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6. 24) 28-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이것은 제자들의 존재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가 중요할 뿐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합류하려고 합니다. 새롭게 창조될 생각은 하지 않고 현재 존재하는 그대도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는 순간 이 세상은 예수님만 존재하게 돼요. 사람들은 잠간 있다가 사라져 버릴 자들이기에 존재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1+1=2가 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1이고, 자신도 1이어서 1+1로 천국에 이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공식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예수님=2’가 돼요. 왜냐하면 창조는 기존의 존재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하늘은 없어질 거예요. 없어질 곳에 살아봐야 결국 없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라고, 사고팔고 열심히 했지만 물에 덮이니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창조는 완성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창조가 성립되지 그 외에는 창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는 취지가 뭔가 하면, ‘예수님+나’가 아니라 인간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려요. 비어있는 자리는 하나님 아버지 자리예요. 아버지 자리를 관계를 이루면서 새로운 창조 작업을 시작하시는 겁니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달리 표현하면, ‘비켜라!’는 것입니다. ‘너희 자리를 없다. 내 자리만 있으면 되고 너희 자리는 다 나에게 양보해야 된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8:28).”라고 답했어요. 이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기존 인간의 존재에서 나왔지요. 이것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답했어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라고 나옵니다.
‘나(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라고 답했습니다. 인자(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 인자에 대해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라고 했단 말이지요. 사람들 보기에 인자는 비어있는 자리입니다. ‘주는 그리스도다.’라고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리스도의 기능을 마감함으로써 생겨나는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공식이 뭔가 하면, 인자는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하는데 필요한 장치들이지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나타날 때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모든 것이 마감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살해함으로 주가 그리스도가 되는 일에 협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베드로가 이해를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이해 못했어요.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조 때문입니다.
31절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 구조에서 제자들은 어디에 있지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구조는 장로, 제사장, 서기관들에게 눌려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어떤 구조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기존의 잘못된 구조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 구조에서 나타난 것이 뭔가 하면, ‘버림받음’입니다. 이제 해답이 나왔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평상시에 살면서 뭘 해야 됩니까? 주님을 포기하고 주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어두운 권력 속에 있는 자임을 보여주면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보다 나를 챙기는 본성을 드러내는데 그 본성이 우리의 개성이 아니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 세상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 전체를 예수님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전체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께 버림 받은 상황입니다.
버림받은 상황에서 야구 열심히 하고, 영국의 EU탈퇴 찬성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어떤 일을 해도 버림받은 것입니다. 버림받은 상황에서도 때로는 화가 나고,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절망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곡성’입니다. 영화 제목인데, ‘통곡하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버림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아, 이렇게 해서 버림받은 것이 확실하구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이나 남편에 대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 이것이 버림받은 모습이구나.’ 여기고 살면 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은, 이 죄악 된 구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 받았다는 말이 나올 때, 우리는 뭘 해도 버림받을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아는 겁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반전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탕자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가출한 적이 없는 맏이는 이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죄 안 지은 사람은 천국 못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버림받음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어요.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말은 주님의 버림받음에 동참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주님과 성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피차 그 사랑을 안고 만나게 되면 그가 형제고 자매가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양쪽 다 버림받음을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만남입니다.
제가 어떤 분과 상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그것 다 욕심입니다.”라고.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있고, 저런 일이 있는데, 이건 이렇게 해결되었으면 좋겠고, 저것은 저렇게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 다 욕심입니다.” 버림받은 자가 고민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주체와 자아를 설명했는데 어렵다는 반응이 왔습니다. 성도의 주체는 주 안에서, 주께서 주신 주체입니다. 내 이름은 없고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에요.
자아는 없어요. 몸에서 나온 것이 자아인데, 이 자아는 내용물에 따라 늘 변하는 것입니다. 자아(나)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날 그 시간에 나로 인식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없고 몸이 있는데, 우리는 몸을 몸으로 보지 않고 ‘나의 몸’ 또는 ‘나’라고 보는 거예요.
나는 없어요. 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몸이라고 우겨요. 이것은 창조 원리에서 이탈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단이 ‘너 자신을 믿고 너를 포기하지 말라.’고 유혹하지요.
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님 몸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따라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나의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개성입니다. 개성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동양화는 붓에 먹물을 찍어서 그립니다. 소나무를 그린 먹물이 조롱박을 그린 먹물보다 우수합니까? 동일한 먹물입니다.
우리의 몸이 주의 몸이잖아요. 그러면 주님만 귀하지 각 사람의 개인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나의 개성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집사님은 키가 180이 넘지요? 참 훤칠하게 보인다.”라고 하면서 부러워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키가 170이 안 되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먹물을 칠하다 보니까 그 사람은 180이 넘었고, 이쪽은 먹물을 칠하다 보니까 165가 된 거예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라고 여기니까 거기서 비교가 나오고, 경쟁이 생기고, 살인이 발생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가 비교 때문이잖아요.
마가복음 8장을 통해서 제가 ‘예수님만 귀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약에서는 장자라고 합니다. 창세기 25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4절에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현대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야곱은 바보입니다. “팥죽 줄게 내가 형하자.” “그래 좋다.” 이렇게 약속했다고 해서 동생이 형이 될 수 있습니까? 형이 배가 고프니까 동생의 제안에 동의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장자만 있어요.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는 말씀이 있어요. 여기서 ‘장자’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이 장자입니다.’를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장자만 존재하는 이것을 철회시키고 피조물의 세계도 인정하는 식으로 활동합니다.
장자가 뭔가? 전부를 다 가지는 것입니다. 그럼 장자 아닌 둘째, 셋째는 왜 있는가? 장자의 특징은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귀는 설쳐야 하고, 인간은 장자도 아니면서 아들 구실을 하고, 구원 받고자 노력하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맏아들에게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 중 누가 장자냐고 물으면 안 돼요. 하나님과 이 형제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불임 여성에게서 이들이 쌍둥이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우리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이 맏아들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제자들을 뽑아 세운 거예요. 제자들은 마지막에 다 예수님을 떠났지요. 예수님은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림받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세계가 다 죽음의 세계임을 확실히 폭로하신 겁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전부 죽은 자요,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난 증거를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안식일, 십일조, 할례 등 모든 율법은 의미가 없지요. 그런데 왜 구약에서는 이런 것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증거하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십자가만 말씀하시지 왜 율법을 거론하신 것입니까?
죽음 바깥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 생명이 있어요. 따라서 생명을 아는 자만이 죽음을 알아요. 이미 구원받은 자(성도)만이 죽음을 알아요. 그런데 성도 아닌 자는 자신이 현재 살아있고, 나중에 죽은 후에 또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살겠다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지금 살아있는 본인이 되겠지요. 그러니 이 사람은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 그 밖은 내부의 밖이기에 탈락입니다.
내부의 바깥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연장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는 세상이고 이 너머에는 천국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가짜 천국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자체가 죽음임을 알릴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그 근거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데 이 세상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면서 특별한 이름을 갖고 오셨습니다. 인자. 이 말뜻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면 예수님 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진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자’란 아들을 통해서 제대로 사람이 파악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인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특징이 있어요. 시편과 다니엘에 보면 나오는데, 죽어야 될 분이에요. 죽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늘은 모르고 인간 바깥의 하늘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새롭게 생긴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라고 함으로써 하늘나라가 이곳에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어요. ‘너희들 속에 천국이 있다.’고 하셨지요. 이 천국이 얼마나 작은지 ‘지극히 작은 권력’이에요. 겨자씨 보다 더 작아요. 구멍이 생겨나면 그 구멍은 점점 커지게 되어 있어요. 구멍이 생기는데 사람들은 이 구멍을 무시하고 자신들 바깥 셋째 하늘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가짜 천국을 생각하는 자에 의해 진짜 천국(인자, 예수님)은 대결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면 구멍이 생겨나고 이 구멍은 인간이 메울 수 없습니다. 아까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 이름 없는 남자를 거론했지요. 그 남자는 허무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갖췄으니까. 그런데 아가씨를 보는 순간 그녀와 동침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이 욕망은 자제가 안 돼요. 다른 사람이 옆에서 “결혼한 당신이 다른 여자와 동침한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고,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까지 한 아내를 배신하는 행위다.”라고 해도 말 안 듣습니다. “그 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고 우깁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가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이미 천국이 있어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겨자씨 만하지만. 아까 그 남자처럼 ‘나는 착하고 훌륭해!’ 이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십자가만 생각한다면, 내가 이 땅에서 완벽하게 살고 남에게 흠 잡힐 것 없이 정결하게 살아도 아무 소용없어요.
내 마음에 구멍이 생기면서 이 모든 것이 찢어져요. 찢어지면서 내가 버림받는 것이 마땅함을 평생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 속에 이미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이런 말을 듣고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누가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한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이미 베드로 마음속에 천국이 시작된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주께서 이미 벌여놓은 그 구멍으로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고 베드로를 큰 사도로 만들잖아요. 그 작업을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 진짜 사람으로 오셔다는 것은, 재벌 자녀가 보육원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데 누가 묻기를 “너는 누구지!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라고 하면 “나는 고아야.”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인자’라는 말은 ‘나도 고아야.’라는 말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묻잖아요. ‘남들이 나를 누구하고 하더냐?’ ‘엘리야, 선지자라고 합니다.’ 라는 말은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주님이 또 물었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의 답변이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외부에서 투입된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와 섞일 수 없는 분인데 섞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후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8:31)”을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만류하고,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어야 된다고 하시고,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잘못은, 천국 간다고 생각하고 예수님 죽으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예수님은 이것은 끊어버립니다. 이런 천국은 지상에서 베드로가 상상하는 가짜 천국이기에 그것을 끊어버립니다.
세상 구조에서 베드로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단이 베드로를 시켜 예수님의 일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일은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왜냐?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베드로의 마음이 자기는 2층 구조로 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층 구조입니다. 이 세상 구조가 전부입니다.
이런 단일 구조를 가진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거예요. 그런데 이 구조를 예수님이 ‘사단’이라고 했으니까 결국 사단은 가짜 종교지요. 가짜 종교가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사단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합니다.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서 그 남자가 자기 삶을 완벽하게 살았지만 아가씨를 만나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이 발동했고 그래도 자기 이름은 밝히지 않아요. ‘나는 너와 사귀는 것이 아니야. 내가 뭐가 아쉬워 너랑 사귀어? 그냥 네 몸을 차지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와 비슷한 남자가 사무엘하에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다말이죠. 압살롬의 형. 이복 여동생을 사랑했어요. 그 여동생을 차지하기 전에는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동생을 차지한 후에는 내쳐 버립니다.
많은 남자들이 사모하고 열망하는 여자 배우가 결혼식을 한다면 ‘여배우와 결혼하는 남자는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요. 고소영이 장동건과 결혼했어요. 고소영을 좋아했던 모든 남자들은 장동건을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장동건에게 ‘고소영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그저 그렇다.’라고 차마 솔직히 말을 못합니다.
차지하기 전까지는 사랑스럽지만 이미 차지하고 난 뒤에는 -- 생각해 보세요. 그 여자(고소영)를 차지하기 전, 자신(장동건)의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여신답고 아름답겠습니까? 그 아름다움은 고소영이 시집을 안 왔으면 그대로 유지될 텐데 괜히 시집을 와서 그 여인에 대한 환상을 그 여인이 망쳐놓았어요.
이게 남자의 마음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워할 때는 순수했는데 막상 그리움을 차지하면 실망스럽고, 과거 착각했던 내가 미워요. ‘착각한 잘못은 내게 있지만 원인 제공은 네가 했다.’ 이런 논리가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왜 이럴까요? 그것은 사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거룩한 마음, 깨끗한 양심, 정결한 삶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정의롭고 순수합니다. 주님을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제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주님을 지키겠다는 것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인간도 아니에요. 사람은 없습니다. 사단에 사로잡혀 있는 자아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아가 뭐냐? 순수함, 깨끗함, 거룩 등 좋은 것은 다 자기에서 적용시켜서 그것을 자기 의로 삼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드리죠.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았습니다. 무엇이 동생보다 못합니까? 못한 것 전혀 없어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을 뿐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개성을 탓하는 분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 죄가 덮쳐서 참지 못하고 동생을 죽입니다. 동생을 제거해서 얻어지는 효과가 뭡니까? 비교 대상이 사라져요. 그러면 자신이 뭘 해도 최고의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단입니다. 우리는 다 사단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 없애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마음을 가진 채 구원받아요. 왜? 그 속에 구멍을 내니까.
구멍을 내니까 이 자체가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중재가 필요치 않는 순수함 그 자체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 사단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중재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순수하기 때문에 분리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인자로 찾아오셨어요. 나에게 실망해야 하고, 나를 미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너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이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왜냐? 우리는 ‘내가 누구냐?’에 관심 있지 인자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강제로 개입하십니다. 구멍을 내기 위해서. 그런데 그 구멍이 천국의 구멍입니다. 십자가의 확대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 나오는 남자에게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있다면 성도에게도 똑같은 것이 있어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소식. “너는 무엇을 해도 의가 없어. 버림받았어.”라고 알려주는 인자의 음성. 이것은 우리 힘으로 억누를 수 없습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인간들은 진리를 찾고자 하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파고들어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멍을 내고 나에게는 죄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진리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구원을 받은 거예요.
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 듣고 또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한다고 별별 짓을 다하는데 어떤 일을 해도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냥 막 살면 돼요. 막 사는데 십자가로 구멍이 뚫리는 사람이 있고, 막 살다가 지옥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막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막 살면 이 말씀이 적용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적용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계신 분이 우리보다 더 센데 우리는 십자가의 위력을 애써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깨끗한 삶을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 깨끗함이 마귀의 속성이고 사람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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