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강-신 18장 1-5절(제사장 제도)1608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8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또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현대인들이 방금 읽었던 본문을 보게 되면 모르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기업이라는 것, 기업이라는 것은 요새는 회사를 두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기업이라는 것은 상속, 상속분이라는 그런 뜻이고, 그 다음에 여기 3절을 보면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라고 해서 응식이라고 하는 것은 몫, 권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받아 챙겨야 되겠다는 것을 가지고 응식이라고 돼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5절에 보면 “그를 택하여 내시고” 택했다는 그 말이 현대인들한테는 또 어려워요. 왜냐하면 인간은 선택을 해도 본인이 선택해서 인생을 꾸려나가지, 누가 택해놓고 거기서 몰아붙이는 식으로, 유도 당한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자존심에 어긋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 내 인생을 내가 이만큼 꾸려왔다. 그런데 누가 일방적으로 몰아세웠다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를 모독하는 것이다. 상당히 기분나빠하는 겁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도 우리 현대인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뭐냐, 제사장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권력을 많이 쥔 자가 권력이 없는 자를 지배하는 그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권력이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돈이죠.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과 더불어 일해서 소득을 나눠먹는 식으로, 그래서 양식 챙겨서 살아가는 것. 그게 사회고 세상이라 보는데.
제사장이라는 것은 제사하는 사람이잖아요. 제사하는 것은 우리 어릴 때는 일 년에, 일 년이 아니고 어떤 집은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조상 제사하는 것, 그게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조상 제사하게 되면 가정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문어라든지, 전 굽는 돈은 어디서 충당합니까? 물론 장남은 그것가지고 장사하지만. 부모 제사인데 돈 보내라 해서 알바 하는 식으로 생계에 보태겠지만, 돈 부치는 다른 아들들은 한두 번도 아니고 짜증내는 거예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사 때려치우라고 하든지. 천주교 같으면 미사에 부치라고 하든지. 교회 같으면 추도예배로 때우라고 하든지. 뭘 하든지 결국에 남는 것은 돈 적게 드는 방법이 뭘까? 를 연구하는 거죠. 돈 적게 드는 방법을.
그래서 제사한다는 이것도 영 현대인들의 취향에 안 맞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종합해서 보면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옛날 옛적에 나오는 이야기,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 이렇게 처리하고는 본 뜻이 무엇인가는 완전히 도외시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5절을 읽었습니다만,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겁니다. 중심이 있다는 겁니다. 중심 찾기입니다.
딱 이거에요. 이스라엘은 중심이 있었다. 너의 중심은 뭐냐? 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옛날에는 제사장 중심이었는데 현재 너는 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중심이 없거든요. 자기가 서 있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중심이 없나이다.” 이렇게 나오겠죠. 중심이 없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니는 육의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중심은 뭐냐 인간은 자기 몸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보통 여행가잖아요. 나이 좀 들어서 은퇴하고 나면 스스로 고생했다곤 생각해서 가족끼리 크루즈여행도 가고 또는 서유럽도 가죠. 개나 소나 다 간다는 그 서유럽. 그쪽으로 여행도 가고 이러는데, 여행을 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랑? 옛날에 어릴 적에 무조건적으로 나를 보듬어주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보호해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던 그 때 그 사랑을 찾기 위해서 여행가는 겁니다.
그 사랑을 찾으려면 나를 간섭하는 간섭쟁이로부터 먼저 나가야 되겠죠. 그래서 여행을 할 때 부부끼리 여행을 하면 하나마나입니다. 집에서 하는 잔소리 밖에 나가 더 하겠죠. 지금 사랑 찾아 나갔는데. 어릴 때 엄마가 “무조건 잘했어. 너는 착해. 오야, 오야, 시키는 대로 다 해줄게.” 그것 찾아서 여행 가는데, 끝까지 따라와서 “그거 먹으면 안 된다. 자판기 커피 먹어라. 아메리카노 먹어봤자 사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거 비싸니까 가지마라.” 가는 곳마다 아껴 라고 하면 이거는 뭐 여행인지, 집에서 하는 행세 그대로면 이거 뭐 분간이 안 되는 겁니다.
여행 간다는 것은, 첫째는 일체 모든 간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전화 오는데도 없고, 택배 왔다는 이야기도 안 들리고, 택배 왔는데 옆집에 맡기세요. 그런 것도 이제는 귀찮아.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냥, 진정한 나의 자유를 찾는데, 그 자유라는 것이 뭐냐, 내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그 사랑. 그 사랑을 찾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것까지는 알아요. 공부를 많이 하게 되면 사람들은 아, 여행이라는 것은 홀로 가는 것이고 그 사랑 찾아 간다. 그 사랑이 뭐냐 어릴 때 자기 몸을 구성한 엄마 같은 그런 사랑을 찾아 간다.
그래서 20대 후반까지 돈 벌고 아가씨들이 배낭 메고 개나 소나 간다는 서유럽가가지고 돌아다니잖아요. 혹시나 미래의 신랑감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만나면 발렌시아에 가서 오래 살고 그런 식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뭘 모르느냐 하면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요. 제가 알려드릴까요? 사랑은 몸의 컨디션입니다. 컨디션. 몸의 컨디션이에요. 간단한 겁니다. 몸의 컨디션은 첫째 간섭이 없어야 돼요. 정신적으로 압박이 없어야 되고. 몸이 18도에서 21도를 유지해줘야 됩니다. 주위 환경이 지금 되거든요. 약간 높지만 되거든요. 누군 춥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요. 그 다음에 몸이 쾌적해야 돼요. 결국은 인간은 이상적인 몸의 상태를 찾아서 여행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행을 할 때 나이지리아 찾아서 가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적도 왜 갑니까? 강도 위험한데 왜 갑니까? 리우에 왜 갑니까? 제일 살기 좋은 나라에서, 그것도 호수나 바닷가에서, 물론 조건이 있어요.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이 그냥 호수가나 바닷가에요. 거기다가 덤으로 좋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이상형인 배우자를 어디서 또 우연히 만나게 되면 아름답고 낭만이 또 이벤트 사건이 벌어져요. 그럴 때 뭐 최고죠. 최고!
그게 뭐냐 내 중심은 몸뿐이라는 것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부터 출발해야 해요. 중심은 이미 몸 중심입니다. 몸의 컨디션 중심이고 나는 신이 되고, 누구의 간섭도 받기 싫어하는 것, 이거는 평생가도 이 본능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게 저지되고 방해받는다면 그때는 왁! 하고 동물적인 본성으로 깨물어버리죠. 갑자기 욱하는 성질나오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나는 나다. 나는 나뿐이다. 건들지 마라. 나 화낸다. 이게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중심이 되어 있는데, 자 이래가지고는 하나님 나라가 안 되거든요. 그 나라가 되는 방법이 뭐냐, 이 중심을 바꿔야 돼요. 인간의 몸 중심 말고 중심을 따로 설정을 해야 됩니다. 그 설정하는 제도와 방법이 바로 블랙홀입니다. 어두움, 텅 빈 공백. 제사장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중앙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너도 들어가서도 안 되고 나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에서, 또는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의 교회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핵심이 뭐냐 하면 구약의 성전 중심으로 내려오는 원칙을 그대로 지켜서 교회를 만드는 겁니다. 그게 뭐냐, 교회 중앙에는 너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고 목사라도 끼어들면 안 되고 장로라도 끼어들면 안돼요. 거기에는 비워놓아야 해요. 텅 빈 장소에요. 아무도 없어요. 뭔가 텅 비었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없고 반드시 텅 빔을 경유해서 상대방을 관계하고 상대방과 교제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텅 빈 곳.
내가 중심이라고 해가지고 상대방과 교제를 해버리면 “니만 중심이가? 나도 중심이다.” 해가지고 둘 다 고집을 세우는 겁니다. 부부생활에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라는 말은 가정의 중심이 텅 비어 있어야 돼요. 이 가정을 세우는 분은 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내 자식도 아니다. 텅 빈 자리를 서로 이야기할 때는 그것을 경유해서 그것을 거쳐서 상대방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는데 라면 끓여 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에 내가 라면 끓여 줄게.” 이런 식으로.
반드시 아무것도 아님을 경유를 해줘야 합니다. 그게 제사장 제도에요. 그런데 이 제사장 제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어떻게 그들과 연관이 됩니까? 직접 연관되는 방법은 없고 반드신 실패를 거쳐야 돼요. 무슨 실패냐, 제사장이라는 인간들이 실패를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신명기 18장에 보면 제사장은, 제사장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를 한 거예요. ‘아,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시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뭐 세우시는데 세우지 뭐.’ 세워놓고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의 권리가 뭐냐 십일조에요. 뭐 특이하게 복잡하게 했는데 간단하게 보면 제일 맏물, 제일먼저 나온 것, 그것을 제사장에게 드려라. 이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일반사람들이 농사지어놓고 하나님에게 바칠 때 그냥 바치면 안돼요. 제사장이 중심이니까 제사장을 경유해서 드려야 해요. 그러면 제사장은 득실이 뭐냐, 없어요. 공백이에요. 뭐가 없느냐, 오늘 본문에 나오죠. 제사장은 기업도, 상속도, 분깃도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없다에요. 없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 제사장. 레위인.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십일조라는 형식으로 안 도와주면 굶어죽는 그런 집단을 중심에 세워놓는 그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조에요. 아, 지금 이거 어려운 이야기에요.
어렵기 때문에 이야기 다시 합시다.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에요. 제사장도 마찬가지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에요. 신명기 18장에 나오잖아요. “너 하나님한테 십일조 내서 나를 먹여 살리란 말이야.” 라고 주장할 때 지금 이 제사장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없음을 이야기해줘야 해요. 어떻게? 너희들이 십일조를 안 하는 그것이 무엇과 합치되어야 하느냐 하면 아무것다 없다는 그 권리와 합치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만약 제사장이라면 “여러분들은 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십일조 하세요. 할 마음 없다고요? 아! 그것이 바로 제사장 구조의 완성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목사님 생활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목사. 뭐 건성으로, 억지로 하겠지만. 속은 쓰리면서 이야기하겠죠.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망해야 진짜 교회가 나타납니다.
“당신들이 십일조를 못내는 이유가 뭐냐?” “나부터 먹고 살아야지.” “당신 몸이 뭔데?” “내 몸? 내 몸은 쾌적해야 되니까. 쾌적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니까.”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없음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놨는데, 그 교회 나오는 사람이 전부 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몸이 우선이다. 이 있음을 건드리면 나는 가만히 안 있어.’ 라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제사장,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오해를 한 거예요.
우리는 신명기 18장 그대로 합시다. 제사장 세웠습니다. 십일조 해주시기 바랍니다. 없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제사장이라는 큰 오산이었고 오해였습니다. 자, 그러면 제사장직의 원래 취지가 뭐냐,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알죠. 지구는 겉보기의 운동과는 달리, 겉으로 보면 태양이 뜨고 태양이 지지만, 과학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죠?
그러면 태양은 어디를 도느냐? 이게 은하계를 돌아요. 근데 은하계 중심에 뭐가 있느냐, 은하계 중심에는 블랙홀이 있어요. 어두움이 있고,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빙빙 돌아요. 참 신기하죠. 그러니까 지구가 돈다는 것은 사실은 태양을 돈다는 것이 아니고 태양 따라 도는 것처럼 하지만 중심에 있는 블랙홀, 어두움을 따라 돌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구한테 물어봅니다. “니 왜 도느냐?” 몰라요. 지금 과학자들도 몰라요. 왜 가만히 있지 않고 왜 뱅뱅 도는지. 아침에 설교했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무지해서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살아봐야 되겠다는 그것만 알지. 아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제사장이 뭐냐 하면 제사장은 어두움을 모시는 겁니다. 어두움을 범접하지 않고 근접하지 않고 모시는 거예요. 어두움을 모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그 어두움의 저촉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대로 합시다. 뭐 어떻게?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라고 해서 세웠다. 뭐가 나쁘냐? 뭐가 나쁘냐는 이게 언제 드러나는가? 마지막 어려운 것이니까 자 들어보세요.
제사장을 세웠던 그 시점을 성경 전체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며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 마지막 때는 마지막에 취지가 다 드러나는 때가 마지막 때에요. 그 말이냐 이 말이냐 다 똑같은 말이데. 마지막은 마지막 때가 드러나는 것을 보여줄 마지막 것을 설정하는 것이 마지막 때에요. 이 말이나 저 말이나 그 말인데. 이게 뭐냐 하면 온전한 제사장은 예수그리스도에요. 예수그리스도를 그냥 보면 안 됩니다. 마지막 제사장이에요. 그럼 앞에서 제사장을 세웠다. 그거 가짜입니다. 다 가짜에요.
왜? 마지막 때가 안 되었으니까 제사장의 취지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아요. 예수님이 마지막 때입니다. 근데 마지막 때인 제사장이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죽습니다. 근데 앞서있는 제사장은 밥 먹고 살라고 제사장 해요. “십일조 도!”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이야기를 제가 십일조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때 마태복음에서 했습니다마는, 마태복음 23장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한 번 핵심적으로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과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뭐냐 하면 십일조는 절대로 버리지 말고 하게 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십일조를 반드시 하되, 전에 유대인들은 십일조만 했는데 거기다가 의와 인과 신을 보태면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 있다, 라고 온 천하의 교회가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뭐냐, “외식하는 자여!”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에 제사장이 어떻게 제사장 직을 했는지를 모르는 이 무지한 제사장들아!” 라는 그런 뜻이에요. 마지막에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율법을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십일조를 어떻게 드렸는가를 모르는 인간들아! 예수님은 본인이 제사장으로서 본인이 십일조를 드린 거예요. 본인이 십일조입니다. 모든 택한 자를 대표해서 아버지께 십일조를 드려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부활을 통해서 십일조를 이룬 거예요.
그게 뭐냐 온전한 십일조인데, 온전한 십일조가 뭐냐, 의와 인과 신입니다. 제 말 잘 들어보세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온전한 십일조는 뭐다? 의와 인과 신이 온전한 십일조에요. 그렇다면 의와 인과 신만 있으면 더 이상 십일조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의가 돼버리면 거기다가 더 의를 보탠다고, 십분의 일을 쪼개서 드린다고 해서 의가 더 추가적으로 증가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럼 이 뜻은 뭐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이 본문이 번역이 잘못되었어요. 번역이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이것”, “저것”이 없어요. 성경 헬라어에 보면 이것, 저것의 조합이 아니고 “이것들”, “저것들”인데 앞에 있는 이것들은 의와 인과 신을 이야기하고 뒤에 있는 저것들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들을 가지고 저것들이라 한 거예요. 그리고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뭐냐, 원 뜻이 이게 용서라는 뜻에서, 그런 외식들을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24절에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려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이게 뭐냐 하면 그들이 어떤 양으로써 물질로써 십일조를 하니까 그게 탐이 난 거예요. 그래서 많이 가져온 사람은 환영하고 적게 가져온 사람은 이것도 헌금이라고? 저리가! 하고 내친 거예요. 이게 저것들이에요. 그 저것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뭐 신약의 십일조가 없다고 집사님이 그러면 제가 듣기로는 어떤 목사는 그냥 성경책을 그냥 들이대기만 하고, 지도 모르니까 아무소리 않고 성경구절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다고 알아서 기라고 하면서 성경구절만 딱 내미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집사라는 사람이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자꾸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일조 드리는 것이 ½을 행함이고, 거기다가 빡세게 의와 인과 신을 드리는 것이 ½이라고 해서 ½+½=1, 그래서 온전한 십일조. 이렇게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슨 물질에다가 마음을 더하면 온전한 것이 됩니까? 온전한 것은 의와 인과 신으로 이미 충족되었는데. 이미 충족됐는데 거기다가 십일조해보세요.
사람이 의와 인과 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십일조, 돈 냈습니다.” 여기에 마음 두기 마련이에요. 인간은. “인간은 의와 인과 신 드렸습니다.” 라고 인간은 하지를 않아요. “십자가 믿습니다.” 하지를 않습니다. “저 귀한 돈 냈습니다.” 이것을 제가 수련회 할 때 큰 떨림이 있다고 했거든요. 떨면서. “제가 이거 돈 냈습니다. 사진 찍어놓으세요.” 여기에 의미를 둔다는 자체가 저것들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걸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어떤 분이 제 강의 듣고 목사님 제 생전 그런 것 처음 듣습니다. 이게 근본문제거든요. 이것, 저것의 조합이 아니고 원 뜻이, 이것들, 그리고 저것들로 되어 있어요. 제대로 된 번역은 이것들, 저것들로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의 제사장들은 뭐냐 하면 너희가 제사하다가, 너희들의 권리, 십일조거든요. 아무 농사한 것이 없으니까 못 살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의 살 권리는 백성들이 낸 십일조인데, 백성들이 십일조를 안 낼 것이다. 근데 백성들이 십일조를 안내서 너희들이 제사장직을 하다가 굶어죽는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에 진짜배기 제사장이 보여 줄 제사장의 완성이에요. 그게. 그게 예수님이 죽으신 겁니다.
돈을 이길 위인이 누가 있습니까? 돈을 이길 수 없는 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제사장 되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의 완성은 뭐냐, 은혜의 마지막은 뭐냐, “이렇게 받았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그겁니다. 신학 중에 최고의 신학은 뭐냐, “주님 제가 죄인 맞군요.” 그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에요. “죄인 맞습니다. 주님 제사장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게 은혜 받은 거예요. 그게.
그것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어디까지? 진짜배기 제사장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카펫을 깔아서 가짜로 걸어오게 하면서 그 제사장 주변에서 많은 왜곡된 형식주의, 제도주의 이것들이 얼마나 십자가를 모독했는가를, 그 당시 제도에, 제사장 제도에 완벽을 기했던 유대인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그 십자가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살해한 유대인들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왜? 우리는 돈이 최고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시면, 여러분 누가 뭐래도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사장 제도는 예수님한테 완성됐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시킨 대로 한다고, 목사 중심으로 십일조 드리고, 생활비 드리고, 그러면 교회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자기 죄를 가리는 하나의 짓거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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