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강-YouTube강의(막살기)141016-이 근호 목사
이제 팔십 아홉 번째 강의, 제목이 ‘막살기’입니다.
이 막산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제일 멀리해야 되고 거부해야 될, 그러한 행태가 막살기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막살았는데, 이제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막살지 않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거룩한 성품이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상식이고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이거는 구약에도 나와 있고 베드로전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막살기라는 것은, 이거는 옛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옛 사람 시절로 그걸로 족하고 이제부터는 자기 절제와 자기 관리로 절대로 막살지 않는 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데, 그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어디서 잘못된 생각이냐 하면,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각들이 바로 그런 생각이에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는 항상 어떤 상상을 잘 해요. 어떤 상상을 잘 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치고, 받았다고 친다면 내가 옛 성품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품대로 살아야 될 텐데. 그 새로운 성품대로 산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지금 내가 사는 성품과는 정반대되는 그런 식으로 살거라고 미리 짐작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성령대로 살기라는 그 생각은 결국은 그 기반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지금의 사는 삶과 뭔가 다른 쪽으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거룩한 그 무엇, 지금의 사는 삶보다 훨씬 달리 살아가는 것인데, 그 달리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 성품을 닮아가는 삶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삶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그 기반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은, 기존의 삶을 참조해서 그거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는 거예요.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새 삶이라는 것이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간단하게,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말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내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그 생각보다도 내 개인의 역량을 초월해서 내가 그렇게 살고 싶든, 혹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든, 나에게 일방적으로 이미 주어진 상황, 덮쳐진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에 대해서 관심가지는 것. 그게 바로 성령의 삶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 성령을 받은 척을 하게 되면, 사적인 윤리적, 도덕적, 거룩한 삶을 가지고 신앙 있는 티를 내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거룩하냐, 얼마나 성실하냐, 얼마나 착하냐, 하는 자체를 잘라버립니다. 그거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관심사가 아니고 범위가, 인간 전체의 범위로 넘어서버립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나는 그동안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느냐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게 바로 제가 읽었던 로마서 5장 14절입니다. 얼른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읽어봅니다. 12절부터 읽어보죠.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는 여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삶이고 거룩한 삶이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새 사람에 합당한 삶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은 저 아니고 여러분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세상에 왕노릇 하였는가에 대해서 관심가집니다. 그러면 죄가 왕노릇 했다는 말은, 그동안 나름대로 내가 착하다, 훌륭하다, 성실하다, 자기 관리 잘했다, 자기 절제 제대로 했다, 라는 것조차도 죄에 왕노릇 한, 하나의 양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조차도 죄라 이 말입니다.
내가 바르게살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하는 그것도 사실은 죄가 퍼뜨린, 죄의 일부로써 그렇게 작용되는 겁니다. 그것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헌금해야지, 십일조 해야지, 전도해야지, 기도해야지, 예배 참석해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성령의 삶이에요. 이거는 성령받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거룩한 삶을,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해버려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성령 받게 되면 이런 새 사람의 삶을 바르게 살아야지. 그야말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위해서 내 목숨 바쳐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 진정 성령의 삶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라는 자체가 그야말로 지워버려야 돼요. 지워버리고 내 이전의 한 사람, 아담과 그리고 아담 이후에 왔던 예수님, 그 두 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성령의 삶이에요. 아담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떻게 살아도 죄가 될 수밖에 없던 그런 상황 속에 이미 우리는 출생했고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국에는 죽어서도 죄 값으로 목숨이 빼앗긴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우리가 놓여있었던 겁니다.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간다고 해서 이게 죄 아닌 게 아니에요. 인간은 결국 막살았습니다. 어떻게 살든 막살고, 막사는데 그 막사는 말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도 자기 사는 것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걸 알든 모르든 막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믿고 잘 살아 본다 할지라도 아담 안에서는 그게 죄가 돼요. 죄가 되고요.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것도 죄가 된다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만일 예수를 믿어버리면 여전히 관심사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에 관심을 둬버립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어떤 모델로 정해버리면, 그 모델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위선적인 행동을, 억지로 법칙을 만들어 나가서, 안 맞으면서도 억지로 맞다고 스스로 자기한테 세뇌 주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죠. 그거는 위선에 위선을 덧대기 한 거 밖에 안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선물로 믿어지는 것이고, 주님의 선물로 믿는 믿음은 내가 짜내는 믿음과 날마다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면서, 다투면서, 주의 믿음이 승리함으로써, 내 믿음이 굴복됨으로서 주의 믿음만 계속해서 증거 되는 식.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갈등이거든요. 예수님이 주신 믿음은 예수님에게 관심 있는 것이고. 내가 짜낸 믿음은, “주여! 믿습니다. 아시지요? 내가 믿은 것 아시지요?” 만날 자기가 하는 믿음에 관심 있다 보니까 그 믿음은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고 행함에 불과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쨌든지 간에, 성령 받기 전이나 성령 받기 후에나 막살기 마련인데, 차이점은 뭐냐 하면은 전에는 아담의 죄 안에서 막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막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막사는 것이 내가 막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주께서 막살도록 우리를 부려먹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종은 주인의 명예를 위해서 살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종은 자기한테 관심을 뚝 끊어버려야 돼요.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은 막사는데, 주님의 은혜와 용서 안에서 막사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아담 안에서도, 죄 안에서도 막살고.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 은혜 안에서 막살고. 이래나 저래나 막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도는 막살면서, 막사는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용서했다는, 주님에 대한 관심사, 그것이 외부에 주의 증인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니가 주의 증인이 되리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바로 이렇게 현실화 되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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