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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예수님의 생명 1503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20. 07:31
2015-03-06 01:23:26조회 : 746         
유튜브(104강, 105강), 예수님의 생명, 아버지와 자식 150305 이름 : 이근호 (IP:119.18.8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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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80.♡.90.76)15-03-09 11:05 
104강-YouTube강의(예수님의 생명)150305-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104강, 제목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생각할 때, 우리 생명하고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같다고 본다면 어떤 잘못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살다가 언젠간 목숨이 끊어지고, 예수님은 길게 살고, 영원히 살고, 길게 가는 생명이고, 우리같이 살다 죽는 것은 생명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기간가지고, 시간가지고 그렇게 따질 수가 있는데 그거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왜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생명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게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것 같으면 주님께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 따먹는 것도 충분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는 거예요. 그만큼 오래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영생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교회 나와서 성경 보면서 우리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단순한 생각 때문에, 예수 믿고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자기 존재에 의한 지속성, 그러면 아무 탈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생각은 그게 아닙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복이에요. 우리가 아담으로 물려받은 죄, 그 죄의 목숨, 그런 목숨이라면 차라리 일찍 없어지는 것이, 그것이 우리한테는 행운이 되는 겁니다. 축복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갈아타시기를 원하거든요. 인간이 갖고 있는 이 목숨, 이런 성질의 생명, 시간 끌기, 이걸 주께서는 그 노선에서 벗어나서 다른 노선, 예수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인간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생명을 부여받는 겁니다. 그럴 때 영생이요. 그러면 성경에서 갈아타기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족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족보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족보는 조상이 있어요. 우리에게 아담이라는 조상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족보 찾겠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질’이 하나님 앞에 ‘죄’라고 규정받은, ‘저주’를 유발하는,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목숨을, 생명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뭐냐, 이미 가진 것이 아담의 저주받은 생명이기 때문에 이 생명 가지고 살려고,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저주만 우리에게 유발될 뿐입니다.

마치 그 허술한 싸리비 가지고 아무리 방을 쓸어봐야 빗자루 자체에서 나오는 싸리가 떨어져가지고 쓸면 쓸수록 청소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온 방에 싸리 쓰레기만 가득 차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쓸수록, 갈수록 저주스러운 상황만 더 짙어지고 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살수록 여러 면에서 우리는 손해입니다. 그러면 자살하면 되지 않겠느냐? 자살하면 기존에 있는 그 목숨의 질이 바뀌지 않은 채 또 다른 저주의 세계에 가기 때문에, 이거는 두 번 다시 기회는 박탈당하는 거죠.

자살해서도 안 되고, 그냥 살려고 애써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하나님의 조치에 맡겨야 되겠죠. 하나님의 조치에 맡기면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조치가 어떤 조치냐 하면 하나님의 조치는 우리를 구원해주는 조치가 아닙니다. 그거는 교회에서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잘못된 저질스러운 목숨에서 유발되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것도 사실은 폐기처분되어야 해요. “나는 죽어서 천국갈래.” 라는 그 천국이라는 개념이 쓰레기 같은 우리의 잘못된 욕망에서 나온 천국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도 폐기처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것은 우리의 목숨을 바꿔치기 하거든요. 그런데 그 바꿔치기 하는 그 선택권을 우리한테 허용하지를 않았습니다. 자, 천국갈래? 지옥갈래? 이 선택을 우리보고 하라고 한다면, 그거는 누구나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겠다고 선택을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예 우리 선택권 자체도 죄로 오염되어 있고 선택한 자체도 우리가 살려고 하는 몸부림, 저주를 유발하는 몸부림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탁월한 선택으로 우리가 탁월하게 구원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전혀 우리 노력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소용없는 제자리 뛰기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 질문은, 사실은 그거 질문하나마나 거기에 대한 답변조차도 허용될 수 없는 질문을 하게 된 거죠. 그러면 제가 바꿔치기 해야 한다는 그 이야기가, 우리가 그 바꿔치기 하는 것을 알아채면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바꿔치기 하는 그 작업은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바꿔치기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요청에 의해서 바꿔치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내 인생을 바꿔치기 하고 싶은 마음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내 인생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좋든 싫든. 못난 인생이든 잘난 인생이든. 우리는 내 인생을 끝까지 꼭 쥐고 갈려고 합니다. 따라서 내 걸 꼭 쥐고 있는 한, 우리가 선뜻 나서서 “내 인생을 바꿔치기해주세요.” 라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기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적을 받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1장에 세례요한이 갇히고 난 뒤에 예수님에 관해 궁금해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질문한 대목입니다.

질문 할 때 어떻게 질문했느냐, “예수님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한 번 들어보세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님께서는 그 답변을 하시면서 출발점이 뭐냐,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꿔치기 한다는, 우리의 목숨을 주님의 생명으로 바꿔치기 한다는, 질이 낮은 목숨을 질이 완벽한 성질의 생명으로 바꿔치기 한다는 그 출발점이 뭐냐, 바로 소경이요, 앉은뱅이요, 문둥병자요, 귀머거리요, 죽은 자요, 그리고 가난한 자입니다.

이거는 우리가 평소에 기피하고 싶은, 이 근처도 안 가고 싶은, 우리가 이런 인생 살까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그 지점을 주님은 출발지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말은 에덴동산으로 뒤돌아보지 마라는 거예요. 주께서 바꿔치기 하는 그 오실 분은 우리 예수님한테, 예수님 안에 갖춰져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 보기에 소경에 위치에 있고, 앉은뱅이의 위치에 있고, 문둥병의 위치에 있고, 귀머거리의 위치에 있고, 죽은 자의 위치에 있고, 가난한 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뜻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만 좋아하느냐 하면, 같은 문둥병자, 귀머거리, 앉은뱅이....이 땅에서 일체 어떤 소망과 자기에 대한 기대감이, 모든 것이 상실된 사람에 한해서만 자신에 대한 출발점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출발점으로 삼을 거예요. 그 사람에게 부터 비로소 바꿔치기 한다는 것은 주님의 작업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자기가 칼로 찌르지 않더라도 이미 자살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이 보이는 겁니다.

자살한 채로 교회 오세요. 이미 죽은 자로 말씀보세요. 그 사람이 바로 이미 주님에 의해서 바꿔치기 작업이 개시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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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80.♡.90.76)15-03-09 11:09 
105강-YouTube강의(아버지와 자식)150305-이 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제 105강 제목은 ‘아버지와 자식’입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이런 민족이 있답니다. 자식이 많아서 그런지, 자식이 볼 때 아버지 값을 못하면 아버지를 바꾼답니다. 자식에게 그런 권한이 있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은 걸 느꼈어요. 어떤 걸 느꼈느냐 하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착각하는데, 만약에 진짜 아버지를 안다면 아마 바꿔달라고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자식 입에서 아버지라 부를 때, 그거는 자식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시는 아버지와 일반인들이, 또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게 같을 리가 없죠. 왜냐, 같았다면 예수님 입에서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니 너희들 애비는 마귀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굉장히 수상하고 그건 잘못된 하나님 아버지일 가능성이 백퍼센트죠.

아까 아프리카 경우처럼 사라들은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자기 이득을 제쳐놓고 낳아줬으니까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러한 순수함으로 다가서지를 않아요. 내가 파악하고 내가 납득이 되는 아버지는 항상 자기 이익을 채워주고 그걸 달성해주는 좋은 분의 이미지를 가지고 거기다가 신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손에 접촉되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조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를 줍니다. 그리고 십계명 5계명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에 어느 자식이든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말에 이의를 거는 사람, 토를 다는 사람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미성년자고 아버지는 자기에게 생계를 책임지고, 돈을 벌어주고, 양식을 제공하고, 자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자기 보호자가 되기 때문에, 자기 보호자를 공경하지 말라고 해도 공경할 거예요. 공경 안 했다가는 자기가 손해 보는데요.

그렇다면 십계명의 제 5계명에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말이, 태어나게 해줘서, 먹여살려줘서, 돈벌어줘서, 보호해주니까 공경하라는, 어떤 조건하에 공경하라는 말씀일까요? 그 십계명에 담긴 내용은 이스라엘 내에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의 투입에 의해서 그 내용이 드디어 깊어집니다. 그 깊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바꾸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고 했지만 아버지라고 대우를 한 적이 없다는 그런 평가가 하나님 쪽에서 나와 버리죠.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을 되돌아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분명히 나에게 이런 혜택을 줬기 때문에 참 좋으신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것이 결코 아버지답지 않은, 내가 아버지를 제대로 모르고 오해해서 나온 아버지구나! 라는 것을 그들은 소급해서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쉬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를 그들이 오해했다면 그 잘못은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그거는 바로 인간적인 아버지와 자기 관계를, 그것을 하나님까지 아무거리낌 없이 연장시켰다는 게,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는 것과 세상에 있는 아버지가 주는 것을 동일한 내용이라고 그렇게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정말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가 살펴봐야겠죠. 십계명에서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그 십계명의 전문이 있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버지를 공경하라” 신명기에서 십계명을 재해석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아버지는 무엇을 아는 사람이냐 하면, 홍해사건을 아는 사람이에요. 아버지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충격적인 사건이 체험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버지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알되 그냥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 때의 그런 사람들을 바다 물속에 집어넣고 끄집어 낸 하나님이십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식 만드는 작업 중에 하나가 자식을 죽음에다 집어넣고 다시 끄집어내는 작업을 통해서 “자, 이제야 너와 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것을 알겠느냐?” 라는 놀라운 경험을 실제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 홍해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자식들한테는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이면서 자기에게는 체험되지 않은 이야기죠. 체험되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거는 빼버리고 지금 나에게 돈벌어주고 양식주시고 나를 예뻐해 주는 그 아버지가 고만 먼저 나타나죠. 죽었다가 살아난 그 아버지의 이미지는 날아가 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진짜 아들과 진짜 아버지 만들기 위해서는 홍해사건과 유사한 그런 새로운 사건들을 계속해서 집어넣어줄 필요를 느낀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희들은 진즉에 죽어야 한다.”는 그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주면서 고 투입된 말씀 때문에 “아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예 죽이려고 하시는구나!” 라는 죽음 사건을 밑에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으키는 일을 동반시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정리 되어야 할 것이 이겁니다. 모든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밑에 뭘 깔아야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어야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깔고 말씀을 해석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잠언서 2장에 보면, 잠언서 1장, 2장 계속 나옵니다. 4장도 마찬가지고. 또 3장도 마찬가지고. 1, 2, 3, 4장 연 이어서 계속 5, 6장 연 이어서 계속 나오는 그 첫마디가 뭐냐, “내 아들아”입니다. 1장도 내 아들아! 다윗의 아들 솔로몬. 2장 내 아들아! 3장 내 아들아! 4장 내 아들아! 5장 내 아들아! 6장 내 아들아! 자, 내 아들아! 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그냥 잘해주기만 하면 “내 아들아!” 라고 외치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아이고, 좋으신 아버지여!” 라고 먼저 나설 용의가 되어 있어요. 잘해주기만 한다면. 원하는 것 알아서 챙겨주기만 한다면.

우리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섬기는 게 그런 하나님 아닙니까? 그저 뭐든지 내 원대로 해줄 때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말래도 자진해서 공경하고 싶고 헌금하고 싶고 그런 마음을, 그런 양심적인 착한 마음을 우리가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원하는 것을 줄 때 좋은 하나님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치 않는, 기피하고 싶은, 차마 이런 일이 나에게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궁지에 몰리고 초죽음 당하는 그런 입장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명령을 지키라는 말이 비로소 죽음이라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이 되는 거예요.

다른 여유 있을 때, 풍족할 때는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 있을 때 아담이 말 들었습니까? 아담이 언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까? 자기가 죽음을 기다리면서, 부끄러운 가운데 죽음을 기다릴 때에, 죽는 순간 이전에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왔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죽고 난 뒤에 그 다음 조치입니다. 따라서 죽음이 전제되고 난 뒤에, “우리는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죽음으로 내려가야 돼.” 라고 할 때에 들려오는 주의 말씀.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으로 “내 아들아! 내 말을 들으라” 라는 말씀이 비로소 내 생명보다, 내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생각을 우리는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여,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다.” 그 생명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것은 니가 진정 아들이라면 예수님을 보낸 그 취지를 니가 받아들여라.

그리고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