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강-YouTube강의(말씀)150507-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12강 제목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신다는 말은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또는 식물이나, 동물, 그런데 적용하는 단어인데, ‘말’, ‘말한다’는 그 말에다가 ‘계시니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렇게 언급을 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해서 그렇게 모호하게 언급을 하냐 이 말이죠.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을 안 하잖아요. 말씀을 했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말이 들린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일상에 말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는 방법이 되는데,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한다면, 누가 여기 계시다, 타인이 있다, 남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여기 있고, 당신이 거기 있고, 당신과 나 사이는 곧 둘 사이에 관계를 맺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 공기가 계십니다.” 말이 안 되잖아요? “저수지에 물이 계십니다.” 말이 안 되지요. “숲 속에 새가 계십니다.” “새 소리가 계십니다.” 이런 말은 잘 쓰지를 않죠. 왜냐하면 “바다 속에 물이 계십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우리하고 물하고 상대를 해야 될 텐데, 바다 속에 들어가면 온통 전체가 물속이기 때문에 누굴 딱 잡아서 우리 말 상대로 붙잡을 대상이 거기는 없죠. 전체가 물로 싸여져 있으니까. 공기가 계십니다는 아니죠. 공기 속에 있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한 것은 처음부터 인간 세상에는 예수님을 인간이 상대할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 안에 모든 인간이 다 거기에 들어있다고 본 겁니다. 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요한복음이나 창세기나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조’라고 이야기하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했다, 이거는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에요. 왜 틀린 말이냐 하면, 그 말을,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미 동의를 하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수긍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잘못된 생각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틀린 말이 되어야 된다는 이유가 뭔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뭐가 빠져있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님과 더불어 창조했구나!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지 왜 말씀이 계시느니라고 되어 있느냐?’ 라고 또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 말씀을 상당히 납득시키기 힘든데요. 왜냐하면, 말씀이 계시느니라 하는 그 자체가, 우리가 있다는 그 하나가 말씀을 상대하거나 예수님을 상대할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죠. 물속에 있는 것처럼. 공기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이미 예수님에 안에 포함되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야 했기에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는 것조차도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님의 뜻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 만드실 때에, 그 만드신 모든 내용이 바로 말씀이라는 이 성경책, 말씀에 의해서 입각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근데,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말과 언어와 말씀을 내가 나를 구원시키는 용도로써 그걸 상대를 하려고 하는 그런 오류를 범한 거죠. 예를 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내가 믿음으로, 내가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께서 바른 인간으로서 새로워진다. 또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사람이 된다.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또는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구원받는 사람이 된다.’ 라고 이런 식으로 그걸 잘못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었던, 자부했던 그들에 의해서 정작 예수님 만났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오해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능력이 인간 속에 담겨있다는 거죠. 성경을 보면서 백독을 봤습니까? 백번 오해하고. 천 독을 하면 천 번 오해하고 만 독을 하면 만 번 오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성경은 말씀으로 되어 있고 나는 말씀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따라서 이 말씀을 해독함으로써 해독한 능력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갖게 된 거죠. 그런 희망을 가진 사람이 우리뿐만 아니고 유대인들도 그랬거든요. 그들이 예수를 죽였다. 이게 무슨 의미이냐? 이렇게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그 자체가 죄에 해당되는, 사탄의 능력의 앞잡이로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해서 바로 우리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경유하느냐, 예수님의 적이 되는 어두움을 경유해서 우리를 다시 언급합니다. “너희는 어두움에 속했다.” 이 원칙이 성경 말씀의 중보자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계시고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나는 하나님과 한 식구가 되고 그래서 그것이 구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보통 사람 상대하듯이 그냥 상대해서 어떤 해결이 날 것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이 말씀을 중보자로 내세우셨습니다. 중보자로 내세웠다는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어떤 누구도 성경 말씀을 해석 못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중보자가 성경 전체에서, 요한복음에서 뭐가 되느냐, 주가 되십니다. 주가 되신다는 말은 구원주도 되시고 심판주도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들이 성경을 이해한다고 구원되고 이해 못한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것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사실입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서 지옥 보내면 지옥 가는 것이고 천국 보내면 죄인이라도 천국 가야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 해석하는 여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열심히 다 믿고 순종한 여부에 따라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라는 것은 나쁜 짓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자들이고, 그리고 나쁜 짓 안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뭐든지 예수님을 경유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간 사람입니다. 천국에 도달된 사람이고, 천국 간 사람이고, 천국 갈 사람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는 이 말은 태초에 말씀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말씀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과 말씀 사이에 약속에 의해서 천지를 창조했고 따라서 창조한 피조물이 예수님을 경유한 방법을 알지를 못했어요. 따라서 그들은 어두움이 되었고 어두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두움의 행세를 하면서 뭐냐 하면,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 본인들이 상상하는 하나님만 상대해서 하나님을 잘 믿게 되게 되면 나한테 영생과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께 순종 못하면 지옥 간다는 이런 마귀적인 생각을 이 세상에 유포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행해서 진짜 천지를 창조하신 원래 주인공이 되는 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죠. 따라서 십자가가 우리 앞에 온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죄인이었으며, 주님의 은혜 아니면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을 전하는데, 기쁜 소식인데, 그 기쁜 소식이 뭐냐,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시작했고 마감했다는 소식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천국과 지옥도 주님의 손에, 십자가의 능력에 달린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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