존재, 예수님께서 너를 찾아가면서 그 언약적으로 덮치면서 달라져요. 언약이 덮칠 때 언약이 나타낼 현상들을 찾아가서 그 속에 예수님의 희생이란 의미를 담아서 찾아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 갔다가 새사람 되어 구원받을 때 그 사람에게 경제적이나 사회적이나 정치적이나 교회 직분적으로 변화가 있겠어요? 아무 변화가 없어요.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아무 변화 없습니다. 아무 변화 없는데 변화되었어요. 자기 존재 의미가 새롭게 파악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을 보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파악한다는 것은 티셔츠 바꿔 입는다고 갑자기 달의 의미가 생기고 별의 의미가 생깁니까?

 

아까 점심 때 먹은 게 뭡니까? 수육 안 먹고 햄버거 먹는다고 갑자기 주의 자비하심을 느낍니까?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해도 전에는 나를 위해서 먹었지만 이제는 주께서 주신 햄버거란 새로운 의미를 가미할 때 이것이 인간이 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남들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데 본인은 달라졌어요. 전에는 내 존재를 위해 하다가 이제는 다른 비-존재를 위해서 관계성으로 그분 때문에 비로소 내가 언약의 사람이 됐다는 걸 아는 겁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 축복을 받고, 달라졌으니까. 이걸 모르고 여전히 옛 게 남아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 겁니다.

 

달라진 게 어떻게 달라졌겠어요? 전에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 은혜는 바로 피를 먹지 말라고 우리에게 법을 제시하시고 하늘에 무지개란 연을 띄우신 그분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 관계 자체가 복이니까요. 보이지 않는 그분과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고 그분의 증표로서 징후로서 사인으로서 그분의 흔적으로서 살아있다는 것, 전에는 내가 살고 싶어서 살았는데 그분 때문에 내가 있다는 사인, 나로 하여금 축복된 사람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걸 아는 경우들이 닥쳐요. 그 중에 하나가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똑같이 노아의 아들들이었지요. 셈과 함과 야벳. 서열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별 차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원수지간 되지요. 이제는 점점 더 내용이 분명해집니다. 당연히 원수지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축복과 저주로 간격이 벌어지게 됩니다.

 

완전히 벌어지게 되는데 벌어지는 방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면 노아를 별 볼일 없는 칠칠맞은 아버지로 변하게 하지요. 아버지는 육을 갖고 있습니다.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은 술 먹으면 개 되지요. 개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요. 술 먹고 개 되어 자기의 하체를 다 드러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알았어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서 훌륭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고. 뭔가 언약적으로 덮어주는 언약의 요소, 피 흘림의 요소, 희생의 요소가 처음부터 수치스러운 인간을 덮어주는 시스템, 장치에 의해서 구원됐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버지의 수치심을 통해서 노아언약의 반복으로 이해했습니다. 언약은 한 때의 언약이 아니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반복됐다는 것을. 그래서 뒷걸음질 쳐서 담요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거예요. 수치를 덮는 행위, 이 행위가 반복적인 언약의 행위며 반복되는 사태를 축복이라 합니다. 돈 챙기는 게 축복이 아니고 나를 가지고 긍휼과 자비를 나의 일생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모든 세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모든 창기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창녀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걸 보여줄 때 그 사람은 언약의 증후고 표상이기 때문에 축복의 나라에 가담이 가능해요. 셈과 야벳은 뒷걸음 쳐서 아버지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알나리깔나리 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보다 못하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거는 존재에서 존재로 본 거예요. 축복의 사람들은 비존재에서 존재를 봐야 되거든요.

 

우리가 수치스럽지만 존재케 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비-존재자, 노아 때는 정결한 짐승의 피, 그것이 우리를 받쳐줘서 날 때부터 악하더라도 주께서는 은혜 주신다는 것을 그 언약을 보여줘야 되는데 함과 가나안은 존재와 존재로 평가하고 비판한 겁니다.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예쁘냐, 누가누가 거룩하냐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아버지 술 깼습니다. 술 먹는 아버지가 육적인 아버지가 육적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술 깨고 난 뒤에는 언약의 아버지로 변했습니다. 같은 자식이지만 끝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너는 지옥 가고, 너는 천국 가고. 저는 저주받아라. 너는 축복받아라. 이렇게 선언해버립니다. 육적인 입장에서 아버지로써 자식에 대해서 그렇게 선언한다는 것이 굉장히 육적으론 견디기 힘든 거죠.

 

그럼 축복과 저주를 선언했다는 말은, 선언이 노아한테 나왔지요. 축복과 저주를 다시 원상태로 회수해보세요. 그럼 노아 안에 축복의 요소와 저주의 요소가 들었다는 거죠. 노아 안에 언약이 들어있죠. 노아가 방주 안에 있는 정결한 새 중에서 짐승 중에서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렇다면 노아는 선지자지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 11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 안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마음껏 보여줬지요. 그러면 노아는 결국 장차올 그리스도와 연결 돼있습니다. 그럼 노아가 보여주는 것은 장차올 예수님, 비-존재, 눈에 띠지 않지만 존재하셔서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그분을 증거했지요.

 

그렇다면 그 노선은 무슨 노선이냐? 신구약을 어떻게 통으로 연결시키느냐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이렇게 나오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써 노아가 등장했다는 말은, 결국 노아는 컨베이어 시스템 다시 말해서 움직이는 선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선반 위에 노아는 그냥 존재자로 서있어서 자기 토대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 고난과 영광을 마음껏 보여줬을 뿐이죠.

 

그러면 오늘날 성도란 말은, 노아가 움직였던 컨베이어 시스템 위에 우리도 같이 서있지요. 그럼 우리가 보여줄 건 뭡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 amazing grace놀라운 은총을 보여주면, 우리가 보여주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물건 사듯이 돈 주고 받는 게 아니고 이미 복의 노선에 있기에 나의 잘남과 우수함을 자랑질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럼 목사가 강단에 설 때 성도라면 십자가 자랑해야 돼요, 뭘 자랑해야 돼요? 십자가 자랑해야지요. 그러면 교인들은 뭐합니까? 우리가 죄인인가, 이렇게 의심되고 복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그 소리 들으러 왔는데 주님을 생각해서 고난을 생각하라 하니까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발 잘못 들였네. 교회 왔다가 고생하라는 이야기밖에 안 듣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니까 갑자기 십자가가 듣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 이후에 나오는 영광을 얻고 싶지 십자가 속에 들어가기 싫은 거예요.

 

그러면 장로 선에서 처리가 됩니다. 목사님, 참 믿음은 좋은데 돈이 안 되니까 올해로 사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옆에 교회는 삼백 명 채우겠다고 자신만만한 목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할 수 없이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우리는 삼백 명을 원합니다. 그리고 오백 명을 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있어야 교회가 되기 때문에. 예배당 짓고.

 

제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십자가 복음으로 돈까지 노리는 이상한 교회들이 등장했어요.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돈은 돈대로 챙기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데 그것 다 들통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