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YouTube강의(육과 영)1403013-이 근호 목사
강의 제목은 육과 영입니다. 육과 영이라는 것은 세상을 육으로 있는 것을 말하고, 영이라는 것은 세상을 성령 안에서, 또는 영적으로 읽어내는 그런 현상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육으로 본다는 것은 딴 게 아니고 간단하게 해서 이런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들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고 다듬어 나갈 수 있고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사람이 손대기 나름이고 활동하기 나름이고 설치기 나름이고 사람이 깊이 노력하고 노력을 짜내고 애쓰기 나름에 따라서 세상은 변화를 보인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육의 생각을 혼합할 수는 없습니다. 섞일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항상 육의 생각은 사람 선에서 출발해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느냐, 안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평가하고 판단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사람이 이 땅에서 얼마나 착한 일 했는지 반대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 일 했는지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개인의 야망, 또 개인의 소망이라는 것을 한번 여기에 집어넣어보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떤 보상을 기대하게 되는데, 방금 영으로부터 영적인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어떠한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보상으로 지금 있는 내가 보다 나은 내가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서는 그거는 수용이 안 됩니다. 거부당합니다.
반면에 육적인 생각을 한다면 내가 착한 일 하게 되면 지금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변화될 수 있다, 라는 그런 희망과 포부가 단단히 거기에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세상을 보는 참된 시선이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면 남는 것은 교회, 종교, 기독교, 불교, 그리고 윤리, 도덕, 철학, 그리고 일반적인 과학, 기술, 이런 게 남겠죠.
그러면 성경을 덮고 교회라는 걸 생각해 봅시다. 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교회가 되지 않고, 사람이 전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할 때에 교회가 커지고 유지가 된다 하는 것, 그게 바로 육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도 종교 자체에서 영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것도, 종교라는 것도 내가 하기 나름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건 육적인 겁니다.
또 예를 들면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 안 하고 방치할 때보다 기도를 시작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거기서 기도한 만큼의 새로운 이익과 효력을 본다는 것, 그게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교회에서 말하는 육적인 생각입니다.
방금 제가 육적인 생각이 뭐냐, 조건을 걸었을 때 그건 성경을 덮으면 그렇다 했습니다. 이제 성경을 펼치겠습니다. 성경을 펼치면 거기서 영적인 시선, 영적인 생각이 여기서 나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같은 경우에 제 구시에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서 그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만난다는 이야기만 제가 했고 그 뒤의 결과 이야기를 미리 말씀드리면 앉은뱅이가 앉은뱅이 생활을 청산하고 일어나 뛰면서 걸었습니다.
자, 처음에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짧은 문제를 던지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가 낫는데 무엇으로 기여했습니까? 앉은뱅이가 낫는데 있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노력과 기여를 했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을 보면서도 육적인 해석을 한 게 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3장을 보게 되면 이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벌어진 일에 자기도 구경꾼으로 그냥 참여한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앉은뱅이를 보니까 거기에 주님이 직접 주시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고, 그 믿음대로 앉은뱅이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는 일어섰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당신은 주님에 의해서 걸을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 자리에 앉은뱅이 당신과 베드로, 요한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 현장에 지금 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베드로, 요한이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베드로 이름도 아니고 요한의 이름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걸어라.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주님의 지시에 따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많은 구경꾼들은 이런 베드로와 요한의 영적인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겼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성이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들은 우겼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께서 직접 그에게 믿음을 줘서 주님께 난 믿음으로 그 앉은뱅이가 낫게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과 앉은뱅이의 관계 때문에 앉은뱅이가 나았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주님이 그를 낫게 했다는 그 목격담 밖에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안목입니다.
자, 이 영적인 안목을 우리 일상에 적용시켜 봅시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깼다. 남들 보기에, 또는 육적인 안목으로 볼 때 내가 깬 거죠.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릇을 깨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육적인 안목에서 아깝죠. 손해나죠. 오늘도 재수 없다고 아마 하루 일과 평가를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봐서는 그렇게 그릇이 깨지더라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안목에서 세상을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 이야기했지만 사도행전 5장 이야기해보면 거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나옵니다. 그 부부가 헌금하는 과정에 대해서 사도행전 5장에서 그 줄거리를 언급해 놨습니다.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등장하고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사단, 악마가 등장합니다.
육적인 안목에서 보게 되면 뭘 빼야 되느냐 하면 주님이 계시는 것과 사단이 활동함을 빼고 이야기해야 그게 육적인 안목이죠. 그러나 사도행전 5장에서는 절대로 주님과 악마를 빼고 이야기하게 되면 사도행전 5장의 이야기가 절대로 성립이 안 됩니다. 사도행전 5장 이야기는 헌금을 하는데 헌금을 다 하기보다는 아껴서 반만 헌금하겠다는 가장 인간들이 평소에 언제든지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을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만 헌금을 반만 했고 그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갔다. 우리의 육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헌금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 부부가 결정했고 그들이 결정한 헌금 액수는 전달되었고 가고 난 뒤에 그들은 무사히 집에 갔다. 무사히 집에 간 것과 헌금한 것과 아무 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그들은 반을 헌금했는데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말합니다. 육으로 보면 즉사한 이유가 안 보입니다. 그냥 운이 다해서 죽었죠. 또는 병들어서 죽은 거죠. 하지만 여기 사도행전 5장에서는 거기에 영적으로 보게 되면 성령님이 역사했고 사단이 역사해서 그 사람은 죽었다고 돼 있습니다.
자,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는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 안 짓는 사람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죄 짓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그 죽은 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다시 영적인 안목을 보는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해석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으면 ‘죽어도 살겠고’ 가 성립이 됩니다. 비로소 영으로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죽은 자지만 사실은 이미 산 자로서 산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영적 세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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