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유튜브강의-매일 새날 1510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3. 08:06
130강-YouTube강의(매일 새날)151015-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30강, ‘매일 새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가는데, 거기에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고린도후서 5장 4절에 보면 거기에 나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 이걸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면 “생명은 미래의 것이고 죽을 것은 과거의 것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마중을 나오는 셈이 되죠. 미래의 생명이 미래에 가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일찍 마중을 나옵니다. 마중을 나와서 썩어가고 있는 시체 같은, 시신 같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게 됩니다. 

생명을 주게 되면 우리 안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우리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은 새롭게 창조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에 4장 16절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되어 있어요. 사실은 개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따지고 보면 매일같이 낙심하는 하루하루라고 보면 됩니다. 

뭔가 기대했다가, 뭔가 예측했다가, 또 안 되는, 그렇게 실망하는 하루하루가 되는데,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거기에 ‘우리’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우리’가 바로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우리’입니다. 영어로 ‘We’라고 하죠. 

근데 그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낼 수 있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날론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루를 지나면 그 하루 지난 것이 과거에 속하지 미래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속한 기억 때문에 새롭다 하는 것도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냥 발악을 하는 습관이 그대로 이어지죠. 

그래서 성도의 특징이 있다면 항상 새로운 것이 속에서 분출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새로운 것. 그러면 그것이 새로운 것인지 구닥다리 옛날 것인지 어떻게 분간하느냐, 옛날 것은 항상 어떤 일이 벌어지면 나라는 바구니에 그냥 담아버려요. 그걸 소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자식도 내 것, 은행에 있는 돈도 내 것, 교회도 내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도 내 것, 인기와 명예도 내 것으로 전부다 집어넣어버리면, 이것은 썩어가는 썩을 그릇에 담기는 내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내 것을 가지고 뭔가 미래를 개척하려고 그렇게 분투노력하죠. 그것이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참 힘들죠. 스트레스 받는 것은 기본이고요. 아무리 미래의 아름다운 것을 계획해봤자 과거에 있는 것을 이렇게 억지로 끌어당기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것에 자꾸 상상을 보태가지고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꾸는데 그것은 제가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죠. 하루 지나면 또 실망하고 하루 지나면 또 실망하죠. ‘우리 자녀가 공부를 잘해야 될 텐데...’ 잘해야 될 텐데..라는 것은 공부를 잘해야 남들한테 자랑거리가 된다는, 후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욕망의 산물입니다. 

‘내 자식은 남의 자식보다 공부를 더 뛰어나게 해야 해.’ 항상 후패적이고 과거적이죠.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애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는데, 공부해서 상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노래 불러서 상을 받았다면, 이거는 나의 과거 속에 들어있지 않은 예상 밖의, 예측이 안 되는 새로운 것이 우리한테 주어졌죠. 

그러면 그 새로운 것으로 인하여 굉장히 기쁘고 즐겁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예상 못한 낯선 것이 주어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한테 이런 통보를 하는 거예요. “너는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고 너는 하나님이 미래의 것을 담아주는, 너의 그릇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릇, 하나님의 사발, 하나님의 용기(容器)라고.” 용기(容器)라는 것은 하나의 그릇을 말하죠. 

우리는 과거에 항상 내가 예측한 것만, 예상한 것만 가득 담기면 그걸 행복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예측 못하고, 예상 못한 것이 우리한테 나타났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는구나! 하는 그것도 잘못이고요. 그게 아니고 내가 있는 그릇을 완전히 다 비우고, 이 그릇 자체가 내게 속한 그릇이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께 속한 그릇이라서 예측 못한 것이 담기게 하셨구나! 하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주시는 겁니다. 

근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애가 노래를 해서 상을 타왔습니다. 타오고 난 뒤에는 어떠냐 하면, ‘이제부터는 걔를 노래를 시켜? 연예인회사에 맡겨서 어떻게 아이돌로 만들어 봐?’ 라고 어떤 새로운, 또 내 중심의 새로운 과거를 기초로 해서 예측 가능한 미래를 또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걔가 나중에 노래 잘한다고 소문났는데 한두 달 뒤에 어떤 콘서트에 가서 일등 못하고 한 삼등 했다면 또 실망스럽죠. 자기의 기대가 어긋났으니까.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명히 처음에 애가 노래 잘 할 때, 나는 하나님의 그릇이지 내 그릇이 아니라고 분명히 자기는 자부했는데, 그것이 내 소유가 되다보니까 어느 새 그게 후패한 것으로 이미 전환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근데 애가 노래를 잘했는데 대회에 막상 나가보니까 일등 못하고 삼등 했다, 그 순간 엄마는 뭐냐 하면 낙심을 하게 되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거기에다가 아주 좋은 말을 다 붙여요.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음 있는 척을 하면서, 또 믿음 있기도 하고요. 믿음 있는 척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고 했는데, 분명히 그렇게 했으면 시간이 지나도 낙심하지 않아야 되는데, 분명히 말로는 그렇게 믿음의 경건의 모습으로 포장을 해놓고 막상 은근히 내가 기대한 것이 있었고 욕망이 노린 게 있었던 모양이죠. 

순간순간 우리가 낙담과 낙심과 절망과 실망이 반복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앞으로 내가 감사할 일만 남았다고 자부했는데, 감사는 짧고 원망은 계속 나오고. 바로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여기 16절에 나오는 “겉 사람은 후패하나” 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 후패가 일회성으로 끝난다고 오해한 겁니다. 

옛날에 한 번 후패하게 되면 이제는 날로 새롭다고 오해한 거예요. 새로운 것도 돌아서게 되면 이게 썩고 후패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깜빡 놓친 겁니다. 한 순간이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전체가 나의 것으로 돼서 후패하게 하시는 것, 그것을 우리가 주님한테 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해서 주께서 이 작업을 우리에게 실시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는 인생인 것을. 살고, 살고 살다보면 자꾸 그것이 깊이 있게 느껴지는 겁니다. ‘나 주의 것으로 삽니다.’ 라고 우겼다가 실망 당할 때, ‘아! 어느 새 후패한 속성에 의해서 내 것으로 다시 전환되었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후패했던 것으로 여겼던 그 후패를, “후패했나?” 그렇다면 그 후패한 덩어리 자체를 다시 새롭게 해주시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볼 때에, 역시 우리는 과거에 매인 존재가 아니고 미래에 주님 만날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아 (IP:180.♡.90.76)15-10-18 01:54 
131강-YouTube강의(하나님의 분노)151015-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제 131강, ‘하나님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라고 한다면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냥 교회나 크리스마스 때 굉장히 인자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 하실 때 의아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실망스럽게 분노하신다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모르는 대목이 있었나?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한 게 아니고, “너희들은 내가 모르는 일을 몰래했구나? 내가 뒤늦게 알아서 이렇게 화가 난다.”는 그런 인간적인 분노를 나타낼 때 그 하나님은 전지전능 한 분이 아니겠죠.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화를 낸다는 것은 예상 밖의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 화를 내는데, 하나님이 화를 낸다는 것은 꼭 인간에게 이런 식이에요. “나, 너희들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몰랐다?”가 성립되게 되면, 이게 하나님이 너희들이 그렇게 할 줄 몰랐다고 분노하는 경우를 생각하죠. 

그래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통틀어서 아시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그렇게 분노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펼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러나 성경을 막상 펼치게 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와 분노로 이어지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류의 역사는 분노하심으로 제공되는 역사다.” 이게 하나님의 허락하신 역사, 심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오해하기를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이렇게 또 오해를 해요. 예수님은 구원자다. “내가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서 내가 건져줄게.” 이런 뉘앙스가 굉장히 강한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시기 이전에 심판자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심판하러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하러 오실 때 그 심판이 뭐냐, 분류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게 심판입니다. 양과 염소, 그리고 두 강도 가운데서 한쪽은 오늘 밤에 낙원 가는 것과 한쪽은 버려둠을 당하는 것.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전부다 이게 심판이거든요. 

심판은 분류부터 시작해서 따로따로 관리를 따로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한쪽은 가라지가 되어서 영원한 저주를 받고 한쪽은 알곡이 되어서 천국 창고에 넣습니다. 그렇게 분류를 할 때, 하나님께서 가라지나 지옥 갈 사람을 분류할 때 웃으면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특히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가득 차 있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성경 마지막의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한마디로 말해서 ‘때려 부수기’입니다. ‘때려 부수기’ 아니면 ‘폭격하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폭격하죠. 하나님의 계시를 들추어내면서 하나님의 분노가 등장하고, 하나님의 나팔 불면서 공격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대접을 쏟음으로써 분노와 진노를 이 지상에다가 쏟아버립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받는 그 모든 대상자들이 친히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이 땅과 하늘에다가 하나님의 분노를,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는 현장으로 하나님께서는 돌변시킨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따로 마련했다는 선언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실컷 두들겨 맞아라. 하지만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세상은 따로 존재한다.” 그렇게 보시면 되죠. 그러니까 이미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아깝지 않고 조금도 미련 없이 부술 것을 철저하게 다 부숴버리는 그 작업이 요한계시록에 그렇게 쫙 이어져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되겠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이 강의 처음에 말씀드렸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착하시다, 하나님은 산타클로스 같은 성품을 가졌다, 하나님은 인자하시다,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성내시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한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분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복음을 네 자로 이야기하면 ‘기쁜 소식’이 되는 거죠. 그 기쁜 소식의 내용이 뭡니까?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기쁜 소식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들이 들었던 풍월로 이야기합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불쌍히 여기사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바로 그들이 저주받아야 될 이유입니다. 복음은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들어있습니다. 그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심판받고 죄인이라고 저주받는 그 내용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이 복음이 내용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부활을 증거 해서 구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십자가를 증거 해서 구원하시죠. 부활을 증거 하게 되면 중간과정은 결과로 인하여 나중에 그거는 흐지부지가 되어버립니다. ‘그래. 한 때 고생했지만 다 잊자.’ 이렇게 되어버리죠.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부활이 눈앞에 보이거늘” 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였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바로 온 세상 인간은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창안에 내고 인간이 고안해낸, 인간이 믿고 있는 그 신이 참된 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었다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을 왜 믿었습니까? 자기한테 마음에 드는 신을 섬기기 때문에, 자기 구미에 맞는,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나중에 좋은 데 가기 위해서 만들어 낸 신이 바로 가짜였다는 겁니다. 그 가짜 신을 앞장세워서 진짜 신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을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형벌을 주시리니” 라고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십자간 사건을 통해서 인간들이 어떤 것을 알아야 하는가, 십자가 사건 전에는 인간들이 인간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인간들이 어디에 가두어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절,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라고 되어 있어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과 2장에 연이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이 뭘 알아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그동안 인간들이 미처 몰랐던 실존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탄인 거예요. 

왜 그동안 인간들이 사탄을, 악마를 알지 못했느냐 하면 악마는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할 때 비로소 자기 정체를 마지막에 다 보여주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을 때 사탄이 임해서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 다 아시죠? 사탄은 항상 우리한테는 친구에요. 친구지만 사탄은 누구의 적이냐? 예수그리스도만 공격하는 그런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제발,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다 줄게. 돌이 떡이 되게 해달라면 떡이 되게 해줄게. 너희들이 인기를 원한다면 인기 줄게. 세상부귀영화 아낌없이 줄게.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너는 그것에 대해서는 믿지 마라.” 이것이 사탄의 한결같은 전략입니다. 그 전략이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전면적으로 전 세계에다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유포시키는 거예요. 

“십자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생명인 부활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잊어버리시고 부활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보다 부활을 앞장세워버려요. “여러분 더 살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 영원히 살고 싶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사랑이 많아서 죽어있는 여러분을 영원히 살도록 기회를 줬습니다. 여러분들이 믿기만 하면 얻습니다.” 

근데 방금 한 이 이론을 사탄이 만들어낸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고, 다른 성령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되어보겠다, 어떻게 구원받아보겠다는, 구원의 의지와 욕망마저 그게 사탄의 노림수란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은 뭐냐, 복음은 구원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거기서 제시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따로 마련해주셨다는 겁니다. 누구에게만? 주님 사랑하는 자에게만 따로, 그들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창세전부터 영생 주기로 작정을 한 사람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공로가 개입되지 않도록, 십자가로서 우리를 몽땅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게 되면 죄인에게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그 내용이 복음, 십자가 중심으로 그 안에 펼쳐져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저주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분류를 통해서, 생명을 얻지 않을 분류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저주하는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