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십자가마을 안양강의 -관계 1608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15. 08:44
2016-08-13 00:35:13조회 : 350         
관계 16081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이미아 (IP:122.♡.165.245)16-09-06 23:52 
안양20160812a히12장 9절(관계)-이 근호 목사 

오늘은 히브리서 15장 9절부터 보겠습니다. 12장 9절을 보면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여기 육과 대비된 것이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를 하죠. 육은 육이고, 영은 뭐냐? 영은 뭐 모호하지. 모호한 것, 라면 끓일 때 나오는 수증기 같은 것, 이런 것. 귀신 종류, 옛날 동양철학에서 나오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런 것을 영이라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런 것을 영이라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은 뭐냐, 딱 보면 영이에요. 육인데, 특이한 육. 그게 영입니다. 영인데, 특이한 육이에요. 여러분, 언약이 특이합니까? 언약에 있는 그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이 눈으로 보면 아주 특이합니까?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그걸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영으로 분류해요. 모세가 특이합니까? 뭐 모세가 키가 2미터50이 되고, 몸무게는 뭐 얼마 되고, 않거든요. 뭐 모세도 짜증낼 것 짜증내고, 원망할 것 원망하고 다 하잖아요. 

그런데 모세 뒤에는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이라고 하는 것은 딱 한마디만 하면 다 알아요. 크게 쓰겠습니다. “관계.” 다른 사람은 하나님하고 이 관계가 없지만, 영적 사람은 관계가 있어요. 옛날 장난감 보면 태엽 감아주는 장난감이 있죠. 지금은 애들이 위험해서 그걸 잘 안하는데, 옛날 인형에 보면 옆으로 된 팔자(∞)같은 태엽을 감으면 인형이 막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은요, ‘저 인형이 왜 자꾸 손을 흔들지?’ 근데 어른들은 아는 거예요. 그 뒤에 빡빡 감아주는 것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장난감이 움직이잖아요. ‘모세는 왜 저런 말을 하지?’ 남들 보기에는 똑같아요. 모세를 뭐 앞을 보고 뒤를 봐도 모세는 우리하고 똑같아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똑같아요. 선지자 예레미야도 똑같아요. 심지어 열두 제자는 우리보다 못하죠. 

그런데 이게 뭐가 됐다구요? “관계.” 다시 함해서 아까 자동인형 뒤에 빡빡 감아주는 태엽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막 시작했어요. 지금 영이 뭐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영은 뭐냐 하면, 뭐 모호한 것, 귀신, 자꾸 이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육은 뭐냐,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영은 뭐냐,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래하지 마시고, 영도 눈에 보이는데, 우리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는데, 다만 뒤에 태엽 감아주는 것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걸 구약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전에 군에 있을 때, 성경을 보면서, 군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성경을 좀 보는데, 제일 궁금했던 것이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영적사람, 또는 영의 사람, 하나님의 신이, 성령 받아라. 이런 것이 있는데, 뭐가 다르지? 이걸 주위에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뭐가 다르지? 갑자기 근육이 좋다든지, 뿔이 나든지, 뭐 이런 것. 머리를 길러서 머리를 묶었다든지, 그런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가 다르지? 지금은 알죠. 

다른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반면에, 성령 받은 사람은, 열두 제자, 사도, 구약 선지자들, 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없고, 주께서 태엽 감아주는 대로 감겼다 풀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게 영의 사람입니다. 그럼 영의 사람의 이 관계, 그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그 내용을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여러분, 얼추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죠?  

영은 있다? 없다? 있다. 보고 싶다. 봐라. 어? 우리하고 똑같네? 아니다. 그 뒤에 주와 관계가 있다. 어떤 관계? 다른 사람은 지 인생 자기가 알아서 챙기고 사는데, 이 사람은 주께서 인도하는 데로 갈 수밖에 없는. 그래서 모세는 수시로 물어요. “하나님이여, 이 백성들이 나를 무시합니다. 이 백성은 숫자가 많아서 저는 감당 못합니다. 어찌할까요?” “모세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이 뭐하는 거야? 이러는데 모세는 이걸 다 알아요. 

모세가 지시받는 것뿐만 아니고, 모세가 책망 받는 것도 주의 지시에 따라 책망 받아요. “왜 니가 사람들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팡이 가지고 왜 두 번 쳤느냐? 내가 그냥 지시하라고만 했는데 왜 두 번 쳤느냐?”(민20장)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이걸 치나, 그냥 물만 나오면 되지? 하잖아요. 그게 육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아, 이게 모든 계획은 내가 관할 할 문제가 아니고 관할 할 분이,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내가 화가 나서 깜빡 잊어버렸구나. 

여러분의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랬으면 좋겠네~ 정말 내 인생은 없어지고, 주께서 정말 기계적으로 태엽을 감아줬으면 좋겠어요. 안 될 때는 더 세게 감아줘서 그 하나님의 언약만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자, 언약이 나타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언약이 나타나게 되면 용서가 나타납니다. 특징이.  용서가.
용서가 나타나면서 그 다음에 동반해서 나타나는 것이 뭐냐 하면 죄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죄 짓고 용서받잖아요? 이거는 우리의 상식이고. 성경은 뭐냐 하면, 용서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아, 이게 바로 죄였기에, 이 죄를 용서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때도 같은 이야기했어요. 양말부터 나오고 그 다음에 발을 들이대라고 했잖아요. 들어보셨다니까 기억납니까? 양말부터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맞는 발을 찾듯이, 주께서는 용서부터 먼저 주시고, “자, 이 용서에 합당한 사람 누구게?”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럼 잘난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여, 저는 용서 필요 없습니다. 왜? 워낙에 깨끗하고 잘났으니까. 율법 지키는 것 저도 한 율법 지킵니다. 저도 이번에 뭐 헌금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전도를 열 명이나 했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뒤에 언약의 태엽이 없어요. 태엽이 없으니까, 그러다보니까 평소에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챙기다보니까, 이거는 관계 자체가 수립이 안 되죠. 

관계가 되려면 숫자 1이 되면 안 되고, 나와 다른 분, 이 둘이 나와야 하는데, 지 인생 지가 알아서 해버리면 뭘 찾을 수가 없습니까? 관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관계를. 자, 여기까지는 여러분에게 쉽습니다. 그렇다면 징계가 뭐냐, 징계는 육을 뭐로 바꾼다? 영으로 바꾸는 거예요. 너 영적인 인간이잖아? 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라고 하니까 뭐 울고불고 집안에 돈 날아가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 본연의 모습을 다시 찾도록 해주는 것을 징계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징계가 집안 말아먹는 것도 징계가 되지만, 갑자기 집안이 잘 풀리는 것, 잘 풀리는 집 있잖아요? 두루마리 휴지. 잘 풀릴 때도 징계입니다. 하는 일마다 너무 잘 돼. 이거 주의해야 합니다. 제 말이 아니고 신명기 9장에 나온 말입니다. 니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마치 너가 잘 해서 잘 되는 것처럼 한다면 나는 너를 추방시키겠다. 그게 언약이에요. 줘놓고, 이거는 분명히 이만큼 잘 된 것은 내가 그만큼 침착했고, 신앙생활 잘 했고, 조심조심, 조심에 또 조심을 했기 때문에 하자가 없이 내 노력으로 잘 했다. 이런 생각을 해버리면 주께서 원하시는 이 관계성이 확 빠져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내 것은 아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항상 독자적으로 살면 안 되고, 항상 내 인생은 내가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관여해서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대략적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가, 잠시 히브리서는 이따가 하고 창세기 33장을 봅시다. 창세기 33장 1절에서 2절까지만 누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절,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됐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들은 뭘 발견을 해줘야 해요. 자 사 백 명이 옵니다. 야곱은 예상합니다. 옛날에 형이 나한테 악한 감정을 먹었기 때문에, 그때 나를 죽이려고 했거든요. 그러면 형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나중에 세월이 지나도 마찬가지로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이 분명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나를 죽이러 오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하고 대비하고 있는 겁니다. 대비할 때, 자식들이 있잖아요. 자식들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세 종류로 분류를 해요. 

여종과 그 자식들은 어떻게 두고? 앞에 두고. 제일 위험한 구석에다 몰아세우고, 그 뒤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 다음에 두고. 마지막에 뭐냐, 라헬과 요셉은 제일 마지막에 두는 것. 자, 사실은 이 내용은 <불편한 여정>이라는 책, 민수기 할 때 이 내용을 제가 언급을 했었습니다. 멘델의 법칙하면서 했거든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이 뭐냐, 언약이 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관계가 뭐냐? 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 예, 그거 참 옳은 말입니다.” “근데 관계가 뭐죠?” “어? 관계가 뭐지?” “관계는 언약입니다.” “아, 예, 언약이군요.” “그럼 언약이 뭐죠?” “어? 그건 또 뭐지?” 예, 예, 하지만 점점 그 내용에 구체화 들어가게 되면, 결국은 이 사실을 모르면, “나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날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라고 큰소리치지만, 나중에 신앙에 권태기가 돼버리면, 멍하게 돼버리면, ‘내가 신앙인이 맞나?’ 본인이 본인의 신앙에 대해서 뭔가 잡히는 것이 없어요. 잡히는 게 없어요. 

대표적인 예가 목사들이잖아요. 목회 한 30, 40년 하게 되면 전혀 신앙인의 구석이 없어요. 처음에는 믿는다고 우기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아니었었어요. 그냥 생활인이지, 신앙인이 아니죠. 그냥 국민입니다. 하늘나라 국민이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다만 그걸 교인들이 눈치 채면 안 되니까 조심하죠. 행정적인 그 모습으로, 관행으로 자꾸 때우지, 누가 복음에 대해서 물으면, 에이, 그런 초보적인 것을 저한테 묻습니까? 이런 것은 전도사한테 물으세요. 이렇게 미루지만. 본인은 이미 그런 것에 대해서 버린 지 옛날입니다. 사람을 꼬셔가지고 목회만 잘해서 나에게 돈만 되게 하면 그만이지. 뭐 목회 50년 하고 아직까지 말씀에 관심 있다? 40년 목회했는데, 말씀 관심이 있는 분이 있다면 여기 계신 분 빼놓고 누가 관심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교회가 돈벌이가 되지, 말씀이 돈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목사는 목사가 아니고 그냥 생활인이라니까요. 그냥 돈 버는 생계인이에요. 오늘 제목을 생계인이라고 할까? 기도해주고 돈 받아 챙기는, 수수료 챙기는 그런 같은 생활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너무 많은 욕을 하지 마세요. 그거 자기 직업인데 욕하면 안 되죠. 그 사람들한테 자꾸 복음이 뭐냐고 성경내용을 자꾸 묻지 마세요. 교회법은 물어야 되죠. 이번 제직회 3분의 2입니까? 그런 것은 자꾸 물어야 되지, 성경내용 물으면 이거는 목사한테 실례가 돼요. 오늘 오랜만에 바른 소리하니까 기분이 좋네. 

언약이 뭐냐? 언약이? 야곱이 언약을 보여주는데 순서를 정한 거예요. 종과 그 다음에 레아와 마지막에 야곱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지점은 라헬이 여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간격은, 이 거리는 어떤 거리냐 하면 사랑의 거리. 멀리 있으면 그만큼 사랑이 얕아지는 거예요. 언약은 뭐냐 하면 관계인데, 이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니 없으면 내가 죽는다는 정도로. 그 관계. 그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나, 당신 없으면 나 죽을 거야?” “여보! 나는 이미 터널에 묻혀서 죽게 되었으니까 당신은 애 잘 키워.” 그럴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당신 없으면 나도 같이 죽을 거야.” “그런 소리하지 마.” 

관계가 뭐냐 하면, 남편은 나는 죽을 테니까 애 잘 키우라고 하면서 관계를 끊고자 할 때, 여보!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야. 당신 죽으면 나도 죽어. 이게 관계에요. 당신 죽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야곱은 아버지가 나에게 축복을 할 때, 나의 이 축복권을 그 다음 후대에 넘기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관계를 갖고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죽던 말든, 하여튼 내가 사랑했던, 원래 야곱이 결혼하고 싶어 했던 사람은 라헬이었습니다. 왜? 레아는 못생겼거든요. 근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레아, 라헬의 아버지가 알아요. 삼촌관계지만. 아버지가 알아요. 알아가지고 마트 세일할 때, 1+1하는 거 있잖아요. 안 팔리는 거 하나 끼워주잖아요. 세일하면서 언니를 끼워준 거예요. 더불어. 

남자가 여자 하나 감당 못해요. 근데 꼴 보기 싫은 여자까지 감당하려고 하니..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뭐냐 하면 속이는 자거든요. 속이는 자인데 야곱 본인이 속임을 당했어요. 근데 결국은 그걸 복수한답시고 삼촌을 속여서 실하고 번식 잘하는 양들만 골라서 자기 것으로 사전에 빼돌렸죠. 왜냐하면 육종(일반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입장에서나 가축을 사양하는 입장에서는 품종개량 또는 가축개량이라는 말로 쓰고 있다.)에 관한 노하우를 실무자가 알기 때문에, 어느 날 우연히 버드나무를 보니까 얼룩덜룩한 실한 양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삼촌은 그걸 몰랐으니까, 자기만 아는 노하우, 그러니까 기업 비밀을 써먹은 거죠. 기업비밀을 써먹어가지고 그 기업에 중요한 핵심기술을 전부 다 빼돌려서 자기 양으로 돌린 겁니다. 

성경에 나온 이러한 야곱의 행동은 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냥 달랑 언약만 등장하는 법이 없고, 썩어빠진 세상, 속고 속이는, 그 악함을 전제로 해서, 언약이 그 악함을 뒤집어쓰고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뒤집어쓰고. 여러분, 아까 강아지 있잖아요. 강아지가 안 듣는다 치고, 이 강아지를 요 앞에 안양천인가, 거기에 집어넣었다 칩시다. 강아지기 기어 나오면서 ‘내가 이 꼴로 해서 집에 들어가면 집이 얼마나 어질러지겠나? 내가 여기 잠시 몸 씻고 나가야지.’ 그런 강아지 없어요. 진흙탕에 들어갔다가 시커먼 채로 주인 오면 그냥 반갑다고 나오잖아요.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자기 몸단장하고 썬 크림 바르고 이래가지고 구원받지 마세요. 그냥 죄를 온 머리부터 해가지고, 머리는 비비꼬아져서 레게머리처럼 해가지고, 죄 덩어리 채로 올라오는 탕자를. 그래야 뭐가 유효하냐 하면, 용서가 유효합니다. 용서가. 그런데 자기 얼굴 단장하고 자기에게 신경 쓰게 되면 용서 앞에 자기 신경 쓰는 것이 비로소 죄가 되는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용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용서의 빛 앞에서 비로소 죄가 드러날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많은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아예 그 본체 되는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니까요. 니가 이런 죄를 지었지? 왜 그랬냐? 이게 아니고 너는 죄인이야.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돼버리는 겁니다. 죄인이 죄 짓지. 뭐 할 건데? 술 먹는 것도 죄인이고, 술 안 먹는 것도 죄인이고. 십일조 한 것도 죄고, 십일조 안 한 것도 죄고. 

여기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은연중에 자신의 언약 사람들을 완전히 까발린 거예요. 종의 자식과 본처 자식을 구분하고 본처 자식 가운데 레아와 라헬을 구분해서 결국은 한 명의 아들이 다른 아들을 다 살리는 기능으로 언약이 다 정리됩니다. 그 귀하게 여겼던 자식 이름이 뭡니까? 여기 33장에 야곱은 누구와 가장 밀착이 되어 있습니까? 요셉이죠. 창세기 뒤에 보면 뭐로 끝나느냐, 요셉 하나가 총리가 되어 가지고 그 요셉을 팔아먹고 죽이자 하고 시기 질투했던, 그 형제들을, 아버지, 어머니 그 형제들 몽땅 다 살려내는 이야기로 창세기는 마감돼요. 
  
그리고 요셉이 죽고 난 뒤에, 그 요셉의 해골을 여호수아 23장 마지막에 보면 여호수아가 다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요셉의 해골을 세겜에 묻는다는 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 땅을 결코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내놓으신 언약을 우리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성취를 시켰습니다. 그걸 증거 한 땅이 약속의 땅이고 신약에서 그걸 두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딴 게 아니라 천국 못 가는 인간을 천국 가게 만드는 것이 성경이거든요. 

그러면 천국가려면 언약을 알아야 가거든요. 언약이 뭡니까? 이 모든 공로가 우리가 아니고 누구의 공로다? 하나님이 스스로 내린 약속에 준해서 약속을 성취했던 그 결과가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자, 그럼 묻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한 대로 이룬다면 우리 쪽에서 주님께 약속을 내밀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쪽에서.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는데도 계속 해대니까 문제가 되는데. 뭐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안 할 우리가 아니거든요. 답답하면 해야죠. 하는데, 우리가 내놓는 것을 맞장 춰줘서 응답받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왜 우리는 육에 태어나서 육의 것만 원하는데 비해서, 오늘 본문 히브리서를 다시 봅시다. 히브리서 들어가 봅시다. 주님은 육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육은 영을 모르잖아요. 이쯤하면 또 잊어버렸죠. 왜 육은 영을 모르느냐 하면 육은 독자적으로 살고 영은 뭐로 산다? 관계로 살고. 오늘 여러 번 이야기할 거예요. 영은 뭐냐, 모호한 귀신이 영이 아니고 관계라니까요. 관계. 보이지 않는 주님과 덩어리, 또는 장난감 뒤에 있는 태엽처럼. 관계라니까요. 주께서는 관계를 원해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면 “뒤돌아봐! 너 덩어리하고 주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보자. 관계가 예수님의 십자가네. 주님이네. 니 그럼 구원받지.” 자꾸 나를 앞장세우려고 하지 말고 나와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수집해서 천국을 구사하는 거예요. 그럴 수집해서. 정말 이거 쉬운 거예요. 영화관에 입장하는데, “표 봅시다. 표를 한 번 보여주세요.” 하는데, 표는 안 보여주고, “아이구, 총각! 내 인물 괜찮지?” 이래 나와 버리면 영화관에 못 들어가잖아요. 

천국 가는데, “언약을 봅시다. 내가 준 언약.”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는 그 약속, 십자가 약속. 피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저, 얼마나 착했다구요. 개도 키우고..” 왜 엉뚱한 소리를 해요. 왜 엉뚱한 소리를. “그거는 뭐 우리교회 목사님이..” 자꾸 그러지 마시고, 성경을 봐야 해요. 성경을. 성경은 육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영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또 영을 원했다고, “그때 계시가 왔는데, 계시의 음성이 삐리링 하더니만 주께서 무지개 타고..” 그거 말고. 

야곱이 자기 사랑의 증거를 붙들고, 니 죽으며 나 죽어. 너 없으면 나 죽는 거야. 그거. 정말 주님 없으면 나 죽겠습니다. 그거. 그게 주님 믿는 거잖아요. 주님 사랑하는 거잖아요. 주님 없이 나 왜 살지? 주님 없으면 나 살 이유가 없습니다. 뭐 터널 영화에 그 한 대목 나오는데 그거 때문에 영화 보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지루하니까. 근데 그 대목 하나는 괜찮아요. “나는 파묻혀 죽으니까 당신 혼자 잘 살아.” “아니야. 나는 당신 없으면 나는 살 이유 없어.” 이게 바로 사랑의 매치입니다. 이 말은 평소에 뭐냐 하면, “나는 나로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당신 바라보는 그 의미 때문에 나는 당신한테 붙어 있는 거야.” 라는 그런 뜻이에요. 다들 뭐 그런 남편들하고 지금 살고 계시겠죠. 

11절 봅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징계는 왜 하죠? 징계는 육으로 사는 사람을 영의 관계로. 육, 독자적으로 사는 것 말고, 이제부터는 니는 내 식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이라는 겁니다. 영을 모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받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죠. 아, 주께서 이렇게 언약으로, 용서로 구원하는구나. 주님의 용서가 이렇게 다시 확인이 되면 주께 징계 받아서 처음부터 영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고. 

그렇지 않고 육으로 나온 징계는 어떤 것이냐 하면, 이렇게 때리시면 저는 더는 못합니다.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십니까? 이럴 것 같으면 진짜 저는 예수 믿는 것 힘들어서 못 믿겠습니다. 빠이빠이.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인사하고 그 다음부터 예수 안 믿고. 이게 뭐냐 하면  예수여 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당신이 뭘 보태줬습니까?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관계가 없죠. 관계가 없는 것은 종의 자식이죠. 진짜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이 아니고 종의 자식입니다. 

예수 왜 믿는데? 나한테 필요해서 믿지.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면 안 됩니다. 필요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한테 필요한 존재라서 주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가. 볼품도 없는데. 볼품없다는 것이 장점이에요. 이번 여름수련회 강의할 때 했죠? 베드로가 왜 교회 반석이 되는 겁니까? 그 대목에서 저도 생각해도 참 재미있었는데요. 베드로가 왜 교회 반석이 되죠? 베드로가 뭐 한 사람이에요? 베드로가 대표로 배신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대목에서 분명히 했다고요. 우리가 아무리 죄 지어도 주님을 노골적으로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남아있는 쿠폰이 많이 남아 있다고. 약간의 농담이 섞인.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죄 지으면 안 되고.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반석이 된다는 베드로가 그렇게 그다지 훌륭한 사람은 아니죠. 우리보다 못난 사람이다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노골적으로 배신은 안 하잖아요. 나 저 사람 저주하고 싶다. 이렇게는 안 한다 말이죠. 혹시라도 벼락맞을까봐. 

근데 베드로는 노골적으로 그렇게 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용서는 얼마나 대단한지. 37도라도 에어컨 켜니까 얼마나 위력이 대단합니까? 집사님 또 누진세 걸려서 전기세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용서의 위력을 우리가 너무 하찮게 여겨요. 왜? 평소에 자기 관리를 자기가 충실하게 하다보니까, 그 까짓것 용서? 라고 해요. 그 까짓것 용서. 그거 뭔데? 나는 원하는 것만 챙기면 되지. 이런 식으로 그저 살아가면 안 돼요. 우리가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주께서 징계를 합니다. 

자 그럼 한 번 물어봅시다. 징계할 때 징계가 들어오지는 않죠. 결과가 징계니까. 그럼 뭐가 쑥 우리 안에 다시 충만하고, 충만 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시면 제일 좋아요. 분명히 한다. 그릇에 뭔가 찬다. 그렇게 해버리면 뭐가 걱정이 되느냐 하면, 그럼 목사님 보기에 제가 몇 퍼센트 찼어요? 지금 내 그릇이 몇 분의 몇 차 있고 몇 분의 몇이 비었습니까? 자꾸 이걸 물어요. 그럼 기도하면 이게 반쯤 수위가 올라가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자기 자신을 양적으로 따지니까, 양적으로 따지게 되면 사람이 정신병 걸립니다. 지금 80퍼센트, 아, 20퍼센트만 더 채우면. 이러면 자기 종교놀이, 신앙놀이에 자기가 말려들어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징계가 뭐냐 하면 “아들아 니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아버지는 뭐 아버지죠.” “좋드냐? 싫드냐?” “뭐 좋은 아버지죠. 용돈 주니까.” “에구 공부나 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래 했을 때에, ‘저 애가 사랑이 충만치 않구나.’ 이래 보시면 된다고요. 그런데 어려울 때에, 다 죽어 가는데, 저기서 아버지가 아들아! 하면서 찾아와가지고 배트맨처럼 자기를 안아서 공중에 날지는 않지만 병원에 갔을 때, 그리고 눈 떴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지켜보면서 울어 줄 때, “니가 많이 아프지? 그래 고생이 많았지?” 이렇게 해줄 때, 뭐가 충만한 거예요. 사랑이 충만하죠. 

그러면 전에는 아버지 아니었어요? 아버지, 아들 관계 아니었습니까? 전에도 아버지 아들 관계고. 지금은 사고 나서 병원에서 울고 껴안고, 그거 얼마 가지도 않지만, 그렇게 해도 맨 아버지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맞죠? 차이가 뭡니까? 사랑이 충만한 관계다 이 말이죠.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걸 많이 느끼죠. 그럼 많이 느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지간한 일에 대해서 아버지를 의심하거나 하지 않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어지간한 인생에 대해서 불평불만이 적어지는 거죠.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먹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인생 살기 더러워서 먹잖아요. 좋아서 먹는 경우도 있지만. 기뻐서 먹는 경우도 있는 것 알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술은 도저히 못 견뎌서, 이렇게 살다 내 정신이 돌아버린다 해서, 술기운이 아니면 내가 저 꼬라지를 못 보겠다고 해서, 술 먹어요. 술 먹을 때 많이 먹는다고 해서 알콜 중독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반병씩 먹으면 알콜 중독이 되거든요. 

그래서 의외로 여자들도 알콜 중독이 많아요. 남편 출근하고, 애 학교 보내놓고, 홈드레스 입고 바깥에 나가 여러 가지 생각하면서 좋은 이슬인지, 아침이슬인지 계속 먹는 거예요. 정기적으로. 많이도 안 먹어요. 나중에는 손 벌벌 떨면서 먹어야 해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언약이 없으니까. 용서도 없고, 사랑도 없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성도는 자기가 누군지도 알고, 죽어서 어디 가는 것도 알고, 주께서 일찍 왔다는 것도 알고, 맹탕으로 온 것이 아니고 그냥 용서가지고 들이닥친 것도 알고.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의인은 한 명도 없고 예수님만 의인이고, 다만 의인되도록, 용서받은 사람들만 성도가 되는 이런 것도 알고. 이런 것들을 아니까, 성경을 아니까, 알지만 당장 돈은 안 되니까 잊어버리다가 주께서 징계를 하게 되면 내 신분이 누군지를 다시 한 번, 그게 일어날 때 그게 징계의 효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흔히 말하는 성령의 충만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뭐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알았으니까, 알아도 얼마 안 가겠지만. 얼마 안 가거든 그때 물으세요. 성령 충만에 대해서 우리가 워낙 오해했던 이유가 금요철야기도 할 때마다 성령 충만을 언급했어요. 여러분들이 빡세게, 목이 쉬도록 고함을 치면서 주여! 이런 식으로 해야, 성령 충만 이라고 하니까 빈 그릇해가지고, 이게, 자꾸 빈 그릇에 마일리지가 쌓이듯이 쌓이는 것으로 생각 한 거예요. 지금 충만, 곧 충만이 넘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편한테 전화 와서 빨리 집에 안 들어와! 이래가지고 쑥 떨어지니까 마저 채우고 가야 해요. 채우면 뭐 합니까? 집에 와서 한바탕 싸우면 그릇 다 깨지고. 있는 바가지까지 다 깨져가지고 있는 물 다 쏟아 붓고. 그 다음날 새벽에 가서 또 주여! 이렇게 하고 있고. 이게 무슨, 이런 노이로제가, 신경질환이 어디에 있어요? 매 주마다 이래요. 매 주마다. 금요일마다. 자꾸 자기를 그릇으로 생각해가지고. 

거기다가 목사는 시편 이야기하면서 입을 크게 열라고 하니까, 각도를 많이 벌리면 많이 채워주고, 쪼끔 열면 안 채워준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목사가 사기를 치기를, 안 되는 것도 여러 개 해야 그 중에 하나는 들어맞지. 로또 한 장 사가지고 되나, 천 장은 사야지. 그처럼 많이 달라고 하면 그 중에 하나는 건진다고. 아이고, 이게 투전판도 아니고, 사기판도 아니고, 완전히 다단계도 아니고. 그거는 교인들이 그런 이야기만 이해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이야기만. 

평소에 자기 생각하고 똑같은 거죠. 육이니까. 영은 그게 아니고 언약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관계지, 내가 얼마나 많이 움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나하고 보이지 않는 주님과는 언약적인 브릿지bridge, 언약적인 다리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리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그 다리의 위력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것. 그 다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 그 다음에 같은 취지의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절,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여기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근거가 13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그 선한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은 말려든 거예요. 

주의 일을 알리는 그런 증거자로, 천사가 모집책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꼬셔진 거예요. 천사가 모집책이라면. 우리는 성령과 천사에 의해서, 주님이 우리한테 의논하기 전부터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미 다 해결해놓으셨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번 겨울 대전수련회는 골로새서를 할 겁니다. 골로새서의 핵심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3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땅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게 너무 어려워서 감당을 못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땅에서 죽었다면 할 게 없더라는 겁니다. 할 게 없는데,  왜, 골로새서 뒷부분에 가면 이거해라, 저거 하라고 왜 하느냐 말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죽었다면, 죽은 놈한테 무슨 짓을 해요? 죽었는데? 그렇다면 아무 짓을 하지 말아야죠. 죽었다. 끝. 하고 골로새서를 끝내야 하는데, 죽었다 해놓고 뒤에는 아내 있는 자는 남편을 뭘 복종하기를, 죽었는데, 왜 명령과 지시, 잔소리를 왜 해대냐 말이죠. 죽었는데. 이게 그들이 난처한 거예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처한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골로새서를 우리가 하는 겁니다. 

이 골로새서를 모르겠다는 말은,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모든 성경을 모르겠다. 이래야 사실 솔직한 거예요. 골로새서만 모르고 딴 건 알겠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모든 사상은 하나로 다 통하거든요. 여기 13절은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예수님의 증인되라고. 주님께서 너를, 아까 13장에서 언약의 피라고 했잖아요. 언약의 피. 언약을 증거하기위해서 우리를 불렀기 때문에, 우리가 주저앉을 때마다, 일어나! 일어나서 또 살아야지. 용서를 이야기해야지. 또 주저앉으면 또 끄집어내서 또 용서를 이야기하게 해요. 

그럼 용서를 어떻게 이야기해요? 니가 지은 죄만 이야기하면 그게 용서야. 죄와 더불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되면 주께서 우리 기능을 다하게 하는 겁니다. 자, 14절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거는 구약을 찾지 않겠습니다.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제가 간추려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제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성전에 관여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죠. 자, 그럼 묻습니다. 레위지파 중에 제사장이 있는 것, 여러분이 아시죠? 제사장은 레위지파입니다. 유다지파 제사장 없습니다. 제사장은 무조건 레위지파입니다. 

그러면 제사장 하는 일이 레위지파의 일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다른 것 맞습니다. 레위지파 하는 일은 기구를 운반하고 정리하고 관리하고 그런 것 하는 것이 레위지파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 기구를  직접 만지는 것은, 그거는 레위지파가 하지 못하고 제사장이 해야 됩니다. 그러면 같은 레위지파인데 우리 좀 하자고 나댔던 사건이 바로 고라자손의 쿠데타였습니다. 땅이 갈라져서 그 고라 자손이 파묻혀서 다 죽었어요. 

자, 그렇다면 같은 지파인데, 니네 나나 같은데, 니 하는 것 좀 하자. 했을 때, 하나님의 율법에 보면 만약에 제사장이 만지는 성물이나 기구를 만진다면 죽으리라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거룩의 영역을 침범한 거예요. 그 부분을 생각해서 방금 읽었던 히브리서 12장 14절 생각해보는 거예요. 누구든지 거룩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룩이 없으면. 

그럼 우리는 거룩, 거룩, 뭐 하늘만 쳐다보고 거룩, 이러면 하나님이 인정해줍니까? 아니에요. 무엇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레위기, 출애굽기, 민수기에서 구체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지파, 그리고 또 레위지파가 만나지 않은 일반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또 죽습니다. 일반백성들과 레위지파, 레위지파와 제사장, 그 세 가지의 부류가운데 그 사이에 두 개의 경계선이 있고, 그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누구든지 죽는데, 죽는 이유가 거룩함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요. 

그러면, 목사님. 거룩이 뭡니까? 답변은 벌써 나왔습니다. 영원히 저주받을 수 있는 요소가 거룩이 돼요. 왜 이렇게 설명해야 되느냐 하면,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윤리, 도덕적으로 설명해야 돼요. 이 윤리, 도덕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아무리 거룩해도 우리 행함으로 그걸 실천해 낼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걸린다 뿐이지. 서로 용서해라. 자, 서로 용서하려면, 그걸 이루려면, 첫째 조건이 뭐냐 하면 서로 용서하라를 성령 없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지혜 없이, 그냥 용서가 되려면, 육적으로 하려면, 우선 몸이 건강해야 돼요. 찡그리면서 용서한다고 하면, 니 몸이나 나아. 남 걱정하지 말고. 

부모가 아파서 눈 밑이 시커멓게 되어 누워서 말도 못하고, “야야, 니 왔나?” 말도 못하고 있는데, “어머님. 여기 막내딸 데리고 왔습니다. 힘내세요. 더 사셔야 됩니다.” “야야, 니가 왔구나. 그래. 나 좀 일으켜 다오.” “그냥 누워 계세요.” 아프면서 일으킴 받아서 서랍을 열고서 하는 말이 “니 줄라고 봉투 해놨다.” 이러면 받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이 아주 뭐, 몸이나 건강하지. 내가 이만큼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거예요. 몰래 주지. 통장에 넣어주면 괜찮아요. 있는데서 티는 다 내. “야야, 봉투에 건물 문서 있다. 3층밖에 안 되지만 니 가게 세 받고 살아라.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걸 공개적으로 하면 다른 형제들은 뭐가 됩니까? 다른 형제들은 n분의 1로 나누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하면... 그때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뭡니까? “어머님. 몸이나 챙겨야죠.” 

다시 말해서 용서가 되려면 어떤 상태여야 하느냐 하면 아프면 용서가 안 돼요. 그 이야기 하려고 지금 이런 상황 극을 벌인 겁니다. 이건 너무난 상식인데, 자꾸 교회에서 용서하라고 하니까, 지 몸도 이빨아파서 있으면서, “형제님. 용서합니다.” 같이 사랑한다고 찬송까지 불러가면서. 제발 그런 가증한 가면파티는, 제발 좀 그만 삑(☓) 중지해야 해요. 

두 번째는 용서가 되려면 여윳돈이 있어야 돼요. 이게 용서라는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슨 개념입니까? “혹시 형님. 돈 남은 거 있습니까?” 그게 모든 인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용서의 매개체입니다. 정말 이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노골적이죠. “야야, 니가 많이 힘들었구나.” “형님. 말만 하지 말고, 뭐 없나?” 말은 누가 못해. “야야, 니가 애쓴다.” 애쓴다고만 하지 말고, 애쓰는 이유가 뭔데? 뒤에 감춘 거 달라고 애썼는데.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요, 제대로 된 용서겠어요? 

이 말은 뭐냐, 아픈 사람은 용서할 자격도 없고, 특히 지도 못살면서 돈 없는 인간은 이 땅에서 용서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흔한 용서조차도 실효성 없는 용서를 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바로 지옥 같은 사회입니다. 거룩요? 거룩도 똑같이 마찬가지에요. 흔히 말하는 거룩하려면 일단 몸이 건강해야 하고, 두 번째 돈이 있어야 되고. 무슨 헌금도 안 하면서 무슨 교회 다니는 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거룩이라는 것은 뭔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거룩이 아니죠. 거룩 아니에요. 거룩함을 좇으라는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자기가 아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거룩의 원형이 뭐냐, 오늘 본문 나와요. 바로 주님이 하신 것처럼. 그럼 거룩은 희생입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이죠. 희생이라는 말을 실감나는 용어로 바꿀게요. 


희생이란, “나 손해 봤어.” 이게 희생이에요. “나 자식 키우고 자식한테 어떤 대우도 못 받았어.” 이게 희생이에요. “나 자식 키우면서 나 손해 봤어.” 이게 희생이에요. 희생이 뭐냐, 주님 가신 거룩입니다. 주님은 우리한테 손해 봤어요. 거룩했으니까. 거룩은 뭐냐, 손해니까. 거룩하지 않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나는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아야지.” 이게 바로 거룩의 반대개념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65.245)16-09-06 23:53 
안양20160812b히12장 9절(관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끝에 시간이 지나서 자세히 못했습니다만, 거룩함을 좇으라고 할 때, 방법은 예수님처럼 살면 된다. 그게 거룩함을 좇는 거예요. 거룩함 하면  뭐 주기철 찾고 손양원 찾고 하지 마시고, 테레사 수녀 찾지 마시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계신데 왜 자꾸, 사도바울 있는데 왜 그런, 역사적인 인물을 찾는지, 그건 참 잘못됐어요. 

예수님의 거룩함은 뭐냐 하면 하나의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희생의 삶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그럼 뭐냐 하면 손해 보는 거예요. 해놓고 이익을 못 보는 것. 거룩은 대가를 노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대가를 노리면. 대가를 노리면 이건 아주 음흉한 것이고, 장사속이고, 꼼수가 되는 겁니다. 거룩했으니까 30배 내놓으세요. 이거는 거룩을 모독해도 가장 극단적으로 모독한 것이 그걸 걸요. 착한 일 했으니까 뭐 내놔라. 부모가 자식 키워놓고 내가 우에 키운 자식인데, 근본도 없는 것이 어디 감히 내 아들을 넘봐? 봉투 받고 애 지우고 유학 가든지. 이런 것이 막장드라마에 나오듯이. 어딜 감히 내 아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니가? 자식을 참 거룩하게 키웠습니까? 

결국 뭔가 괜찮다고 여기는 그것을 사수하고 방비하기 위해서, 주변의 모든 것을 강하게 밀칠 때,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거룩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좋은 것은 나누어줘야지. 내가 이 정도 의롭고 이 정도 착한데, 어디 더러운 것들이 내 착함에다가 흠집을 내고 손때를 묻혀? 이거는 전혀 예수님이 생각한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종교의 거룩은 뭐냐, 니가 훌륭한 것을 대외적으로 알려라. 이게 거룩의 동기유발 되었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신앙인 것을 거룩을 통해서 표방하세요. 그럼 이거는 경쟁적이죠. 난리도 아니죠. 

자, 정리해봅시다. 거룩은 희생이다. 희생은 누구의 손해? 예수님의 손해 보심. 예수님의 손해 보심이죠. 근데 우리들의 평소의 육적인 모습은 뭡니까? 우리는 우리의 잘남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손해 보기는 커녕,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겠다는 거죠. 그럼 이 거룩은 두 개의 대립이 되어 버려요. 뭐냐 하면, 손해 보는 결과의 거룩이 있는 반면에, 이 거룩을 빙자해서 이익에 이익을 창출하는 거룩이 있겠죠. 

이 두 개의 거룩이 충돌하는 겁니다. 충돌하는데,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나는 거룩함을 통해서 세상 것을 뭔가 소득으로, 반대급부로 얻고자 하는 이  거짓된 거룩에 진짜 거룩이 찾아오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발견되느냐 하면, 미안스러움이 생기고, 미안스러움은 이게 감사로 이어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꼼수를 가진 것을 주께서 이렇게 들통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인생 자체가 꼼수와 꼼수의 연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신 길은 어찌 우리와 다른지요? 손해보고, 손해보고, 결국 마지막 자기 생명까지 죄인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우리를 구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것은 우리가 기대한 이익이 많은 게 아니라, 주의 희생이 담겨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땅! 땅! 땅! 하고 판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주께서 손해 보셨다는 사실을 품고 있을 때, 우리는 거룩을 품고 있다고 보시면 이거는 정답입니다. 내가 이만큼 착하다고 품고 있으면 그거는 거룩을 빙자한 마귀의 생각을 품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할 때, 거룩을 가는 길은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길이 아니고 무지무지하게 쉽죠. 그냥 못난 놈이라고 자신을 바라보면 그게 성령의 열매고 그게 거룩입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거룩을 하라고 하니까 갑자기 헌금내고,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다리다가 태우고, 뭐든지 깨끗한 것, 내가 얼마나 깔끔 떨고, 경건스럽기 짝이 없고, 얼마나 남한테 흠도 티도 없이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 그거는 거룩이 아닙니다. 항상 손해봐요. 

15절 봅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돌아보라. 돌아보게 되면 뭐가 있어요? 없어요. 이미 얻었기에 미안함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한번 돌아보라. 그것은 바로 손해 보는 짓을 하라. 이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하는 짓을 하세요. 이게 이미 거룩한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가만히 보면 두 개의 인생밖에 없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실패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 있는 반면에, 실패는 때려죽여도 싫고 어떤 경우에도 성공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 이 두 종류의 인생이 있겠죠. 인생의 질이 다르겠죠. 그럼  모든 인간은 어느 쪽이겠습니까? 손해 볼라고 하겠습니까? 이익 보려고 하겠습니까? 이익 볼라고 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 전할 때,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떤 다른 사람이 나한테 “이래서 당신한테 이익입니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아요. 근데 잘난 나를 폄하하고, 잘난 나를 개 무시하면 그게 예수 소식이고, 십자가고 뭐고, 무슨 소식이고 간에, 그런 것 가리지 않고 우악하고 달려들어서, 꼭 짐승처럼 이빨로 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우악하고 달려드는 것을, 그것을 시선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시선을 통해서. 

그러니 세상사람 판단하는 것, 의외로 쉬워요. 그냥 판단하면 안 되고요. 살짝이 복음만 달랑 던져주세요. 던지게 되면 내가 뭐가 못나서?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손해 보는데? 나는 평생가도 남한테 내가 손해 보는 짓은 한 적이 없다. 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 같은 경우는, 이거는 뭐 허세만 더덕더덕, 평생을 허세로 시작해서 허세로 말미암아 허세로 끝나는. 옛날 그 아버지들, 아버지상. 그래서 가정에서 아버지 권위가 산다나? 만다나? 뭐 그런 사고방식가지고. “내가 어때서?” “아버지 이제는 좀 놓으세요.” “내가 뭘 손을 놔?” “제발 어머니한테 좋은 말 해주시고..” “남자가 하늘같아야지. 가정이 권위가 서지. 그래, 니 엄마한테 자주 가? 꼴좋다. 집구석 잘도 돌아가겠다?” 이걸 세상에 구십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술 한 잔 먹으면 그걸 곱빼기로 하고. 계속 듣는 거예요. 계속. 얼마나 진짜 안에 들은 것이 없으면 했던 소리 또 하고 그런 소리 하겠습니까? 

자,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죠. 아무도 손해 볼 사람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 혼자 손해 봤어요. 그럴 때, 그럼 나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를 하지 마세요. 나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참 우스운 질문이에요. 뭐 정답이 이거라고 한다고 해서 할 거예요? 그런 말 없잖아요. 손해 볼 것 같아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요? 묻지도 말아야지. 그렇잖아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제가 알려드리면 그대로 하려고요?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 날 것 같으면 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묻기는, 뭐 그렇게 자꾸 묻는다는 말은 할 생각도 없으면서 묻는 것으로 좀 착한 것으로 때워 달라, 봐 달라 하는 그런 생각이겠죠. 

자,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끝까지 손해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이익밖에 모르고,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그러면 손해 보는 쪽은 누구만 손해 봐요? 주님만 손해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함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늘 주님은 나한테 학대당하고 나한테 개 무시당하고, 믿는다는 나부터 주님을 천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약간의 가치는 있겠지만,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고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그게 주의 거룩만 담기는 그릇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또 나와야 해요. 우리는 죄밖에 할 수 없는데, 주의 은혜가 담기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그릇을 뭐로 바꾸느냐, 그릇 자체를 거룩한 그릇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주께서 하셨어요. 어차피 거룩을 담아봐야 우리한테는 담기지도 않아요. 우리는 손해 보는 짓은 안 하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손해 볼 짓을 안 합니다. 주께서 지시하면, 그거 하면 뭐 해줄 건데요? 그거 하면 내가 원하는 것 해줄 거예요? 항상 이래요. 기도하라. 기도하면 내 소원 들어 줄 거예요? 성경 봐라. 성경 보면 내 소원 들어 줄 거예요? 항상 뒤에 말을 안 해도 그게 붙어 있어요. 이 그릇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mbc뉴스에 보면 스마트 살림이라고 살림지혜 같은 것을 모아서 알려주는 것이 있어요. 그 중에 보면 수박화채를 먹다 보면 처음에는 시원하다가 한 5분도 안 돼서 수박도 뭐 물러버리고 온도 높아져서 맛이 밍밍하고 그렇잖아요. 그럴 때, 수박을 계속해서 시원함을 유지하는 생활의 Tip, 생활 정보, 그거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그릇을 얼음그릇으로 바꾸는 거예요. 큰 그릇을 일단 준비하시고 그 다음에 물을 붓고 거기다가 작은 그릇을 그 안에 넣어요. 큰 그릇 밑에다가 꽃잎이나 과일 같은 것을 넣게 되면 나중에 무늬 있는 그릇으로 예쁘게 나옵니다. 그걸 4시간 동안 냉동실에 넣어두게 되면 나중에 안에 작은 그릇만 떼 내면 되거든요. 특히 화채 그릇은 되지만 냉면 그릇은 아주 일품입니다. 팁 하나 알려드렸습니다. 다 알고 있지만. 남자로서는 몰랐는데 이제 알았습니다. 

그릇 자체를,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 하면, 주님이 죄인으로 죽었잖아요. 의인이면서도 죄인으로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증거 하는 내 인생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내가 이익 본다든지, 내가 손해 본다든지, 라는 그러한 판단은 더 이상 붙일 자리가 없고 날아가 버립니다. 사람이 이익을 봐도 불안해요. 왜? 이 이익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불안하고. 손해 보면 자존심 상해서 또 손해 봐.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이 그릇을 주님의 얼음그릇으로 바꾸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그릇이 되어서 바꾸어져 버리면, 이래도 주의 은혜입니다. 저래도 주의 은혜입니다. 그걸 바로 1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 

그런 사람을 살펴보면서 니 그릇은 얼음그릇인지 한번 살펴보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인지 니가 살펴보라 이 말입니다. 이게 거룩적 환경이라는 거예요. 거룩적 환경. 이게 뭐냐 하면 니가 잘하라고 하지 말고 그릇만 바꾸면 되는데, 내가 잘하라고 한다면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하면, 지금은 몸 건강하고 돈 좀 있어가지고 누굴 도와주면 뭔가 으싸으싸 착한 일 한 것 같지만, 만약에 내 몸이 아프면, “집사님. 아이구 몸이 아파서 귀찮고 전화도 일찍 끊읍시다.” 이래 될 수도 있어요. 몸 아프고 돈 없으면, 또 돈도 없어서 못 도와줘서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돈 좀 있는 것 빼앗길까 생각하면 다행스럽고.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러니 내가 뭐 한다는 자체가 아무리 해줘도 뒤에 뭔가 잡음이 많이 끼어들어요. 쓰레기 같은 게 착한 일 해놓고 많이 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왼손이 했든, 오른손이 했든, 그건 니가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로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내가 누굴 도와주는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시켰다. 이렇게 하면 될 문제를, 내가 오른손가지고 참외를 들었다. 왼손아 니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 왼손을 뒤로 감춘다고 이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산상설교는 니 그릇을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그릇 바꾸는 스마트한 하나의 정보에요. 그래서 산상설교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맹세하지 마라. 니가 이 세상에 기여한 것이 뭐가 있다고 니가 건방지게 맹세를 하느냐? 니 맹세에 해가 따르고 별이 따르고 달이 따를지 아느냐? 니 맹세에 저 들풀이, 저 대자연이, “아이구, 형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따를 줄 알아? 자연세계는 주의 맹세만 따르지 니 맹세 안 따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맹세를 해가지고, 맹세의 급을 높여요. 내가 제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제단에 있는 금을 가지고 하고, 성전 전체를 두고 맹세한다. 주님께선 맹세하는 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런 내 밑에 있는 것들에 맹세해봐야 그거는 씨알도 안 먹힌다 이 말이죠. 

검증받은 자가 와야 되지, 뭐 검증받지도 않은 사이비가 와가지고 검사하겠다고 하면 그 대자연이 아이구, 형님! 하면서 받아주겠습니까? 자격 없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부정하고 여러분들을 공격할 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심판할 권리와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격증, 로스쿨도 안 나온 사람들이에요. 자, 그런데 그 다음에 봅시다. 16절에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이야기가 여기서 등장 합니다. 에서이야기. 에서이야기가 하나의 언약을 위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한 건데, 수요일에 시간 가서 빨리 했는데 천천히 해봅시다. 이삭의 장자가 결국은 누가 되느냐 하면 야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차피 장자가 마지막에 야곱이 될 것 같으면,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 없이 처음부터 야곱이 쌍둥이였을 때 먼저 태어나서 그냥 계속 가면 되잖아요. 처음부터 10점, 10점, 10점 쏴가지고 상대방 기 팍 죽이고, 6대 0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10점 쏘면 되잖아요. 양궁 기보배 동메달 딸 때처럼. 줄곧 우세함을 보이면 되잖아요. 이게 더 속 시원한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왜 그런데 분명히 장자라고 떠벌려 놓고, 장자를 완전히 이 자리를 비워 놔버려요. 

장자를 비워놓고 이 자리에 장자 아닌 자를 집어넣어 버리면, 이 장자였던 사람은 장자였던 자리가 박탈당하고, 장자 아닌 자는, 웬 떡이고? 하고 되게 좋아하겠죠. 이 언약 구조가 뭐냐 하면, 천국 갈 잘난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하면 잘난 사람들이 줄 쫙 설 거 아니에요? 제일 앞에 누가 있고? 바리새인이 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줄 쫙 선 다음에,  우리는 뭐 앞에 줄도 안 보여요. 밤 새면서까지 줄 서도 앞줄은 보이지도 않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줄 세워놓고,, 앞에 주님이 있다고 치고 제일 첫 번째 바리새인 있고, 사두개인 있고...착한 일 한 사람 있고, 쭉 있는데, 주님이 앞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왔단 말이죠. 

죄인으로 와서 뒤쪽으로 오니까, 누가 와요? 천하에 세리와 창기가! 주님이 잘난 사람 앞에 섰을 때는 몰랐는데, 바로 내 앞에 서버리니까 어쩌면 나하고 그렇게 가장 밀착된, 가장 가까이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주님께서 자리를 바꿀 때 그냥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면서도 뭘로 바꿔요? 자체에서, 아버지에 의해서 죄인이 되신 거예요. 아버지께 버림받을 정도로 저주 받을 죄인이 되신 겁니다. 그러면 이 죄인 된 예수님과 구원받은 이 죄인 사이에 공통점은 뭐냐 하면 바로, 이 죄가 둘 사이를 이어주는, 태엽을 감아주는, 공통점이 뭐냐, 죄 이야기입니다. 죄 이야기.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에서가 망령되었다는 말은, 에서는 내가 배고파서 팥죽을 먹은 그것은, 현재 나의 상태는 유지되면서 팥죽+팥죽, 팥죽에 팥죽 하나 더 보탠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거죠. 나는 건장하고, 나의 장자 된 신분은 끄떡도 없는 거고, 왜냐하면 팥죽과 장자를 바꾼다는 말은 말이 안 되거든요. 오히려 팥죽과 장자를 바꿀래? 하는 저 동생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생각이죠. 신기하죠? 장자와 팥죽 한 그릇을 바꾸면, 진짜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은 못 삽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점심에 죽이 그릇에 담기게 되면 이걸 몇 그릇을 먹어야 바뀐 장자를 또 바꿀 수 있는, 몇 그릇이 되는 거예요. 이걸 먹었으면 팔았잖아요. 판 것을 또 먹으면 또 팔았으니까 둘째가 되니까 또 첫째가 될 가능성이 있고 또 첫째가 되면 또 뭐가 되고? 둘째가 될 가능성이 있고. 평생 팥죽 먹다가 볼일 다 봐요. 바꿨다, 바꿨다, 또 바꿨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중 되고, 나중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또 제자리를 찾아가고. 찾아가다보니까 거기 먼저 된 자가 또 나중 돼야 되고. 이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고 뭐예요? 중간에 뭐가 끊어줘야 되는데. 

잠언서에 보면 겸손하면 높임을 받는다고 했죠. 그럼 겸손했습니다. 그 다음에 졸지에 뭐가 돼요? 높은 자 됐죠? 높은 자 됐으니까 이건 또 교만한 겁니다. 낮은 자가 겸손한데 니는 높임을 받았으니까 이게 또 겸손 안 한 게 돼요. 이게 교회에서 쉬쉬하지만, 이게 이천년 교회역사동안 한 번도 품귀현상이 없는 딜레마 같은 거예요. 사랑을 베푸시면 여러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시면 성화됩니다.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게, 겸손한데 성화된다는 말은, 성화라는 것은, 거룩 이라면 남한테 못지않게 선두를 달린다는 이 말 아닙니까? 선두를 달리면 겸손이 아닌데? 겸손하면 진짜 겸손해야 되죠. “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주께서, “그래, 니 말 맞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또 이러면, 이 소리 들을까봐 겁나서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를 못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게 되면, 눈치껏 주께서, 아이구 착하다고 건져주면 이게 앞뒤가, 주님하고 손발이 맞아야 돼요. 주님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보낸다.”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뭘 이야기가 달라?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복 준다고 했잖아요?” “니는 그런 뜻으로 알았어?”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복 한 번 줘 볼까?” 복 줘놓고 하는 말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하면 이게 마찬가지라니까요. 그 자리 오래 유지하지도 못해요. 또 내려와야 해요. 

이 문제 예상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팥죽문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야곱과 에서사이에 그 장자의 자리를 비워놓아야 됩니다. 제가 하나님의 수법을 말씀드립니다. 일단 장자의 자리를 비워놓아야 해요. 장자의 자리가 뭐냐 하면 이게 복 받는 자리입니다. 복 받는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는 말은, 야곱이나 에서도, 그 누구도 탐낼 수 있는 자격자가 되지를 못해요. 야곱은 탐내서 문제고, 에서는 가졌다고 여겨서 문제가 된 거예요. 둘 다 나가 있어! 둘 다 꺼져야 돼요.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여기 빵이 있잖아요. 엄마가 빵을 사왔어요. 사왔는데, 형제가 세 명이 있다고 치면, 빵을 누가 봤느냐 하면, 엄마가 빵을 사왔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낸 사람은 둘째아들, 셋째아들이 이걸 발견했어요. 있는데, 그때 형이 학교 마치고 늦게 마치고 마지막에 들어왔어요. 근데 평소에 형의 행세를 아는 동생들이, 형이 있어봐야 빵 한 조각 안 돌아옵니다. 저리가! 하면서 빵을 지 혼자 다 먹는 것을 아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빵을 가려버리죠. 거기서 노는 거예요. 그럼 형이 와서 “야야, 왜 거기서 노는데?” “으음~나는 평소에 여기가 좋더라.” 자꾸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자꾸 시도를 하는데, 정작 정말 십자가를 누가 가리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착함, 말씀 지켜서 얻고자 하는 어떤 꼼수, 지켰으니까 반대급부적인, 이게 정말 주께서 사랑으로, 선물로 그냥 주신 것을 우리는 자꾸 행함으로, 내 대가를 치르고 얻으려고 하는 그 행세가, 이게 에서고 이게 야곱 같은 육적인, 둘 다 똑같아요. 에서나 야곱이나 둘 다 똑같은 육적인 이 모습입니다. 애가 시험 친다, 대번에 떠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께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한데, 성경은 그게 터무니없다는 거예요. 

팥죽 줬는데 장자가 바뀐다, 그런 아이디어도 터무니없고. 웃기네! 하고 그래도 장자는 그대로 있거든. 하는 에서의 생각도 터무니없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둘 다 터무니없고. 그런데 인간이 아는 것은 터무니없는 그거 밖에 모르고. 그래서 성경의 핵심은 뭐냐, 십자가는 아무도 몰랐다. 이게 성경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사전에 누구도 몰랐다. 이거는 베드로도 몰랐어요. 그래서 자기 목숨 바쳐서 천당 가려고 하는데, 천국은 도리어 목숨 바치는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냥 있어. 내가 다시 성령가지고, 처소가 마련되면 내가 너를 찾아오는 식으로 건져주겠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잖아요. 

제가 이 말을 안 했겠어요? 제가 전에 이 말을 대구 대덕교회에 있을 때 요한복음 강해를 했거든요. 하니까 장로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가만있고 주께서 찾아와서 구원한다면, 만일 가만히 있는데 안 찾아오면 그럼 우리교회 한 명도 구원 못 받으면 당신이 책임 질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장로들은 뭐냐 하면 터무니없는 것은 안 믿겠다는 거예요. 그럼 저의 생각은 뭐냐, 터무니없는 것이 복음이고, 그게 안 믿어지면, 솔직하게 “나는 복음이 안 믿어집니다.” 이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지옥 가더라도 그런 솔직함을 드러내고 지옥가라 이 말이죠. 안 믿어진다고. 그래서 갈라선 거예요. 갈라선 게 아니죠. 그냥 추방된 거죠. 

그때부터 교단에서 이근호 목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사람이 설득 될 소리를 해줘야 꼬셔서 교회 다닐 텐데, 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해가지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 헌금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안식일 지키는 사람들, 직분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들, 이거 뭐 워워?~~하는 식으로,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게 오해거든요. 저는 하시라 이 말입니다. 하시면서 그게 왜 구원하고 상관없는 것을 아시라 이 말이에요. 근데 그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복음 제대로 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성경 볼 때는 다 납득이 되죠. 성경 참 쉽다. 쉬울 수밖에 없죠. 성경 본뜻은 모르고. 아, 이거 행하면 되겠네. 나는 에서처럼 절대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안 팔아야지. 기껏 응용하는 게 뭐냐 나는 장자의 명분을 부패한 것에 안 갚아야지. 이 정도로 응용하는 거예요. 이 정도로. 나는 절대로 뇌물을 내 천국 명분을 안 뺏겨야지. 기껏 응용하는 것이 그거에요. 일반 공직에 있는 집사쯤 되게 되면. ‘아, 에서가 나쁜 짓을 해가지고 세상에! 천국에 못 갔구나. 그럼 내 직장이 나쁜 짓이구나. 내가 세무공무원인데. 세금 깎아달라고 뇌물 주는 것, 이제 예수 믿고 난 뒤에 달라져야지. 이제부터 뇌물 안 받아야지. 뇌물 안 받게 되면 망령된 행동은 안 하니까 나는 구원받겠지.’ 기껏 지 수준대로 응용한다는 것이 그 정도 응용이에요.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성도는 매일같이 터무니없는 것이 샘솟듯이 폭발해야 됩니다. 어떻게? 그냥 집에 가서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참, 내가 사는 이 자체가 터무니없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참 쉽죠. 내가 이렇게 산다는 것이, 내가 아무 탈 없이, 하도 교통사고도 많고 집안의 일도 많으니까, 이렇게 편안하게 있는 것도, 이것은 내 행함의 대가가 아니고, 정말 이거는 터무니없는, 덤으로 복 받고 있다. 이런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거죠. 자, 감사가 나오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감사가 나오면 그 다음에 뭐냐 나오느냐 하면, 감사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실함이 나와요. 그렇잖아요? 감사하는데. 동서끼리 일하는데, 갑자기 생전 안 하던 젊은 동서가, “형님 제가 할게요.” 이런다면 대번에 큰 동서는 데모합니다. ‘이거 우리 어머니가 뭐 준 게 있어. 분명히 뭐 줬어.’ 감사가 있으면 뭐로 바뀐다고요? 성실함이 있습니다. 감사하면.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막 놀면 되겠네요? 하는데, 감사는 고마움으로, 죄인이 구원받은 고마움으로 반드시 성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실은 뭐로 나타나느냐, 관심으로 나타나요. 세상에 대한 그냥 관심이 아니고 복음적인 관심. 보통 여름에 선글라스 끼잖아요. 복음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보이느냐, 에서가 보여요. 에서가 보이고 야곱은 가끔 보이고. 우리끼리는 많이 보이고. 나가면 거의 안 보이고. 사실 야곱도 보이죠. 야곱도 마찬가지로 잘못했으니까.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이렇게 장자를 노려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 야곱을 그냥 사랑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논리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야곱의 행동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냥 구원받은 것이지. 야곱이 장자명분을 탐을 내고, 팥죽을 끓여주고, 어떻게 속여서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하고 구원하고 관계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바꿔치기 할 때 인간이 어떤 조건을 내는 어떤 조건도 주께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기 위해서 야곱이나 에서를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구하되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뭘 흘렸다고 했습니까? 눈물을 흘리죠. 이게 곡성이에요. 곡성. 통곡.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가서 맛보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거예요.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으로서 천국의 맛배기를 벌써 우리가 맛보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천국 맛보면 천국 가고 이 땅에서 지옥을 맛보면 그거 지옥 가는 거예요. 

자, 왜 울까요? 개인의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가야 되는데, 내가 가야 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2). 이를 간다는 것은 이가 간지러워서 간다는 것이 아니고, 사태파악을 못한 자기에 대한 분노. 이럴 줄 몰랐다.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지 내가 미처 몰랐다. 근데 백부장은 같은 인간이라도 눈치 챘어요. 눈치가 빨랐던 모양이라. 까라하면 까겠나이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나이다. 저 군대생활 좀 합니다. 군대식으로 말씀만 하면 가지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뭐냐, 독자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관계성. 언약이라는 관계성 때문에 늘 마음이 기쁘고 편안하고 그렇다 이 말이죠.  

까짓것 실패하면 어때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곧 성공을 의미하는데.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살만큼 살면 되지. 늘 이런 여유가 자유로써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 바랍니다. 물론 눈물을 안 흘릴 수는 없는데, 우리가 눈물을 너무 자주 흘리죠.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죽을 때까지 계속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새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옛날, 갖다 버려야 될 육을 주께서 활용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쪼끔 복음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울 일이 생겨요. 이쯤하면 이제 눈물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또 눈물나오고. 천하에 냉정을 유지하는 그 사격선수라도 연속 금메달 3개 따니까 남자의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눈물을 세 번 흘리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태어날 때, 하나는 부모님 죽을 때, 또 하나는 사격 3연패할 때. 뭐 그런 건가요? 나라를 잃을 때 눈물 흘리라고 했잖아요. 초등하교 애들은 게임에 졌을 때 울라고 그런 식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해요. 

그 다음에 봅시다. “회개의 기회를 구하되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 이거 어렵다. 회개의 기회가 꼭 와야 됩니까? 그냥 생각나서 회개하면 되는데, 회개하니까, 끝났어. 뭐 그런 것이 있어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말은 회개하는 것도 서류접수 기한이 있었던 모양이죠. 기한 넘어가면 서류접수도 안 되는 모양이라. 그러면 에서가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말은, 그 기회가 없다는 말입니까? 야곱이 있을 때, 야곱 앞에서 회개를 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바로 오늘날 주님이, 주님께서 세상 마지막 끝내기 전에 회개해야 된다. 뭘 회개해야 하는데, 여러분 뭐 나쁜 짓 한 거 있어요? 없잖아요. 독자적으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꾸려간다는 그것을 회개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독자적으로 되면 손해 보기 싫어하고, 손해 보기 싫어하면 실패 안 하려고 하고, 실패 안 하려고 하면, 감사가 없고, 고마움도 없고. 용서도 필요치 않고. 지가 알아서 잘하는데 무슨 용서를 해요. 이런 것들이 바로 에서라는 하나의 성질의 다양성이 거기서부터 나왔다고 보면 돼요. 

인류를 두 종류로 보면 돼요. 야곱 같은 인간과 에서 같은 인간. 그럼 모든 파생된 인간들은 거기서, 에서의 요소와 야곱의 요소가 파생되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18절을 하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아까 감사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실함이죠. 그래서 아까 14절, 15절, 돌아보라는 것은 전부 다 성실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냥 하면 안 되고, 감사한 마음속에서 성실하게 돌아보라 이 말입니다.     

자, 그 다음에 18절에 봅시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절,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시내산을 그림자로 삼고 심판의 순간을 묘사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걸 오늘 강의 제목으로 삼으면 좋겠네. 뭐냐 하면 “저주의 완판” 완판은 다른 말로 완결판. 

저주 가운데 가장 악랄한 저주가 어디에 나오겠습니까? 어느 책에 나오겠어요? 바로 성경책에 나와요. 저렇게 잔인할 수가? 라는 잔인의 극한. 그만큼 잔인하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이 무섭고 거룩한 분이라는 뜻이에요. 자 이왕 말 나왔으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피곤해하시니까, 설명보다도 저주의 완판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에 나옵니다. 레위기 26장. 이걸 랩으로 하면 좋고요, 판소리해도 좋고, 랩으로 하는 것이 제일 좋은데, 우리 가운데에 지금 랩을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16절,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17절,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지금 랩으로 하는 겁니다. 18절,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아직 멀었습니다. 

판소리에 흥부가라고 있죠. 놀부가 심술부리는 그 대목 있잖아요. 20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니 아니하리라” 21절,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2절,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25절,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절,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이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29절 봅시다.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남의 자식이 아닙니다. 지 자식이에요. 에구에구, 내 딸! 에구에구, 내 아들! 지 자식이라니까요. 33절,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36절에 보면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절,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뭐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더운데 밥 먹고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겁니까? 왜 이런 벌칙들을 준비했어요? 이런 벌칙들을 준비했다는 말은, 니가 하는 행동이 이런 벌칙 받아도 싸다. 그런 뜻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벌과 우리의 평소 행동과 연결이 안 되죠. 1:1매치가 안 되죠. 우리가 납득이 돼야 되잖아요. 내 행동이 이런 벌 받아도 마땅합니다. 정말 내 자식의 고기를 먹어도 나는 쌉니다. 뭐 그런 게 감이 와야 되는데, 해도 너무 하잖아요. 해도 너무 한 거예요. 

뭐 우리가 그리 나쁜 짓 했다고, 평생 시장에서 애 공부시키려고 반찬 장사 하다가 늙어 죽었다.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게. 제가 한 번 따져볼까요? 그게 바로 배신했던 베드로나 열두 제자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주님이 죄 용서한답시고 한 행동이 너무 과격해요. 말로 할 수 있잖아요. 앞으로 잘 하래이~ 니가 반성문 열 장 쓰고. 그 정도만 해도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서 충분히 상쇄가 되고, 우리는 그 정도의 죄로 알고 있는데. 

그 피 흘리고 그것도 죄 없는, 죄가 있어 피를 흘리면 몰라도, 죄 없는 분이 피를 줄줄 흘리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남한테 그렇게 착한일 하고 오병이어 베풀고 기적을 행했는데, 근데 피 흘리고 죽을 때에 이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딱 한명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 옆에 있는 강도밖에 없었어요. 강도가 알았어요. 저 분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분이 아니고, 저 분이 지신 다른 죄가 있는데, 그 다른 죄가 누구냐 하면 바로 나 때문에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그게 세트인데, 나라는 죄인과 그리고 죄 없이 죽는 주님이 한 세트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식으로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강도가 알게 된 거예요. 강도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정말 이런 믿음만 좋으면 강도짓이라도 하고 싶어요. 정말. 모든 신학에 대해서 전부 다 입 다물라. 모든 신학에 대해서 입 다물어라. 개혁주의 신학이고 천주교고 입 다물어. 이것뿐이에요. 교회 뭐 제직회 몇 분의 일이고, 예배당이 몇 미터고 다 필요 없어요. 

딱 이거에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내가 칼빈 신학 나오고, 총신 나오고, 아이구 그런 소리. 내가 목사를 몇 년 했고, 목회를 하고, 뭐 강의를 하고, 어디 미국 가고, 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딱 이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미국에 있으나 캐나다에 있으나 어디 있으나. 참 이 소식을 전광식도 알아들어야 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와 십자가로 된 이 관계가 거룩이고 이게 의고, 이것으로 구원받지,  인간관계는 그냥 재미나게 사세요. 너무 거기다가, 인간관계에다가 투자는 많이 하지 마시고. 너무 정주지 마시고. 간, 쓸개 다 빼주지는 마세요. 주게 되면 실망만 늘어납니다. 포트폴리오, 너무 한 군데만 투자하지 마시고 분산투자 하세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의미 없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 아니면 아무도 나올 고백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고백이 자주 안 나오고, 한 2초하다가 다시 세상에 파묻히지만. 세상 소음에 다시 묻혀서,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부끄러워하겠지만. 이제 아시겠죠. 히브리서 12장 마지막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그 무서운 이야기는, 무섭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서움이 강렬하면 할수록, 너희에게 오히려 고마움과 고마움을 더 배가할 수 있다는 이 말입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근데 그 산이, 시내산이 하나님이 계시는 산이거든요. 얼마나 무서운지 그 누구도 못 올라가느냐 하면, 짐승도 그 산에 함부로 못 올라가요. 올라가게 되면 뭐가 날아와요? 돌이 날아와요. 그 철없는 짐승도. 20절에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견디지 못하는데, 우리보고 집합하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쪽에 살면 안 되고, 세상의 어떤 인간도 감당할 수 없는 그곳으로 너희들이 다 소집통보를 받은 겁니다. 예비군 소집통보 받듯이. 소집된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뭘 갖고 나가야 합니까? 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소집에 응해야 돼요. 저 아무것도 한 것 없습니다. 그것이 10장에 나오죠. 

10장 27절에서 29절까지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27절,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해요. 불쌍히 여겨준다는 것은 그냥 주께서 에이, 그냥 불쌍히 여겨줄게. 이게 아니라 불쌍히 여겨주는 것도 함부로 아무나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29절,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자, 이제 강의를 끝냅시다. 결국 주님께서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죠? 우리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죠? 자기 아들이 흘린 피에 관심사가 있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관계라고 했죠. 관계. 뭐 제목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에 있죠.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냥 고맙게 여기면 돼요. 주어진 것은 뭐든지 고맙게.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목사님 그러지 마세요. 오늘도 실수했습니다. 아니 그게 정상적이에요. 정상적이라고 믿는 것이, 여러분 터무니없죠? 그 터무니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위해서 우리보기에 오늘 그런 실수 같은 것도 했고, 남한테 해서는 안 될 그런 말도 한 거예요. 돌아보면 부끄럽죠. 부끄러워야 돼요. 왜? 미안해야 되니까. 하지만 미안하라고 그렇게 정상적인 사태를 일으킨 거예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우리가 나름대로의 주님의 거룩에다가 내 거룩을 집어넣을 수가 없고, 주님의 의에다가 내 거룩을 집어넣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저 주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그걸 할 때, 누가? 예수님의 피가. 왜?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되었지, 나 구원하라고 피를 준 것이 아니고. 내 구원이전에 주님의 피가 흘렀고, 그 효과로써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뭐 주저 말고 싱글벙글하면서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내 중심, 내 관점 정리하게 하옵소서. 내 중심으로 보다가 주님 중심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주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