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4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1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구약을 관통해보겠습니다. 구약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고 그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논리들이 흐름을 이룰 때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또 들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창세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는 두 개의 창세기가 있어요. 하나는 나 밖의 창세기. 내 안과 밖의 모든 천지창조를 하나님이 어떻게 운영하시고 창조하시고 나 밖의 다른 사람들, 사탄, 영적 세계, 자연세계 여기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를 썼다고 하는 반면에, 두 번째는 뭐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내 안의 창세기가 있습니다.
내가 알기는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천주교 모든 역사가 첫 번째 나 밖의 창세기를 이야기해왔어요. 나 밖에 있는 창세기가 허구라면, 지금껏 실제라는 말을 앞장세운 종교놀이하고 있었던 겁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것, 그 많은 주석들, 책들이 있지만 나 자신을 감추기 위한 위작 또는 조작된 창세기일 경우에 평생을 창세기로 오락하고 있었던 셈이 되겠지요.
실제 하나님은, 우리가 있으면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내가 조작하고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가짜라는 겁니다. 저 나무와 풀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걸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제가 생각하기에 천지창조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누군데? 네가 너를 모르잖아. 그렇게 고백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네가 너에 대해서 모르면서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것이 진리고 맞는다고 네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냐?
저 달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게 맞는다는 근거가 어디 있어요? 내가 맞는다고 우기는 것밖에 더 되겠어요? 기독교 이천 년 동안 서로 속이고 있어요. 창세기 주석 책이 수십 만 권 나오는 게 이게 거짓말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거예요. 그렇다고 동의하고 교회 세우고 성당 세우고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를 누가 썼느냐? 제가 알기에는 창세기를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썼지만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이야기하면서, “내가 창세기라고 글 쓰면 잘 알아듣잖아. 그지? 그러니까 내가 창세기 썼어.” 이렇게 될 경우에는 인간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없는 인간에게 창세기를 이야기하신 게 돼요. 인간에게 문제가 없다면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십자가 사건이 있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지요. 근본적으로 문제 있는 인간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어, 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고백이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사탄의 고백이에요. 내 속에 괴물이 들어서 괴물이 만든 고백, “저는 신이 창조한 걸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자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알라 신을 믿는 사람들. 알라는 하나님이란 뜻인데 그들은 천지 창조를 하나님이 했다고 믿지요. 그러면 그 사람 말이 옳다면 알라 신을 믿는 이슬람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네요. 문제없으면 천국 가겠네요. 문제없는 인간을 왜 지옥을 보낼까요? 천국 가야지요.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고백에는 나는 문제가 없음이 깔려 있어요. 그동안 몰랐던 걸 더 보탰을 뿐이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문제도 없는 인간이 죽습니까? 왜 죽습니까? 로마서 6장에 나와 있어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죗값으로 죽어요. 죄 때문에 죽습니다. 이것 아시지요. 그러면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천지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은 죄일까요, 죄 아닐까요? 죄죠. 그 죄라는 것을 내가 어떤 식으로 눈치 챌 수 있는 역량이나 소질이나 가능성이 죄인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마지막 끄트머리에는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 존재라고 기어이 증명하는 식으로 모든 고백과 모든 신학과, 성경공부를 하게 마련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도 움직임 하나, 생각 하나, 사업 벌이는 것, 그리고 아이들 교육 시키는 것, 결혼하는 것, 농사짓는 것, 어부가 고기 잡는 것, 모든 행동 속에는 반드시 마지막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역시 나는 정당해. 이것이 항상 거기에 전제가 돼있어요. 심지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밝혀내기 위해서 창세기를 둘로 나눈 겁니다. 인간 바깥에 있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 창세기. 그리고 그러한 고백이 잘못된 데서 나왔다고 우리 내부로 파고드는 창세기가 있어요. 우리 내부에서 창세기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우리 바깥에 천지 창조가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천지창조라는 그 의식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내 안에 진짜 창세기와 관련돼있는 것이 있기에 인간은 자기 죄를 숨기고 하나님이여, 나는 천지 창조한 것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오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 그런 거짓말이 나오게 된 원인을 우리는 모르거든요. 그 원인을 지적하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인 겁니다.
그러니 이천 년 교회역사고 성당이고 지금 아무 쓸데없는 짓을 계속 해오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조차 모르면서. 창세기 주석을 수십 만 권을 내면서 창세기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 본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본인이 죄인인 걸 모르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줄로 믿습니다, 라는 그 고백이 정당하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에 대해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의 창세기, 하나님의 계시인 창세기가 내 안의 어떤 점과 결합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두 개의 문장을 쓸 테니 차이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할/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이게 뭔 뜻입니까?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그런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신앙이란 창세기란 계시, 구약이란 계시, 십자가란 계시, 신약이란 계시로 날아와서 나를 파괴시켜놓고 나의 파괴를 대가로 해서 진짜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와 연계를 꾀하시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파괴 없는 연계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 뜻을 알아채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나는 파괴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계속 유지해야 되겠지요.
모든 인간의 심보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선 모르고 무조건 괜찮은 것 다 끌어당겨서 자기 것 만들면 자기가 더욱더 든든하고 훌륭하고 성스럽게 된다고 누가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해요. 십자가, 언약, 복음, 좋은 건 다 끌어당겨요. 끌어당기면 끌어당길수록 뭘 몰라요? 자기는 점점 더 위대해지지요. 그게 사탄이에요. 악마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게 악마의 속성이에요.
그동안 수천 년 가려졌던 우리가 악마의 일부로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면서 “악마야, 물러가라” 하고 있어요. 본인에서 이미 악마가 작동하고 발동하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한테 악마야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고 있단 말이죠. 그게 특히 심한 것이 종교인들이에요. 불교, 기독교, 천주교인들. 자꾸만 종교생활로 신앙생활하려고 해요.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될까요? 무엇이 가려질까요? 자신의 악마성은 점점 깊숙한 곳에 감춰지겠지요.
이것이 진짜 신앙고백이라면, 악마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어거스틴입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고백, 악마의 고백이에요. 차이가 뭐예요? 앞에 있는 것이 ①이고 밑에 있는 것이 ②이라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할 수 없기에 하나님, 당신을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없는 이 무자격자를 주여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저를 파괴 시켜주옵소서. 그런 뜻이에요. 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파괴하시는 그분이 유일하게 의로운 분이죠. 오직 주님이죠. 주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대가는 뭐냐? 나의 파괴가 필요하기에 주여, 저는 그런 주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영원히. 이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뒤쪽을 보세요.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당신 없이 내 영혼이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내 평온을 위해서 하나님이여 나의 주가 되시옵소서.”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그런데 이런 이기주의가 대표적 믿음에 모델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표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걸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우려먹었고 수련원, 기도원, 모든 교회에서 청소년들이에, 자식들에게 이걸 모방을 시킨 거예요.
두 번째를 모방할 때 따라 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인간은 본래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은 쉬워요. 혹시 여러분들 괴로운 게 있습니까? 그 괴로움을 해결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주님을 영접하여 여러분 괴로움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다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알라 신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 역사의 대세에요. 이것은 드러났고 위에 있는 고백은 핍박 받았어요.
사람들은 직장생활하고 일하면서 삽니다. 그렇게 바빠요. 그런데 왜 살지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살지요? 혹시 사시는 이유 아십니까? 모르지요. 성경 백독하면 왜 사는지 이유가 나오던가요? 안 나와요. 해답 안 나와요. 나를 위한 하나님인데 무슨 해답이 나옵니까. 처음부터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꿈꾸던 허구적 세계에 성경을 하나의 자료로 거기다 보탠 거예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까지 동원한 겁니다. 내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까지 믿으니 내 미래는 활짝 피어있다. 죽으면 천국 갈 거야. 성경을 믿으니까. 창세기를 믿고 십자가를 믿으니까. 이런 식으로 일본말로 구라,거짓말을 남발해온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고 비로소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게 2번이라면, 1번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고백이지요. 누구 고백이에요? 바로 사도되기 전에 사울 한 고백입니다.생판 예상도 못한 분이 왜 찾아오십니까? 내가 예상한 것은 2번이거든요. 인간이 되었으면 하나님을 믿는 게 당연하지.이게 2번이에요. 인간이 되었으면 창조주를 알아야 존재의 이유를 알지. 이게 2번입니다.
그런데 1번은 뭡니까? 사울이 율법에 흠이 없는 자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데 2번에 대해서 자기가 모르겠어요? 정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확인했어요. 전 국민이 신자기 때문에.유대나라는 전 국민이 신자에요.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소원하는 것처럼. 미국이 신자 됨을 얼마나 기쁘겠어요. 전 국민이 신자인 유대교에 정통한 사도 바울이 2번 고백을 왜 모르겠어요. 인간이 되었으면 창조주를 아는 것이 마땅하단 말이죠.
이사야에 나오잖아요. 자식이 되었으면 아비를 알고, 소는 주인을 알고, 돼지는 돼지 주인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듯이, 사람이 되었으면 하나님을 알아야지. 그건 모든 인간이라면 딱 들으면 아멘 그냥 나와요. 그건 아멘이 아니고 오멘입니다. 그랬던 사울이 정말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쉬운 말로 나는 그동안 뭐했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생각에는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바깥에 있는 천지창조와 연관시키는 것은 다 거짓이고 사탄이 만든 환상의 세계라면 진짜 세계는 어디에 있고, 진짜 창세기 내용은 어디 있고 그것과 우리는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고 묻고 싶지요.
인간 속에 창세기적 요소가 들어있어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자체 안에 우리는 모르지요. 우리는 창세기를 바깥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확인하기 이전에 우리 속에 창세기적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와 창세기가 어떻게 관련돼있는가? 죄와 관련돼있어요. 그러면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서 눈치 채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이런 죄를 알았기 때문에 죄인으로써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내가 믿나이다.” 이러면 사탄의 고백이 아니고 천사의 고백이고 신앙의 고백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자기 죄라고 들려오게 되면 가짜 죄를 죄라고 만들어놓고 그게 죄라고 다짐을 하고 장담을 해요. 예를 들어서 나는 옛날에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나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오셔야 비로소 죄를 압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창세기는 전부 다 구라고 가짜라면 진짜 창세기를 만드신 하나님은 창세기를 품고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용과 창세기 말씀 작용에 의해서 그때마다 새롭게 펼쳐지게 되겠지요.
의미를 확실히 주기 위해서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4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다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희가 죄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죄가 죄로 드러났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 있는 것은 고백하면서 하나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우리가 만들어낸 죄라는 것은 기존에 알고 있는 죄, 간음죄, 남한테 피해 입힌 죄, 사기 친 죄, 스스로 나쁜 생각, 우리가 납득이 되는 죄만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죄를 끄집어내는 우리 행위는 죄가 아니고, 스스로 자백한 착한 사람이 돼버려요. 이해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내가 반성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대견하고 착합니까? 내가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주 앞에 내려놨다는 말 자체, 그걸 인식한 자체가 이미 그만큼 착하다는 거예요. 안 내려놓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착한 거예요. 결국 이천 년 교회역사가 지 잘난 맛에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한 겁니다. 이렇게 나를 부인하고 낮추니까 목사님, 나 이뻐해줘. 신부님 이뻐해줘.이거라니까요. 세상에선 예쁨을 못 받아서 마음에 평안이 없었으니까.
주님을 알기 전에 평안이 없었는데 주를 알고 평안합니다, 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이 왜 사탄의 고백이라고 한 줄 알아요?지금 놀이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게임,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장난이라고 하고 싶어요. 모든 교회, 모든 신학자, 목사들이 교인으로 장난치고 있어요. 진리와 아무 상관없어요. 여러분, 마음 불편하지요?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고객이 원하면 장사하는 사람이 그걸 만족시켜줘야지요.
제가 왜 자꾸 그냥 사세요. 아무티내지 말고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그렇게 티를 내면 낼수록 자신은 점점 더 종교라는 신앙이라는 세계를 솜사탕처럼 부풀려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만들어내는 것이 자기의 거짓을 가리는 구명보트처럼 부풀어져요. 나중에 뚱보 돼요. 미국에 와서 인상적인 것은 공항이고 어디고 뚱뚱한 사람이 많은지.
신앙 생활하면 할수록 목사들이 영적으로 뚱보가 되는 거예요? 자기의 위선과 자신의 죄는 점점 가려지고 목소리까지 변조해서 주님은 안 계신 것 같아요. 본인이 신이고 교주 같아. 자꾸 교인들에게 신앙의 티라고 강요하니 교인들은 있는 주특기, 없는 주특기 모방해서 전통적으로 인정받은 종교적인 모습들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여기 오니까 성화 보고 수도원인 줄 알았어요. 주눅 들 정도에요. 오래 직장생활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처음 온 사람들은, 개 끌고 오면 개한테도 세례 줄 판이에요.
인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손댈 것 없어요. 수작을 걸면 걸수록 점점 더 악마의 모습만 풍선처럼 부풀어질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목사님은, 그게 성경적으로 이론적으론 맞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냥 기다리라고 한다면 만약에 개척교회해서 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면 교인 한 명도 없게 되지 않습니까? 제 이론에 의하면 주께서 찾아와서 성령님이 세례 주셔야 그게 교회라면 스스로 발견하는 게 교회가 아니고 흉내 내는 게 교회가 아니고 찾아오는 게 교회라면 그 교회는 본인이 나서서 예수님 영접한 건 아니잖아요. 주께서 먼저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찾아오지 않으면 계속 교인이 아닌 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그 교회에 교인이 한 명도 없을 수 있지요. 십년 째 교회 간판 걸고 있는데 한 명도 안 나타나면, 자진해서 예수님 만난 사람은 여럿 왔다 갔지만 진짜 예수 만나고 온 사람이 없으면 그럼 목회자로서 난 어떻게 됩니까? 차마 이런 질문은 못하고 솔직하게 그런 마음은 들고 걱정이 돼서 목회자가 교인 한 명도 없으면 문제 되잖아요. 가게에 손님 하나도 없으면 가게 문 닫잖아요.
제 답변은 간단해요. 주님은 교회 협조하라고 계신 주님이 아니고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알아서 하자 없이 착오 없이 택한 백성 빈틈없이 다 건지면 그게 교회 아닙니까? 평생 삼십년, 오십년 목회해도 한 명도 없었는데 천국 가보니까 올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출석했다면 자기는 공짜로 천국 가게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요.
예수님 영접했다는 사람 오천 명 왔다면 골치 아파요. 바쁘기 때문에. 그런데 한 명도 없잖아요. 한 명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가기는 천국 가고. 이렇게 배짱 영업하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그게 진정 목회자의 소망이고 소원 아닙니까? 자기 손으로 목회 안 했는데 주님 앞에서 여러분, 훌륭한 목회자 소개합니다. 살아있을 때 교인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 같이 박수, 짝짝짝. 최고입니다. 한 명도 없더라도 그게 주께서 하신 것을 계속 꾸준히 믿어 왔습니다. 한 번 더 이쪽으로 박수, 짝짝짝. 그런 신학생, 그런 목사가 왠지 오늘 그리워집니다.
목사들이 창세기를 왜 읽습니까? 장사하려고. 여러분, 창세기 궁금하지요. 제가 전문가입니다. 원어 배웠습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제가 원어로 풀이해주면 당신이 이 정보를 얻으면 당신의 영혼은 천국 갑니다. 이런 작전이 미리 다 깔려있어요.
다시 정리합시다. 창세기란 이미 창세기를 해석하기 전에 창세기 자체가 우리를 대상으로 해석하는데 그 해석하는 결과가 신약시대에 십자가와 관련 되어서 해석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다 죄인입니다. 그것을 창세기부터 발굴해내게 하고 발췌해 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를 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이런 마음이지요. 제가 중국에 갔는데 거기 온천에 닥터피시라는 물고기가 있답니다. 호기심 많은 아담의 후손이 되어 거기 가서 발을 담가보니까 고기들이 신상 왔다고 뜯어먹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와서 뜯어먹어요. 따라서 창세기가 닥터피시에요. 내가 알지 못하는 죄를 창세기가 와서 간질간질하게 우리를 뜯어내기 세상에 우리는 그때마다 감격의 이런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의 위선과 나의 죄를 들춰내시는 고마운 닥터피시 같은 기능을 하시는 주여, 누구십니까?” 그것은 바로 창세기를 만드신 분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분이 모세 안에 있는 영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이 한 문장으로 창세기 해석 끝났어요. 이 한 문장으로 미국 강의 끝났어요. 여러분 해답 알고 공부하는 것과 해답 알려고 창세기 보는 것은 기분이 달라요. 이미 해답을 쥐고 창세기고 구약에 들어가야 돼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을 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지금 베드로 시대에 너희들은 이렇게 하라, 이렇게 살라는 게 아니라 선지자 이야기를 끄집어내요. 베드로 사도님,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렇게 묻고 싶지. 나는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선지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교회가 부자 된 성도는 어떻게 부자 됐는지 찾지 마시고 열두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구약의 선지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을 둬야 돼요. 성경을 본 사람은 알아요. 선지자들과 스데반 집사와 열두 제자가 그다지 고생 없이 살진 않았잖아요. 그럼 그들의 고생과 뉴저지에 있는 우리의 고생과 비교할 때 선지자들이 고생을 더 하면 더 했잖아요. 핍박 받고 죽었으니까. 그분보다 덜 고생한 것에 감사하기보다도 내가 제대로 삼을 기준을 잘 됐다는 것, 우리가 소망하고 여망한 것을 그걸 달성하고 쟁취한 그런 사람을 본받지 말고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의 선지자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간 길을 보잔 말이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의 마지막 복인데,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게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네가 본받을 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고 그건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고. 부러워 미쳐. 질투 날 정도로. 저 여자는 왜 그렇게 예쁜 거야. 여자들에게 예쁜 게 부러움의 대상이잖아요. dna가 다른 걸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부러움의 대상은 알아요. 하지만 본받음의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니까요. 얼굴에 손댈 이유가 없다니까요. 본받지 말라 하는데 견적내서 깎고 난립니까. 선지자가 미용 수술했습니까? 선지자가 주의 복음을 위해서 코 세웠습니까? 코 세울 수도 있겠다. 복음을 위해서는.
선지자들은 핍박받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삶은 핍박받는 삶이에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들에게 상이 많음이라. 이게 뭐냐 하면, 좁은 길로 가는 자는 어디로 통한다? 영생으로 통하고 넓은 길로 가는 자는 멸망으로 가지요. 제 아내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이 많은 물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궁금했다고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는데 나이아가라 폭포가 굉장히 넓어요. 넓은 길이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이 결국 나이아가라 폭포가 돼요. 남 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폭포 끝에서 줄줄이 떨어져요. 지금도 모든 교회가 큰 교회 당회장 본받았다가 지옥으로 차례차례 다 떨어집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포스터가 있어요. 한반도 그려놓고 절벽을 만들어놨어요. 자녀 셋 낳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절벽에서 막 떨어져요. 아주 잔혹한 포스터에요. 넘쳐서 바다에 빠져요. 제가 오늘날 교회를 보면 그래요. 넓은 길, 넓은 길을 추구해서 교회마다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전부 다 넓은 길로 모아놓고 목사부터 앞장서서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다 떨어지고 있어요. 좁은 길? 이게 좁은 길 아닙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자기가 안다는 거예요. 뭘 아는데? 닥터피시여, 제발 나를 뜯어주옵소서, 나를 파괴시켜주옵소서, 하는 자는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안다는 말은 어떤 뜻에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날 살리기 위해서 이것저것 끌어 모았는데 얼추 성경 내용은 들으나마나 거기서 거기고 다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안다는 말 속에는 나는 나를 살리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스케줄이 있어. 그런 뜻이에요.
“나를 파괴시켜주옵소서”가 아니라 나는 평소에 내 생활을 더욱더 공고하게 단단하게 만들어서 천국에 집어넣는 시중에 떠도는 방법은 다 강구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게 바로 마귀 아닙니까. 그게 유대인이고.
아까 요한복음 봤지만 예수님 오기 전까지 그들이 말씀으로 완전 무장했습니다. 사울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오기 전까지 너희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했으니까, 주님도 인정했어요. 물론 비꼬면서 인정했지요. 너희 최고다. 칭찬입니까? 비꼬는 말이잖아요. 왜? 너희 아비는 마귀로 했으니까. 가장 의로운 자가 가장 마귀다운 거예요. 세리와 창기는 저 뒤에 가 있고.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깝고 앞장 선 사람들은 지옥에 가깝고.
내가 오매 비로소 네가 죄인임이 드러나는 것처럼 창세기를 보는 관점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내가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창세기 보신다면 잘못됐습니다. 잘못됐으면 고치면 되지 않습니까? 고칠 방법이 없어요. 그냥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잘못된 길로 하고, 하나님의 진짜 해석이 주어졌을 때 진짜 해석을 핍박이라고 계속하게 되면 계속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고, 내 쪽에 문제 있다고 알면 그 사람은 좁은 길로 가서 영생 가는 사람이고. 그런 겁니다.
그럼 옳은 창세기 해석은 뭐란 말이냐? 아까 베드로전서 봤지요. 베드로가 선지자 언급했지요. 제가 강의하고 나면 강의 진도를 천천히 하고 말도 좀 천천히 하라고 말들 하는데 오늘은 천천히 하도록 애써 보겠습니다.
여기 11절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는 신약 시대에 나타났지요. 예수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여기 보면 구약 선지자 속에 누가 있다 했어요? 벌써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가 관여했지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뭐가 있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 그리스도가 창세기 1장에 관여했지요. 창세기 1장을 해석하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의 죄만 뽑아내서 너는 파괴 되어도 마땅하다는 결론 나오면 그게 바로 창세기 해석이에요.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탄의 고백이고 죄가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창세기 정도는 외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못 박게 한 원인이에요. 외운 것으로 자기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했지요. 우리가 마치 성경공부하고 난 뒤에 뭔가 더 많이 알고 그 안 것이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리라고 착각하는 것부터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럼 성경공부해도 도움이 안 되는데 왜 합니까? 이렇게 정답을 내릴 수 있어요. 성경공부를 우리가 왜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은 우리로 더욱더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주께서 모임을 주선한 겁니다.
창세기를 들어가겠는데요, 창세기를 보게 되면 우리에게 발생되는 게 있어요. 그게 의미라는 겁니다. 창세기를 모를 때 하고, 예를 들어서 한 번도 성경을 본 적도 없는 북한주민이 여기 있다고 칩시다. 창세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몰랐던 창세기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 속에 창세기와 관련되어서 내가 누구지, 하는 의미가 생기게 돼있습니다. 나는 창세기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은, 나는 이런 류의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모습의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죄의식입니다.
그러나 북한주민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가 이런 의미인 줄 몰랐네. 나는 생전 처음 들었어요. 누가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으니까.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나는 처음 알았어요. 모세가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넜구나. 야, 신기하다. 그럼 어떤 의문이 생기느냐 하면, 나도 그 현장에 있었으면 홍해를 건너고 신났을 텐데. 하나님이여, 저도 홍해 건너는 기적으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가 발생하겠지요. 이게 바로 주님이 고대했던 죄입니다. 무슨 의미를 만들어도 그게 죄가 되게 돼있어요. 닥터피시니까. 뜯어내니까.
하여튼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뜯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누가 뜯는가? 주님이 우리를 뜯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맨날 낯선 내 의미와 다른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고백은 맨날 이 고백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여, 내가 예상 못한 일을 일으키십니까?” 또는 “주여, 제가 원치 않는 길로 궁지로 몰아넣으십니까?어찌하라고?” 그럼 주님 답변은, “어찌 하지 말란 말이야.”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하지 마, 그래.” 이런 뜻이거든요. “저는 주를 섬깁니다.” “섬기지 말라 했잖아. 섬기는 게 죄라 했잖아. 그동안 공부 뭘 했어. 너한테 나오는 것은 다 죄야.” “이렇게 나온다면 주님 못 믿습니다.” “네가 믿는 것이 죄였어. 이제 알았어? 그걸 발굴하려고 그동안 공들여 너한테 일을 벌인 거야. 이제야 네 자신을 아는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그 반발이 주님의 기도의 응답이에요. 그걸 보여주는 대목이 이사야 6장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렇게 해서 이사야는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 안 돼요.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은 보는 순간 우리에게 의미가 생기는데 그 의미가, “나도 이사야처럼 해서 구원받아야지”라고 또 다시 내가 나를 건지려는 구원된 이상적인 모습을 환상으로 그려보는 그런 의미가 발생돼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이거에요. 나는 화로도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한다면 주님이 그때나 지금이나 활동하시는구나. 이렇게 돼야 돼요. 이사야를 만드신 주님이 지금의 나를 관여하고 이 순간 이사야를 보게 하신 그 주님이 옛날 이사야로 하여금 화로다 망하게 하여구나, 하신 그 주님이 닥터피시처럼 나를 뜯어먹는 작업을 하시는구나.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찾아온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사도 바울처럼 번개 치고, 눈 어두워지고, 낙타에 떨어지고, 그런 것 했다고 우리도 재현한다고 고속도로에서 말 타고 하지 마시고 평소에 보면, 기쁨실, 주께서 만드셨구나. 시계, 양탄자. 양탄자에 그려진 최후만찬 그림치고 예수님 얼굴 제대로 나온 그림 본 적이 없어요. 주께서 저렇게 그려놓았구나. 그렇다면 주께서 이렇게 나를 앉혀놓은 거예요. 이게 범사에 감사 아닙니까. 이게 성령의 충만이잖아요.
그래서 스데반이 죽을 때 주님이여, 설교했는데 왜 죽으십니까? 이랬습니까? 주께서 했지요. 내가 안다니까. 눈치 챘어.이런 고백했어요. 그럴 줄 알았어. 짱돌 들고 저들로 하여금 울분을 일으켜서 돌 던지도록 주께서 하신 줄 다 알았어. 이리 와. 빨리 나와 영원히 살자. 그게 바로 스데반 집사 순교사건이에요.
그게 순교사건이라면 지금 우리가 땅콩과자 먹는 게 순교사건이에요. “주께서 이걸 줄줄 알았어. 주께서 마련했지요?” 순교사건은 피 흘리는 게 아니고 내가 소멸되는 것 이게 순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