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11. 27) 21-2
헤롯에게 중심이 있습니까? 없지요. 본인이 중심이니까. 본인이 왕이고 백성들은 자기 밑에 있습니다. 즉 자신은 ‘갑’이고 백성을 ‘을’인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까불면 죽이면 돼요.
마가복음 6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이미 죽었어요. 14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헤롯은 자신이 제 발에 저려서, ‘내가 죽였는데 이 인간이 다시 살아났구나. 이제 어떻게 하지?’ 하면서 두려워 떨어요. 공포에 사로잡힌 거예요.
헤롯의 지위가 뭡니까? 왕입니다. 최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공포에 질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보다 높은 사람은 없어요.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자신을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러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죽은 자가 ‘갑’이 되고 죽인 자는 ‘을’이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묵시는 죽은 자의 반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생은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어요. 성도는 이것을 압니다.
‘중심 찾기’인데 30절을 보면, 헤롯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이쪽은 헤롯이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동그라미 말고 이쪽 동그라미에는 예수님 곁에 5,000명이 있지요. 예수님 곁에 있는 5,000명은 어떤 공포가 있는가? 생존의 공포입니다. 몸의 공포지요.
몸에는 욕구가 있고, 욕구는 자아가 다스릴 수 없지요. 자아 마음대로 안 되는 ‘갑’이 내 몸입니다. 자아가 ‘을’이고 몸이 ‘갑’입니다. 길에 여인이 지나갑니다. 내가 ‘참 예쁘다.’고 하니까, 함께 가는 친구는 ‘저 사람이 뭐가 예뻐?’ 안 예쁘다는 거예요. 그러나 나에게 예쁘게 보이면 예쁜 거예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결혼 60주년 파티 자리에서 “내 생애에서 잘 선택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내 아내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이 말은 순전히 영업용 멘트일 뿐입니다. 어떤 남자도 진심으로 자기 아내 선택한 것을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남자는 더 예쁜 여자에게 마음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고 몸의 욕구가 그래요.
우리 모두는 아담의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몸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의 아내와 사는가? 형편이 안 되어서 그래요. 솔로몬은 본처가 300명, 첩이 700명 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가? 형편이 되니까. 이슬람 국가는 법적으로 아내 4명까지 둘 수 있어요. 그런데 아내 4명을 둔 남자가 별로 없어요. 왜? 아내가 많으면 집안이 시끄러워 살기 힘들이요. 그래서 형편에 따라 사는 거예요.
인간의 윤리, 도덕은 자기변명을 위해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윤리, 도덕으로 뒤덮어도 그것을 뚫고 나옵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메시아가 와도 인간은 배고픔에 마음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공포는 배고픔이고, 헤롯왕의 공포는 정신적인 것인데 해결될 수 없는 공포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배가 고픈데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너희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고 물으니까 제자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라고 했어요.
5,000명이 있는데, 그들이 가진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뿐입니다. 이것으로 5,000명이 다 먹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왜 불가능합니까? 그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왔습니다. 한 사람이 최소한 라면 1봉지는 먹어야 배고픔을 면할 수 있어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는 겨우 1인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경험상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누가 구성한 것입니까? 본인이 구성했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진리라고 우깁니다. 왜? 인간은 본인 체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라도 아줌마와 후포 아줌마가 시합이 붙었어요. 어느 쪽 미역이 더 맛이 있는가? 마라도 아줌마가 “이 지역 미역 맛은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라고 하니까, 후포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이 지역 미역 안 먹어봤으면 말하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후포 아줌마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이긴 것이 아니라 바보에요. 그분의 말은 “나는 내 경험 밖에 모릅니다.”라는 말이에요.
‘내 몸은 최소한 떡 10개는 먹어야 배가 부르다.’는 것은 그동안의 자기 경험에 따른 진리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그것을 탓하지 않고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평소에 하던 행세를 그대로 가져 오라는 겁니다.
신이 어떻고, 삼위일체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평소에 네가 식사할 때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그대로 가져와.’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는 1인분 식사지요. 그럼 이것을 어떻게 먹이는가? 한 사람만 먹이면 돼요. 5,000명 먹일 필요 없어요. 이걸 누가 먹습니까? 주님이 먹습니다.
‘너희들의 몸은 죽을 몸이다.’ 우리는 부서질 흙덩이를 쥐고 있는 거예요. 내 몸만 지키면 된다고. 주님이 왜 인간세계에 침투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허수아비 붙들고 내 몸이라고 우기는 착각을 일거에 제거하십니다. “너는 그동안 그림자를 붙들고 살았다. 헛된 몸 붙들고 살았어.”
매일 밥 먹이고 떡 먹여봐야 85세 살다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살면서 별 요란을 다 떨어도 결국은 죽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혼자 가요. 어떤 몸도 몸 아니에요. 흙덩어리를 쥐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몸만 진짜 몸입니다.
1인분 도시락을 가지고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지요. “아버지여, 이 몸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기대했던 몸인 것을 이들에게 알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떡은 그냥 떡이 아니고 예수님 몸을 통과해서 나눠줍니다. ‘이것은 바로 내 떡이다. 너의 떡이 아니고 나의 떡이다. 내가 준 떡을 네가 먹는다. 내가 준 고기를 네가 먹는다. 이 의미를 알면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의 지체가 되고, 의미를 모르면 네가 네 몸이라고 여겼던 그 몸으로 살다 죽을 것이다.’하고 떡을 나눠 주지요.
사람들은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몸의 주인공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자기 몸이 자기의 주인공이라고 여전히 착각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겠지요. 그러면 주께서 호출하실 때 다 호출 당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주님을 몰라보지요.
그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았습니까? 역시 몰랐지요.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모독적인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도 가지 왜 머물러 있느냐?”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어요.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이야기했지요. 맞는 이야기입니까, 틀린 이야기입니까? 틀린 이야기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는데 누구에게 가라는 말입니까?’라고 할 때, 가고 말고의 선택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런 말을 한 본인이지요. 예수님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분이기에 본인이 결정해서 안 가겠다는 거예요. 주체가 잘못 된 거예요. 주님이 정답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는 자신이 믿는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예수님께 왔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체를 물어요. 이 때 베드로의 답변은 “주님이 아시잖아요.” 이 말의 의미는 ‘제가 답변할 입장이 못 됩니다.’라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일에 실패하겠지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의 공로자지요. 공로자인데 지옥에 갔어요. 공로자가 왜 지옥 갑니까? 예수님 말씀은 “너는 네 갈 길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무화과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시장해서 열매를 먹기 원했는데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있어요. ‘무화과나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때가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 주님이 저주를 했단 말이지요.
저주 받을 짓을 무화과나무가 했습니까? 안했지요. 그게 저주에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한 사람은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한 사람은 저주받기로 되어 있어요. 뒤늦게 등장한 허구적인 자아가 하나님의 선택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없지요. 이 말은 ‘몸은 너의 것이 아니고 나(주)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그 후에 자아가 있으니까 이놈의 자아는 ‘나는 행복하게 살아야 해. 죽으면 천국 가야 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종교, 혹은 문화입니다. 모든 종교의 특징은 ‘나 잘 되기’입니다. 믿음으로 하든지 행함으로 하든지 포인트는 내가 믿어서 내가 잘 되는 것입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가릴 것 없이 모두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오락입니다. 취미생활이지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내 몸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아셨고, 주님께서 주신 몸이 어떤 시점에 태어나게 하셨고, 정한 코스대로 가면서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뒤돌아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고백 이전에 통보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으로 통보해 주시면 그 때 알게 됩니다. 5,000명이 떡을 먹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습니다. 이게 오늘 공부의 핵심입니다.
47-49절을 보겠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령이 뭡니까? 유령은 인간의 아이디어입니다. 유령은 어느 세계에 살고 있습니까? 인간의 몸이 사는 곳이 아닌 그 바깥의 세계에 유령이 살지요. 따라서 유령은 없습니다. 유령은 인간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없는 거예요.
하여튼 인간들이 진리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인간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언어나 개념은 소통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소통은 왜 하는가? 결합하기 위함입니다. 왜 결합해야 하는가? 혼자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혼자는 못 살아요.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남편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던 부인이 애완견이 죽었을 때 통곡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편은 살아 있을 때 겉돌았어요. 그런데 개는 자기 말을 들었어요. 그러면 개는 누구 소속입니까?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었지요.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개는 내가 키웠고, 개는 나를 닮았어요. 왜냐? 나는 눈만 뜨면 자아만 생각하는데 개는 나의 대체물입니다. 그래서 누가 개를 발로 차면 용서가 안 돼요. 남자들한테 용서 안 되는 일은 자기 차를 발로 차면 용서가 안 돼요. 남자에게 차는 종교입니다. 여자는 핸드백이 종교고.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외로워서 죽어요. 외롭다는 것은 사귀자는 말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내 말을 들어 줄 사람, 나를 인정해주고 긍정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일 적당한 상대가 애완견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반갑다고 꼬리치며 반기는 개.
남편에게 실망하면 개를 키우고, 결혼 못한 노처녀도 개나 고양이를 키웁니다. 내가 아는 어떤 처녀는 고양이 6마리 키웁니다. 주위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본인은 자기 가족입니다. 고양이와 자신은 소통이 됩니다. 언어는 소통이고, 소통은 외로움을 달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인간 중 진짜로 사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야기하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이해했다고 단정해요. 대표적인 경우가 부부 사이의 대화지요. “이 영화 재미있지?” “재미있네.” 둘 다 뜻이 달라요.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서로 사랑의 의미가 달라요.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내뱉은 의미는 자신에게 회수됩니다.
인간은 모두 자폐증 환자입니다. 자기에게 갇혀 살아요. 자기 굴레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게 뭔가? ‘유령인가?’ 세상을 너무 좁게 봤다는 겁니다. 그럼 세상은 어떻게 만드는가? 내 몸에서 욕구가 나옵니다. 욕구를 자아가 욕망으로 바꾸면서 욕망을 자재해요. 여기에서 윤리, 도덕이 나옵니다.
윤리, 도덕은 누구에게 배웠어요? 살면서 부모에게 배우고,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우고, 교회 가서 목사에게 배웠지요. 그러면 이 욕구와 욕망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들어있어요. 들어 있다가 언제 나오는가 하면, 술을 마실 때, 담배를 피울 때, 노래방에 갔을 때, 성질 날 때 나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다고--.’ 윤리, 도덕이 있고 양심이 있으니까.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하면서 터뜨리지요. 참을 때는 술로 달래면서 참아요.
결국 인간의 욕구,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욕구와 욕망을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서 시간, 공간 요소가 첨가됩니다. 그러면 나의 과거가 뭉쳐진 것이 현재고, 나의 희망이 미래가 되는 겁니다. 공간은 옛날 내가 어느 동네에 살았는데 --.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일본과 야구 시합을 해서 한국이 이기니까 기분이 좋지요? 왜냐? 내가 대한민국 소속이니까 그래요.
이것을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찌그러질 때 어떻게 방비를 하는가? 인간의 자아는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착한 마음, 착한 행동, 바른 말씨. 불교에서는 팔정도. 이런 착함을 모으면 불운이 물러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위해 ‘천도제’를 지냅니다.
“이 집안에 액운이 끼어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지요? 조상님의 원기를 달래기 위해 큰 제사를 한 번 치러야 합니다. 2,000만원 정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소리 듣고 천도제를 지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너무 큰돈이 드니까. 대신 교회에 가서 1만원 정도 헌금하고 기도합니다. 왜냐? 비용이 훨씬 절감되니까요. 그래서 교회에 사람이 모입니다.
천도제 드리는 것보다는 교회 가서 좋은 말씀 듣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왜 착하게 살려고 할까요? 내 세계가 붕괴되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지금의 내 현실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려고. 그리고 보다 더 발전되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 때는 굿을 하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제자들이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한 것은 반가움의 표시인가요, 아니면 불안해서 하는 말인가요? 공포지요. 결국 인간의 구원은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의 말씀처럼. 그래서 내가 나를 지키면 안 되고, ‘나는 저주 받아도 합당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살아온 것은 하나님이 주선 선물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화로다. 당하게 되었구나. 나는 망하는 백성 중 일원인 것을 왜 이제야 알았는가?” 처음부터 망하도록 태어난 것을 왜 이제야 알았는가?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00 집사님이 늘 퇴근이 늦어서 좀 늦게 공부에 참석하셨는데, 오늘은 일찍 퇴근하셔서 늦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가 묻기를 “집사님, 웬일이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만약 집사님이 직장에서 쫓겨나 집에 계신다면, 직장에서 일하고 좀 늦게 성경공부에 참석한 집사님은 어디 갔습니까? 없어요. 그럼 둘 중 어느 것이 집사님 모습입니까?
나를 규정짓지 마세요. 그때그때 달라요. 내용을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안 쫓겨나면 늦게 퇴근해야 되고, 은퇴하시면 집에서 쉬면 됩니다. 나의 자아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만드시는데, 상황에 따라서 나에게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물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했지요. 제자들의 남은 과제가 뭔가? 그 유령마저도 무서워하지 않는 제 2의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귀신이라도 무서워하지 않는 제 2의 자아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변화된 예수님을 보고 무서워서 엎드렸지요.
내가 있는 현실을 주님이 만든 현실로 교체를 하면 돼요. 이 교체는 내 몫이 아니고 이미 교체되었음을 뒤늦게 파악하면 돼요. 전에는 본인의 현실이 전부라면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현실로 바뀔 용의는 없습니까? 지금도 멀리 계시는데, 만약 미국으로 가신다면 섭섭합니까, 아니면 맨 예수 안에 계시는 겁니까? 역시 예수 안에 있지요.
내가 여기 있다 저기로 이동한다는 것이 별 의미 없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해서 ‘어떻게 살까?’ 걱정하는데, 의미 없습니다. 공간상 의미 없지요. 그러면 지금 나이가 38세라고 합시다. 나중에 88세가 되었습니다.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왜? 나의 시간, 나의 공간으로 형성된 현실관은 의미 없어요.
아들이 실습 나갔어요? 그러면 ‘아들이 실습을 나가서 뭔가를 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께서 실습을 현장에서 시킨 거예요. 항상 주체를 주님으로 보시고 그 결과물이 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이 이제 실습을 하는구나. 대견하다.’ 이렇게 보지 말고, ‘주께서 실습을 시키는구나.’ 모든 시작과 주체를 주님께 옮기면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의 현실이 아니고 주님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밤 사경(새벽 3시)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3시가 되든 2시가 되든 주님이 계시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가복음 6장 49-50절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두려워했겠습니까, 안 두려워했겠습니까? 두려워 안 했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유령이라는 이미지가 그 순간 없어졌지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유령이라면 겁이 난다. 그런데 유령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됩니다.
앞으로 이렇게 살면 안 돼요. 유령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안심을 해야 돼요. 유령이 무섭다는 것은 이들이 아직 죽음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이 나오기 전이기 때문에 아직은 유령을 겁냈던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를 구원할 때는 감당 못할 일을 강제로 거치게 합니다. 왜냐? 감당할 일을 하게 되면 예전의 내 모습을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뭉개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내가 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오셨는데 이것이 예수님 평소에 늘 하신 일입니까? 사람은 물위를 못 걷는다는 선입견이 인간들이 만든 현실입니다. 어떤 인간도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이유는 뭡니까? 역사 속에 묵시가 삽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는 분이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인 줄 알고 두려움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어요. 베드로도 한 번 물위를 걸은 적이 있어요. 그 후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재주가 생긴 것입니까? 아니지요. 물위를 걷는 순간에도 베드로에게는 물위를 걷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질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계실 때 살아 있었지요. 그럼 베드로에게 자신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베드로는 그것 만큼은 있다고 여겨 예수님 잡힐 때 본인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그 옛날 버릇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세 번 부인했지요. 이게 평소에 하던 버릇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이것이 안 바뀝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면 남들은 다 손가락질해도 유일하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이런 인간의 끝은 주님과의 완전한 이별입니다. 이것이 인간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인간 속에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질문: 아담 때문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부터입니까?
답변: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아담 자체로는 가치가 없고 창조주가 아담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조주가 아담을 다룰 때 아담 안에 스며드는 것이 있어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담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투석’ 알지요? 피를 바꾸는 거지요. 새로운 피로 바꿔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는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 받는 몸으로 태어났는데 영생 받는 몸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질문: 하나님은 본인을 증거하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셨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했어요. 여호와지요. ‘하나님’이란 말보다 ‘하나님들’이란 표현이 적당해요. 주님은 아들을 보고 기뻐하고 아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고.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어요. 그러면 인간 이전에 ‘우리’가 있었지요. ‘우리’가 있고 ‘우리’의 반영물로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위를 찾아갈 수가 없어요. 반대로 하나님이 찾아와 줄 때 뒤늦게 알아요. ‘아, 내가 찾아가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를 발견합니다. 질문: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만든 것입니까? 답변: 그렇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은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질문: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심하시겠습니다. 답변: ‘심심하다’는 말은 심심하지 않은 경우를 상정할 때 성립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이 개념을 확대시켜서 하나님도 아마 우리와 유사할 것이라고 짐작을 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나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입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 말이 맞아요. 신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신을 몰라요. 그래서 ‘신은 저절로 생겼다.’고 하지요. 이것이 불교입니다. ‘저절로’는 ‘자연(自然)’이죠. ‘저절로’의 끝은 뭔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모르겠다.”는 것이 그들의 답입니다.
그런데 ‘모르겠다’는 것이 잘못된 말입니다. ‘모르겠다’고 하면 ‘아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이 판단이 옳은 것인지는 누구 판정하는가?’ 그 때 인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요. ‘맞다’ 혹은 ‘틀렸다’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가, 아니면 다른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이 물음에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 모든 것의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나’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이 자아실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데카르트는 여기에 실망을 했습니다. 이런 ‘나’가 죽는다면? 해답 없음. 절대적인 ‘나’가 죽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묵묵부답. 하나님도 내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지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잖아요. 그래서 성경이 너무도 고마운 말씀이에요.
다들 무식해서 모르는데 성경 말씀을 주시니까 ‘아,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셨구나.’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을 통해서 하신 일을 우리가 알아보니 새삼스럽게 우리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면서 살았는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 죄인의 죄를 씻기 위해서 흘리신 그 피가 정말 진리인 것을 다시 한 번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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