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1장41절(보내신 자)160719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1장 41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볼게요.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이렇게 돼 있죠?
“보내신 것을” 요한복음에서 특히 보내신다는 말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어요. 보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아는 현실 세계 말고 다른 동네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보냄이 성립되려면 이 동네에서 이 동네 가는 게 보냄이 아니고, 인간들이 알 수 없는 다른 세계 계신 분이 이 쪽 세계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다른 세계 들어왔다가 이 쪽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그 당시에 분명히 같은 그 아람어를 사용하고, 우리 같으면 우리 한국말을 사용하는데, 단어도 그런 것을 다 만들어서, 문장이라 하는 것은 선택과 연결로 돼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적당한 걸 뽑아서, 그 다음에 뽑기만 하는 게 아니고 그걸 연결, 연결시킴으로써 문장이 되거든요. 문장이 딱 되는데, 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단어의 의미와 다른 뜻을 갖고 있고, 또 연결될 리가 없는데 연결 될 수 없는 단어들을 이렇게 연결시켜 놓는 거예요.
그 한 가지 예가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는데, 오늘날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나라는 게 조금만 나이 들면 지금 죽어가잖아요. 나라는 게 지금 60, 70, 80, 90, 100되면 내가 죽는다 이 말이죠.
본인부터가 스톱이 된 상태가 아니고, 본인부터 죽음 쪽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데, 나를 믿는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와 합체하는 사람, 나와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 나와 더불어 한 공간에 있는 사람은“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이렇게 돼 있으니까 결국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은 “그럼 당신은 늙어도 안 죽는다 이 말이야?”라는 식으로 되는 거죠.
그런데 같은 인간인데도 늙어서 왜 안 죽는 사람이 있을까요?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을 하려면 그렇게 말을 내뱉는 본인부터가 안 죽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본인이 안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그걸 납득하겠어요? 그걸 수용하겠어요? 인간치고 안 죽은 위인이 없어요. 다 죽어요. “날 믿는 자는 행복해집니다.” 이건 부처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건 충분히 납득이 돼요. 공자처럼 “내 말을 믿는 자는 이 땅에서 선비가 된다.”이거는 충분히 되죠. 세속인이 아니고 점잖은 분이 된다. 이게 유교의 모토입니다. 이 땅에서 선비로 사는 게 모토거든요. 이건 충분히 되는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지가 이만희도 아니고 왜 그래요? 지가 신천지입니까? 안 죽게. 안산홍이도 지가 안 죽는다 했는데 죽었잖아요. 그러니 이 말은 결국 믿으란 말이 아니고, “너 안 믿지? 그렇지? 못 믿겠지? 그렇지?”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무엇이 의미가 있느냐 하면 “너 못 믿겠지?” 못 믿는 것은 니가 사는 동네에는 내 말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뭘 믿어야 돼요? 믿으려면 보내신 분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따로 있음을 겸하여 수용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세계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가 이 세상에 밝히 나타났다는 것을 믿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뭐는 믿을 필요 없어요? “나는 착해야 돼. 나는 성화돼야 돼. 나는 훌륭해야 돼. 나는 봉사해야 돼. 나는 헌금해야 돼. 나는 가족들 다 몽땅 교회로 보내서 천당 가게 만들어야 돼.”라는 것을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그걸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지금 보내신 자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까 이야기한 헌금, 전도 이런 걸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왜냐 하면 보내신 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전도, 헌금 이런 게 아니고 보내신 분은 나름대로의 헌금, 전도, 예배, 제사, 영광, 그리고 율법, 천국, 지옥, 모든 개념은 보내신 분이 따로 챙기고 있겠죠. 따로.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아버지와 예수님이 알고 있던 그 모든 개념과 그 모든 내용은 누가 이루겠습니까? 땅에 있는 우리가 이루겠습니까? 보내신 분에 다 실려서 그분이 이루겠습니까? 그분이 이루겠죠. 그렇죠? 우리가 의인이 되어야 천국 가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의인 되는 것도 우리가 열심히 해야 되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의인되게 하겠습니까? 그분이 하겠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나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 죽었고 살겠고, 라고 하는 것은, 그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이야기가 다 된 겁니다. 나만 믿으면 니가 어떤 죄를 지어도 보내신 자를 믿었기 때문에, 그 안에, 심지어 죽어야 될 자, 죽는 자, 마땅히 죽어야 될 자, 마땅히 지옥가야 될 자도 뭘 얻는다? 영생을 얻도록 그렇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이야기했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나라는 것은 보내신 자죠.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죠.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꽂혀야 됩니까? 왜 우리가 죽어야 되느냐? 왜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느냐? 우리가 죽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우리가 죽어야 될 자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평소에 살고 싶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 이유를 알려면, 어디 영어를 공부해야 되겠어요? 스페인어를 공부해야 되겠어요? 수학을, 물리학을 공부해야 되겠어요? 뭘 공부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 이유를 알려면? 죽어야 된다는 것이 예수님 입에서, 보내신 자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보내신 자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지와 관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관련이 있죠. 그게 율법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율법에서 소개하는 겁니다. 그 율법을 돌판으로 만든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뭡니까? 탐내지 말라 했죠. 탐내지 마라. 근데 로마서 7장에 보면 탐내지 말라가 우리로 하여금 없는 탐심도 유발시킨다고 돼있습니다. 탐내지 말라 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탐을 안 냈는데, 주께서 탐내지 말라 하는 그 순간부터, 그 다음부터 우리는 탐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죄가 있어서, 인간의 죄라는 것은 주의 말씀에 대해서 항상 도발하고, 대항하고, 대드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보고 잔소리하면 더 하고 싶죠. 이거 떡 먹지 말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떡은 하나의 나의 노림이 됩니다. 기어이 떡을 먹고자 해요. 심지어 안 먹고 싶었는데도 마음이 그 다음부터는 도대체 무슨 떡이길래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을까? 관심사가 거기에 쏠리게 되어 있어요.
왜?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목사님.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주장하십니까? 물으면 선악과 만들고 난 뒤에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는 그 선악과에서 생각이 떠날 수가 없었어요. 늘 그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걸 누가 알았어요? 뱀이 알았죠. 마귀가 알았잖아요. 마귀가 알고 따먹으라고 부추겼고, 거기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방어기제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방어 메커니즘은 없어요. 인간은.
한두 번 거절한다고 해서, 삼세판인데, 세 번, 네 번 거절한다고 다섯 번, 여섯 번 이긴다는 보장은 없고, 칠천육백사십번 거절한다고 해서 칠천육백사십일곱번째 또 거절한다는 법은 없어요. 인간은 아무리 과거에 그렇게 인내를 해도 어떤 순간에는 과거의 인내는 이미 소모되고 난 끝입니다. 건전지 여기 들어있는데 백만 한번, 백만 두 번해봤자, 결국은 한계가 드러나잖아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노인네들 이렇게 오래 살았다 하지만, 70이고 80살아보게 되면 뒤돌아보세요. 없어요. 이미 소모했는데요. 그러니까 70이 되고 80이 되도, “아버님. 뭐 오래 사셨으니까 올 말쯤 돌아가시죠?” 하면 20대나 40대나 똑같아요. 더 살고 싶어요. 80살았다고 ‘아이구, 뭐 대충 죽을까?’ 이런 것 없습니다. 인간은 갈수록 독종입니다. 특히 노인들은 더 심하고요. 노인네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아주 독종 중에 독종이에요. 목사, 장로,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평생을 새벽기도 했던 권사님도 나이 들면 독종 돼요. 자기에 대해서 독종 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인간 속에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괴(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고정된 부위에 있으며 통증 부위가 이동하지 않는 병증)같은 덩어리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의 덩어리에요. 그동안 어설프게 생명으로, 목숨이라는 것으로 칭칭 감아왔는데, 이게 다 닳았어요. 세월 따라 이리 뜯겨 나가고 저리 뜯겨 나가니까, 달랑 남는 게, 아담의 죄, 그게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나이 많은 목사, 나이 많은 장로, 나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들은 전부 다 독종입니다. 독해요. 집념. 자식 하나 오게 되면 또 돈 바라보고 오는 줄 알고, 맞는 말이지만, 전부 다 긴장을 해가지고, 실제로 그리 이야기해요.
제가 버스 타고 가는데, 한 60, 70된 할머니들이 이야기해요. “지난 며칠 동안 딸내미가 와있는데 내가 죽는 줄 알았다. 오늘 오전에 갔다. 아이구, 속이 시원하다.” 그걸 차마 딸한테는 말 못하고, 딸이 간 뒤에는 친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이구, 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 혼자 사니 이렇게 좋은 걸 가지고.” 효도 한답시고 너무 자주가지 마세요. 유산이 나누어줄 정도만, n분의 1이 나올 정도만 하세요. n분의 1. 그것까지만 오지 너무 많이 오지도 않아요. 유난떨지 마세요. 괜히 다른 형제들한테 오해받습니다. 몽땅 차지하려고, 유언 또 조작하려고 어슬렁거리고....,
보내신 자, 보내신 자 안에는 말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보내신 자하고 하나님 아버지하고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은 본인이 혼자 다 이루어서, 다만 믿기만 하게 되면, 믿는 자의 일체 모든 행동에 대한 예수님이 혼자 단독행위를 다 해버리고, 예수님의 단독행위가 믿는 자에게 효과, 혜택을 주어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 쪽에서 얻는 이익이 뭐냐, 한 것이 있으니까 이익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천국에 오게 되면, 그 천국 온 사람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겁니다. 오직 주께만 찬양하고 주께만 감사하게 하는 것. 이 말은 방향을 어디다 두지 않았다는 거예요? 방향을 나에게, 내가 잘나서, 내가 믿어서 왔다는, 자기 공로로, 자기 자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오직 주께만 바라는 겁니다. 면류관도 벗어서 던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건 제가 면류관을 쓴다는 것은 택도 없습니다. 하면서 던지겠죠. 요한계시록 4장에.
그럴 미리하자는 거예요. 미리. 교회 다니면서 미리 하자는 거예요. 그걸 선취라고 하는데, 미리 취한다. 미리 그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미리 갖게 하려면 누굴 부정해야 합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해야 하죠.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한 게 아니에요. 제가 봉사한 게 아닙니다. 그걸 늘 반복하게 하고 그걸 훈련시키고 실습시키는 그 모든 역할과 임무가 성령 받은 자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도 잠깐 실습해봅시다. 실습.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는 아니요, 오직 주께만 되어 있죠. □네모는 아니요, 오직 주께만 입니다. 자, □안에 들어갈 말을 해볼 테니까 여러분하고 동일한가 보세요. 1.자식성공. 내 자식 성공은 아니고 누구만? 예수님만. 벌써 여기서부터 들통 난 것 같죠. 2. 큰 예배당 신축. 이것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만. 3. 자신의 자존심이나 명예, 사업성공. 이런 것 아니요, 오직 주께만 이래 되겠죠. 마지막 결정적인 거 하나 있다면 4. 딸내미 결혼식. 딸내미 결혼식 아니요, 딸내미 결혼식이 7월 21일이고 예수님의 재림이 7월 21일이면 감사하겠습니까? 일단 딸 시집보내고 22일에 오시지.
그래서 노아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에 갑자기 홍수가 주어졌죠. 거기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시집가고 장가가고, 인륜지경사가 주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륜지경사가. 주님 재림하시면, 상견례 할 때 벌벌 떨면서 위신 챙기고 있는 이게, 주님 재림하시면 아무것도 아닌 허세부린 거예요. 인간은 허세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허세 빼놓고는.
그러니까 이렇게 되려면, 주님께서 인위적으로 부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안 돼요. 주님 십자가 지신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내 자식 출세하고 성공한 것이 더 좋고, 이게 인간이 아무리 신앙이 좋고 장로, 권사라 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이런 것들을 스스로 자기부인으로 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아무리 새벽기도 나오고 소나무뿌리 열댓개 뽑아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식을 투자했는데, 한 백배 올랐다. 기분이 좋아가지고 감사하면서 주의 은혜로 올랐습니다. 이렇게 하죠. 근데 이 공식에 의하면 주식 백배 오른 것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주식을 백배나 오르게 해서 부자 되게 하신 주님이라고, 이것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예수님이라고 자꾸 하는 거예요. 근데 주식을 팔았으면 되는데, 주식을 안 팔고 놔뒀더니만 사흘 만에 이거는 똥값 되었다 이 말이죠. 그때 싱글벙글 하겠어요? 아니죠.
이것은 주식이 백배 오를 때 그것을 주님께서 하셨고, 그걸 폭삭 망하게 한 것도, 주님만 귀한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망하게 하신 거예요. 이걸(위에 4개의 예) 당했던 사람이 바로 구약의 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식 열 명 다 훌륭했고, 욥도 생각이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행여나 믿음도 없는 자식들이 본의 아니게 죄를 짓고 영광을 가릴까 싶어서 아버지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서 늘 제사 드리고, 그들이 철이 없어 죄졌으니까 제가 드린 제사 받으시고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했다 이 말이죠.
제사 드린 그 입장만 생각한다면, 그 정도로 빽쓰고 치맛바람 일으켰듯이, 자식을 위해서 헌신했으면 자식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죽더라도 뭐, 열 명이니까 한 둘이 죽을 수 있는데, 어떻게 열 명이 다, 그것도 자식을 위해서 제사에 몽땅 다 투자했는데, 그 자식들이 다 죽었습니다. 애 하나 있는 사람은 애 하나 죽고, 둘 있는 사람은 둘 죽고, 셋 있는 사람은 셋 죽고, 네 명이 있는 사람이 다 죽었다면 사람들이 의미를 두겠죠. 근데 열 명인데 다 죽었다? 분명히 이것은 그 제사가 하나님의 대한 사기라고 다들 이야기하겠죠.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들이 욥의 가장 친한 친구들 세 명이 이야기했어요. My Dear Friends? 친구 믿지 마세요.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친구 아무 소용없어요. 그동안 친구했던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친구에요. 친구라는 말이 나와서 생각납니다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했죠. 그 말은 보내신 자 입장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하고 막 먹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의미는, 인간들끼리만 아는, 그런 통용되는 의미지, 보내심을 입은 그 자의 의미가 아니에요. 나중에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가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알고 있던 의미를 그냥 일방적으로 제자들에게 퍼부어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된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반드시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아야 돼요.
성령을 받아가지고, ‘내가 옛날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오해했고 곡해했습니다.’ 제자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보면 제자들이 헛짓한 것이 쭉 나와 있죠. 그게 제자들이 부끄러워서, “야, 이것 좀 지워 도! 누가야, 이거는 좀 지워라! 마가야 이것 좀 지우고!” 압력 들어오고 했을 건데, 아닙니다. 그대로 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저주한다고 했던 것 그대로 다 이야기해요. 왜? 그것이 바로 구원의 과정이고, 누구나 그걸 겪어야 될 코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좀 이렇게 괜찮은 사람하고 오랜만에 명분 있는 날이 되면 무슨 식당에 갑니까? 코스요리 나오는 식당에 가죠. A코스, B코스, 코스요리. 항상 여기에는 메인요리가 있어요. 앞에 나온 스프만 먹고 집에 가자고 하면, 이건 촌사람입니다. 항상 메인요리를 먹어줘야 해요. 메인요리를. 메인요리는 뭐냐 하면 앞에 스프도 맛있지만, 메인요리를 감칠 나게 하기 위해서 앞에 먹는 거잖아요. 뒤에 나온 디저트도 마찬가지지만.
결국 메인요리가 누굴 증거 하는 거겠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우리는 접시 위에 있는 하나의 에피타이저, 스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입가심하는 맹물정도. 항상 메인요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거예요. 내 구원받으라고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고, 내 믿음 티내라고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나를 이런 것으로 살리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보내신 자를 믿어야 되는데, 자꾸 보내신 자를 믿었다는 나를 우기면 안 돼요. 그거는 종교라는 취미활동 하는 것이지, 그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누구라도 이용할 생각으로 “믿습니다.”를 말하게 돼요. 자기를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더 키우기 하기 위해서 능력자를 찾아다녀요. 능력자를. 저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저 사람의 능력이 내 거 되면 나는 얼마나 지금보다 폼이 나겠느냐?
교회 갈 때 자기를 부인하고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는 오늘도 깨져야지.’ 이래 가는 사람 없거든요. 교회 가서 예배 참석하는 것이 노동이잖아요. 노동을 했으면 무슨 대가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목사의 축도를 받든지, 광선에 쏘이든지, 뭔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헌금한대로 30배, 60배, 100배를 받든지. 내가 정성들여 기도한 대가로 내 남편도 같이 교회에 나와 가지고 부부싸움과 헤어짐을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가 있든지. 뭔가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게 가짜인 거예요. 그게.
나는 교회에서 이만큼 하고, 주님을 교회에서 만나가지고 거래하고 흥정해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교회가 시장터가 아니에요. 내가 교회 가주고, 그 정도 수고하고, 주께서 십자가 지는 수고를 해주시면, 십자가 수고한 것과 내 수고한 것이 맞닿아서, “그래 악수 하자. 우리 계약 체결됐어. 구원해줄게.” 이렇게 구원하는, 그런 구원은 성경에는 없어요. 주님이 무슨 능력이 없어가지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는 그 모든 것이 니가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행위들을 다 쏟아내게 하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히브리서 10장 16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주께서 새언약을 주시는데, 새 언약이 뭐냐 하면, 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리고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예수님의 몸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준비된 몸을 우리가 장만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장만하셔서 독생자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주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한다는데,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서의 주장은 뭐냐 하면, 내 생각과 내 마음은 누가 주장하느냐 하면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잘못했을 때, ‘아이구,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이래 생각한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마음과 내 생각은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틀어지고 있고, 내 마음가는대로, 내가 결정하는 대로, 내가 선택하는 대로, 내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그게 아니고 거기에다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미 구원되었음을 우리 속에 쑤셔 넣어버리는 거예요. 막 쑤셔 넣어버려요.
여러분들이 빙수나 미숫가루를 여름에 먹을 때, 맛있게 먹고 있는데 누가 숟가락 들고 와서 빙수 속에 숟가락 확 집어넣으면 기분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 나쁘죠. 지금 빙수 먹을 때 제일 맛없는 것부터 먼저 먹고 제일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으려고 놔뒀는데, 근데 숟가락 들고 확 들어와 버리면 안 되잖아요? 이게 보내신 자에요. 보내신 자의 행동이 이런 거예요. 나름 착하게 산다고, 교회 가서 담배 끊고, 술 끊고 바르게 살라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복 주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속에 팍 해가지고, “받아 줄래? 안 줄래? 묻지도 않아요. 그냥 거기다가 다 꽂아버려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주님이 자신의 일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데 누가 우길 겁니까? 주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우리는 의인이 되어가지고, 한 것도 없이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황당’이라고 합니다. ‘황당.’ 나름대로의 천국가려고 착한 일 준비를 했는데, 그런 착한 일 준비를 다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치고 들어온 겁니다.
이 말은 천국이란 누가 간다? 천국은 죄인이 가는 곳이에요. 의인이나 바리새인들은 못 가고, 세리와 그 당시에 가장 밑바닥 죄인이 누구냐 하면, 그 당시 세리는 계약직이어가지고 엄청나게 프리미엄을 챙기기 위해서 돈을 지 맘대로 비율을 정해가지고, 이만큼 챙겨가지고 위에는 이만큼 주고 나머지기는 자기 돈으로 끌어 모으는, 돈 밖에 모르는 구두쇠, 수전노, 그게 세리고.
또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몸을 팔아서 온 곳곳에 있는 가정을 다 파탄 내는 여인, 창녀죠. 창녀는 지만 먹고 살면 그만이고, 남의 가정 파탄 날 것은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냥 지는 몸 팔고 돈만 챙기면 돼요. 박유천이든, 김기훈이든, 누구 걸리기만 걸려라. 그래야 백퍼센트 돈만 빼내면 되니까. 깡패 데려와 가지고. 돈 없으면 고소하면 되고. 돈 안줘서 문제지.
그런데 그 창기와 세리가 천국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강도가, 예수님께서 살인강도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뭐했다고? 사람 죽일 때 살살 찔러 죽여서 그런 거예요? 칼도 이렇게 회칼 안 쓰고 부엌칼 안 쓰고 그냥 도루코칼 써서, 그래도 양심 있는 강도라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은 줄 알아요? “저는 죄인입니다. 내가 강도 안하고 바르게 살아도 죄인. 주님 앞에서는, 보내신 자 앞에서는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마음에 새 언약이 박혀서 그런 마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미 새 언약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취지가 니 마음속에 그렇게 도달이 되어 있으니까, 박혀 있으니까, 빼도 박도 못해요. 이게 하나의 칩처럼 박혀 있어가지고 자기가 못 빼요. 째깍째깍 시한폭탄처럼 가고 있으니까. 그게 박혀 있으니까 나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누구에게만 죄인이다? 누구한테만 범죄 했다? 주께만. 주께만 범죄 했다. 정말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때는, 인간적으로 볼 때는 염치없고 치사한 인간이죠. 왜 주께만 범죄 했습니까? 가정을 파탄 내놓고, 우리야 장군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의해서, 살인 안 한 것처럼 해서 밀어붙여가지고 제일 앞에 서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거기에 덤비게 해서 죽게 만들어놓고, ‘뭐 적들이 와서 죽였지 내가 뭐 했나?’ 이런 식으로 빠질 궁리를 하고. 아주 얍삽한 사람이고 비열한 인간이죠. 가정을 파탄 냈고, 그 아내마저 자기 아내로 삼았고.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주께만 범죄 했다.” 뻔뻔함의 끝을 보여줬어요. 뻔뻔함의 끝을 보여준 그 사람 지금 어디에 가있습니까? 지금 천국에 가있습니다. 누가 믿겠어요? 결국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은, 나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믿을 만 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내가 네 속에 믿음을 집어넣은 사람만, 자기 사람만 찾는 거예요. 자기 사람만 데려가겠다는 겁니다.
잠언서 11장 21절 한 번 봅시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누구누구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만 했으면 이렇게 부정적으로 느끼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구원을 언급한다는 것은 반드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어떤 인간이라는 것 까지 같이 병행해서 이야기해줘요.
이 말은 천국만 달랑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지옥도 겸해서 이야기합니다. 지옥도 겸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지옥은 지가 구경하고 싶다고,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아무리 나쁜 짓해도 지옥은 못 갑니다. 지옥은 주께서 보내줘야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것은 천국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착해도 천국 못 가요. 보내줘야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유가 뭐냐, 어차피 이 세상이 지옥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의 지배를 받는, 어차피 지옥이기 때문에 전부 다 각기 자기자랑 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자기 믿음, 자기 소망, 자기 사랑, 막 끄집어내어 경쟁하는 것. 지 잘난체하는 것. 이것 외에는 인간이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어요. 그 외에는 없고 그거만 해요. 그 재주만 해요. 나는 니보다 믿음 좋고, 니보다 기도 많이 했고, 헌금 많이 했고,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뭘 해도 죄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 와야 나올 수 있는 고백이지.
아까 했던 것 다 잊어버렸죠? 다시 해보면 자, □는 아니요, 오직 예수님만. 이게 천국이고, 이걸 지금부터 실습한다고 했죠? 반복해야 되죠. □라고 할 적에, 이 앞에 이거는 아니요, 라고 했잖아요. 아니요. 그럼 □안에 뭐가 들어가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기대한 것, 내가 소망한 것, 내가 바라는 것은, 전부 다 “아니요”입니다. 왜? 나 자체가 죄인인 것을 본인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천국 안 가면 누가 천국 가? 이게 인간의 타고난 거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실습을 한 적이 있어요. 하루 종일 알바를 했는데 오 만원을 줬어요. 굉장히 감사했어요. 똑같은 일을 시킬 때 본인에게만 오 만원 줬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육 만원을 줬습니다. 감사가 안돼요. 왜 그럴까요? 일 더 한 것도 아닌데, 똑같이 오 만원을 줬는데, 비교가 되죠. 그걸 통해서 아는 것은 인간이라는 주체는, 자아는 홀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과 더불어 상호작용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인간의 자아성은 달라진다,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은 본인이 누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경이 바뀌면 자기 자신이 다른 인간으로 돌변해버린다는 겁니다. 돌변해버려요. 그동안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알았다고 했던 그 모든 것이 다 헛방이에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군 비유죠. 10시, 12시, 3시, 5시에 왔을 때, 일부러 주인께서는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약속한 것을 주니까 누가 감사했습니까? 제일 마지막에 온, 할 것도 없었던 사람이 제일 감사하고. 누가 툭툭거렸습니까? 제일 먼저 온 사람이. 하지만 주인이 약속은 처음부터 딱 하나였어요. 한 데나리온 딱 하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만 구원한다는 이 약속에 대해서 누가 툭툭거려요? 툭툭거리는 사람 가지고 못하지만, 누가 제일 감사하겠어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으면 내 행함을 일체 거부하시고, 헌금이고, 전도고, 다 거부하시고 오직 십자가만 구원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감사하고, 그 사람만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먼저 된 자가 그만큼 일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 듣고 어떤 뺀질이는요, 실컷 놀다가 죽을 때 되어서 천국 가겠다는데, 그런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인간이 마음대로 살지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마음대로 살게 되면 누가 괴롭게 되느냐 하면 본인이 괴롭게 되어 있어요. 그냥 편안대로 살아야지 나쁜 짓도 억지가 되면 나쁜 짓도 괴로워요. 더러워서 나쁜 짓도 못하겠다. 착한 일로 돌아서게 돼있어요.
잠언서 11장 21절에 보면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이걸 왜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과 관련이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삽니다. 살고 난 뒤에 유대인들의 반응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11장을 보세요. 반응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걱정하는 거예요.
나사로가 살아난 뒤에 이러다가 많은 사람이 저 예수 편으로 가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맞죠? 47절에.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절,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앞에 45절에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떻게 반가운 일입니까? 아니면 올무에요? 올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만 미운 것이 아니에요. 누구도 미워요? 예수를 믿는 자도 같이 미움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해서, 그 예수님과 예수 믿는 관계를 주변에서 도와줘요. 복음으로 인하여 십자가만으로 끝났다는 것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당했던 미움을 그들도 똑같이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라? 나한테 한 것이라.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죽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여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십자가만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도 지금 일하고 있고, 눈에 안 보이지만 분명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예수님 보고 싶어요. 키가 몇 센티 되고, 인물은 훤하게 생겼는지, 그렇게 자꾸 기도하게 되면 화가들이 구라로 그린 그림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가지고, 그게 가짜거든요. 아까 유튜브 동영상을 하면서 실체와 표상이라고 했죠. 상징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알고 복음 아는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저 주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이미 다 이루었습니다.” 라는 것으로 고백할 때, 그것이 지금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능력입니다.
보내신 자, 그렇게 설명했고요. 자, 그 다음에 43절 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라고 되어 있죠. 이거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예수님께서 누굴 부르느냐 하면, 여기에 무덤이 있고 돌은 치워져 있고, 여기에 베로 꽁꽁 묶여 있는 나사로가 있죠.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불렀습니다. 만약에 나사로가 이 명령을 듣고 좀 짜증나고 귀찮아서 “싫어요.”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싫어요.” 하면 안 되잖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러내시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불러내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성도의 매일의 삶은 나사로를 부르듯이 주께서 일구어내신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거해라! 저거해라!”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걱정, 근심이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평소에도 주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미리 미래를 앞당겨서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뭐 자식이 어떠니, 남편이 어떠니, 아내가 어떠니, 사업이 어떠니, 이걸 이렇게 해버리면 그거는 사람이 쪼그라듭니다. 이거 잘해서 영광 돌려야지. 이거 잘해서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 있는 현장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딱 맞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적합한 것을 주신 거예요. “너는 딱 그렇게 살아야 돼! 너는 그렇게 살아야 돼!” 우리교회에 아픈 분들이 좀 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아파야 돼요. 아파야 된다고 해서 좀 미안하지만. 그렇게 아파야 돼요. 아플 때, 최적의 상황이에요. 그게 나사로를 죽였다가 빼어내는 귀찮은 일을 하잖아요. 결국 나사로가 어떻게 됩니까? 또 죽죠.
근데 나사로가 죽고 어떻게 살든 간에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임시무대, 임시거든요. 임시 땜빵이에요.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임시적이지. 이게 그냥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임시적인 연출된 무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죽게 되면 ‘연극이 끝난 뒤에’, 모든 연극이 끝나버렸어요. 모든 연출이 끝났어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나오죠.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야지. 염려, 걱정을 사서 할 이유는 없다. 그러면 염려,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다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염려, 걱정을 하게 한 것조차도, 나중에는 그 염려, 걱정 한 것도 후회스럽게 되는 그런 조로해서, 주님과 관계를 다시 당당한 관계로 되돌리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임시적인 연출이었고 하나의 드라마였고, 하나의 연극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공 되시는 거기에 하나의 증명하는, 증거인으로서 하나의 역할들을 갖고 있는 겁니다. 어떤 걱정과 근심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살았고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걱정을 안 하게 되면 이 당당함도 유지가 될 거예요.
이게 몇 초 가느냐? 딱 3초가요. 3초갑니다. 과학적으로, 의식적으로, 어떤 의식은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상태는 0.3초밖에 안돼요. 0.3초 지나면 인간은 시간을 못 느껴요. 3초 지나면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을 갖는 마지막 순간이 0.3초에요. 그걸 쉽게 저는 3초 간다고 한 겁니다. 그게 모기약 뿌릴 때는 모기가 없는 것 같지만, 뿌리면 모기가 윙윙 거리면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날 파리가 늘 들끓어요.
그런 가운데 주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뭐냐, 주님의 공생애가 그렇게 날 파리를 늘 들끓게 하는 공생애가 되가지고, 우리도 주님과 똑같은 그 길을 가다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코스요리에요. 우리가 가는 길이 이 길이라면, 예수님께서 탄생했잖아요. 그 다음에 죽죠. 그 다음에 부활이죠. 이 코스대로 우리가 가는 겁니다. 이 코스대로 가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마귀적인 것이 우리 눈에 띄게 됩니다.
우리 눈에 띈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정(正)코스대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가고 있으니까, 행함을 가지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 이러면 복 받는다고 유혹하는 사람, 이런 마귀 메시지들이 계속 느껴지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그거 가지고는 모자라고 이거까지 플러스해야 됩니다. 그래서 복 받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하는 간증집회 열어가지고 자꾸 이렇게 유혹하잖아요.
무엇은, □는 아니요가 되는데 이걸 가려버리고, 자기 소망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당한 것도 다 주께서 허락하셔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시고, 우리가 마음을 넓게 가져야지 어쩌겠어요. 예수님이 이런 세상에 다 다녀가셨구나! 하는 것을 십자가의 더욱 깊이 있게, 사랑을 더욱 깊이 있게, 아픔을 더 많이 흡수해서 느끼는 하나의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