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강-YouTube강의(예수님의 생명)150305-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104강, 제목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생각할 때, 우리 생명하고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같다고 본다면 어떤 잘못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살다가 언젠간 목숨이 끊어지고, 예수님은 길게 살고, 영원히 살고, 길게 가는 생명이고, 우리같이 살다 죽는 것은 생명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기간가지고, 시간가지고 그렇게 따질 수가 있는데 그거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왜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생명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게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것 같으면 주님께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 따먹는 것도 충분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는 거예요. 그만큼 오래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영생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교회 나와서 성경 보면서 우리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단순한 생각 때문에, 예수 믿고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자기 존재에 의한 지속성, 그러면 아무 탈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생각은 그게 아닙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복이에요. 우리가 아담으로 물려받은 죄, 그 죄의 목숨, 그런 목숨이라면 차라리 일찍 없어지는 것이, 그것이 우리한테는 행운이 되는 겁니다. 축복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갈아타시기를 원하거든요. 인간이 갖고 있는 이 목숨, 이런 성질의 생명, 시간 끌기, 이걸 주께서는 그 노선에서 벗어나서 다른 노선, 예수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인간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생명을 부여받는 겁니다. 그럴 때 영생이요. 그러면 성경에서 갈아타기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족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족보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족보는 조상이 있어요. 우리에게 아담이라는 조상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족보 찾겠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질’이 하나님 앞에 ‘죄’라고 규정받은, ‘저주’를 유발하는,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목숨을, 생명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뭐냐, 이미 가진 것이 아담의 저주받은 생명이기 때문에 이 생명 가지고 살려고,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저주만 우리에게 유발될 뿐입니다.
마치 그 허술한 싸리비 가지고 아무리 방을 쓸어봐야 빗자루 자체에서 나오는 싸리가 떨어져가지고 쓸면 쓸수록 청소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온 방에 싸리 쓰레기만 가득 차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쓸수록, 갈수록 저주스러운 상황만 더 짙어지고 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살수록 여러 면에서 우리는 손해입니다. 그러면 자살하면 되지 않겠느냐? 자살하면 기존에 있는 그 목숨의 질이 바뀌지 않은 채 또 다른 저주의 세계에 가기 때문에, 이거는 두 번 다시 기회는 박탈당하는 거죠.
자살해서도 안 되고, 그냥 살려고 애써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하나님의 조치에 맡겨야 되겠죠. 하나님의 조치에 맡기면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조치가 어떤 조치냐 하면 하나님의 조치는 우리를 구원해주는 조치가 아닙니다. 그거는 교회에서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잘못된 저질스러운 목숨에서 유발되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것도 사실은 폐기처분되어야 해요. “나는 죽어서 천국갈래.” 라는 그 천국이라는 개념이 쓰레기 같은 우리의 잘못된 욕망에서 나온 천국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도 폐기처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것은 우리의 목숨을 바꿔치기 하거든요. 그런데 그 바꿔치기 하는 그 선택권을 우리한테 허용하지를 않았습니다. 자, 천국갈래? 지옥갈래? 이 선택을 우리보고 하라고 한다면, 그거는 누구나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겠다고 선택을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예 우리 선택권 자체도 죄로 오염되어 있고 선택한 자체도 우리가 살려고 하는 몸부림, 저주를 유발하는 몸부림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탁월한 선택으로 우리가 탁월하게 구원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전혀 우리 노력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소용없는 제자리 뛰기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 질문은, 사실은 그거 질문하나마나 거기에 대한 답변조차도 허용될 수 없는 질문을 하게 된 거죠. 그러면 제가 바꿔치기 해야 한다는 그 이야기가, 우리가 그 바꿔치기 하는 것을 알아채면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바꿔치기 하는 그 작업은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바꿔치기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요청에 의해서 바꿔치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내 인생을 바꿔치기 하고 싶은 마음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내 인생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좋든 싫든. 못난 인생이든 잘난 인생이든. 우리는 내 인생을 끝까지 꼭 쥐고 갈려고 합니다. 따라서 내 걸 꼭 쥐고 있는 한, 우리가 선뜻 나서서 “내 인생을 바꿔치기해주세요.” 라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기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적을 받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1장에 세례요한이 갇히고 난 뒤에 예수님에 관해 궁금해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질문한 대목입니다.
질문 할 때 어떻게 질문했느냐, “예수님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한 번 들어보세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님께서는 그 답변을 하시면서 출발점이 뭐냐,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꿔치기 한다는, 우리의 목숨을 주님의 생명으로 바꿔치기 한다는, 질이 낮은 목숨을 질이 완벽한 성질의 생명으로 바꿔치기 한다는 그 출발점이 뭐냐, 바로 소경이요, 앉은뱅이요, 문둥병자요, 귀머거리요, 죽은 자요, 그리고 가난한 자입니다.
이거는 우리가 평소에 기피하고 싶은, 이 근처도 안 가고 싶은, 우리가 이런 인생 살까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그 지점을 주님은 출발지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말은 에덴동산으로 뒤돌아보지 마라는 거예요. 주께서 바꿔치기 하는 그 오실 분은 우리 예수님한테, 예수님 안에 갖춰져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 보기에 소경에 위치에 있고, 앉은뱅이의 위치에 있고, 문둥병의 위치에 있고, 귀머거리의 위치에 있고, 죽은 자의 위치에 있고, 가난한 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뜻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만 좋아하느냐 하면, 같은 문둥병자, 귀머거리, 앉은뱅이....이 땅에서 일체 어떤 소망과 자기에 대한 기대감이, 모든 것이 상실된 사람에 한해서만 자신에 대한 출발점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출발점으로 삼을 거예요. 그 사람에게 부터 비로소 바꿔치기 한다는 것은 주님의 작업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자기가 칼로 찌르지 않더라도 이미 자살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이 보이는 겁니다.
자살한 채로 교회 오세요. 이미 죽은 자로 말씀보세요. 그 사람이 바로 이미 주님에 의해서 바꿔치기 작업이 개시된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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