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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육과영,사건의 발생 1403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9. 19:25
2014-03-15 00:34:19 조회 : 935         
유튜브(64강, 65강) 육과 영, 사건의 발생 140313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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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2.222)14-03-15 22:13 
64강-YouTube강의(육과 영)1403013-이 근호 목사


강의 제목은 육과 영입니다. 육과 영이라는 것은 세상을 육으로 있는 것을 말하고, 영이라는 것은 세상을 성령 안에서, 또는 영적으로 읽어내는 그런 현상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육으로 본다는 것
은 딴 게 아니고 간단하게 해서 이런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들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고 다듬어 나갈 수 있고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사람이 손대기 나름이고 활동하기 나름이고 설치기 나름이고 사람이 깊이 노력하고 노력을 짜내고 애쓰기 나름에 따라서 세상은 변화를 보인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육의 생각을 혼합할 수는 없습니다. 섞일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항상 육의 생각은 사람 선에서 출발해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느냐, 안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평가하고 판단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사람이 이 땅에서 얼마나 착한 일 했는지 반대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 일 했는지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개인의 야망, 또 개인의 소망이라는 것을 한번 여기에 집어넣어보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떤 보상을 기대하게 되는데, 방금 영으로부터 영적인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어떠한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보상으로 지금 있는 내가 보다 나은 내가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서는 그거는 수용이 안 됩니다. 거부당합니다.


반면에 육적인 생각을 한다면 내가 착한 일 하게 되면 지금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변화될 수 있다, 라는 그런 희망과 포부가 단단히 거기에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세상을 보는 참된 시선이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면 남는 것은 교회, 종교, 기독교, 불교, 그리고 윤리, 도덕, 철학, 그리고 일반적인 과학, 기술, 이런 게 남겠죠.


그러면 성경을 덮고 교회라는 걸 생각해 봅시다. 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교회가 되지 않고, 사람이 전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할 때에 교회가 커지고 유지가 된다 하는 것, 그게 바로 육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도 종교 자체에서 영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것도, 종교라는 것도 내가 하기 나름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건 육적인 겁니다.


또 예를 들면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 안 하고 방치할 때보다 기도를 시작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거기서 기도한 만큼의 새로운 이익과 효력을 본다는 것, 그게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교회에서 말하는 육적인 생각입니다.


방금 제가 육적인 생각이 뭐냐, 조건을 걸었을 때 그건 성경을 덮으면 그렇다 했습니다. 이제 성경을 펼치겠습니다. 성경을 펼치면 거기서 영적인 시선, 영적인 생각이 여기서 나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같은 경우에 제 구시에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서 그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만난다는 이야기만 제가 했고 그 뒤의 결과 이야기를 미리 말씀드리면 앉은뱅이가 앉은뱅이 생활을 청산하고 일어나 뛰면서 걸었습니다.


자, 처음에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짧은 문제를 던지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가 낫는데 무엇으로 기여했습니까? 앉은뱅이가 낫는데 있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노력과 기여를 했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을 보면서도 육적인 해석을 한 게 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3장을 보게 되면 이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벌어진 일에 자기도 구경꾼으로 그냥 참여한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앉은뱅이를 보니까 거기에 주님이 직접 주시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고, 그 믿음대로 앉은뱅이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는 일어섰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당신은 주님에 의해서 걸을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 자리에 앉은뱅이 당신과 베드로, 요한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 현장에 지금 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베드로, 요한이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베드로 이름도 아니고 요한의 이름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걸어라.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주님의 지시에 따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많은 구경꾼들은 이런 베드로와 요한의 영적인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겼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성이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들은 우겼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께서 직접 그에게 믿음을 줘서 주님께 난 믿음으로 그 앉은뱅이가 낫게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과 앉은뱅이의 관계 때문에 앉은뱅이가 나았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주님이 그를 낫게 했다는 그 목격담 밖에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안목입니다.


자, 이 영적인 안목을 우리 일상에 적용시켜 봅시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깼다. 남들 보기에, 또는 육적인 안목으로 볼 때 내가 깬 거죠.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릇을 깨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육적인 안목에서 아깝죠. 손해나죠. 오늘도 재수 없다고 아마 하루 일과 평가를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봐서는 그렇게 그릇이 깨지더라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안목에서 세상을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 이야기했지만 사도행전 5장 이야기해보면 거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나옵니다. 그 부부가 헌금하는 과정에 대해서 사도행전 5장에서 그 줄거리를 언급해 놨습니다.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등장하고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사단, 악마가 등장합니다.


육적인 안목에서 보게 되면 뭘 빼야 되느냐 하면 주님이 계시는 것과 사단이 활동함을 빼고 이야기해야 그게 육적인 안목이죠. 그러나 사도행전 5장에서는 절대로 주님과 악마를 빼고 이야기하게 되면 사도행전 5장의 이야기가 절대로 성립이 안 됩니다. 사도행전 5장 이야기는 헌금을 하는데 헌금을 다 하기보다는 아껴서 반만 헌금하겠다는 가장 인간들이 평소에 언제든지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을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만 헌금을 반만 했고 그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갔다. 우리의 육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헌금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 부부가 결정했고 그들이 결정한 헌금 액수는 전달되었고 가고 난 뒤에 그들은 무사히 집에 갔다. 무사히 집에 간 것과 헌금한 것과 아무 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그들은 반을 헌금했는데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말합니다. 육으로 보면 즉사한 이유가 안 보입니다. 그냥 운이 다해서 죽었죠. 또는 병들어서 죽은 거죠. 하지만 여기 사도행전 5장에서는 거기에 영적으로 보게 되면 성령님이 역사했고 사단이 역사해서 그 사람은 죽었다고 돼 있습니다.


자,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는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 안 짓는 사람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죄 짓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그 죽은 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다시 영적인 안목을 보는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해석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으면 ‘죽어도 살겠고’ 가 성립이 됩니다. 비로소 영으로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죽은 자지만 사실은 이미 산 자로서 산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영적 세계입니다.

 이한례 (IP:203.♡.42.222)14-03-15 22:14 
65강-YouTube강의(사건의 발생)1403013-이 근호 목사


65강 제목은 ‘사건의 발생’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 있다 할 때 사람들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냐, ‘오 기적이구나. 그 기적을 나도 보고 싶어.’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을 못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세상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사건에 종속되었다고 그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건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는 특수한 용어를 붙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약속입니다. 이 세상 인간 세상에서 약속이라 하는 것은 양쪽 다 동의가 돼야 됩니다. 우리가 계약을 성사하자. 그러면 양쪽 다 사인을 하죠. 이 계약에 양쪽 다 사인을 하지 않으면 그 계약은 성사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그 계약, 언약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덮치는 식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인간 세계 말고 하나님 세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가 사실은 성도로서는 궁금해 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세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창세전에 언약이라는 것을 체결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4절 같은 경우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는데 그 하나님께서 약속한 상대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라고 돼 있습니다.


자, 일반적인 상식으로 돌아가 봅시다. 보통 이 세상에서 예수란 인물은 돌아가실 때 나이는 서른 세 살이고 아버지가 요셉이었으며 직업은 목수였으며 이 땅의 행적은 별로 드러나지 않다가 나이 30세쯤 되어서 세례요한의 물세례 받고 난 뒤에 자신이 메시야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그 당시의 신학과는 너무나 판이한 주장들을 늘어놓다가 결국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를 문란했다. 질서를 문란했다는 그 이유로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고 33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 사라진 인물이 예수라는 인물인데 이거는 초등학생들도 아는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땅에 잠시 왔다가 33년 살다 가신 그분이 창세전에 하나님과 이 세상 운영에 대해서, 경영에 대해서 약속으로 이미 체결해 놓은 당사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 내용에 보게 되면 이런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자질구레한 아주 세미한 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가 되심을 증거 하는 증빙 자료로서 진행되도록 그렇게 사건들이, 사건들의 꼬리를 물고, 물고 일어난다는 겁니다.


미국 뉴욕에서 주택가가 무너진 것이나 전라북도 익산에서 어떤 강도 사건이 일어난 이 모든 사건이나 북한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 이 모든 사건들이 다 예수님에 의해서 의미 있게 진행된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에베소서 1장 4절을 이해하려면 그 사건을 추적해서 결국 어디까지 도달돼야 되느냐 하면 창세전에 예수님이 주되심을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발시킨 일이라고 이렇게 연관을 지어야 됩니다.


집에 강아지 한 마리 죽는 것도 예수님의 주되심의 개입으로 강아지가 죽는다는 겁니다. 참 허황되게 생각되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든지,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런 일이 성사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네 주변에서 또는 네 신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 일을 통해서 그 핵심, 언약이 보이는 쪽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 쪽으로 인생이 진행되어야 그래야 주님과 관련된 성도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그 중심을 보겠습니다. 구약의 노아 언약에 보게 되면 참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가 허황되지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움직이는 것도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짐승을 잡은 그 연기가 하늘에 상달된 그 점을 증거 하기 위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겁니다. 그건 과학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고 과학은 태양을 지구가 공전하기 때문에, 그것도 23.5도 삐딱하게 자전축이 기울어져 돌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것과 지구가 스스로 자전하는 이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과학이고 그것이 진리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노아라는 어떤 할아버지가 개인적으로 노아 방주에서 나온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그것을 흠향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것은 창세기 8장 말미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성경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과학은 아무리 따져봐야 기껏 도달되는 것이 뭐냐, 자연은 옛날부터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그냥 물 흐르듯이 그냥 그대로 돌고, 돌고, 어디 가는지도 목적도 없이 그냥 가는 것이 다 자연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이 그렇다면 자연 속에 있는 우리도 인생의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고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 아무렇게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게 일반적인 것이니까 사람들은 자기 현재 살아있는 자기 육신의 쾌락과 정욕과 그리고 육신의 욕망만 달성하다가 죽을 때 돼서 죽으면 인생이 그만입니다. 그 인생이 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잠간 왔다가 그냥 사라지고 아무 의미 없이,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만 동원해서 자기 이익만 챙기면 그게 정답이고 그게 제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언약 적으로 보게 되면 그 언약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죽어도 지옥 간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아주 과격한 발언을 성경에서 하는지 몰라요.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격함에 충돌되는 것이고 거기서 우리가 살아왔던 인생관, 나는 내 위주로 산다는 이것이 와장창! 그야말로 유리창 깨지는 소리 이상의 큰소리 내면서 나라는 얇은 깨지기 쉬운 이 유리창이 그분 앞에서 계속 바닥에 쨍그렁! 하고 다 깨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느낍니다. “주여,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고 언약에 묶인 몸이고 매인 몸이었군요.”


이미 노아 언약부터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 언약에 들어가면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도 되고 저주의 근원이 돼요. 성경에 나온 말씀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한 자는 저주를 받겠죠. 자꾸 저주를 빼지 마세요. 내 인생에서 저주를 빼지 마세요. 아브라함이 아니면, 아브라함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 사람이 사법고시 합격해서 판사, 검사로 임명된 그 자체가 저주고 그 사람이 검사장이 되면 그것도 저주고 그 저주 받은 사람과 결혼하면 저주 받은 사람에게 시집간 게 돼요. 어떤 사람이 의사가 돼서 돈벌이하면 그 사람은 영생을 모르면 그 사람은 저주 받은 채로 의사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 돼도 마찬가지고.


정말 과격합니다. 이거는 너무도 과격해서 진짜 성경 내용을 이야기하면 등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 언약 끝에 아브라함 자손이 나오는데 그분은 심판 주랍니다. 십자가 피를 모르면 지옥 가고 십자가 피로써 우리의 지옥 가야 될 죄를 씻어준다는 메시야가 떴다는 겁니다. 그분은 이 인간 세계를 이미 몰래 다녀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영이 오게 되면 아! 다녀가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심판 주고 동시에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 받았으면 예수님처럼 과격하게 세상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