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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 -보내신 자 1607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5. 18:58
2016-07-20 01:25:58조회 : 400         
보내신 자 16071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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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65.245)16-09-04 20:13 
가락-요한복음11장41절(보내신 자)160719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1장 41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볼게요.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이렇게 돼 있죠? 

  

“보내신 것을” 요한복음에서 특히 보내신다는 말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어요. 보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아는 현실 세계 말고 다른 동네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보냄이 성립되려면 이 동네에서 이 동네 가는 게 보냄이 아니고, 인간들이 알 수 없는 다른 세계 계신 분이 이 쪽 세계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다른 세계 들어왔다가 이 쪽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그 당시에 분명히 같은 그 아람어를 사용하고, 우리 같으면 우리 한국말을 사용하는데, 단어도 그런 것을 다 만들어서, 문장이라 하는 것은 선택과 연결로 돼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적당한 걸 뽑아서, 그 다음에 뽑기만 하는 게 아니고 그걸 연결, 연결시킴으로써 문장이 되거든요. 문장이 딱 되는데, 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단어의 의미와 다른 뜻을 갖고 있고, 또 연결될 리가 없는데 연결 될 수 없는 단어들을 이렇게 연결시켜 놓는 거예요. 

  

그 한 가지 예가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는데, 오늘날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나라는 게 조금만 나이 들면 지금 죽어가잖아요. 나라는 게 지금 60, 70, 80, 90, 100되면 내가 죽는다 이 말이죠. 

  

본인부터가 스톱이 된 상태가 아니고, 본인부터 죽음 쪽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데, 나를 믿는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와 합체하는 사람, 나와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 나와 더불어 한 공간에 있는 사람은“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이렇게 돼 있으니까 결국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은 “그럼 당신은 늙어도 안 죽는다 이 말이야?”라는 식으로 되는 거죠. 

  

그런데 같은 인간인데도 늙어서 왜 안 죽는 사람이 있을까요?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을 하려면 그렇게 말을 내뱉는 본인부터가 안 죽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본인이 안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그걸 납득하겠어요? 그걸 수용하겠어요? 인간치고 안 죽은 위인이 없어요. 다 죽어요. “날 믿는 자는 행복해집니다.” 이건 부처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건 충분히 납득이 돼요. 공자처럼 “내 말을 믿는 자는 이 땅에서 선비가 된다.”이거는 충분히 되죠. 세속인이 아니고 점잖은 분이 된다. 이게 유교의 모토입니다. 이 땅에서 선비로 사는 게 모토거든요. 이건 충분히 되는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지가 이만희도 아니고 왜 그래요? 지가 신천지입니까? 안 죽게. 안산홍이도 지가 안 죽는다 했는데 죽었잖아요. 그러니 이 말은 결국 믿으란 말이 아니고, “너 안 믿지? 그렇지? 못 믿겠지? 그렇지?”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무엇이 의미가 있느냐 하면 “너 못 믿겠지?” 못 믿는 것은 니가 사는 동네에는 내 말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뭘 믿어야 돼요? 믿으려면 보내신 분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따로 있음을 겸하여 수용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세계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가 이 세상에 밝히 나타났다는 것을 믿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뭐는 믿을 필요 없어요? “나는 착해야 돼. 나는 성화돼야 돼. 나는 훌륭해야 돼. 나는 봉사해야 돼. 나는 헌금해야 돼. 나는 가족들 다 몽땅 교회로 보내서 천당 가게 만들어야 돼.”라는 것을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그걸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지금 보내신 자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까 이야기한 헌금, 전도 이런 걸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왜냐 하면 보내신 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전도, 헌금 이런 게 아니고 보내신 분은 나름대로의 헌금, 전도, 예배, 제사, 영광, 그리고 율법, 천국, 지옥, 모든 개념은 보내신 분이 따로 챙기고 있겠죠. 따로.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아버지와 예수님이 알고 있던 그 모든 개념과 그 모든 내용은 누가 이루겠습니까? 땅에 있는 우리가 이루겠습니까? 보내신 분에 다 실려서 그분이 이루겠습니까? 그분이 이루겠죠. 그렇죠? 우리가 의인이 되어야 천국 가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의인 되는 것도 우리가 열심히 해야 되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의인되게 하겠습니까? 그분이 하겠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나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 죽었고 살겠고, 라고 하는 것은, 그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이야기가 다 된 겁니다. 나만 믿으면 니가 어떤 죄를 지어도 보내신 자를 믿었기 때문에, 그 안에, 심지어 죽어야 될 자, 죽는 자, 마땅히 죽어야 될 자, 마땅히 지옥가야 될 자도 뭘 얻는다? 영생을 얻도록 그렇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이야기했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나라는 것은 보내신 자죠.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죠.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꽂혀야 됩니까? 왜 우리가 죽어야 되느냐? 왜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느냐? 우리가 죽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우리가 죽어야 될 자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평소에 살고 싶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 이유를 알려면, 어디 영어를 공부해야 되겠어요? 스페인어를 공부해야 되겠어요? 수학을, 물리학을 공부해야 되겠어요? 뭘 공부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 이유를 알려면? 죽어야 된다는 것이 예수님 입에서, 보내신 자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보내신 자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와 관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관련이 있죠. 그게 율법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율법에서 소개하는 겁니다. 그 율법을 돌판으로 만든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뭡니까? 탐내지 말라 했죠. 탐내지 마라. 근데 로마서 7장에 보면 탐내지 말라가 우리로 하여금 없는 탐심도 유발시킨다고 돼있습니다. 탐내지 말라 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탐을 안 냈는데, 주께서 탐내지 말라 하는 그 순간부터, 그 다음부터 우리는 탐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죄가 있어서, 인간의 죄라는 것은 주의 말씀에 대해서 항상 도발하고, 대항하고, 대드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보고 잔소리하면 더 하고 싶죠. 이거 떡 먹지 말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떡은 하나의 나의 노림이 됩니다. 기어이 떡을 먹고자 해요. 심지어 안 먹고 싶었는데도 마음이 그 다음부터는 도대체 무슨 떡이길래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을까? 관심사가 거기에 쏠리게 되어 있어요. 

  

왜?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목사님.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주장하십니까? 물으면 선악과 만들고 난 뒤에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는 그 선악과에서 생각이 떠날 수가 없었어요. 늘 그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걸 누가 알았어요? 뱀이 알았죠. 마귀가 알았잖아요. 마귀가 알고 따먹으라고 부추겼고, 거기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방어기제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방어 메커니즘은 없어요. 인간은. 

  

한두 번 거절한다고 해서, 삼세판인데, 세 번, 네 번 거절한다고 다섯 번, 여섯 번 이긴다는 보장은 없고, 칠천육백사십번 거절한다고 해서 칠천육백사십일곱번째 또 거절한다는 법은 없어요. 인간은 아무리 과거에 그렇게 인내를 해도 어떤 순간에는 과거의 인내는 이미 소모되고 난 끝입니다. 건전지 여기 들어있는데 백만 한번, 백만 두 번해봤자, 결국은 한계가 드러나잖아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노인네들 이렇게 오래 살았다 하지만, 70이고 80살아보게 되면 뒤돌아보세요. 없어요. 이미 소모했는데요. 그러니까 70이 되고 80이 되도, “아버님. 뭐 오래 사셨으니까 올 말쯤 돌아가시죠?” 하면 20대나 40대나 똑같아요. 더 살고 싶어요. 80살았다고 ‘아이구, 뭐 대충 죽을까?’ 이런 것 없습니다. 인간은 갈수록 독종입니다. 특히 노인들은 더 심하고요. 노인네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아주 독종 중에 독종이에요. 목사, 장로,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평생을 새벽기도 했던 권사님도 나이 들면 독종 돼요. 자기에 대해서 독종 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인간 속에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괴(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고정된 부위에 있으며 통증 부위가 이동하지 않는 병증)같은 덩어리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의 덩어리에요. 그동안 어설프게 생명으로, 목숨이라는 것으로 칭칭 감아왔는데, 이게 다 닳았어요. 세월 따라 이리 뜯겨 나가고 저리 뜯겨 나가니까, 달랑 남는 게, 아담의 죄, 그게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나이 많은 목사, 나이 많은 장로, 나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들은 전부 다 독종입니다. 독해요. 집념. 자식 하나 오게 되면 또 돈 바라보고 오는 줄 알고, 맞는 말이지만, 전부 다 긴장을 해가지고, 실제로 그리 이야기해요. 

  

제가 버스 타고 가는데, 한 60, 70된 할머니들이 이야기해요. “지난 며칠 동안 딸내미가 와있는데 내가 죽는 줄 알았다. 오늘 오전에 갔다. 아이구, 속이 시원하다.” 그걸 차마 딸한테는 말 못하고, 딸이 간 뒤에는 친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이구, 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 혼자 사니 이렇게 좋은 걸 가지고.” 효도 한답시고 너무 자주가지 마세요. 유산이 나누어줄 정도만, n분의 1이 나올 정도만 하세요. n분의 1. 그것까지만 오지 너무 많이 오지도 않아요. 유난떨지 마세요. 괜히 다른 형제들한테 오해받습니다. 몽땅 차지하려고, 유언 또 조작하려고 어슬렁거리고...., 

  

보내신 자, 보내신 자 안에는 말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보내신 자하고 하나님 아버지하고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은 본인이 혼자 다 이루어서, 다만 믿기만 하게 되면, 믿는 자의 일체 모든 행동에 대한 예수님이 혼자 단독행위를 다 해버리고, 예수님의 단독행위가 믿는 자에게 효과, 혜택을 주어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 쪽에서 얻는 이익이 뭐냐, 한 것이 있으니까 이익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천국에 오게 되면, 그 천국 온 사람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겁니다. 오직 주께만 찬양하고 주께만 감사하게 하는 것. 이 말은 방향을 어디다 두지 않았다는 거예요? 방향을 나에게, 내가 잘나서, 내가 믿어서 왔다는, 자기 공로로, 자기 자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오직 주께만 바라는 겁니다. 면류관도 벗어서 던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건 제가 면류관을 쓴다는 것은 택도 없습니다. 하면서 던지겠죠. 요한계시록 4장에. 

  

그럴 미리하자는 거예요. 미리. 교회 다니면서 미리 하자는 거예요. 그걸 선취라고 하는데, 미리 취한다. 미리 그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미리 갖게 하려면 누굴 부정해야 합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해야 하죠.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한 게 아니에요. 제가 봉사한 게 아닙니다. 그걸 늘 반복하게 하고 그걸 훈련시키고 실습시키는 그 모든 역할과 임무가 성령 받은 자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도 잠깐 실습해봅시다. 실습.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는 아니요, 오직 주께만 되어 있죠. □네모는 아니요, 오직 주께만 입니다. 자, □안에 들어갈 말을 해볼 테니까 여러분하고 동일한가 보세요. 1.자식성공. 내 자식 성공은 아니고 누구만? 예수님만. 벌써 여기서부터 들통 난 것 같죠. 2. 큰 예배당 신축. 이것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만. 3. 자신의 자존심이나 명예, 사업성공. 이런 것 아니요, 오직 주께만 이래 되겠죠. 마지막 결정적인 거 하나 있다면 4. 딸내미 결혼식. 딸내미 결혼식 아니요, 딸내미 결혼식이 7월 21일이고 예수님의 재림이 7월 21일이면 감사하겠습니까? 일단 딸 시집보내고 22일에 오시지. 

  

그래서 노아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에 갑자기 홍수가 주어졌죠. 거기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시집가고 장가가고, 인륜지경사가 주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륜지경사가. 주님 재림하시면, 상견례 할 때 벌벌 떨면서 위신 챙기고 있는 이게, 주님 재림하시면 아무것도 아닌 허세부린 거예요. 인간은 허세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허세 빼놓고는. 

  

그러니까 이렇게 되려면, 주님께서 인위적으로 부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안 돼요. 주님 십자가 지신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내 자식 출세하고 성공한 것이 더 좋고, 이게 인간이 아무리 신앙이 좋고 장로, 권사라 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이런 것들을 스스로 자기부인으로 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아무리 새벽기도 나오고 소나무뿌리 열댓개 뽑아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식을 투자했는데, 한 백배 올랐다. 기분이 좋아가지고 감사하면서 주의 은혜로 올랐습니다. 이렇게 하죠. 근데 이 공식에 의하면 주식 백배 오른 것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주식을 백배나 오르게 해서 부자 되게 하신 주님이라고, 이것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예수님이라고 자꾸 하는 거예요. 근데 주식을 팔았으면 되는데, 주식을 안 팔고 놔뒀더니만 사흘 만에 이거는 똥값 되었다 이 말이죠. 그때 싱글벙글 하겠어요? 아니죠. 

  

이것은 주식이 백배 오를 때 그것을 주님께서 하셨고, 그걸 폭삭 망하게 한 것도, 주님만 귀한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망하게 하신 거예요. 이걸(위에 4개의 예) 당했던 사람이 바로 구약의 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식 열 명 다 훌륭했고, 욥도 생각이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행여나 믿음도 없는 자식들이 본의 아니게 죄를 짓고 영광을 가릴까 싶어서 아버지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서 늘 제사 드리고, 그들이 철이 없어 죄졌으니까 제가 드린 제사 받으시고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했다 이 말이죠. 

  

제사 드린 그 입장만 생각한다면, 그 정도로 빽쓰고 치맛바람 일으켰듯이, 자식을 위해서 헌신했으면 자식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죽더라도 뭐, 열 명이니까 한 둘이 죽을 수 있는데, 어떻게 열 명이 다, 그것도 자식을 위해서 제사에 몽땅 다 투자했는데, 그 자식들이 다 죽었습니다. 애 하나 있는 사람은 애 하나 죽고, 둘 있는 사람은 둘 죽고, 셋 있는 사람은 셋 죽고, 네 명이 있는 사람이 다 죽었다면 사람들이 의미를 두겠죠. 근데 열 명인데 다 죽었다? 분명히 이것은 그 제사가 하나님의 대한 사기라고 다들 이야기하겠죠.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들이 욥의 가장 친한 친구들 세 명이 이야기했어요. My Dear Friends? 친구 믿지 마세요.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친구 아무 소용없어요. 그동안 친구했던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친구에요. 친구라는 말이 나와서 생각납니다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했죠. 그 말은 보내신 자 입장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하고 막 먹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의미는, 인간들끼리만 아는, 그런 통용되는 의미지, 보내심을 입은 그 자의 의미가 아니에요. 나중에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가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알고 있던 의미를 그냥 일방적으로 제자들에게 퍼부어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된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반드시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아야 돼요. 

  

성령을 받아가지고, ‘내가 옛날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오해했고 곡해했습니다.’ 제자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보면 제자들이 헛짓한 것이 쭉 나와 있죠. 그게 제자들이 부끄러워서, “야, 이것 좀 지워 도! 누가야, 이거는 좀 지워라! 마가야 이것 좀 지우고!” 압력 들어오고 했을 건데, 아닙니다. 그대로 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저주한다고 했던 것 그대로 다 이야기해요. 왜? 그것이 바로 구원의 과정이고, 누구나 그걸 겪어야 될 코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좀 이렇게 괜찮은 사람하고 오랜만에 명분 있는 날이 되면 무슨 식당에 갑니까? 코스요리 나오는 식당에 가죠. A코스, B코스, 코스요리. 항상 여기에는 메인요리가 있어요. 앞에 나온 스프만 먹고 집에 가자고 하면, 이건 촌사람입니다. 항상 메인요리를 먹어줘야 해요. 메인요리를. 메인요리는 뭐냐 하면 앞에 스프도 맛있지만, 메인요리를 감칠 나게 하기 위해서 앞에 먹는 거잖아요. 뒤에 나온 디저트도 마찬가지지만. 

  

결국 메인요리가 누굴 증거 하는 거겠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우리는 접시 위에 있는 하나의 에피타이저, 스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입가심하는 맹물정도. 항상 메인요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거예요. 내 구원받으라고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고, 내 믿음 티내라고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나를 이런 것으로 살리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보내신 자를 믿어야 되는데, 자꾸 보내신 자를 믿었다는 나를 우기면 안 돼요. 그거는 종교라는 취미활동 하는 것이지, 그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누구라도 이용할 생각으로 “믿습니다.”를 말하게 돼요. 자기를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더 키우기 하기 위해서 능력자를 찾아다녀요. 능력자를. 저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저 사람의 능력이 내 거 되면 나는 얼마나 지금보다 폼이 나겠느냐? 

  

교회 갈 때 자기를 부인하고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는 오늘도 깨져야지.’ 이래 가는 사람 없거든요. 교회 가서 예배 참석하는 것이 노동이잖아요. 노동을 했으면 무슨 대가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목사의 축도를 받든지, 광선에 쏘이든지, 뭔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헌금한대로 30배, 60배, 100배를 받든지. 내가 정성들여 기도한 대가로 내 남편도 같이 교회에 나와 가지고 부부싸움과 헤어짐을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가 있든지. 뭔가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게 가짜인 거예요. 그게. 

  

나는 교회에서 이만큼 하고, 주님을 교회에서 만나가지고 거래하고 흥정해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교회가 시장터가 아니에요. 내가 교회 가주고, 그 정도 수고하고, 주께서 십자가 지는 수고를 해주시면, 십자가 수고한 것과 내 수고한 것이 맞닿아서, “그래 악수 하자. 우리 계약 체결됐어. 구원해줄게.” 이렇게 구원하는, 그런 구원은 성경에는 없어요. 주님이 무슨 능력이 없어가지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는 그 모든 것이 니가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행위들을 다 쏟아내게 하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히브리서 10장 16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주께서 새언약을 주시는데, 새 언약이 뭐냐 하면, 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리고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예수님의 몸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준비된 몸을 우리가 장만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장만하셔서 독생자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주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한다는데,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서의 주장은 뭐냐 하면, 내 생각과 내 마음은 누가 주장하느냐 하면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잘못했을 때, ‘아이구,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이래 생각한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마음과 내 생각은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틀어지고 있고, 내 마음가는대로, 내가 결정하는 대로, 내가 선택하는 대로, 내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그게 아니고 거기에다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미 구원되었음을 우리 속에 쑤셔 넣어버리는 거예요. 막 쑤셔 넣어버려요. 

  

여러분들이 빙수나 미숫가루를 여름에 먹을 때, 맛있게 먹고 있는데 누가 숟가락 들고 와서 빙수 속에 숟가락 확 집어넣으면 기분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 나쁘죠. 지금 빙수 먹을 때 제일 맛없는 것부터 먼저 먹고 제일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으려고 놔뒀는데, 근데 숟가락 들고 확 들어와 버리면 안 되잖아요? 이게 보내신 자에요. 보내신 자의 행동이 이런 거예요. 나름 착하게 산다고, 교회 가서 담배 끊고, 술 끊고 바르게 살라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복 주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속에 팍 해가지고, “받아 줄래? 안 줄래? 묻지도 않아요. 그냥 거기다가 다 꽂아버려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주님이 자신의 일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데 누가 우길 겁니까? 주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우리는 의인이 되어가지고, 한 것도 없이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황당’이라고 합니다. ‘황당.’ 나름대로의 천국가려고 착한 일 준비를 했는데, 그런 착한 일 준비를 다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치고 들어온 겁니다. 

  

이 말은 천국이란 누가 간다? 천국은 죄인이 가는 곳이에요. 의인이나 바리새인들은 못 가고, 세리와 그 당시에 가장 밑바닥 죄인이 누구냐 하면, 그 당시 세리는 계약직이어가지고 엄청나게 프리미엄을 챙기기 위해서 돈을 지 맘대로 비율을 정해가지고, 이만큼 챙겨가지고 위에는 이만큼 주고 나머지기는 자기 돈으로 끌어 모으는, 돈 밖에 모르는 구두쇠, 수전노, 그게 세리고. 

  

또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몸을 팔아서 온 곳곳에 있는 가정을 다 파탄 내는 여인, 창녀죠. 창녀는 지만 먹고 살면 그만이고, 남의 가정 파탄 날 것은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냥 지는 몸 팔고 돈만 챙기면 돼요. 박유천이든, 김기훈이든, 누구 걸리기만 걸려라. 그래야 백퍼센트 돈만 빼내면 되니까. 깡패 데려와 가지고. 돈 없으면 고소하면 되고. 돈 안줘서 문제지. 

  

그런데 그 창기와 세리가 천국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강도가, 예수님께서 살인강도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뭐했다고? 사람 죽일 때 살살 찔러 죽여서 그런 거예요? 칼도 이렇게 회칼 안 쓰고 부엌칼 안 쓰고 그냥 도루코칼 써서, 그래도 양심 있는 강도라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은 줄 알아요? “저는 죄인입니다. 내가 강도 안하고 바르게 살아도 죄인. 주님 앞에서는, 보내신 자 앞에서는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마음에 새 언약이 박혀서 그런 마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미 새 언약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취지가 니 마음속에 그렇게 도달이 되어 있으니까, 박혀 있으니까, 빼도 박도 못해요. 이게 하나의 칩처럼 박혀 있어가지고 자기가 못 빼요. 째깍째깍 시한폭탄처럼 가고 있으니까. 그게 박혀 있으니까 나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누구에게만 죄인이다? 누구한테만 범죄 했다? 주께만. 주께만 범죄 했다. 정말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때는, 인간적으로 볼 때는 염치없고 치사한 인간이죠. 왜 주께만 범죄 했습니까? 가정을 파탄 내놓고, 우리야 장군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의해서, 살인 안 한 것처럼 해서 밀어붙여가지고 제일 앞에 서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거기에 덤비게 해서 죽게 만들어놓고, ‘뭐 적들이 와서 죽였지 내가 뭐 했나?’ 이런 식으로 빠질 궁리를 하고. 아주 얍삽한 사람이고 비열한 인간이죠. 가정을 파탄 냈고, 그 아내마저 자기 아내로 삼았고.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주께만 범죄 했다.” 뻔뻔함의 끝을 보여줬어요. 뻔뻔함의 끝을 보여준 그 사람 지금 어디에 가있습니까? 지금 천국에 가있습니다. 누가 믿겠어요? 결국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은, 나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믿을 만 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내가 네 속에 믿음을 집어넣은 사람만, 자기 사람만 찾는 거예요. 자기 사람만 데려가겠다는 겁니다. 

  

잠언서 11장 21절 한 번 봅시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누구누구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만 했으면 이렇게 부정적으로 느끼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구원을 언급한다는 것은 반드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어떤 인간이라는 것 까지 같이 병행해서 이야기해줘요. 

  

이 말은 천국만 달랑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지옥도 겸해서 이야기합니다. 지옥도 겸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지옥은 지가 구경하고 싶다고,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아무리 나쁜 짓해도 지옥은 못 갑니다. 지옥은 주께서 보내줘야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것은 천국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착해도 천국 못 가요. 보내줘야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유가 뭐냐, 어차피 이 세상이 지옥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의 지배를 받는, 어차피 지옥이기 때문에 전부 다 각기 자기자랑 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자기 믿음, 자기 소망, 자기 사랑, 막 끄집어내어 경쟁하는 것. 지 잘난체하는 것. 이것 외에는 인간이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어요. 그 외에는 없고 그거만 해요. 그 재주만 해요. 나는 니보다 믿음 좋고, 니보다 기도 많이 했고, 헌금 많이 했고,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뭘 해도 죄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 와야 나올 수 있는 고백이지. 

  

아까 했던 것 다 잊어버렸죠? 다시 해보면 자, □는 아니요, 오직 예수님만. 이게 천국이고, 이걸 지금부터 실습한다고 했죠? 반복해야 되죠. □라고 할 적에, 이 앞에 이거는 아니요, 라고 했잖아요. 아니요. 그럼 □안에 뭐가 들어가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기대한 것, 내가 소망한 것, 내가 바라는 것은, 전부 다 “아니요”입니다. 왜? 나 자체가 죄인인 것을 본인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천국 안 가면 누가 천국 가? 이게 인간의 타고난 거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실습을 한 적이 있어요. 하루 종일 알바를 했는데 오 만원을 줬어요. 굉장히 감사했어요. 똑같은 일을 시킬 때 본인에게만 오 만원 줬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육 만원을 줬습니다. 감사가 안돼요. 왜 그럴까요? 일 더 한 것도 아닌데, 똑같이 오 만원을 줬는데, 비교가 되죠. 그걸 통해서 아는 것은 인간이라는 주체는, 자아는 홀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과 더불어 상호작용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인간의 자아성은 달라진다,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은 본인이 누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경이 바뀌면 자기 자신이 다른 인간으로 돌변해버린다는 겁니다. 돌변해버려요. 그동안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알았다고 했던 그 모든 것이 다 헛방이에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군 비유죠. 10시, 12시, 3시, 5시에 왔을 때, 일부러 주인께서는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약속한 것을 주니까 누가 감사했습니까? 제일 마지막에 온, 할 것도 없었던 사람이 제일 감사하고. 누가 툭툭거렸습니까? 제일 먼저 온 사람이. 하지만 주인이 약속은 처음부터 딱 하나였어요. 한 데나리온 딱 하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만 구원한다는 이 약속에 대해서 누가 툭툭거려요? 툭툭거리는 사람 가지고 못하지만, 누가 제일 감사하겠어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으면 내 행함을 일체 거부하시고, 헌금이고, 전도고, 다 거부하시고 오직 십자가만 구원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감사하고, 그 사람만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먼저 된 자가 그만큼 일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 듣고 어떤 뺀질이는요, 실컷 놀다가 죽을 때 되어서 천국 가겠다는데, 그런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인간이 마음대로 살지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마음대로 살게 되면 누가 괴롭게 되느냐 하면 본인이 괴롭게 되어 있어요. 그냥 편안대로 살아야지 나쁜 짓도 억지가 되면 나쁜 짓도 괴로워요. 더러워서 나쁜 짓도 못하겠다. 착한 일로 돌아서게 돼있어요. 

  

잠언서 11장 21절에 보면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이걸 왜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과 관련이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삽니다. 살고 난 뒤에 유대인들의 반응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11장을 보세요. 반응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걱정하는 거예요. 

  

나사로가 살아난 뒤에 이러다가 많은 사람이 저 예수 편으로 가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맞죠? 47절에.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절,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앞에 45절에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떻게 반가운 일입니까? 아니면 올무에요? 올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만 미운 것이 아니에요. 누구도 미워요? 예수를 믿는 자도 같이 미움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해서, 그 예수님과 예수 믿는 관계를 주변에서 도와줘요. 복음으로 인하여 십자가만으로 끝났다는 것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당했던 미움을 그들도 똑같이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라? 나한테 한 것이라.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죽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여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십자가만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도 지금 일하고 있고, 눈에 안 보이지만 분명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예수님 보고 싶어요. 키가 몇 센티 되고, 인물은 훤하게 생겼는지, 그렇게 자꾸 기도하게 되면 화가들이 구라로 그린 그림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가지고, 그게 가짜거든요. 아까 유튜브 동영상을 하면서 실체와 표상이라고 했죠. 상징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알고 복음 아는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저 주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이미 다 이루었습니다.” 라는 것으로 고백할 때, 그것이 지금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능력입니다. 

  

보내신 자, 그렇게 설명했고요. 자, 그 다음에 43절 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라고 되어 있죠. 이거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예수님께서 누굴 부르느냐 하면, 여기에 무덤이 있고 돌은 치워져 있고, 여기에 베로 꽁꽁 묶여 있는 나사로가 있죠.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불렀습니다. 만약에 나사로가 이 명령을 듣고 좀 짜증나고 귀찮아서 “싫어요.”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싫어요.” 하면 안 되잖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러내시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불러내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성도의 매일의 삶은 나사로를 부르듯이 주께서 일구어내신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거해라! 저거해라!”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걱정, 근심이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평소에도 주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미리 미래를 앞당겨서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뭐 자식이 어떠니, 남편이 어떠니, 아내가 어떠니, 사업이 어떠니, 이걸 이렇게 해버리면 그거는 사람이 쪼그라듭니다. 이거 잘해서 영광 돌려야지. 이거 잘해서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 있는 현장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딱 맞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적합한 것을 주신 거예요. “너는 딱 그렇게 살아야 돼! 너는 그렇게 살아야 돼!” 우리교회에 아픈 분들이 좀 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아파야 돼요. 아파야 된다고 해서 좀 미안하지만. 그렇게 아파야 돼요. 아플 때, 최적의 상황이에요. 그게 나사로를 죽였다가 빼어내는 귀찮은 일을 하잖아요. 결국 나사로가 어떻게 됩니까? 또 죽죠. 

  

근데 나사로가 죽고 어떻게 살든 간에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임시무대, 임시거든요. 임시 땜빵이에요.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임시적이지. 이게 그냥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임시적인 연출된 무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죽게 되면 ‘연극이 끝난 뒤에’, 모든 연극이 끝나버렸어요. 모든 연출이 끝났어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나오죠.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야지. 염려, 걱정을 사서 할 이유는 없다. 그러면 염려,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다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염려, 걱정을 하게 한 것조차도, 나중에는 그 염려, 걱정 한 것도 후회스럽게 되는 그런 조로해서, 주님과 관계를 다시 당당한 관계로 되돌리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임시적인 연출이었고 하나의 드라마였고, 하나의 연극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공 되시는 거기에 하나의 증명하는, 증거인으로서 하나의 역할들을 갖고 있는 겁니다. 어떤 걱정과 근심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살았고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걱정을 안 하게 되면 이 당당함도 유지가 될 거예요. 

  

이게 몇 초 가느냐? 딱 3초가요. 3초갑니다. 과학적으로, 의식적으로, 어떤 의식은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상태는 0.3초밖에 안돼요. 0.3초 지나면 인간은 시간을 못 느껴요. 3초 지나면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을 갖는 마지막 순간이 0.3초에요. 그걸 쉽게 저는 3초 간다고 한 겁니다. 그게 모기약 뿌릴 때는 모기가 없는 것 같지만, 뿌리면 모기가 윙윙 거리면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날 파리가 늘 들끓어요. 

  

그런 가운데 주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뭐냐, 주님의 공생애가 그렇게 날 파리를 늘 들끓게 하는 공생애가 되가지고, 우리도 주님과 똑같은 그 길을 가다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코스요리에요. 우리가 가는 길이 이 길이라면, 예수님께서 탄생했잖아요. 그 다음에 죽죠. 그 다음에 부활이죠. 이 코스대로 우리가 가는 겁니다. 이 코스대로 가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마귀적인 것이 우리 눈에 띄게 됩니다. 

  

우리 눈에 띈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정(正)코스대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가고 있으니까, 행함을 가지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 이러면 복 받는다고 유혹하는 사람, 이런 마귀 메시지들이 계속 느껴지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그거 가지고는 모자라고 이거까지 플러스해야 됩니다. 그래서 복 받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하는 간증집회 열어가지고 자꾸 이렇게 유혹하잖아요. 

  

무엇은, □는 아니요가 되는데 이걸 가려버리고, 자기 소망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당한 것도 다 주께서 허락하셔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시고, 우리가 마음을 넓게 가져야지 어쩌겠어요. 예수님이 이런 세상에 다 다녀가셨구나! 하는 것을 십자가의 더욱 깊이 있게, 사랑을 더욱 깊이 있게, 아픔을 더 많이 흡수해서 느끼는 하나의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65.245)16-09-04 20:14 
가락-요한복음11장41절(보내신 자)160719b-이 근호 목사 

아까 첫 번째 끝에 이야기했습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불신자의 등장과 겸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신자냐, 신자아니냐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상대방이 나에게 뭘 가지고 티를 잡고, 뭘 가지고 공격하는지를 귀담아 들으면 돼요. “너는 딴 건 다 좋은데, 행함도 없이 무슨 구원을 받느냐?” 이래 나오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시면 돼요. ‘야, 이게 인간으로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내가 믿게 됐구나!’ 

사실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은 다 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 못 받아서 사람들이 파멸하잖아요. 성령 못 받아서. 성령 못 받아서 지옥 가잖아요. 천국 갈 수 있는 성령을 받았으면 더 이상 딴 거 달라는 소리가, 성령의 가치를 아신다면, “주여! 뭐 딴 것 주시옵소서.” 라는 말이 안 나올 걸요. 아마 “그냥 성령의 충만함만 계속 채워주시옵소서.” 그 기도만 할 뿐이에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것은 성령께서 인도하게 되면 됩니다.”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는 모든 일을 했다는 말이, 온갖 재주를 다 피웠다는 말이 아니고, 사실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성령께서 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풍랑 속에도, 로마에 갈 때도, 심지어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심지어 매를 맞는 것도 성령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신 그대로, 그렇게 몰아세우니까 뭐가 뚜렷해지느냐 하면 복음이라는 게 뚜렷해지는 겁니다. 

어떻게? 복음과 그 복음을 반대하는 그 세력이 함께 등장함을 통해서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제가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자체가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곱게 이야기해서 대접 받아버리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사건 자체가 일어날 이유가 없죠. 결국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서,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는 스스로 죽는다. 쉽게 말하면 내가 알아서 죽는다. 알아서 죽는데, 목자라 하는 것은 알아서 죽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자가 양이 되고, 알아서 죽는 그 의미를 모르면 그거는 양이 아니고 가짜 양이죠. 진짜 양은 목자가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 양을 졸졸 따라가는 십사 만 사천, 벌써 천국에 올라가 있다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요한복음을 보면서 지레짐작 겁을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아이구, 나사로는 고생했겠다. 뭐 마리아는 이렇게 됐는데, 지금 막상 이런 일이 우리 집안에 일어나서 우리 오빠가 죽는다면..안 돼!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이렇게 겁을 내지 마세요. 겁을 낸다는 말은 요한복음 11장하고 무관한 관계가 돼버립니다. 요한복음 11장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인생 속에 깊숙하게 이미 개입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면 되는 거죠. 

그럼 체험을 어떻게 하는가, 체험하는 방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특이성의 심화” 심화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점점 더 깊어진다. 점점 더 확실해진다. 또는 굳어진다. 특이성이라는 것은, 특별한 점. 희한한 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점. 특이성이니까 불가능성과 통하죠. 불가능성. 특이성의 심화라는 말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자다 깨어나서도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지? 말이 안 돼.’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믿지 못할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는데, 안 믿겨져야 이게 정상인의 태도인데, 이게 왜 믿어지냐 말이죠. 

왜 예수님은 저쪽세계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이 왜 믿어지고 그냥 오셔가지고 나하고 좋게, 좋게 흥정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쑤시고 들어와 가지고, 뭐 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이미 너희가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서 세웠나니, 라는 것이 내 안에 장착되고, 이것을 확인하는 조로, 인생을 몰고 간 것이 내 쪽에서 믿어진다는 것은, 이거는 놀라운 특이성입니다.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거든요. 이 특이성. 이 특이성이, 결국은 이 특이성이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새롭게 해가지고, 새로운 버전으로 계속 확인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어디 초점에 모아지고 있다? 이 특이성이 특이성답게 들추어내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고 계신다. 니가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니 안에 이런 십자가가 그저 용서하시고 그저 구원하시는, 아무 대가없이 건져주신 이 특이성을 계속해서 확인해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난처한 일이라든지, 혹은 기쁜 일이라든지, 즐거운 일들이 자꾸 이렇게 생겨나는 거예요. 

멀쩡한 강아지를 안고 가다가 툭 떨어져가지고 죽었어요. 실제로 대전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강아지를 안고서 문 잠그려고 하고 있는데 강아지가 까불다가 떨어져서 죽었어요. 10년 동안 키운 강아지인데. 그러나 그 집사님의 태도는 아주 냉정했습니다. ‘뭐 누구나 죽는 것!’ 십자가 꼽아주고 그런 것 안 했습니다. 비닐봉지에 담아가지고 그냥 일반쓰레기에 버렸어요. 그것도 물어보고 하니까 그렇게 해도 된답니다. 

참 정들었고 모든 것을 투자했고, 정 주었고 외롭지 않게 해주었지만, 이 사건은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께서 일으키신 거예요. 그 강아지 있으나 없으나, 무엇은 사라지지 않는다? 꽂혀있는 이 특이성은, 이것은 대단하게 너무 깊이 있게 박혀가지고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한국에서나 캐나다나 미국이나 어디에 가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은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확인케 하는 거예요. 몇 초? 3초. 3초 지나면 또 걱정, 근심, 염려, 또 뭐 붙들고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살지? 이렇게 난리를 치죠. 

그래서 이 특이성을 할 때에, 결국 인간들에게 이 특이성이 3초지나면 뭐로 바뀌느냐 하면, 특이성이 흐물흐물해져요. 시시해져가지고 보편성으로 바뀌어져버립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경우가 되느냐 하면 이런 경우가 되거든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두 사람이 서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고 한 사람은 우리인데, 괜히 한 3초 동안은 감사해요. 함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근데 주님은 이렇게 가거든요. 이게 주님의 공생애입니다. 근데 우리는 주님과 이야기하면서 가고 있는데 어느새 이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럼 점점 더 뭐가 벌어집니까? 이 간격이 점점 더 멀어졌죠. 뭐 주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해요. 하면서 가는 이 꼬락서니를 보니까, 점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막 끌리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 본성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몸의 본성. 몸이 아프면 왜 아프냐 하고 짜증내면서 이 길로 가고 있다 말이죠. 멀찍하게 말씀하고 멀어져요. 성경말씀 읽는 것도 처음에는 진지하게 읽다가 한두 번 읽으면 건성건성 읽게 되고, 나중에는 오늘도 읽어야 되나 싶고. 다음에는 오늘 안 읽고 내일 두 장 읽어야지 이래가지고 온갖 자기 딴에 요령을 다 부리고. 이렇게 멀어지거든요. 큐티 하다가 안 하다가 하다가 한 번에 숙제하듯 하다가 안 하다가 하다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의미 없거든요. 점점 멀어졌단 말이죠. 

그럼 어떻게 이 간격을 좁히느냐, 이게 뭐냐 하면 인식 자체거든요. 우리 사고방식 자체가 이렇게 가요. 실제로는 주님과 함께 가는데. 여기서 뭐가 날아오느냐 하면 징계가 날아옵니다. 징계는 사생아한테는 절대로 날아오지 않아요. 오직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에게 매를 들고 징계를 하는 겁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럼 징계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는가? 사후에, 일이 끝나고 나면 알아요. 징계냐, 징계 아니냐를. 

징계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종류가 있느냐 하면 몸의 병, 그리고 사업 폭삭. 자식 가출, 남편 병 이런 징계가 있는 반면에 로또 당첨, 주식 대박, 그 다음에 자식 사법고시 합격, 금메달 따는 것. 양쪽 다 징계에요. 이것도 징계고 저것도 징계고 그 사이에 있는 평범한 일상도 뭐냐 하면 이것도 징계가 됩니다. 그러니까 징계 없는 성도라는 생활은 없어요. 

징계는 있지만 육신이 강해버리면, 우리 인식이,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사고방식 자체가, 정신머리자체가 자꾸 이리로 가는 거예요. 이제 뭐 예수 믿고 복음까지 알았으니까, 주께서는 아들이니까 내 소원대로 기대에 응답하시겠지. 이래가지고 자꾸 기대를 출세와 성공에 연관 지어서 계속 가는 겁니다. 계속 가다가 징계가 한꺼번에 터져버리면, 아!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이지, 이미 주와 함께 이 좁은 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몇 초? 3초 동안. 

아! 주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신앙생활하지, 내가 예수 믿었다고, 이제는 정신 차렸다고 해가지고, 스스로 몸 관리하고 정신관리하고, 이제는 주께 구원받은 티를 내고 은혜에 보답해야지 하면서 열심히 나름대로 헌금하고 충성하는 것, 그런 것은 사실은요, 그런 것을 빌미로 해서 내가 정작 원하는 것을 따내기 위한 재롱, 하나님 앞에 위장술을 벌이는 거예요. 이렇게 착한데, 내 소원 들어주겠지. 소원 들어주게 되면, 인생 깨진 것 만회시켜주겠지. 그동안 못한 것 보상책으로 해주겠지. 어디 땅 갖고 있습니까? 나라에서 보상해주게. 

우리 인생이 없는데 무슨 보상을 해요? 우리 인생이 아예 없는데 무슨 보상을 해요. 함께 산다는 것은 나는 없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 살고 있고.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이 몸이 주의 것이거든요. 지난주에 전화 자주하시는 성도님이 계신데, 그 분한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 그렇게 자꾸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이야기하시는 그 혀와 입 바닥과 그 몸의 전체가 자꾸 내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거 지금 주님 겁니다. 

걱정을 해도 주님이 걱정하셔야 되는데, 왜 본인이 걱정을 하십니까? 지금 걱정거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자꾸 저한테 전화하시는데, 내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원하는 내 것이고 싶어서 자꾸 이게 뭔가 방어책으로 인생을 만회하기 위해서 하시는데, 못나나 잘나나 햇볕에 새까맣게 탄 다리나 맨 흰 다리나, 다 주의 것이지 내 것 아닙니다. 꼭 그렇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끊어도 또 오고, 또 오고하는데. 자꾸 내 인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없는데. 왜 그러냐 하면 실제로 이런데, 실제로 주와 함께 동행 합니다. 

동행하니까 나한테 전화를 하는데, 생각은 뭐냐, 온톤 생각은 평소에 자기가 원했던 것, 바라는 것, 그 바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싶은데, “인정받기” 누구로부터 인정받아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어릴 때부터 소망이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에요. 이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인간 생의 모든 투쟁은 인정을 놓고 벌이는 인정투쟁입니다. 헤겔이 이야기했죠. 인정투쟁. 

사장님이 나를 인정하겠나? 저 사람을 인정하겠나? 목사님이 나를 인정하겠는가? 교인들이 나를 인정하겠는가? 다른 어떤 분을 인정하겠는가? 인정을 두고 하는 싸움인데, 그 인정에 대해서 신경 쓴다는 말은 내가 이미 남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모든 행동하는 것, 시도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남이 되고 싶어서 행동하는 거예요. 남이 원하는 사람, 남이 좋아할 사람, 남이 기뻐할 그 이미지를 갖기 위해서 내가 남에게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주님께 제물을 바쳐야지 남한테 바치고 있어. 

그렇게 해서 돌아오는 것은 뭐냐, 남한테 인정받는 겁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 다 그래요. 님 이라는 글자에 점하나 찍으면 남이 되는 이 사이, 이런 운명이라. 남들 눈에 놀아나는 거예요. 평생토록 남들 눈에. 부모가 됐으면 자식들이 우에 생각 하겠노? 자식이 됐으면 옛날 우리 어른 말씀에, 어른 말씀에 나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른 말씀에. 

시어머니가 며느리 가르칠 때,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어른 말씀에 며느리 니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돼. 새댁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하늘같은 남편에게 꼭 밥을 해줘야 하고 우리 집안에서는 아침에 빵 해가지고 그렇게 일하러 보내는 것이 아니야. 꼭 삼시세끼 밥을 해서 줘야해. 어른 말씀이 그렇다고. 이래거든요. 그럼 어른 말씀이 당신 속에 꽉 차 있다는 것인데, 당신 속에는 당신 것은 하나도 안 들어있고, 그동안 남들의 교훈과 양육 받은 것이 가득 차있으니까 이건 자기 인생이 아니죠. 

자, 이 심오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 요한복음 11장 봅시다. 요한복음 11장 50절 봅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으니” 51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절,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 이러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게 지금 한글로 되어 있잖아요. 근데 읽어보면 왜 이리 말을 비비 꼬고, 왜 이렇게 한 번에 확 안 들어오도록 길게 이야기했는가?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해석이라는 것은 내 관점을 고집하는 자체가 해석의 방해가 되는 거예요. 해석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석은 이거만 알면 해석 끝나는 거예요. 1층과 2층을 알아서 둘이 비교하면 해석 끝나는 겁니다. 

자, 예수님께서 잡혔습니다. 잡혔을 1층의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 이 말썽꾸러기! 사고유발자! 말씀유발자! 말씀유발자를 잡아 죽이게 되면, 예수님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거만 제거하게 되면 나머지기 사람은 로마로부터 쓸데없는 오해를 안 받아서 압제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편해진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 죽어서 남이 사는데, 행복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이게 1층의 해석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해석하는데 사건이 일어나요. 사건에 대해서 반드시 둘로 분할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분할이 그래서 이 두 가지 해석을 설교자들은 다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그리고 우리 성도도 남 앞에 사실은 설교자잖아요. 둘 다를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골라잡으라고.  1층 골라잡으면 이거는 지옥 갈 사람으로서 이미 예정된 사람이고, 2층까지 아는 사람은, 2층 아는 사람은 뭐도 아느냐 하면 1층도 알아요. 육에서 영이 된 사람은 육도 알고 영도 아는데, 육으로 있는 사람은 본인이 육인 줄도 모르고 영인 줄도 몰라요. 양쪽 다 몰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영으로 나지 아니하면 어디를 못 간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잖아요. 하나님나라에 갈 사람인지 아닌지, 주께서는 사건을 일으켰고 그 사건을 해석해 줘요. 요한복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건 앞에 흘려두고 뒤에 해석해 나오는 것이 요한복음의 구조입니다. 앞에 사건 터지고, 베데스다 못에 사건 터지고 그 뒤에 해석이 쭉 나오잖아요. 

그 해석의 끝이 어디냐 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왔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육신이 된 것을 보고 같은 육신으로 착각하게 되면 이거는 1층에 있고, 원래 보내신 자가 잠시 육신이 되셨다고 보는 것은 2층의 안목으로 본 게 돼요. 따라서 해석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 1층과 2층으로 분할이 되어서 양쪽 다 알아야 되는 겁니다. 

1층 해석이 먼저 나오죠. 예수님 죽여서 있는 사람이라도 편하게 살자. 2층 해석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말고 새롭게 구성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산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예수님이 죽어서 백성들이 산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이 백성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철저하게 예수님은 누굴 이용합니까? 악마에 속한 죄인들을 철저하게 자기 십자가를 위해서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누구까지 이용합니까? 마귀까지 이용하죠. 욥에게 믿음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굴 내세우느냐 하면 마귀를 내세워요. 마귀하고 내기하죠. 하나님은 타짜에요. 하나님은 화투놀이를 하시면서 아무 이유도 없이 욥을 그냥 자기가 치는 화투로 일방적으로 사용해버려요.  

죽어나는 것은 누가 죽어나는 겁니까? 욥이 죽어나죠. 욥이 답답해가지고 묻잖아요. 욥의 해석을, 1층 해석 갑니다. 1층 해석에는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착하게 살면 천국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 간다. 욥이 고난 받기 전에는 욥의 생각이나 욥의 친구들 생각이나 똑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친구 아닙니까? 그러니까 친구죠. 그래서 1층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잘못된 해석의 대표적인 해석이 뭐냐 하면 바로 다단계해석에서 나오는 겁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 말이 다단계에서만 나오겠습니까? 큰 교회에도 다 있는데. 이게 바로 정말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거든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 철딱서니 없는 이 이야기가 2층에 올라가면 겨자씨비유가 되는 거예요. 보기에는 심히 약하나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서 온 각종 새들이 와서 깃드느니라. 이게 이번 여름수련회 마태복음 주제입니다. “지극히 작은 권력” 제목입니다. 지극히 작은 권력. 미미한 권력. 아무것도 아닌 권력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아무것도 아닌 권력이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이게 특이성으로 박혀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덜미 뒤에 별로 된 아주 조그마한 문신하나 박았다고 하면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한테는 예수님이 유명하잖아요. 근데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유명하지 않습니다. 미미한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4대성자 중 하나고. 가짜 예수가 유포되어서 기독교가 되었지, 진짜 예수님은 정말 미미해요.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진짜 유명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찾기 힘들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우리 동네 수변공원을 빨리 산책하면서 나름대로 운동을 해요. 뱃살도 빠지고 몸무게도 줄이고, 이렇게 해서 건강도 해야 복음도 전하고. 그렇게 해서 운동을 하는데, 어젯밤에 노숙자들이 수변공원벤치에 앉아서 술하고 안주하고 치킨하고 사먹고 그 자리에 그냥 놔두었어요. 저걸 누가 치우나? 누가 치우겠어요? 아무도 안 치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위에 있고 노숙자들이 어질러놓은 벤치는 계단을 내려가야 있어요. 아무도 안 치웁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가 내려가서 깔끔하게 치웠어요. 신문에 납니까? 신문에 안 납니다. 누가 알아줍니까?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월급 받았어요? 아니에요. 사진 찍었습니까? 아무도 안 찍었습니다. 그냥 치우고 고요히 사라졌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신자의 모습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것, 아무도 알 필요도 없고 인정받을 필요도 없어요. 이 세상에서 어떤 누구한테. 왜? 주님이 인정해주면 됐지. 주님이 인정해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정말 이거는 믿음인지, 아닌지, 다시 한 번 검토해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한테 이런 말을 해요. “목사님. 복음 믿으니까 왜 이렇게 외롭습니까?” 근데 외롭다는 말은 아직도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남한테 인정받고 싶어요.” 라는 낌새가 많이 곰팡이처럼 끼어있어요. 그러면 소원이 뭐냐? 니 소원을 말해라. 금도끼가 니 도끼냐? 하는 것처럼. “내가 복음 알고 믿게 된 것을 남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래 돼버리면 그거는 남들이 인정해준 그 육적인 본성을 껴안고 계속 그걸 붙들고 있는 바가 돼버려요. 

근데 주님께서는 그걸 강제로 철거했을 때, 다시 말해서 내가 노숙자가 어질러놓은 벤치를 치울 때, 마침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사진 찍고, 인터뷰하고 좀 이랬으면 좋잖아요. 만약에 그렇게 하려면요, 치울 때 몇 번 봐야 돼요. 신문기자가 있는지 봐야 되고, 경찰이 있는지 봐야 되고, 그리고 천천히 슬로우 비디오로 주워야 돼요. 그 사람은 그게 아니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무도 줍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왜?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이 휴지를 줍게 된 것은 영광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내가 이 십자가복음을 알게 된 것은 웬 떡이냐?’ 이래 생각해야지, ‘이게 무슨 떡이야? 남이 알아주는 것이 떡이지.’ 이래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오해하신 거예요. 교회 와서 예수 믿는다고 손들고 나올 필요 없어요. 교회가 그런 짓 하면 안 됩니다. 침례교에서 그런 짓 많이 하는데, 가만히 있는 침례교만 욕 할 필요 없고 장로교도 해야죠. “손들고 형제 나와 주세요!” 이러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세례 받는 것, 성만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다 올무에요. 

원래 믿음 없는 것들이 상징을 자꾸 동원시켜가지고 자기 믿음 없는 허상을 위장하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세례 받았다. 성만찬 받았다. 성만찬 그거 왜 합니까? 그거 함으로써 점점 더 믿음과 멀어지는, 원래 믿음도 없지만 있는 믿음까지 다 성만찬하고 바꿔치기 할 일 있습니까? 사람이 뭘 남한테 보이듯이 한다는 말은 남한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니 안 믿지?” “믿는다. 성만찬 한단 말이야. 나 세례 받았단 말이야.” 이렇게. 

왜 자꾸 남을 의식하죠. 주께서는 이미 아시는데. 주께서는 니가 착하다는 것을 아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니한테 먼저 찾아왔다는 것을 아시죠. 고넬료하고 베드로하고 만났을 때 그 중개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가 했습니까? 고넬료가 했습니까? 누가 했습니까? 누가 하셨지요? 주님이 하셨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지금 살아있어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만 노동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일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일해서 나온 결과가 뭐냐 하면 둘 다 “으음~~!?”이러고 있다는 거예요. 둘 다. 아니 중개자 아저씨가? 아니 사도님은 저를 어떻게? 보자기 내려왔는데 안 먹는다 했는데,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먹지 못 할 것을 먹어라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고넬료를 만나니 그 뜻을 알았습니다(사도행전 10장). 율법도 모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도 이미 천국가기로 작정된 자는 다 소집을 해주시는구나. 이미 하늘로 소환시키는 거예요. 올라오라고. 성령을 보내가지고. 사랑의 줄로 꽁꽁 묶인 채로. 꽁꽁 묶여가지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걸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 거예요. 그럼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잡아당겨 있는 채 그대로 증거 하면 됩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회자 입장에서 이걸 그대로 하게 되면 목회자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걱정 안 되는데, 목회자는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의 줄로 꽁꽁 묶인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걱정이 돼요. 이게 걱정되는 거예요. 이게. 

근데 생각해보세요. 나한테는 없지만 주님한테는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면 나한테는 한 명도 없고 저쪽 교회에는 만약에 20명이 있다면, 나는 놀고 천당 가잖아요. 목회 한 명도 안 했는데 천당 가고, 저기는 20명 목회 한다고 생고생을 하면서 천국가기는 똑같고. 누가 남는 장사입니까? 돈 없는 내가 남는 장사잖아요? 3000명이 있으나 세 가정이 있으나. 노아 방주에 몇 명 들어갔어요? 만들기는 장충체육관만큼 만들어놓고 몇 명 탔습니까? 달랑 8명. 말이 8명이지 한 가족밖에 안 돼요. 남의 가족은 한 명도 전도 못했다는 이 말이거든요. 달랑 자기 식구만 갔어요. 자기 식구도 구원받았습니까? 함은 또 탈락이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자를 마지막 때에 살리리라는 이 믿음만 있으면 전도라는 것이 딴 게 없어요. 안 믿어지거든 오지 마세요. 이게 전도에요. 주의 말씀 전했는데 너무 안 믿어지거든 너무 용 안 쓰셔도 됩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했던 베드로가 했던 전도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말씀만 전했습니다. 오직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보낸 자가 아니면 누가 들으리요. 이 말씀을 누가 믿으리요. 보내신 자가 아니면 누가 보냄을 받겠느냐.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저런 경우를 다 떠나서,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게 제일 알기 쉬운 거예요. 전 인류를 정신병자, 오늘 제목 정신병자입니다. 전부 다 정신병자로 하세요. 생각을 아예 그렇게 정신병자로 생각하시면 돼요. 공부 잘하고, 엄마 말 잘 듣고, 발 씻으라면 발 씻고, 숙제 하라면 숙제 하고, 장 보라고 하면 장보고,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고..너무나 착한데 정신병자. 모든 생활 경제권 아내한테 주고, 돈 타 쓰고 일찍 퇴근해서 놀아주고, 너무나 착한 남편도 뭐? 정신병자. 왜? 내가 바로 주님 보시기에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왜? 나는 내 행복밖에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남한테 인정받는 것 이외는 달리 생각하는 것이 없고, “나 어때요? 나 성공한 사람이에요.” 이게 삶의 목표가 돼있었고, 날 무시하지 마라가 나의 표어가 돼있었고, 나 건드리면 나도 가만히 안 있겠다. 나도 한 오기한다는, 남에 대한 마지막병기, 최후의 무기로 삼을 정도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살아왔습니다. 정신병자에요. 멀쩡한 사람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예수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18장에서 누가 크냐고 했을 때에 어린아이 데려다 세우셨고, 마태복음 20장에서 하늘나라에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제자들이 다투었을 때에 나의 쓴 잔을 마시라고 했잖아요. 세상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대로 하면 안 된다. 섬기는 자가 높은 자다. 나는 너희에게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도리어 대속물로 온다고 했을 때에, 남들 보기에 예수님은 정신병자에요. 그러니까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완전 세계관이 대척이 되어 있는, 완전 반대가 되어 있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처음부터 죄에 있고 지옥이에요. 뭐 지옥 가서 지옥 구경하고 싶어 하지마세요. 평생 지옥이에요. 평생 지 잘난 것만 생각하는 지옥이에요. 인정받는 경쟁밖에 몰라요. 이 지옥에서 거지 나사로는 거지였고 아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의한 청지기가 사장의 돈을 횡령한 사람이 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저 2층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움, 자기 장래를 대비했다는 좋은 칭찬과 더불어서, 불의한 자가 오히려 깨끗한 자를 제치고 불의한 자가 칭찬받는, 그냥 모든 것을 거꾸로 해석해야 되는 그 정도로 심각한 이 세상입니다. 모든 것을 거꾸로. 예수님을, 창조주를 죽이는 이 세상 같으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정답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사실의 공간이 아니라 내가 견뎌내야 될 가혹한 의미의 공간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군에 가 있는 군인의 현실은 뭡니까? 군대가 가장 자기의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죠. 제대 말년 되면 취직이 가장 현실이고. 군대는 군대고 제대하면 밥벌이해야 되지 않습니까? 취직이 가장 큰 문제에요. 지난 번 목사님께서 취직이야기 할 때 제가 참 가슴 아팠어요. 우리 젊은 교인들 취직 때문에 고민한다고. 내가 견뎌야 할 가혹한 의미의 공간이, 나만이, 나에 대한 그것만이 현실이에요. 프랑스 테러가 어떻고 니스가 어떻고, 니스를 바르든지 하여튼 터키 쿠데타든, 그건 남의 이야기고. 진짜 나의 현실은 주께서 일으키는데, 그 일으킨 사건이 뭐냐 하면, 정신병자인 내가 정상이라고 치고 이걸 이겨내고 견뎌내야 하기 때문에 그 현실이 참 가혹하게 느껴지잖아요. 가혹하게. 

그런데 그 가혹한 공간을 누가 관통했습니까? 미리 앞당겨서 주께서는 그걸 통과해놓고, 예수님이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환경은 곧 가혹한 우리의 현실인데 그 안에 뭐가 나 있습니까? WAY, 길이 나 있는 거예요. 내가 곧 길이요. 내가 있는 곳에 내 아버지도 함께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영생이 없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거죠. 

그 말씀은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말씀인데, 그걸 다 끊어봅시다. 다 끊고 끝에만 남겨봅시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결국 우리의 인생은 뭐냐, 백날 살아도 아무 소용도 없는 그런 나만의 현실만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뭘 해도, 뭘 성공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우리가 아무리해도 천하를 얻겠습니까? 근데 주님께서 천하를 얻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뭘 잃으면? 니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거죠. 그럼 목숨을 얻으려면? 자기를 부인해야죠. 

결국 이 말은,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이 말은 모순되기 때문에, 말을 정리해봅시다. 너를 부인하면 니 목숨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너의 목숨을 포기하고, 뭐로 대체해야 하느냐, 내 대신 돌아가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바꿔치기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바꿔치기 하는가, 몸은 그대로 두고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보내신 자의 영이기 때문에, 보내신 자 안에, 모든 십자가의 말씀의 완성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게 되면 우리 몸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님의 몸으로 바뀝니다. 바뀌게 되면 로마서 14장 말씀이 돼요.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이다. 다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는 값 주고 산 것이 되지 이제 너의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다? 주의 몸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의 몸인데, 주의 몸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굴려야 되는데, 그 방법이 뭐냐, 사실은 제가 이야기를 다 했어요. 했는데도, 막상 이쯤 되면 뭔가 걱정이 되는 거예요. 구원은 받아놓고, 구원은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뭡니까? 목사님. 이렇게 묻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오늘 다 알았다고 하면 걱정될까 싶어서 어렵게 이야기합니다. 

대상이 바뀌면 시간도 바뀐다. 이게 정답입니다. 내 시간,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 내 역사, 쉽게 말하면 내 팔자에요. 대상, 내 몸이 있으면 시간이 갈 수 있어요. 그럼 시간은 내 현실이라고 여기는 시나리오거든요. 시나리오. 나는 커서 뭘 하고, 40대는 뭘 하고, 60대는 뭘 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시나리오가 있어요. 이거는 어떤 대상이 있으면, 습득된 대상에는 습득된 시간이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대상을 잡아버리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 물이 있잖아요. 여기 물이 있기까지 필요한 시간들, 과정들이 둘둘 감아있는 거예요. 만약에 물을 줬는데 제가 흥! 하고 탁 쳐서 물이 쏟아졌다, 아무도 가슴 아파 할 사람 없어요. 닦으면 되지. 그런데 날 무시한다? 물 안 먹으려면 곱게 먹지 말지, 이걸 툭 쳐가지고 보란 듯이 물을 쏟지? 갑자기 이게 어떤 상황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있어요. 교사가 남의 애 때리면 가만히 있어요. 근데 내 애를 때리면 학교 폭력 위원회를 소집해가지고, 어디 두 명이 한 명을 패냐? 이래가지고 또 교사 만나고 안재욱이 사과하고 무마시키고 합니다. 아이가 다섯에 나와요. 

모든 인생에는 자기 게 없어요. 걸려있는 관계들이, 아버지, 어머니의 기도, 애씀과 삼촌의 용돈과 고모의 잔소리와 온갖 것이 얽히고설킨 것이 우리네 시간을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바꿀 때에 말로만 ‘뭐 주님 건데.’ 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요?  못 살아요? 살 수가 없어요. “니가 우리 집안이 불도가 심한 집안인데, 니가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안동 권씨 15대 가문인데, 니가 교회 나가? 그럼 이 재산은 어떻게?” 나는 안동 권씨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안동 권씨 가문 가운데, 대대로 명문가 있잖아요. 옛날 고가(古家)를 관리하는 사람. 그 사람이 만약에 교회 부흥회에 가서 은혜 받으면 우에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사 엎고 그렇게 할 텐데. 

왜 사람이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도, 왜 못 사느냐? 그동안 얽히고설킨, 습득된 시간들이 있어요. 시간들이. “어머님. 제가 불도가 심한지를 알지만 제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뭔데?” “성령을 받는 거예요.” “야야! 성령이 뭐고 ?” 도무지 납득이 안 되니까. 그래 착한 일 해가지고, 제사는 안 드리고, 제사 할 때, 그러면 밥 해주면서 제사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는데, 이거는 제가 제사 드린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무마시킬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누구처럼 이냐면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이 여호와 하나님한테 은혜 받아놓고, 자기 나라에서는 여호와가 없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핑계 댑니까? “내가 우리 동네에 가서 림몬 신한테 절하더라도 나는 림몬 신하고 아무 상관없이 여호와 생각하면서 제사 드립니다. 봐주세요.” 하는 것처럼. 절에 가서 절에서 주는 비빔밥 먹으면서, 이 비빔밥이 부처한테 드렸다가 나왔지만, 그래도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감사히 먹으라는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처럼 그저 주께서 주신 줄 알고 맛있게 먹습니다. 자기를 위해 온갖 변명을 갖다 댄다는 자체가 그동안 얽히고설킨 것이 그렇게 많다는 거예요. 그게 언제까지 가느냐? 평생 갑니다. 

자, 이제 결론을 내립시다. 예수 은혜 받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변명하며 사세요.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그런 게 있잖아요. 비겁하고 변명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깔끔하게 처리가안 됩니다. 이게. 변명한다는 것이, 사과한다는 것이 어딥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고, “주여, 제가 예수 믿은 뒤로 다 끊었습니다.” 이거는 분명히 불신자 같아요. 제가 볼 때는 성령 안 받은 사람 같아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주께서 하라고 하는 것만, 어쩔 수 없다고 했는데, “야야, 니가 교회 간다면서, 사실은 니가 내가 교회 가는 것 내가 반대는 안 한다.” 이렇게 하면, 역시 내가 고난 받으니까 도와주시는구나. 이렇게 하지 마시고, ‘주께서 교회 가는 것을 우리 불도 심한 시어머니를 통해서 허락하시는구나.’ 하고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내가 성령 받았는데 마귀가 나한테 달려들면 안 되지.’ 이래 돼버리면 그거는 자기 찬양이고 자기 인정이지. 그런 되바라진 태도나 행동은 안 됩니다. 옆에 불신자들이 뭐 떡 같은 것 주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감사히 먹고. 이게 뭐 부처의 입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과 관계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감사히 잡수면 되는 것이지.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니가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동하는 데 있어서, 이걸 먹을까? 안 먹을까? 하고 있는데, 그거 먹으면 안 돼. 하게 되면 니가 주께서 피 흘린 형제를 니가 니 행동, 니 잣대로 형제를 니가 넘어지게 하는구나. 이 말을 쉽게 하면 뭐냐, 그럼 니 맘대로 사세요. 그냥 살면 되고. 비겁한 변명이든, 구차한 변명이든, 어떻든 그냥 하세요. 하지만 뭐는 변하지 않는다? 이 특이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발 편하게 사시고 당당하게 사시고 자기 자신한테 너무 채찍을 때리지 마세요. 주의 몸입니다. 내가 나를 관리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죽을 때까지 비겁하고 구차한 변명 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아주 비겁한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말씀을 몇 퍼센트 추진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시는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특이성이, 늘은 아니지만, 잠시 잠간이지만 그 특이성을 깨닫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 천국은 죄인만 간다는 것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그 시간이 이제 우리에게 덮쳤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주님이었고, 끝에도 주님이었고, 주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나중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못나고 못난 우리가 십자가 은혜를 받고 난 뒤,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고 지금도 아들이고, 비겁한 변명을 쏟아내는 그 현장에서도 분명히 아들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