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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아카데미2강-구약의 흐름 1609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5. 19:41
2016-10-05 14:35:21조회 : 8         
20160914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2 – 구약의 흐름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36)

20160914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2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자기 파괴를 대가로 해서 하나님의 창세기는 그걸 구체화한다, 현실화한다. 이게 하나님 작전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창세기 요소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우리 속의 창세기 요소를 끄집어내야 창세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는 말은, 우리 안에 창세기로 하여금 창세기 되게 의미를 주는 요소가 있어요. 정답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주시다. 예수님이 주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죄를 박아 놓는 겁니다. 그 죄 때문에 희생을 하게 되면 창세기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주가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세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다 구약에서 말씀하신 뜻대로 그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이런 뜻이잖아요.

여기서 제가 한 짧은 멘트 가운데 뭐가 빠져있지요? 하나님은 인간 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내 편으로 절대로 끌어당기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지 사람 편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냥 이용물이에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소모품입니다. 너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니라. 뭡니까? 안개니라. 왜 성경에서 이야기는 그걸 자꾸 잊어버립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안-개- 이렇게 나와야지. 그 이름 아름답구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안개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분명히 성경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서 확실하게 규정해놓은 게 있는 게 왜 자꾸 결부시키지 못하느냔 말이죠. 넓은 길에 어쨌든 출세해서 끼어보려고 머리 디밀고 그것도 작은 교회 말고 큰 교회 가고. 거기에 돈이 생기고 인기와 권력이 생기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내가 사는데 유리하게 작용하니까. 살아서 뭐 하는데? 그건 모르겠다. 처음부터 지가 누군지 몰라요. 왜 하는지 몰라요. 그냥 본능이에요. 살아있기에 살아있고, 더 살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실컷 행복하고 나중에 지옥 가고. 집단적으로 몰려가요.

그걸 선지자들이 본 거예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모세, 엘리야, 엘리사. 얼마나 거기에 대해서 외치고 또 외쳤다고요.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편지를 써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주의 것이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나는 나의 것이라고 그렇게 우기잖아요.

구약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작용하고 창세기 자체가 우리 속에서 이미 창세기 성취를 위하여 인간이 존재해 있습니다. 좋게 보지 마시고 죄를 품고 창세기와 관련된 채 우리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낙원, 극락의 동산 한 가운데 뭐가 박혀 있는지 보잔 말이죠. 하나가 아니고 두 나무에요. 두 나무가 어떻게 짝지어 있는지는 한 나무가 훼손 될 경우에만 다른 쪽 나무의 의미가 발생됩니다. 선악과나무가 훼손될 경우에만 생명나무의 진의, 본질이 드러나요. 그걸 설명해드리면, 어쨌든 간에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한 가운데 박혀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선악과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거든요.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이란 아담과, 남자와 여자는 화이트보드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절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인간한테 왜 알려줍니까? 혼자 아시면 되지. 여기 9개월 된 아기가 있다고 합시다. 아무것도 모르죠. 주는 대로 먹으니까. 이건 소다수고, 이건 사이다다. 그 이야기를 9개월 된 아기한테 왜 이야기합니까? 선택할 결정할 능력도 분별력도 없는데 이야기를 왜 해요? 천국은 누가 갑니까? 어린아이가 가지요. 천국은 어린아이 간다는 이야기를 어린아이한테 합니까? 안 하지요. 그걸 알아들으면 이미 어린아이에서 떠나서 천국 못 가기 때문에.

지금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심어놓고 이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을 구태여 인간한테 하느냐 말이죠. 할 필요도 없는데. 사단이 이야기했다는데 있잖아요. 그렇게 안 보입니까? 법을 이야기했다는 자체가 하나님 내부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세계 자체에 뭔가 문제 있다는 겁니다. 어떤 가정이 길을 가는데 갑자기 앞에 그릇이 와서 자기 발 앞에서 깨졌다. 좀 더 가니까 그 집에서 티비가 날아왔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집안에 부부싸움하고 있고 문제 있다는 뜻이지요.

선악과는 죽음의 나무에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지요. 죽음의 나무를 왜 동산 한 가운데 심어놨느냐 말이죠. 심어놓았을 뿐만 아니고 정녕 죽으리라는 것을 인간에게 왜 통보합니까? 하늘나라 내부에 문제 생긴 거예요. 따먹지 말라는 말은 너는 가던 길 가고, 남의 부부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 문제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으니.

모든 성경은 예수님 중심입니다. 이것부터 먼저 분명히 합시다. 모든 진리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할 때 예수님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하나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 말도 어려운 말이지만 여러분이 알아듣는다 치고, 요한복음 5장 39절에 모든 성경은 아버지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걸 자꾸 기피하고 신을 알아야 된다고 자꾸 신에게 결부시키는데 그건 내가 신에 대한 정보를 획득해서 신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죄의 심보를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종교성이죠. 이런 말을 하나하나 하는 것도 힘들어요. 어느 정도 조금 다르면 수정이 되겠는데 맞는 게 없다니까요. 어디서부터 손댈지 몰라요. 입만 열면 다 반대니까, 다 틀렸으니까.

목사님, 예수 믿으면 구원받지요. 그것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요. 주님이 구원해줘야 구원받지. “예수,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 못 받아요. 그럴 것 같으면 강제로 권총을 들이대고, 추석에 예수 안 믿는 아버지한테 칼 들고, 따라 하세요. 나는, 나는, 예수를, 예수를, 믿는다, 믿는다. 아멘, 할렐루야.

방법이 너무 과격했어요. 그럼 쉬운 방법으로 할게요. 아버님, 1000달러인데 매달 드리겠습니다. 돈 좋아하는 네가 웬 일이냐. 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고 이제 다 됐는데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거기에 심판이 있다는데 자식으로서 두고 볼 수 없어서 아버지 천국 보내야 되겠습니다. 이것 받으시고 다음 주부터 교회 나오세요. 돈 주는데, 한 번 갔다 오는 노동한 일당인데. 권총 들고 칼 들고 하나 똑같은 거예요. 결국 사고방식은 똑같은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십자가마을 사람들 다 알아요. 알아도 정말 또 하고 싶어요. 워낙 다르니까. 워낙 엉터리니까. 손댈 구석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살 처분, 도살하듯이 해야 돼.

에덴동산은 극락의 동산인데 하늘나라 안에 내부문제를 증거하기 위해서 환경으로 잠시 조성된 겁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조성은 하늘나라의 내부문제에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미카엘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과 악한 천사와 싸우죠. 그 문제가 신약 마지막에 등장했지만 앞서서 창세기에 미리 예고편으로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존재는 내부문제 후에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잖아요. 인간은 하늘나라의 내부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15절 봅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 이것은 인간이 관여해서 이룰 문제입니까, 인간이 배제당한 채 이뤄질 문제입니까? 배제당한 채 이뤄질 문제에요. 인간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 노력(교회 간다든지, 기도한다든지)으로 구원 못 받아요. 구원은 인간 외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자체 내부의 문제가 자체적인 어떤 작업에 의해서 해소될 때 그 결과로 구원받는 자도 생기고 유황불에 들어가는 자도 생기는 겁니다.

성경해석 끝났지요. 간단하게 끝났지요. 기도, 전도, 선교, 헌금 아무 의미 없지요. 예수님과 마귀의 전쟁 여파로 우리는 전리품이 될 뿐이에요. 그 전리품으로 집단구원이 뭐냐?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전리품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과 싸운 게 아닙니다. 애굽의 신들과 싸운 것은 바로 어린양을 요구했던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과 싸워서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용사요, 우리는 그 전리품입니다. 또는 상급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시작하면서 창세기에 들어왔는데 창세기를 하면서 초장에 분명해진 게 있습니다. 모든 창세기의 완성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배제된다. 그래서 아브람은 배제되고 “아브람, 너는 빠져. 나가”라고 아브람은 아니라고 한 하나님 일의 결과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을 밀치고 아브라함 되게 하고, 야곱을 밀치고 이스라엘 되게 하고.

그러면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이름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이건 마치 야곱이 꿈꿀 때 천사 온 그것은 장차올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흉내 낸 거예요. 이렇게 하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야곱이 본의 아니지만 흉내 낸 거예요. 어차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배제되니까. 배제됐다는 말은 나가라는 말이 아니고 너를 쓰겠다는 의미에요. 내가 알아서 썼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말란 말입니다.

주께서 주님의 내부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간을 끌어 쓴다는 말은, 끌어 쓰임을 당한 인간은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이런 뜻을 품고 고백하란 말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지요.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했지요. 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합니까? 자기 이름으로 안 하고.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하면 앉은뱅이가 얼마나 납득을 하겠어요.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명령하니까 명령자 이름으로 하면 듣고 일어서면 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하면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야 돼요, 예수님 말을 들어야 돼요? 예수님의 말로 듣고 일어났단 말이죠.

앉은뱅이는 알아요. 그런데 주변에 있던 군중들은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심과 신앙심이라고 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짜증을 내면서 “왜들 이러십니까? 나의 경건과 나의 기도와 나의 기적의 힘으로 한 게 아닙니다. 저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앉은뱅이가 갖고 있는 예수로부터 난 믿음,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낫게 됐습니다. 앉은뱅이에 대한 주님이 하는 일에 우리는 옆에 선 목격자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한단 말이죠.

그 현장이 성령의 현장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없는 현장의 해석과 성령이 있는 현장의 해석이 이렇게 달라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알겠지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무슨 뜻을 가지느냐 하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란 말은 나는 아닙니다. 저는 아니란 뜻이에요. “목사님, 병 낫게 해주세요.” “저는 아닙니다.”라는 것이 그 병을 낫게 했단 말입니다. “목사님, 제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 용서할 능력 없거든요.”라는 그것이 바로 주의 증인이란 말이죠. 그게 구약부터 있는 거예요. 줄곧 이어져온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연기자들이에요. 어떤 대본이 나오는지 몰라요. 대본 주니까 연기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 자체 전부가 연기고 연극이에요. 거기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연극이 끝난 후>('80 제4회 MBC 대학가요제 은상)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는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불빛은 네온을 따라서 바삐 돌아가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객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침묵만이 흐르고 있죠

관객은 열띤 연길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할 때 어떤 현실이 눈에 보이는데 연극이 끝난 후에 뒷모습이 너무 허무하듯이 우리 인생도 한 편의 연극이라서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란 내용입니다. 역할만 했을 뿐이에요. 그것도 내가 정하지 않은 역할, 주께서 주신 역할. 그런데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걸 받아들이지 않아요. 주여, 왜 저를 이렇게 못 살게 굽니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렇게 하십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앞으로 이래서는 더는 못 삽니다.

드디어 성공한 거야. 창세기가 너한테 꽂혀서 네가 찾아내지 못한 네 죄를 드디어 끄집어낸 거예요. 우리의 배신성을. 그게 바로 하늘의 문제성이 땅까지 전쟁터가 번져서 에덴동산이고 인간 세상이고 온통 사탄과 예수님과의 전쟁터로 바뀌고 만 겁니다. 거기에 우리는 걸려들었고 우리는 멋도 모르고 태어난 겁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다윗이 알고 시편 50편에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죄가 나를 낳았다.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

이미 전쟁터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영적 전쟁에 말려들었는데 그 영적 전쟁터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 다 인간 아닙니다. 둘 다 인간으로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뱀의 후손은 악마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후손이 앞의 것을 규정하게 돼있어요. 뱀의 후손은 악마인데 악마이기에 앞서서 뱀이라고 창세기 3장에 미리 온 거예요. 에덴동산에 들어온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선조가 있고 후손이 있잖아요. 성경 영적 세계는 후손이 선조를 규정하게 돼있어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뱀의 후손이 뱀의 주가 되는 겁니다. 뱀을 다룬 거예요. 여자를 유혹하라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믿지 마라. 네가 따먹는 날에는 나처럼 된다. 누가 이야기했어요? 사탄이 이야기했죠. 네가 따먹는 날에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어. 내가 되도록 노력하게 될 거야. 이 땅에서. 그래서 인간은 사탄이 되고자 노력하는 게 아니고 정반대로 신이 되려고 하죠. 그게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이게 사탄의 짓입니다.

소원이 뭡니까? 죄인이 되는 게 소원입니까, 천당 가는 게 소원입니까? 천당 가는 게 소원이죠. 주의 소원은 뭡니까? 죄인으로 드러나서 십자가를 진 주님인 것을 증인되는 것이 성령이 임한 목적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의 증인이 되리라 할 때 네모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나의 증인이 되면 안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는 네가 되리라. 예수의 증인이 되는 멋들어진 네가 될 것이다. 멋들어진 나를 목표로 우리는 예수 증인되려고 성령세례 받으려고 그렇게 통성기도하고 금요철야기도하고 있어요. 성령 주시옵소서. 뭐 하려고? 괜찮은 사람 되려고. 이게 타고 난 본성인데 어떻게 합니까. 선악과 따먹은 본성이 이래요.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은 어거스틴도 이야기했는데 선악과 구경 해봤어요? 구경도 못했는데 왜 본인이 책임져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dna 있어서 dna 조사해도 선악과 없어요. 선악과 따먹는 순간 모든 것은 묵시적인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에 그 전쟁터에서 새로운 얘들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동일한 전쟁터에서 동일한 규칙을 적용받으면서 백날 태어나도 동일한 원판이에요. 그게 아담 안. 아담보다 이천년 후에 태어나도 아담이 짜놓은 판에서 저쪽 구석에서 태어난 거고, 오천년 후에 태어나도 이쪽 구석에 태어난 거죠. 표정들이 안 믿는 표정이라서 말을 못하겠네.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이 이천 년 전이죠. 그러나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분이 의로운 분이 됨으로써 예수 믿는 자는 의인이 되잖아요. 사도 바울은 그걸 예수 판,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천 년 후에 태어나도 같은 예수 안에 태어난 게 되고 오천 년 전에 태어나도 예수 안에 태어난 원리가 뭐냐? 아담 이후 만년 후에 태어나도 그건 아담 안에 있는 육신,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 되는 겁니다. 이제 슬슬 성경의 윤곽이 드러납니까?

기본은 뭐냐? 인간은 나가 있어. 하나님 내부문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 거예요. 영적 세계란 천사의 세계에요. 천사의 세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겁니다. 그게 뱀의 후손이에요. 악마에요. 요한계시록은 무슨 이야기로 끝납니까? 악마는 유황불에 들어갔다. 이걸로 끝나잖아요. 양의 탈을 쓴 짐승과 물에서 온 짐승은 유황불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나머지는 잘나서 천국 갑니까? 어린양에 기록된 자는 이건 행함도 없이 기록됐다는 사실만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짐승의 이름에 기록됐다는 이유로 전부 다 지옥 가는 겁니다.

제가 지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잖아요. 그대로 이야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너무나 그대로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 믿는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을 믿지 말까, 이렇게 나와요. 너무나 급진적인 이론이 나왔기 때문에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가 없지요. 앞뒤가 다 맞는 이야기니까. 너무 맞기 때문에 성경은 옛날 신화 책이라고 하자. 기어이 그걸 기피하려고 해요. 말하기 전에는 성경 믿는다고 하다고 성경의 진실 된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니까 성경을 밀치는 거라.

그러면 성경을 매일 큐티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잘못된 해석을 계속 공급해줘야 돼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계속 거짓말해서 이 말씀대로 지키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거짓말해줘야 나를 위한다는데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성경을 버릴까? 주님 사진 찍어주세요. 성경 보는 순간을 잊지 말아 주세요. 이런 식으로 성경 본 마일리지를 쌓는 거예요. 거기에다 헌금한 마일리지, 선교헌금한 마일리지, 교회봉사한 마일리지.

그런데 창세기부터 인간은 나가 계세요. 아담아 따먹지 말라는 말은,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누가 관여해야 돼요? 장차오실 예수님이 해결할 문제지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을 방패로 자기편으로 삼아버립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럴 줄 알았지요.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영원히 갈라지게 했습니다.

처음에 주님의 지시가 뭐였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요. 그 안에 네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생명나무는 못 먹는다는 말을 안 했지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은 결코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적으로 싸우는 주의 원수, 사탄은 주의 원수입니다. 이것도 어려운 말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주의 원수에요. 시편 110편. 왜냐하면 사탄을 해결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해결하실 분이에요. 그렇게 해결되면 그 나라를 아버지한테 바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마지막에는.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과 안 싸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싸우게 만듭니다. 왜? 예수님을 주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성경 전체는 예수님은 주시니라.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성경핵심이 아니에요.

버지니아 강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사탄의 생각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인간들이 자기를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거고 진짜 하나님이 말하는 주권사상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하기 위한 주님의 권한이 성경에서 나오는 주권사상입니다. 개혁주의신학에서 말하는 주권사상은 인간 자기를 위함이에요. “신이시여, 저는 인정합니다. 화초와 모든 세상의 만물은 다 주께서 만드셨잖아요. 이 정도로 압니다. 저를 구원하소서.” 이건 인간들이 자길 구원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십자가가 빠져버려요. 그렇게 잘도 아는 인간이 왜 죄인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주장이에요. 모든 걸 믿고 모든 걸 아는데 이게 왜 죄인이냔 말이죠. 근본적으로 그게 이상하잖아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 왜 죄인입니까? 율법에 흠이 없다는 사울이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그동안 못 지은 죄를 다 지었기 때문에 그걸 종합하니까 죄인된 거예요? 도대체 사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국에 치킨 광고에 이런 게 있어요. 치킨이 얼마나 맛있는지 깜짝 놀랐어요. 그때 멘트가, “도대체 이 닭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사울이, “주여, 저한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예상 못했어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런 하나님은 있지도 않았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드는 하나님뿐이에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건 인간들이 지어낸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합니다. 이걸 구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합니다. 그걸 상세히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만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이름을 버리잖아요. 대번에 탈락이에요.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가리는 게 본인들의 이름이죠. 본인들의 존재감이죠. 본인들의 열성이고 본인들의 가치 같은 것들이죠. 더 나아가서 첫째 강의한 것이 본인들의 의미잖아요.

성경을 보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어떤 의미가 생기는가? 하나님 성경 봅니다. 성경 보는 착한 짓하는 나에게 저의 존재를 영원토록 천국에 넣어주세요. 의미 생겼어요. 여기 북한주민 나왔습니다. 천국 이야기했습니다. 하자마자 뭘 생각합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분명히 속으로 하나님께 이야기하겠지요. 그렇게 외치고 싶을 때는 하나님을 상상해서 대상화시켜야 되겠지요. 그리고 구원받는 대상은 누굽니까? 본인이 되겠지요. 그게 이천 년 동안 인간들이 종교란 이름으로 기독교란 이름으로 해온 원형이고 모델이잖아요. 그 사람 구원받습니까?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졌지요. 북한주민님, 십자가 빠졌는데요? 아차, 하나님, 십자가를 믿습니다. 저를 구원하소서. 뭐가 빠졌지요? 그게 죄라는 사실, 십자가에 의하면 그게 죄라는 것. 다시 말해서 네 구원에 네 자신이 관여했다는 그게 바로 사탄이 이미 피조물들을 다 같이 주의 일에 관여하자, 라고 사탄이 꼬신 거예요. 아담아 따먹고 나와 한 편이 되어서 우리 피조물도 신처럼 되자. 언제까지 피조물 노릇만 하고 도구로만 쓰일 것인가.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럴 때 주께서는 아담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져요. 분명히 처음에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생명나무는 없다. 하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처음에는 바로 옆에 있었어요. 이제는 영원히 갈라섰습니다. 갈라섰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것이고 보이지 않는 거죠. 감추어졌다는 것은 부재,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생명나무.

인간에게 남은 건 뭡니까? 신처럼 되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참고로 해서 상상의 생명나무를 만들어내야 되죠. 상상의 에덴동산, 상상의 하늘나라, 상상의 율법, 상상의 신구약, 이걸 참고로 해서 다 만들어내죠.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과 참된 천국과의 차이는 상상한 것은 어떤 식으로도 천국에 인간은 들어갈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 믿으면 구원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한다는 것이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뭡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에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의외의 반발을 유발하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쏟아내면서 주께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모든 게 주로 마감되는군요. 내가 주 앞에 저주받아 끊어질지라도 주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옵소서. 나의 파괴를 대가로 해서 주의 일이 이뤄진다면 주께서 저한테 묻어보지 마시고 그렇게 일을 진행시켜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했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에게만 그대로 이어집니다. 방금 이것을 다섯 자로 이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더 길게 하면, 범사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태가 내 인생에 일어날지라도 감사합니다. 그걸 더 길게 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군요. 누구 좋으라고? 주님 좋으라고. 주님만 좋으시면 되는 겁니다.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잡힌 것도 주님만 좋으시다면 또 잡히겠습니다, 라는 식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경의 일은 인간은 배제당합니다. 인간은 끼어들 입장이 못 돼요. 주께서 다만 쓰시고자 하는 가운데 쓰는 거예요. 아브람을 택하사 아브라함으로 바꾸면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인데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 안에 아브라함의 기능이 들어있으니까 그 기능을 앞당겨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듯이 예수님도 스스로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한테 바치잖아요. 그게 바로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는 뜻이에요.

계속해서 인간은 빠집니다. 주님이여,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구원이란 그 여파라니까. 이미 이루어진 마귀에 승리한 결과로 주어진 거예요. 며칠 전에 우리가 했잖아요. 저는 했다고 보는데 요한일서 2장 14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미 이긴 거예요. 우리가 뭘 해서 이겼습니까? 아니죠. 주님 안에 예수 안에서 이긴 자가 되는 거예요. 버지니아 강의에도 나오지만 3장 6절에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범죄 하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의를 행할 때 우리가 개입했습니까? 개입 안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개입했습니까? 죄 지은 데 우리가 왜 개입 안 했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자기의 본성을 바깥으로 발산한 것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다면 너는 범죄 하지 아니하다는 이 말은 주의 규정이죠.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빠져있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주님 계신데 전문가가 있는데 건방지게 내가 왜 관여합니까?

악마야, 나와. 내가 관여한다고 해서 악마가 무섭다고 도망가겠어요? 마늘과 십자가로 악마가 싫어합니까? 악마가 좋아합니다. 도대체 악마가 십자가 들이대고 마늘 싫어해서 물러간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는 자체를 이미 우리가 상상해서 천국, 귀신, 다 만들어낸 거예요. 백 독, 천 독 한 성경을 통해서 모든 개념을 내가 상상하는데 상상한 개념들은 내가 개입해야 내가 구원되는 그러한 원칙에 준해서 체제를 만든 거예요. 그게 바로 신학체제에요. 그 신학체제 구조에서 교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구원받았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렸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렸습니까? 움직이는 자체가 예배인데 뭘 또 예배드려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그날인데.

어느 정도 대충 맞고 몇 구절 틀리면 이것 고치세요. 이렇게 말을 하겠는데 다 틀리니 어딜 이야기를 해야 될지. 근원적으로 그겁니다. 대세 따라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큰 강으로 막 우르르 떨어져요. 밀고 떨어지고, 밀고 떨어지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살고 싶어 해요. 성경이고 복음이고 다 귀찮은 거예요. 제발 좀 놔둬라. 편하게 살고 싶다. 이걸 두 자로 줄이면, ‘행복’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목적은 행복이었습니다. 행자를 떼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복. 모든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복 주세요. 한국에선 이사한 집에 갈 때 휴지를 사 가요. 휴지 이름이 ‘잘 풀리는 집’이에요. 뭘 해도 일이 잘 풀리는 집. 미국 오면서 약이나 김 같은 것 사오지 말고 잘 풀리는 집을 하나씩 나눠줘야 되는데 그래야 액땜이 되고 저주가 풀리는데^^

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제로 끌어당긴 겁니다. 그게 가능했어요. 왜? 가짜기 때문에 끌어당겨진 거예요. 목사가 가짜 하나님, 가짜 예수, 다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오늘도 복 받았다는 자위하는 행위를 그 사기를 반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신앙의 연륜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오래 해먹은 사람이 장로 돼요. 초신자를 초짜라 하고. 맨 그쪽 길로 가게 돼요.

벌써 창세기 3장 다 했습니다. 인간은 빠지는 거예요.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리는 것은 호르몬 작용 때문이 아니고 이 땅에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은 재주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타고난 본성이 자기를 가만두질 않아요. 허망하게 죽을 수 없고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악마적인 발악이 자기를 힘들게 만들어요.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갔지요. 엘리야도 참 야박하고 남자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살할 정도로 마지막 남은 밀가루, 마지막 남은 참기름을 털어 넣으려는 순간 동작 그만, 그걸 날름 지가 먹어버렸잖아요. 이걸 야바리 까졌다. 또는 싸가지 없다고 하거든요. 뭐예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해. 그걸 먹고 모자가 죽으려고 했는데 벼룩에 간을 빼먹지. 그걸 빼먹잖아요. 진짜 너의 진면목은 자살할 자격도 없어요. 그게 인간이에요.

다시 말해서 네가 살고자 하는 이유를 네가 모르잖아, 이런 뜻이에요. 살려고 해도 가뭄 들어서 못 살겠다. 과부라서 못 살겠다. 죽자. 너에 대해서 죽자, 살자 하는 그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살려주면 사는 거고 죽이면 죽는 거지 왜 네 마음대로 살려 하고, 네 마음대로 죽고자 하느냐 말이죠. 날름 빼앗아 가죠. 이제부터 너는 못 죽어. 내가 살려줄 거야. 밀가루가 화수분처럼 피어나고 있는 기름통은 다 찼어요. 끝. 그리고 난 뒤에 아들이 죽어요. 분명히 엘리야가 살려줬는데 멀쩡한 아들이 죽습니다. 도움 받은 건 생각 안 하고 자기 아들 죽어간다고 살려내라고 난리 치네.

지금 엘리야가 하는 의미가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거든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네가 생명나무를 모르지? 생명나무가 뭔지 알아? 생명나무는 생명나무를 위해서 죽일 수도 있고 생명나무를 위해서 살릴 수도 있다는 걸 마르다, 마리아가 모른다는 거예요. 그것의 형상이 바로 엘리야 사건입니다.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뭔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반영으로,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주의 일이 아닌 것을 엘리야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