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812a히12장 9절(관계)-이 근호 목사
오늘은 히브리서 15장 9절부터 보겠습니다. 12장 9절을 보면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여기 육과 대비된 것이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를 하죠. 육은 육이고, 영은 뭐냐? 영은 뭐 모호하지. 모호한 것, 라면 끓일 때 나오는 수증기 같은 것, 이런 것. 귀신 종류, 옛날 동양철학에서 나오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런 것을 영이라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런 것을 영이라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은 뭐냐, 딱 보면 영이에요. 육인데, 특이한 육. 그게 영입니다. 영인데, 특이한 육이에요. 여러분, 언약이 특이합니까? 언약에 있는 그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이 눈으로 보면 아주 특이합니까?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그걸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영으로 분류해요. 모세가 특이합니까? 뭐 모세가 키가 2미터50이 되고, 몸무게는 뭐 얼마 되고, 않거든요. 뭐 모세도 짜증낼 것 짜증내고, 원망할 것 원망하고 다 하잖아요.
그런데 모세 뒤에는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이라고 하는 것은 딱 한마디만 하면 다 알아요. 크게 쓰겠습니다. “관계.” 다른 사람은 하나님하고 이 관계가 없지만, 영적 사람은 관계가 있어요. 옛날 장난감 보면 태엽 감아주는 장난감이 있죠. 지금은 애들이 위험해서 그걸 잘 안하는데, 옛날 인형에 보면 옆으로 된 팔자(∞)같은 태엽을 감으면 인형이 막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은요, ‘저 인형이 왜 자꾸 손을 흔들지?’ 근데 어른들은 아는 거예요. 그 뒤에 빡빡 감아주는 것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장난감이 움직이잖아요. ‘모세는 왜 저런 말을 하지?’ 남들 보기에는 똑같아요. 모세를 뭐 앞을 보고 뒤를 봐도 모세는 우리하고 똑같아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똑같아요. 선지자 예레미야도 똑같아요. 심지어 열두 제자는 우리보다 못하죠.
그런데 이게 뭐가 됐다구요? “관계.” 다시 함해서 아까 자동인형 뒤에 빡빡 감아주는 태엽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막 시작했어요. 지금 영이 뭐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영은 뭐냐 하면, 뭐 모호한 것, 귀신, 자꾸 이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육은 뭐냐,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영은 뭐냐,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래하지 마시고, 영도 눈에 보이는데, 우리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는데, 다만 뒤에 태엽 감아주는 것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걸 구약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전에 군에 있을 때, 성경을 보면서, 군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성경을 좀 보는데, 제일 궁금했던 것이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영적사람, 또는 영의 사람, 하나님의 신이, 성령 받아라. 이런 것이 있는데, 뭐가 다르지? 이걸 주위에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뭐가 다르지? 갑자기 근육이 좋다든지, 뿔이 나든지, 뭐 이런 것. 머리를 길러서 머리를 묶었다든지, 그런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가 다르지? 지금은 알죠.
다른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반면에, 성령 받은 사람은, 열두 제자, 사도, 구약 선지자들, 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없고, 주께서 태엽 감아주는 대로 감겼다 풀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게 영의 사람입니다. 그럼 영의 사람의 이 관계, 그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그 내용을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여러분, 얼추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죠?
영은 있다? 없다? 있다. 보고 싶다. 봐라. 어? 우리하고 똑같네? 아니다. 그 뒤에 주와 관계가 있다. 어떤 관계? 다른 사람은 지 인생 자기가 알아서 챙기고 사는데, 이 사람은 주께서 인도하는 데로 갈 수밖에 없는. 그래서 모세는 수시로 물어요. “하나님이여, 이 백성들이 나를 무시합니다. 이 백성은 숫자가 많아서 저는 감당 못합니다. 어찌할까요?” “모세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이 뭐하는 거야? 이러는데 모세는 이걸 다 알아요.
모세가 지시받는 것뿐만 아니고, 모세가 책망 받는 것도 주의 지시에 따라 책망 받아요. “왜 니가 사람들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팡이 가지고 왜 두 번 쳤느냐? 내가 그냥 지시하라고만 했는데 왜 두 번 쳤느냐?”(민20장)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이걸 치나, 그냥 물만 나오면 되지? 하잖아요. 그게 육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아, 이게 모든 계획은 내가 관할 할 문제가 아니고 관할 할 분이,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내가 화가 나서 깜빡 잊어버렸구나.
여러분의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랬으면 좋겠네~ 정말 내 인생은 없어지고, 주께서 정말 기계적으로 태엽을 감아줬으면 좋겠어요. 안 될 때는 더 세게 감아줘서 그 하나님의 언약만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자, 언약이 나타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언약이 나타나게 되면 용서가 나타납니다. 특징이. 용서가. 용서가 나타나면서 그 다음에 동반해서 나타나는 것이 뭐냐 하면 죄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죄 짓고 용서받잖아요? 이거는 우리의 상식이고. 성경은 뭐냐 하면, 용서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아, 이게 바로 죄였기에, 이 죄를 용서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때도 같은 이야기했어요. 양말부터 나오고 그 다음에 발을 들이대라고 했잖아요. 들어보셨다니까 기억납니까? 양말부터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맞는 발을 찾듯이, 주께서는 용서부터 먼저 주시고, “자, 이 용서에 합당한 사람 누구게?”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럼 잘난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여, 저는 용서 필요 없습니다. 왜? 워낙에 깨끗하고 잘났으니까. 율법 지키는 것 저도 한 율법 지킵니다. 저도 이번에 뭐 헌금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전도를 열 명이나 했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뒤에 언약의 태엽이 없어요. 태엽이 없으니까, 그러다보니까 평소에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챙기다보니까, 이거는 관계 자체가 수립이 안 되죠.
관계가 되려면 숫자 1이 되면 안 되고, 나와 다른 분, 이 둘이 나와야 하는데, 지 인생 지가 알아서 해버리면 뭘 찾을 수가 없습니까? 관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관계를. 자, 여기까지는 여러분에게 쉽습니다. 그렇다면 징계가 뭐냐, 징계는 육을 뭐로 바꾼다? 영으로 바꾸는 거예요. 너 영적인 인간이잖아? 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라고 하니까 뭐 울고불고 집안에 돈 날아가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 본연의 모습을 다시 찾도록 해주는 것을 징계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징계가 집안 말아먹는 것도 징계가 되지만, 갑자기 집안이 잘 풀리는 것, 잘 풀리는 집 있잖아요? 두루마리 휴지. 잘 풀릴 때도 징계입니다. 하는 일마다 너무 잘 돼. 이거 주의해야 합니다. 제 말이 아니고 신명기 9장에 나온 말입니다. 니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마치 너가 잘 해서 잘 되는 것처럼 한다면 나는 너를 추방시키겠다. 그게 언약이에요. 줘놓고, 이거는 분명히 이만큼 잘 된 것은 내가 그만큼 침착했고, 신앙생활 잘 했고, 조심조심, 조심에 또 조심을 했기 때문에 하자가 없이 내 노력으로 잘 했다. 이런 생각을 해버리면 주께서 원하시는 이 관계성이 확 빠져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내 것은 아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항상 독자적으로 살면 안 되고, 항상 내 인생은 내가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관여해서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대략적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가, 잠시 히브리서는 이따가 하고 창세기 33장을 봅시다. 창세기 33장 1절에서 2절까지만 누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절,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됐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들은 뭘 발견을 해줘야 해요. 자 사 백 명이 옵니다. 야곱은 예상합니다. 옛날에 형이 나한테 악한 감정을 먹었기 때문에, 그때 나를 죽이려고 했거든요. 그러면 형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나중에 세월이 지나도 마찬가지로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이 분명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나를 죽이러 오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하고 대비하고 있는 겁니다. 대비할 때, 자식들이 있잖아요. 자식들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세 종류로 분류를 해요.
여종과 그 자식들은 어떻게 두고? 앞에 두고. 제일 위험한 구석에다 몰아세우고, 그 뒤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 다음에 두고. 마지막에 뭐냐, 라헬과 요셉은 제일 마지막에 두는 것. 자, 사실은 이 내용은 <불편한 여정>이라는 책, 민수기 할 때 이 내용을 제가 언급을 했었습니다. 멘델의 법칙하면서 했거든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이 뭐냐, 언약이 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관계가 뭐냐? 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 예, 그거 참 옳은 말입니다.” “근데 관계가 뭐죠?” “어? 관계가 뭐지?” “관계는 언약입니다.” “아, 예, 언약이군요.” “그럼 언약이 뭐죠?” “어? 그건 또 뭐지?” 예, 예, 하지만 점점 그 내용에 구체화 들어가게 되면, 결국은 이 사실을 모르면, “나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날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라고 큰소리치지만, 나중에 신앙에 권태기가 돼버리면, 멍하게 돼버리면, ‘내가 신앙인이 맞나?’ 본인이 본인의 신앙에 대해서 뭔가 잡히는 것이 없어요. 잡히는 게 없어요.
대표적인 예가 목사들이잖아요. 목회 한 30, 40년 하게 되면 전혀 신앙인의 구석이 없어요. 처음에는 믿는다고 우기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아니었었어요. 그냥 생활인이지, 신앙인이 아니죠. 그냥 국민입니다. 하늘나라 국민이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다만 그걸 교인들이 눈치 채면 안 되니까 조심하죠. 행정적인 그 모습으로, 관행으로 자꾸 때우지, 누가 복음에 대해서 물으면, 에이, 그런 초보적인 것을 저한테 묻습니까? 이런 것은 전도사한테 물으세요. 이렇게 미루지만. 본인은 이미 그런 것에 대해서 버린 지 옛날입니다. 사람을 꼬셔가지고 목회만 잘해서 나에게 돈만 되게 하면 그만이지. 뭐 목회 50년 하고 아직까지 말씀에 관심 있다? 40년 목회했는데, 말씀 관심이 있는 분이 있다면 여기 계신 분 빼놓고 누가 관심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교회가 돈벌이가 되지, 말씀이 돈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목사는 목사가 아니고 그냥 생활인이라니까요. 그냥 돈 버는 생계인이에요. 오늘 제목을 생계인이라고 할까? 기도해주고 돈 받아 챙기는, 수수료 챙기는 그런 같은 생활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너무 많은 욕을 하지 마세요. 그거 자기 직업인데 욕하면 안 되죠. 그 사람들한테 자꾸 복음이 뭐냐고 성경내용을 자꾸 묻지 마세요. 교회법은 물어야 되죠. 이번 제직회 3분의 2입니까? 그런 것은 자꾸 물어야 되지, 성경내용 물으면 이거는 목사한테 실례가 돼요. 오늘 오랜만에 바른 소리하니까 기분이 좋네.
언약이 뭐냐? 언약이? 야곱이 언약을 보여주는데 순서를 정한 거예요. 종과 그 다음에 레아와 마지막에 야곱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지점은 라헬이 여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간격은, 이 거리는 어떤 거리냐 하면 사랑의 거리. 멀리 있으면 그만큼 사랑이 얕아지는 거예요. 언약은 뭐냐 하면 관계인데, 이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니 없으면 내가 죽는다는 정도로. 그 관계. 그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나, 당신 없으면 나 죽을 거야?” “여보! 나는 이미 터널에 묻혀서 죽게 되었으니까 당신은 애 잘 키워.” 그럴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당신 없으면 나도 같이 죽을 거야.” “그런 소리하지 마.”
관계가 뭐냐 하면, 남편은 나는 죽을 테니까 애 잘 키우라고 하면서 관계를 끊고자 할 때, 여보!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야. 당신 죽으면 나도 죽어. 이게 관계에요. 당신 죽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야곱은 아버지가 나에게 축복을 할 때, 나의 이 축복권을 그 다음 후대에 넘기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관계를 갖고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죽던 말든, 하여튼 내가 사랑했던, 원래 야곱이 결혼하고 싶어 했던 사람은 라헬이었습니다. 왜? 레아는 못생겼거든요. 근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레아, 라헬의 아버지가 알아요. 삼촌관계지만. 아버지가 알아요. 알아가지고 마트 세일할 때, 1+1하는 거 있잖아요. 안 팔리는 거 하나 끼워주잖아요. 세일하면서 언니를 끼워준 거예요. 더불어.
남자가 여자 하나 감당 못해요. 근데 꼴 보기 싫은 여자까지 감당하려고 하니..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뭐냐 하면 속이는 자거든요. 속이는 자인데 야곱 본인이 속임을 당했어요. 근데 결국은 그걸 복수한답시고 삼촌을 속여서 실하고 번식 잘하는 양들만 골라서 자기 것으로 사전에 빼돌렸죠. 왜냐하면 육종(일반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입장에서나 가축을 사양하는 입장에서는 품종개량 또는 가축개량이라는 말로 쓰고 있다.)에 관한 노하우를 실무자가 알기 때문에, 어느 날 우연히 버드나무를 보니까 얼룩덜룩한 실한 양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삼촌은 그걸 몰랐으니까, 자기만 아는 노하우, 그러니까 기업 비밀을 써먹은 거죠. 기업비밀을 써먹어가지고 그 기업에 중요한 핵심기술을 전부 다 빼돌려서 자기 양으로 돌린 겁니다.
성경에 나온 이러한 야곱의 행동은 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냥 달랑 언약만 등장하는 법이 없고, 썩어빠진 세상, 속고 속이는, 그 악함을 전제로 해서, 언약이 그 악함을 뒤집어쓰고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뒤집어쓰고. 여러분, 아까 강아지 있잖아요. 강아지가 안 듣는다 치고, 이 강아지를 요 앞에 안양천인가, 거기에 집어넣었다 칩시다. 강아지기 기어 나오면서 ‘내가 이 꼴로 해서 집에 들어가면 집이 얼마나 어질러지겠나? 내가 여기 잠시 몸 씻고 나가야지.’ 그런 강아지 없어요. 진흙탕에 들어갔다가 시커먼 채로 주인 오면 그냥 반갑다고 나오잖아요.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자기 몸단장하고 썬 크림 바르고 이래가지고 구원받지 마세요. 그냥 죄를 온 머리부터 해가지고, 머리는 비비꼬아져서 레게머리처럼 해가지고, 죄 덩어리 채로 올라오는 탕자를. 그래야 뭐가 유효하냐 하면, 용서가 유효합니다. 용서가. 그런데 자기 얼굴 단장하고 자기에게 신경 쓰게 되면 용서 앞에 자기 신경 쓰는 것이 비로소 죄가 되는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용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용서의 빛 앞에서 비로소 죄가 드러날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많은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아예 그 본체 되는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니까요. 니가 이런 죄를 지었지? 왜 그랬냐? 이게 아니고 너는 죄인이야.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돼버리는 겁니다. 죄인이 죄 짓지. 뭐 할 건데? 술 먹는 것도 죄인이고, 술 안 먹는 것도 죄인이고. 십일조 한 것도 죄고, 십일조 안 한 것도 죄고.
여기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은연중에 자신의 언약 사람들을 완전히 까발린 거예요. 종의 자식과 본처 자식을 구분하고 본처 자식 가운데 레아와 라헬을 구분해서 결국은 한 명의 아들이 다른 아들을 다 살리는 기능으로 언약이 다 정리됩니다. 그 귀하게 여겼던 자식 이름이 뭡니까? 여기 33장에 야곱은 누구와 가장 밀착이 되어 있습니까? 요셉이죠. 창세기 뒤에 보면 뭐로 끝나느냐, 요셉 하나가 총리가 되어 가지고 그 요셉을 팔아먹고 죽이자 하고 시기 질투했던, 그 형제들을, 아버지, 어머니 그 형제들 몽땅 다 살려내는 이야기로 창세기는 마감돼요. 그리고 요셉이 죽고 난 뒤에, 그 요셉의 해골을 여호수아 23장 마지막에 보면 여호수아가 다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요셉의 해골을 세겜에 묻는다는 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 땅을 결코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내놓으신 언약을 우리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성취를 시켰습니다. 그걸 증거 한 땅이 약속의 땅이고 신약에서 그걸 두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딴 게 아니라 천국 못 가는 인간을 천국 가게 만드는 것이 성경이거든요.
그러면 천국가려면 언약을 알아야 가거든요. 언약이 뭡니까? 이 모든 공로가 우리가 아니고 누구의 공로다? 하나님이 스스로 내린 약속에 준해서 약속을 성취했던 그 결과가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자, 그럼 묻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한 대로 이룬다면 우리 쪽에서 주님께 약속을 내밀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쪽에서.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는데도 계속 해대니까 문제가 되는데. 뭐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안 할 우리가 아니거든요. 답답하면 해야죠. 하는데, 우리가 내놓는 것을 맞장 춰줘서 응답받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왜 우리는 육에 태어나서 육의 것만 원하는데 비해서, 오늘 본문 히브리서를 다시 봅시다. 히브리서 들어가 봅시다. 주님은 육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육은 영을 모르잖아요. 이쯤하면 또 잊어버렸죠. 왜 육은 영을 모르느냐 하면 육은 독자적으로 살고 영은 뭐로 산다? 관계로 살고. 오늘 여러 번 이야기할 거예요. 영은 뭐냐, 모호한 귀신이 영이 아니고 관계라니까요. 관계. 보이지 않는 주님과 덩어리, 또는 장난감 뒤에 있는 태엽처럼. 관계라니까요. 주께서는 관계를 원해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면 “뒤돌아봐! 너 덩어리하고 주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보자. 관계가 예수님의 십자가네. 주님이네. 니 그럼 구원받지.” 자꾸 나를 앞장세우려고 하지 말고 나와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수집해서 천국을 구사하는 거예요. 그럴 수집해서. 정말 이거 쉬운 거예요. 영화관에 입장하는데, “표 봅시다. 표를 한 번 보여주세요.” 하는데, 표는 안 보여주고, “아이구, 총각! 내 인물 괜찮지?” 이래 나와 버리면 영화관에 못 들어가잖아요.
천국 가는데, “언약을 봅시다. 내가 준 언약.”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는 그 약속, 십자가 약속. 피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저, 얼마나 착했다구요. 개도 키우고..” 왜 엉뚱한 소리를 해요. 왜 엉뚱한 소리를. “그거는 뭐 우리교회 목사님이..” 자꾸 그러지 마시고, 성경을 봐야 해요. 성경을. 성경은 육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영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또 영을 원했다고, “그때 계시가 왔는데, 계시의 음성이 삐리링 하더니만 주께서 무지개 타고..” 그거 말고.
야곱이 자기 사랑의 증거를 붙들고, 니 죽으며 나 죽어. 너 없으면 나 죽는 거야. 그거. 정말 주님 없으면 나 죽겠습니다. 그거. 그게 주님 믿는 거잖아요. 주님 사랑하는 거잖아요. 주님 없이 나 왜 살지? 주님 없으면 나 살 이유가 없습니다. 뭐 터널 영화에 그 한 대목 나오는데 그거 때문에 영화 보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지루하니까. 근데 그 대목 하나는 괜찮아요. “나는 파묻혀 죽으니까 당신 혼자 잘 살아.” “아니야. 나는 당신 없으면 나는 살 이유 없어.” 이게 바로 사랑의 매치입니다. 이 말은 평소에 뭐냐 하면, “나는 나로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당신 바라보는 그 의미 때문에 나는 당신한테 붙어 있는 거야.” 라는 그런 뜻이에요. 다들 뭐 그런 남편들하고 지금 살고 계시겠죠.
11절 봅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징계는 왜 하죠? 징계는 육으로 사는 사람을 영의 관계로. 육, 독자적으로 사는 것 말고, 이제부터는 니는 내 식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이라는 겁니다. 영을 모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받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죠. 아, 주께서 이렇게 언약으로, 용서로 구원하는구나. 주님의 용서가 이렇게 다시 확인이 되면 주께 징계 받아서 처음부터 영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고.
그렇지 않고 육으로 나온 징계는 어떤 것이냐 하면, 이렇게 때리시면 저는 더는 못합니다.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십니까? 이럴 것 같으면 진짜 저는 예수 믿는 것 힘들어서 못 믿겠습니다. 빠이빠이.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인사하고 그 다음부터 예수 안 믿고. 이게 뭐냐 하면 예수여 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당신이 뭘 보태줬습니까?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관계가 없죠. 관계가 없는 것은 종의 자식이죠. 진짜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이 아니고 종의 자식입니다.
예수 왜 믿는데? 나한테 필요해서 믿지.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면 안 됩니다. 필요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한테 필요한 존재라서 주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가. 볼품도 없는데. 볼품없다는 것이 장점이에요. 이번 여름수련회 강의할 때 했죠? 베드로가 왜 교회 반석이 되는 겁니까? 그 대목에서 저도 생각해도 참 재미있었는데요. 베드로가 왜 교회 반석이 되죠? 베드로가 뭐 한 사람이에요? 베드로가 대표로 배신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대목에서 분명히 했다고요. 우리가 아무리 죄 지어도 주님을 노골적으로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남아있는 쿠폰이 많이 남아 있다고. 약간의 농담이 섞인.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죄 지으면 안 되고.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반석이 된다는 베드로가 그렇게 그다지 훌륭한 사람은 아니죠. 우리보다 못난 사람이다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노골적으로 배신은 안 하잖아요. 나 저 사람 저주하고 싶다. 이렇게는 안 한다 말이죠. 혹시라도 벼락맞을까봐.
근데 베드로는 노골적으로 그렇게 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용서는 얼마나 대단한지. 37도라도 에어컨 켜니까 얼마나 위력이 대단합니까? 집사님 또 누진세 걸려서 전기세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용서의 위력을 우리가 너무 하찮게 여겨요. 왜? 평소에 자기 관리를 자기가 충실하게 하다보니까, 그 까짓것 용서? 라고 해요. 그 까짓것 용서. 그거 뭔데? 나는 원하는 것만 챙기면 되지. 이런 식으로 그저 살아가면 안 돼요. 우리가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주께서 징계를 합니다.
자 그럼 한 번 물어봅시다. 징계할 때 징계가 들어오지는 않죠. 결과가 징계니까. 그럼 뭐가 쑥 우리 안에 다시 충만하고, 충만 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시면 제일 좋아요. 분명히 한다. 그릇에 뭔가 찬다. 그렇게 해버리면 뭐가 걱정이 되느냐 하면, 그럼 목사님 보기에 제가 몇 퍼센트 찼어요? 지금 내 그릇이 몇 분의 몇 차 있고 몇 분의 몇이 비었습니까? 자꾸 이걸 물어요. 그럼 기도하면 이게 반쯤 수위가 올라가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자기 자신을 양적으로 따지니까, 양적으로 따지게 되면 사람이 정신병 걸립니다. 지금 80퍼센트, 아, 20퍼센트만 더 채우면. 이러면 자기 종교놀이, 신앙놀이에 자기가 말려들어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징계가 뭐냐 하면 “아들아 니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아버지는 뭐 아버지죠.” “좋드냐? 싫드냐?” “뭐 좋은 아버지죠. 용돈 주니까.” “에구 공부나 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래 했을 때에, ‘저 애가 사랑이 충만치 않구나.’ 이래 보시면 된다고요. 그런데 어려울 때에, 다 죽어 가는데, 저기서 아버지가 아들아! 하면서 찾아와가지고 배트맨처럼 자기를 안아서 공중에 날지는 않지만 병원에 갔을 때, 그리고 눈 떴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지켜보면서 울어 줄 때, “니가 많이 아프지? 그래 고생이 많았지?” 이렇게 해줄 때, 뭐가 충만한 거예요. 사랑이 충만하죠.
그러면 전에는 아버지 아니었어요? 아버지, 아들 관계 아니었습니까? 전에도 아버지 아들 관계고. 지금은 사고 나서 병원에서 울고 껴안고, 그거 얼마 가지도 않지만, 그렇게 해도 맨 아버지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맞죠? 차이가 뭡니까? 사랑이 충만한 관계다 이 말이죠.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걸 많이 느끼죠. 그럼 많이 느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지간한 일에 대해서 아버지를 의심하거나 하지 않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어지간한 인생에 대해서 불평불만이 적어지는 거죠.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먹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인생 살기 더러워서 먹잖아요. 좋아서 먹는 경우도 있지만. 기뻐서 먹는 경우도 있는 것 알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술은 도저히 못 견뎌서, 이렇게 살다 내 정신이 돌아버린다 해서, 술기운이 아니면 내가 저 꼬라지를 못 보겠다고 해서, 술 먹어요. 술 먹을 때 많이 먹는다고 해서 알콜 중독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반병씩 먹으면 알콜 중독이 되거든요.
그래서 의외로 여자들도 알콜 중독이 많아요. 남편 출근하고, 애 학교 보내놓고, 홈드레스 입고 바깥에 나가 여러 가지 생각하면서 좋은 이슬인지, 아침이슬인지 계속 먹는 거예요. 정기적으로. 많이도 안 먹어요. 나중에는 손 벌벌 떨면서 먹어야 해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언약이 없으니까. 용서도 없고, 사랑도 없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성도는 자기가 누군지도 알고, 죽어서 어디 가는 것도 알고, 주께서 일찍 왔다는 것도 알고, 맹탕으로 온 것이 아니고 그냥 용서가지고 들이닥친 것도 알고.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의인은 한 명도 없고 예수님만 의인이고, 다만 의인되도록, 용서받은 사람들만 성도가 되는 이런 것도 알고. 이런 것들을 아니까, 성경을 아니까, 알지만 당장 돈은 안 되니까 잊어버리다가 주께서 징계를 하게 되면 내 신분이 누군지를 다시 한 번, 그게 일어날 때 그게 징계의 효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흔히 말하는 성령의 충만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뭐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알았으니까, 알아도 얼마 안 가겠지만. 얼마 안 가거든 그때 물으세요. 성령 충만에 대해서 우리가 워낙 오해했던 이유가 금요철야기도 할 때마다 성령 충만을 언급했어요. 여러분들이 빡세게, 목이 쉬도록 고함을 치면서 주여! 이런 식으로 해야, 성령 충만 이라고 하니까 빈 그릇해가지고, 이게, 자꾸 빈 그릇에 마일리지가 쌓이듯이 쌓이는 것으로 생각 한 거예요. 지금 충만, 곧 충만이 넘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편한테 전화 와서 빨리 집에 안 들어와! 이래가지고 쑥 떨어지니까 마저 채우고 가야 해요. 채우면 뭐 합니까? 집에 와서 한바탕 싸우면 그릇 다 깨지고. 있는 바가지까지 다 깨져가지고 있는 물 다 쏟아 붓고. 그 다음날 새벽에 가서 또 주여! 이렇게 하고 있고. 이게 무슨, 이런 노이로제가, 신경질환이 어디에 있어요? 매 주마다 이래요. 매 주마다. 금요일마다. 자꾸 자기를 그릇으로 생각해가지고.
거기다가 목사는 시편 이야기하면서 입을 크게 열라고 하니까, 각도를 많이 벌리면 많이 채워주고, 쪼끔 열면 안 채워준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목사가 사기를 치기를, 안 되는 것도 여러 개 해야 그 중에 하나는 들어맞지. 로또 한 장 사가지고 되나, 천 장은 사야지. 그처럼 많이 달라고 하면 그 중에 하나는 건진다고. 아이고, 이게 투전판도 아니고, 사기판도 아니고, 완전히 다단계도 아니고. 그거는 교인들이 그런 이야기만 이해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이야기만.
평소에 자기 생각하고 똑같은 거죠. 육이니까. 영은 그게 아니고 언약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관계지, 내가 얼마나 많이 움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나하고 보이지 않는 주님과는 언약적인 브릿지bridge, 언약적인 다리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리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그 다리의 위력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것. 그 다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 그 다음에 같은 취지의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절,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여기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근거가 13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그 선한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은 말려든 거예요.
주의 일을 알리는 그런 증거자로, 천사가 모집책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꼬셔진 거예요. 천사가 모집책이라면. 우리는 성령과 천사에 의해서, 주님이 우리한테 의논하기 전부터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미 다 해결해놓으셨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번 겨울 대전수련회는 골로새서를 할 겁니다. 골로새서의 핵심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3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땅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게 너무 어려워서 감당을 못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땅에서 죽었다면 할 게 없더라는 겁니다. 할 게 없는데, 왜, 골로새서 뒷부분에 가면 이거해라, 저거 하라고 왜 하느냐 말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죽었다면, 죽은 놈한테 무슨 짓을 해요? 죽었는데? 그렇다면 아무 짓을 하지 말아야죠. 죽었다. 끝. 하고 골로새서를 끝내야 하는데, 죽었다 해놓고 뒤에는 아내 있는 자는 남편을 뭘 복종하기를, 죽었는데, 왜 명령과 지시, 잔소리를 왜 해대냐 말이죠. 죽었는데. 이게 그들이 난처한 거예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처한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골로새서를 우리가 하는 겁니다.
이 골로새서를 모르겠다는 말은,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모든 성경을 모르겠다. 이래야 사실 솔직한 거예요. 골로새서만 모르고 딴 건 알겠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모든 사상은 하나로 다 통하거든요. 여기 13절은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예수님의 증인되라고. 주님께서 너를, 아까 13장에서 언약의 피라고 했잖아요. 언약의 피. 언약을 증거하기위해서 우리를 불렀기 때문에, 우리가 주저앉을 때마다, 일어나! 일어나서 또 살아야지. 용서를 이야기해야지. 또 주저앉으면 또 끄집어내서 또 용서를 이야기하게 해요.
그럼 용서를 어떻게 이야기해요? 니가 지은 죄만 이야기하면 그게 용서야. 죄와 더불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되면 주께서 우리 기능을 다하게 하는 겁니다. 자, 14절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거는 구약을 찾지 않겠습니다.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제가 간추려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제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성전에 관여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죠. 자, 그럼 묻습니다. 레위지파 중에 제사장이 있는 것, 여러분이 아시죠? 제사장은 레위지파입니다. 유다지파 제사장 없습니다. 제사장은 무조건 레위지파입니다.
그러면 제사장 하는 일이 레위지파의 일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다른 것 맞습니다. 레위지파 하는 일은 기구를 운반하고 정리하고 관리하고 그런 것 하는 것이 레위지파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 기구를 직접 만지는 것은, 그거는 레위지파가 하지 못하고 제사장이 해야 됩니다. 그러면 같은 레위지파인데 우리 좀 하자고 나댔던 사건이 바로 고라자손의 쿠데타였습니다. 땅이 갈라져서 그 고라 자손이 파묻혀서 다 죽었어요.
자, 그렇다면 같은 지파인데, 니네 나나 같은데, 니 하는 것 좀 하자. 했을 때, 하나님의 율법에 보면 만약에 제사장이 만지는 성물이나 기구를 만진다면 죽으리라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거룩의 영역을 침범한 거예요. 그 부분을 생각해서 방금 읽었던 히브리서 12장 14절 생각해보는 거예요. 누구든지 거룩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룩이 없으면.
그럼 우리는 거룩, 거룩, 뭐 하늘만 쳐다보고 거룩, 이러면 하나님이 인정해줍니까? 아니에요. 무엇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레위기, 출애굽기, 민수기에서 구체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지파, 그리고 또 레위지파가 만나지 않은 일반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또 죽습니다. 일반백성들과 레위지파, 레위지파와 제사장, 그 세 가지의 부류가운데 그 사이에 두 개의 경계선이 있고, 그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누구든지 죽는데, 죽는 이유가 거룩함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요.
그러면, 목사님. 거룩이 뭡니까? 답변은 벌써 나왔습니다. 영원히 저주받을 수 있는 요소가 거룩이 돼요. 왜 이렇게 설명해야 되느냐 하면,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윤리, 도덕적으로 설명해야 돼요. 이 윤리, 도덕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아무리 거룩해도 우리 행함으로 그걸 실천해 낼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걸린다 뿐이지. 서로 용서해라. 자, 서로 용서하려면, 그걸 이루려면, 첫째 조건이 뭐냐 하면 서로 용서하라를 성령 없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지혜 없이, 그냥 용서가 되려면, 육적으로 하려면, 우선 몸이 건강해야 돼요. 찡그리면서 용서한다고 하면, 니 몸이나 나아. 남 걱정하지 말고.
부모가 아파서 눈 밑이 시커멓게 되어 누워서 말도 못하고, “야야, 니 왔나?” 말도 못하고 있는데, “어머님. 여기 막내딸 데리고 왔습니다. 힘내세요. 더 사셔야 됩니다.” “야야, 니가 왔구나. 그래. 나 좀 일으켜 다오.” “그냥 누워 계세요.” 아프면서 일으킴 받아서 서랍을 열고서 하는 말이 “니 줄라고 봉투 해놨다.” 이러면 받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이 아주 뭐, 몸이나 건강하지. 내가 이만큼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거예요. 몰래 주지. 통장에 넣어주면 괜찮아요. 있는데서 티는 다 내. “야야, 봉투에 건물 문서 있다. 3층밖에 안 되지만 니 가게 세 받고 살아라.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걸 공개적으로 하면 다른 형제들은 뭐가 됩니까? 다른 형제들은 n분의 1로 나누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하면... 그때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뭡니까? “어머님. 몸이나 챙겨야죠.”
다시 말해서 용서가 되려면 어떤 상태여야 하느냐 하면 아프면 용서가 안 돼요. 그 이야기 하려고 지금 이런 상황 극을 벌인 겁니다. 이건 너무난 상식인데, 자꾸 교회에서 용서하라고 하니까, 지 몸도 이빨아파서 있으면서, “형제님. 용서합니다.” 같이 사랑한다고 찬송까지 불러가면서. 제발 그런 가증한 가면파티는, 제발 좀 그만 삑(☓) 중지해야 해요.
두 번째는 용서가 되려면 여윳돈이 있어야 돼요. 이게 용서라는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슨 개념입니까? “혹시 형님. 돈 남은 거 있습니까?” 그게 모든 인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용서의 매개체입니다. 정말 이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노골적이죠. “야야, 니가 많이 힘들었구나.” “형님. 말만 하지 말고, 뭐 없나?” 말은 누가 못해. “야야, 니가 애쓴다.” 애쓴다고만 하지 말고, 애쓰는 이유가 뭔데? 뒤에 감춘 거 달라고 애썼는데.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요, 제대로 된 용서겠어요?
이 말은 뭐냐, 아픈 사람은 용서할 자격도 없고, 특히 지도 못살면서 돈 없는 인간은 이 땅에서 용서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흔한 용서조차도 실효성 없는 용서를 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바로 지옥 같은 사회입니다. 거룩요? 거룩도 똑같이 마찬가지에요. 흔히 말하는 거룩하려면 일단 몸이 건강해야 하고, 두 번째 돈이 있어야 되고. 무슨 헌금도 안 하면서 무슨 교회 다니는 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거룩이라는 것은 뭔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거룩이 아니죠. 거룩 아니에요. 거룩함을 좇으라는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자기가 아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거룩의 원형이 뭐냐, 오늘 본문 나와요. 바로 주님이 하신 것처럼. 그럼 거룩은 희생입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이죠. 희생이라는 말을 실감나는 용어로 바꿀게요.
희생이란, “나 손해 봤어.” 이게 희생이에요. “나 자식 키우고 자식한테 어떤 대우도 못 받았어.” 이게 희생이에요. “나 자식 키우면서 나 손해 봤어.” 이게 희생이에요. 희생이 뭐냐, 주님 가신 거룩입니다. 주님은 우리한테 손해 봤어요. 거룩했으니까. 거룩은 뭐냐, 손해니까. 거룩하지 않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나는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아야지.” 이게 바로 거룩의 반대개념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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