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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굴복,막살기 1410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9. 19:16
2014-10-18 00:34:37 조회 : 781         
유튜브(88강, 89강) 굴복, 막살기 141016 이름 : 이근호 (IP:119.18.9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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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80.♡.97.94)14-10-18 13:18 
88강-YouTube강의(굴복)141016-이 근호 목사

이제 제 88강, 제목은 ‘굴복’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에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나의 세계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세계를 따로 챙기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힘이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세계를 다지고 확장하는 그런 노림수, 그런 노림수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기 뜻대로 자기 세계가 잘 다져지지 않고 넓혀지지 않을 때,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세계가 이렇게 쪼그라든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지. 이런 걱정이 오는데 바로 그런 것들이 다 마귀의 시험입니다.

애초부터 성경은 나의 세계란 것이 없고 다 주님의 세계입니다. 주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거는 사치고 우리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염려 같은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죠.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백날 봐도 나의 세계를 따로 챙기고 있는 이상 성경을 보면, 그 성경 보는 순간 우리는 왜곡된 성경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5장 39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보는데, 영생을 얻기 위해서 본다는 말은 내 바깥에 있는 영생을, 나라는 세계를 따로 만들어 놓고, 내 바깥에 있는 영생을 내 안에 영생으로 바꾸어서 내가 영생을 얻겠다고,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성경은 나를 위한 성경이 되죠.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이 성경은 너희들을 위한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에 대한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작할 때부터 크게 오해하고 성경을 보고 있는 거예요. 나의 세계는 여기 있다, 이걸 어떻게 다지고 다지고 또는 키우고 키우고. 여기 키우는 어떤 에너지를 어디서 얻을 수 없을까? 옳지! 성경을 봐야지. 그 성경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그 능력을 뚝 떼어가지고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데 아마 큰 도움 될 것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때는 기도로, 어떤 때는 헌금으로, 교회 봉사로, 하나님께 아부를 해서 정작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거 백날 해봐야 결국은 악마의 테스트에 말려든 것밖에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 있는 것이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그러면 예수님만 증거 하면 우리 인간은 필요 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죠. 성경세계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본인의 능력을 따로 챙기려고 하다가 주님한테 얻어맞은 사람들의 열전이에요. 나열이었습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처음부터 대단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이득을 위해서 신에게 다가갔던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존재로 살다가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이 나의 세계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 한 바 된 상태로 정작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 영생을 얻은 사람들의 집합,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어떻게 제가 이야기하니까 어떻게 주의 일에 한번 참여하고 싶죠? 그 참여하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는 어떤 한 인물을 통해서 제가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입니다. 그 야곱이라는 인물이 24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절에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위골되었더라” 라고 되어 있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겁니다. 어떤 인간이 자기 세계를 확보하면서 그걸 다치지 않고, 그걸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런 야곱이 홀로 있을 때에, 어떤 낯선 사람이 밤중에 나타났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야곱과 낯선 사람, 성경은 지금 낯선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그 낯선 사람과 만나면서 어떤 변화를 겪는가에 대해서 주안점을 보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사람과 싸웠는데 그 사람의 정체는 모르고 있고, 어쨌든 싸웠는데, 어쨌든 야곱은 나중에 자기의 환도뼈가 깨졌더라.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오늘 제가 팔십 여덟 번째 강의 제목으로 삼았던 굴복이라는 겁니다

신앙은 뭐냐, 날마다 얻어터지고 굴복당하는 겁니다. 굴복당하고 얻어터지기 위해서는 항상 신앙의 첫 출발점은, 나의 것은 절대로 내가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극히 육적이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그러한 마음을 견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미리 하나님을 만날 때, 미리 내 마음가짐을 나는 하나님께 다 드리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잡아도 그 마음은 주님 앞에 안 통합니다. 그거는 하나의 위선일 뿐입니다. 신앙인 척 하면서 뭔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않으려는 사전 전략과 작전을 우리는 교묘하게 뭔가 내 쪽에서 꾸미게 되죠. 거기 속아 넘어갈 주님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사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임수에 넘어 가는 분이 아닙니다. 야곱은 형을 속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야곱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야곱은 하나님께 속임을 당합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을 속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면서도 마치 아닌 척 하면서, 보통 인간인 척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어떤 속임수를 제공했느냐 하면, 히야! 야곱아! 니 씨름 잘한다! 나 니한테 못이겠네! 아이구, 내가 안 되겠네! 야, 니 쎄다! 이런 식으로 위장을 합니다.

야곱은 이왕 시작한 거 절대로 내 거 다치지 않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죠. 야곱이 사력을 다하는 그 순간, 그게 가장 야곱적이고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육적이고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입니다. 그 야곱이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때려 죽여도 니한테 내 것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나의 본색이고 가장 밑바닥이 드러난 나의 전부라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인간 이상의 솜씨를 보이면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리죠. 결정적 순간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속을 다 들킨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접촉하는 그 순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속았습니다. 그 전에 야곱은 하나님께 잘해준다고, 재롱부린다고,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온갖 아부를 다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엔 자기의 더러운 속내가 다 하나님에 의해서 유도되어서 폭로된 그 순간이, 그래서 주님한테 얻어맞아서 자기가 더 이상 깨질 것은 다 깨져버리고 굴복하게 된다는 그 행복감. 그 행복감으로 야곱은 하나님과 컨택트contact, 접촉이 되고 연결이 되는 겁니다. 주여, 앞으로 뭐가 또 깨지더라도, 나를 깨지게 하시는, 나를 굴복케 하시는, 그 하나님으로.....,그 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영생이 야곱 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러한 다리가 형성된 겁니다.

환도뼈 깨지고 난 뒤에 야곱은 그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나님 만나고 그 때 이미 나는 죽었다. 주님 만났을 때 나의 솔직한 일은, 주여! 죽은 자 따로 있습니다. 제가 바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 살려주면 주의 은혜고 안 살려줘도 그만입니다.” 하는 그 고백. 주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서 이름 속에 생명 담아서, 영생 담아서 이제부터는 영생이 품어져 있는,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니가 참여된 그러한 새 사람 만들어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이름 지었는데,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 만나면 진짜 죽었다가 주님의 생명으로 진짜 살아납니다.

 이미아 (IP:180.♡.97.94)14-10-18 13:20 
89강-YouTube강의(막살기)141016-이 근호 목사

이제 팔십 아홉 번째 강의, 제목이 ‘막살기’입니다.

이 막산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제일 멀리해야 되고 거부해야 될, 그러한 행태가 막살기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막살았는데, 이제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막살지 않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거룩한 성품이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상식이고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이거는 구약에도 나와 있고 베드로전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막살기라는 것은, 이거는 옛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옛 사람 시절로 그걸로 족하고 이제부터는 자기 절제와 자기 관리로 절대로 막살지 않는 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데, 그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어디서 잘못된 생각이냐 하면,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각들이 바로 그런 생각이에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는 항상 어떤 상상을 잘 해요. 어떤 상상을 잘 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치고, 받았다고 친다면 내가 옛 성품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품대로 살아야 될 텐데. 그 새로운 성품대로 산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지금 내가 사는 성품과는 정반대되는 그런 식으로 살거라고 미리 짐작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성령대로 살기라는 그 생각은 결국은 그 기반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지금의 사는 삶과 뭔가 다른 쪽으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거룩한 그 무엇, 지금의 사는 삶보다 훨씬 달리 살아가는 것인데, 그 달리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 성품을 닮아가는 삶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삶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그 기반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은, 기존의 삶을 참조해서 그거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는 거예요.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새 삶이라는 것이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간단하게,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말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내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그 생각보다도 내 개인의 역량을 초월해서 내가 그렇게 살고 싶든, 혹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든, 나에게 일방적으로 이미 주어진 상황, 덮쳐진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에 대해서 관심가지는 것. 그게 바로 성령의 삶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 성령을 받은 척을 하게 되면, 사적인 윤리적, 도덕적, 거룩한 삶을 가지고 신앙 있는 티를 내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거룩하냐, 얼마나 성실하냐, 얼마나 착하냐, 하는 자체를 잘라버립니다. 그거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관심사가 아니고 범위가, 인간 전체의 범위로 넘어서버립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나는 그동안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느냐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게 바로 제가 읽었던 로마서 5장 14절입니다. 얼른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읽어봅니다. 12절부터 읽어보죠.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는 여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삶이고 거룩한 삶이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새 사람에 합당한 삶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은 저 아니고 여러분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세상에 왕노릇 하였는가에 대해서 관심가집니다. 그러면 죄가 왕노릇 했다는 말은, 그동안 나름대로 내가 착하다, 훌륭하다, 성실하다, 자기 관리 잘했다, 자기 절제 제대로 했다, 라는 것조차도 죄에 왕노릇 한, 하나의 양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조차도 죄라 이 말입니다.

내가 바르게살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하는 그것도 사실은 죄가 퍼뜨린, 죄의 일부로써 그렇게 작용되는 겁니다. 그것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헌금해야지, 십일조 해야지, 전도해야지, 기도해야지, 예배 참석해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성령의 삶이에요. 이거는 성령받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거룩한 삶을,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해버려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성령 받게 되면 이런 새 사람의 삶을 바르게 살아야지. 그야말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위해서 내 목숨 바쳐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 진정 성령의 삶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라는 자체가 그야말로 지워버려야 돼요. 지워버리고 내 이전의 한 사람, 아담과 그리고 아담 이후에 왔던 예수님, 그 두 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성령의 삶이에요. 아담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떻게 살아도 죄가 될 수밖에 없던 그런 상황 속에 이미 우리는 출생했고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국에는 죽어서도 죄 값으로 목숨이 빼앗긴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우리가 놓여있었던 겁니다.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간다고 해서 이게 죄 아닌 게 아니에요. 인간은 결국 막살았습니다. 어떻게 살든 막살고, 막사는데 그 막사는 말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도 자기 사는 것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걸 알든 모르든 막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믿고 잘 살아 본다 할지라도 아담 안에서는 그게 죄가 돼요. 죄가 되고요.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것도 죄가 된다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만일 예수를 믿어버리면 여전히 관심사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에 관심을 둬버립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어떤 모델로 정해버리면, 그 모델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위선적인 행동을, 억지로 법칙을 만들어 나가서, 안 맞으면서도 억지로 맞다고 스스로 자기한테 세뇌 주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죠. 그거는 위선에 위선을 덧대기 한 거 밖에 안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선물로 믿어지는 것이고, 주님의 선물로 믿는 믿음은 내가 짜내는 믿음과 날마다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면서, 다투면서, 주의 믿음이 승리함으로써, 내 믿음이 굴복됨으로서 주의 믿음만 계속해서 증거 되는 식.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갈등이거든요. 예수님이 주신 믿음은 예수님에게 관심 있는 것이고. 내가 짜낸 믿음은, “주여! 믿습니다. 아시지요? 내가 믿은 것 아시지요?” 만날 자기가 하는 믿음에 관심 있다 보니까 그 믿음은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고 행함에 불과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쨌든지 간에, 성령 받기 전이나 성령 받기 후에나 막살기 마련인데, 차이점은 뭐냐 하면은 전에는 아담의 죄 안에서 막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막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막사는 것이 내가 막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주께서 막살도록 우리를 부려먹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종은 주인의 명예를 위해서 살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종은 자기한테 관심을 뚝 끊어버려야 돼요.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은 막사는데, 주님의 은혜와 용서 안에서 막사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아담 안에서도, 죄 안에서도 막살고.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 은혜 안에서 막살고. 이래나 저래나 막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도는 막살면서, 막사는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용서했다는, 주님에 대한 관심사, 그것이 외부에 주의 증인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니가 주의 증인이 되리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바로 이렇게 현실화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