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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강의-낯선 사람 1608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5. 19:01
2016-09-03 22:20:18조회 : 32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2 - 낯선 사람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2 - 낯선 사람 
                                                                                 
                                                          16,08,2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어둠 속에 있으면 주변의 존재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 의식합니다. 그게 바로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 어둠 속의 인간 !!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으면 주변이 어둡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는데, 여기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은 자기 의식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변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이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즉 인간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즉 "빛이 오기 전에는 어둠인 줄 몰랐는데, 빛이 오고 나니 어둠 속에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특히 어둠 속에, 어둠 안에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전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둘러 쌓여있는데, 그럴 때 느끼는 것은 '나' 라는 의식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면 그런 자기 의식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고 하니,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데, 그러니 성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간에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결론은 어디로 가겠는가? 당연히 자기에게 유리하게 간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이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스스로 어둠에서, 즉 스스로 자기의 진면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성경을 보던 무엇을 하던 간에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잘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여기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인간은 어둠 속에 있다" 라는 것을 그만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즉 '무엇 무엇 속의 인간' 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그만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강의를 어렵게 해서 여러분에게는 미안한데 말이다.

◈ 무엇 무엇 속의 인간 !!

그렇게 그것을 없애버리니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즉 성경을 볼 것인지 불경을 볼 것인지, 그런 것도 자기가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인지를 모르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 성경을 주니까, "성경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라고 여기고, 그런 성경에서 하나님이 나오고 여호와가 나오니,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1장에서 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어느 속에 있다. 그것도 빛이 아닌 어둠 속에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어둠 속에서는 자의식밖에 나오지 않는데, 즉 캄캄한 밤에는 항상 자기만을 의식하는, 바로 그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아왔다는 말이다.

◈ 대리와 대속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대리성, 즉 대신 죽음, 대리 구원, 물론 교회에서는 이 '대리' 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대속(代贖)' 이라고 하는데, 이 대속이란 것은 먼저 대리가 있고 그 다음에 용서함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용서함이란 것은 빚을 탕감해준다는 의미인데, 즉 빚을 면제해준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돈이 없어서 빚을 갚지 못하는데, 그러니까 대리해서 탕감을 해준다는 것은, 주기도문에 보면 그 탕감이 나오는데, 즉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해준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빚진 것을 탕감해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러니 대리 용서나 대리 탕감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리가 들어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어둠 안에 들어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어둠을 성도의 경우에는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이것을 대리효과가 있는 장(場)으로, 그런 영역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복음이 궁금하고 기독교의 진리가 궁금하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딱 여기에 있는 이 그림 하나인데, 즉 어둠을 대리효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자기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무엇을 경유하는고 하니까, 대리 효과를 받은 열매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주께서 하신 대리 작업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리 뒤에는 무엇이 붙는다고 했는가? 대리 용서해주심, 대리 탕감해주심, 대리 면제해주심, 그렇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작업의 결실물, 즉 열매라는 것이다.

◈ 십일조의 경우에 !!

이것이 신약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구약에는 무엇인고 하니, 농사를 지으시는 하나님인데, 즉 농사꾼 하나님인데, 농사꾼이니까 그 뒤에는 반드시 소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소산물을 제사장이 가지고 가는데, 100퍼센트 전부 다 가지고 간다는 말이다. 도둑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데,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가지고 가는데 90퍼센트를 돌려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무려 90퍼센트를 다시 받으니 말이다. 그러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10퍼센트 차이가 나는데, 그것을 두고 십일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일조는 내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자기 것을 90퍼센트 가지고 가면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십일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언급할 때는 "나의 것을 다 가지고 가신 분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의와 신과 인이 바로 그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제사장의 응식(應食)이고 권리이고 몫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제사장이 누구인가? 어제 오후시간에 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것을 몽땅 다 가지고 가시고, 주지 않아도 되는데 무려 90퍼센트나 주셨다는 것이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다는 말이다. 

◈ 살려주시니 살아가는 인생 !!

우리의 인생이 독자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대리 효과 속에 있기 때문인데,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그 90퍼센트의 효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도는 살려주니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왜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을 주는데 있어서, 자식이 "엄마, 용돈이 좀 모자라요" 라고 하면 더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양들에게 90퍼센트의 용돈을 주시는데, 그러면 어떤 관계가 되는가? 농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지으시고, 그 결실물이 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즉 성도 자체가 열매라는 말이다.  

◈ 성도 자체가 열매 !!

그러니 여기서 제일 말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실물이 도로 하나님에게 봉사한다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봉사를 다 받았는데 무엇을 더 봉사하고 말고 한다는 말인가? 그냥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미 열매 자체인데, 그런데 그 열매가 또 떼어서 무엇을 드린다고 한다는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것을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의와 신과 인인데, 그 자체가 온전한 십일조가 된다는 것이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율법의 일점 일획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

그래서 율법과 온전함 사이에 누가 들어가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다 이루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니 성경전체가 맞추어지는데,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이루었다고 하면 열매가 있을 것인데, 그 열매가 무엇인고 하니, 용서함을 받은 자들의 등장이야말로, 그들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인데, 그들이 누구의 열매인고 하니, 주님의 열매인데, 왜냐하면 주님의 효과 안에 있기에 말이다. 

그런데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자기 의식이니, 그래서 자기 자신은 자기가 애를 써서 만든 열매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에 나서게 되는데, 그게 바로 외식하는 자의 모습이고 거짓이라는 말이다.

◈ 내 인생은 나의 것 !!

그러면 그런 오류가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강의처음에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모든 것이 어둡다고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어둠 속에서 믿을 만한 것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 라는 의식만 달랑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평소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가 하기 나름이다" 라고 하는 자의식밖에 없으니, 거기에 성경을 붙이든 불경을 붙이든 코란을 붙이든, 그렇게 자기가 업을 쌓았다고 하는 의식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업을 쌓던 절에서 업을 쌓던 그게 다 같은 업인데, 즉 "내가 이런 업을 쌓았으니 복을 받는구나" 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로 예민한고 하니, 그것을 징벌로서 간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다이어트를 하고 노력을 해도 몸무게가 줄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벌을 받았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물론 몸매가 날씬해지면 축복으로 여기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축복과 저주를 자의식으로 시작하니, 겨우 생각한다는 것이 그 정도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약간 발전한 것이 "하나님에게 잘하니 우리 가족이 잘 되더라" 라고 하는데, 역시나 자기 가족중심이라는 것이다. 자기에서 발전된 것이 자기 가족인데, 우리 인간은 그렇다는 말이다. 

◈ 나부터 살고 보자 !!

고대명언에 "나는 형제와 싸우고, 형제는 부족과 싸우고, 부족은 다른 민족과 싸운다" 라고 하는 게 있는데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 라는 것이 중요하니,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형제와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 형제 바깥에서 적이 왔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형제와 단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가가 자기 국가를 침범해오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도 단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전라도와 경상도가 평소에는 열나게 싸우더라도 일본놈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서로가 힘을 모아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고 고대격언에 보면 나와있는데, 그러니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잘 보았느냐는 것이다.

결국은 무슨 의미인가? "나부터 살고 보자" 라는 것인데,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말이다. 현대철학이나 현대과학도 역시 "나부터 살고 보자" 라고 하는 것이 전부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SF영화를 보면 항상 지구가 잘 되기 위해서 외계인들과 싸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그것을 판정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은 어둠 속에 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나부터 살고 보자" 라는 것이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만 드러난다는 말이다.

◈ 어둠이 인물로 !!

여기서부터 어려워지는데, 오늘 강의가 너무 어려울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데 말이다.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 주위에 어둠이 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어둠이 무엇으로 변하는고 하니, 그 어둠이 인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참으로 어려운데 말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분명히 어둠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요한복음 8장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사탄이 되고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초반부터 악마가 등장을 하는데, 4장부터 말이다. 여기서 사탄과 악마는 서로 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 오감으로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데 있다고 하면?

물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데, 즉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체가 아니라는 것인데,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감으로 말이다. 그것을 '안이비설신'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눈으로, 눈으로, 귀로, 코로, 몸의 촉각으로 포착이 되지 않는데, 그런데 뭔가 존재했을 때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오감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없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없는데 나타났다고 하면, 물론 그렇게 나타나면 시각에 포착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나타나게 되면 '있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끝까지 가보면, 그 나타남이 누구에게 나타남이 되는고 하니, 예수님에게만 사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게 마태복음 28장 끝까지 간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 라고 해도, 정작 바리새인들은 전혀 걱정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 오감이 포착되지 않으니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으면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에만 이것이 있음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을 하는데,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경계에 선 자 !!

여기에 우리 인간들이 있다고 하면, 즉 제자들이 있고 유대인들이 있고, 예수님은 여기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마는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경계선' 이라고 하고 싶은데,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경계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인데, 그래서 목사가 복음을 설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지, 없는 것을 자꾸만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알아듣기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알아듣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세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있음에서 있음으로 가는, 그런 이야기만 해주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교인들은 그런 요구를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경계에 서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설교한다고 하면, 그 설교자도 역시 경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양쪽을 다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양쪽을 다 아니까,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바꿔주어야 하는고 하니, 물론 목사가 바꾸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여기에 있잖아" 라고 연결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경계에 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종교가 아닌데, 어렵다고 할 말조차도 부족하다는 말이다. 불가능한 것인데, 성경에선 이것을 간단하게 '영적 존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흉내를 내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영적 존재라고 해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있음에서 있음으로 간다는 말이다. 방언을 한다든지, 아니면 예수를 믿고 착하게 산다든지, 담배를 끊는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어둠이 어떻게 악마로 변하는가?

그러므로 '나'를 포함한 유대인들, 그리고 제자들, 그들도 역시 있음에서 살아가는데, 그게 전부라고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은 이 자체가 어디에 포위되어있다고 했는가? 벌써 10번도 더 했지 싶은데 말이다. 어둠에 포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은, "이 어둠이 어떻게 악마, 혹은 악마의 힘으로 변하는가?" 라고 하는 그 과정에 대해서, 그것을 제가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악마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데, 그렇다면 악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데, 그런데 악마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완료와 미완료로 나누는데, 즉 "이미 되었다" 라는 것과 "아직 되지 않았다" 라고 말이다. 이것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 8장을 보겠는데, 3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완료와 미완료 !!

여기 마지막에 보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하셨느니라' 라고 말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이 완료가 어떻고 하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이루어졌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루어졌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적 세계의 시간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라기보다도 층으로, 즉 각기 또 다른 두 개의 층이 포개져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위에는 이루어진 것, 그리고 아래는 이루어진 것에 비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데, 말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냥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루진 것에 비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에 것에 비해서 덜 영적인데, 즉 영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과거에서 경험한 것이 현재가 되었고, 그리고 미래는 대기상태인데, 그것이 곧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시간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것은 전부가 과거에 경험한 것인데, 그 과거를 현재에 느낄 뿐이고, 그리고 미래는 반드시 과거에 근거해서 내다본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정도인데, 그러니 성적을 좀 더 올려라" 라고 말이다. 즉 "지난번에 25등이었으니 이번에는 15등을 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 근거한 미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시간에 층이 없는데, 시간은 그냥 단선이라는 것이다. 터널 속으로 통과한 것뿐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동사가 없는데, 완료와 미완료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완료는 언제인가? 윗층에 있는, 즉 위에서 이야기하면 완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지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냐는 것이다.

◈ 주께서 말씀하셨다 !!

그러니 "주께서 말씀하셨다" 라는 것은, "하면 하고 말면 말고"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것 자체가 이 지상에서는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의 미완료라는 말이다. 즉 필히 이루질 수밖에 없는 것을 꾸역꾸역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 전에 예정되어서 구원이 되었다" 라는 것은 완료가 된 것인데, 그런 완료됨을 우리는 꾸역꾸역 확인할 뿐인데, 살아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어떻게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 자기가 오해하고 곡해하고 훼방하고 있는지를, 그러한 자기의 허점을 확인만 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교회운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도망을 가든지 말든지 교회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그런 것과 관계없이 이것은 진리 그 자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아무도 추종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을 말씀을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기 때문인데, 여기는 그냥 미완료인데, 즉 "할 수 있는 데로 최선을 다해서, 되지 않으면 그만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지상인데, 그런데 위에는 무엇인가? 손을 털고 있는데, 즉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디를 봐서 그게 끝났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죽는 것도 이미 완료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앞서서 봉사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은 정해진 것인데, 그러니 그렇게 정해진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데, 이것은 미완료라는 말이다. 물론 주님은 아시지만 이 땅에서는 미완료라는 것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니까 성도라고 하면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자신의 행함을 믿는 것인데, 성도라고 이야기하기가 그야말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층에 있는, 즉 위층에 있는 말씀을 믿는 모습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목사의 경우에도, 자기에게 믿음이 없으니 그것을 남에게 들킬까 싶어서 두려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세요' 라고 강단에서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목사가 말씀을 믿지를 못하는데, 그러니 그런 설교가 교인들에게 납득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목사나 교인들이나 다같이 믿지를 않으니 서로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발 그것만 이야기해주세요 !!

어떤 분이 하도 답답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린 것을 보았는데, 한국교회에 부탁을 하기를, "제발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것만 말씀해주세요. 다른 소리는 하지 마세요" 라고 말이다. 즉 "여러분, 이렇게 하세요" 라는 소리는 말라는 것인데, 교인들이 그렇게 하든 말든 간에 목사가 거기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즉 "우리가 어떤 분을 믿을 때 믿는다고 할 수 있는지, 그것만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거의 없는데, 대부분이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반응이 어떠한가? 오히려 자기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를 버럭 내고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런데 19절을 보면, 불의한 자는 엎어지고 넘어져도 모든 것이 깜깜한 가운데 있음으로 무엇에 걸렸는지 알지 못하고, 어디에 걸렸는지도 몰라요.   

(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구약의 이 잠언서 4장 19절의 말씀이 놀랍게도 신약의 요한복음 1장에 오면 그대로 보편화가 되는데, 즉 이것이 악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선인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다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속성이 잠언서에는 "악인은 이러이러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잠언서에서 먼저 맛배기로서 보여주고, 그것은 신약에 와서는 온 천지를 다 뒤덮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 말씀에 걸려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제 교재 174페이지를 보자.

** 지혜에 반대가 되는 것은 비(非)지혜가 아니고, 지혜를 반대하는 반(反)지혜로 작용하는 겁니다. 즉 '교회에 간다' 라는 것의 반대말은 '교회에 안 갈래' 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못 나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을 반대하는 것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죠.

어둠은 그냥 어둠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어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엇으로 바꿔진다고 했는가? 인물로 바뀐다고 했는데, 그렇게 인물로 바뀔 때 잠언서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잠언서가 개입되면서 동시에 어리석은 자가 누구이며 악인이 누구인지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탄로가 나는데, 그러면 선인은 지혜를 증거하는 반면에 악인은 비지혜가 아닌 반지혜, 즉 지혜를 공격하고 저주하고 밀쳐내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서, 인간 중심의 이 공간이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 촘촘한 말씀의 거물망 !!

그것을 어제 설교에서는 '촘촘한 말씀의 거물망'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전기 모기채를 하나 가지고 와야 실감이 나는데 말이다. 치면 '치직' 하면서 고압이 흐르면서 파리나 모기들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의 모든 행동과 생각들이 '치직', '치직' 하면서 다 걸린다는 말이다.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십분의 일을 내는 것이 없는데, 인간이 그렇게 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90퍼센트를 돌려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고맙다고 여기고 받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10퍼센트를 내었다고 하는, 즉 십일조를 내었다고 하는 위선적인 인간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망에 '치직', '치직' 하면서 다 걸린다는 것이다. 즉 가짜로 다 들통이 난다는 말이다. 

12제자들의 경우에도 자기들이 주님을 죽도록 섬기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치직', '치직' 하니 모두가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목자를 치니 양들이 도망을 간다" 라고 하는 스가랴서의 말씀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렇게 도망가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라고 하고 말이다.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게 자기 갈 길로 가는 부정적 역할을 자기들이 감당할 줄을, 아마 제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 싶은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마귀새끼라고 하니, 그들은 마귀새끼이고 자기들은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에는 바로 그런 바리새인들을 의식해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의식했다는 것은 그만한 권력의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처음부터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인간은 혼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둘러 쌓여있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무슨 전치사가 여기서 성립되는고 하니, '무엇 무엇 속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무엇 무엇 속에'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즉 "내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데, 내가 누구에게 속해있다는 말인가?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내 생각으로 살아왔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인문학에서는 이것을 발견했는데, '푸코' 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권력 속에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권력 속에 말이다. 그리고 유대인 철학자인 '네비나스' 라는 사람은 이 권력을 이웃이라고 했는데, 즉 "이웃 속에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없는 그냥 빈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B.C. 500년경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정치력 속에 있다" 라고 했는데, 거기서 나온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동물인데 어떤 동물인고 하니, 인간은 정치를 하는 동물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옛날에는 사회라는 것이 없었는데, 인간은 그냥 정치를 하는 동물이란 말이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지배해야 안정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 공화국 !!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그리스에는 산지가 많았는데, 그래서 각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산다는 것이다. 산지에 둘러 쌓여서 말이다. 그것을 두고 '도시국가' 라고 하는데, 그런 도시국가들이 가끔 모였는데, 그때가 바로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B.C. 776년이 올림픽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웃에 있던 페르시아에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다같이 힘을 모아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런 결정을 '아고라' 라는 광장에 모여서 했는데, 물론 노예는 제외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들만 모여서 말이다. 그것을 두고 '민주주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오늘날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사회인데, 이게 바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권력 안에 있고 정치력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민주주의가 너무 노예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물론 옛날에는 그러했지만, 이제는 자기가 투표를 해서 이 바깥에 있는 권력층을 4년이나 5년마다 억지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래서 민주주의인데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국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 공화국' 이라는 말이다.

북한도 민주주의 공화국인데, 이 공화국이라는 의미는 모든 권리는 자기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서로가 가진 의사의 합의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물론 사우디와 같은 경우에는 공화국이 아닌데, 그런 나라의 왕족의 나라라는 것이다. 인간 위에 인간이 있는데, 즉 왕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왕이 있더라도 태국이나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입헌군주국이라고 해서, 왕이 있어도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만드는데 말이다.

◈ 어둠 속에 있는 '나' !!

아무튼 인간의 오감으로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인간이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겠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결국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있다" 라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것을 "너는 어둠 속에 있다" 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 있으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없음 속에 있는 것과 같은데, 흑암 속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나만 있으면 되었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어둠에 그냥 공간 속에 계속해서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빛이 오니 그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지가 20년이 되었다고 하면, 믿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 보라는 것이다. 교회도 나가지 않고 절에도 나가지 않고 아무 것도 믿지 않던 시절로 돌아갔다고 치고, 그리고 나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그렇게 질문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뻔한데, "내가 열심히 일을 한만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생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런 자기에게 누가 와서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한다면, 지금 자기 것이 있고, 자기의 노력한 것이 있는데, 자기가 무슨 욕심을 부려서 복을 더 받겠다고 굳이 예수를 믿겠느냐는 것이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어둠 속에 동결이 되었기에 !!

그렇게 믿지 않는데, 그래도 믿는 척을 하면서 연구를 해보면, 예수도 역시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예수가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참고로 하겠지만, 자기 목숨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믿을만한 대상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어둠 속에 동결이 되어서 그러한데,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온다는 것부터 이미 사달이 났는데, 뭔가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인생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냥 예수를 알고 교회에 다니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바쁘면 나오지 않고 심심하면 나오고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이 빛이 되어서 찾아오시니 !!

그런데 예수님이 빛이 되어서 찾아오시니, 그동안 자기가 어둠에서 속아왔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둠에게 속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어둠은 아무 것도 없는 진공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속기는 누구에게 속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빛이 오니, 아무 것도 없다고 여겼던 그 어둠이 "제발 예수님을 믿지 마라" 라고 하면서 발작을 일으키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말이다. 즉 주님의 효과에 의해서 어둠의 효과도 드디어 같이 느껴지지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계시는데 사단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단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러면 인간에는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오감으로 접촉이 되지 않으면 없는 것인데,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은 일단 감각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 로크의 사상인데, 즉 뭔가가 들어와야 그것이 정립이 되어서 개념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져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허황된 소리라는 말이다.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데, 즉 미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합리적 인간이 미신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러니 사단도 역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천사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어디에 서있다는 말인가? 경계선에 서있는데, 그런데 제자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했을 때, 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단을 찾아보아도 없다는 말이다.

◈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 !!

그러면 예수님은 알고 제자들은 모르고, 그런데 예수님이 나중에 12제자들에게 무엇을 보내시는가?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데, 그러자 드디어 사도들의 입에서 사단의 전략에 대해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치 과거에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이다. 같이 성령을 받은 자들도 역시 그러한데, 이 세상을 사단의 세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경우에는, 이 세상이 온통 옛뱀, 즉 뱀의 세계로 이미 확정이 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단을 인간은 직접 알 수 없고, 이미 사단을 경험한 예수님을, 즉 복음을 경유해야 사단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복음의 광채' 라고 하는데, 이 복음의 광채라는 말이 어려우면 복음의 가치, 혹은 복음의 소중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훼손시키는 모든 짓들이 바로 이 세상 신인 사단의 짓이라는 것이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예수님만 가만히 있으면 사단도 없다 !!

그러면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다고 하면, 사단은 이렇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나는 이렇게 한다" 라는 것이 사단의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좀 어려운데 말이다. "예수님만 가만히 있으면 사단도 없다" 라는 것이다.

왜 아이들이 숨박꼭질을 할 때 어두운 곳에 숨는데, 그러면 어둠은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헤겔이 "밤에는 모든 소가 다 검은 소이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얼룩소이든 누렁이이든 뭐든 간에 밤에는 다 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믿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좋은 팁을 하나 드리는데 말이다(ㅋㅋ).

예수님만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교회에 가도 그냥 놀기 삼아서 가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게 되면,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사단이 알기 때문에 비로소 방해공작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면 사단도 같이 동반해서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 언젠가 대통령이 되고 말겠어 !!

그러면 사단도 없고 예수도 없으면 인간은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자기 혼자 사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말대로 인간은 권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권력 속에 있으니, 인간은 권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뭐라고 하는가? "언젠가 재벌이 되고 말겠어. 언젠가 대통령이 되고 말겠어"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가 권력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인데, 즉 "임마, 공부를 좀 잘해, 숙제를 했어?" 라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그렇게 하다가는 거지가 되고 말아" 라는 뜻인데, 즉 "니가 가질 권력은 없어"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것 자체가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리산에서 혼자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이미 노리고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저 사람은 저렇게 권력을 노려서 가지고 있는데, 니는 무엇을 한다고 그렇게 권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 라는 것인데, 그러니 권력화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화가 말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왔을 경우에만 !!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이 바로 권력의 산물인데, 그런데 그것을 사단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와서 이 성경이 하나의 책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이고 거물망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아하, 나는 그동안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서 사단의 영향을 받고 있었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것은 목사님의 개인 이론이 아닙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면 베드로의 경우에 무엇을 느끼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했는가? 자기가 그러한 소리를 하면 잘린다고 하는 기존의 권력을 의식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다.

◈ 권력의 종, 사단의 종 !!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이 그 순간에 베드로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항상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는 '권력의 종'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그만 '사단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둘 다 같은 말인데, 즉 같은 현상이라는 말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서 우리가 한 템포를 쉬어가겠는데, 이러한 권력에서 초연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의 힘에서 말이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출세하지 않겠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아마 모르기는 해도 여러 대를 쥐어 박히지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노? 그만 나가 죽어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복음 때문에 산다고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강의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복음이라는 것은 마귀가 존재할 경우에, 그 마귀가 설칠 때 우리에게 후차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살게 되면, 주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명예가 있고 자존심이 있다는 말이다. 

◈ 속죄와 대리 속죄 !!

그것이 바로 '대리 속죄'이고 '대리 탕감'인데, 그러니 우리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대리 탕감해주신 효과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성도는 '대리 용서' 안에 놓여있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대속(代贖)'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냥 용서만 하는 것을 속죄라고 하고, 대리 용서를 대속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속죄를 말하고 신약에서는 대리 속죄를 말하는데, 즉 구약은 "너희가 이렇게 하면 용서를 받아" 라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그것 봐,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대신 왔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계주는 바통을 이어주는데, 그 바통을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통을 받으면 예수님은 육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이 되는데, 그러면 이방인은 일종의 외계인인데, 사단으로 둘러 쌓인 바깥의 존재로서 예수님이 투입되게 되면, 그러면 누가 따라오는고 하니, 언약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우르르 따라와서 이 대속의 효과를 같이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다.

◈ 이게 웬 떡이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혜택을,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성경세례를 받으니까, "이게 웬 떡이냐?" 라고 하면서, 물론 그냥 들어가면 안 되고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들어가니, 예수님 자체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헐어버리겠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즉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라고 하는 율법적 굴레를 벗어버리고, 십자가 자체가 율법이고 또한 율법의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이야기하게 되면 율법을 다 이야기한 것이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소득에서 달리 얼마를 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자기 몸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대신해서 주께 던져놓고, 도로 의의 결실물로 인수인계를 받은 몸이 바로 현재 우리 몸이라는 것이다. 녹색 티를 입은 그 몸이란 말이다. 그러니 녹색 티도 같이 받은 것인데, 블라우스도 그렇고 말이다.

이렇게 되니, 그때부터 가만히 있던 악마가 어떻게 하는가?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처럼,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뿔이 달려서 덤벼드는가? 그게 아니라, 이것이 오늘 강의의 두 번째 테마로 들어가는데, 그게 '관게성' 인데 말이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관계성 !!

같이 지내던 육적인 좋은 관계의 친구나 친척이, 혹은 집안 식구가 원수 정도가 아니라 그만 웬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복음만 모르면, 즉 주님께서 자기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그런데 찾아오는 순간부터 웬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데 말이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는데, 살던 대로 사는 것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냐는 말이다. 무엇 안에 사는 것이냐는 말이다. 권력 안에 사는 것인데, 돈과 권력인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살던 대로 사는 것이란 말이다. 복음 이야기를 하지 말고 조용하게 살자는 것이다.

추석 때 만나서 고스톱이나 치고 막걸리나 마시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면 되는데, 제발 복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년 추석 때 만나서 복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는 말이다.

◈ 주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자기 의를 가지고 벌이는 투쟁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한 자기 의로 인한 투쟁이고, 여기에 "수치를 당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인데, 즉 인간은 수치 때문에 산다는 것이다. 즉 수치스러우면 살지 못하고 수치를 이기면 산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통하느냐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데, 주님 앞에서 마지막으로 웃는 자가 승리자인데, 그렇게 주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알아서 이미 주님의 사람이 된 자는, 주님이 이 땅에서 가신 길을 그대로 가기 때문에, 비록 수치를 당해도 거기서부터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그런 효과가 예수님의 대리 속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리적 효과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맞다고 하면, 자기의 모든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관계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관계성에서 무엇을 도입하는고 하니, 경계, 혹은 경계선을 도입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 인간과 인간은, 모든 것이 힘의 관계 !!

성도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다고 하면, 그것은 오감으로는 안 되는데, 왜 안 되는가? 그런 눈에 보이는 간증거리를 내세우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의 경계선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가 육의 세계로 온전하게 번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제대로 번역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경계선이라는 것은 양쪽을 다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경계선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쪽의 말을 할 때는 이쪽의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둘 다 인간의 권력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모든 언어 속에는 힘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힘은 보다 강한 힘과 보다 약한 힘의 관계인데,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얼굴이 예쁜 여자는 자기보다 못난 친구를 데리고 약속의 장소에 나감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가 돋보일 수 있는데(ㅋㅋ), 실제로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美)가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가치는, 결국은 힘이 된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인 에스더서가 그것을 보여주는데, 잡혀온 유대인의 딸래미 하나가 누구를 이기는가? 바사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하만이라는 실권자의 목을 그만 날려버린다는 말이다. 그것이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것인데 말이다. 이 세상에는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꺾어버릴 수 있는데, 그게 미모가 되었던 언어가 되었던 무엇이 되었던 간에 말이다. 그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자기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에 엮어져있고, 그 권력은 자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것과 같이 엮어져서 인간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계선이라는 것은 영적 세계와 육의 세계인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육의 세계인데 말이다.

이 육의 세계는 힘의 관계인데, 즉 힘의 관계로 엮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육의 세계는 힘의 관계로 엮어져있기에, 그러면 영의 세계는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영이라고 해도 항상 무엇으로 환원이 되는고 하니, 힘으로 번역이 되어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작은 교회에 가지 말고 큰 교회가 가자" 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큰 교회는 크니까 힘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힘이 없는 자기로서는 이용할 수 있는 여분의 힘이 큰 교회에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은 교회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작은 교회에 가면 자기의 없는 그 힘조차도 잘못하면 빼앗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교회의 목사는 매일같이 질질 짜면서 생활비가 있니 없니 하면, 처음 나온 교인들은 미안해서라도 계속해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큰 교회에 가면 점심으로 나오는 국수값을 천원만 내면 되는데, 작은 교회는 이천원을 내도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같이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겨우 틀고 말이다.

그러니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오고, 영어도 공짜로 가르쳐주고, 그리고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을 위해서 아이들의 놀이방도 운영해주고, 학생들을 위한 공부방도 있고, 노인네들을 위해서 커피도 단 돈 오백원에 하루종일 있게 해주는, 그런 카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서예나 기타도 공짜로 가르쳐주고 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전부가 경계선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냥 잘 살자는 것인데, 즉 "힘이 필요하세요? 그러면 힘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를 합시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만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는 사단과는 관계가 없는데,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요즘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절이나 성당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 !!

그러니 여기에 오지 말아야 되는 빛 되신 분이 그만 와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가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가? 힘으로 그만 추방을 시켜버렸는데, 그러면 주님이 멀리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추방된 이쪽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분이 훌륭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하지만 이순신 장군처럼 과거의 인물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쫓는 반면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로 제자들인데 말이다.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부활하셔서 우리 속에 들어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누구의 말이 맞는가? 이쪽은 예수님을 과거의 인물로 여기는데, 즉 이미 소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살아서 장차 다시 온다고 주장을 하니, 그렇다면 누가 옳은지를 밝혀내려면 증거를 대야만 하는데, 즉 증거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증거물은 어디에 예속이 되는가? 오감만족에 예속이 되는데, 그러니 백날 만족을 해봐야 육적인 것밖에 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해서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잘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증거물로 대는데, 그러니 그것이 영적 세계의 증거물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자신이 힘이 없어서 약하심으로 나가셨는데, 그게 고린도후서 13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니 힘을 완전히 빼는 증거물이어야만 주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증거물이 된다는 것이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래서 힘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도 믿는 분이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싶은 힘을 주지 않아도, 나는 그분으로 인하여 지금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증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 어려운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의 경계선이니, 이쪽에 있는 영적 세계가 여기 육의 세계로 들어오게 될 때, 그것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노선에서의 설명인데, 그리고 두 번째는 새언약인데, 이것은 영의 노선에서의 설명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둘 다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 첫 번째, 율법의 노선 -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첫 번째로 율법의 노선인 경우에는, 그것은 이미 이번에 수련회에서 마태복음강의를 하면서 했는데, 그것은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게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나오는데, 즉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고 하는데 말이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그러니 이 율법노선에서의 설명은, 남성의 세계에서 여자에게서 나게 되면 무엇이 깨어지는고 하니, 율법 자체가 모두 깨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이라는 것은, 마치 마술사가 보자기 속에서 비둘기를 끄집어낸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술사가 보자기 속에서 비둘기를 끄집어내면 사람들이 더 이상 보자기에 관심을 두는가? 두지 않는가? 비둘기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그 보자기에 관심을 두지만, 이제 비둘기가 나오게 되면 더 이상 보자기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자의 후손이 나오게 되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이루어서 나오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이 원했던 것은 완벽한 의인데, 그런데 의가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서 완전체로 드러남으로서, 그동안 일종의 계란의 껍질과도 역할을 하던 율법이 깨어지고 그 안에서 병아리가 나와서 바깥을 걸어다니듯이, 그렇게 율법은 깨어진 조각으로서의 역할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깨어진 껍질을 버리느냐고 하면,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율법을 누구 곁에 둔다는 말인가? 십자가의 곁에, 즉 예수님의 살아계심 곁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인 율법노선에서의 설명이라는 말이다.

◈ 두 번째, 새언약 - '권력체와 다툼이 되는 형식으로' !!

두 번째로 새언약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퍼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효과가 말이다. 그러면 무엇과 투쟁에 나서는고 하니, 권력체와 다툼이 되는 형식으로 영의 노선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핍박받음과 옥에 갇힘인데,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억울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 때문에 억울하게 핍박을 받아서 옥에 갇히는 모습으로 이제는 설명이 되는데, 무엇이 말인가? 영의 세계가 그렇게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 지극히 작은 권력 !!

그러면 이 경계선에 서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있기 때문에, 일단 그 예수님이 힘이 없이 죽었으니 지극히 작은 권력인데, 즉 미미한 권력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번 수련회의 제목을 '지극히 작은 권력' 이라고 했는데, 누군가가 바꾸라고 해서 '미미한 권력'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물론 더 좋은 제목이 있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뽑아낼 권력은 없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런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 1번에서 시작해서 2번으로 가야하는데, 바로 2번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1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그리고 그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의 결실물이 되어서, 마치 풀장에서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노는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을 거칠 것 없이 말이다.

◈ 소자(小子)의 경우에 !!

이것은 완전히 하이킥인데(ㅋㅋ), 그렇게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기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미국에 가든 아프리카에 가든 중국에 가든 북한에 가든, 그 어디에서도 전혀 구애받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설치고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가 싶어서 보니, 권력도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미한 권력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의 한 달 수입이 얼마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너의 꼬라지를 보니, 나 같으면 죽는다" 라고 해도, 그 사람이 그런 소리에 기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를 건드려야 그 사람을 화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런 구석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빌립보서 4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무슨 사도인고 하니, 1번의 사도가 아니라 2번의 사도인데, 즉 이방인들의 사도라는 말이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권력과 권력의 자랑질로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이것은 권력의 구애를 전혀 받지 않는, 마치 하늘을 나는 드론처럼, 그렇게 높은 곳에서 조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망하면 새로운 시간층이 되는데, 이것을 완료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 시간의 완료이니 다른 말로 하면 묵시, 그러니 이미 묵시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적 세계에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이라고 폄하를 했는데, 그렇게 영적인 사람의 등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낯설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낯설다는 것이 바로 경계선에 서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세 번째는, 내부의 문제 - '주체정립' !!

그러면 이제 1번과 2번을 알았지 싶은데, 그러면 3번까지 한 번 나가보자는 것이다. 이 3번이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고 나온다는 말이다. 첫 번째는 옛날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의 모든 권력까지 찾아간다는 것이고, 세상 끝까지 말이다. 천사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경계선에 있는 소자(小子), 즉 내부의 문제라는 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외부의 문제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즉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는 개인의 문제인데, 그러니 자기 주체의 정립에 관한 문제라는 말이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 보면 굉장히 심도가 있게 나오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악이 아니고 선인데, 그런데 악이 와서 나를 사로잡는구나. 아하,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말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문제인데, 이것은 바로 경계선에 서있는 성도가, 즉 성령을 받은 성도의 자기 내부가 어떻게 성령에 의해서 정립되어 가는지, 그러니 주체의 정립에 관한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늘어나는 몸무게 !!

그런데 이 주체정립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성경을 그냥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체가 개입되는 형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이 말씀을 지키면 나에게 돌아오는 반대급부는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면, "교회에 나가서 내가 얻을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게 되는데, 흔히 "은혜를 받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정립하는 순간, 그것은 깨질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자기에게 환원이 되는데, 즉 "내가 괜찮은 것을 챙겼다" 라고,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답은 무엇인가? 자기는 날마다 사라져야 하는데,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은혜가 누적이 되어서, "이제 은혜 받은 나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 라고 하면서 옛날 본색이 또 살아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 정도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 그러니 누구든지 나를 무시하지마!"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 몸무게가 갑자기 늘어나는데, 그러면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자기가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하, 나는 은혜를 받은 자인데, 그렇게 은혜를 받은 목사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때그때 설교하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목사는 없다는 것이다. 설교를 하면 그 순간만 설교자가 되고, 그게 아니면 다시 맹탕이라는 말이다.

◈ 주체는 곧 예수 그리스도 !!

그러니 주체는 누가 주체인가? 바로 예수님이 주체인데, 1번과 2번에서 성도는 경계선상에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3번에 오니 그 성도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있으니, 예수님이 영원한 경계선상에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부리는 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양의 특징은 권력이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러니 양들이 모여서 민주주의 제도를 하면 안 되는데, 양들이 모여서 입헌군주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양들은 항상 목자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목자는 오감으로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모세가 자기 오감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모세를 부를 때만 사건화가 되어서 만나게 되는 것이지, 모세가 평소에도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도 죄를 지으면서 !!

그것은 12제자도 마찬가지인데, 성령이 임할 때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모든 일이 계시가 아닌데, 계시를 줄 때만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평소에는 무엇을 하는가?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짓다가 성령을 받으면 주의 일을 하고, 그러다가 또 다시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닌데, 그러니 사도를 모델로 삼으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니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데, 즉 힘과 힘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힘을 빼는 관계라는 말이다. 그렇게 힘을 빼는 관계가 되려고 하면 내부의 문제가 정립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우리의 육적인 것을 죽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 토하는 삶 !!

죽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은 죄의 용서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죄의 용서가 되니 찌꺼기가 나오는데, 슬러지가 말이다. 죄가 말이다.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성도의 삶은 계속해서 토하고 토하고 또 토하는 삶이다" 라고 했는데, 즉 "내가 목사답지요?" 라는 것이 죄로서 토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이게 바로 죄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피아노를 하나 헌금해놓으면 예배시간에 온통 그 피아노에만 눈이 가는데, 그래서 누가 거기에 손이라도 대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보다 피아노가 더 소중하게 여겨질 때, "아하, 이게 바로 죄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죄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1번부터 3번까지를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그게 사도의 권면과 명령이고, 이것이 바로 신약 때 적용되는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면, 자기가 먹는 것 입는 것 외에 탐을 내는 순간, 즉 "내 꼬라지 좀 봐라" 라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평하는 순간, 디모데전서 6장에 의하면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경계선에서 !!

하지만 그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는데, 왜냐하면 경계선에 있는 사람은 이미 완료된 사람인데, 자기는 이 땅에 대해서 죽었고 생명은 하늘에 있기에 말이다. 그렇게 완료가 되었기에 이 세상을 볼 때 힘의 구조로 볼 수 있고, 그 힘은 그리스도라고 하면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막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절대로 과거의 인물이지 지금은 아무 것도 아냐. 이순신 장군과 똑같아. 그냥 왔다가 가버렸어. 그러니 그것 뿐이야. 그러니 너의 인생은 니가 알아서 사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반지혜적이고 반복음적인 일을 일구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광야에서 만났던 사단이고, 그것을 우리가 만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이렇게 경계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과 영의 경계선상에서 힘을 빼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전에는 남에게 기가 죽지 않으려고 하고 힘을 자랑하면서 살아갔는데, 그러나 이제는 기가 죽어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8,31 오전 10시에 마침.
저울이 아닌 말씀을 통해서 늘어나는 몸무게를 깨닫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