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강-신 17장 14-20절(왕의 길)1608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7장 14-20절입니다. 구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며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왕이라는 것은 숫자로 치면 여러 백성이 있더라도 딱 하나로 뭉쳐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상대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 뭐냐 하면 나중에 나는 너희들이 세운 왕을 상대하겠다는 말입니다. 왕은 여러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각자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이걸 개인구원이라고 하죠. 개인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대표자로 세웠던, 너희들의 대표자로 세운 왕과 관계에 나섬으로써 왕만 제대로 된다면 나머지기 사람들은 거저 혜택을 입는 그러한 체제를 주께서는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각자 개인이 착하게 살아서, 율법대로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율법 지키는 전문가가 내 대신 다 지켜서 단독으로 하나님께 어떤 해결을 봐서, “됐습니까?” “됐다.” 이렇게 해결을 봐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좋을까요? 내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그 분이 대신 지키고 우리는 그 분에게 종속된 백성으로서 관계에 성립되게 되면 왕에게 주어진 그 구원이 왕과 연계되어 있는 백성에게 같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는 방식,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허용을 하셔요.
처음부터 그렇게 허용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지만 숨겨놓은 그 체제가 이미 유대해서 있습니다. 왕의 의해서 해결한다. 그럼 그 체제는 처음에는 없었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있었어요. 있었는데 그 왕이 누구냐? 보이지 않죠. 이 땅에 오신 왕을 가지고 여호와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고, 그 왕으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의논되어 있는 하나님과 그 관계가 왕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 것이 더 믿음직하다는 느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어요.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인간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왕을 보니까 그 왕한테 지시받고, 그 왕한테 복종하게 되면, “짐이..” 이렇게 하면 “알겠습니다. 통촉하옵소서.” 이게 훨씬 더 관계가 밀접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왕을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인간의 왕을 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됨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거든요. 그 이유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상하다. 하나님의 왕 됨을 포기하는 것이 인간의 왕을 뽑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그런 논리가 되느냐, 그것은 바로 그 인간이 뽑았던 왕이 인간의 형제 중에 뽑게 되어 있어요. 형제 중에 뽑았다는 말은 고만고만한 인간들 중에서 뽑았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걸 뽑았다는 것은 뭐, 어떤 인간을 뽑아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근데 어설프기가 마찬가지인 사람을 뽑아놓고 사람들은 ‘뭐 뽑아놨으니까 복종하면 하나님께 복 받겠지. 우리가 뽑은 대표자가 하나님하고 직접 모든 것을 의논해서 알아서 하겠지.’ 이래 그냥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러면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임금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 인간 왕을 교체를 하겠죠. “너 아니거든. 너도 아니거든. 그래서 너는 탈락이야. 또 다른 사람 대봐. 너도 역시 아니야.” 그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바로 “모든 인간의 왕은 더 이상 인간이 뽑을 필요가 없다. 똑같은 족속들이다.” 라는 그것이 판정 날 때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어떻게 판정 나느냐, 인간이 뽑은 왕이 진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진짜 하나님이 보내주신 왕을 살해할 때, 죽일 때, 들통 날 대로 들통 난 거예요.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 다는 말은, “우리 인간 모두가 하나님 한 분을 죽였습니다.” 라는 뜻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자기까지 포함해요. “나도 옛날에 예수님이 왕인 줄 모르고,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자인 줄 모르고 함부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사.....,” 근데 긍휼히, 불쌍히 여겼다는 말을 할 때는 그 전에 나는 어떤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아울러 인정을 해줘야 돼요. 얼마나 촐랑대고 까불었는지, 그것이 충분이 되는 겁니다.
죄를 고백한다는데, 사실은 죄를 고백해봐야 그거는 반성밖에 안 되고요. 앞으로 죄를 고백하지 마시고 촐랑댐을 고백해야 돼요. 독자적인 것을 고백해야지, 자꾸 죄를 고백하게 되면 고백한 만큼 착해져버려요. ‘남은 죄 모르는데 나는 죄 고백했잖아.’ 이래 돼버리면 얼마나 착합니까? 그게 촐랑대고 까부는 거예요. 여전히 자기반성에 희망을 갖는 것. 우리가 대표자가 아니거든요. 대표자는 따로 있다는 것.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전부를 상대하지 않는다. 대표자만 상대한다. 근데 그 대표자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함께 있어서 홍해도 건너고 기적을 베풀었건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같은 그런 정치체계를 요구했고, 그러다보니까 거기서 뽑힌 왕은 어설프기 짝이 없죠. 좀 된다 싶었더니만 갑자기 권력을 쥐니까 ‘에헴’거리고 진짜 아까 말한 대로 촐랑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울이 겸손했어요. 그러나 왕이 되고 난 뒤에는 겸손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뽑힌 왕은 처음에 보기에는 남들보다 우수해보이고 믿음 있어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내는 거예요.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인간 손에 의해 뽑힌 왕은 역할이 있는데 인간이 숨겨놓은 죄의 바닥까지 대표로 보여주는 인물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두 종류의 왕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줬습니다. 첫 번째 왕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바로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왕으로 삼은 것은 바로 죄인 중에 최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유 때문에 저를 왕 되게 하셨습니다.” 라고 보여주는 왕이 다윗이죠.
물론 다윗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부하의 아내가 마음에 든다고 자기 아내로 삼았던, 인간의 간음하는, 욕망하는 본성을 또 보여줬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 모든 것이 죄가 아니라, 잘 들으세요. 밧세바를 범한 간음죄가 죄가 아니라 죄 그 자체에 관계없이 처음부터 죄 됨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죄 지었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처음부터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상황으로써 그런 일들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는 사람에게 새삼스럽게 죄 지은 적 없다. 나는 어떤 일을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윗은 진정한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왕, 죄인의 고수로서의 왕 다윗과 하나님과 연결고리로 들어갈 때는 상처 입은 사람이 들어가야 돼요. 희생물이 들어가야 해요. 그것이 바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희생당한,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갖추어져요. 그 시스템이 나중에 예수님이 수용되는 시스템이에요. “너희들은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지만 내가 너희 대신 상처 입은 사람으로서 너희 앞에 등장하면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 너는 나와 직접만나지 말고 나의 상처와 만나라.” “목자여! 목자 옆에 있는 상처는 웬 말입니까?” 스가랴 13장 6절에 나오는 예언된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허리에 난 상처가 웬 말입니까?”
주님의 인물보지마시고, 신장보지마시고, 체중보지마시고, 옆구리에, 손자국에 무슨 상처가 있는가 보세요. 그 상처가 스가랴 13장 6절에 예언하신 말씀이에요. 그 분을 가지고 이사야 53장에는 그 분이 왕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했어요. 왕이에요. 왕을 다른 말로 하면 기름 부은 자, 또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자, 또 한 번 정리합니다. 나는 뭘 믿느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거예요. 인간에게 뽑힌 왕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뽑힌 왕이 아닌 줄 어떻게 아느냐? 인간들로부터 도리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도리어 하늘에서 유일하게 보내주신 예수님이시고 다른 이름으로 하늘나라 갈 길은,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오는 말씀.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주지 않아요.
그렇게 되니까 좋든 나쁘든 간에 이미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로, 하나의 통로로 확정지어놨어요.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백성인지 아닌지, 그 일만 남아 있죠. 그러면 왕이 아닌 자는 어떠냐? 그것도 이스라엘 나라에서 보여줍니다. 그게 솔로몬이에요. 상당히 재미있는 일은 그 솔로몬이 누구 아들이냐? 다윗의 아들입니다. 누가 봐도 다윗의 아들이에요. 근데 다윗은 말합니다.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와 밧세바 사이에서 낳아 놓고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물론 그런 여디디아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식이지, 내 자식 아니라는 거죠.
자기 자식은 죽었으니까. 자기 자식은, 밧세바와 동침해서 처음 낳은 애는 다윗 자신의 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될, 아버지 우리아의 흔적으로써 대신 죽었어요.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살려달라고 그렇게 하더니만 죽고 난 뒤에는 입 싹 닦고 뭐 울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죄인인 걸 알기 때문에. 많이 뻔뻔스럽죠. 그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여 쓰시려면 쓰세요. 죄인을 쓰셔서 태어난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가정에서도 이거는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 자식이라 해서 이름 짓기를, 한나, 요셉, 뭐 외국 같으면 이스라엘, 그리고 다윗, 조다윗, 발음하기 좀 이상합니다만, 그런 기독교 이름들을 많이 짓죠. 내 자식이 아니고 주신 자식이라 해서 이삭이라 짓고.
그래서 솔로몬도 마찬가지인데, 솔로몬도 사실은 다윗처럼 똑같은 반복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반복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자식인데 하는 행세 보니까 지옥 갈 행세를 드러낼 때, 성도 맞습니다. 그걸 안다는 게 성도에요. 안다는 게. 솔로몬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왕의 조건을 딱 두 개 줬습니다. 그 왕의 조건은 솔로몬을 겨냥한 거예요.
첫째는 애굽에서 말(horse)을 많이 수입하지 말라. 만약에 말이 많이 모자라면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서 말을 많이 수입하려고 하는데, 하여튼 왕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던 백성을 절대로 애굽으로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왕은 어떤 왕이냐, 애굽과 관련된 어떤 것도 차단시키는 그런 식의 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로 애굽과 무역을 했기 때문에 말을 좋아하지 말라 했는데, 열왕기상 4장 26절에 보면 솔로몬의 병거와 말의 외양간만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고 했어요.
두 번째 조건은 뭐냐, 여자를 많이 두지 말라는 거예요. 솔로몬의 여자가 몇 명인지는 열왕기상 11장에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그러니까 왕비 빼놓고 천명이죠. 왕비까지 하면 1001명. 그렇게 왕비들이 있으니까 왕의 마음을 돌이켰다고 했어요.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여자 관리하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여자가 또 권력에 관여하겠죠.
여기 오늘 본문에 봅시다. 말을 많이 두지 말고, 또 하나는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을 미혹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아두지 말라. 이게 또 솔로몬에 해당이 돼요. 굉장히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어쩔 수 없고요.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왕은 남녀, 성을 초월해야 될 인물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자냐, 여자냐를 벗어나야 할 인물이어야 그것이 바로 왕다운 거예요. 남자, 여자. 왜냐하면 남자, 여자 자체가, 남성은 그 자체가 미흡하고 여성은 그 자체가 미흡해요.
남성은 여자의 자리가 비어있고, 여자는 남성의 자리가 비어있으니까. 그게 충족되지 못하거든요. 왕은 남자, 여자를 떠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율법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는 그 나라, 이렇게 지붕이 내려앉듯이, 천장이 내려앉은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어야지, 밑에 있는 것들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위에 올라가더라도 왕을 통해서 아, 세상 것들은 다 지나가는구나! 를 생각하고, 걸러내고, 오직 왕의 혜택, 왕이 우리 대신했던 하나님의 모는 말씀을 완성함으로 그저 구원되는구나!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고린도전서 7장 29절에 나와 있듯이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하늘나라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해요. 남녀의 관계는 이 지상에서만 한시적인 관계이지, 나중에 늙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점점 더 뭔가 귀신쯤 되게 되면 남자, 여자 관계없듯이, 남자여자를 밝히는 것은 언제냐 하면 20대, 30대, 그때, 남성과 여성의 호르몬이 구분될 때하고, 그것도 일시적 현상이고 한시적 현상이에요. 여자가 한 60대까지 결혼 안 하면 누가 여자로 안 봅니다. 그냥 초인으로 보죠.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으로.
그래서 뭐 부부지간에 바람피웠다고 막 해대는데, 그거 뭐 속상하지만 그냥 진득하게 지내면 바람피운 거나 안 피운 거나 이미 인간 안 되기는 마찬가지에요. 안 피웠다고 얼마나 갑질 하는지 몰라요. 다 피웠는데 혼자 안 피웠다는 거예요. 그만큼 능력 없다는 뜻이지 뭐. 자기 약점을 그렇게 까발리면 되겠어요? 솔로몬 보세요. 천명되잖아요. 솔로몬이 말씀과 바꾸지 않아야 될 것을 바꿨어요. 자기가 소유한 사람이 많으니까 그럴 뭘로 바꾸느냐 주의 율법의 뜻과 바꿔버렸어요.
이게 뭐냐, 가짜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다 가짜 왕이고, 오늘날 우리들은 전부 다 가짜 인간들이에요. 근데 솔로몬은 그걸 안다는 겁니다. 어디서?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이 전도서를 보는 사람이 솔로몬이 그걸 썼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 뭐냐, 니는 해봤잖아? 지는 다 해보고, 그게 전도서에 나와요. 나는 온갖 것을 다 해봤다는 거예요. 부한 자도 되보고 여자도 많이 가졌는데, 모든 것을 다 해봤는데, 다 헛되다 이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거기에 대고, 좋겠네~ 정말 좋겠네~ 하죠. 청년들아 이 세대에 말려들지 말라. 어차피 이 세상은 율법이 완성되는 천국의 모형으로만 존재할 뿐이에요. 이 땅이 그림자거든요. 아! 이래서 날씨가 덥고 이래서 지옥이구나! 이래서 살 곳이 못 되는구나! 그것을 하나님의 진짜배기 왕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씀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진짜 왕은 상처가 있어요. 아픔이 있습니다. 누가 그 상처를 내었는가? 이 세상을 고집한, 이 세상을 붙든 사람이 그 상처를 낸 거예요. 이건 강의할 때 여러 번 했습니다만, 이번 겨울수련회는 골로새서를 합니다. 골로새서 3장의 핵심은 그거에요. 너는 이 땅에서 죽었고 너의 생명은 지금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그걸 이번 대전에서 강의할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한 것이 뭐냐, “이미 죽었는데 명령과 지시는 왜 했느냐?”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이미 죽었다는 걸, 이미 죽은 놈한테 잔소리하지 말아야지 왜 그리 잔소리가 많이 나오느냐 말이죠. 죽었다는 것이 관계 때문에 죽은 것이지, 숨 안 쉬는 것이 죽은 게 아니에요. 주님이 죽으셨던 세상에 우리가 마지막 꼬리를 지금, 황혼의 그림자 거두어가듯이, 마지막 꼬리를 이렇게 철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금메달을 쥐고 사는 게, 바로 미래의 완료된 상을 쥐고, 금메달을 쥐고 한번 살아보자 이 말이죠. 이 땅을. 이미 구원받은 면류관을 쓰고 이 세상을 한번 살아보는 거예요. 그러면 남는 것은 철수하는 것 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부탁하는 것은 이왕 철수할 것, 전도서의 말씀 그대로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위시리스트(평생 이루고 싶은 꿈의 목록),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 같은 것이 있거든요. 다 정해놓고, 왜 그것이 헛된지, 왜 그것이 하나님 말씀보다, 복음보다, 십자가보다 못한 것인지, 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명령이 지금 통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뭐라고 하던 우리는 몸이 땡기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육적인 흐름 속에 있습니다. 그것과 왕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늘 비교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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