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강-YouTube강의(아버지와 자식)150305-이 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제 105강 제목은 ‘아버지와 자식’입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이런 민족이 있답니다. 자식이 많아서 그런지, 자식이 볼 때 아버지 값을 못하면 아버지를 바꾼답니다. 자식에게 그런 권한이 있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은 걸 느꼈어요. 어떤 걸 느꼈느냐 하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착각하는데, 만약에 진짜 아버지를 안다면 아마 바꿔달라고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자식 입에서 아버지라 부를 때, 그거는 자식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시는 아버지와 일반인들이, 또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게 같을 리가 없죠. 왜냐, 같았다면 예수님 입에서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니 너희들 애비는 마귀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굉장히 수상하고 그건 잘못된 하나님 아버지일 가능성이 백퍼센트죠.
아까 아프리카 경우처럼 사람들은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자기 이득을 제쳐놓고 낳아줬으니까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러한 순수함으로 다가서지를 않아요. 내가 파악하고 내가 납득이 되는 아버지는 항상 자기 이익을 채워주고 그걸 달성해주는 좋은 분의 이미지를 가지고 거기다가 신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손에 접촉되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조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를 줍니다. 그리고 십계명 5계명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에 어느 자식이든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말에 이의를 거는 사람, 토를 다는 사람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미성년자고 아버지는 자기에게 생계를 책임지고, 돈을 벌어주고, 양식을 제공하고, 자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자기 보호자가 되기 때문에, 자기 보호자를 공경하지 말라고 해도 공경할 거예요. 공경 안 했다가는 자기가 손해 보는데요.
그렇다면 십계명의 제 5계명에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말이, 태어나게 해줘서, 먹여살려줘서, 돈벌어줘서, 보호해주니까 공경하라는, 어떤 조건하에 공경하라는 말씀일까요? 그 십계명에 담긴 내용은 이스라엘 내에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의 투입에 의해서 그 내용이 드디어 깊어집니다. 그 깊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바꾸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고 했지만 아버지라고 대우를 한 적이 없다는 그런 평가가 하나님 쪽에서 나와 버리죠.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을 되돌아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분명히 나에게 이런 혜택을 줬기 때문에 참 좋으신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것이 결코 아버지답지 않은, 내가 아버지를 제대로 모르고 오해해서 나온 아버지구나! 라는 것을 그들은 소급해서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쉬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를 그들이 오해했다면 그 잘못은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그거는 바로 인간적인 아버지와 자기 관계를, 그것을 하나님까지 아무거리낌 없이 연장시켰다는 게,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는 것과 세상에 있는 아버지가 주는 것을 동일한 내용이라고 그렇게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정말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가 살펴봐야겠죠. 십계명에서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그 십계명의 전문이 있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버지를 공경하라” 신명기에서 십계명을 재해석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아버지는 무엇을 아는 사람이냐 하면, 홍해사건을 아는 사람이에요. 아버지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충격적인 사건이 체험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버지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알되 그냥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 때의 그런 사람들을 바다 물속에 집어넣고 끄집어 낸 하나님이십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식 만드는 작업 중에 하나가 자식을 죽음에다 집어넣고 다시 끄집어내는 작업을 통해서 “자, 이제야 너와 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것을 알겠느냐?” 라는 놀라운 경험을 실제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 홍해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자식들한테는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이면서 자기에게는 체험되지 않은 이야기죠. 체험되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거는 빼버리고 지금 나에게 돈벌어주고 양식주시고 나를 예뻐해 주는 그 아버지가 고만 먼저 나타나죠. 죽었다가 살아난 그 아버지의 이미지는 날아가 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진짜 아들과 진짜 아버지 만들기 위해서는 홍해사건과 유사한 그런 새로운 사건들을 계속해서 집어넣어줄 필요를 느낀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희들은 진즉에 죽어야 한다.”는 그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주면서 고 투입된 말씀 때문에 “아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예 죽이려고 하시는구나!” 라는 죽음 사건을 밑에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으키는 일을 동반시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정리 되어야 할 것이 이겁니다. 모든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밑에 뭘 깔아야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어야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깔고 말씀을 해석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잠언서 2장에 보면, 잠언서 1장, 2장 계속 나옵니다. 4장도 마찬가지고. 또 3장도 마찬가지고. 1, 2, 3, 4장 연 이어서 계속 5, 6장 연 이어서 계속 나오는 그 첫마디가 뭐냐, “내 아들아”입니다. 1장도 내 아들아! 다윗의 아들 솔로몬. 2장 내 아들아! 3장 내 아들아! 4장 내 아들아! 5장 내 아들아! 6장 내 아들아! 자, 내 아들아! 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그냥 잘해주기만 하면 “내 아들아!” 라고 외치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아이고, 좋으신 아버지여!” 라고 먼저 나설 용의가 되어 있어요. 잘해주기만 한다면. 원하는 것 알아서 챙겨주기만 한다면.
우리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섬기는 게 그런 하나님 아닙니까? 그저 뭐든지 내 원대로 해줄 때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말래도 자진해서 공경하고 싶고 헌금하고 싶고 그런 마음을, 그런 양심적인 착한 마음을 우리가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원하는 것을 줄 때 좋은 하나님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치 않는, 기피하고 싶은, 차마 이런 일이 나에게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궁지에 몰리고 초죽음 당하는 그런 입장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명령을 지키라는 말이 비로소 죽음이라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이 되는 거예요.
다른 여유 있을 때, 풍족할 때는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 있을 때 아담이 말 들었습니까? 아담이 언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까? 자기가 죽음을 기다리면서, 부끄러운 가운데 죽음을 기다릴 때에, 죽는 순간 이전에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왔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죽고 난 뒤에 그 다음 조치입니다. 따라서 죽음이 전제되고 난 뒤에, “우리는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죽음으로 내려가야 돼.” 라고 할 때에 들려오는 주의 말씀.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으로 “내 아들아! 내 말을 들으라” 라는 말씀이 비로소 내 생명보다, 내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생각을 우리는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여,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다.” 그 생명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것은 니가 진정 아들이라면 예수님을 보낸 그 취지를 니가 받아들여라.
그리고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아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