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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말씀,인생의 정답 1505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9. 19:19
2015-05-09 00:35:32 조회 : 725         
유튜브(112강, 113강) 말씀, 인생의 정답 150507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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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80.♡.90.76)15-05-09 23:23 
112강-YouTube강의(말씀)150507-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12강 제목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신다는 말은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또는 식물이나, 동물, 그런데 적용하는 단어인데, ‘말’, ‘말한다’는 그 말에다가 ‘계시니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렇게 언급을 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해서 그렇게 모호하게 언급을 하냐 이 말이죠.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을 안 하잖아요. 말씀을 했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말이 들린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일상에 말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는 방법이 되는데,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한다면, 누가 여기 계시다, 타인이 있다, 남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여기 있고, 당신이 거기 있고, 당신과 나 사이는 곧 둘 사이에 관계를 맺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 공기가 계십니다.” 말이 안 되잖아요? “저수지에 물이 계십니다.” 말이 안 되지요. “숲 속에 새가 계십니다.” “새 소리가 계십니다.” 이런 말은 잘 쓰지를 않죠. 왜냐하면 “바다 속에 물이 계십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우리하고 물하고 상대를 해야 될 텐데, 바다 속에 들어가면 온통 전체가 물속이기 때문에 누굴 딱 잡아서 우리 말 상대로 붙잡을 대상이 거기는 없죠. 전체가 물로 싸여져 있으니까. 공기가 계십니다는 아니죠. 공기 속에 있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한 것은 처음부터 인간 세상에는 예수님을 인간이 상대할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 안에 모든 인간이 다 거기에 들어있다고 본 겁니다. 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요한복음이나 창세기나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조’라고 이야기하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했다, 이거는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에요. 왜 틀린 말이냐 하면, 그 말을,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미 동의를 하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수긍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잘못된 생각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틀린 말이 되어야 된다는 이유가 뭔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뭐가 빠져있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님과 더불어 창조했구나!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지 왜 말씀이 계시느니라고 되어 있느냐?’ 라고 또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 말씀을 상당히 납득시키기 힘든데요. 왜냐하면, 말씀이 계시느니라 하는 그 자체가, 우리가 있다는 그 하나가 말씀을 상대하거나 예수님을 상대할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죠. 물속에 있는 것처럼. 공기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이미 예수님에 안에 포함되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야 했기에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는 것조차도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님의 뜻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 만드실 때에, 그 만드신 모든 내용이 바로 말씀이라는 이 성경책, 말씀에 의해서 입각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근데,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말과 언어와 말씀을 내가 나를 구원시키는 용도로써 그걸 상대를 하려고 하는 그런 오류를 범한 거죠. 예를 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내가 믿음으로, 내가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께서 바른 인간으로서 새로워진다. 또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사람이 된다.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또는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구원받는 사람이 된다.’ 라고 이런 식으로 그걸 잘못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었던, 자부했던 그들에 의해서 정작 예수님 만났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오해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능력이 인간 속에 담겨있다는 거죠. 성경을 보면서 백독을 봤습니까? 백번 오해하고. 천 독을 하면 천 번 오해하고 만 독을 하면 만 번 오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성경은 말씀으로 되어 있고 나는 말씀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따라서 이 말씀을 해독함으로써 해독한 능력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갖게 된 거죠. 그런 희망을 가진 사람이 우리뿐만 아니고 유대인들도 그랬거든요. 그들이 예수를 죽였다. 이게 무슨 의미이냐? 이렇게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그 자체가 죄에 해당되는, 사탄의 능력의 앞잡이로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해서 바로 우리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경유하느냐, 예수님의 적이 되는 어두움을 경유해서 우리를 다시 언급합니다. “너희는 어두움에 속했다.” 이 원칙이 성경 말씀의 중보자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계시고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나는 하나님과 한 식구가 되고 그래서 그것이 구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보통 사람 상대하듯이 그냥 상대해서 어떤 해결이 날 것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이 말씀을 중보자로 내세우셨습니다. 중보자로 내세웠다는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어떤 누구도 성경 말씀을 해석 못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중보자가 성경 전체에서, 요한복음에서 뭐가 되느냐, 주가 되십니다. 주가 되신다는 말은 구원주도 되시고 심판주도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들이 성경을 이해한다고 구원되고 이해 못한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것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사실입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서 지옥 보내면 지옥 가는 것이고 천국 보내면 죄인이라도 천국 가야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 해석하는 여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열심히 다 믿고 순종한 여부에 따라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라는 것은 나쁜 짓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자들이고, 그리고 나쁜 짓 안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뭐든지 예수님을 경유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간 사람입니다. 천국에 도달된 사람이고, 천국 간 사람이고, 천국 갈 사람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는 이 말은 태초에 말씀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말씀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과 말씀 사이에 약속에 의해서 천지를 창조했고 따라서 창조한 피조물이 예수님을 경유한 방법을 알지를 못했어요. 따라서 그들은 어두움이 되었고 어두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두움의 행세를 하면서 뭐냐 하면,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 본인들이 상상하는 하나님만 상대해서 하나님을 잘 믿게 되게 되면 나한테 영생과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께 순종 못하면 지옥 간다는 이런 마귀적인 생각을 이 세상에 유포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행해서 진짜 천지를 창조하신 원래 주인공이 되는 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죠. 따라서 십자가가 우리 앞에 온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죄인이었으며, 주님의 은혜 아니면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을 전하는데, 기쁜 소식인데, 그 기쁜 소식이 뭐냐,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시작했고 마감했다는 소식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천국과 지옥도 주님의 손에, 십자가의 능력에 달린 겁니다.

 이미아 (IP:180.♡.90.76)15-05-09 23:24 
113강-YouTube강의(인생의 정답)150507-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113강, 제목은 ‘인생의 정답’입니다. 참, 정답을 미리 알고 있으면 기죽을 일이 없죠. 인생에서 제일 신나는 것이 처음과 끝을 다 알아버리면 그야말로 세상에 꿇릴 것이 없이 자유를 만끽할 것입니다. 그 정답이 어디 있느냐, 이 정답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제가 정답이 성경 안에 있다고 하니까 성경 어디에 있느냐? 합니다. 이렇게 찾아서 그걸 뽑아내려고 하는데, 뭐든지 정답이 있더라도 그걸 내 걸로 만들면 이미 정답은 사라져버립니다.

하늘에 있는 파랑새가 아름답지만 그 파랑새를 손에 쥔 순간 아주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가 되고 말죠. 따라서 정답은 소유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돼야 합니다. 우리가 정답 안에 포함이 되어서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정답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근데, 사람은 그것이 분에 차지를 않으니까 정답을 내 손에 쥐어가지고 이것을 어떤 영역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리되면 정답이 주인공이 아니고 정답을 쥔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거는 오히려 정답을 질식시키는 현상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정답, 누굴 만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상황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죽지 않고 절망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는 그 정답은 성경에 어디 있느냐, 성경 전체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녹아져 있는 정답을 어떻게 뽑아낼 것인가. 이 뽑아내는 과정이 중요한데요. 뽑아내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현상이 뭐냐 하면, 기죽지 않고 거부하고 용감하게 거절하는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 예를 역대하 26장 16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건 웃시야 왕 때 있었던 일인데, 웃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고 남 왕국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왕입니다. 거기의 왕인데 웃시야 때 나라가 굉장히 강성해졌어요. 강성해지니까, 성경 자체가 정답이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강성해지니까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다음에 말이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정답 안에 들어 있어요. 근데 웃시야 왕은 본인이 강성해지고 행복해지고 본인 뜻대로 되는 것을 정답이라고 여기는 그 잠재성이 그가 강성해지기 이전부터 잠복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게 어디 남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웃시야 왕의 이야기만 되겠습니까? 우리이야기죠. 요,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원합니다. 정답이 없어서 못합니다. 정답만 있으면 남한테 기죽을 필요도 없고 남한테 굽실거릴 필요 없어요. 당당합니다. 그럼 정답을 얻고자 하겠죠.

근데, 정답을 얻고자 하는 그 정답을 얻고자 하면서 그 의도 안에 뭐가 이미 삽입되어 들어가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잠복되어 있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께 대드는 죄가 정답을 아는 시도 안에 이미 합류가 되고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러면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우리가 그 나쁜 죄를 빼고 정답만을 알고자 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정답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과정을 병행해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정답을 알게 되면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될 것 같지만, 그 멋있는 사람인 내가 오히려 정답을 아는 순간 멋있기는커녕 부끄러운 사람, 죄인으로 전락하면서 비로소 우리 눈앞에 정답은 전개됩니다. 반드시 그래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 정말 우리는 천국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 없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러한 속성이 우리 내부에 들어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회개 없는 천국은 없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에 간 사람이 있기는 있는데 그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바로 천국을 탐내는 자체가 천국에 어울리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욕심인 것을 고백하는, 회개의 형식으로 고백하는 방식을 통해서 천국은 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무엇 하나 순순히 들어가는 법이 없어요.

자, 그 다음에 그 웃시야 왕이 강성해졌거든요. 강성해졌다는 말은 사실은 정답을 얻으면 자동적으로 강성해진다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는 뜻이죠. 근데, 우리는 "정답"과 "강성"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돼요. 정답을 얻었으면 남한테 짓밟힘 당해도 감사해야 되고, 남한테 짓밟힘 당한다는 것이 그렇게 싫고 짜증나거든 정답은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답은 어림도 없습니다. 웃시야 왕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는데, 범죄 했다고 누가 이야기할 사람 없습니다.

웃시야가 행동에 옮깁니다. 행동에 옮기는 것이 뭐냐, 16절,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을 분향하려 한지라” 17절,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절, “웃시야 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자, 여기서 제사장 아사랴가 대단히 용감하죠. 군사력을 누가 갖고 있는가? 경찰권을 누가 갖고 있는가? 웃시야 왕이 갖고 있습니다. 왕이 이 소리 듣고 기분 나빠서 경찰권이 없고 군사력이 없는 아사랴를 그 현장에서 즉사시킬 수 있고 살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사랴 제사장은 겁나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해버립니다. 왜요? 아사랴는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겁나지를 않아요. 죽는 것이 겁나지 않으니까 누구한테 의도적으로 굽실거리지 않죠.

남한테 굽실거린다는 것은 곧 뭘 뜻하느냐, 내가 굽실거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수명이 더 연장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에 굽실거리거든요. 물론 남을 배려해서, 모르는 사람을 배려해서 그들에게 기분 좋게 해서 어떤 정답을 알려주게 되는 그런 순간도 옵니다 만은 그건 사랑이고요. 대부분의 알랑거림, 굽실거림은 나를 더 사랑해서 그렇겠죠. 그것은 뭐냐, 죽기 싫어서,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과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합치되지 않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이고 두렵지 않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부부사이도, 가족끼리도, 자식 간에도 같이 통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사장 아사랴가 왜 이렇게 겁이 없죠? 왜 왕에게 지적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아사랴는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답이 뭐냐, “왕이여! 왕이나 내나 이 유다 나라에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안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개인적 사고를 하지 않은 거죠.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남한테 더욱더 도움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슨 짓을 해?’ 라는 사적인 견해를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뭉개버린 겁니다.

정답을 안다는 것은 사적인 기대나 희망은 정답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울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답을 이용해서 어떤 사적인, 개인적인 이득을 얻어 볼까? 하는 것은 정답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 설교해서가지고 교인 수를 더 늘려 볼까? 헌금을 좀 더 모아 볼까?’ 이거는 지금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겁니다. 거룩한 성경 말씀을 가지고.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주님, 요걸로 내 인생 끝났군요!’ 라는 마음으로, 그것도 아쉬워서가 아니고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아! 이 설교 마치고 이제 주님 만나는구나!’ 하고 아주 들뜬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설교하는 도중에 어느 교인들한테 양보하거나 굽실거리거나, 진리를 양보하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죠. 그것이 바로 진리와 정답을 아는 목회자의 태도입니다. 설교하다가 죽고 싶은 것이 본인의 여망인거예요. 또 주께서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일을 그렇게 시키시고. 주저할 필요가 없죠. 근데, 그 정답이 뭐냐, 그것은 주님의 언약 앞에서 우리는 다 같이 지배받고 있다는 겁니다.

니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나를 공격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공격하고 내가 공격받는 나도 내가 밉상 받아서 공격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공격 받으라는 뜻이 있어서 공격 받는다. 그러나 그 뜻이 나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현재 주로 살아계시고, 심판주로, 구원주로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증거 용도로 주께서는 이런 사태를 유발했다는 것.

그런 것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사람 앞에서 기죽지 않는 거죠. 오히려 주님을 늘 의식하면서, 의식하다보니까 사람한테 기죽을 필요 없는 것. 주님은 살아계신다. 이것이 인생의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