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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마을 유튜브강의 아무것도 아님 1509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13. 18:00
2015-09-04 01:21:00조회 : 613         
유튜브(124강, 125강) , 아무 것도 아님, 신자와 불신자 150903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124강     음성                  동영상

 

125강     음성                  동영상

 이미아 (IP:180.♡.90.76)15-09-05 21:56 
124강-YouTube강의(아무것도 아님)150903-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24강 제목은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어쨌든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믿을 때, 과연 성경의 내용이 우리가 믿을 만한 내용인지를 생각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믿고 싶은 것, 또 믿을 만한 것만 골라서 믿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 이미 우리 선배들인 이스라엘 나라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이라는 것을 내놓았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의 믿음이 가짜로 들통 났습니다. 

유대인이나 우리나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인데, 그들의 신앙이라도 하나님 앞에 거부당했는데, 우리의 신앙이 무슨 대단한 신앙이라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것이라고 그렇게 성급하게 생각할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믿을 만해서 믿어지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하는 그것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예수 믿는 능력은 우리 속에 애초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것도 성경의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 성경의 내용에 내가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나한테는 없다는 그 사실을 성령이 오게 되면 알게 됩니다. 아, 성경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줄 때는 믿고 천국오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가 애초에 천국 갈 수 있는 그러한 자격자, 권리자가 아니구나! 우리 주제 파악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을 다시 보게 되면 성경이 새롭게 나타나죠. 그 전에 수 천 가지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시편 73편 20절에 보게 되면 거기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꿈 이야기가 나오면서 거기 중요한 단어가 꿈과 함께 나오는데 그 단어에 대해서 이번 강의에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시편 73편 20절을 읽어보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꿈과 더불어 같이 동반되는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무시’, 같은 뜻으로 ‘멸시’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딱 이겁니다. “니가 니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느냐?”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느냐, 우리가 꿈을 꾸고 난 뒤에 꿈을 자연적으로 무시하죠. 꿈이 생각나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 안 날 정도로 무시를 해버립니다. 꿈은 지난밤에 꾼 것이고 지금은 벌건 대낮이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꿈까지 신경 쓸 거 없잖아요. 

꿈을 우리는 무시합니다. 꿈을 우리는 멸시합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신경 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신다는 겁니다. 꿈을 개무시 하고, 꿈을 멸시하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존재와 생각들을 무시할 때에, 그 무시함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자꾸 일부러 조작해내려고 하느냐 하면 믿음을 조작하는데 노림수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가치 있게 보려고 믿음이라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시편 73편 23절에 보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23절을 보면서 앞에 22절을 봐야 해요.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이것을 우리가 믿습니까? “주님이여, 제가 주님 앞에 우매하고 무지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를 개무시 할 때 그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멸시 할 때, 아무것도 아닌 걸로 멸시할 때, 마치 꿈처럼, 지난밤에 꾼 꿈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할 때, 정말 그것이 내가 미처 나를 몰랐던, 나의 진면목인 것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주의 앞에 내가 짐승이오니” 라는 고백을, 우리가 이 시편에 나오는 73편 22절에 나오는 이 고백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꿈을 개무시 하듯이 꿈처럼 간주해서 우리를 무시하고 멸시하시는 이유는 주께서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한 절차로서 시편 73편 22절의 내용을 가지고 다시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73편 22절의 내용 자체가 우리는 주의 앞에 짐승이다, 우리는 꿈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멸시 당연한 것이다, 무시당함도 마땅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피조물로 만들어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 작업의 결과로 우리가 성도라는 자아가 형성됩니다.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 모든 작업을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셨거든요. 하시고 난 뒤에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여기에 두 가지의 다른 층이 형성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무시하지 않고, 내가 나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존귀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계시까지 포섭을 해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내가 천국까지 갈려고 하는 그 시도, 그 시도가 신약에 가게 되면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을 믿은 우상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라는 우상을 믿는 우상숭배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형제로 간주하지를 않아요. 예수 믿는다는 그 예수가 다른 예수인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게 다른 예수인지, 진짜 성령이 임해서 믿게 된 진짜 주님의 백성인지를 그걸 가려내고 구분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그럼 그걸 구분하고 가려낼 때 기준이 있을 텐데, 그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은 제가 오늘 124강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이 어디에 근거 하느냐, 시편 73편에 근거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이래되어 있어요. “사람을 주께서 티끌로 돌아가게 하셨다.”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그 티끌로 돌아가게 하신 그 원인이 시편 90편 7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 하나님의 화내심 가운데서 티끌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십니까? 화가 나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을 믿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성령이 없이 그냥 성경을 대해버리면 예수 믿으라 하니까 예수 믿으면 본인이 이익인 줄 알고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고 나옵니다. 근데 그거는 결심에 불과하고 오기에 불과합니다. 그건 이단이 되는 거죠. 예수님은 이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한 구분은 뭐냐, 다시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면 오늘 시편 73편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매했습니다. 무지했습니다.”는 이 고백이 기쁨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이제야, 나는 우매하고 무지함을 주님 앞에 짐승 같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그걸 확인하는 차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이 땅에 살게 했음을, 기쁨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미아 (IP:180.♡.90.76)15-09-05 22:00 
125강-YouTube강의(신자와 불신자)150903-이 근호 목사 

제 125강, 제목은 ‘신자와 불신자’입니다. 성경을 처음에 보게 되면 천지창조가 나오는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어떻게 하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세기를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하신 것을, 그 만드신 것을 믿으면 우리가 신자가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때 천지창조 했던,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그것이 신약 때 보면 개인의 마음에 대해서, 심령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니까 바깥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했던 그것을 믿는다 치더라도 우리 마음 자체가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지옥 갑니다. 

바깥에 있는 현상을, 우리가 저걸 믿는다, 신이 만들었다, 그것을 믿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우리가 안 만들었으니까. 너무나 쉬워요. 그런데 내 마음을 다른 마음으로 바꾼다, 이거는 쉬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천국 가는 것이 저 대자연을 신이 만들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기준이 되지를 않아요. 

창조과학회가 천국, 지옥을 결정한 게 아닙니다. 진화론이 천국, 지옥을 결정한 거 아니거든요. 천국 결정은 우리의 심령 자체가 달라져야 해요. 이거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불가능한 일이에요. 

기적이 일어나야 되는 문제에요. 차라리 “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습니다.” 라고 이 한마디 하고 천국 갔으면 참 편하겠는데, 이 신이 와서 우리 마음 자체를 다루니까, 그 마음 자체를 다룰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옳은 마음 같으면 우리 옳은 마음을 유지를 시키면 되는데, 성경 신약에 보면 우리 마음 자체가 이미 패역 됐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했고, 왜곡되어 있고, 심지어 악마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고, 왕노릇 하고 있다고, 죄가 이렇게 다스리고 있다고,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적해버리면 우리는 이미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러한 마음 가지고, 그런 성격 자체가 불손한 그런 마음에서 어떻게 순수한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까?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일이죠. 

건전한 게 좀 있으면 건전한 것을 좀 뽑아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모든 것이 마음 자체가 상한 심령이 돼버렸는데, 상한 심령을 가지고 상한 심령의 주체자가, 본인의 상한 심령을 가지고 상한 심령적인 손을 댄다면 거기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못 나오죠. 

다시 말씀드려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들었습니다.” “합격입니다.”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심령에 관한 문제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거는 정말 천국 가고 싶어도 못 갈 입장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 본인을 사람으로 간주하는 이것이 치명적인 오류고 잘못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가 다스리는 존재지, 내가 인간인데, 천국이나 지옥을 선택할 선택권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선택권은 어디한테 있느냐, 선택권은 시편 118편에 보면 그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말씀의 작업이 완료가 되고 나면 우리는 두 가지 생산품이 나오는데, 하나는 천국 가는 존재로 나올 것이냐, 아니면 지옥 가는 피조물로 나올 것이냐, 그거는 말씀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주도권이 우리 개인에서 말씀으로 이미 넘어간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길길이 애를 쓰고 간절히 기도하고 통성기도하고 이렇게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보내주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말씀이 우리한테 어떻게 적용하느냐 따라서 천국 가도록 적용하게 되면 천국 가고, 지옥 가도록 적용하게 되면 지옥 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 피조물 입장에서 “이거는 불공평합니다. 이거는 불합리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랑거리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항의한다는 자체가 피조물이 자기의 범주를 넘어서는 객기를 부리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교회라는 것이 사람을 천국 못 보내서 환장하고, 그저 천국 보내려고 애를 쓰는 그 취지는 가상하다는 만은, 그거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그거는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업소일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가 천국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당도 마찬가지고. 유니폼 입고 설친다고 해서, 그것이 고상하다고, 거룩하다고 쳐준다고 해서, 거기서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그 교회와 사랑이 다 끌어 모아도 어떤 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게 하지를 못합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렇게 설치는 인간이나 우리나 다 무능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신자나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 말씀이 어떻게 하는가를 평소에 살아가면서 간파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 간파할 때 성경에 나오는 원리대로 간파하는, 원리대로 진행되는 절차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예가 히브리서 9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사람이라는 것은 죽어야 될 존재로서 임시적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곧 죽을 짓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임하죠. “나는 사람입니다.” 하는 것은 “그래? 곧 그런 식으로 너는 죽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임시적으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저는 사람을 ‘도마’로 보는데, 요리하는 도마. 그 도마는 어떤 음식이라도 칼질 당하는 도마입니다. 도마 위에다가 파나 양파가 숭숭숭 썰리잖아요. 그러면 그 도마가 칼질만 늘 당했을 뿐이에요. 하나님께서 임시적으로 사람이란 도마를 만들어주시고 거기다가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말씀을 집어 넣어주시고 요리는 누가 하느냐, 셰프는 누구냐, 주님이 그 말씀을 요리하면서, 인간은 거기에 말씀이 적용되고, 말씀이 진행되는 그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표현해주는 하나의 바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할 때에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도마에 불과한 인간이 “저를 죽이지 마세요.” 이렇게 저항하거나 반항할 그런 잽이 못됩니다. 그런 처지에 있지를 않아요. 다만 죽음이 무엇이며, 왜 죽음이 인간과 결부되어서, 왜 죽음이 찾아와서 인간은 죽어 마땅한가를, 거기에 대한 모든 과정은 말씀을 통해서 인지가 되고 파악이 되는, 감지가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라서 안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가 있다면 이 사람은, 성도든 불신자든 다 마땅히 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뭐냐, “당연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예, 죽어 마땅하죠.” 이 말씀 작업에 동의가 되는 사람은 신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물론 사람은 사람이 힘들기 때문에 빈 소리라도 ‘이래서는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합니다. 빈 소리라도 ‘아이고 콱 죽었으면 제일 좋겠다.’ 그런 소리를 하죠. 특히 연세 많아서, 나이 들어서 병들면, 온 몸에 당뇨 걸리고 하면, 아이고 죽는 게 편하다고 하죠. 

그런데 한 번 보세요. 본인 죽는 것은 그렇게 편하게 가는데 만약에 본인 죽기 이전에 팔팔하고 거기다 공부 잘하고 인물 좋은 자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죽는다면 ‘그래, 사람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야. 그래, 죽어라.’ 라고 이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부모 있습니까? 그게 히브리서 9장 27절에 분명히 나온 말씀인데요? “하나님이여, 그 말씀을 차라리 부모인 나한테 적용시키되, 제발 철없는, 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제 자식한테는 비켜가게 하옵소서.” 그러한 욕망,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순수하게 동의가 안 되는, 몇 번이고 발악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냉철하게 우리를 도마로 사용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놓고 그 다음에 뭐냐,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제 심판까지 도마에 얹습니다. 

“심판이 있으리니”, 죄를 씻어준 사람은 구원이 이르게 하고 죄와 상관있는 사람에게는 지옥 보낸다, 라는 이야기가 우리의 판때기 위에 그대로 적용되는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 실제적으로 지금도 이루어지는 말씀 작업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시면 신자가 동의 못하면 불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