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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주님경유 1511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1. 17:33
2015-11-28 01:37:42조회 : 797         
주님 경유 151127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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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4.♡.77.175)15-12-08 17:32 
광주 강의(2015. 11. 27) 21-1 

전에 세례요한이 죽었던 이야기를 거론합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왜 죽이려고 했는가? 그것은 평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데 그 위장술에 요한이 안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정당하다고 여겼는데, 요한이 도끼 이야기를 했지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3:11).” 

그리고 ‘회개하라.’고 했지요. 걸치고 있는 위선의 옷을 벗으라는 거지요. 회개하라고 했는데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점이 어려워요. 성경은 분명히 ‘회개하라.’는 명령으로 나와 있지요. 그러나 명령이 아니라 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나처럼 현 상태를 안다면 나는 회개했다.’ 이런 뜻입니다. 회개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에 대한 답변을 한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이 회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알면 그 자체가 회개입니다. ‘내가 그동안 상황판단을 잘못 했구나.’ 이렇게 잘못 된 것은 알게 된 것이 회개입니다. 

뉘우치고 고치면 회개한 사람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회개한 나의 괜찮은 행동이 나를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요. 이렇게 되면 자신의 위선을 벗을 수가 없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옷을 벗으세요.”라고 했는데, 어떤 분이 “옷을 벗으면 구원 받습니까?”라고 물어요. 제 뜻은 그것이 아니고 ‘여기는 목욕탕입니다.’라는 이야기를 ‘옷을 벗으세요.’라고 표현한 거예요.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말한 겁니다. 

‘회개하라’는 말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세례 요한의 말 중에 진짜 어려운 말이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겁니다. 무엇이 왔다는 것은 시간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에 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시간이 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시간이 왔다, 안 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 인간은 항상 시간을 보면서 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시간은 내가 알아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시간이 왔다는 말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상관없이 어떤 인물이 왔다.’는 겁니다. 인물이 왔으면 ‘너희들이 시간을 보고 상황을 판단하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 온다고 기름 준비하는 것처럼. 기름 준비하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요.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게 되면 구원에서 탈락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준비가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구원 받습니다. 왜냐? 이전에는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삶을 살았는데, 천국에 필요한 백성은 다가오신 분이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면 그 나라에 백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백성 만들기는 오신분의 자기 숙제입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 6장 30절을 했는데, 세례 요한이야기를 했어요.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했지요. 회개하라는 말은 반성하라는 말과 다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정신 차리고 잘못을 시인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것조차 할 필요 없게 만드는 상황이 찾아 온 겁니다. 뭔가 마지막 때가 왔을 때 사람들이 그 때를 무작정 기다리는 바보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뭔가를 준비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있기에 준비가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는 말은, 인간이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비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닥쳐오는 거예요. 세례 요한 당시에 선지자는 말라기로 이미 끝이 났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지자가 말을 하면 어떤 뉘앙스냐? 선지자는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 온 자들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방법이 뭡니까?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정신 차리게 되면 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바로 그 생각이 세례 요한이 와서 잘못된 생각인 것을 폭로합니다. 왜냐? 회개하라는 말은 시간이 가까워 졌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시간이 지난 거예요. 

뭔가가 온다면 사전에 대비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미 왔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비 자체가 소용없는 거예요. 시대를 잘못 읽었어요.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고 곧 올 줄 알았지요. 이미 왔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내가 그동안 선지자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구나.’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명령이 아니고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수련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우리가 대비하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재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결과를 원인과 연관시킨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식으로 대비하는 책이 아니고, 성도 아닌 자가 성도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결과입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성도 되는 일에 실패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원인이 나 혹은 내 주변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승리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게서 오는데 인간들의 평소 버릇은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엄청난 무서운 일이 온다고 하니까 자신이 대비를 하려고 합니다. 666 도장도 안 받고 피하려 하는데 그 자체가 구원되지 못할 자임을 보여주는 짓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는 것은 인간이 대비하라는 말이 아니고 상황 자체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알아보는가? 인간들의 시간해석 자체가 오실 메시아 계열과 맞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헤롯은 세례 요한의 외침은 새삼스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세례 요한을 죽이려 했지요. 

세례 요한은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임을 당합니다. 태어날 때는 요란했습니다. 성령의 계시에 의해 잉태하고, 이름도 사가랴가 아니고 요한이라 지었고. 어린 때의 경우만 놓고 보면 이 인물이 나중에 총회장이나 혹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공적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후 죽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세례 요한을 일찍 죽게 하셨는가? 그것은 ‘중심 찾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심 찾기가 무슨 뜻인가 하면, 묵시(비역사)라고 할 때 사람들이 역사를 떠난 다른 곳에 묵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고, 역사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니까. 

역사 세계를 떠난 묵시 세계를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3:8).’고 했지요. 이 땅에 있는 시간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묵시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자체는 맞는 말인데, 역사 바깥에 묵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묵시가 역사 안에 파고 들어와요. 

역사와 묵시가 같이 동심원을 이루는, 하나의 중심이 되는 그 ‘중심 찾기’는 이 땅에서 어떤 흔적으로 오는가? 묵시와 역사가 만나면서 죽음으로 옵니다. 죽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묵시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구름타고 와야 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다니엘 7장에 보면 메시아가 올 때 구름타고 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구름타고 오지 않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어요. 구름타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주님은 몰래 침입했어요. 몰래 오셔서 죽을 때는 제자들도 배신했으니까 누가 알았겠어요?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르고 시체를 찾겠다고 무덤에 갔잖아요. 결국 아무도 예수님을 몰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찾으려 하는 거예요. 내 육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님 존재를 중심으로 본 겁니다. 주님의 신체가 중심이 아니고 그분의 죽음이 묵시적 사건입니다. 

역사는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묵시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항상 발생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늘 일어납니다. 발생합니다. 이것이 묵시입니다. 죽음의 반복이지요. 묵시가 역사와 만날 때는 죽음이에요. 이 죽음을 바울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또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라고 할 수 있어요. 

상처가 사랑이에요. 주님이 찾아오실 때 나에게 상처로 와요. “네가 바로 적그리스도고, 네가 나를 배신했다.”고 지적하면서 오십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원수 된 자인데, 수많은 원수 된 자 중에, 특별히 원수 된 자라고 통보해 주고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의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자신의 의의 자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차용해서 그 역사가 묵시를 반복하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사용하십니다. 내 몸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도구로 우리가 차출 당한 겁니다. 차출 당한 것을 ‘소명(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롬8:30)” 이 대목을 보면, 마치 우리를 구원시켜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를 구원시키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활용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간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덤으로 가는 것입니다. 왕비 옆에 왕비를 보좌하는 무수리가 있어요. 우리는 무수리가 되어 주님을 따라 가는 거예요. 모세도 주님의 사환이었습니다. 무수리는 본인의 목표나 희망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몇 살까지 삽니까?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하다가는 주님께 쥐어 박힙니다. “너는 너를 위한 존재가 아닌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가?”라고. 

우리는 주님과 관련된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 수요일에 창세기 2장 ‘남자와 여자’를 설교할 예정인데, 미리 잠시 언급하면, 남자 없이는 여자가 없습니다. 여자라는 말 자체가 ‘나보다 먼저 남자가 있었음’을 말하기 위해 여자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독적으로는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여자의 존재 의미입니다. 여자분들 기분 나쁩니까? 기뻐하세요. 죄 짓기 전까지만 그래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역전되었습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 없는 남자는 없습니다. “나는 누구의 남편입니다.”라고 해야 살아요. “나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편입니다.”라고 할 때 사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남자든 여자든. 이제는 통합됩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입니다. 누구의 신부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부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 나오지요. ‘내가 지금 신랑, 신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남, 여가 결혼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허구입니다. 허구가 내용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을 지어야 하고, 이럴 경우에만 허구가 아닌 것이 됩니다. 옛날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건전지를 넣어 소리가 났는데, 건전지 약 떨어지면 소리가 안 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니라(마10:20).”고 하는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 말씀을 생각해 보니 그 때 그 당시의 ‘나’가 아니고 성령 받은 후 ‘나’에 대해서 주님이 일러 준 거예요. 왜냐? 주님의 시간은 인간들이 대비하는 시간이 아니고 이미 넘어섰어요. 

시간을 기다리고 대비하면 내가 조정할 수 있지만 시간이 넘어버리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고 나는 결과로 살뿐 원인은 주님께만 있는 겁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원인, 결과의 반대로 했지만, 저는 이것을 ‘중심 찾기’로 말하고 싶어요. 원인, 결과로 말하면 여전히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과거 00이 원인이 되어서 현재 이런 결과가 왔습니다.’ 이것은 시간성이죠. 그리고 ‘원인이 미래에 있습니다.’ 라고 해도 역시 시간성인데, 이 시간을 없애버리면 ‘중심은 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묵시적 개념입니다. 이 묵시적 개념이 시간이 흐르고 있는 역사 속으로 들어올 때는 죽음으로만 들어와요. 

그런데 아무도 죽고 싶은 사람이 없고, 십자가 지고 따라 올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혼자만의 구원이에요. 모든 구원은 예수님만의 구원이에요. 예수님 몸의 구원이에요. 그 몸에 지체로 붙어 있는 사람만 지남철에 쇳조각 붙듯이 하나로 엉키게 되고, 여기 붙은 자들이 무수리입니다. 

왕비 없는 무수리는 의미 없습니다. 이 말은, ‘내가 여기 있으매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의 소속은 어디야?”를 묻는 거예요. “마귀 소속이야, 주님 소속이야?”를 물어요. 단독적 존재가 아닌 관계입니다. 그냥 관계가 아니고 내가 주인으로 삼는 그분의 결과물이 나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언급하는데,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주님을 원망했겠습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자신의 딸은 귀신에 들렸으니까. 그런데 원망은커녕 뭐라고 합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합니다. 자신을 개라고 여긴 거지요. 이런 여인을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세례 요한을 왜 죽이는가? 죽임 당해야 해요. 왜? 그래야 이 세상이 이미 죽음이라는 중심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게 됩니다. 역사 속의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죽음입니다. 주님의 본 모습은 물 위를 걷는 것도 아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고, 설교를 멋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귤이 있고 감도 있는데, “여기에 귤과 감이 있습니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리면, 주님은 틀렸다고 하십니다. 왜요? ‘귤을 귤이라고 하고, 감을 감이라고 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십자가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입니다. 세례 요한이 목 잘려 죽을 때 “주여, 억울합니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저를 죽이십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6장 27-28절을 봅시다.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역사 가운데 세례 요한의 죽음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런데 이 죽음이 세례 요한이 죽는 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은 주님의 죽음을 반영하는 결과물이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써 역사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러면 세례 요한을 죽이는 자가 나왔지요. 헤롯, 당시의 권력자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그 권력을 인정했습니까, 부정했습니까? 인정했지요. 심지어 베드로도 그 권력이 무서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어요. 이미 권력을 인정하지요? 헤롯이 권력자인 것을 알잖아요. 권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주님은 어떤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혼자 자살해서는 안 되겠지요?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돌아가셔야 되겠지요. 

세례 요한을 죽인 그 권력에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헤롯은 뭔가? 예수님의 일을 위해 보조 역할을 하기 위해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마귀도. 

질문: 그럼 헤롯도 자기 역할을 하고 죽어서 지옥 가나요? 
답변: 그렇지요. 세례 요한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는 일을 하고 지옥 가는 거지요. 
질문: 그러면 진리라는 큰 시나리오 안에서 각자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지옥 갈 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요? 
답변: 그럼요. 언약의 속성 중에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습니다. 
질문: 그럼 축복과 저주 중에서 하나님이 자기 원대로 주시는 건가요? 
답변: 정답입니다. 

질문: 그러면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잖아요? 
답변: 그러니까 안 믿어야 되는 거예요. 
질문: 안 믿어야 돼요? 
답변: 안 믿어야 되는데 인간은 계속 믿죠. 왜냐? 본인이 본인을 관리하고 싶은 속성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내가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즉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거기에서 자신이 납득이 되는 믿음을 끄집어내니까 한심한 거지요. 

질문: 그러면 지금 세상의 많은 종교들 중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구원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답변: 종교라고 하지 말로 문화라고 생각하세요. 문화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인간의 행위로 구성되어 있어요. 
질문: 세상은 종교로 구분을 해 놓았잖아요. 
답변: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지요.  

질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가 이것이 종교 중 하나라고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잖아요. 
답변: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예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참 진리라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오히려 구원에 가까운가요? 
답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구원에 가깝다는 것은 없어요. 왜냐? 구원은 인간에게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질문: 그러면 다 지옥에 가야 하나요? 
답변: 당연하지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할 때는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추방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아까 질문하실 때 ‘인간’이란 말을 하셨는데, 우리가 ‘인간’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해야 됩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으로 났어요. 

질문: 그러면 하나님은 어차피 죽어 지옥 보낼 인간들을 왜 태어나게 하셨어요? 
답변: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지요.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님과 상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지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바로 죽었습니까? 아니지요.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고 930년을 향수하고 죽었어요. 

아담이 몇 년을 살겠다는 목표가 있었습니까? 없지요. 자식 몇 명 낳겠다는 목표가 있었습니까? 없지요. 그냥 주께서 죽일 인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죽였어요. 그리고 활용한 그 후손이 저와 질문하시는 분입니다. 

질문: 그럼 우리는 어차피 죄인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면 구원과도 상관이 없나요? 
답변: 없지요. 
질문: 만약 그것을 아는 순간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고 힘들기만 하기에 지금 죽어버려도 상관없나요? 
답변: 그것을 진작 알아야지요. 사실은 태어날 때부터 알아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거예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베들레헴 주변에 2살 이하의 아이들이 다 죽임 당했어요. 그들이 2년 살고 죽으나 90년을 더 살고 죽으나 죽으면 살아온 것이 전부 무효가 됩니다. 거기에서 ‘나는 예수 믿었다.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질문: 그러면 힘든 세상 왜 삽니까? 
답변: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려 주시니까 사는 거예요. 
질문: 그러면 내가 선택해서 죽어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답변: 죽을 힘을 주셔야 죽을 수 있어요. 자살도 자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 감이 있는데 저는 감 있는 줄 몰랐어요. 이것도 내 뜻이 아니에요. 내 키가 작아서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도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내 발걸음을 내가 헤아릴 수 없어요.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밤에 잠이 들기 전에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해야지.’ 생각하고 잠을 잤어도 잠이 들면 끝입니다. 하나의 물체가 됩니다. 잠든 중에도 계속 심장이 뛰게 하시고, 아침에 눈을 뜨게 하셔야 살아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지요. 

질문: 그러면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우리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답변: 그게 바로 소급입니다. 그동안 자신은 예쁘게 미화시킨 겁니다. 자신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흙이 되기 전에 주께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흙 아닌 인간처럼 살게 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마치 그 약속을 단독적으로 내가 관리한다고 오해하게 된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물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질문: 그럼 그 오해를 다 풀고 제대로 이해하고 죽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답변: 아무도 없어요. 오해를 풀면 안 됩니다. 
질문: 그러면 내가 풀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답변: 풀려 한다는 말은, 내가 나 바깥으로 나가야 ‘이건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그러니까 풀겠다는 자체가 또 하나의 착각을 만든 겁니다. 

질문: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변: 주께서 은혜 주시는 대로 살면 됩니다. 
질문: 주께서 주신 은혜인지, 아니면 내 생각인지 어떻게 구분하지요? 
답변: 그건 남에게 물을 필요 없어요. 본인이 알아요.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알게 하신다.’ 요한1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에게 확인받고 인정받으려 할 필요도 없어요. 

질문: 저는 아직 모르겠는데, 아직 성령이 작용하지 않아서 모르는 거예요? 
답변: 모르겠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알고 모르고를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본인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자신을 판단의 위치에 세우게 되면 두 개의 자아가 됩니다. 내가 나를 판단할 자격도 없으면서 판단하는 나와 판단 받는 나가 생깁니다. 이 자체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 본인이 판단하면 안 돼요. 

질문: 주님의 판단인지 내 판단인지 본인이 알 수 있다는 말인가요? 
답변: 자기만 알 수 있지요. 
질문: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답변: 모르겠다는 말은 저에게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르겠다고 할 때는 반드시 다른 것은 안다는 말인데, 그 아는 기준을 본인이 세울 수 없는데 왜 본인이 세웁니까? ‘이건 알고, 이건 모르겠다.’는 말은 아는 부분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안다는 것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모르는 것에 포함되어 있어요.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주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이것을 뒤늦게 안다고 더 살려주고 모른다고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그러면 성경 공부는 왜 하는 거예요? 
답변: 주께서 하게 하셔서 하는 거예요. 마치 내가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살게 하시는 것이 주의 뜻인 것처럼 하게 하신 거예요. 

지금의 대화를 분석해 보세요. 저는 원인을 주님께 두잖아요. 그런데 질문하시는 분은 내가 어느 정도는 알고, 또 약간은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해요. 본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제가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니까요. 소위 성령 받았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두 가지를 다 알아요. 내가 시작하는 경우와 그리고 내가 시작하는 이것조차 주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 둘 다를 알고 있어요. “나는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시면,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이것에만 관심을 두면 됩니다. 내 것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질문하신 것들은 전혀 궁금해 할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주께서 지금 어떻게 일하십니까?’ 이것을 궁금해 해야 합니다. 

“성도님은 주님이 살아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회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잘 못 했네요. “최초에 인간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인간은 우주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방금 질문하신 분이 말씀하신 그 ‘하나님’입니다. 영어로 하면 nature. 한자로 하면 自然(자연).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자연은 자연적으로 있다.’고 합니다. 

방금 본인이 이야기했으니까 그것은 믿습니까? ‘자연은 스스로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태어나보이 모든 것이 있었으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후에 있었던 간에 나보다 먼저 있는 것이 있지요? 그러면 문제가 간단해 졌어요. 자연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요? 그럼 나의 의미란 없습니다. 

자연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이 죽으라고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살고. 그러면 나 나름의 의미나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반역이고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럼 본인은 지금 죄인이기 때문에 자연이 죽으라고 하면 이유도 물을 필요 없이 죽어야 돼요. 자살해서 빨리 죽어야 하나? 빨리 죽든 늦게 죽든 시간은 의미 없어요. 물에 빠져 죽을까, 번개탄을 피워 죽을까? 관계없어요. 어쨌든 죽으면 자연으로 흡수되지요. 

문제는 이것이 정답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제가 강요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이렇게 되면 아까 하신 말씀처럼 나의 사는 의미, 행위의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질문: 의미가 없더라도 힘들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답변: 힘든 것도 자연이 주는 것인데요. 윗사람이 힘들게 살라고 하면 힘들게 살아야지 별 수 있나요? 부분이 왜 전체에 대해 반항하지요? 
질문: 반항하면 안 되나요? 
답변: 반항하세요. 그런다고 해서 자연이 겁을 냅니까? 
질문: 사는 것이 힘드니까 반항이라도 하고 싶어요. 
답변:  반항하고 싶은데, 아무리 반항해도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반항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나는 자연에 복속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잖아요. 자꾸 정리를 안 하려고 하시는데, 제가 정리하라고 도와드리는 거예요. ‘반항을 하든 뭘 하든 그것은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해답이 나왔지요? 

‘반항을 하든지 자살을 하든지 이것도 자연의 일부다.’ 이것을 성도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세례 요한이 왜 죽었는가? 자연을 만드신 분이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요한이 죽은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세상을 만드신 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펼쳐진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누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 (IP:175.♡.38.142)15-12-17 09:19 
광주 강의(2015. 11. 27) 21-2 

헤롯에게 중심이 있습니까? 없지요. 본인이 중심이니까. 본인이 왕이고 백성들은 자기 밑에 있습니다. 즉 자신은 ‘갑’이고 백성을 ‘을’인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까불면 죽이면 돼요. 

마가복음 6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이미 죽었어요. 14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헤롯은 자신이 제 발에 저려서, ‘내가 죽였는데 이 인간이 다시 살아났구나. 이제 어떻게 하지?’ 하면서 두려워 떨어요. 공포에 사로잡힌 거예요. 

헤롯의 지위가 뭡니까? 왕입니다. 최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공포에 질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보다 높은 사람은 없어요.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자신을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러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죽은 자가 ‘갑’이 되고 죽인 자는 ‘을’이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묵시는 죽은 자의 반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생은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어요. 성도는 이것을 압니다.  

‘중심 찾기’인데 30절을 보면, 헤롯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이쪽은 헤롯이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동그라미 말고 이쪽 동그라미에는 예수님 곁에 5,000명이 있지요. 예수님 곁에 있는 5,000명은 어떤 공포가 있는가? 생존의 공포입니다. 몸의 공포지요. 

몸에는 욕구가 있고, 욕구는 자아가 다스릴 수 없지요. 자아 마음대로 안 되는 ‘갑’이 내 몸입니다. 자아가 ‘을’이고 몸이 ‘갑’입니다. 길에 여인이 지나갑니다. 내가 ‘참 예쁘다.’고 하니까, 함께 가는 친구는 ‘저 사람이 뭐가 예뻐?’ 안 예쁘다는 거예요. 그러나 나에게 예쁘게 보이면 예쁜 거예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결혼 60주년 파티 자리에서 “내 생애에서 잘 선택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내 아내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이 말은 순전히 영업용 멘트일 뿐입니다. 어떤 남자도 진심으로 자기 아내 선택한 것을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남자는 더 예쁜 여자에게 마음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고 몸의 욕구가 그래요. 

우리 모두는 아담의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몸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의 아내와 사는가? 형편이 안 되어서 그래요. 솔로몬은 본처가 300명, 첩이 700명 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가? 형편이 되니까. 이슬람 국가는 법적으로 아내 4명까지 둘 수 있어요. 그런데 아내 4명을 둔 남자가 별로 없어요. 왜? 아내가 많으면 집안이 시끄러워 살기 힘들이요. 그래서 형편에 따라 사는 거예요. 

인간의 윤리, 도덕은 자기변명을 위해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윤리, 도덕으로 뒤덮어도 그것을 뚫고 나옵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메시아가 와도 인간은 배고픔에 마음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공포는 배고픔이고, 헤롯왕의 공포는 정신적인 것인데 해결될 수 없는 공포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배가 고픈데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너희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고 물으니까 제자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라고 했어요. 

5,000명이 있는데, 그들이 가진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뿐입니다. 이것으로 5,000명이 다 먹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왜 불가능합니까? 그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왔습니다. 한 사람이 최소한 라면 1봉지는 먹어야 배고픔을 면할 수 있어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는 겨우 1인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경험상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누가 구성한 것입니까? 본인이 구성했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진리라고 우깁니다. 왜? 인간은 본인 체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라도 아줌마와 후포 아줌마가 시합이 붙었어요. 어느 쪽 미역이 더 맛이 있는가? 마라도 아줌마가 “이 지역 미역 맛은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라고 하니까, 후포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이 지역 미역 안 먹어봤으면 말하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후포 아줌마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이긴 것이 아니라 바보에요. 그분의 말은 “나는 내 경험 밖에 모릅니다.”라는 말이에요. 

‘내 몸은 최소한 떡 10개는 먹어야 배가 부르다.’는 것은 그동안의 자기 경험에 따른 진리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그것을 탓하지 않고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평소에 하던 행세를 그대로 가져 오라는 겁니다. 

신이 어떻고, 삼위일체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평소에 네가 식사할 때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그대로 가져와.’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는 1인분 식사지요. 그럼 이것을 어떻게 먹이는가? 한 사람만 먹이면 돼요. 5,000명 먹일 필요 없어요. 이걸 누가 먹습니까? 주님이 먹습니다. 

‘너희들의 몸은 죽을 몸이다.’ 우리는 부서질 흙덩이를 쥐고 있는 거예요. 내 몸만 지키면 된다고. 주님이 왜 인간세계에 침투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허수아비 붙들고 내 몸이라고 우기는 착각을 일거에 제거하십니다. “너는 그동안 그림자를 붙들고 살았다. 헛된 몸 붙들고 살았어.” 

매일 밥 먹이고 떡 먹여봐야 85세 살다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살면서 별 요란을 다 떨어도 결국은 죽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혼자 가요. 어떤 몸도 몸 아니에요. 흙덩어리를 쥐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몸만 진짜 몸입니다. 

1인분 도시락을 가지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지요. “아버지여, 이 몸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기대했던 몸인 것을 이들에게 알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떡은 그냥 떡이 아니고 예수님 몸을 통과해서 나눠줍니다. ‘이것은 바로 내 떡이다. 너의 떡이 아니고 나의 떡이다. 내가 준 떡을 네가 먹는다. 내가 준 고기를 네가 먹는다. 이 의미를 알면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의 지체가 되고, 의미를 모르면 네가 네 몸이라고 여겼던 그 몸으로 살다 죽을 것이다.’하고 떡을 나눠 주지요. 

사람들은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몸의 주인공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자기 몸이 자기의 주인공이라고 여전히 착각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겠지요. 그러면 주께서 호출하실 때 다 호출 당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주님을 몰라보지요. 

그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았습니까? 역시 몰랐지요.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모독적인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도 가지 왜 머물러 있느냐?”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어요.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이야기했지요. 맞는 이야기입니까, 틀린 이야기입니까? 틀린 이야기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는데 누구에게 가라는 말입니까?’라고 할 때, 가고 말고의 선택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런 말을 한 본인이지요. 예수님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분이기에 본인이 결정해서 안 가겠다는 거예요. 주체가 잘못 된 거예요. 주님이 정답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는 자신이 믿는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예수님께 왔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체를 물어요. 이 때 베드로의 답변은 “주님이 아시잖아요.” 이 말의 의미는 ‘제가 답변할 입장이 못 됩니다.’라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일에 실패하겠지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의 공로자지요. 공로자인데 지옥에 갔어요. 공로자가 왜 지옥 갑니까? 예수님 말씀은 “너는 네 갈 길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무화과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시장해서 열매를 먹기 원했는데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있어요. ‘무화과나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때가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 주님이 저주를 했단 말이지요. 

저주 받을 짓을 무화과나무가 했습니까? 안했지요. 그게 저주에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한 사람은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한 사람은 저주받기로 되어 있어요. 뒤늦게 등장한 허구적인 자아가 하나님의 선택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없지요. 이 말은 ‘몸은 너의 것이 아니고 나(주)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그 후에 자아가 있으니까 이놈의 자아는 ‘나는 행복하게 살아야 해. 죽으면 천국 가야 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종교, 혹은 문화입니다. 모든 종교의 특징은 ‘나 잘 되기’입니다. 믿음으로 하든지 행함으로 하든지 포인트는 내가 믿어서 내가 잘 되는 것입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가릴 것 없이 모두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오락입니다. 취미생활이지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내 몸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아셨고, 주님께서 주신 몸이 어떤 시점에 태어나게 하셨고, 정한 코스대로 가면서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뒤돌아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고백 이전에 통보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으로 통보해 주시면 그 때 알게 됩니다. 5,000명이 떡을 먹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습니다. 이게 오늘 공부의 핵심입니다. 

47-49절을 보겠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령이 뭡니까? 유령은 인간의 아이디어입니다. 유령은 어느 세계에 살고 있습니까? 인간의 몸이 사는 곳이 아닌 그 바깥의 세계에 유령이 살지요. 따라서 유령은 없습니다. 유령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없는 거예요. 

하여튼 인간들이 진리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인간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언어나 개념은 소통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소통은 왜 하는가? 결합하기 위함입니다. 왜 결합해야 하는가? 혼자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혼자는 못 살아요.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남편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던 부인이 애완견이 죽었을 때 통곡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편은 살아 있을 때 겉돌았어요. 그런데 개는 자기 말을 들었어요. 그러면 개는 누구 소속입니까?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었지요.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개는 내가 키웠고, 개는 나를 닮았어요. 왜냐? 나는 눈만 뜨면 자아만 생각하는데 개는 나의 대체물입니다. 그래서 누가 개를 발로 차면 용서가 안 돼요. 남자들한테 용서 안 되는 일은 자기 차를 발로 차면 용서가 안 돼요. 남자에게 차는 종교입니다. 여자는 핸드백이 종교고.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외로워서 죽어요. 외롭다는 것은 사귀자는 말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내 말을 들어 줄 사람, 나를 인정해주고 긍정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일 적당한 상대가 애완견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반갑다고 꼬리치며 반기는 개. 

남편에게 실망하면 개를 키우고, 결혼 못한 노처녀도 개나 고양이를 키웁니다. 내가 아는 어떤 처녀는 고양이 6마리 키웁니다. 주위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본인은 자기 가족입니다. 고양이와 자신은 소통이 됩니다. 언어는 소통이고, 소통은 외로움을 달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인간 중 진짜로 사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야기하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이해했다고 단정해요. 대표적인 경우가 부부 사이의 대화지요. “이 영화 재미있지?” “재미있네.” 둘 다 뜻이 달라요.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서로 사랑의 의미가 달라요.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내뱉은 의미는 자신에게 회수됩니다. 

인간은 모두 자폐증 환자입니다. 자기에게 갇혀 살아요. 자기 굴레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게 뭔가? ‘유령인가?’ 세상을 너무 좁게 봤다는 겁니다. 그럼 세상은 어떻게 만드는가? 내 몸에서 욕구가 나옵니다. 욕구를 자아가 욕망으로 바꾸면서 욕망을 자재해요. 여기에서 윤리, 도덕이 나옵니다.  

윤리, 도덕은 누구에게 배웠어요? 살면서 부모에게 배우고,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우고, 교회 가서 목사에게 배웠지요. 그러면 이 욕구와 욕망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들어있어요. 들어 있다가 언제 나오는가 하면, 술을 마실 때, 담배를 피울 때, 노래방에 갔을 때, 성질 날 때 나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다고--.’ 윤리, 도덕이 있고 양심이 있으니까.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하면서 터뜨리지요. 참을 때는 술로 달래면서 참아요. 

결국 인간의 욕구,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욕구와 욕망을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서 시간, 공간 요소가 첨가됩니다. 그러면 나의 과거가 뭉쳐진 것이 현재고, 나의 희망이 미래가 되는 겁니다. 공간은 옛날 내가 어느 동네에 살았는데 --.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일본과 야구 시합을 해서 한국이 이기니까 기분이 좋지요? 왜냐? 내가 대한민국 소속이니까 그래요. 

이것을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찌그러질 때 어떻게 방비를 하는가? 인간의 자아는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착한 마음, 착한 행동, 바른 말씨. 불교에서는 팔정도. 이런 착함을 모으면 불운이 물러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위해 ‘천도제’를 지냅니다. 

“이 집안에 액운이 끼어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지요? 조상님의 원기를 달래기 위해 큰 제사를 한 번 치러야 합니다. 2,000만원 정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소리 듣고 천도제를 지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너무 큰돈이 드니까. 대신 교회에 가서 1만원 정도 헌금하고 기도합니다. 왜냐? 비용이 훨씬 절감되니까요. 그래서 교회에 사람이 모입니다. 

천도제 드리는 것보다는 교회 가서 좋은 말씀 듣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왜 착하게 살려고 할까요? 내 세계가 붕괴되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지금의 내 현실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려고. 그리고 보다 더 발전되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 때는 굿을 하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제자들이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한 것은 반가움의 표시인가요, 아니면 불안해서 하는 말인가요? 공포지요. 결국 인간의 구원은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의 말씀처럼. 그래서 내가 나를 지키면 안 되고, ‘나는 저주 받아도 합당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살아온 것은 하나님이 주선 선물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화로다. 당하게 되었구나. 나는 망하는 백성 중 일원인 것을 왜 이제야 알았는가?” 처음부터 망하도록 태어난 것을 왜 이제야 알았는가?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00 집사님이 늘 퇴근이 늦어서 좀 늦게 공부에 참석하셨는데, 오늘은 일찍 퇴근하셔서 늦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가 묻기를 “집사님, 웬일이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만약 집사님이 직장에서 쫓겨나 집에 계신다면, 직장에서 일하고 좀 늦게 성경공부에 참석한 집사님은 어디 갔습니까? 없어요. 그럼 둘 중 어느 것이 집사님 모습입니까? 

나를 규정짓지 마세요. 그때그때 달라요. 내용을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안 쫓겨나면 늦게 퇴근해야 되고, 은퇴하시면 집에서 쉬면 됩니다. 나의 자아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만드시는데, 상황에 따라서 나에게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물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했지요. 제자들의 남은 과제가 뭔가? 그 유령마저도 무서워하지 않는 제 2의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귀신이라도 무서워하지 않는 제 2의 자아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변화된 예수님을 보고 무서워서 엎드렸지요. 

내가 있는 현실을 주님이 만든 현실로 교체를 하면 돼요. 이 교체는 내 몫이 아니고 이미 교체되었음을 뒤늦게 파악하면 돼요. 전에는 본인의 현실이 전부라면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현실로 바뀔 용의는 없습니까? 지금도 멀리 계시는데, 만약 미국으로 가신다면 섭섭합니까, 아니면 맨 예수 안에 계시는 겁니까? 역시 예수 안에 있지요. 

내가 여기 있다 저기로 이동한다는 것이 별 의미 없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해서 ‘어떻게 살까?’ 걱정하는데, 의미 없습니다. 공간상 의미 없지요. 그러면 지금 나이가 38세라고 합시다. 나중에 88세가 되었습니다.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왜? 나의 시간, 나의 공간으로 형성된 현실관은 의미 없어요. 

아들이 실습 나갔어요? 그러면 ‘아들이 실습을 나가서 뭔가를 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께서 실습을 현장에서 시킨 거예요. 항상 주체를 주님으로 보시고 그 결과물이 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이 이제 실습을 하는구나. 대견하다.’ 이렇게 보지 말고, ‘주께서 실습을 시키는구나.’ 모든 시작과 주체를 주님께 옮기면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의 현실이 아니고 주님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밤 사경(새벽 3시)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3시가 되든 2시가 되든 주님이 계시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가복음 6장 49-50절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두려워했겠습니까, 안 두려워했겠습니까? 두려워 안 했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유령이라는 이미지가 그 순간 없어졌지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유령이라면 겁이 난다. 그런데 유령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됩니다. 

앞으로 이렇게 살면 안 돼요. 유령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안심을 해야 돼요. 유령이 무섭다는 것은 이들이 아직 죽음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이 나오기 전이기 때문에 아직은 유령을 겁냈던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를 구원할 때는 감당 못할 일을 강제로 거치게 합니다. 왜냐? 감당할 일을 하게 되면 예전의 내 모습을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뭉개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내가 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오셨는데 이것이 예수님 평소에 늘 하신 일입니까? 사람은 물위를 못 걷는다는 선입견이 인간들이 만든 현실입니다. 어떤 인간도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이유는 뭡니까? 역사 속에 묵시가 삽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는 분이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인 줄 알고 두려움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어요. 베드로도 한 번 물위를 걸은 적이 있어요. 그 후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재주가 생긴 것입니까? 아니지요. 물위를 걷는 순간에도 베드로에게는 물위를 걷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질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계실 때 살아 있었지요. 그럼 베드로에게 자신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베드로는 그것 만큼은 있다고 여겨 예수님 잡힐 때 본인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그 옛날 버릇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세 번 부인했지요. 이게 평소에 하던 버릇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이것이 안 바뀝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면 남들은 다 손가락질해도 유일하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이런 인간의 끝은 주님과의 완전한 이별입니다. 이것이 인간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인간 속에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질문: 아담 때문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부터입니까? 

답변: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아담 자체로는 가치가 없고 창조주가 아담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조주가 아담을 다룰 때 아담 안에 스며드는 것이 있어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담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투석’ 알지요? 피를 바꾸는 거지요. 새로운 피로 바꿔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는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 받는 몸으로 태어났는데 영생 받는 몸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질문: 하나님은 본인을 증거하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셨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했어요. 여호와지요. ‘하나님’이란 말보다 ‘하나님들’이란 표현이 적당해요. 주님은 아들을 보고 기뻐하고 아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고.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어요. 그러면 인간 이전에 ‘우리’가 있었지요. ‘우리’가 있고 ‘우리’의 반영물로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위를 찾아갈 수가 없어요. 반대로 하나님이 찾아와 줄 때 뒤늦게 알아요. ‘아, 내가 찾아가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를 발견합니다. 
질문: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만든 것입니까? 
답변: 그렇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은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질문: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심하시겠습니다. 
답변: ‘심심하다’는 말은 심심하지 않은 경우를 상정할 때 성립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이 개념을 확대시켜서 하나님도 아마 우리와 유사할 것이라고 짐작을 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나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입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 말이 맞아요. 신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신을 몰라요. 그래서 ‘신은 저절로 생겼다.’고 하지요. 이것이 불교입니다. ‘저절로’는 ‘자연(自然)’이죠. ‘저절로’의 끝은 뭔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모르겠다.”는 것이 그들의 답입니다. 

그런데 ‘모르겠다’는 것이 잘못된 말입니다. ‘모르겠다’고 하면 ‘아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이 판단이 옳은 것인지는 누구 판정하는가?’ 그 때 인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요. ‘맞다’ 혹은 ‘틀렸다’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가, 아니면 다른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이 물음에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 모든 것의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나’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이 자아실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데카르트는 여기에 실망을 했습니다. 이런 ‘나’가 죽는다면? 해답 없음. 절대적인 ‘나’가 죽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묵묵부답. 하나님도 내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지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잖아요. 그래서 성경이 너무도 고마운 말씀이에요. 

다들 무식해서 모르는데 성경 말씀을 주시니까 ‘아,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셨구나.’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을 통해서 하신 일을 우리가 알아보니 새삼스럽게 우리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면서 살았는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 죄인의 죄를 씻기 위해서 흘리신 그 피가 정말 진리인 것을 다시 한 번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