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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존재의 응축 1607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17. 09:58

2016-07-01 23:44:09 조회 : 244         
존재의 응축 160701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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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221.♡.126.28) 16-07-08 13:30 

20160701a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존재의 응축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40장, 하다 보니 출애굽기 마지막 시간이 됐네요.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출애굽기 전체 내용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구원받고 가야 될 곳이 어디냐?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만 했으니까 이 땅을 벗어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하는데 우리가 떠나야 될 이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도착해야 될 지점이 더 중요하거든요. 여기서 떠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겁니까? 청소년들이 아버지 간섭 받기 싫다고 이래나 저래나 집만 떠나서 독립하면 된다는 데 독립하면 그게 천국일까요?

도달해야 되고 도착해야 될 곳이 어디냐? 이게 출애굽기 마지막에 나오네요.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어요.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아서 천국 가는 내용은, 우리가 도달하는 곳에 무엇을 원하느냐로 결정되는 거예요, 도착한 곳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에요.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잖아요.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같이 빛난다 말이죠. 같이 올라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해같이 빛났습니까? 전혀 빛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영광스럽게 됐지요. 그렇다면 천국이란 곳은 천사와 같이 모두 지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영광스런 곳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요.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냥 좋다는 정도가 아니에요. 너무나 엄청난 곳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람이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한다고 하는데 장차올 영광에 비하면 이 땅에서 고생한 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우리가 이 땅에 성령을 받고 성도로 살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게 되는데 그 고난이 있다할지라도 장차올 영광에 족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국에 도착했다고 칩시다. “세상에 있을 때 고생 많아 했지.” “그래 고생 좀 했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단 말이죠. “그게 무슨 고생이에요. 이런 호강을 누리고 이런 호사를 누리는데 이렇게 영광스럽게 산다는 걸 생각한다면 땅에서 고생했다는 말을 끄집어내기 참으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뭘 잘났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놀랄만한 호강을, 혜택을 우리한테 베풀어주십니까? 헌금 좀 했다고, 교회 출석 좀 했다고 주시는 겁니까.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한데 시비 걸어서 욱하는 성질에 그 사람을 떠밀었다고 하면, 경찰에 잡혔는데 그 사람이 사형 당할까요? 사형 안 당하겠지요. 사람 죽인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사형 안 당할 것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이유는, 이 사람이 한 행동, 그 나쁜 짓과 벌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을 했는데 과도한 벌을 내리면 안 되겠지요. 그 다음에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어떤 길 가는 노인네 리어카를 오 미터 정도 밀어줬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가 젊은이 고맙네. 얼마 안 되지만 용돈으로 쓰게 하면서 270억 줬다면, 조금 더 밀면 천 억 받습니까? 이건 터무니없이 과도한 상을 받는 거죠.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약간 떠밀었는데 사형 당하는 것도 불합리하고, 리어카 약간 밀어주고 250억 받는 것도 과도한 복을 받는 거고. 두 가지 경우가 생겼다고 친다면 그 벌과 그 축복은 무엇과 관계가 없어요? 우리가 행한 것과 관계가 없겠지요. 천국은 해와 같이 빛납니다. 천국은 천사처럼 영광스럽게 됩니다, 라고 하나님이 우리한테 이야기할 때 잘못된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하면 그 영광을 얻겠습니까?”라는 그 말을 해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그 말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큰 영광을 주셨고 천국을 주신다면 우리 쪽에서 뭔가 보답을 해야 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그 자체가 주님의 영광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영광을 주는지를 본인이 지금 모르고 있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올림픽 할 때 체조경기에서 도마가 있지요. 선수가 달려서 딛는 도움 발판이 있지요. 이것 딛고 공중에서 두 바퀴 반 돌아서 착지하면 점수 괜찮게 나오지요. 도마 뛰어넘는 걸 천국 가는 것으로 봅시다. 그럼 뭘 디뎌야 천국에 도달합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가는 곳은 천국이고 천국은 너무너무 좋은 나라라고 성경에서 소개하니까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디딤돌을 생각하기 마련이란 말이죠. 그들의 주로 제시하는 디딤돌이 교회에 봉사하기, 헌금하기, 착한 일하기, 인간개조 되기,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출애굽기에서 그걸 제시합니까? 안 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천국의 영광은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해도 천국에 있는 축복과 균형 맞추는 그러한 행위에 대한 상으로 어울릴 수 있는 행동을 이 땅에서 인간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것, 하나님 영광에 이르는 디딤돌이 뭐냐? 여기 32절 봅시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한 게 있어요. “그가 또 성막과 단 사면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의 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더라”

모세가 뭘 만들었습니까? 성막을 만들었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감 잡을 거예요. 뭘 디딤돌로 해서 주님의 영광에 합류합니까? 방금 읽은 본문에 보면 디딤돌 역할 한 게 있지요. 그게 회막이지요. 회막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요. 여러분이 이해 잘했는지 다시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행할 행함은 없다고 했지요. 리어카 오 미터 밀었는데 250억 받았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비교가 안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것과 받는 복은 족히 비교가 안 돼요.

그런데 천국 가면 좋습니다. 모든 시련이 족히 비교가 안 된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내 쪽에서 뭔가 성의를 표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인간의 행함이란 말이죠. 제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베드로 이야기가 낫겠네요. 변화 산에서 주님이 영광스럽게 될 때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천국 가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하는데 해와 같이 빛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가만있지 못하고 베드로가 제시한 게 있어요.

그때 베드로가 우리가 주를 위해서 뭘 하겠다고 돼있습니까? 초막 셋을 짓겠다는 거예요. 초막 셋을 지어서 천당 간다면 주택업자, 재개발업자들 다 천당 가겠다. 베드로가 너무 좋아서 그런 이야기했겠지요. 여기가 좋사오니. 제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에요. 초막을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충분히 성의 표시할 마음이 준비돼있는 거예요. 좋아도 너무 좋으니까.

흔히 교회에서 금요일 밤이 되면 철야합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러 올 때 좋아서 기도합니까, 답답하고 컬컬해서 기도하러 옵니까? 좋아서 기도하는 게 아니고 정성을 쏟으면 답답한 문제가 뚫어 뻥, 하는 것처럼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굳게 믿고 교회 와서 커피 석 잔 마시면서 밤새도록 간구라 하는데 사실은 갈구에요. 갈구하고 매달리고 억지를 쓰는 겁니다. 평소에 하는 행실 있잖아요. 주씨~옵소서. 애가 엄마한테 젖 달라고 떼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른 됐다고 애에서 벗어나는 것 아닙니다. 엄마한테 젖 달라는 것이나 하나님한테 형편 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똑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강의한 걸 보면 그 사람이 기도하는 목적이 뭡니까?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겁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더 개기고 싶어 하죠. 더 살고 싶어서 기도란 짓을 하잖아요. “주여, 믿습니다. 빨리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 들어본 적 있습니까? 기도할 것 뭐 있습니까,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다리 밑에 자기 몸 던지면 되지 교회 와서 죽여 달라고 할 필요가 뭐 있어요. 죽여라, 죽여라 하는 것은 부부싸움 할 때나 하는 것이지 교회 와서 그렇게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교회 와서 죽여 달라는 것은 죽이라는 게 아니고 살려달라는 거예요.

제가 만약에 그 교회 목사라면, 집사님 살아서 뭐 할 겁니까? 그러면 열심히 갈구하는 집사나 권사가 하는 말이, “이 땅에서 영광을 봐야지요. 이왕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요.” 하거든요. 이 땅에 무슨 영광이요? 내가 이렇게 못나도 남보란 듯이 호강하고 죽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러거든요.

우리나라 도마 잘하는 양학선이 금메달 딸 때 달려와서 디딤돌 딛고 착지 잘하니까 금메달이잖아요. 그러면 금요철야해서 이 땅에서 호강하겠다는 것은 이 노선이 아니고 노선이 달라요. 옆으로 세요. 뜀틀도 없고 디딤돌도 없고 그냥 떼쓰는 거예요. 떼써서 이 땅에서 호강을 보겠다는 거예요. 호강을 보는지 요강을 보는지. 이건 갓바위 노선이에요. 불교 노선이고 푸닥거리 노선이라니까요. 주님이 정해준 노선으로 가야지 왜 이리로 셉니까? 시원하다. 오늘도 무사히 철야했습니다.

여러분 철야 안 해봤지요. 저는 심지어 저녁 8시부터 해서 새벽 6시에 코피 터졌습니다. 해보면 남는 게 하나 있어요. 극기 훈련에 성공한 보람이 있어요. 나도 되는구나. 밤새도록 기도가 되는구나. 처음엔 기도할 게 일 분도 안 될 것 같지요. 막상 해보면 되고요. 또 어떤 경우엔 새벽 두 씨쯤 방언 터지면 새벽 다섯 시까지 세 시간 그냥 갑니다.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방언 안 터지면 새벽 한 시에서 네 시까지 지겨워서 비몽사몽간에 자는지 기도하는지 몰라요. 처음에 열 시에 시작할 때는 기도할 제목이 다섯 시간 할 것 같아요. 자식, 남편, 일가친척, 남북통일은 물론이고 교회 어린아이부터 하면 시간 빠득할 것 같지요. 그런데 해보세요. 30분만 하면 다 해요. 나머진 할 게 없어요. 과거의 죄까지 해도.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주님이 정해준 노선이 아니란 말이죠. 노선이 아니면 이 사람들은 세상 호강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뭐는 안 됩니까? 하나님의 영광에는 못 들어간다니까요. 평생 교회 다녀도 버스 노선을 잘못 타서 엉뚱한데 내려논다니까. 내리면 지옥이라니까요. 교회 다니고 지옥 가고, 무슨 이런 낭패가 있어요. 하나님이 코스를 정해줬잖아요. 이렇게 오라고. 코스대로 가야지 정해지지도 않은 지 기분대로 뽐내고. 초막 셋, 언제 주님이 초막 셋을 받았습니까? 하늘나라 빌라 없어서 재개발 할 입장입니까. 초막 셋 받아서 베드로 구원합니까?

초막 셋을 제시할 때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너는 바칠 생각하지 말고 예수의 말만 들어라. 예수님이 가신 코스가 있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가라한 게 아니고 몸소 주께서는 길을 터놨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라. 예수님 자신이 길이 된 거예요. 우리가 싫든 좋든 관계없어요. 우리가 싫어한다고 해서 네 길로 해서 나한테 오라고 그런 여유부리지 않습니다. 무조건 예수님 그 길만이 영광이 됩니다. 그 길 외에는 안 돼요.

성경에 디모데후서에 보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야 되는데 기도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기도가 다른 게 아니고 말씀대로 한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어낸 기도가 아니고 말씀에 입각한 기도에요. 기도 자체도 말씀에 의해서 간섭받게 된다 이 말입니다. 조종당해야 돼요. 그건 아니야. 그런 기도는 소용없어, 라는 것을 말씀에 의해서 조종당해야 돼요. 급하다고 그냥 기도하면 안 되고 말씀에 지적받아야 돼요.

여기서 문제는 간단해요. 주님께서 인간들이 자기 세상 영광을 위해서 달려가는 걸 뻔히 아시면서 주께서 주신 길을 따로 했다.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회막으로 가서 주의 영광에 참여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지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주께서 회막을 통해서 디딤돌로 삼아서 천국에 오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속마음은 우리의 행함과 정성으로 천국 가려는 그 마음을 그대로 이쪽 노선을 들어가고자 합니다.

내 마음 빼고 주의 방법을 집어넣는 게 아니고 내 마음 뺄 수 있는 방법도 모르는 체, 내 마음은 그대로 유지한 체 이쪽 노선에 접어들면 이것은, ‘내 방식+주님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이게 천국이 되면 좋겠는데 천국이 안 돼요. 내 방식 자체가 없어야 되는데 내 방식+주의 방식이니까 더하기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 우리 십자가가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에요.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너라. 그러면 너희가 생명을 얻으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지금 우리의 꿍꿍이는 이 방법이에요. 그런데 이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그런 방법을 지니고 있는 이 몸 그대로 가지고 추가해서 이 방법까지 집어넣어요. 이렇게 해서 망했던 나라가 네 자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성전 만들고 회막 만들어서 망했던 민족이에요. 특히 회막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5장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갖고 전쟁 나갔다가 빼앗기지요. 언약궤 없는 성막은 엔진 없는 자동차에요. 엔진 없는 자동차? 전기 자동차인가. 이건 차가 굴러가지 않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 찐빵이겠어요. 밀가루덩어리지.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왜 들고 가야 합니까? 자꾸 어려워지지만 할 수 없어요. 어려워져도 아셔야 돼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궤를 뺏겼다고요. 디딤판이 없는데 그게 무슨 이스라엘이에요. 디딤판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임합니까. 나중에 그 언약궤는 스스로 알아서 돌아옵니다.

그러면 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들고 나가려고 했는가? 그 사람들은 공간과 장소를 구분 못해서 그래요. 공간과 장소를 우리가 보통 같이 쓰지요. 그런데 이걸 차이를 둬야 됩니다. 장소는 기본적으로 내가 있음을 중심으로 쓰는 걸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예를 들면, 달이 보인다. 이게 장소일까요, 공간일까요? 나는 달을 보고 있다. 이게 장소에요. 왜 장소냐 하면, 달 보고 있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중요한 걸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전제 조건이 있어요.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달이 내 눈에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과학적으로 안 맞는 것 같지요. 과학적으로는 너 죽어도 내가 너 대신 달 있는 것 알아. 하지만 의미라는 것은 내가 달을 보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어요. “달아, 달아. 저 달 보니까 서울 와서 고생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구나.” 이게 서울의 달이에요. 고향에서 순이는 저 달 보고 있겠지. 내가 달 보는 것은 의미 없으면 내가 달 보나 순이가 달 보나 똑같아요. 우리는 달을 볼 때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의미를 환수하면서 내가 의미를 당겨가면서 봐요.

그러니까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달이고 별이고 간에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심지어 하나님이고 예수님도 소용없다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한테 의미가 있을 때만 살 이유가 생겨요. 만약에 내 사업이 몽땅 날아갔다면 사업 자체가 자기 의미라면, 사업이 부도나면 나도 안 살고 싶어요.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어요. 나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만 나기 때문에 그런데 내 모든 걸 건 사업체가 망해버릴 경우에는 살 이유가 없는데요.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이란 일방적이라니까. 자기 위주에요. 과학은 이 사실을 밝혀내질 못합니다. 과학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가 죽어도 달은 그대로 달이다. 그러나 그건 내가 달을 보는 이유와 전혀 안 맞아요.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 과학은 이렇게 해요. 지금 눈물의 온도는 15도입니다. 그게 내가 눈물 흘린 이유가 됩니까? 나는 영화 보는 순간 어릴 때 생각나서 눈물 났는데. 고객님, 지금 흘린 눈물은 15도입니다. 그래서 15도면 울어야 되나?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성경책을 주신 것은 너는 네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미로 둘러싸여서 완전 포위됐어요. 마치 찐빵 속의 앙꼬가 밀가루한테 완전히 포위되듯이. 그래서 앙꼬 있는 찐빵과 없는 찐빵이 겉으로는 모르잖아요.

내가 달을 보게 되면 우리는 평소에 달이 거기 있으니까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사가 부도났을 때 옆에 사람이, “달을 봐.” “미쳤나 달을 왜 봐. 지금 달 보게 됐어. 그런데 신경 쓰게 돼있어?” 평소 잘도 보더니만 왜 안 봅니까? 나의 의미는 달이 주는 게 아니고 다른 데서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있음에 하나님이에요. 내가 없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우선 있고 나한테 잘해주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지요. 교회? 교회 다녀도 이익도 없는 왜 교회 다닙니까. 성과가 있어야지.

천국이 좋은데 라면 가주고 안 좋다면 안 갈 거야. 그래서 천국이 있는 거예요? 달이 예쁘면 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볼 거야. 그것 때문에 그 소리 듣고 달이 갑자기 예뻐집니까? 얼마나

 

인간은 세상을 너무 몰라요.

세상은 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보다 귀한 존재로

일방적으로 간주하면서 평생을 살고 있으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요.

아이큐가 5도 안 되는 같아.

세상에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별 하나, 나 하나. 별과 지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별이 웃겠다. 별 둘, 너 둘. 자기 연애한다고 별이 있습니까? 너, 나 사랑해? 별들에게 물어봐. 별이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가? 그게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승리할 줄 알았던 겁니다.

 

나와 결부된 공간 개념이 장소 개념이에요.

그러나 공간은 나를 둘러치고 있는 나를 수정시키는 나를 변화시키는 바깥의 외각을 공간이라 하지요.

내가 있으나 없으나 의미 있는 게 공간이고,

내가 있을 때만 의미 있는 건 장소가 되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이 모를 리가 없어요.

오늘 본문 28절 보면, “그가 또 성막 문에 장을 달고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뒤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회막과 제사 왜 드려요? 시켰으니까 했을 것 아닙니까. 방금 이 이론에 의하면, 시킨 대로 하면 하나님 영광에 도달한다고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시킨 대로 했고 회막에 영광이 임했으니까 앞뒤를 살펴볼 때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바로 오류였어요. 그게 잘못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여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듯이 오직 구원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이 구원이라 했지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한테는 어리석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만 하나님의 지혜라고 돼있지요. 복음의 비밀이고. 고린도전서 2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오직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여기 있고 하나님이 여기 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이 이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십자가 능력이 우리에게 도달돼서 구원받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 쪽에서 시작해서 우리가 예수 십자가 믿어서 천국 가는 겁니까, 아니면 십자가 능력이 와서 우리를 데려감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방향이? 같은 방향 아닙니다. 분명히 반대 방향이에요.

우리 쪽에서 시작하는 이것은 천국에 가는 십자가 능력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반드시 어리석음을 우리가 수용해줘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참 어리석은 짓을 한다, 라는 것이 수용이 되려면 처음부터 우리는 내 지혜로움을 발휘하려는 생각을 스스로 포기가 돼야 됩니다. 지혜로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평소에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내가 똑똑하고 남한테 당당해, 라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해요.

“참 나도 어리석지.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한다고 해. 난 참 바보 같아.” 이게 기쁨으로 오려면 평소에 내가 발휘하는 모든 것은,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잘나고 남한테 기죽지 않는 자격자라는 것을 과시하는 용도로 살아왔다는 이것이 죄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악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십자가 자체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가만있는데 데려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참으로 나는 어리석은 자, 맞는다고 변화되는 것을 동반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라 하는 순간 우리 내부에서 저 십자가를 믿어서 기어이 천국 가리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죠. 그것 자체를 십자가 능력이 어리석다, 그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이게 신약 고린도전서 1장, 2장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을 우리가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십자가를 그리게 되겠지요. 그러면 십자가가 가시화, 어떤 이미지를 그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믿으라고 할 때 십자가를 눈에 그리게 되고, 그 다음에 십자가를 잘 믿는 내 모습을 내가 상상하게 됩니다.

십자가 이미지를 떠오르게 되면 예수님이 고통당해 죽었던 이걸 떠오르게 된다고. 왜냐하면 시중에 그런 그림 많잖아요. 이걸 십자가로 보는 거예요. 말도 안 되지만 그걸 십자가로 본다고. 이걸 대상이라 합니다. 인간은 대상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사고할 수 없어요. “너, 누구 좋아하나?” 그러면 상상하게 돼요. 그 대상에 대해서 나한테 오려면 내가 그 대상과 관계를 누가 채우느냐 하면, 내 쪽에서 관계를 채워나가야 돼요.

그 방법이 뭐냐? ‘믿습니다’라든지, ‘사랑합니다’라든지. 그렇게 채워나가는 걸 소유라고 해요. 대표적인 것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풀이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상상한 그것을 나는 기어이 소유하고자 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대상화하고 그걸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줄여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엄마 우리 집에도 강아지 키웠으면 좋겠어.”라고 하는 것은 그 애 마음속에 강아지를 상상합니다. 그 다음에 키운다는 말은 이것이 내 소유가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이게 십자가가 되던 하나님이 되던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사고방식과 행동은 자기 영향을 자기 권세를 확장시키는 방식이 돼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기껏 해내는 것이 이런 것밖에는 할 모르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십자가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한다는 말을 이 방식 외에는 없어요. 예수님을 대상화해서 예수님마저 내 것으로 만드는 그것을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그 내용 말고 다른 내용으로 채울 길이 없어요. 이게 보통 문제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세요.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아멘. 이러면 끝난 게 아니에요. 뭘 어떻게 알고 아멘이에요. 똑같은 실수를 유대인들이 모세가 회막 만드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서 회막이 영광스럽게 됐다. 회막만 있으면 우리는 됐어. 왜?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임할 거니까. 회막이 있는데 회막 안에는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가 우리 편인 이상 우리는 어느 나라에도지지 않는다. 이게 홉니와 비느하스가 생각했던 사고방식이고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덩달아 같이 생각했던 그 생각들을 대변한 거예요.

마치 요새 같으면 십자가 앞장세우면 귀신이 물러간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건 부적입니다. 언약궤를 부적으로 사용한 거예요. 십자가를 부적으로 사용하듯이. 십자가를 이마에 들이대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물러갑니까? 지가 사탄인데. 니 이마에나 해라.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쁜 쪽으로 달라지지 않아요. 아무리 겸손해하고 자기를 낮추어봐야 자기를 낮추는 그 모습이 자꾸 연상이 되기 때문에. 낮추어진 자기의 모습을 신앙의 대상으로 경배해요. 겸손하고 착한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떠올라요. 기도하고 있으면 기도가 되는 게 아니고 기도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머릿속에 떠올라요. 자아를 삭제해야 돼요. 자아가 자기를 삭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큰 문제에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삭제할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이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 안 드리면 강의가 안 되니까. 약만 올리고. 대상이 있고 내가 있고 뭐든지 좋다는 건 소유하고자 합니다. 대상이 있다는 말은, 존재에요. 내가 있다는 것도 여기 존재한다. 존재가 다른 존재를 합치면 세력권이 확장돼요. 나, 이 정도야. 더 커지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존재를 전부 다 사건으로 만들어요. 쉽게 만들어서 회막을 만들었더니만 자동적으로 주의 영광이 임한 게 아니고 모세가 회막을 만든 것 따로, 주께서 기꺼이 영광스럽게 회막을 가득 채운 것은 따로 임해주는 거예요. 잘 만들었다고 임한 게 아니고.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천사가 만든 것과 같겠어요? 같지 않아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인간 식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받는 그것을 우리는 안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주께서는 거기에 영광이 임한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봉사해도 이런 인간 주께서 안 받을 거야, 라는 것이 계속 살아있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해버려요.

그럼 우리는 주의 영광이 임한 순간 역시 나는 죄인 맞구나가 되지요. 그게 확인되지요.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응답을 받더라. 그러면 자기는 공로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나 깍지 이렇게 끼나 저렇게 기도하나 주께서는 관계없어요. 그런 것과 관계없이 주께서 성령이 덮치는 사건이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기도하든지 상관없이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돼요. 그게 오늘 본문에 회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찾아갔지 네가 찾아오도록 유인해서 내가 찾아간 게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짓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그냥 결과에요. 이게 답이에요. 이 결과를 우리는 자꾸 원인으로 바꾸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하나님이 복 줄 것이라고 원인으로 바꾸지 마세요. 그러면 방향이 틀려서 안 돼요.

A+B=B+A, 이게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걸 수학에서 교환법칙이라 하는데 맞아요, 틀려요? 맞지요. 그런데 수학의 행렬에 들어가면 틀려요. 순서가 바뀌면 이게 틀린 게 돼요. 내가 이렇게 하면 자동적으로 주께서 은혜를 주시는 게 아니고 어떤 것을 하더라도 은혜가 되도록 조치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조치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구원이 되는 내용이 들어있지요. 그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221.♡.126.28) 16-07-08 13:31 

20160701b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존재의 응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출애굽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끝내면서 회막이 만들어질 경우에 회막에 영광이 임합니다.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회막을 만들게 하셨구나. 이건 인간의 터무니없는 착오입니다. 회막을 만들게 하신 것은 인간들이 회막을 통해서 구원받게 하려고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회막에 임함으로 말미암아 회막이란 장치 안에 구원될 수 없는 자도 구원될 수 있는 내용물이 들어있어요.

어릴 때 엄마가 잡채를 하니까 방금 학교에서 온 딸이 오해해서 공부 잘했다고 엄마가 잡채 해준다고 손을 대면 엄마가, “이건 손님 줄 거야.”라고 빼돌리잖아요. 그건 오해잖아요. 회막 만들면 구원해주겠지. 그건 오해에요. 인간은 회막을 만들던 십자가 피를 발라도 구원 안 돼요. 애초부터 인간은 구원이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십자가 피를 바르는 것도 자기 자신을 감추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자들이 메이크업하면서 희망이 뭐냐 하면, 이걸 하면 젊어지고 예뻐지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인 겁니다. 지인 중에 시어머니가 뽀샵을 해서 며느리에게 사진이 어떠냐고 하니까, 그 며느리 특징이 융통성이 없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해요. “아이고, 징그러워라.” 말하는 게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 그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대구에 테크노폴리스 행정실장이에요. 그 집 아이들을 시어머니가 다 봐주거든요. 악의는 없는데 말하는 것이 그냥 바르게 이야기해요. 징그러운 걸 징그럽다고 하지. 시어머니가 착각을 한 거죠.

뽀샵하면 젊어 보인다 하는데 회막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구원하겠지. 이게 뽀샵한 것과 똑같아요. 아이고, 징그러워라. 회막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 되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데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인간들은 보는 것만 보잖아요. 그래서 보이는 회막이란 것, 나중에는 성전 돼요. 성전, 성막, 회막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오해하기를 눈에 보이는 것을 같이 만들었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들은.

그런데 회막은 구원의 방해물입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상상하고 그 이미지로 버티기 때문에. 십자가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란 인물도 기독교 명화에서 따와서 그걸 자꾸 상상한 거예요. 주여, 믿습니다. 따가운 가시면류관 쓰시고 이마에 피 흘리는 것, 그런 걸 상상하는 거예요.

그런 상상해서 거기에 의미를 두는 것은 강신무, 내림굿, 신 내림 받은 무당집에 가 보세요. 이순신 장군, 단군도 있잖아요. 그 그림들을 보세요. 왜 무당집에 그림을 둡니까? 인위적으로 반복해서 자기 이미지를 계속 확보함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걸 통해서 이순신 장군 귀신과 억지로 내 쪽에서 교류를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 무당이 치매 걸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순신이 누고, 이런다고요. 치매 걸리면 소용없듯이 교인들이 치매 걸리면 예수가 누구고? 몰라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남의 아저씨를 어떻게 알아요. 상상한 건데. 만약에 예수님이 흑인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예수님이 만약에 머리 깎았다면 어떻게 할 건데? 인간의 모든 이미지는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체험과 경험에서 엑기스를 뽑아낸 겁니다. 이건 자기 상상을 자기가 경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면 주께서 복 줄 거야, 라고 오해를 유발시켜서 회막 자체를 하나님께서 시간 따라 파괴시킵니다. 부셔버려요. 그러면 철석같이 성전과 회막을 믿었던 이스라엘은 성전이 불타버리고 회막이 부셔지면 이건 곧 뭘 의미합니까? 본인이 최선을 다하여 정말 경건과 성의를 다하여서 오직 하나님만 집중적으로 생각했던 이미지가 다 파괴당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자기가 의지하고 믿었던 것이 파괴당함으로써 함께 파괴당하는 거죠.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왕입니다. 왕이 하는 일은 백성들을 율법으로 통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이 나라에 어떤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자기는 양도 많은데 양 한 마리밖에 없는 하인의 양을 잡아 대접했습니다. 이런 못된 인간을 임금이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다윗이 너무너무 화가 났어요. 이 나라에 그런 인간은 용서가 안 돼. 죽여 버려라. 그리고 율법으로 네 배나 갚아줘라. 나라 통치 잘하고 있지요. 어디서 이웃사랑하지 않고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얌체 짓을 해, 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 누구야, 하니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이 당신이야.

이게 구원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이미지 관리해서 나는 왕이다. 나는 가치 있다고 했는데 정작 주님은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게 주님의 구원방식이고 십자가 쪽에서 찾아오시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그렇게 통치 안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네가 임금 노릇 안 해도 상관없다. 다윗이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라고. 이게 성신이 임할 때나 알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여기 회막이 있어요. 다른 말로 성막이라 하는데 같이 봅시다. 만나는 지점이 어디냐를 보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사도 지내고 언약궤도 마련하지요. 이걸 재현 또는 구현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지내라 했습니다. 이건 하나님 법을 구현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요. 말라기에 십일조 하라고 돼있지요. 십일조 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인간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재현된 거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구현과 재현, 이것밖에 못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구현과 재현을 유도하신 거예요. 구현과 재현했다는 말은, 사람들이 뭘 믿느냐? 눈에 보이는 어떤 업적처럼 느껴지는 구현과 재현을 철석같이 믿어요. 거기다 자기 의미를 둡니다. 이 교회 피아노 분명히 누가 기증한 분이 있을 거예요. 그 피아노를 아이들이 함부로 다루면 누가 제일 가슴 아플까요? 피아노 기증한 사람이겠지요. 꽃꽂이 했는데 이번 주 꽃꽂이 엉망이라고 하면 꽃꽂이 한 사람이 제일 가슴 아플 거예요. 그게 구현이고 재현이에요.

인간은 하나님, 예수님 하지만 노리는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의롭고 성스러워질 수 있는지 자기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내가 살아야 될 이유와 목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은 거예요. 나, 이것 때문에 산다. 그래서 가정주부의 목적은 뭐냐? 그저 자슥 잘 되는 것.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잘 됐어요? 그 소리 들으면 그 동안 고생한 것 다 잊어버려요. 누구 딸인데 이렇게 예쁩니까? 이 한 마디에 그만 부모 마음은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믿지 자기 외에 어떤 누구도 믿지 않는단 말이에요. 믿음의 대상 제일순위는 자기 자신이에요. 예수, 하나님은 구색에 불과하고. 구색 알지요. 우선순위가 예수, 하나님이 아니에요. 나, 자신이라니까요. 자기밖에 몰라요. 주의 뜻은 뭐냐 하면 그걸 보다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그걸 드러내고 노출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습니까? 나만 사랑하는 장소, 회막이죠. 회막에 영광이 임했으니까 사람들이 붙들고 있단 말이죠. 이 장소가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장소가 심판을 받아야 돼요. 나한테 의미 있는 장소가 심판을 받고 그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게 아니고 바로 내가 있는 장소가 주님한테 의미 있는 주님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얻어터지고 난 뒤에 비로소 받아들이게 돼요. 자기가 부인되고 난 뒤에 내가 내 욕심만 챙기는 이것조차도 주께서 벌이시는 작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정신 차리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그것도 주님의 구원 작업에 이미 포함된 거예요. 일부로 편입돼있다 이 말이죠.

제가 자꾸 망해라, 파괴되라, 이런 말 하니까 재산 날아가고 집안 망하는 걸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죄 받아 마땅하고 파괴되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재벌 돼도 괜찮아요. 문제는 내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 제대로 주님에 의해서 그런 경우를 당한 그것이 이미 내 속에 주님의 일이 시작된 겁니다. 전에는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그 장소마저 주님께 의미 있는 공간이 된 거예요.

제가 공간이란 말을 하는 이유는, 공간은 우리가 임의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니까 지구가 생긴 거예요? 나 때문에? 안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의 평소 행동은 지구는 자기 때문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에 옮겨요. 모든 게.

전에 부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거제도 조선업체가 불황이라서 많은 사람이 실직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죠. 그런데 왜 실직하지요?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어서 실직했다는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얼마나 악한 마음을 먹었기에 하나님이 나한테 실직케 했느냐. 그렇게 연계시킨 자체가 나쁜 거예요. 왜 나쁘냐 하면, 내가 그동안 착하기 때문에 이만큼 버텼다, 라고 생각하기에 나쁜 거예요.

내가 착한 일 계속했다는 조건 하에 이만큼 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욥의 친구들 생각이에요.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직 정도가 아니에요. 욥은 귀한 자식 열 명 다 죽었습니다. 그것도 한 날에. 이건 어떤 인간, 누가 봐도 욥이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당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상황이 그러니까. 게다가 자식 죽어도 재산 있으면 되지 하는데, 자식만 죽었습니까? 재산도 다 날아갔어요. 자식 죽고 재산 날아갔지만 몸은 건강하니까 몸으로 버티지. 몸은 어떻습니까? 몸까지 아프죠.

결국 하나님께서 마귀한테 시킨 게 뭐냐 하면 인간이 무엇인지 극한까지 몰아세웁니다. 인간은 뭘 믿고 사느냐? 자식 믿다가 안 되면 돈 믿고, 그 다음 몸 건강한 것 믿고. 하여간 믿는 것은 다 따라다니면서 다 걷어치우잖아요. 천하의 욥도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했지요.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그게 구원의 노선, 구원의 디딤돌이에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유월절에 피 발라서 구원되었습니다. 피 발라서 구원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유월절 피 바르고 끝나야 돼요. 피 바르고 천국 갔더라. 그래야 돼요.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성막을 만들었기에 은혜를 받았다.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이 성막 만들고 그대로 천국 가야 돼요.

출애굽기 다음에 레위기죠. 출애굽기로 성경 안 끝났지요. 이 의미가 뭐냐 하면, 그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유월절 피 바르면 구원받고, 성막 만들었으니까 복 받을 것이고, 그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을 레위기, 민수기 가면서 다 파괴시켜버립니다. 그걸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기본적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겨주게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구원을 얻기 위해 시도하게 되면 남는 것은 존재가 남아요. 구원받은 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을 받아놓은 체 행함이 나오면 이 행함은 존재가 아니고 그 행동 하나하나가 사건이 되는데 나의 사건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일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서 주님의 일되는 게 아니고 내가 행했다고 생각한 그것이 우리가 오해라고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신 일인데 그걸 마치 내가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인다는 말은 내 존재가 수축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존재가 수축돼야 사건이 되거든요. 물 마실 때 그냥 마시면 사건이에요. 물마시고 있는데 누구야, 물 마시는 사람? 할 때 내가 물 마신 게 돼버려요. 물 마시는데 갑자기 누가 물 마시는 게? 주님이, 이렇게 안 나와요. 주님이 나로 하여금 물마시게 했다. 문장이 너무 길어. 내가 마셨다. 이렇게 해야 돼요. 너 아니고 나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주님이 물마시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물 마시는 것이 구원과 관련된 주의 일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범사에 감사하라. 네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게 신약에 나오는 그 말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아신다 치고 물어보겠습니다. 모세가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누가 만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만들게 하셨지요. 그러면 회막을 만든 이유가 뭡니까? 회막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죠. 그 뜻이 뭐였습니까? 회막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깨부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회막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잖아요. 안 되지요. 그럼 어린양 피로도 안 되지요.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일을 시키는 과정의 결과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주의 일이 될 때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구원인 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주의 일을 하게 되면 구원받지 못해요. 그러나 주의 일을 하게 되면 그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게 구원과 관련돼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에서 네가 이걸 믿느냐?

그런데 십자가 믿는 것과 평소에 모든 것을 믿는 것과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 그 관련성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상상한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능력에서 나오는 모든 일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한테 한 달 용돈 오만 원을 줘요. 아들이, “나는 용돈 주는 아빠가 너무 좋아.” 하는데 아버지가, “용돈 안 주면 아버지 아니야?” 그렇게 시비 거는 거예요. 부부싸움도 말꼬리 잡아 하잖아요. 자식 미우면 면전에서 구박하고 그래요. 그럼 아들이 용돈 뺏길 일 있어요. “아버지, 용돈 주나 안 주나 내 아버지 맞아.” 이렇게 하잖아요.

십자가 상상할 때만 십자가 능력입니까? 우리가 밥 먹고 잠자고 햇빛 비추고 오늘 같이 단비 내리고, 다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에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도 본인은 로마에 갔어요. 내가 로마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풍랑을 만나든, 강도를 만나든, 도적을 만나든, 모든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동일한 십자가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이 문제를 응용문제로 하겠습니다. 교회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배운 걸 써먹을 게요. 인간은 상대를 볼 때 대상으로 본다. 대상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가시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 이런 것도 항상 가시적인 이미지화시켜서, 대상화시켜서 내가 믿는다고 하지요. 믿는다는 것은 내 것으로 소유한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오늘 선풍기 바람 좋다. 바람이 누구한테 옵니까? 나한테 오니까 내 소유가 되니까 하는 거잖아요. 선풍기를 여러분한테 틀어놓고, 선풍기 바람 좋다, 이러는 것은 나한테 의미 없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든지 간에 모든 것이 자기한데 회수하는 전제로 하고 하는 거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의 능력은 자기 공간은 이만큼 확장됐어요. 자기가 있기 때문에 공간이라 하지 않고 장소라 하지요. 그래서 내가 죽으면 하늘도 땅도 없어요.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공간이란 말은, 내가 있든 없든 간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빈터, 그게 공간이거든요. 보통 장소라는 것은 대지의 어떤 지점을 말합니다. 어쨌든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그냥 둘러쳐 있는 것이 공간이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의미 두는 것을 장소라고 본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장소적으로 생각하지 공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장소를 파괴시켜버리면 전체가 내 공간이 아니고 주님의 공간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대상이 되면 우리가 존재가 돼요. 나란 존재, 자아란 존재. 존재가 되면 안 된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가 응축이 되고 축소가 되고. 축소가 되면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이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돼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존재가 너보다 잘났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런 뜻이란 말이죠.

어느 촌에 아줌마가 파마했는데 파마 값이 52만 원 나왔답니다. 그런 식으로 미용사가 여섯 명한테 삼백만 원이나 받아먹었어요. 머리 하나 하는데 52만 원어치 됩니까? 사기로 걸려들어요. 52만 원짜리 머리해서 그 여자 분이 그만큼 존재 가치가 높아졌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사기 당한 사건이에요. 사기란 나라는 장소에서 멋진 파마를 기대했건만 그 공간이 사기 치는 공간이었고 나는 사기 당했잖아요. 사기 당한 것은 존재라 하지 않고 사기 당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주님의 사건이지 내 존재의 성장이나 확장, 존재가 뭔가 잘 되는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러면 존재를 버리고 사건 되면 되지 않습니까? 절대로 못 돼요. 그냥 있는 존재를 주께서 사건으로 만들어주셔야 되지 우리 스스로 자기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 순 없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좀 더 깊이 있게 나가봅시다. 인간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걸 대상으로 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왔습니까, 비가시적으로 왔어요? 예수님이 그 당시에 제자들에 보였지요. 보이기 때문에 오해를 한 겁니다. 보였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겁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예수님은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물 위를 걸었으니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으니까. 이만한 재주와 능력 있으면 세상 권력 같은 것 무서울 것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맥없이 체포되어서 요지부동 사형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 회수한 의미에 예수님이 맥없이 주저앉는다는 내용이 있었겠어요?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일방적으로 본 거예요. 자기의 기대와 희망을 예수님에서 일방적으로 쏟아 붓고 다시 회수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거예요.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자체가 죄가 됩니다.

코파아메리카 결승전을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경기했지요. 칠레 선수뿐만 아니고 국민까지 지구상 축구팬 60억이 아르헨티나의 메시라는 선수를 주목한 거예요. 메시가 속한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승부차기에서 실축해서 우승 못하고 졌어요. 졌을 때 기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칠레 국민밖에 없어요.

왜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기분 나빠할까요? 전제에 뭐가 깔려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뭘 비운다 해도 은근히 음흉하게 기대한 게 있었고, 희망한 게 있었지요. 내가 먼저 태어났습니까, 지구가 먼저 있었습니까? 나는 나중에 태어났잖아요. 그렇다할지라도 이 현실은 내 소망 위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답변한 사람 아무도 못 봤습니다. 그 이유나 들어보자고 물으면 화를 내요. 화내다 안 되면 너는 안 그러냐고 해요. 비겁하게. 질문은 내가 했는데.
간단하게 나는 죄입니다, 하면 될 걸. 말만 죄인이 아니고 말한다고 죄인 취급해주는 게 아니고 늘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 무산되고 파괴돼야 될 것들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는 그런 존재가 납니다. 사건이 아니고 그런 존재가 난데 그것을 주님께서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또 예수 믿으면서 은근히 기대와 목적을, 교회 가서 예수 믿으면서 어떤 기대와 목적을 안 갖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잘되길 바라죠.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숨겨놓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회막을 만들라고 한 이유가, 그 죄를, 네 자신이 죄인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 회막을 만들고, 법궤 만들고, 언약궤 만들고, 왕 세우고 성전 만들라고 한 거예요. 결국 이스라엘은 망했잖아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같이 있었던 이유가, 네 자신을 알아. 너희들이 결코 주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들에요. 열두 제자들 전부 다.

그러면 그들이 왜 구원받았느냐? 요한복음 13장에,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고. 14장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내가 선택했다고 하면 안 돼요. 네가 나를 모른다는 거예요. 너는 나를 몰라도 나는 너를 이미 알고 있다. 이런 관계가 성도와 주님의 관계입니다. 그 외에는 아니에요. 그 외에는 전부 다 조작입니다. 지금 교회는 동호회, 친목단체, 계모임이지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는 존재가 아니에요. 교회는 사건이 연속돼야 돼요.

A집사, B집사, 두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교인이니까 친하게 지냅시다. 이게 성립돼요, 안 돼요? 인간은 누구와도 친하게 안 지내요. 인간은 이 사이에서 상대방을 볼 때 눈에 보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은 대상, 그 대상은 나의 소유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만나요. 빼먹을 있나 하고.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에요.

애가 엄마를 사랑해요. 그런 자식을 하나님을 만들지를 않았어요. 아담의 자식은 결코 누굴 사랑할 줄 몰라요. 자기 살 궁리 먼저 챙기지 남이 우선 이런 것 없어요. 이게 아담 자손들 특징입니다. 빼먹을 것 없으면 차 버리는 거예요. 저쪽도 마찬가지고요. 원활하게 서로 기 싸움이 잘 안 되니까 여기서 협상과 타협을 하는데 존 로크라는 철학자는 이걸 계약이라 했어요. 현대시민사회는 계약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 계약을 구체화한 것을 법 또는 헌법이라 합니다.

나라가 마음에 안 들어요? 이민 가면 돼요. 이민 가면 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쪽 나라 계약에 동의해야 돼요. 한국에서는 세금이 10%라면 뉴질랜드는 33%입니다. 한국 살기 싫고 뉴질랜드 가려면 소득세 33%에 동의해야 돼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도 마찬가지고. 복지가 잘 될수록 세금이 많단 말이죠. 그런 나라는 반 이상이 세금으로 나갑니다. 동의가 안 되면 이민자 되는 겁니다. 알라 신이나 믿든지.

계약을 한다는 말은, 때려죽여도 난 당신 믿을 생각 없다는 뜻이에요. 계약사회에서 가장 치밀한 계약관계가 부부관계에요. 결혼은 멋모르고 해놓고 그 다음에 살아가면서 법을 따지게 돼있어요. 특히 나중에 헤어질 때. 헤어질 때 변호사 데리고 아주 난리 납니다. 기여도가 몇 퍼센트인지 아이는 누가 키우고. 여자 쪽 아이 셋, 남자 쪽 아니 둘에 할머니까지. 방 네 개 있어야 되고. <아이가 다섯>이라는 드라마에 나오죠. 엄마가 안 된다고 말리고. 이 여자여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드라마에서 둘이 사랑해서 결혼한 것으로 보이죠. 만약에 남자 쪽에서 아이들 빼고 당신 사랑한다면 결혼하겠어요? 안 하죠. 아이는 부모 소유에요. 자식을 사랑한 게 아니고 소유한다니까요.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다하니까 얼마나 부모가 얼마나 자신한테 섭섭해 한다고. 그리고 나중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식 이길 부모 없다고 하거든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타협, 협상이라니까.

교회가 뭐냐? 교회는 바로 너와 나 사이에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십자가로 그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먼저 저 사람한테 가지 말고 십자가 앞에 자기를 세웁니다. 그럼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주변에 눈에 보이는 자들을 전부 다 이용해 먹을 죄인에 불과하다는 게 십자가에서 들통 나겠지요. 그럴 때 이용해 먹겠다는 마음이 십자가 알고 난 뒤에 달라질까요? 안 달라지지요. 안 달라지니까 교회인 거예요. 이쪽도 안 달라지요. 둘이 이미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들통 내지요.

특히 부부사이가 이래야 돼요. 부부사이가 죄인과 죄인의 만남이잖아요. 혼자 잘난 체하고 고상한 척하면 안 돼요. 서로 못난 자에요. 그런데 한쪽은 주님만 보는데 상대방이 주님을 안 보면 그럼 그 사람한테 꼼짝 못하고 이용당하죠. 한쪽은 십자가 복음을 아는데 한쪽은 안 보면 이용당하죠. 힘들어요.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를 계속 바라본다면 남편이 처음엔 이용하다가 이상하게 내가 이용하는 것을 여자가 다 아는 것 같아. 그럼 재미없어서 헤어지자고 할 겁니다. 그때 고린도전서에 보면, 복음 모르는 자가 헤어지자고 할 적에 주저 말고 헤어져줘라. 복음 아는 사람은 그런 결혼에 얽매일 필요 없다.

결국 결혼관계라든지 자식이나 모든 관계가 중간에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가시화되는 세계. 십자가의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모든 일은 다 이뤄진다. 그래서 현재 놓여있는 상황 자체가 답이에요. 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십자가의 능력에서 온 답이라고. 그런데 우린 그 답이 마음에 안 들거든요.

오늘 본문 40장 봅시다. 37절에 보면,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6절에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와 함께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과 함께 움직이고 있지요. 그럼 이게 장소가 아니고 계속해서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으로 전환되지요. 그러면 내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공간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아침에 애한테 밥 해주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간 안에서 움직이면서 우리가 얼마나 남을 이용하려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들추는 이런 모습 자체가 구원의 일이고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출애굽기는 오늘 끝났습니다. 몇 년 만입니까? 오래 걸렸는데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구원이라고 오해했지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몸만 달랑 나오면 그게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갔지요. 광야에 가니까 어김없이 불평과 원망이 나왔잖아요. 모세가 지팡이로 만나 줬지요. 만나 있으면 구원이고 물 있으면 구원인 줄 알았어요. 그건 생존자원이지 마음이 바뀐 건 아니에요. 그리고 난 뒤에 십계명 주기 전에 우상 섬겼지요. 인간의 마음 안 바뀌었지요.

이제 오늘 본문에서 회막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었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공간, 그들의 장소가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동행하시는 주님의 일의 일부로써 이스라엘은 그러한 반발, 반항과 실패와 오류가 연발로 터져 나와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오늘날 우리 모습과 동일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기 전이에요. 우리는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도대체 우리 죄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가시적인 이 세상을 통해서 토해내는 겁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의 속내, 속마음이 평생 살아가면서 그 죄를 노출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이 자신들은 몰랐던 죄까지 고백되는 그것이 신약에서 십자가의 능력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함께 있음으로써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