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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인간의 바탕,종속된 세월 1311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9. 19:24
2013-11-29 00:25:59 조회 : 1026         
유튜브(54강, 55강) 인간의 바탕, 종속된 세월 131128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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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강-YouTube강의(인간의 바탕)13011028-이 근호 목사


“인간의 바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체험들이 있고 인생들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남들과 비교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인생에 있어 정답이라는 것이 전부다 어떤 식으로 주장하게 되느냐하면, 자기가 경험한 것, 자기가 인생 살아온 것 그것을 세상의 정답이라고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직업에 따라서 정답이 다 다르겠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또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래 각 사람마다 인생 자기가 살아온 경험들이 의미 있고 가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다 종합하고 다 모아 놓으면 그것들이 진리이고 정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모든 경험과 체험이라는 것은, 어떤 경향성이 있는데 성질이 있어요. 그 성질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만약 의사라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자기 직업에 부합되도록 그걸 어려운 말로 유(有)의미라 하는데 의미 있는 것으로 재해석하는 세상을 다시 해석하는 성질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디오피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만약 군인 같으면 ‘야 한국인이 파병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것이고, 의사 같으면, 의사로서 거기서 봉사하면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일이 하나 벌어졌는데 자기가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그 직업 때문에 그 이디오피아에서 일어났던 그 사태를 자기하고 유(有)의미, 의미 있는 것으로 연결 지으려고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 세상에 진정한 해답은 나올 수 없지요. 그리고 열사람 모아 놓아 봤자 각자 자기주장만 나올 뿐이기 때문에 그것도 정답이라고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 인간의 정답은 뭐냐, 인간이 살아가면서 항상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요소가 인간에게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변하지 않는 요소를 제시합니다. 그 요소가 여러 가지 말씀으로 주시지만 이 시간에는 시편 49편 17절~20절 말씀을 읽어 보면서 이것이 인간의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그리고 어떤 환경에 있든지 어떤 나라에서 시민으로 살든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인간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경험 같은 것, 그런 틀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이라면 다 체험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성경은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시편 49편 17절~20절 읽어 보면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를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이 땅에서 어떤 체험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그 바닥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깔려있는 이유와 내막을 알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겁니다.


특히 여기 17절에 보면, 생시에 자기가 평소에 세상에서 출세했고, 성공했고, 교회에서도 복 받았다고 칭찬하고 하니까 스스로도 칭찬할 수밖에 없겠죠? 남들이 다 그렇게 얘기 하니까 ‘역시 난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라고 자부해도 그것은 생시에 자기를 스스로 축하해도 그 바닥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부자가 됐다. 출세했다. 또는 권력을 잡았다. 남한테 부러움을 사더라도 ‘아니야 그 딴 건 다 껍데기고 바람에 날라 가는 낙엽 같은 거야. 사실은 내가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나는 지니고 있어. 그런 속성을 나는 지니고 있단 말야.’ 라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짐승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사실은 본인이 짐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의 모임, 무리여야 그것이 참된 교회가 되겠죠. 세상에서 영광 받은 지 자랑질 하러 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가 없겠죠.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사람과 인간하고 어떤 연결을 시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자기가 잘하는 것, 주특기, 장기, 자질, 능력 흔히 그것을 교회에서는 달란트라고해서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 해서 그것을 개발하시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라는 이야기 하거든요? 그건 칼빈이 그런 이야기를 해서 덩달아 다 따라하는거 같은데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소질 달란트 가지고 우리와 관련을 짖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바닥, 우리의 바탕위에서 우리와 비로소 연관을 짖고,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습니다. 그 근거가 시편 50편 5절에 보면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내 천국 간 백성들아 내 앞에 나오너라 그런 이야기죠.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여기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천국,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제사에 의해서만 약속을 맺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제사도 나오지만 그전에 아브라함과의 맺은 약속도 제사였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또는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삭을 바침으로서 믿음 있는 자라고 인정을 받죠?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바치게 해서 그 제물을 통해서 제물가운데 쪼개놓고 그 가운데를 하나님이 지나감으로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성사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의사냐, 판사냐, 목사냐, 백수냐, 가정주부냐, 선교사냐 이런 직업가지고 하나님께서 직업자체에 의미를 주고 맺는 게 아니예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씀드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유(有)의미,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하는 직업으로 하는 일, 내가 여기 매진하는 일로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세상과 관련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작된 거고, 하나의 환타지고요 그건 우리가 스스로 자기한테 의미를 갖기 위해서 만들어 낸 거고,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비 복음적이고, 그건 악마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가지고 어떻게 영광이 있더라도 여기 49편 17절 말씀처럼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다” 는 거예요.


우리가 죽으면 가져가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그동안 벌었던 재산과 자식교육 잘 시킨 것, 성공시킨 자랑거리들 다 버리고 교회 주님 앞에 예배 올 때는 ‘이미 나는 죽은 자다.’ 하는 마음으로 어떤 재산이나, 어떤 권력이나 성취성은 다 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은 어떻게 마중 나오느냐.


시편 50편 5절의 말씀처럼 제사로 나와 언약을 맺는다. 여기에 나오는 제사가 신약에서 마무리된 제사, 완성된 제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서 비로소 십자가 앞에서 너 자신을 제대로 다시 보라는 겁니다. 다시보고, 우리는 주님 십자가 앞에서 정말 그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내 자랑하고 유(有)의미, 의미 있는 존재라고 자부했던 그 모든 것이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만든 원인제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유일자 (IP:116.♡.234.248)13-12-02 09:19 
55강-YouTube강의(종속된 세월)13011028-이 근호 목사


“종속된 세월”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보통 세월이라 하는 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모든 기업들의 연결고리 그걸 세월이라 하죠. 또는 나만의 역사,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라 할 때 우리가 잘 살았던, 못 살았던 간에 우리는 남한테 종속되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물론 어릴 때 경제적인 자립이 안 되고, 교육비를 부모로부터 타내야 되고 가정생활이나, 식사와 잠자리를 부모로부터 제공받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세상관, 인생관 특히 부모의 종교관, 신앙관을 본의 아니게 억지 삼아 소유하는 척을 했겠죠. 하지만 유, 청소년 시절이 끝나고 드디어 20세가 되어서 어른이 됐다, 라고 한다면 그때 청춘들은 전부다 ‘내가 원 없이 나의 존재됨을 풀어 낼 수 있는 나만의 역사. 이젠 종속이란 말의 뜻을 버리고 나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 라고 다짐의 다짐을 하면서 자기 청혼의 꿈을 꾸죠.


그런데 꿈꾸는 그 출발점에 나라에서 군대 가라고 소집장 오게 되면 어떻습니까? 군의 하루 스케줄이 군인 본인이 정합니까? 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다 정하죠. 군대생활에서 제일 힘든게 뭐 훈련이 힘들다. 음식이 힘들다. 잠자리가 힘들다. 하지만 제일 힘든게 뭐니해도 시간 스케줄을 자기가 짜지 못하고 자유가 없다는 거예요.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고,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하고 누구 눈치 봐야 된다는 겁니다.


탈영하고 싶죠. 탈영하게 되면 수십배의 보복이 국가로부터 주어집니다. 징역살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평생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리면 군에 2년 다녀온 거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갖게 되고 청혼의 꿈은 날라가 버리죠. 청년 때부터, 군에 갈 때부터 그동안 부모한테 종속된 것은 종속도 아니고, 진짜 내가 원치 않는 국가라는 이 명령에 종속되면서 어렴풋이 사회에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아~ 내가 남의 것을 얻고자 한다면, 바로 내 뜻을 남한테 굴복당해야 되고, 종속당해야 되고, 예속되어야 비로소 약간이나마 나의 원하는 것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뜨게 되는 겁니다.


취직하기 전에는 취직해서 취직했다는 그것에 대한 수입과 그 수입을 기초로 해서 자기의 미래상을 꾸미고 싶지만 회사에서 그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꿈조차 접고 회사의 꿈에 종속되어야 되는 것이 신입사원들의 팔자요, 운명입니다. 그것이 현실이고 사회고.


사회라 하는 것은 내 꿈대로, 내 원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꿈을 펼치기 이전에 나보다 더 센 힘으로 나에게 뭔가 강요하는 그러한 힘들의 군상들이 힘들에 따라서 움직이는 군상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개인회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회사해도 더 큰 회사가 버티고 있고, 또는 작은 회사끼리 하청을 해도 경쟁해야 되고, 어디에도 경쟁은 있고 내 뜻대로 안될 때, 우리는 결국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 꿈을 펼친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미 기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수능 하는 식으로 그래도 숨쉴수 있을 만한 조그마한 내 공간하나 마련하는 데에도 그렇게 굴복과 굴복의 반복에 의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얻어봤자 그것도 언제 날라 갈지 그것도 항상 위협받는 존재죠.


자, 그렇다면 과연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 꿈을 펼치고 나만의 청혼의 꿈을 펼친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소리치는 허풍에 불과한 거고, 실제는 내가 생존에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진해서 고개 숙이고 굴복해야 되는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 우리는 내던져진 존재, 투사라 하죠. 그냥 던져진 존재, 투여된 존재 그런 식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나만의 인생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요. 이미 선배들이 갔던 상투적인 인생의 되풀이와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방하는, 흉내 내는 인생, 삶. 나만의 개성을 챙기는 것을 허용하고 용납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전철을 밟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런 사태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냐 하면, 아담에 속한 인생, 또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육신적인, 육에 속한 인생. 풀이하면 육에 종속된 인생, 어두운 세상에 종속된 세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돈과 인기와 권력이 지배하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이 세가지 가지고 시험 받았거든요? 여기에 종속된 인생으로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은 이 세상의 진정한 의미라 하는 것은, 혹독하게 자기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협박받으면서, 위협받으면서 분명히 협박이고, 위협이고 나의 자유와 개성을 부수는 공격성 있는 힘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몇 푼 안 되는 월급 때문에 양심속이고, 고개 숙이고 마음까지 스스로 자기를 굴욕적으로 낮추면서 굴복해야 됨을 통해서 참으로 내가 진정 세상에 대해서 굴복하는지,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 자체에 대해서 지금 애초부터 굴복 받아야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파악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끝은 뭐냐, 그렇게 굴복하면서 희망의 날, 좋은 날을 기대한다구요? 결국은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죽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조금씩 체험의 순간들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아프죠. 괴롭습니다. 누가 몽둥이로 때려서 아픈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우리는 아픕니다.


내 뜻대로 안되니까 아프고, 싫어하는 사람을 웃으면서 대해야되고 위선을 떨어야 한 푼이라도 번다는 그러한 자기가 자기의 성질을 죽이고 속여야 되는 그것이 정신적으로 아파요. 평생 살면서 안 아픈 순간이 없어요. 뭔가 좀 좋았다가도 롤라코스터처럼 다시 협박받고, 위협당하고 두려움으로 변하는 그런 순간이 다시 옵니다.


돈을 좀 가져도 누가 이 돈을 빼앗아가고, 훔쳐가고, 사기쳐갈지 누가 또 달라고 동정삼아 와가지고 나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있는 돈도 가져갈지 우리는 소유를 가져도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일부러 시키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이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뭐를 꿈꾸느냐하면,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원합니다. 그런 직업을 원하다 보니까 가는 길이 뻔하죠. 신학교가서 선교사로 가던지, 목회하던지 목회해도 부목사나, 전도사 보다는 당회장목사가 되어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목회했을 때 뭔가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고, 자기의 만족도도 높이고, 자기 자유도 만끽하고 양쪽 다 그것을 구비한 것처럼 희망을 품고 신학교 갑니다마는,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목사직도 찢어버리는 것을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목사를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믿는 걸 포기했을 경우에만 목사해서 목회 성공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오늘날 교회입니다. 따라서 사도들 갔던 길을 보세요.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열두 사도를 보세요.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속에 고생고생하면서도 세상에 종속된 세월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께 종속된 예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었으면 이제는 죽겠습니다. 주여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그들의 인생의 삶의 목표였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죽는 것이 목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 종속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