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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중재된 사랑 1606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16. 07:55
2016-06-25 01:34:34조회 : 309         
중재된 사랑 160624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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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18.♡.84.244)16-06-30 21:08 
광주 강의(2016. 6. 24) 28-1

마가복음 8장 27절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이 예수님의 물음에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는 서로 교류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속한 구조와 제자들이 속한 구조가 달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은 그분이 속한 구조에서 나온 말씀이거든요. 사람들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구조적인 선입견으로 듣기에 자기식의 이해가 있을 뿐 예수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제자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제가 일방적으로 우기는 것이 아니고 3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사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베드로가 제대로 못 알아들었기에 꾸짖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말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뻔히 아시는 예수님이 왜 못 알아듣는다고 꾸짖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식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지요. 자신들은 판단력도 있고 지혜도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다고 여기지만 사실을 자신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런 상황을 아시고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 말씀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이지만 사실 베드로를 책망할 수 없어요. 왜냐? 베드로는 자신이 속한 구조를 대변해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꾸짖은 것은 베드로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속해 있는 구조를 꾸짖는데 그 구조가 ‘사단’입니다. 3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몰러가라.”고 하신 후에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속한 구조에서만 하나님의 일이 되고, 그 외에는 하나님의 일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베드로를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꾸짖고 계십니다. 그러면 다시 문제를 간추려 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는가 하는 문제, 우리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베드로만 꾸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꾸짖기 위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주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구조의 정체가 악마적인지 아닌지를 파악을 해야 되겠지요. 그 파악하는 방법이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어요. “정신 차려!”라고 하실 때 “예, 정신 차려서 주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정신 차려!”라는 꾸짖음 속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해결책이 주님 말씀 안에 이미 세트로 갖춰진 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럼 주님이 세트로 갖춰서 주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공부해야 할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때는 상대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왜냐? 피조물은 반드시 창조주를 거쳐야 연결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예수님이 맺어줘야 됩니다.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요. 형제가 사랑할 때도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주님을 거치지 않고 인간들끼리만 나누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는 슬픔으로 끝이 납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이미 슬픔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쉬움과 결핍으로 끝나요.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전유나가 부른 [너를 사랑하고도]의 가사입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처음 봤을 때 그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요.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어요. 정말 잘 지적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 자기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기 사랑에 몰두하다 보니 상대에게 맞춰주지 않아요. 상대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이것은 나의 일방적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 그대로를 간직하길 원해요.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아름다웠다면 계속 그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속에 있는 구조이고, 예수님 말씀을 이해 못하는 선입감이에요.

남녀가 서로 사귀지요. 남자들은 사귐의 결말이 결혼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결혼 전에는 여자에게 친절하고 잘합니다. 여자는 그 따뜻한 친절이 결혼 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믿고 결혼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결혼에 성공하면 목적을 달성했기에 더 이상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는 사귐이 있었지만 결혼하면 더 이상 사귐이 필요치 않다고 여깁니다. 결혼을 위해 헌신하고 투자한 것은 결혼 후에 뽑아 먹겠다는 생각으로 했기에 결혼을 하면 지시하고 명령하지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의 범위에서 못 벗어납니다. 남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와 사귀면서도 자기 사랑을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중재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인간들이 다 이렇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기에 자기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을 주님이 하십니다. 분리시키면 빈자리가 생기는데 그 빈자리에 주님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서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요. 본문(29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 거예요. 이것은 ‘너’에서 ‘너’를 떼내야 돼요. 인간은 자신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서 떼내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아요. 왜?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 좋은 것을 떼놓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어야 돼요. ‘내가 그것밖에 안 돼!’ 이렇게 되려면 베드로가 상상도 못한 뒤통수치는 이야기가 나와야겠지요? 그게 바로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입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런 과격한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에 대한 애착의 강도가 너무 심해 절대 자신에 대해 실망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제자들의 구조 자체에 복음이 없다는 것, 예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제자들은 뭘 했는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자기 사랑을 아낌없이 주님께 퍼붓는 겁니다. ‘이 정도 성의를 표했으면 주님이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으로 주님을 대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과 똑같아요. ‘이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면 주님께서 날 인정해 주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꾼 거예요. 사람들은 천국에 가도 자신이 주인공이고 본인이 대단한 존재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님만 높여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꾼 거예요.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기에 나는 너에게 다가 갈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라서야지요. 예수님이 떠나는 것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준비 없는 이별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주님을 핍박해야 됩니다. 주님을 핍박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제자들 노선에 있지 않은 거예요.

제자들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과 헤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주님에게는 핍박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 노선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게 바로 죄인이 되는 노선이죠. 제가 단언합니다. 죄 짓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후 죄를 안 지으려고 하니까 역시 천국에 못 갑니다.

예수 믿으면 본격적으로 자신이 죄 짓고 있다는 감이 와야 돼요. 죄를 지음으로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제자들이 구원 받은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을 핍박했기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왜? 그런 자가 구원되어야 천국에서 자기 가치를 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동네인지 아시겠습니까? 미워했기에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공로로 드러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조금이라도 구원받은 자의 공로가 포함되면 그 노선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베드로가 꾸중을 들었으면 우리도 마땅히 꾸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 가는 노선에 탄 거예요. “당신은 주님께 꾸중 들었습니까?” “예, 꾸중 들었어요.” 천국 노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꾸중 안 들었는데요.” 이런 사람은 천국과 다른 노선에 있는 사람입니다.

꾸중을 들어야 해요. 본인의 근본이 폭로가 될 경우에만 꾸중을 들은 것입니다. 꾸중의 계기가 뭔가? 29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너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가룟 유다는 제외하고. “제자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 주님의 구원 능력이 작동합니다. 

전유나 노래 가사를 보면 ‘너를 사랑하고도 목이 메인다.’고 합니다. 사랑이 슬픈 이유는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재되지 않으면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그냥 결혼하면 안 돼요. 주 안에서 사랑해야 됩니다. 불신자에게는 이런 말이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용만 할 뿐이지요.

출애굽기 4장을 보면 모세와 십보라 부부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했습니다. 모세의 아내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왜 하나님은 내 앞에서 남편을 죽어가게 하는가?’ 십보라는 하나님을 개입시켰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자기 백성이라도 언약에 어긋나면 제거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십보라는 알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미 소문으로 퍼졌어요. ‘내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내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그 위상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저주와 축복을 결정합니다. 그것을 십보라가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언약을 개입시켰습니다. 피 언약, 할례 언약이죠.

할례를 행치 않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해서 그 자른 부분을 (원문에 의하면) 모세에게 닿게 했어요. 이것은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는 것과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있는데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피를 가지고 모세에게 닿게 하니까 모세가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 부부 사이에는 인간적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중재가 있을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은 피 없이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스스로 죽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멀쩡한 모세를 죽이려 했어요. 시작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시작할 때 모세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고, 거기에 대해서 십보라가 아브라함 언약(할례 언약)을 생각해서 아들의 할례를 행해서 양피를 던지니까 모세가 멀쩡하게 되었지요.

죽어야 될 모세가 죽어야 될 이유를 몰랐어요. 그런데 아내의 처방전을 통해서 죽어야 될 이유가 밝혀졌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받는 이유는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구원 한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이것이 빠졌어요.

[교황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기가 찹니다. 권력의 역사이지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주님의 구원을 가시화 하겠다는 것입니다. 큰 예배당, 교회화 된 국가, 큰 권력. 이것은 주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 증거하라고 구원한 거예요.

이미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세 인생에 관여를 하신 거예요.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어요. 예수님의 중재를 통해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모세만 구원 받으면 안 되고,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 받아야 하지 않나요? 출애굽기 1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20절에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애굽 왕이 히브리인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산파는 아기를 받으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왔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우리 목숨 자체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과격하게 찾아오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완전히 괴멸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출애굽기 1장에 의하면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했지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이 바로 왕의 명령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왕이 설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목숨을 걸고 바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산파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셨지요. 제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탱하려는 세속적 상황에서 손을 놓게 되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런 환경에서 모세가 태어납니다. 여러 여인의 도움을 받아 죽지 않고 삽니다. 산파, 누나, 바로 공주의 딸, 엄마. 특히 누나는 갈대 상자에 떠내려가는 동생 모세를 따라가면서 보살피지요. 미가(6장 4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과 누나(미리암)가 동급으로 나옵니다. 세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누나가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한 후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도 했지요(출15:20-21절).

나중에는 모세를 비난하다가 문둥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백성들은 미리암을 지도자로 여겼기에 그가 문둥병에서 나을 때까지(7일간) 이스라엘 진영은 전진하지 않습니다(민 12:10-16 참조). 그를 두고 가지를 않아요. 그와 합류해서 가기를 원했어요.

성경에서 연약한 여인을 개입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도 아내가 아니면 죽었어요. 이것은 지극히 작은 권력이 큰 권력에 갇혀 못 나오는 우리를 건져내는 더 큰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큰 권력을 놓쳤다고 실망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그 틈새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못난 놈이구나.” 이런 소리가 나오도록 주님이 유도하십니다. 주님이 유도하심을 느끼는 자는 이미 구원 받은 자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특채 된 사람입니다.

출애굽을 언급한 것은, 제자들이 당했던 낭패가 구약 때부터 구원의 절차로,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신호로 그런 현상이 이미 일어났어요.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낭패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완벽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있는 일탈의 욕망이 올라옵니다.

일탈의 종류가 사람마다 다른데 [파리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를 보면,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데, 중년의 남자는 완벽한 자기 방어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젊은 아가씨는 정 반대입니다. 이 사람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함부로 굴려서 허무의 끝을 맛보려고 합니다.

남자는 모든 것이 완벽한데 젊은 아가씨를 만난 순간 그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 아가씨의 몸을 원해요. 그런데 아가씨는 모든 허무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나이에 허무 속에서 진리를 알았어.” 허무는 자기 파탄이에요. 의도적으로 무질서와 파탄에 몸을 던져 진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어떤 남자가 안산에서 강릉까지 걸어서 왕복을 했어요. 20대에. 2주가 걸렸답니다. 일부러 돈도 없이 걸어가는데, 가다가 배가 고프면 구걸해서 먹었답니다. 고생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도 시험해 보고 세상을 파악하겠다는 거지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수 하현우. [복면가왕]에서 9승을 한 사람입니다. 고생을 사서 하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요. 그런데 만나는 이유가 서로 달라요. 남자는 완벽한 사람인데 아가씨를 보는 순간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어찌할 수가 없어요. 감당이 안 돼요. 자기 몸에 있는 기생충은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생충이 나에게 들어와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요.

나는 완벽한 자라고 여겼는데 우연히 만난 아기씨 때문에 자기 통제가 되지 않고 보고 싶어서 미치는 거예요. 이것은 본인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아가씨는 저 남자에게 내가 몸을 바쳐서 세상에서 금기로 설정해 놓은 선을 넘어보는 거예요. 선을 넘으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선을 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묻습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라고 하면서, 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이름 없는 것과 이름 있는 것의 만남은 비극입니다. 남자가 왜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남자는 알아요. 이름을 밝히는 순간 그 여자와 동질이 됩니다.

그런데 남자는 스스로 완벽한 자입니다. 저 더러운 여자가 내 괜찮은 인생이 끼어들면 안 돼요. 그래서 이름을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은 숨긴 채 몸만 원해요. 둘의 만남은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죠. 나중에는 결국 헤어집니다. 남은 것인 빈 아파트입니다. 아파트에서 격렬하게 성관계를 할 때 남자는 여자의 몸을 탐닉하고, 여자는 금지 된 선을 넘어보는 겁니다.

남자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넘어섰다는 그 자리가 내 영역이 아니고 확대된 너의 일탈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것은 더 넓어진 허무의 영역입니다. 여자에게는 이것이 남고, 남자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는 테두리를 폭파하는 것이 바깥에 있는 여자의 유혹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있는,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내 통제에 눌리지 않고 폭발해 버린,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젊은 여인이 오는 순간 발짝을 일으키는 욕구, 욕망. 그것에 완전히 폭파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파리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안 맞는 층이 만나 같다고 착각하며 서로 어우러지는 것일 뿐입니다. 부부, 친구, 동창 등 모든 관계가 안 맞는 관계입니다. 처음 보았던 느낌 그대로 가슴에 간직하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서로 사랑하는 대상이 달랐어요.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뭡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 분리가 안 되었어요. 자기만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름이 없어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인간들과 층이 달라 인간들이 알아 챌 수 없습니다. ‘인자’는 이름이 아닙니다. ‘인자는 ~다.’라고 할 때 그 빈자리를 제자들에게 채워보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했지요.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는데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려주신 것일 뿐,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인자는 비어있고, 그 공백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채워집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기를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의 자리가 공백이라면 이 공백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공백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이 자리에 집어넣을 거예요. 집어넣으려면 이름 없는 분이 이름 있다고 우기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삭제하는 작업을 해요. 이름을 삭제한다는 것은 존재를 삭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말은, 인간들이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자에게는 아버지가 인정하는 이름도 이미 끊어진 겁니다. 인간이 이름을 거론해도 소용없어요. 아브람의 경우는 그 이름이 끊어져도 아브라함이 주어졌지요. 이삭은 원래 이름이 없고. 이삭 이름은 아브라함이 불신하는 이름이고. 야곱의 이름은 삭제하고 이스라엘이 되지요.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과 이삭,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 이런 이름을 모아놓게 되면 이 이름은 누구 이름이냐 하면 우리 이름이 아니고, 아브람과 이삭 이름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이에요. 예수의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우리의 모든 이름을 삭제함으로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중재를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중재자가 되어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만남이 성사되면 우리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주님 앞에 나서게 됩니다. 이런 최종 결과를 이미 아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10분 쉽시다.

(2016. 6. 30. 19:27 녹취 마침)

 서경수 (IP:175.♡.38.243)16-07-14 10:07 
광주 강의(2016. 6. 24) 28-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이것은 제자들의 존재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가 중요할 뿐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합류하려고 합니다. 새롭게 창조될 생각은 하지 않고 현재 존재하는 그대도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는 순간 이 세상은 예수님만 존재하게 돼요. 사람들은 잠간 있다가 사라져 버릴 자들이기에 존재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1+1=2가 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1이고, 자신도 1이어서 1+1로 천국에 이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공식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예수님=2’가 돼요. 왜냐하면 창조는 기존의 존재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하늘은 없어질 거예요. 없어질 곳에 살아봐야 결국 없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라고, 사고팔고 열심히 했지만 물에 덮이니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창조는 완성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창조가 성립되지 그 외에는 창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는 취지가 뭔가 하면, ‘예수님+나’가 아니라 인간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려요. 비어있는 자리는 하나님 아버지 자리예요. 아버지 자리를 관계를 이루면서 새로운 창조 작업을 시작하시는 겁니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달리 표현하면, ‘비켜라!’는 것입니다. ‘너희 자리를 없다. 내 자리만 있으면 되고 너희 자리는 다 나에게 양보해야 된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8:28).”라고 답했어요. 이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기존 인간의 존재에서 나왔지요. 이것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답했어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라고 나옵니다.

‘나(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라고 답했습니다. 인자(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 인자에 대해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라고 했단 말이지요. 사람들 보기에 인자는 비어있는 자리입니다. ‘주는 그리스도다.’라고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리스도의 기능을 마감함으로써 생겨나는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공식이 뭔가 하면, 인자는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하는데 필요한 장치들이지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나타날 때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모든 것이 마감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살해함으로 주가 그리스도가 되는 일에 협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베드로가 이해를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이해 못했어요.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조 때문입니다.

31절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 구조에서 제자들은 어디에 있지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구조는 장로, 제사장, 서기관들에게 눌려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어떤 구조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기존의 잘못된 구조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 구조에서 나타난 것이 뭔가 하면, ‘버림받음’입니다. 이제 해답이 나왔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평상시에 살면서 뭘 해야 됩니까? 주님을 포기하고 주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어두운 권력 속에 있는 자임을 보여주면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보다 나를 챙기는 본성을 드러내는데 그 본성이 우리의 개성이 아니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 세상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 전체를 예수님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전체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께 버림 받은 상황입니다.

버림받은 상황에서 야구 열심히 하고, 영국의 EU탈퇴 찬성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어떤 일을 해도 버림받은 것입니다. 버림받은 상황에서도 때로는 화가 나고,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절망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곡성’입니다. 영화 제목인데, ‘통곡하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버림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아, 이렇게 해서 버림받은 것이 확실하구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이나 남편에 대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 이것이 버림받은 모습이구나.’ 여기고 살면 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은, 이 죄악 된 구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 받았다는 말이 나올 때, 우리는 뭘 해도 버림받을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아는 겁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반전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탕자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가출한 적이 없는 맏이는 이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죄 안 지은 사람은 천국 못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버림받음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어요.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말은 주님의 버림받음에 동참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주님과 성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피차 그 사랑을 안고 만나게 되면 그가 형제고 자매가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양쪽 다 버림받음을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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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떤 분과 상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그것 다 욕심입니다.”라고.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있고, 저런 일이 있는데, 이건 이렇게 해결되었으면 좋겠고, 저것은 저렇게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 다 욕심입니다.” 버림받은 자가 고민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주체와 자아를 설명했는데 어렵다는 반응이 왔습니다. 성도의 주체는 주 안에서, 주께서 주신 주체입니다. 내 이름은 없고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에요.

자아는 없어요. 몸에서 나온 것이 자아인데, 이 자아는 내용물에 따라 늘 변하는 것입니다. 자아(나)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날 그 시간에 나로 인식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없고 몸이 있는데, 우리는 몸을 몸으로 보지 않고 ‘나의 몸’ 또는 ‘나’라고 보는 거예요.

나는 없어요. 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몸이라고 우겨요. 이것은 창조 원리에서 이탈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단이 ‘너 자신을 믿고 너를 포기하지 말라.’고 유혹하지요.

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님 몸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따라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나의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개성입니다. 개성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동양화는 붓에 먹물을 찍어서 그립니다. 소나무를 그린 먹물이 조롱박을 그린 먹물보다 우수합니까? 동일한 먹물입니다.

우리의 몸이 주의 몸이잖아요. 그러면 주님만 귀하지 각 사람의 개인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나의 개성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집사님은 키가 180이 넘지요? 참 훤칠하게 보인다.”라고 하면서 부러워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키가 170이 안 되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먹물을 칠하다 보니까 그 사람은 180이 넘었고, 이쪽은 먹물을 칠하다 보니까 165가 된 거예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라고 여기니까 거기서 비교가 나오고, 경쟁이 생기고, 살인이 발생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가 비교 때문이잖아요.

마가복음 8장을 통해서 제가 ‘예수님만 귀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약에서는 장자라고 합니다. 창세기 25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4절에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현대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야곱은 바보입니다. “팥죽 줄게 내가 형하자.” “그래 좋다.” 이렇게 약속했다고 해서 동생이 형이 될 수 있습니까? 형이 배가 고프니까 동생의 제안에 동의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장자만 있어요.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는 말씀이 있어요. 여기서 ‘장자’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이 장자입니다.’를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장자만 존재하는 이것을 철회시키고 피조물의 세계도 인정하는 식으로 활동합니다.

장자가 뭔가? 전부를 다 가지는 것입니다. 그럼 장자 아닌 둘째, 셋째는 왜 있는가? 장자의 특징은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귀는 설쳐야 하고, 인간은 장자도 아니면서 아들 구실을 하고, 구원 받고자 노력하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맏아들에게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 중 누가 장자냐고 물으면 안 돼요. 하나님과 이 형제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불임 여성에게서 이들이 쌍둥이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우리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이 맏아들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제자들을 뽑아 세운 거예요. 제자들은 마지막에 다 예수님을 떠났지요. 예수님은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림받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세계가 다 죽음의 세계임을 확실히 폭로하신 겁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전부 죽은 자요,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난 증거를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안식일, 십일조, 할례 등 모든 율법은 의미가 없지요. 그런데 왜 구약에서는 이런 것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증거하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십자가만 말씀하시지 왜 율법을 거론하신 것입니까?

죽음 바깥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 생명이 있어요. 따라서 생명을 아는 자만이 죽음을 알아요. 이미 구원받은 자(성도)만이 죽음을 알아요. 그런데 성도 아닌 자는 자신이 현재 살아있고, 나중에 죽은 후에 또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살겠다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지금 살아있는 본인이 되겠지요. 그러니 이 사람은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 그 밖은 내부의 밖이기에 탈락입니다.

내부의 바깥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연장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는 세상이고 이 너머에는 천국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가짜 천국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자체가 죽음임을 알릴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그 근거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데 이 세상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면서 특별한 이름을 갖고 오셨습니다. 인자. 이 말뜻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면 예수님 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진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자’란 아들을 통해서 제대로 사람이 파악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인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특징이 있어요. 시편과 다니엘에 보면 나오는데, 죽어야 될 분이에요. 죽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늘은 모르고 인간 바깥의 하늘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새롭게 생긴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라고 함으로써 하늘나라가 이곳에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어요. ‘너희들 속에 천국이 있다.’고 하셨지요. 이 천국이 얼마나 작은지 ‘지극히 작은 권력’이에요. 겨자씨 보다 더 작아요. 구멍이 생겨나면 그 구멍은 점점 커지게 되어 있어요. 구멍이 생기는데 사람들은 이 구멍을 무시하고 자신들 바깥 셋째 하늘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가짜 천국을 생각하는 자에 의해 진짜 천국(인자, 예수님)은 대결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면 구멍이 생겨나고 이 구멍은 인간이 메울 수 없습니다. 아까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 이름 없는 남자를 거론했지요. 그 남자는 허무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갖췄으니까. 그런데 아가씨를 보는 순간 그녀와 동침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이 욕망은 자제가 안 돼요. 다른 사람이 옆에서 “결혼한 당신이 다른 여자와 동침한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고,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까지 한 아내를 배신하는 행위다.”라고 해도 말 안 듣습니다. “그 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고 우깁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가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이미 천국이 있어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겨자씨 만하지만. 아까 그 남자처럼 ‘나는 착하고 훌륭해!’ 이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십자가만 생각한다면, 내가 이 땅에서 완벽하게 살고 남에게 흠 잡힐 것 없이 정결하게 살아도 아무 소용없어요.

내 마음에 구멍이 생기면서 이 모든 것이 찢어져요. 찢어지면서 내가 버림받는 것이 마땅함을 평생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 속에 이미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이런 말을 듣고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누가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한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이미 베드로 마음속에 천국이 시작된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주께서 이미 벌여놓은 그 구멍으로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고 베드로를 큰 사도로 만들잖아요. 그 작업을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 진짜 사람으로 오셔다는 것은, 재벌 자녀가 보육원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데 누가 묻기를 “너는 누구지!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라고 하면 “나는 고아야.”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인자’라는 말은 ‘나도 고아야.’라는 말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묻잖아요. ‘남들이 나를 누구하고 하더냐?’ ‘엘리야, 선지자라고 합니다.’ 라는 말은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주님이 또 물었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의 답변이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외부에서 투입된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와 섞일 수 없는 분인데 섞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후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8:31)”을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만류하고,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어야 된다고 하시고,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잘못은, 천국 간다고 생각하고 예수님 죽으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예수님은 이것은 끊어버립니다. 이런 천국은 지상에서 베드로가 상상하는 가짜 천국이기에 그것을 끊어버립니다.

세상 구조에서 베드로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단이 베드로를 시켜 예수님의 일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일은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왜냐?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베드로의 마음이 자기는 2층 구조로 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층 구조입니다. 이 세상 구조가 전부입니다.

이런 단일 구조를 가진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거예요. 그런데 이 구조를 예수님이 ‘사단’이라고 했으니까 결국 사단은 가짜 종교지요. 가짜 종교가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사단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합니다.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서 그 남자가 자기 삶을 완벽하게 살았지만 아가씨를 만나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이 발동했고 그래도 자기 이름은 밝히지 않아요. ‘나는 너와 사귀는 것이 아니야. 내가 뭐가 아쉬워 너랑 사귀어? 그냥 네 몸을 차지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와 비슷한 남자가 사무엘하에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다말이죠. 압살롬의 형. 이복 여동생을 사랑했어요. 그 여동생을 차지하기 전에는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동생을 차지한 후에는 내쳐 버립니다.

많은 남자들이 사모하고 열망하는 여자 배우가 결혼식을 한다면 ‘여배우와 결혼하는 남자는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요. 고소영이 장동건과 결혼했어요. 고소영을 좋아했던 모든 남자들은 장동건을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장동건에게 ‘고소영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그저 그렇다.’라고 차마 솔직히 말을 못합니다.

차지하기 전까지는 사랑스럽지만 이미 차지하고 난 뒤에는 -- 생각해 보세요. 그 여자(고소영)를 차지하기 전, 자신(장동건)의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여신답고 아름답겠습니까? 그 아름다움은 고소영이 시집을 안 왔으면 그대로 유지될 텐데 괜히 시집을 와서 그 여인에 대한 환상을 그 여인이 망쳐놓았어요.

이게 남자의 마음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워할 때는 순수했는데 막상 그리움을 차지하면 실망스럽고, 과거 착각했던 내가 미워요. ‘착각한 잘못은 내게 있지만 원인 제공은 네가 했다.’ 이런 논리가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왜 이럴까요? 그것은 사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거룩한 마음, 깨끗한 양심, 정결한 삶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정의롭고 순수합니다. 주님을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제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주님을 지키겠다는 것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인간도 아니에요. 사람은 없습니다. 사단에 사로잡혀 있는 자아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아가 뭐냐? 순수함, 깨끗함, 거룩 등 좋은 것은 다 자기에서 적용시켜서 그것을 자기 의로 삼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드리죠.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았습니다. 무엇이 동생보다 못합니까? 못한 것 전혀 없어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을 뿐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개성을 탓하는 분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 죄가 덮쳐서 참지 못하고 동생을 죽입니다. 동생을 제거해서 얻어지는 효과가 뭡니까? 비교 대상이 사라져요. 그러면 자신이 뭘 해도 최고의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단입니다. 우리는 다 사단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 없애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마음을 가진 채 구원받아요. 왜? 그 속에 구멍을 내니까.

구멍을 내니까 이 자체가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중재가 필요치 않는 순수함 그 자체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 사단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중재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순수하기 때문에 분리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인자로 찾아오셨어요. 나에게 실망해야 하고, 나를 미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너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이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왜냐? 우리는 ‘내가 누구냐?’에 관심 있지 인자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강제로 개입하십니다. 구멍을 내기 위해서. 그런데 그 구멍이 천국의 구멍입니다. 십자가의 확대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 나오는 남자에게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있다면 성도에게도 똑같은 것이 있어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소식. “너는 무엇을 해도 의가 없어. 버림받았어.”라고 알려주는 인자의 음성. 이것은 우리 힘으로 억누를 수 없습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인간들은 진리를 찾고자 하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파고들어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멍을 내고 나에게는 죄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진리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구원을 받은 거예요.

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 듣고 또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한다고 별별 짓을 다하는데 어떤 일을 해도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냥 막 살면 돼요. 막 사는데 십자가로 구멍이 뚫리는 사람이 있고, 막 살다가 지옥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막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막 살면 이 말씀이 적용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적용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계신 분이 우리보다 더 센데 우리는 십자가의 위력을 애써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깨끗한 삶을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 깨끗함이 마귀의 속성이고 사람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