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YouTube강의(종속된 세월)13011028-이 근호 목사
“종속된 세월”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보통 세월이라 하는 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모든 기업들의 연결고리 그걸 세월이라 하죠. 또는 나만의 역사,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라 할 때 우리가 잘 살았던, 못 살았던 간에 우리는 남한테 종속되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물론 어릴 때 경제적인 자립이 안 되고, 교육비를 부모로부터 타내야 되고 가정생활이나, 식사와 잠자리를 부모로부터 제공받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세상관, 인생관 특히 부모의 종교관, 신앙관을 본의 아니게 억지 삼아 소유하는 척을 했겠죠. 하지만 유, 청소년 시절이 끝나고 드디어 20세가 되어서 어른이 됐다, 라고 한다면 그때 청춘들은 전부다 ‘내가 원 없이 나의 존재됨을 풀어 낼 수 있는 나만의 역사. 이젠 종속이란 말의 뜻을 버리고 나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 라고 다짐의 다짐을 하면서 자기 청혼의 꿈을 꾸죠.
그런데 꿈꾸는 그 출발점에 나라에서 군대 가라고 소집장 오게 되면 어떻습니까? 군의 하루 스케줄이 군인 본인이 정합니까? 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다 정하죠. 군대생활에서 제일 힘든게 뭐 훈련이 힘들다. 음식이 힘들다. 잠자리가 힘들다. 하지만 제일 힘든게 뭐니해도 시간 스케줄을 자기가 짜지 못하고 자유가 없다는 거예요.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고,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하고 누구 눈치 봐야 된다는 겁니다.
탈영하고 싶죠. 탈영하게 되면 수십배의 보복이 국가로부터 주어집니다. 징역살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평생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리면 군에 2년 다녀온 거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갖게 되고 청혼의 꿈은 날라가 버리죠. 청년 때부터, 군에 갈 때부터 그동안 부모한테 종속된 것은 종속도 아니고, 진짜 내가 원치 않는 국가라는 이 명령에 종속되면서 어렴풋이 사회에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아~ 내가 남의 것을 얻고자 한다면, 바로 내 뜻을 남한테 굴복당해야 되고, 종속당해야 되고, 예속되어야 비로소 약간이나마 나의 원하는 것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뜨게 되는 겁니다.
취직하기 전에는 취직해서 취직했다는 그것에 대한 수입과 그 수입을 기초로 해서 자기의 미래상을 꾸미고 싶지만 회사에서 그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꿈조차 접고 회사의 꿈에 종속되어야 되는 것이 신입사원들의 팔자요, 운명입니다. 그것이 현실이고 사회고.
사회라 하는 것은 내 꿈대로, 내 원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꿈을 펼치기 이전에 나보다 더 센 힘으로 나에게 뭔가 강요하는 그러한 힘들의 군상들이 힘들에 따라서 움직이는 군상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개인회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회사해도 더 큰 회사가 버티고 있고, 또는 작은 회사끼리 하청을 해도 경쟁해야 되고, 어디에도 경쟁은 있고 내 뜻대로 안될 때, 우리는 결국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 꿈을 펼친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미 기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수능 하는 식으로 그래도 숨쉴수 있을 만한 조그마한 내 공간하나 마련하는 데에도 그렇게 굴복과 굴복의 반복에 의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얻어봤자 그것도 언제 날라 갈지 그것도 항상 위협받는 존재죠.
자, 그렇다면 과연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 꿈을 펼치고 나만의 청혼의 꿈을 펼친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소리치는 허풍에 불과한 거고, 실제는 내가 생존에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진해서 고개 숙이고 굴복해야 되는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 우리는 내던져진 존재, 투사라 하죠. 그냥 던져진 존재, 투여된 존재 그런 식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나만의 인생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요. 이미 선배들이 갔던 상투적인 인생의 되풀이와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방하는, 흉내 내는 인생, 삶. 나만의 개성을 챙기는 것을 허용하고 용납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전철을 밟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런 사태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냐 하면, 아담에 속한 인생, 또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육신적인, 육에 속한 인생. 풀이하면 육에 종속된 인생, 어두운 세상에 종속된 세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돈과 인기와 권력이 지배하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이 세가지 가지고 시험 받았거든요? 여기에 종속된 인생으로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은 이 세상의 진정한 의미라 하는 것은, 혹독하게 자기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협박받으면서, 위협받으면서 분명히 협박이고, 위협이고 나의 자유와 개성을 부수는 공격성 있는 힘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몇 푼 안 되는 월급 때문에 양심속이고, 고개 숙이고 마음까지 스스로 자기를 굴욕적으로 낮추면서 굴복해야 됨을 통해서 참으로 내가 진정 세상에 대해서 굴복하는지,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 자체에 대해서 지금 애초부터 굴복 받아야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파악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끝은 뭐냐, 그렇게 굴복하면서 희망의 날, 좋은 날을 기대한다구요? 결국은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죽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조금씩 체험의 순간들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아프죠. 괴롭습니다. 누가 몽둥이로 때려서 아픈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우리는 아픕니다.
내 뜻대로 안되니까 아프고, 싫어하는 사람을 웃으면서 대해야되고 위선을 떨어야 한 푼이라도 번다는 그러한 자기가 자기의 성질을 죽이고 속여야 되는 그것이 정신적으로 아파요. 평생 살면서 안 아픈 순간이 없어요. 뭔가 좀 좋았다가도 롤라코스터처럼 다시 협박받고, 위협당하고 두려움으로 변하는 그런 순간이 다시 옵니다.
돈을 좀 가져도 누가 이 돈을 빼앗아가고, 훔쳐가고, 사기쳐갈지 누가 또 달라고 동정삼아 와가지고 나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있는 돈도 가져갈지 우리는 소유를 가져도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일부러 시키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이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뭐를 꿈꾸느냐하면,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원합니다. 그런 직업을 원하다 보니까 가는 길이 뻔하죠. 신학교가서 선교사로 가던지, 목회하던지 목회해도 부목사나, 전도사 보다는 당회장목사가 되어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목회했을 때 뭔가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고, 자기의 만족도도 높이고, 자기 자유도 만끽하고 양쪽 다 그것을 구비한 것처럼 희망을 품고 신학교 갑니다마는,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목사직도 찢어버리는 것을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목사를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믿는 걸 포기했을 경우에만 목사해서 목회 성공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오늘날 교회입니다. 따라서 사도들 갔던 길을 보세요.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열두 사도를 보세요.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속에 고생고생하면서도 세상에 종속된 세월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께 종속된 예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었으면 이제는 죽겠습니다. 주여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그들의 인생의 삶의 목표였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죽는 것이 목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 종속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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